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성의 칼날 - 과학 사상의 역사에 관한 에세이 / 찰스 길리스피 지음/ 이필렬 옮김/ 새물결

 

<객관성의 칼날>은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100권중에 과학분야의 한 권이다. 전세계적으로 꼭 읽어봐야 할 고전으로 꼽히지만 일고 이해하기 어려운 책 중의 하나이다. 특히 과학에 대한 소양이 다소 부족하다면 읽는데 더욱 어려움이 있겠지만, 얻는 성과는 작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갈릴레오로부터 시작한 근대과학의 대부분의 분야를 망라한다. 동역학, 고전역학, 광학, 화학, 생물학, 에너지학, 전자기장등 과학 내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과학과 철학, 예술과의 연관성등에 대한 논의등도 담고 있다. 여러 과학분야의 수많은 천재과학자들의 연구결과와 그 구체적인 연구과정까지도 어느정도 보여주며, 그들의 인간적인 면등이 흥미롭게 소개되어 있다. 

 

그의 제목 <객관성>에 비추어 볼 때, 천재과학자들의 직관, 감각, 판단력, 개성등의 주관적 요소들이 과학 혁명에 미친 역할은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 과학발전과 혁명은 그와 같은 개인적 요소에 빚진 바가 있지만, 정작 그 결과물에는 주관적 요소들이 완전히 배제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선명한 대조를 통해 과학의 객관성을 두드러지게 하려는 의도였을까?

 

어쨌든 그의 서문은 이 책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1990년판 서문>

 

과학발전의 기초가 된 행동양식은 무엇인가?

'지식은 활동을 통해 그것의 목적을 찾아낸다. 그리고 활동은 지식 속에서 그 근거를 찾아낸다. 또한 어떤 문제가 풀릴 수 있다면 그것은 풀려야 하며 어떤 일이 실행될 수 있다면 그것은 실행되어야 한다는 본능. 이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를 만들어낸 행동양식이다. 르네상스 분화는 고대적이거나 스콜라적인 학식과 기법과는 확연한 차별화를 보이면서 현대과학과 공학의 모태가 된다.  

 

과학사에서 <객관성의 칼날>의 의의

<객관성의 칼날>은 최초의 역사 서술 형태의 과학사이다. 이를 시초로 하여 전문적인 과학사 분야가 새롭게 소개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이 분야가 발달하고 있다. 이후 과학사는 과학의 사상과 개념을 다루는 내적 과학사에서 외적 과학사로 발전해 나간다. 외적 과학사는 과학 그 자신의 제도속에서, 그리고 사회와의 연관 속에서 과학을 다룬다. 과학의 사회사, 과학의 정치사등은 외적 과학사가 어떻게 그 영역을 확장해 왔는지 보여준다. 과학은 얼마간 정치적 사회적 산물로서의 모습을 띤다. 하지만 과학 지식의 골간이 정치나 사회 구조로 인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과학의 본성에 대한 부차적인 측면일 뿐이다.

 

찰스 길리스피가 의도한 '객관성'이란 무엇인가?

과학은 어떤 사회적 환경 속에 존재하는 개개인들과 집단들에 의해 산출되지만, 역사적 과정 속에서 결국 개인의 인성과 사회적 환경을 초월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과학은 몰개인적이며 보편적인 것이다. 과학이란 객관적이며 개인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지식체계이지만 그들 자신에 관해서가 아니라 세계에 관하여 만들어지는 지식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 아는 데에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 과학은 그 방식은 아니다.

 

과학은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해 왔으며, 그 대가는 과학의 정식화된 내용과 서술들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목표, 목적, 적합성, 희망 등에 대한 고려를 제거하는 것이다. 과학의 중심적인 문화적 경향은 '자연의 외화'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과학은 감성의 차원에서 '소외'라는 결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과학은 양날의 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비록 지식이 위험할지라도 무지는 더욱 위험한 것이다. 과학의 후퇴나 퇴보를 통해 과학에 수반된 악을 감소시키려고 하는 것 보다는 과학을 보다 더 잘 이끌어 나감으로 이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서문(제임스 클럭 맥스웰의 강연-1871년 10월)

과학연구와 인간연구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마음의 움직임이 진리인가 오류인가를 논하는 지적인 활동 무대"가 있는가 하면 "분노와 정념, 악의와 선망, 격정과 광기 같은 격렬한 감정상태"의 인간성을 연구하는 무대가 있다. 과학연구자는 후자의 연구에 적합하지 않다.

 

"우리는 즐겁게 뛰어난 사람들에게 되돌아가서, 그들과 함께 이론적인 것이든 실제적인 것이든 고귀한 목적을 열망함으로써, 폭풍의 영역을 넘어서 청명한 대기로 올라갑니다. 그 곳에는 견해에 대한 그릇된 설명도, 표현의 애매함도 없으며, 오직 진리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지점에서 마음과 마음이 서로 접촉할 뿐입니다."

 

맥스웰의 강연은 과학연구자의 홛동무대를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성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청명한 대기와 같은 객관적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영역이다. 그리고 진리에 가장 가까운 영역이다. 그의 강연은 과학도들과 연구자들에게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며 과학에 대한 그 자신의 자부심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찰스 길리피스의 과학에 대한 확신과 그가 말하고자 하는 과학의 객관성에 그 맥이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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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회된 과학이 더 이상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고 전 인류의 재산이며 책임이므로 양날의 칼날을 지닌 과학을 올바르게 소유하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과학자와 과학세계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찰스 길리피스의 생각일까? 과학의 공은 자신들에게로 돌리고 그 과에 대해서는 모두가 책임지자고 하는 말이라면 이는 분명 독선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독선적인 것이든 아니든,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그의 저변에 깔려있든 그렇지 않든간에, 야누스적인 얼굴을 지닌 과학은 분명히 인류를 위해 길들여야 하는 대상임에는 틀림없다.

 

과학세계도 책임감을 가지고 이러한 문제에 직면해 나가야 할 것이다. 생명과 윤리등이 과학과 그토록 밀접한 관련을 가진 때는 이전에 없었던 듯 하다. 객관성만을 부르짖으면서 무한한 방향으로의 과학발전을 도모할 것이 아니라, 적절한 방향성을 인지하고 통제함으로, 최소한 인류의 멸망이라는 대파국으로 향하는 길에 과학이 촉매제가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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