가을 숲은 마지막 기력을 다 쥐어 짜내듯 처절하게 피를 토한다. 풍성했던 가지는 앙상하게 메말라간다. 차가운 길가에 널부러진 잎들은 서서히 바스라지고 있다. 지난 봄에 속살처험 연하게 돋아난 잎이 집 떠나 길 잃은 청춘처럼 이리 저리 쏠리고 있다. 떠나는 가을의 뒷모습을 잡으려는 손짓은 하릴없다.   

 

저물어가는 가을 날에 영화 <봄 날은 간다>를 보았다. 헤어지자는 여자의 말에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하고 묻는 남자의 말은 이 영화의 유명한 대사이다. 이 작품을 만든 허진호 감독의 심중은 어떨까? 아마도 '사랑은 봄 날과 같다. 봄 날이 가는 것처럼 사랑도 가버린다. 그리고 다른 봄 날이 오는 것처럼 또 다른 사랑이 찾아 온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사랑은 왔다가 가고, 또 다른 사랑이 온다는 감독의 의도를 보여주는 세가지 코드를 찾았다. 첫째, 제목 <봄 날은 간다>! 사랑은 봄 날과 같다. 겨우내 가지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싹들이 새 봄을 맞으러 설레는 마음으로 머리를 내미는 것처럼 사랑도 그렇게 두근거리며 시작된다. 그러나 꽃이 피고 지고, 잎의 색깔이 짙어가면 설레임은 익숙함에 자리를 내어준다. 봄 날은 이렇게 지나가고 만다. 사랑도 그저 봄 날처럼 그렇게 지나가 버린다.    

 

두번째, 소리채집. 사랑은 기억속의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지는 소리와 같다. 함께 소리 채집 여행을 하면서 남자와 여자사이의 사랑이 싹튼다. 남자와 여자는 대나무 숲에 부는 바람 소리를 채집하고 있다. 대나무 숲과 바람의 만남은 처연한 소리의 아우성이다. 대나무 숲 사이로 빠져나가지 못한 바람은 대나무 숲 위를 불어댄다. 대나무는 끝에 걸린 바람을 놓치지 않으려한다. 그러나 바람은 머물지 않는 것을, 그냥 스쳐지나가야만 하는 운명인 것을. 바람을 놓친 대나무 숲은 바다 물결처럼 출렁거린다. 바람이 대나무 숲을 스치며 내는 소리가 대나무 숲에 가득하다. 남자와 여자는 대나무 숲에 말없이 앉아 흔들리는 대나무 끝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는 동안 대 숲의 바람소리는 음향기기에 담긴다. 

 

산사의 한 밤에 눈이 내린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여자. 남자는 여자를 깨우지 않으려고 혼자서 조용히 마루에 걸터앉아 한 밤중 산사의 눈 내리는 소리를 담고 있다.  여자도 가만히 마루에 앉는다. 그리고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인 양 흩날리는 눈을 바라본다. 눈은 먼 곳의 여인의 옷벗는 소리처럼 내리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 고요함 속에 잔잔한 설레임이 느껴진다. 시간의 흐름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는 소리를 담으려는 몸짓은 안타까운 아름다움이다. 봄 처럼 가버리는 사랑을 잡으려는 남자의 몸짓도 그렇다. 개울가의 물소리를 채집하던 남자는 여자가 흥얼거리며 소리를 듣고 음향기기에 담는다. 여자의 노래소리는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세번째, 이별이다. 여자는 이미 사랑을 믿지 않는다. 아픈 상처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여자는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또 다시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남자는 아직 사랑을 모른다. 사랑은 덧없이 지나간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봄 날이 가면 그도 아마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은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사랑은 지나가 버린다는 것을. 그리고 다시 또 다른 새로운 사랑이 찾아 온다는 것을.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이 흐려진다. 여자를 떠나 보내는 남자의 눈에는 물기에 젖어든다. 

 

헤어진 남자와 여자. 사랑은 지나가고 추억은 남는다. 여자는 종이에 베인 손가락을 머리위로 쳐들고 흔들다가 문득 그 남자를 추억한다. 남자는 바람부는 갈대밭에 혼자 서서 온 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갈잎의 소리를 듣고 있다. 감은 눈 망막은 아마도 추억을 더듬고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랑이 찾아 올 때까지는 이 추억으로 버텨야 한다.   

 

영화 곳곳에 허진호감독의 섬세함이 배여있다. 한 번 더 보고 싶다. 여자의 아름다운 모습을, 아니 무엇보다도 감독의 섬세한 감성을 더 많이 느끼고 싶다.

 

 

'기타등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이 오고 있다.  (0) 2016.02.22
대교약졸  (0) 2015.11.17
경주 보문단지  (0) 2015.10.23
숲속에 가만히 서서  (0) 2015.10.01
저녁  (0) 2015.08.25

F. 스콧 피츠제럴드/ 김욱동 옮김

 

읽지 말 걸 그랬나?

<위대한 개츠비>에 취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 단편선에 수록된 소설들은 모두 제2, 제3의 <위대한 개츠비>로 보인다.

문체는 여전히 차갑게 빛나고, 소설 속의 분위기에는 아름다운 슬픔이 배여있다.

그의 소설에는 여전히 데이지처럼 아름다운 소녀, 숙녀들이 등장하고, 

개츠비처럼 그녀를 사랑하고 동경하는 남자들이 나온다,

반짝 빛나던 사랑과 헤어짐, 시간이 흐른 후 해후. 시간은 모든 것을 색 바랜 추억으로 만드는 마술사이다.  

지나간 아름다웠던 젊은 한 때의 추억은 잃어버린 시간 속에 다시 갈 수 없는 슬픔으로 남는다.

"아무리 영원히 찾아 헤매더라도 잃어버린 4월의 시간은 절대로 되찾을 수 없다."

지나버린 청춘, 4월처럼 빛나던 그 시절은 돌이킬 수 없는 추억이다.

언제나 그대가 아름답게 남아있기를 바라지만, 시간을 바람처럼 갈대를 흔들고 어디론가 가 버린다.

 

이 단편선에는 아홉개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하나 하나 되짚어 되돌아 보면 제각각 다른 이야기임에도,

얼핏 생각할 때 다 비슷한 이야기로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내용이 뒤섞여 버린 그런 느낌이다.

그것은 모든 이야기들이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과 피츠제럴드 특유의 문체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아뭏든 수록된 작품은 다음과 같다  

다시 찾아온 바빌론/ 겨울 꿈/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 광란의 일요일/ 기나긴 외출/ 컷글라스 그릇/ 분별 있는 일/ 부잣집 아이/ 오월제

'다시 찾아온 바빌론'은 대공황으로 온 재산을 날린 주인공이 다시 회복해서 처형집에 맡겨둔 딸을 찾으러 온 남자 이야기

'겨울 꿈'은 골프장 캐디를 하며, 부잣집 딸을 사모하던 소년이 자수성가하여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는 이야기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시간'은 어릴 때 좋아하던 여자를 찾아가 엇갈린 사랑을 맛보는 이야기

'광란의 일요일'은 전도양양한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영화계의 인사들의 파티에 참석하여 벌어지는 이야기 

'기나긴 외출'은 정신병동에 있는 부인이 매일 남편을 기다리는 이야기.

'컷글라스 그릇'은 결혼 선물로 받은 컷글라스 그릇이 그 가정에 가져다준 파국에 대한 이야기,

'부잣집 아이'는 명문가에서 태어난 서민들과는 다른 종족으로 자란 남자 이야기,

'오월제'는 오월제의 축제가 한창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 절망에 빠진 남자의 파국,

 

'문학의 주제는 모두 동일하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했는가만이 다를 뿐이다.'라고 말한 김연수의 말이 떠 오른다.

모든 문학의 주제가 동일하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대동소이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듯 하다.

대부분의 문학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하지만 한 작품이 표현해 내는 사랑은 다른 작품에 표현된 사랑과는 다르다.

각각의 사랑법이 다른 것이다. 사실 사랑의 모양은 사랑하는 사람의 수 만큼이나 많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작품이란 독자들이 경험하지 못한 사랑의 모습을 그려내면서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닐런지? 

 

피츠제럴드의 사랑법은 투명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것은 전후 미국 재즈시대 상류계층의 정서를 반영하는 사랑일 것이다.

만일 그 사랑법은 우리네 사랑법은 아닐 것이라고 말하면 내가 사랑을 모르는 것일까?

 

 

 

'읽은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브레히트 선집1 희곡  (0) 2015.11.29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0) 2015.11.10
소설가의 일  (0) 2015.10.08
걷기 여행 1  (0) 2015.10.06
이방인  (0) 2015.09.2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