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 올라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완만하지만은 않은 오르막길은 갈비뼈를 앙상하게 드러내고 있다. 흙속에 덮여 있어야 할 나무뿌리가 얽기설기 얽혀 기괴하게 표면에 다 드러나 있다. 뿌리를 계단 삼아 힘들게 올라갔다. 문득 다산 선 이 뿌리 길을 라가면서 무슨 각을 을까? 

자신의 꼬인 인생 한탄했을까? 아니면 ' 이상 잃을 것은 없다. 다시 시작이다.'라고 생각했을까?


<뿌리길 - 출처: 전라남도 SNS 통합사이트>


다산초당을 방문했던 여행을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자리에서 다산선생이 체취제대로 감지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단지 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는 편액에서만 희미하게 다산의 흔적을 느꼈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추사 김정희의 흔적이었다.


다산의 흔적을 진하게 느끼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초의 기대가 어긋난 때문이었을까? 초가지붕이 아닌 기와지붕을 보 '다산초당이 아니라 다산와당이었어?'하는 생각? 다산선생의 영정을 보고 왠 안경? 고독하고 적막해야 할 유배지에 이런 북적임이란? 기대와는 다른 이질감 다산 선생의 흔적을 찾아 그의 삶을 되돌아보려는 마음을 흩트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산의 삶을 느끼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무지였다. 흘러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려면 뭔가 실마리가 있어야 했다. 다산 선생이 남긴 흔적은 그의 삶을 상상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다산 선생이 남긴 흔적을 놓치고 말았다. 적어도 다산 4경은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 다산 선생이 남긴 흔적들, 정석丁石, 약천藥泉, 다조茶竈,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말이다.  



18년간의 오랜 유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다산. 10년간 고운 정 미운 정 다 들었을 다산초당을 떠나려다 문득 돌아서서 망치와 정을 가지고 초당 뒤 바위 앞으로 다가간다. 그리 자신의 성을 바위에 새긴다. 다산초당의 제1경 '정석丁石'이다. 선생이 그 글을 새길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정석을 새기고 난 뒤에도 한참을 머뭇거리지 않았을까? 가다 멈춰서서 다시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나는 다산초당 방문을 되돌아보는 지금에야 선생의 심정을 헤아려 본다.


<정석>


다산초당의 제2경과 제3경은 약천藥泉과 다조茶竈이다. 초당 주위를 살펴보던 선생 초당 뒤에서 물기가 축축이 새어나오는 곳을 보게 된다. 혹시 하는 마음에 손가락으로 이곳을 헤집어 본다.  그랬더니 바위들이 드러나고 그 틈에서  맑은 물이 흘러나온다. 선생은 그 물을 마시기도 하고 그 물로 차를 끓이기도 했다. 이 물과 차는 유배생활로 초췌해진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이 샘을 '약천藥泉'이라 한다. 또한 초당 앞 뜰에는 널찍한 바위가 하나 있는데, 선생은 약천에서 물을 떠다가 이 바위 위에서 솔방울을 태워 차를 끓여 마시곤 했다. 이 바위가  다조茶竈이다   


<약천>


<다조>


선생을 이야기하자면 차를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선생에게는 '사암'이라는 호가 있다. 하지만 '다산'이라는 호가 더 널리 알려져 사용된다. 선생이 생활을 하던 초당은 강진 만덕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산에는 야생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다. 그래서 만덕산을 '차가 많이 나는 산'이라는 뜻의 '다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선생이 기거하던 초당도 그래서 다산초당이라 불렸고, 선생도 역시 '다산'이란 호를 얻게 되었다.  


선생과 6년간 절친한 벗이었던 백련사의 혜장선사도 차로 맺어진 인연이었다. 혜장이 보내준 차는 선생의 건강과 마음을 다스리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억울하게 유배되어 온 선생, 큰 형 약전은 흑산도, 자신은 이 곳 강진에 유배되고, 작은 형 약종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끝내 목숨을 다. 이렇게 가족이 풍비박산 나는 통에 그 마음에 맺힌 응어리는 얼마나 컸을까? 게다가 열악한 유배생활은 선생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이런 선생의 몸과 마음을 치료해 준 것이 바로 차였던 것이다.


또한 조선후기에 이르러 거의 절멸 상태에 있었던 차문화는 다산과 초의선사를 거쳐 추사에 의해 다시 부흥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산은 차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제 돌이켜 보니 다산초당의 선생의 흔적들은 실은 차향의 흔적이 었음을 깨닫는다. 다산 선생과 차는 뿌리길의 뿌리들처럼 깊이 얽혀 있  선생 산인지 다시 생각해본다.


다산초당의 제 4경은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다. 풀이하면 '연꽃이 핀 연못에 돌로 만든 산'이란 뜻이다. 다산초당 인근은 물이 많은 지역이다. 차나무도 습하고 일교차가 큰 지역에서 잘 자란다고 하는데, 바로 다산이 그러한 곳이었다. 다산초당 왼쪽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선생은 연못을 조금 더 크게 만들고 연못 중앙에 돌을 쌓아 작은 산을 조성하였다.


<연지석가산>


초당에서 연못 쪽으로는 '관어제觀魚齊'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작은 문이 있다. 선생은 글을 읽거나 쓰다가 피로해질 때면 이 문을 열고 연지석가산을 보기도 하고, 연못 속을 노니는 잉어도 쳐다보면서 잠깐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좁은 연못을 헤엄치고 있는 잉어를 보면서 자신도 그 잉어와 같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다산초당을 방문했다면 이렇듯 다산이 남긴 흔적들에 묻어나는 다산의 삶의 향기를 느꼈어야 하지 않을까? 시간의 흐름을 살아남은 실마리의 꼬리를 잡고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다산의 삶을 그려보는 시간여행을 했어야 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유홍준 님의 말처럼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역사적 장소를 답사할 때 기억해야 할 가장 기본임을 절실히 느낀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일정이었기에 아쉬움은 피할 수 없었던 일이었고, 다산초당의 방문을 계기로 뒤늦게라도 선생의 삶의 흔적을 좇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 아쉬움을 달래 본다.   


다산초 4경외에 남아 있는 선생의 흔적은 다산초당의 편액이다. 언제인가 이 글씨가 추사 김정희의 것임을 읽은 기억이 있었다. 추사의 글씨라는 선입견 때문일까 그 글씨는 특별해 보였다. 하지만 자꾸 들여다보니 정이 가는 글씨이다. 각 글자는 모두 다른 필체낌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어우러진 조화는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다산과 추사가 한 시대를 살았다는 우연과 다산과 추사의 인연이 만들어낸 다산의 흔적이 바로 '다산초당' 편액이 아닐까?


이 우연은 다산동암의 편액에서 또다시 조우한다. 다산동암의 편액은 다산선생의 글씨이다. 다산과 추사의 글씨는 이렇게 나란히 서로 만남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다산동암을 지나다산초당의 백미 백련사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뿌리 길과는 달리 이 길은 그다지 가파르지는 않다. 숲의 향기에 취해 40여분을 걸어 800여 미터를 가면 고갯마루를 넘어 백련사에 도착한다. 선생은 혜장을 만나러 이 길을 무던히도 걸었을 것이다. 혜장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함께 이야기하는 즐거움도 즐거움이려니와 계절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보이는 길도 선생의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동백꽃 가득한 봄날의 숲, 동백꽃 떨어지고 초록의 향연이 짙어지는 늦봄의  숲, 매미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어대는 한 여름의 숲, 모든 잎들이 꽃이 되는 가을의 숲, 낙엽이 융단처럼 깔린 늦가을의 숲, 눈 덮힌 겨울의 숲, 선생은 이 숲 사이로 난 백련사 가는 길을 사랑했을 것이다.  



어떤 밤에는 부드러운 달빛을 초롱 삼아 달그림자 밟으며 길을 걸었을 것이다. 때로는 혜장이 이 길을 거슬러 선생을 찾았을 것이다. 선생은 혹 밤늦게라도 자신을 찾아 올 혜장을 위해 평소에도 문걸이를 걸지 않았다. 다산보다 14살이 어린 혜장이 초당을 찾아, "선생님 계십니까?" 하고 부르며 들어섰을 때, 다산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혜장을 맞이 했을 것이며, 약천에서 물을 떠다가 다조에서 차를 끓이고, 찻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차향과 맛을 음미하며 대화를 즐겼을 것이다. 찾는 이 드문 외로운 유배지에서 선생의 마음에 위로가 된 것은 백련사 가는 길로 이어진 혜장과의 사귐이었을 것이다.  



나는 뒤늦게서야 다산초당에 남아 있는 선생의 흔적을 찾아 선생의 삶의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다. 아 무상한 세월이여, 선생은 가고 없고 그 흔적만 남아 있고, 난 그 향기를 좇아 나대로의 방식으로 선생의 삶으로 상상의 여행을 떠나고 있다.



김은미, 김영우의 <다산, 그에게로 가는 길>에서 발췌 정리 

 

■ 당파의 발생과 당쟁

임진왜란에 앞서서 왜란의 발발 위험이 있다고 본 당파는 서인이었고, 왜란의 발발 위험이 없다고 본 쪽은 동인이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동인은 전쟁을 극복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이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는데, 유성룡이나 이순신은 남인 계열이었다.

북인은 의병활동을 통해 나라의 위기 해결에 기여한다.

선조의 아들 광해군이 전쟁을 마무리하면서 나라를 안정시키는데, 광해군은 후에 북인의 지지를 받아 집권하게 된다.   

광해군 때는 북인의 일당 독재 체제였다. 북인이 추앙하는 사람은 진주를 기반으로 하던 남명 조식선생이다. 남명은 퇴계와 쌍벽을 이루고 있던 야인 유학자이었다.

북인 정인홍은 당시 거유인 퇴계를 비판하고 나서면서 조식을 문묘에 올리자고 주장하나 이 요청은 수락되지 않고, 이후 정인홍의 권력도 위축된다.

이후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한 인조반정이 성공함으로 북인은 몰락하고 만다.

연립정권을 구성한 서인과 남인은 자주 충돌하게 되는데, 북벌론이나 예송 논쟁이 그것이다.

당시 서인의 영수는 우암 송시열이었는데, 서인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송시열의 제자 윤중을 중심으로한 소론으로 분열된다.

남인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고, 노론은 신권을 더 중시하는 입장에 있었는데,

이로 인한 입장 차이가 예송논쟁의 격화에 원인이 된다. 왕의 예법을 신하의 예법과 동일하게 볼거냐, 아니면 왕은 특별한 존재이니까 신하의 예법과는 다르게

볼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별 역할을 못한 서인은 율곡의 십만양병설이나 오랑캐 나라 청나라를 정벌해야 한다는 북벌론으로 자존감을 높이려 한다.

북벌론의 결과 서인은 청나라의 발달한 문물을 수용하지 못하게 된다.  

 

■ 성리학의 이기론이란?

조선시대를 지배하던 유교 사상은 성리학이다. 송나라의 주자로 부터 시작된 성리학은 조선의 이퇴계에 이르러 그 꽃을 피우게 된다. 이퇴계는 '해동주자'란 별칭으로 불릴 만큼 주자를 따랐던 조선 최고의 유학자이다. 성리학의 이기론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과 기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하는 이론이다. 눈에 보이고 형체로 드러나며 운동하는 것을 '기'라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 새가 알을 낳는 것, 나무에 꽃이 피는 것, 이런 것이 모두 기의 작용이다. 그러나 새가 알을 낳기는 하지만 타조가 참새 알을 낳을 수 없는 것이고, 배나무에 꽃이 피지만 배나무에 사과 꽃이 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듯 타조는 꼭 타조 알을 낳고, 배나무에는 배꽃이 피도록 만들어 주는 어떤 원리나 법칙, 어떤 현상의 근거가 되는 것을 일컬어 '리'라고 한다. 

 

■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이기론

여기서 기를 더 강조한 것이 기발설, 이를 강조하는 것이 이발설이다. 퇴계 이황은 사단과 칠정이 모두 감정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사단은 완전히 선한 감정이기 때문에 '리'에 속하고, 칠정은 선악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 감정이기 때문에 '기'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사단을 '리'가 발현한 것이며,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 사단은 <맹자>에 나오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을 가리킨다. 칠정은 '희노애구애오욕'으로 '기쁨, 노여움, 슬픔, 두려움, 사랑, 미움, 욕망'을 말한다.  

 

퇴계보다 36년 늦게 태어난 율곡 이이는 퇴계의 이론에 반론을 제시한다. '리'는 원리이니까 이건 '기'처럼 운동하는 것이 아니며, 운동을 하지 않으니 발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기'는 운동을 하지만, '리'는 운동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운동할 수 없는 '리'가 발현한다는 퇴계의 설명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퇴계가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로 구분하는 데 치중했다면, 율곡은 기는 운동하지만 리는 운동할 수 없다는 것을 가지고 퇴계의 이발설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퇴계로서는 리와 기를 마음의 본성의 문제에 국한시켜 말한 반면, 율곡은 리와 기에 대한 규정을 들어 퇴계설을 바판한 것이다. 퇴계가 주로 인간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 이와 기를 이해하고 있다면 율곡은 리와 기를 존재의 문제로 이해하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퇴계의 '이기이원론'과 율곡의 '이기일원론'이 나오게 된다.

 

■ 정약용의 유교 사상

정약용은 실학자이기에 앞서 유학자였다. 그는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의 영향을 받아 리와 기를 달리 해석하였다. 율곡은 운동을 하느냐 안하느냐를 가지고 리와 기를 설명했다면, <천주실의>에서는 자랍성을 가지고 판단했다. 기는 자립적인 존재이고, 리는 그 자립적인 존재의 속성으로 보았다. 성리학에서는 최고의 존재 원리였던 리가 기의 속성으로 전락한 것이다. 리가 기의 속성이라면 운동의 주체는 기가 된다. 그러므로 기발은 성립하지만 리발은 성립할 수가 없다. 움직이는 것은 주체일 뿐, 속성은 그 주체를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약용은 율곡의 기발설에 더 가깝다고 보여진다. 

 

정약용의 철학을 말하라고 한다면 아마 성기호설쯤 될 것이다. 성리학은 본성이 리라고 본다. 성기호설은 본성을 리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기호라고 보는 것이다. 인간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성기호설에 따르면 본성이 성향을 따라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겠다는 마음의 굳센 의지, 구체적 실천, 이런 것이 종요하다. 성리학은 천(하늘)도 '리'라고 한다. 정약용은 천(하늘)은 '리'가 아닌 절대적 인격자인 상제(하느님)로 보았다.

 

정약용은 현실과 동떨어진 채 내면의 인격만을 도야하는 것은 유학자의 수양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수기(자신을 닦는 것)이 반이고 목민(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반이라고 주장했다. 성리학의 내면의 수양으로는 수기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백성을 사랑하는 목자된 자의 윤리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정약용의 주장이었다.

 

성리학을 비판하던 다른 실학자들과 정약용의 실학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정약용은 이전 것을 부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과 세계를 설명하던 고전적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윤리적 수양론을 만들어 냈다는 데 특징이 있다. 박지원이나 박제가와 같은 북학파 실학자들은 청나라의 문물을 수용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새로운 것으로 기존의 것을 대체하려 했다. 그들에게는 과거와의 연결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약용은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 전통을 재검토하고 그 바탕위에서 새로운 비전을 열려고 했다. 이런 점에는 정약용은 동양 지성사나 한국 사상사와 같은 맥락에서 중요한 인물인 것이다.

 

정약용이 여러 실학자 중 한 사람이라는 말은 어떤 점에서는 맞지만 경학 연구를 놓고 볼 때, 학문적 전통을 종합적으로 재검토하고 거기서 출발한 것으로 보면 정약용은 분명히 실학의 중심인물이고 실학을 집대성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 정약용의 실학사상

박지원은 정약용보다 서른 살 정도가 많으며, 박지원은 노론의 자제로 당색도 달랐고 서로간의 교유가 없었다. 박제가도 정약용보다 10년정도 빠른데, 화성이 벽돌로 만들어 진 것은 박제가의 공로가 크다고 한다. 박제가의 <북학의>에 보면 벽돌의 사용을 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학자는 경세치용학파와 이용후생학파등 두 파로 나누어진다. 경제치용학파는 농업중심의 개혁론을 주장했으며, 이용후생학파는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했다. 정약용은 경세치용학파로 반계수록의 유형원, 성호 이익의 뒤를 잇는 실학자이었다. 한편 이용후생학파에는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이덕무등이 있으며 이들은 북학파로 알려져 있다.  

 

 

■ 정약용의 삼근

황상이라는 정약용의 제자가 배움을 중단하려 하면서 스승 정약용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가지 병통을 언급하였다. 

1. 머리가 둔하고

2. 앞뒤가 꽉 막혔고,

3. 분별력이 없다.

 

정약용은 황상에게 배우는 사람에게 있는 세가지 병통을 이야기해 준다.

1. 기억력이 좋은 병통은 공부를 소홀히 하게 하고

2. 글짓는 재주가 좋은 사람은 가벼이 들떠 허황한 대로 흐르게 하고

3. 이해력이 빠른 병통은 깊이 공부하지 않아 거칠게 된다. 

 

그런데 황상에게는 이와 같은 세가지 병통이 하나도 없음을 지적하면서 "머리가 둔하지만 공부를 파고드는 사람은 식견이 넓어지고, 앞뒤가 막히나 그것을 뚫는 사람은 흐름이 거세어지며, 분별력이 없으나 꾸준히 연마하는 사람은 빛이 난다. 이 세가지는 모두 부지런해야 가능하다. 부지런히 한다는 것은 마음을 확고히 하는데 있다. 이렇게 즉 네가 부지런히만 공부한다면 네가 생각한 병통들이 오히려 너의 장점이 될 것이다." 라고 조언한다. 황상은 이 말을 깊이 간직한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 그러려면 마음을 확고히 하라." 마음을 확고히 하라는 듯의 '병심확'과 부지런히 하라는 '삼근'이 여기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 정약용 연구 정약용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1930년대 조선학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운동의 일환으로 정약용 서거 100주년에 맞추어 정인보, 안재홍, 최익한의 주도로 정약용의 저술을 모아 <여유당전서>를 발간한다. 정약용은 이 세사람에 의해 조선 실학의 집대성자로 평가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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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 그에게로 가는 길> / 김은미 김영우 지음 / 동녘

 

정약용을 알고 싶어 한승원의 소설 <다산>을 읽었다. 하지만 정작 다산이라는 인물과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는 미진했었다. 이번에 읽게 된 <다산 - 그에게로 가는 길>은 정약용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인간 정약용의 모습을 가감없이 바라 볼 수 있도록 지나치게 미화하지 않고 그의 약점이랄 수 있는 것까지 보여주고 있다. 구성 자체는 사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되어 있어 청소년을 위한 책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꽤 많은 양의 정보를 담고 있어 다산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될 만한 책이라 생각되었다  

 

정약용의 고향 마재, 그 건축에 정약용이 일익을 담당했던 수원화성, 정약용이 결혼한 살았던 서울, 18년간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등, 네군데의 정약용의 주요 거점을 답사하며 정약용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형태로 쓰여진 이 책은 읽기가 수월한 편이다. 

 

1. 어디에서나 한강이 보인다. - 정약용의 고향 마재

다산, 사암, 열수...정약용을 부르는 다른 이름들이다. 정약용 선생은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 중 근 10여년간을 야생차가 많이 나는 만덕산의 기슭에 있는 다산초당에서 보냈다. 다산이란 '차가 많이 나는 산'이란 뜻이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이라 부른다. 한편 정약용의 일생을 다룬 <사암연보>라는 책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에 사암 정약용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정약용 선생은 고향 마재의 한강을 그리워했으며, 이 한강의 옛이름이 '열수'라고 고증하여 주장하면서 열수에 대한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서 '열수'선생이라 부르기도 한다. 선생의 어릴 때 이름은 '귀농'이었다. 정약용의 아버저 정재원은 당파 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귀농하여 마재에 살면서 정약용을 낳았기에 그렇게 불렀다 한다. 또한 어릴 때 마마(천연두)를 앓아 눈썹 위에 상처가 생기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한 쪽 눈섭이 두개로 보였다. 그래서 눈썹이 세개처럼 보여 '삼미자'라는 별명도 있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 대부분 한강을 끼고 있는 지역에 포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아마도 물길을 따라 서울로의 접근성이 좋아 신 문물에 일찍 접할 수 있었다는 점과 서로 왕래하기에 편리했다는 점이 그 이유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실학의 집대성이라 불리기도 하는 정약용의 고향 마재 역시 한강을 끼고 있는 지역이다. 정약용은 18세(1784년)에 큰 형수의 동생인 광암 이벽을 통해 서학(천주교)를 처음 접했다. 이 서학은 정약용의 운명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남인 정약용은 노론으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게 되는데, 그 빌미가 된 것이 바로 서학이다. 서학은 유교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게된다. 천주교 탄압사건인 신유사옥때 정약용의 형 세째형 정약종은 사형당하고,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가고,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고향 마재에 살게된 정약용은 자신의 집을 '여유당'이라고 불렀다. '여유'란 <노자>에 나오는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 같은 조심스러움'을 뜻하는 말이다. 당시 노론이 득세하고 있던 시대적 상황에서 남인 정약용이 삶을 부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심초사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2. 생각한 대로, 그대 생가한 대로 - 경기도 수원 화성

정조는 왕이 된 후에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겼고, 이로 인해 화성에 신도시가 건설되게 된다. 정조가 사도 세자의 묘에 참배하러 올 때 임시 거처로 머물 수 있도록 화성 행궁을 짓는데 있어, 정조는 3년 상중에 있던 정약용에게 화성의 설계를 맡겼고 정약용은 설계는 물론 거중기를 만들어 화성의 건축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수원 화성에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설치된 군영인 장용영이 있었다. 장용영은 임금을 호위하던 친위병이었는데, 장용내영은 한양에, 장용외영은 수원 유수부에서 임금을 호위했다.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는 곳이 '장대'였는데, 서쪽에 있는 장대는 서장대, 동쪽에 있는 장대는 동장대라고 부른다.   

 

정약용은 삼년 상이 끝난 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을 때, 서용보의 과실을 밝혀냄으로 이 때부터 평생 서용보와의 악연이 시작된다. 1801년 신유사옥때 서용보의 반대로 석방이 무산되는가 하면, 1803년 정약용을 해배하라는 명에 서용보가 반대하여 무산되었고, 1819년(58세) 정약용을 중용하려는 논의에서 서용보 반대하는 등, 이렇듯 결정적인 순간마다 서용보와의 악연이 질기게 정약용을 따라 다니게 된다.

 

정약용이 속해 있던 남인은 천주교에 우호적인 신서파와 천주교를 반대하는 공서파로 나누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정치적 입지가 약한 남인에게 서학(천주교)는 아킬레스의 건이었다. 일찌기 서학에 접한 남인들 사이에 서학이 번져 나가고, 서학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커지자, 남인 사이에서도 서학을 경계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공서파의 서학을 싫어하는 경향은 당시 입지가 좁았던 남인의 세력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런지도 모른다. 정약용은 신서파에 속해 있었는데, 주문모 사건으로 공서파의 공격의 타켓이 된 정약용을 보호하기 방편으로 정조는 정약용을 외지인 금정찰방으로 보낸다. 중앙 정치에게 격리시켜 공격의 예봉을 피하게 하려는 수단이었다. 이 때 정약용은 정조에게 <변방사동부승지소>라는 글을 올려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한편 천주교와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정조에게 고한다. '자명소'라고도 불리는 이 글에 정약용은 자신이 천주교 책을 읽은 적은 있으나 천주교 신자는 아니라고 밝힌다.

 

이후 정약용은 황해도 곡산 부사로 1년 11개월 부임하게 된다. 이 때의 목민관의 경험이 <목민심서>를 집필하는 데 기초가 된다. 곡산 부사로 부임할 당시 주세 거부 시위를 주동했던 이계심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하였고, 호구 조사후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표로 정리한 종횡표도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지석영 선생의 종두법이 나오기 전에 이미 홍역의 치료 방법을 소개한 <마과회통>도 쓴 것도 이 즈음의 일이었다.

 

곡사 부사 이후 서울로 돌아온 정약용은 형조 참의로 두달간 일했는데 그 때의 경험은 <흠흠신서>을 집필하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후일 정약용은 자신이 접하고 조사한 사건을 바탕으로 <흠흠신서>를 쓰게 된다. '흠흠'이란 걱정이 되어 잊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재판을 할 때 아주 신중하게 생각하고 조사하여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3 설혹 너무 태양 가까이 날아

정약용의 가족 역사는 천주교 초기의 역사와 맞물려 있다. 정약용의 세째 형 정약종의 가족은 온 가족이 모두 몰살당한다. 정약종은 물론이요, 그의 아들 철상, 하상, 며느리, 딸까지 온 집안이 모두 순교를 당하게 된다. 당시 천주교와 관련이 있던 많은 사람들이 정약용과 인척 관계에 있었다. 처음 천주교를 책을 통해 배워 받아들인 이벽은 큰 형의 처남으로 사돈관계에 있었다. 이벽은 이승훈을 북경으로 보내 최초로 영세를 받게 하는데,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다. 그리고 천주교 백서사건의 주요인물인 황사영은 조카 사위, 모친상을 당하여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해서 죽임을 당한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사촌, 윤지충의 외사촌인 권상연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순교를 당하였다. 

 

천주교 박해의 이면을 들여다 보면, 이는 딩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이 천주교를 빌미삼아 남인들을 공격한 것임을 알게 된다. 특히 남인이었던 정약용을 공격하기 위한 방편으로 천주교 탄압이 이루어졌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약용 은 자신이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고 해명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먼 유배길을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정약용을 총애하던 정조가 죽은 이후 그를 막아줄 방패막이가 없었던 것이다.  

 

 

4 언제나 마음은 - 강진 유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되어 갔을 때, 처음에는 거처를 구하기조차 힘이 들었다. 마침 주막집 노파가 방 한 칸을 내 주어 4년을 보내게 되는 데 이 방을 '사의재'라고 한다. '사의'란 생각과 용모와 언어와 행동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이후에 고성암이라는 절의 한 쪽 방인 보은 산방에서 2년을 거처했다가 제자인 이학래의 집으로 가게 되고, 유배당한 지 8년만에 다산 초당으로 자리를 옮긴다. 귤동마을에 살던 귤림처사 윤단과 그의 아들 귤원처사 윤규가 정약용을 다산 초당으로 초대하였다. 다산 초당은 윤단의 아버지 윤취서가 지었으며, 다산 초당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였다.

 

강진은 정약용의 어머니 해남 윤씨의 고택이 가까운 곳이었다.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가 유명한 화가 윤두서이고, 윤두서의 증손자가 정약용이다. 어쨌든 이 고택에는 엄청난 책이 있었고 정약용은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학문에 열중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되어 있을 당시 수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강진에 있을 때 정약용이 친하게 지내던 아암 혜장이라는 승려가 있었으며, 혜장의 제자 초의 선사는 정약용과 친분이 깊었을 뿐 아니라, 추사 김정희, 정약용의 아들 정학유와는 동갑으로 친구 사이였다. 강진에서 정약용을 수발하던 홍씨라는 여인이 있었으며, 정약용과의 사이에 홍임이라는 딸이 있었다고 한다. 정약용이 18년동안의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마재에 살고 있을 때, 홍씨와 홍임이 정약용을 찾아 왔으나,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다시 강진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정약용이 18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마재로 돌아온 때가 57세인 1818년, 그리고 그가 1836년 75세로 사망할 때까지 노소론계의 여러 학자들과 교우관계를 유지하며 학문에 매진하며 저술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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