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길리스피

 

제3장 새로운 철학

 

르네 데카르트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17세기 과학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과학은 공허한 철학으로 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베이컨과 의견을 같이하나, 과학의 방법론에 있어 베이컨은 유용성에 기대고 있고, 데카르트는 명석함에 의거하여 과학의 재건을 꾀한다. 다시 말해 베이컨은 실험과 귀납을 신뢰한 경험주의라면, 데카르트는 이성과 연역을 신뢰한 합리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관성의 이해에 있어 데카르트는 갈릴레오를 초월한다. 갈릴레오는 영속적인 원운동이야 말로 완전한 것이라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원에서 벗어나 무한으로 그 운동의 방향을 돌렸다. 즉 완전한 관성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1) 어떤 물체도 가능한 한 동일 상태를 유지하려 하며, 그 상태는 다른 물체와의 충돌에 의해서만 바뀐다. 2) 어떤 물체도 그 운동을 곡선이 아니라 직선으로 계속하려고 한다. 이러한 직선관성의 원리는 무한의 우주상을 끌어들인다. 코이레는 우주의 무한성이야말로 다른 어떤 과학의 발전보다도 깊게 철학의 방위를 바꾼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뉴턴은 관성의 원리에서 운동의 법칙을 만들어 낸다.

 

이 관성의 개념은 고도로 추상적인 것이다. 그래서 물리적 현상보다는 자기의 사고를 더 크게 확신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것을 정식화할 수 있다. 그런면에서 데카르트는 적절한 사람이었다. 데카르트에게는 오직 명석함, 어떤 결과가 나와도 무관심한 일종의 놀랄 만한 일관성만이 있었을 뿐이다. "눈뜨고 있든지 잠들어 있든지, 우리는 이성의 명증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이성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지, 상상력이나 감각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관성의 발견은 실제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 즉 무한까지의 불변의 운동이라는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한 후에 얻게 된 것이다.

 

데카르트가 물리학에 끼친 유산은, 수학적 무기인 해석기하학, 합리적 광학의 출발점이 되었던 굴절 법칙이 있으며, 물리학을 유클리드적 공간 개념 속에 자리잡게 한 것도 포함된다. 또한 유기체적 목적성을 기계의 비인격성으로 대체하여 전 자연을 포괄하는 질서의 모델로 삼은 것도 그렇다. 하지만 그는 명석함과 단순함이라는 미덕으로 아이러니하게도 형이상학으로 아주 잘못된 물리학을 만들어 내기까지 하였다.

 

방법서설에 나타난 그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은 말에 나타나 있다. "철학은 모든 사물에 대하여 그럴 듯하게 이야기하며, 학식이 자기만 못한 사람들의 찬탄을 사게 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그리고 수학에 대한 그의 찬탄은 "나는 수학을 특히 좋아했는데, 이것은 그 추리의 확실함과 명증성때문이었다."라는 말에 잘 드러나 있다.  

 

데카르트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기 쉬운 대상"에서부터 학문의 개조에 착수했는데, 그는 직선보다 더 단순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존재들 사이의 관계나 비례등을 두개의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평면에 놓고 연구하는 직각좌표의 개념을 생각해냈다. 이렇게 그는 데카르트 기하학의 창시자가 된다. 이것은 좌표와 대수학을 결합시킨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그래프와 방정식, 함수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 이전의 대수학은 불연속적인 양의 수학이었고, 기하학은 공간적 연속의 수학이었다. 자연의 구성성분을 수량화하려는 경향의 대수학과 자연의 통일을 꾀하는 기하학 사이의 괴리는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데카르트가 이 간격을 없애버렸지만 그 가능성을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뉴턴은 이 두가지 수학상을 종합하였다. 추상적이고 연속적인 공간 개념과 구체적이고 원자론적인 물질개념을 통합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세계가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즉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비어있는 공간 개념이 아니라 물질로 가득차 있는 공간 개념을 가지게 된다. 공간은 곧 물질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그는 세계는 하나의 기계이다라는 사상까지 오게된다. 데카르트가 세계에 대한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은 무엇때문일까? 데카르트는 자연이 아니라 이성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사상은 지나치게 수학적이다. 수학은 도구이며 양을 표현하는 수단이고, 과학의 언어이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이 언어와 주제를 혼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단일한 일반화를 가지고 행위와 원인을 일거에 설명하려 한다. 모든 것을 그리고 그 원인과 함께 단일한 일반화로 설명하기 위해 그는 기계론에 의지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느  하나의 명석하고 단순한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르네상스 과학은 주로 문화와 철학에서 유래하였다. 하지만 17세기 이후에는 문화와 철학은 주로 과학에서 유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역전의 교차점에 데카르트가 서 있다. 그로부터 자연에 관한 지식은 철학에서 과학으로 옮아갔다. 과학은 법칙의 균일성만을 가정할 뿐 진리의 통일, 우주 인격 같은 것은 상정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으로부터 직접 과학에 총괄적인 공헌을 한 최후의 위대한 체계적 철학자였다.

 

우주란 기하학적 물리학에서 묘사된 단일한 연속체인가? 그렇지 않으면 불연속체-맥스웰의 정의에 따르면 "두 개로 나눠질 수 없는"물체인 원자-의 덩어리인가? 버트란트 러셀이 말한 것처럼 세계는 당밀이 든 양동이인가, 모래가 든 통인가?

 

아인쉬타인이나 데카르트와 같이 수학적인 인물이라면, 자연의 통일성을 가하학의 언어로 나타낼 것이다. 공간-물질은 연장에서나 분할에서나 모두 무한하다. 그러나 물리적 직관을 가진 탐구자라면, 측정의 명확한 조건, 즉 사실은 그렇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그곳으로 과학이 내려와야할 계량 가능한 것을 찾을 것이다. 따라서 과학의 경험 전체는 기묘한 패러독스를 확증한다. 연장에 있어서는 무한을 요청하면서도, 분활에 있어서는 무한을 배제한다는 것이 물리학이 거듭헤서 보였던 뛰어난 지혜였다. 사물의 논리에는 이에 대한 근거가 아무 것도 없다.

 

원자론

고대 원자론 학파에서는 레우키포스,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가 있다. 이 고대 원자론자드릉ㄴ 무한한 연장을 가진 진공 속에다 입자를 넣었고, 그럼으로써 물질이 보존되는 우주에서 운동이 가능하도록 했다. 루크레티우스는 "자연은 물체와 진공으로 구성되어 있다"과 말한다. 변화와 진행은 객관적 존재를 갖는 특정 크기와 형태를 지닌 입자의 물리적 재배열 그것이다.

 

이러한 원자론을 철학에 받아들인 것이 에피쿠로스학파이다. 원자론은 목적론을 배제하는 객관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결코 도덕적 권위의 환영을 받을 수 없었다. 에피쿠로스의 신들은 세계를 창조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루크레티우스는 "자연은 자유다. 그리고 거만한 사람들의 통치도 받지않고 신들의 도움없이 우주를 운행시킨다"라고 말한다. 그리스 과학의 다양한 유파중에서 원자론자들만이 인간의 사고와 목적으로 부터 법칙을 분리했다. 그들의 자연관은 신학과는 완전히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주의는 훈련된 안정된 취미이고 세상을 마음 내키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관의 창을 통하여 실제 있는 그대로 살펴보는 용기에 찬 체념이다. 감각을 통해서 에피쿠로스적 진리에 접촉한다. 자연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원자들의 배열로, 원자들의 우연한 집합이다. 우리가 감지하고 판단하는 물질의 제 2성질- 색, 냄새, 맛, 형, 감촉-은 우리속에 있는 지각의 양식에 불과하다. 이러한 지각은 원자연의 모습, 자연의 영광과 미를 인식하지 못한다. 인식의 범주들은 자연 속에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혼과 지성도 단순한 미립자의 배열에 불과하다.

 

17세기에 들어 피에르 가상디(1592~1655)에 의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이 과학사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17세기 두뇌만이 아니라 손으로도 과학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원자론이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원자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증명할 길은 없었으나, 원자가 놓여있다고 가정되는 진공의 존재는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실험물리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자연은 진공을 혐오한다"는 원리를 논박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진공의 발견

갈릴레오의 탁월한 제자인 토리첼리(1608~1647)은 수은 기압계를 발명한다. 토리첼리는 수은을 사용하여 위끝이 막힌 수직관 속의 액체의 움직임을 관찰하고는 수은이 그것을 담은 그릇으로 떨어져서 보통 30인치가 되었을 때 관 위쪽에 남는 빈 공간의 의미에 흥미를 가졌다. 그 공간이 진공공간이다. 그는 진공을 만들 때 받는 저항은 진공혐오의 원리가 아니라 공기의 무게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공기의 대양의 밑바닥에 살고 있으며, 이 공기는 무게가 있다는 것이 실험에 의해서 밝혀졌다."

 

파스칼은 1648년 높은 곳에서는 기압이 내려간다고 하는 유명한 실험을 실증하여 온 유럽의 주의를 이끌었다. 그는 "자연은 진공을 싫어하지 않고 그것을 피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 혐오라고 되어 있는 현상은 모두 공기의 무게와 압력에 기인한 것이다....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참된 원인을 간파하지 못할 때, 그들은 교묘하게 가상적 원인을 만들고 여기에다 특수한 이름을 붙여서 이성이 아니라 그 귀를 만족시킨다."

 

실험 물리학은 로버트 보일(1621~1691)과 함께 본 궤도에 진입했다. 그는 진공에 존재에 관한 토리첼리와 파스칼의 의견을 확인했다. 그리고 진공이 되면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연기가 흩어지는 것, 새 털이 총알처럼 낙하하는 것, 그 속에 20일동안 쥐를 넣어 두면 죽는 것등을 증명했다. 보일은 화학자라기보다는 그 자신이 희망했던 바인 원자물리학자라고 간주애햐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진공을 뛰어넘어 또는 진공 속으로 들어가서 원자로 나아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진공보다는 펌프의 작용과 공기의 반응 즉 "탄성"에 흥미가 있었다. 보일은 그의 실험들을 "입자 철학"의 자료로 삼을 생각으로 계획했다. 보일은 공기가 원자로 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원자 모형은 그 현상을 "알기 쉽게"한다고 말한다. 보일은 입자 철학을 수립하는 수단으로서, 화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최초의 중요한 물리학자였다.

 

기계론 철학자는 모든 변화를 "두 개의 가장 종합적인 원리-물질과 운동"으로 돌린다. 말하자면 변화는 객관적 세계의 여러 부분들의 재배치다. 만약 과학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은 혼돈으로 화하고, 세계는 (나중에 괴테가 원했듯이) 측정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공감에 의해서 통찰해야 할 것이 된다. 파우스트는 지식과 권력에의 지름길을 과학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술을 통해서 얻으려 한다.  

보일의 과학은 상식의 과학이었다. 보일의 입자설은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물질에 관한 하나의 생각, 즉 데카르트의 경우처럼 하나의 방법론이었을 따름이다. 그는 화학을 양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 보일은 공기의 물리적 특성을 발견했지만, 기체의 화학적 특성을 발견하지 못했기때문이다. 백년이 더 지나서 돌턴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입자철학"은 수로 표현된 적극적 의미를 갖게 된다.

 

실험에의 열의

베이컨의 실험주의는 보일과 영국의 왕립학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베이컨의 영감이 보일에게 작용하여 원자 물리학을 진공으로부터 탄생시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또한 "베이컨의 문장만큼 <왕립학회의 역사>의 서문으로 어울리는 것은 없을 것이다"라고 스프랫주교는 말했다. 베이컨은 개념을 가지고 질서를 수립하려는 추상적인 사상에 비하면 실험은 쉬운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에게 천하게 보인 것은 실제로 실험하여 얻은 몇 조각을 가지고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발견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겸양이었을 것이다.

 

실험가들은 과학의 장인이었다. 수학은 오만하다. 그것은 자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신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모든 이론은 실험적 방법을 통해 심판받아야 한다. 즉 데카르트와 같은 사람들은 사실을 진지하고 겸허하게 탐구하는 실험가들에 의햐여 재표현되어야 한다.

베이컨은 다소 천박한 반지성주의적 입장이었다. 하지만 실험과학자들은 거기에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사실의 축적과 분류로써 얻은 질서를 추상과 수학 공식에 의하여 얻어진 질서와 대립시키지 않았기때문이다.

 

과학의 사회성

베이컨의 예언대로 과학은 협동, 커뮤니케이션, 후원등의 필요로부터 사회적 성격을 발전시킨다. 역사적으로 두개의 탁월한 과학단체가 있다. 런던 왕립학회(1662)과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1666)이다. 최초로 과학적 목적을 가진 것은 1603년 로마에서 탄생한 린체이 아카데미였다.1657년 창설된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델 치멘토는 계획연구의 산실이었다. 여기에서는 대기압, 온도측정, 압력측정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실험 기구의 고안이 아마 그들의 가장 뛰어난 공헌일 것이다. 그들은 결빙현상이 일정한 온도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7세기 전반에 파리의 지식인들은 장소를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살롱을 형성했는데, 여기에서 프랑스적 양심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을 벌였다. 지방의 동료와는 서신에 의존했다. 이 그룹의 중심인 메르센느(1588-1648)신부는 과학의 가십을 전하는 사람으로 "학계의 우편함"으로 유명했다.

 

영국의 왕립학회와 프랑스의 왕립과학아카데미의 성격의 차이

프랑스의 왕립 과학 아카데미는 베이컨의 새 아틀란티스의 상보다는 프랑스풍의 국가 통제적 전통에서 구상된 것었다. 그것은 왕립학회와는 달리 프랑스 공업의기술적 감독과 개량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재촉받는 일은 거의 없었고, 회원들은 와으로부터 연금을 받아 영예를 누렸다. 왕립학회의 정직한 아무추어 기질과는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왕립학회는 흥미있는 개인적 기획을 넘어서 특별히 자격을 까다롭게 심사하는 일은 없었다. 과학 아카데미의 자리는 제한되어 있었다.

 

영국보다 프랑스에서 과학이 좀 더 전문적으로 제도화되었다. 하지만 루이14세 치하의 프랑스에서 성숙한 과학자들은 데카르트나 파스칼 세대에 비하면 훨씬 빈약했고, 뉴턴 시대에 왕립학회에 모여들었던 영국의 천재들보다 덜 생산적이었다. 18세기 계몽사조나 나올 때에야 비로소 그 우위가 드러나 보인다.

 

17세기 과학 대중의 요구에 대한 자연발생적 응답으로 성립되어 과학의 경향과 양식을 창조한 것은 왕립학회였다. 과학 대중이 없었더라면 사회적 활력으로 되기에는 너무 세련된 수준에서,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의 후계자 및 그들과 필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고상한 개념이 교환되는 형태가 계속되었을 것이다. 왕립학회는 성실한 사람들이 위대한 발견을 이해하려하고, 경건, 학문, 인간성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발전시키려고 토론을 거듭했던 데서 유래했다. 보일은 크롬웰 통치하의 그들의 모임을 "보이지 않는 컬리지"라고 불렀다. 보일은 19세때 왕립학회의 거장들과 교제를 맺게 되었다.

 

이 그룹의 한 사람인 윌킨스는 1648년 새로운 역학과 우주론을 다룬 저작을 출판한다. 그는 놀랄만한 통찰력으로 갈릴레오의 과학의 수학화와 베이컨의 과학의 사회화 사이에 조정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는 것을 예언했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윌킨스가 과학의 성과중의 하나로서 의견교환이 아니라 사물을 표시하는 기호에 의한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일종의 "학술언어"의 고안인데, 이것은 베이컨의 시장의 우상을 추방하려는 것이었다.

 

이 그룹은 항구적인 조직을 세우고자 국왕의 은혜를 구했다. 1662년 예비헌장이 발표되었고 그 이듬해 "자연의 지식을 향상시키기 위한 런던 왕립학회"라는 재가를 받았다. 학회의 <철학회보>가 1665년 창간되어 이후 끊임없이 계속되는 학술지가 되었다. "왕립"이라는 칭호는 국왕의 관용을 표시할 뿐, 지원은 없었다. 왕립학회는 영국시의 자발적인 단체로, 대륙에서라면 공영 기관이 되엇을 것에 민영 사업이 손을 뻗힌 것이다. 거기에는 공공심 있는 후견인과 보일, 로버트 후크, 에드먼드 핼리 등 자기 실험실이나 재정 상태가 지극히 좋지 않은 학회의 실험실에서 "자연에 관한 지식의 향상"에 실제로 종사한 사람들이 제휴했다. 이리하여 왕립학회는 왕정복고 하의 협동적인 문화 운동을 체현하였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 -계몽사조의 기독교에 대한 적의와는 달랐다.

청교도의 헌신과 열의가 종교의 에토스로부터 과학의 에토스로 이행되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생애는 청교도 윤리가 과학과 정치라는 세속적 활동으로 돌려진 예로서, 미국인을 고무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보일에 있어서 이 윤리는 세속화될 것까지도 없었다. 그의 지극히 영국적인 자연신학은 고도의 성실성에 따르는 그 모든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신의 없으로서의 자연이라고 하는 증거 위에 안주해 있었다.

 

칼빈주의자의 행동 양식인 전통에의 적의, 공리주의, 타산적 자기 부정, 세상일에 대한 소명, 합리성, 경험의 개인적 해석등은 서구 문화사의 일반적 특색이다. 프로테스탄트와 시민 계급의 환경은 재능있는 자나 야심 있는 자를 격려하여 과학을 높여왔다. 반면에 가톨릭과 귀족적 환경은 과학자의 발전을 저해했다. 스코틀랜드인과 네덜란드인은 과학의 역사에서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아일랜드인과 스페인인은 거의 찾아 볼수가 없다. 그러나 이 영향들은 사회적인 것이지 교의적인 것이 아니다. 최근 미국 과학자의 출신에 관한 조사에 의하면 대부분 중서부의 특정 종파와 관계있는 소규모 대학 출신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귀족주의의 망령이 남아 있는 남부나 졸업생들이 보통 법률, 외교, 정치 분야로 진출하는 아이비리그 출신이 아니라, 옥수수지대 출신인 것이다.

 

일반인의 눈에는 과학자들은 고립된 존재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의 진정한 사회적 성격으로 부터 이렇게 동떨어진 견해는 없다. 어는 인문학자는 '그의 과학자 동료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집단을 이루고 샘이 날 정도의 연구비에 힘입어서, 온 세계를 여행하며 언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지만 훌륭한 결과를 맺는 토론을 하기에는 하등의 방해도 안 될 것 같은 집회에 참석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모두 과학의 언어로 말하기 때문이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과학과 공통의 이해>에서 과학 안에서 살고 과학 안에서 존재하는 참된 공동체를 감동깊게 고찰한다. 이것이 왕립학회가 발족했을 때부터 성취한 것이다.  

객관성의 칼날 제2장 예술과 생명의 실험/ 해부학 및 베이컨 주의/찰스 길리피스 지음

 

17세기 천재들은 자연주의, 경험주의, 베이컨주의등을 과학의 기초로 사용하였다. 자연주의는 과학의 주요 요소가 되기 전에 이미 예술의 표현 양식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경험주의는 물리학보다 생명의 과학에서 더욱 명확하게 보여지고 있었다. 르네상스의 항해자, 기술자, 장인 등의 기술적 성취는 베이컨주의의 배경을 이루었다. 베이컨주의는 과학을 개념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 실험과 관찰을 통해 귀납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학문으로 만들었으며, 자연의 힘을 조종할 능력은 자연을 이해한 보상으로 오는 것이라고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연주의와 해부학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자연을 순수한 탐구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나타냈다. 그러한 태도는 자연으로부터 윤리나 교훈을 끌어내려는 경향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태도를 자연주의라 부를 수 있다. 또한 레오나르도의 정신은 자연에서 기하학적 형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형상화하려 하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들은 입체기하학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과학일반으로 전진하지 못했다.

 

과학의 언어인 수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 있던 그 당시의 과학은 서술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기술적(묘사적) 과학은 사물을 관찰하여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3차원의 모습을 평면상에 재현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과학의 방법을 사용해야만 했다. 다시 말해 과학적 방법인 투시화법과 같은 방법들이 미술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한편 인체를 자연주의적(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르네상스의 취향은 인체 해부학 연구로 이끌었다. 

 

생명 과학의 발달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1514~1564)는 르네상스 해부학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이 출판된 1543년 베살리우스는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그의 책은 인체의 멋진 목판화를 제공하고 있다. 과학과 미술이 자연주의 안에서 함께 어우러져 나타났다.

 

코페르니쿠스 이론은 인류의 세계관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베살리우스의 사상을 비롯한 다윈 이전의 어떠한 생물학자들의 연구도 인류의 세계관까지는 바꾸지 않았다. 물리과학의 경우 이론의 심화는 사실의 확장에 선행하는 반면, 생명과학의 발전 순서는 그와는 반대였다. 베살리우스의 해부학으로부터 하비의 혈액 순환의 실증에 이르기까지 사고의 움직임은 물리학사의 어떤 에피소드에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흥미롭다. 하지만 그 업적에는 한계가 있다. 뉴턴은 중력이론으로 케플러의 행성 법칙과 갈릴레오의 역학을 통일하여 물리학의 전 문제가 망라된 운동하는 물체에 관한 수리 과학을 수립했다. 그러나 하비의 혈액 순환은 해부학과 생리학을 결합시킨 데 불과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은 나름대로 그 세계의 진리였다. 그의 분류학은 수백만의 생명 형태에 질서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은 기본 전제를 가지고 전개되었다. 그 기본 전제인 목적에 대한 고려, 기능에 대한 목적론적 분석은 다윈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을 지배하였다. 생물학은 물리학에 비해 볼 때 덜 급진적인 쪽이었다. 또한 생물학자들은 수리 분야의 학자들보다는 좀 더 인간적인 기질의 소유자들이었다. 수리 분야의 학자들이 추상적인 것, 정확한 것에 주목했다면 이들은 오히려 생명과 육체에 중점을 두었기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만큼 생명과학이 객관성을 지닌 과학으로 발전하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베살리우스의 해부학

베살리우스의 강의 및 강의내용이 수록된 책은 세가지 요소로 인해 성공을 거두었다. 권위있는 지식, 해설적 방법 그리고 조직적 접근. 베살리우스의 주요한 공헌은 어떤 단일한 세부사항이나 방법에서의 독창성보다, 오히려 이 세 요소를 짜 맞추어서 해부 실습의 체계를 세운는 종합적 수완에 있었다. 베살리우스 자신은 책을 통해서보다는 시체로 해부학을 배우는 것을 매우 중요시했다. 이렇듯 베살리우스가 일으킨 혁신은 실물 교습의 방법이었고, 이후 그것은 자연에 관한 지식을 가르치는 기법이 되었다.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는 고도로 체계적인 저작이다. 베살리우스가 체계적으로 저술했다기 보다는 그의 연구 대상이었던 육체 자체가 체계적이었다. 그의 연구 구조는 대상(신체)의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모범적인 해부학 저술일 뿐 아니라, 모든 관련 사실이 질서 정연하고 자연으로부터 직접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과학의 역사상 최초의 저술이다. 거기에는 새로운 이론은 없었다. 그러나 모든 사실이 거기에 있었다. 베살리우스 저술의 영향은 낡은 과학의 안정성을 무너뜨리게 되고 해부학 전체가 세심한 관찰과 독립적 사고방식에 의하여 재건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게 되었다.

 

갈레노스의 낡은 이론

의학사에서 갈레노스의 위치는 물리학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치에 비교할 수 있다. 갈레노스의 목적론은 사물의 목적에 관심을 가진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적인 태도와 신이 모든 것을 완전히 계획하고 있다는 플라톤의 신비 사상이 결합된 것이었다.

 

갈레노스는 심장의 기능보다는 간장의 우월성을 지지하였다. 갈레노스의 이론은 다음과 같다. 간장은 영양분을 위장으로부터 공급받고 영양분이 풍부한 피를 생산한다. 이 피는 심장의 팽창박동(수축이 아니라)에 의해 우심방으로 빨려들어가고, 심장이 수축할 때 일부는 폐로 가며, 나머지는 심장의 격막(좌심방과 우심방을 가르는 근육막)을 통해 좌심방으로 나온다. 그리고 거기에서 페정맥을 통해 운반된 공기와 섞여서 생명을 주는 유동체로 밝은 적색을 띠고 동맥속에서 밀려갔다 밀러오며 신체에서 물결친다. 여기서 갈레노스가 보기에 폐정맥은 혈관이 아니라 기관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간장에서 나온 정맥혈은 신체 중의 검은 자양분을 좀 더 서서히 운반한다. 갈레아노의 이론에는 혈액의 순환 개념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갈레노스의 이론의 난점은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갈레노스는 심장의 주된 역할이 흡인이라고 보았지만, 사실 심장근육의 구조는 심장의 역할이 수축과 분출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폐정맥을 혈관이 아니라 기관으로 보았지만, 사실 폐정맥은 해부적으로 혈관이라는 것이다. 즉 폐정맥은 공기가 아니라 피로 가득차 있으며, 폐정맥은 혈관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폐정맥은 기관과는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째, 심장 격막을 통해 피가 전달된다는 것은 완전히 비이치적인 주장이었다. 이 격막은 두껍고 강한 근육이다. 베살리우스도 이 격막을 조사했지만 구멍이나 통로를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윌리엄 하비(1578~1657)의 혈액 순환 이론이 1628년 출판될 때까지 사람들은 이 오류를 받아들여 왔다. 

 

 혈액의 소순환을 밝힌 미구엘 세르베토(1511~1553)

혈액이 폐를 거쳐서 우심실에서 우심방으로 이행하는 혈액의 소순환은 1553년 출판된 세르베토의 <기독교의 부흥>이라는 책에 기술되어 있다. 그는 자연신학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연을 읽고 파악함으로 신의 말을 통찰할 수 있으며, 이러한 신의 단순한 말을 통해 신학자들에 의해서 생긴 허영과 부패를 뛰어 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칼빈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고 화형을 당하고 말았다. 

 

세르베토는 격막을 통한 전달은 없다고 말했다. 그 대신 "이 피는 교묘한 기교를 써서 폐 속의 어떤 도관을 통과한다. 폐에 의하여 그것은 밝은 색을 띠게 되며 폐동맥에서 폐정맥으로 옮겨 간다. 다음에 그 정맥에서 공기를 흡입하는 사이에 공기와 섞이며 배기할 때 불순물을 씻어낸다."라고 썼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피가 순환할 가능성을 영향력있는 누군가에게 암시하는 일은 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그것은 피가 격막을 통하여 심장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스며 나오고 그 동안 생명의 영에 의해서 깨끗해진다고 하는 설을 폐 우회설로 대치시켰을 뿐이었다.

 

파브리키우스(1537~1619)의 판막 발견

파브리키우스는 1603년 정맥에서 발견한 판막에 관하여 기술한 해부학 저술을 출판했다. 그것은 피를 한 방향 즉 심장으로만 흐르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 시대까지는 해부학자들은 혈액의 순환을 올바로 파악하는데 필요한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혈액의 소순환, 그리고 판막의 존재, 심장의 근육의 구조등은 모두가 혈액 순환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혈액의 순환을 발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 새로운 접근 방법이었다.

 

윌리엄 하비(1578~1657)의 혈액 순환 이론

하비는 논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 기본적인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관찰과 실험을 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의 탐구의 무기는 경험 그리고 그것을 실험실에서 인위적으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그의 이론이 결정되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진실하고 풍부한 결실을 맺는 자연철학은 모두 이중의 사닥다리, 즉 상승하는 것과 하강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실험에서 공리로 상승하는 사닥다리와 공리로부터 새로운 실험의 고안으로 하강하는 사닥다리다" 라고 그의 방법론을 설명한다. 하비는 이러한 상승하는 사닥다리와 하강하는 사닥다리를 적절히 사용한, 탐구와 경험주의를 잘 배합된 방법으로 혈액 순환 개념에 다다른다. 

 

윌리엄 하비의 <심장과 피의 운동에 관하여>(1628)은 귀납적 과학의 고전이다. 그 책은 귀납적 추론의 모범을 보여준다. 각 장마다 많은 예를 들어 설명한 간결한 요점이 적혀있다. 예를 들면 그는 냉혈동물 생체해부를 통해 심장근육의 수축은 펌프작용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관찰은 폐순환의 정당함은 물론 더 나아가 동맥에서 정맥으로 흐르는 전체적인 혈액 순환이 합리적 결론임을 시사하였다. 그리고 혈액의 순환에 대한 결정적 논의가 피의 양에 관해서 전개되었다. 심장의 용량, 속도 및 박동으로부터 계산해 보면 심장은 한 시간에 인간의 체중보다도 많은 양의 혈액을 뿜어낸다. 이 양은 사람이 섭취할 수 있는 음식물의 최대량으로 만들어진 것보다도 많은 양이다. 이 많은 양의 피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혈액이 순환한다는 것이야 말로 이러한 의문점에 대한 단 하나의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혈액은 심장의 박동에 의해 순환로를 끊임없이 도는 일종의 순환운동을 한다는 점이 필연적으로 제시되었다. 하비의 혈액 순환 이론이 완성된 것이었다.

 

모세혈관의 존재를 몰랐던 당시, 혈액 순환 이론의 단 하나의 난점은 피가 세동맥에서 세정맥으로 어떻게 흘러가는가이다. 그러나 하비는 모세혈관의 존재를 가정했으며, 1661년 말피기(1628~1694)가 현미경을 사용하여 개구리의 폐기관에서 모세혈관을 확인함으로 그의 가정이 증명되었다. 

 

하비의 견해는 말피기의 발견이 있기 이전 30년간이나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비에 반대의 강력한 이유는 피의 흐름의 수력학은 단 하나의 자연 현상을 확증하기 위하여 신체의 철학 전체를 파괴해버렸다는데 있다. 하비의 연구는 아리스토텔레서로 부터 이어져 오던 목적론적 견해와이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비 업적은 갈릴레오의 업적과 같은 과학의 선구적 개념이 되었다. 그의 과학은 측정에 기반을 둔 객관적인 새과학이었으며, 성질, 체액, 목적, 내재적 경향 등을 중심으로 하는 옛 과학을 대신했다. 그의 과학적 사고와 질서에서는 주관성과 개성적인 것이 배제되어 있었다. 갈릴레오는 물리학으로부터 생물학적 비유를 추방했다. 하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기계론적인 사고를 유기체 연구에 도입했다. 이윽고 데카르트가 인간속에서 기계론를 발견하게 되었다.   

 

베이컨의 실험주의 및 실용주의

하비와 베이컨의 관계는 과학을 실천하는 자와 그 방법에 관하여 논의하는 자의 관계이다. 베이컨은 하비의 혈액순환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도, 케플러의 행성의 법칙도 수용하지 않았으며, 갈릴레오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천재적인 과학자라기 보다는 과학세계에서는 평범한 한 사람의 시민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새 과학의 철학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용하기 위해서 지식을 조직하는 새로운 확파를 창시하였다. "내가 과학의 발견을 위하여 제안하는 과정은 지혜의 예리함이나 힘에는 거의 의존하지 않고 재능이나 이해력 여하를 막문하고 모두 동일한 수준에 놓는 것이다." 베이컨 철학은 과학이 공공적으로 그리고 공중에의 관심에서 수행되는 하나의 운동이라고 주장하였다.

 

베이컨 저작의 주제는 세가지, 즉 학문의 가치와 존엄의 실증, 학문을 쇠퇴시키고 쓸모없게 만드는 장애의 분석, 학문을 개혁하고 진보시키는 방법으로 나눌 수 있다. 베이컨은 과학의 학도는 아니었지만 대단히 날카로운 인간학의 학도였다. 지성 자체에 대한 지성의 방해 작용을 논하는 점에서 그점이 잘 나타난다. 그는 우리 오성의 구조 자체에 정신의 혁신을 저해하는 요소들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베이컨은 이 생득적인 눈가리개들을 "우상"이라고 불렀다. 여기에는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 있다.

 

베이컨의 우상

먼저 "종족의 우상"은 우리의 공통된 천성으로부터 오는 왜곡이다. "인간 이해력에는 의지와 애정이 스며든다....인간은 스스로 진리라고 믿는 것을 실제의 진리보다도 쉽게 믿어버린다."

 

또한 "동굴의 우상"은 만인 공통의 이 오해의 경향(종족의 우상)과 개인의 편견 및 정열이 복합된 것이다. 각 개인은 "자연의 빛을 굴절시키고 색을 상실케하는 그 자신의 동굴 내지는 은신처를 가지고 있다."

 

"시장의 우상"은 "사람들의 교제나 연합에 의하여 형성된 우상이다. 말의 부적절한 선택은 오성을 놀랄 만큼 저해한다." 말에 가득찬 오류를 확인하는 것은 수정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그때 이후로 과학 언어에 정확성을 도입하려는 시도는 소홀히 여겨진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극장의 우상"은 철학자의 체계적 독단론이다. "모든 기성 체계는, 비현실적이고 연극과 같은 방식으로 그들이 창조한 세계를 표현하는 연극에 불과하다." 데카르트는 고대 철학들의 근거 없는 많은 가정 - 원의 완전성, 자연에 내재된 목적이라는 생각등의 근거없음을 한 사람의 철학자도 지적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언어의 분석과 관련된 이 "체계의 추방"이 18세기 계몽사조의 과학의 주요 모티프가 된다. 이것은 과학에 상당한 건전성을 가져 왔지만 지나치게 건전하게 보이게 하는 결점도 조장했다. 말하자면 상상력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것은 미세한 사실의 축적을 장려하였지만, 이론을 막았다. 그리고 박물학을 장려하였지만 추상적인 일반화를 억눌렀다. 베이컨에게는 사소한 사상이나 추론을 확장하여 세계 체계에 도달하려고 하는 케플러,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태도가 없었다.

 

베이컨의 과학 방법론

베이컨에 의하면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과학적 방법은 세개의 서로 다른 단계로 이루어 진다. 귀납적 방법의 적용, 보편적인 박물학의 창조, 과학의 공공 연구 조직이다.

 

귀납은 과학의 절차를 바꿈으로 공허한 합리주의를 뜯어 고치고 새롭게 출발하게 한다. 스콜라학파는 원리에서 출발하여 결론을 연역한다. 그러나 베이컨은 개별 사실에서 출발하여 모든 관련 사실들을 망라하여 차츰차츰 일반적 원리로 높여간다. 베이컨의 근대과학에의 큰 기여는 실험에 대한 강조에 있다. 17세기 이후의 과학을 르네상스 및 그리스 과학으로 부터 명료하게 구분하는 것은 실험이다. 자연의 관찰 결과뿐 아니라 더 나아가 자연의 인공적 재현 즉 실험의 관찰을 중요시 한다. "자연을 노하게 하면, 그것은 가면을 벗고 진면목을 드러낸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진정한 박물학이 창조된다. 베이컨의 완성하고자 했던 방대한 박물학은 협력과 자금이 필요할 것이다. 과학은 인간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기때문에 과학을 유지하고 조직하는 것은 국가의 임무이다. 이렇게 과학은 공공 연구조직을 갖게 될 것이다.  

 

베이컨 이후의 과학의 발전 방향

갈릴레오 이후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이 지향하는 바와 같은 인간적인 면을 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베이컨의 과학은 인도주의의 모습을 띠게 되었으며 이는 많은 과학자들에게 매력적인 생각이었다. 과학은 부분적으로 베이컨이 의도했던 대로 되었지만 베이컨의 방법에 따라 이루어진 발견은 전혀없었다. 그리고 과학사상도 베이컨이 예상했던 것보다 혹은 베이컨이 뜻했던 것보다 훨씬 추상적이고 우아하며, 지적인 것으로 발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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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 예술에 도입된 자연주의는 인체의 연구에 큰 영향을 주면서 해부학의 발달에 기여하였다. 인체에 대한 오랫동안의 잘못된 이해는 하비의 혈액 순환 이론에 의해 바로 잡히게 된다. 그리고 베이컨에 의한 실험주의, 실용주의 과학관이 주장되면서 근대과학의 큰 특징이 형성된다.

 

베이컨의 우상이론은 흥미롭다. 지성의 올바른 작용을 방해하는 요소들...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인간의 경향, 진리를 찾고자 하나, 실체에 다가가기 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믿어버리는 인간 특유의 경향은 진리를 밝히는데 큰 걸림돌이다. 거기에 더해 개인적인 편견-다양한 환경이나 상황에서 생성된 편견등이 진리로 부터 얼마나 우리 자신을 멀리 떨어지게 하는지 개탄할 만하다.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 부터 받는 영향들, 그리고 사용하는 언어의 불완전함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지는 진리와의 갭, 더더구나 특정한 체계속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그 체계밖에 있는 진리를 발견하기 어렵게 되는 상황들...

 

그렇다면 인간의 이성으로 객관적 실체를 발견하기란 너무 지난한 일이 아닐까? 그렇다고 베이컨이 주장한 것처럼 귀납적인 방법 역시 그 한계가 있어 실체로 가는 길을 밝혀줄 수 없다면, 그 무엇으로 하여 그 길을 가게 될까?

객관성의 칼날  (찰스 길리스피 지음/이필렬 옮김/새물결)

제1장 완전한 원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의 낙체의 법칙 "자연스런 운동에서 통과한 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

 

갈릴레오는 이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그가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일상 언어 및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의 기하학뿐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변수 x가 포함된 방정식이나 함수로 나타나는 대수학을 편리하게 사용한다. 하지만 그러한 도구가 없는 상태에서 자연의 법칙을 수학적으로 명시하고 증명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번거로운 것이었을까? 위의 식도 대수적으로 나타내면 S=1/2*gt^2처럼 쉽게 나타낼 수도 있는데...어쨌든 갈릴레오가 이 낙체의 법칙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한 기하학적 도형은 자연을 수학의 언어로 표현하는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갈릴레오는...수학적 기법과 철학적 주장이 온통 뒤얶여 있는 곳에서 물리학의 기본 요소를 골라내는 자연에 대한 판단력과 직관과 감각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수리 물리학자가 단지 토론으로만 그치지 않고 실제로 상황을 일변시켜버린 기법으로는 최초의 것이었다."

 

그리스 과학에서 근대 과학으로

"과학은 그리스 철학의 유산에서 유래한다."

그리스인의 사변적 천재성은 합리적 우주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그 우주는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질서 정연한 우주였다. 그리고 그 법칙은 인간 사고에 의해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이성에 의해 모든 만물의 법칙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신화에서 지식으로의 그리스인의 전이는 철학뿐만 아니라 과학의 기원이기도했다. 실제로 자연에 관한 지식은 17세기의 과학혁명을 통해 분리되기까지 철학은 일부분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는 자연철학이라고 불이었다. 

 

그리스 과학은 근대 과학과는 그 성격에 있어 차이가 있다. 그리스 과학은 주관적이고 합리적이며 순수하게 지적이었다. 그것은 정신의 내부에서 출발하여, 보편성과 이성을 만족시키는 능력에 따라 성공여부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리스 과학은 실험이라는 근대 과학적인 방법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리스 과학의 도구는 이성이었다. 

 

이에 반해 근대과학은 비개성적이고 객관적이다. 출발점을 자연에 두며, 새로운 현상을 예측하고 새로운 개념을 제안한다. 가능하면 수학적으로 표현하고 실험을 통해 검증하는 과정을 거친다. 합리성을 내던지지는 않았으나 무엇보다도 계량적이고 경험적이다. 근대 과학은 자연을 이해함과 동시에 통제하려고 든다.

 

르네상스시대에 기성 권위에 대한 반역을 통해 근대 과학이 등장했다. 그것은 근본적인 것에 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것은 중세시대의 과학을 지배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허물어 뜨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플라톤의 힘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형이상학적이었으며 추론적이었다. 그것은 자연현상을 논리 정연하게 그리고 고도로 정교하게 관념화하였다. 상식에 의해서 파악된 경험에서 출발하여, 정의, 분류, 연역을 거쳐서 논리적인 증명에 도달하는 방식의 추론이 그것의 기초이었다. 이것의 무기는 실험과 방정식이 아니라 삼단 논법이었다.  이것의 목표는 무수한 종속적 수단들이 어떻게 질서라는 커다란 목적에 들어맞게 되는가를 보임으로써, 세계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직접적이고 미세한 관찰, 종에 의한 형상의 분류, 부분이 어떻게 전체에 봉사하는가에 대한 분석...이러한 것들은 19세기까지는 생명과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기술이라고 불렸던 박물학에 유용한 것이었다.

 

플라톤이 물리학에 끼친 영향

플라톤은 과학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과학자에게 아리스토텔레스에 버금가는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이데아론은 사물의 세계에서 진리를 제거한다는 점에서는 과학에 부정적이지만, 이상적인 단순성을 수학적 현실로 확인하는 점에서는 과학적 아이디어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안타깝게도 우주론과 물리학은 단일 과학으로 확립되지 않았다. 우주론은 달 저편에 있는 천체의 영역에 관여하고, 물리학은 지상의 세계에 관계하는 것이었다. 우주의 물리학과 지구의 물리학은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케플러와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상의 운동은 불완전한 것이었으며, 오직 하나의 운동만이 완전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천체의 운동을 지배하는 원운동이었다.   

 

피타고라스학파

피타고라스학파는 자연의 본질은 수라고 확신하였다. 그들에게 수는 사물의 형상을 포함하고 있으며, 실재하면서 동시에 이상적인 것이었다. 수에는 완전하고 영원한 구조가 존재한다고 믿었기때문이다. 현대물리학자중에도 우주의 본질은 구조라고 이야기하거나, 또는 정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질의 근본이 비물질이라는 사상은 고대나 현대나 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불가능한 수리물리학

그리스 철학 전통의 두 위대한 인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수리물리학 즉 수학과 물리학의 결합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학과 물리학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플라톤에게 이상적이며 영속적인 수학의 세계는 그의 이상 세계에 실재하는 진실이었으며, 물리학은 불완전한 사물의 세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서로는 인연이 닿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수학이란 추상적인 것을 다루는 것이었으며, 물리학이란 현실적인 것을 취급하는 것이었다. 성질, 형상, 미묘한 특성들로 이루어진 현실 세계는 수학을 통해 표현할 수없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현실 세계는 미묘하여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으며 특히 양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르키메데스는 지렛대의 법칙등을 통해 불가능해 보였던 기하학과 물리학의 결합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의 사후 1700년 후 그의 가장 뛰어난 제자 갈릴레오가 나타났을 때에야 비로소 그의 정역학은 동역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사고  

고대 그리스 전통의 물리학으로 부터의 과학 혁명은 코페르니쿠스에서 시작하여 뉴턴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뉴턴의 중력 법칙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분리되어 있었던 천체와 지상의 지식을 연결하여 운동하는 물체에 관한 단일한 이론 과학을 완성한 때가 바로 그것이다.

 

고대의 지동설과 천동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은 행성의 역행운동과 같은 불규칙성을 해결할 수 없었다. 그것은 태양 중심 모델에 의해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태양이 중심에 위치한다는 것을 믿었으며,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310~230 BC)도 이러한 설을 제안했었다. 하지만 당시의 천문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85~165 AD)의 완전한 기하학적 천문학을 받아들었다. 이는 지구가 정지해 있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는 이른바 천동설이다. 그는 주전원, 이심원, 대심이라는 세가지 구조를 사용한 원의 조합으로 천체의 겉보기 운동을 합성해 내었다. 이것은 고대 로마로부터 16세기까지의 역(달력)의 계산을 뒷받침하는데도 충분한 기능을 함으로 당시의 천문학자들에게 만족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출판했다. 이 책에 들어있는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프톨레마이오스까지의 낡은 형식을 그 근본원리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뒤엎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의 학설은 태양계의 배치를 바꾸어 버렸다. 태양계의 중심에 태양이 있고, 움직이지 않는 지구를 하루에 한바퀴씩 돌게 만들었으며, 일년에 한번 태양주위를 돌게 만들었다. 그의 사상이 완전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그의 태양중심설은 근대물리학으로의 위대한 혁명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발상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이 상식의 흐름에 대항하여 얼마나 강하게 거슬러 올라가야 했는가는 고려한다면 그의 사상이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 다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대는 관성의 원리도 운동의 합성도 알려지지 않은 시대였다. 만일 지구가 움직인다면 우리는 공중으로 팽개쳐지는 것처럼 느껴야 할 것이다. 탑위에서 떨어지는 돌은 탑 서쪽에 떨어져야 하며, 서쪽을 향해 발사된 포탄은 동쪽으로 발사된 포탄보다 멀리 날아가야 한다. 분명한 경험과 우리가 느끼는 직관적인 정지감은 코페르니쿠스의 생각과는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타르코스와 코페르니쿠스의 경우에는 이성이 오감을 제압하여 그 주인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나는 찬탄을 금할 길이 없다"라고 갈릴레오가 말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신념

코페르니쿠스는 고집쟁이이다. 아리스타르코스적 생각의 단순성과 우아함을 깨달은 이후, 그는 수많은 모순에 압도되면서도 기가 꺽이지 않고, 온갖 곤란에 직면하면서도 그의 생각을 고수했었다. 사실 그의 연구가 완성되었지만 그 중심적인 내용의 멋진 단순성을 입증하기는 불가능했다. 그의 체계는 수학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웠으며 아주 틀린 것도 많았었기때문이다. '과학에서 이론이 수행하는 합리화의 역할 및 사물에 궁극적 이치가 들어 있다는 신념'의 힘을 코페르니쿠스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대한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의 우월성은?

그 당시 코페르니쿠스체계의 우월성은 어디에 있었는가? 당시의 학문적 전통은 태양 중심설과 지구 중심설은 기하학적으로 교환 가능한 것이었으며, 특별히 태양 중심설을 취해야 할 현실적인 이유가 없다는 쪽이었다. 천체의 위치를 예측하고 역을 만드는 등의 일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보다 우월한 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우월성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개념적인 것이었으며 프톨레마이오스가 보여주지 못했던 장대한 규칙성을 제시한다는 점이었다. 그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은 데이터가 완성된 미래에 가능한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의의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이 물리학의 발달에 기여한 중요한 점이 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질서를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또한 상상력의 날개를 펴도록 자극하는 면이 있었다.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면 세계는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우주의 둥근 지붕에 별이 부착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들은 얼마나 깊은 공간에 놓여있을까? 이런 생각은 공간과 세계에 무한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용감한 상상력은 비극으로 인도하기도 했다. 조르다노 브루노(1548~1600)의 무한한 우주에 대한 용감한 주장은 그를 화형으로 인도하고 말았다. 

 

케플러의 법칙

케플러는 "나는 코페르니쿠스의 견해가 진리임을 고백하며, 활홀하게 그 조화를 명상한다."고 말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보완할 세가지 법칙을 제안한다. 첫째, 행성은 타원의 한 초점에 놓여있는 태양 주위를 타원궤도를 그리며 돈다. 두번째 법칙은 행성의 속도가 변하더라도 일정하게 유지되는 양이 있다는 것이다. 행성이 공전할 때, 태양과 행성을 이은 가상의 선이 휩쓰는 면적은, 같은 시간에 같은 면적만큼 움직인다는 것이다. (1609년 <새로운 천문학>) 세번째 법칙은 행성주기의 제곱은 태양으로 부터의 평균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1619년 <우주의 조화>)

 

케플러의 혁명적 발상

케플러에 이르기 전까지는 원은 우주 질서의 기초였으며, 사물은 원위를 영원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케플러의 경우에는 상상력, 사실에의 몰입, 좀 더 깊은 질서에의 신념이 도대체 어떻게 배합되어 있었기에 천문학 창시 이래의 관습을 깨고 태양계를 그 참 형태로 끌어내서 원의 완전성보다 더욱 추상적인 수학적 기초 위에 놓게 되었을까? 쉽게 말하자면 어떻게 행성이 타원궤도로 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유연성으로 가득한 위대한 인간 정신의 공적이며, 참신함이란 점에서 이와 비견될 수 있는 것은 상대성 이론뿐이다.

 

케플러와 티코 브라헤의 만남

케플러가 티코 브라헤를 만난 것은 과학 역사상 가장 잘된 만남의 하나였다. 티코 브라헤는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자연에 관해서 관측하고 실험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론적 통찰이라는 고도의 자질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는 여전히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믿지 않고 있었다. 티코는 케플러에게 고도의 이론적 능력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의 귀중한 관측 결과를 사용하게 하여 티코 학설을 수립하도록 케플러를 구속하려 했다. 하지만 1600년 그들의 만남이 있은 1년 후 티코는 사망하고 케플러가 그의 데이터를 물려 받았다. 이 데이터에서 케플러의 법칙이 만들어 진다.

 

어떻게 타원 궤도를 발견하게 되었을까?

케플러는 티코의 숫자들에 근거하여 화성의 궤도에 대해 연구하면서, 계산에 엄청난 시간을 허비하면서 적어도 일흔 번 이상 해 가며 5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그는 올바른 값을 얻었다고 생각했으며, 화성의 궤도를 증명하게 되었다. 그런데 관측된 위치와 이론에 의해서 예상된 위치 사이에 8분 정도의 각도가 어긋난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아주 적은 차이였다. 티코 이전이라면 그것은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케플러는 이 8분을 해결하기 위해 또 다시 6년을 연구하며 보냈다. 8분의 각도를 가지고 6년을 희생하며 연구했다는 것만큼 케플러의 양심을 증명해 주는 것은 없다. 이 8분이 원을 깨뜨리는 결함이라는 것이 판별되었다. 이리하여 케플러는 화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다른 형태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과학의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은 왕왕 커다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소한 모순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타원궤도에 대한 또 다른 증거들

그의 발견중 타원궤도를 증명하는 것이 몇개 더 있다. 그가 생각한 달걀형 궤도와 완전한 원사이에 생긴 초승달 모양의 최대폭은 반지름의 0.00429배이며, 화성에서 태양으로 그리고 화성에서 궤도중심에 그은 선분이 이루는 최대각이 5도 18분이라는 것이다. 이 각의 시컨트 값이 1.00429라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이 관계는 타원을 정의하는 조건중 하나였던 것이다.

 

케플러 제3 법칙의 발견의 배경

그는 타원의 불합리성에 화가 치밀었다. 그의 우주의 기하학적 구조는 미숙하였으며 그의 타원이란 결국 원에 대한 보잘 것 없는 대용품이었기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타원보다 더 깊이 내재한 사물의 근거를 찾으려고 했다. 세계의 조화를 찾으려는 그의 노력은 조각 그림 맞추기 놀이처럼 여러 방식으로 시도되었다. 그리고 결국 제3법칙에 도달하게 된다. 행성의 운동과 거리의 관계, 태양계의 운동과 구조의 관계를 수립하게 된 것이다.

 

"나의 책은 백 년 동안 독자를 기다려야 할 지 모른다. 신은 사람들이 자기 작품을 명상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기까지 6천년이나 기다리지 않았던가."(케플러 <우주의 조화> 제3법칙 서문)

 

갈릴레오의 혁명

갈릴레오의 객관성은 어떻게 표출되는가?

갈릴레오의 플라톤주의는 피타고라스적 전통보다는 오히려 아르키메데스적 전통을 계승햏다. 그는 우주의 구조에서 감각성, 경건한 윤리, 교훈등의 애매한 요소들을 제거하여, 연구의 대상으로 유클리드적 차원의 견실하고 곧은 뼈대만을 남겼다. 그는 물체의 제1성질과 제2성질을 구분했다. 길이, 넓이, 무게, 모양등 수량화할 수 있는 것은 본질적인 성질이라 정의하고, 색, 맛, 냄새, 감촉등은 물질에 속한 본질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지각 양식으로 제2성질을 이룬다고 정의하였다. 그 차이는 객관과 주관의 차이이다.

 

갈릴레오의 독창성과 혁명성은 어디에 있는가?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이 지니고 있던 주관성 즉 목적론적 물리학을 완전히 바꾸어 객관적 물리학으로 만들었다. 갈릴레오의 세계는 공감보다는 오히려 측정에 의해 파악된다. 갈릴레오는 그의 낙체의 법칙에서 시간을 순수한 물리 현상의 매개 변수로 취급하여 운동을 수량화하였다. 이것은 과거와의 단절을 이루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갈릴레오는 물체의 낙하 거리와 속도에 관한 일반적 표현을 발견하려 시도하였고, 결국 속도를 낙하시간과의 관계로 표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자연의 책은 수학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말한다.  

 

갈릴레오가 윤리에 미친 부정적 영향

갈릴레오는 자연의 모든 것을 크기, 형, 수, 운동이라는 제1성질로 환원하고 그 밖의 것은 모두 주관적인 것으로서 제2성질로 분류했다. 이리하여 과학과 윤리학 사이의 치명적인 불화가 시작되었다. 과학의 객관화는 자연에의 모든 목적론적인 의미를 제거함으로 세계는 허무주의에 노출되었다. 과학자는 측정을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도덕적 책임을 스스로 해제했고, 사물에 대한 분별력을 행사하지 않게되었다. 과학자의 성격이나 윤리에 대한 판단으로 부터 그들의 업적에 대한 판단을 분리하라는 요청을 받는 시대는 갈릴레오로 부터 시작되었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통해 하늘을 관찰하면서 천체들은 완전한 존재가 아님을 알게되었다. 구멍투성이의 달표면, 태약의 흑점등...그리고 토성의 위성들의 발견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의 정당성을 추론할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보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케플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웃어야 할까요, 울어야 할까요?"라고 말했는데, 이는 어느 스콜라 철학자들이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것을 거절했을 때의 일이었다.

 

갈릴레오와 교회와의 반목의 원인

갈릴레오와 교회의 분쟁은 종교의 과학에 대한 원천적 적의나, 진리와 지식 사이의 반목에서 유발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과학자와 세상물정에 밝은 사람들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하는, 어쩔 수 없는 사정에 기인한 것이었다.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혼란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그것이 거론되길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으리라고, 어떻게 갈릴레오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신앙과 도덕과 문명의 질서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 성직자들이, 상식과 정통 종교에 대항하여 기존 자연철학의 구조를 뒤엎으려 하는 갈릴레오의 정열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추기경과 수사들은 수리적 추론에는 완전히 무지했으며,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힘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갈릴레오의 한계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갈릴레오도 그와 같은 경향을 나타냈다. 갈릴레오는 천체와 지상을 단일 물리학으로 결합시키는 수리 과학을 수립하려는 열망 즉 아리스토텔레스에 대신할 통일적 우주상을 얻으려는 갈망이 있었다. 갈릴레오는 운동을 자연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이 지속된다고 하여 보존법칙과 힘의 법칙으로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뉴턴의 제1법칙과 고전 동역학의 기초가 되는 관성의 원리를 정식화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완전한 수리화 사이에서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그 역시 질서 쪽을 택했기때문이다. 그리스에서 과학의 기능은 우주를 단일한 이론적 바탕 위에서 설명하는 것이지, 단지 어떤 특정한 현상만을 일반화하는 것이 아니었기때문이다. 설명가능한 우주, 우리에게 적합한 우주는 유한해야 했다. 하지만 관성의 법칙은 무한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물체는 무한히 앞으로 전진할 것이었기때문이다. 갈릴레오조차 앞에 펼쳐져 있는 무한성과 대결하지 못했다. 갈릴레오에게 있어서 자연스런 운동은 관성 운동이며, 상승도 하강도 하지 않은 지구 중심으로부터의 등거리 운동, 즉 원운동이었다. 지구는 이미 우주의 중심은 아니지만 여전히 운동의 중심이긴 했다.

 

갈릴레오는 이 원을 타파하는 데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낙체의 법칙에는 투사체의 포물선 궤도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타원궤도를 논한 케플러의 <새로운 천문학>도 가지고 있었다. 타원궤도에서 행성을 떠 받치고 있는 물리적 힘은 투사체의 포물선을 만들어내는 힘과 동일한 것이며, 그 어느 것이든 원추 곡선이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갈릴레오가 원했던 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승리지, 혼돈이 아니었기때문이다. 중력이 없다면 직선적인 관성을 가진 물체는 일직선으로 무한히 날아 갈 것이다. 만약 갈릴레오가 원을 포기했다면, 그리고 케플러의 업적을 생각했다면, 그는 관성을 직선상으로 보았을런지도 모르며 천체와 지구를 중력으로 연결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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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관념이 깨어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는 과학혁명에 불을 붙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적 전통에서 이어져 온 "완전한 원"이란 개념안에 갇혀버렸다. 위대한 혁명적 발상의 소유자들도 그것을 벗어날 수 없었다. 단 케플러만이 화성의 궤도를 알아내기 위한 5년, 그리고 실제로 나타나는 궤도와 이론상의 궤도사이의 8분의 오차를 설명하기 위한 6년의 연구 끝에 '완전한 원'을 대신하는 타원을 발견했다. 데카르트에 이르러서야 영원한 원운동은 직선상의 운동개념으로 발전하며, 무한을 향한 움직임을 상상하게 된다. 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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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은 모순을 뛰어넘는다. 어떤 모순들은 지식의 불완전함에 유래한다. 그러한 모순을 극복하는 것은 완전한 지식을 향한 걸음이다. 오류는 진리를 향한 첫 발걸음을 재촉하는 힘이 될 수 있다. 모순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로부터 발전을 이끌어내는 동력이다.  모순 뒤에 숨어 있는 진리는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객관성의 칼날 - 과학 사상의 역사에 관한 에세이 / 찰스 길리스피 지음/ 이필렬 옮김/ 새물결

 

<객관성의 칼날>은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100권중에 과학분야의 한 권이다. 전세계적으로 꼭 읽어봐야 할 고전으로 꼽히지만 일고 이해하기 어려운 책 중의 하나이다. 특히 과학에 대한 소양이 다소 부족하다면 읽는데 더욱 어려움이 있겠지만, 얻는 성과는 작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갈릴레오로부터 시작한 근대과학의 대부분의 분야를 망라한다. 동역학, 고전역학, 광학, 화학, 생물학, 에너지학, 전자기장등 과학 내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과학과 철학, 예술과의 연관성등에 대한 논의등도 담고 있다. 여러 과학분야의 수많은 천재과학자들의 연구결과와 그 구체적인 연구과정까지도 어느정도 보여주며, 그들의 인간적인 면등이 흥미롭게 소개되어 있다. 

 

그의 제목 <객관성>에 비추어 볼 때, 천재과학자들의 직관, 감각, 판단력, 개성등의 주관적 요소들이 과학 혁명에 미친 역할은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 과학발전과 혁명은 그와 같은 개인적 요소에 빚진 바가 있지만, 정작 그 결과물에는 주관적 요소들이 완전히 배제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선명한 대조를 통해 과학의 객관성을 두드러지게 하려는 의도였을까?

 

어쨌든 그의 서문은 이 책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1990년판 서문>

 

과학발전의 기초가 된 행동양식은 무엇인가?

'지식은 활동을 통해 그것의 목적을 찾아낸다. 그리고 활동은 지식 속에서 그 근거를 찾아낸다. 또한 어떤 문제가 풀릴 수 있다면 그것은 풀려야 하며 어떤 일이 실행될 수 있다면 그것은 실행되어야 한다는 본능. 이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를 만들어낸 행동양식이다. 르네상스 분화는 고대적이거나 스콜라적인 학식과 기법과는 확연한 차별화를 보이면서 현대과학과 공학의 모태가 된다.  

 

과학사에서 <객관성의 칼날>의 의의

<객관성의 칼날>은 최초의 역사 서술 형태의 과학사이다. 이를 시초로 하여 전문적인 과학사 분야가 새롭게 소개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이 분야가 발달하고 있다. 이후 과학사는 과학의 사상과 개념을 다루는 내적 과학사에서 외적 과학사로 발전해 나간다. 외적 과학사는 과학 그 자신의 제도속에서, 그리고 사회와의 연관 속에서 과학을 다룬다. 과학의 사회사, 과학의 정치사등은 외적 과학사가 어떻게 그 영역을 확장해 왔는지 보여준다. 과학은 얼마간 정치적 사회적 산물로서의 모습을 띤다. 하지만 과학 지식의 골간이 정치나 사회 구조로 인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과학의 본성에 대한 부차적인 측면일 뿐이다.

 

찰스 길리스피가 의도한 '객관성'이란 무엇인가?

과학은 어떤 사회적 환경 속에 존재하는 개개인들과 집단들에 의해 산출되지만, 역사적 과정 속에서 결국 개인의 인성과 사회적 환경을 초월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과학은 몰개인적이며 보편적인 것이다. 과학이란 객관적이며 개인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지식체계이지만 그들 자신에 관해서가 아니라 세계에 관하여 만들어지는 지식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 아는 데에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 과학은 그 방식은 아니다.

 

과학은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해 왔으며, 그 대가는 과학의 정식화된 내용과 서술들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목표, 목적, 적합성, 희망 등에 대한 고려를 제거하는 것이다. 과학의 중심적인 문화적 경향은 '자연의 외화'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과학은 감성의 차원에서 '소외'라는 결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과학은 양날의 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비록 지식이 위험할지라도 무지는 더욱 위험한 것이다. 과학의 후퇴나 퇴보를 통해 과학에 수반된 악을 감소시키려고 하는 것 보다는 과학을 보다 더 잘 이끌어 나감으로 이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서문(제임스 클럭 맥스웰의 강연-1871년 10월)

과학연구와 인간연구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마음의 움직임이 진리인가 오류인가를 논하는 지적인 활동 무대"가 있는가 하면 "분노와 정념, 악의와 선망, 격정과 광기 같은 격렬한 감정상태"의 인간성을 연구하는 무대가 있다. 과학연구자는 후자의 연구에 적합하지 않다.

 

"우리는 즐겁게 뛰어난 사람들에게 되돌아가서, 그들과 함께 이론적인 것이든 실제적인 것이든 고귀한 목적을 열망함으로써, 폭풍의 영역을 넘어서 청명한 대기로 올라갑니다. 그 곳에는 견해에 대한 그릇된 설명도, 표현의 애매함도 없으며, 오직 진리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지점에서 마음과 마음이 서로 접촉할 뿐입니다."

 

맥스웰의 강연은 과학연구자의 홛동무대를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성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청명한 대기와 같은 객관적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영역이다. 그리고 진리에 가장 가까운 영역이다. 그의 강연은 과학도들과 연구자들에게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며 과학에 대한 그 자신의 자부심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찰스 길리피스의 과학에 대한 확신과 그가 말하고자 하는 과학의 객관성에 그 맥이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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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회된 과학이 더 이상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고 전 인류의 재산이며 책임이므로 양날의 칼날을 지닌 과학을 올바르게 소유하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과학자와 과학세계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찰스 길리피스의 생각일까? 과학의 공은 자신들에게로 돌리고 그 과에 대해서는 모두가 책임지자고 하는 말이라면 이는 분명 독선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독선적인 것이든 아니든,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그의 저변에 깔려있든 그렇지 않든간에, 야누스적인 얼굴을 지닌 과학은 분명히 인류를 위해 길들여야 하는 대상임에는 틀림없다.

 

과학세계도 책임감을 가지고 이러한 문제에 직면해 나가야 할 것이다. 생명과 윤리등이 과학과 그토록 밀접한 관련을 가진 때는 이전에 없었던 듯 하다. 객관성만을 부르짖으면서 무한한 방향으로의 과학발전을 도모할 것이 아니라, 적절한 방향성을 인지하고 통제함으로, 최소한 인류의 멸망이라는 대파국으로 향하는 길에 과학이 촉매제가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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