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피천득/ 범우, <자전거여행> /김훈/ 생각의 나무

 

피천득 수필집 <수필>과 김훈의 에세이집 <자전거여행>

 

 

수필!

글쓰기에는 수필만한 것이 없을 듯하다. 온갖 주위의 사건이나 사물들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하여 글을 쓸 수 있으니 하는 말이다. 이렇듯 자유롭게 써 내려간 수필에는 글쓴이의 인격과 개성, 생각과 사상이 아무래도 은연중에 스며들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에는 피천득이 진하게 배여있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을 읽으면 소심하면서도 자상한 할아버지,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할아버지가 느껴진다. 그 할아버지는 딸 서영이를 누구보다도 사랑한다. 그 할아버지는 청초한 여성의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로맨티스트이다. 선생의 눈에는 더러움이라 보이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애써 그것을 피하고 아름다움만을 노래하려는 것일까? 선생의 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일 뿐... 아름답지 않다고 느낀 것을 소재로 한 유일한 예외는 <인연>에 나오는 아사코와의 세번째 만남일 것이다. 하지만 아니 만남만 못했던 만남조차, 아사코에 대한 선생의 아름다운 회상을 훼손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선생의 수필을 읽으면서, 그냥 읽어나가기에는 아깝다고 느껴졌다. 선생의 글을 아껴 하루에 하나씩 읽으면서 천천히 음미하고 싶었고, 방안 가득한 커피향에 취해듯, 수수하고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배여있는 유려한 문장에 취하고 싶었다. 

 

선생의 수필 중 <인연>이나 <유순이>와 같은 글은 남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스토리가 있는 선생의 글을 읽으면, 그것이 아주 짧은 에피소드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단편 소설 한편을 읽는 느낌을 준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그 때의 풋풋한 로맨스를 편안하게 그려낸 이야기는, 마치 그 이야기가 우리 자신의 이야기였던 것인양 느끼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우리는 피천득 선생의 글을 읽고 우리의 지나간 젊은 때를 추억한다. 기억은 지나간 시간의 두께만큼 희미해 지는 것이겠지만, 희미한 만큼 오히려 아름답고 순수해 보인다. 아픔과 슬픔은 시간의 안개에 가려 아련해지고, 추억은 다만 그리움을 불러 일으킨다.  

 

자전거 여행!

김훈의 글은 난해하다. <자전거 여행>에서 김훈을 읽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김훈의 사유의 방식이 어렴풋이 느껴지면서, 그 사유의 깊이에 감탄한다.

여행이란 움직임과 멈춤의 반복이다. 서로 상반되는 이 동작의 반복이 여행을 만들어 내듯, 김훈의 사유는 서로 모순되는 관념들을 하나로 묶어내려는 처절한 시도로 난해하다. 치명적인 봄의 관능을 노래하는가하면, 삶의 터전에 자리 잡은 무덤, 소가 매를 맞는 낙원등의 이야기는 양극단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자전거가 달리는 길은 이미 몸과 하나가 되고, 지친 몸을 잠시 의탁하는 곳에서 그의 사유는 시간을 거슬러 또 다른 여행을 한다. 먼 옛날 그 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며 서로 통합되기를 질기게 거부해온 것들의 교차점을 모색한다. 부석사에서 그는 신라를 대표하는 고승, 의상과 원효의 서로 상반되는 삶과 철학을 생각한다. 동해의 대왕암앞에 서서는 서로 대척점에 서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무기와 악기를 통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신라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기린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은 지리적 여행이면서 아울러 역사 여행이기도 하며, 그만의 독특한 사색 여행이기도 하다. <자전거 여행>에는 김훈의 모습보다는 그가 지향하는 곳을 보여준다. 자연과 역사속에 숨겨진 모순들을 한덩어리로 묶어내려는 그의 시도는 오르막을 헐떡거리며 오르는 그의 자전거처럼 힘에 겨워보인다. 아니 그의 시도를 쫓아가는 나 자신이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글은 감상을 표방하는 듯하나 논리를 따르고, 논리의 형식을 빌어 감상을 표현한다. 감상은 감상으로 받아들이면 되고, 논리는 그 논리를 따라 가면 될터이나, <자전거 여행>은 감상과 논리가 분할할 수 없는 한 몸을 이루고 있으니 따라가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래도 그의 글은 수정처럼 투명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훈은 아마도 자신만의 글쓰기를 실험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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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명성이 자자한 작가, 해마다 노벨상 후보로 손꼽히는 작가로 알고 있다.

그의 대표작 <상실의 시대>가 수작이라고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내가 처음 접한 그의 소설은 1Q84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책만을 통해서 판단해 보건데, 무라카미 하루키는 무의식중에 대중의 편협함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먼저 무카카미 하루키는 종교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아니 규모가 큰 대중 종교는 그의 화살을 비켜간다.  

1Q84에 나오는 종교는 '증인회'와 '신구'이다. 그는 이 두 종교집단 모두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묘사한다.

그는 왜 이 두 종교를 중심 기둥으로 삼았으며, 그가 종교에 대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무엇인가? 

어린 시절의 추억을 앗아 가버린 종교에 대한 반감인가?

 

또 하나는 특히 우시카와의 외모와 인간성을 연결하여 평가하는 방식은 지극히 편협하다. 이 사람은 극히 편협한 대우를 받는다.

단지 그의 외모가 이상하다는 것때문에. 그를 사악하게 몰아가는 것은 공정치 않다. 그의 사악함은 따돌림을 받는데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우시카와의 사악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외모로 판단하고 따돌리는 세상을 향해 손가락을 뻗어야 정말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련만.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 우시카와같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의 글은 어떤가?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필요없는 문장이 너무 많다는 느낌이다. 쓸 데 없는 수사들이 너무 지나쳐, 글이 늘어지는 것 같고, 중복되는 부분도 많다.

물론 한 번 만 읽고 판단하는 내가 잘못인지는 모르겠다.

하루키가 극찬한 위대한 개츠비...세번은 읽어야 그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그의 작품도 세반이나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을까?

쓸데 없는 부분을 덜어낸다면, 아마 그럴 수도 있을지...하지만 세번을 읽기에는 무게감이 떨어지는 듯...

 

그기 표현하려 했던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그는 1984년을 겨냥하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년, 브라더가 지배하는 세상, 브라더의 눈이 온 세상을 덮고 있는 세상, 권위적인 세상, 이러한 세상에서 벗어난 세계를 그리려 의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1984년의 세계를 벗어나 들어가게 된 세상 1Q84의 세계도 그다지 다른 것 같지는 않다.     

 

하루키의 소설은 아주 정적이다. 주인공들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의 사건들은 대부분 머리속에서만 전개되는 듯하다.  

덴고는 <공기 주머니>란 소설을 쓴 후에 크나큰 위험에 처한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덴고가 정작 실제 생활에서 겪는 위험이란 거의 없다. 

다만 우시카와가 방문하여 귀찮게 했을 뿐, 그 외의 어떤 위해도 가해지지 않는다. 다만 위협은 그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잠재적인 위협일 뿐이었다.

 

아오마메도 거의 방에 틀어박혀 지낸다. 하는 일이라고는 차가운 베란다에 앉아 있는 놀이터 미끄럼틀만 바라 보며 그를 기다릴 뿐, 능동성보다는 수동성의 정신이알까? 상황자체가 수동적이 될 수 밖에 없고, 상황은 필연으로 내달리며 해피엔딩으로 내달린다.

아오마메를 조종하는 노부인도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노부인의 심복인 다마루도 마찬가지...우시카와를 살해하는 장면에서만 다마루가 행동한다. 

심각해야 할 비밀 단체 선구에서도 움직임은 거의 관찰되지 않는다. 우시카와만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쏘다닌다.

작중 인물중 다이내믹한 인물은 없다. 그냥 상황만 있을 뿐이다.

행동이 없으니, 결국 소설을 이어나가는 것은 애매한, 때로는 의미없는 묘사들 투성이다.

언제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른 작품을 읽고서 나의 생각을 바꾸어야 할 지도 모르겠지만, 1Q84의 느낌은 바로 이런 것이다.

아마도 한권으로 충분했으리라...

 

자전거 여행/ 김훈/ 생각의 나무

 

<자전거 여행>

꽃피는 해안선- 여수 돌산도 향일암...

김훈은 겨우내 자전거를 타고 달려 달려 남해안에 도착한다. 겨울 장구를 벗어 버리고 가벼운 티셔츠로 꽃피는 해안선을 달리는 자전거, 책 속에서 봄 기운이 화락 달려든다. 어제는 봄 비 속에서 봄을 느꼈지만, 오늘은 책 속에서 봄을 느낀다. 김훈이 봄을 느끼는 방식은 정말 봄 스럽다. 김훈의 꽃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수 돌산도 해안선에 가득한 동백꽃 이야기. 그리고 매화, 산수유, 목련꽃 이야기. 이 꽃 이야기속에 봄을 대하는 김훈만의 독특한 시각이 숨어 있다. 

 

"돌산도 향일암 앞바다의 동백숲은 바닷바람에 수런거린다.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는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 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 버린다." 21쪽

 

 

 

"매화는 잎이 없는 마른 가지로 꽃을 피운다. 나무가 몸 속의 꽃을 밖으로 밀어내서, 꽃은 품어져 나오듯이 피어난다. 매화는 피어서 군집을 이룬다. 꽃핀 매화숲은 구름처럼 보인다. 이 꽃구름은 그 경계선이 흔들리는 봄의 대기 속에서 풀어져 있다. 그래서 매화의 구름은 혼곤하고 몽롱하다. 이것은 신기루다. 매화는 질 때, 곷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가지에서 떨어져서 당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21쪽

 

<매화> 

 

<꽃잎이 벚꽃처럼 날릴 때>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끊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이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23쪽

 

 

 

"산수유가 사라지면 목련이 핀다.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 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 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 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24쪽

 

 

김훈은 봄을 이야기하면서 꽃을 이야기한다. 누구나 봄을 이야기할라 치면 꽃 이야기를 빼 놓지 않는다. 

봄은 생명의 태동이며, 만물의 시작으로 누구나에게나 봄은 시작의 의미로 다가 온다. 그러나 봄을 대하는 김훈의 생각은 다르다. 

김훈은 봄을 시작과 끝이 있는 존재로 파악한다. 그는 봄의 종말을 이야기한다. 꽃의 죽음을 노래하고 있다. 생명의 부활을 찬미하는 이 봄에 말이다.

봄에 이런 사정없는 칼날을 들이댄 이가 또 있었을까?  하지만 봄도 가 버리고 만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김훈은 봄의 관능을 노래한다. 절대 고승의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던 감성의 선을 건드려, 사람의 냄새가 그리워 견딜 수 없게 하는 봄, 출가한 여승의 마음을 헤집어놓고 속세로 돌아서게 하는 봄의 관능을 이야기한다. 

 

13세기 고려 선종 불교의 6대 조사인 충지는 지눌 문중의 대선사였다. 충지는 초봄에 입적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평탄하구나. 너희들은 잘 있으라"고 말했다고 한다. 대 지팡이 하나로 삶을 마친 이 고승도 때때로 봄날의 적막을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인 지 산사의 어느 봄날 충지는 시 한 줄을 썼다.

아침 내내 오는 이 없어

귀촉도는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이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노래이다. 충지 대선사가 봄 산사의 마루에 앉아 햇빛 가득한 마당과 숲을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봄 기운이 숲에 넘실거리고, 나무들이 두런 두런 깨어나는 봄의 적막 속에, 아침 태양 빛은 마당에 가득했겠지. 봄을 준비하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분주하고, 발걸음도 논으로 밭으로 달려가지만, 반면 산사는 인적없이 조용했을 것이다. 귀촉도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인지 '귀촉 귀촉' 하고 자기의 이름을 불러대며 우는데, 아마도 선사 마음은 고향으로 달려 갔다보다. 도를 깨치는 선사도 한 순간 봄의 품에서 몽롱해졌나 보다.

 

 

설요는 7세기 신라의 젊은 여승이다. 아름다운 이 여승은 꽃피는 봄의 관능을 마냥 산사에 앉아서 견디기가 어려웠나 보다. 시 한 줄 써 놓고 절을 떠나 속세로 내려와 어느 시인의 첩이 되었다고 한다.

 

꽃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

 

그 때 이 여승의 나이는 스물하나. "이 여승이 견딜 수 없었던 생의 충동, 위태롭고도 무질서한 생의 충동의 주범은 봄이다. 7세기의 봄이나 13세기의 봄이 다르지 않듯, 올 봄 또한 다르지 않다. 꽃들이 해마다 새롭게 피었다 지고, 지금은 지천으로 피어있다." 김훈도 생의 대책없는 충동을 숨기고 있는 것이리라. 어찌 설요나 충지, 김훈만 그러랴.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김훈은 동백꽃 피어있는 여수 돌산도 해변 도로를 따라 달려 금오산 향일암에 이른다. 높은 암벽위에 자리한 향일암에 오르려면 간신히 한 사람만 지날 수 있을 만큼 좁은 돌틈 사이를 수직으로 가파르게 올라가야 한다. 꽉 끼이는 틈을 통과해 암벽위에 도달한 순간 갑자기 남해가 끝도 없이 무한히 펼쳐진다. 수직적 고양감과 수평적 무한감으로 가득한 향일암에서 김훈은 봄 바다를 만끽한다. 

 

 

한 권으로 보는 한국 미술사/ 박차지현 지음/ 프리즘 하우스

 

조선시대의 미술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고려시대는 불교문화가 융성했다.

그러나 조선은 유교적 이념으로 성립되었고

유교가 국가 경영의 기틀이 된 나라이다. 

그래서 조선시대는 유교문화가 꽃을 피운 시기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유교적 이념에 따라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틀잡혔다.  

예술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문화와 예술은 화려함과 과장을 피하고

소박하고 자연친화적인 것을 추구하는 유교적인 경향을 보인다.

화려한 색채를 쓰지 않는 수묵화,

무늬가 없거나 많지 않은 백자,

자연 재료의 특성을 최대한 살린 목공예,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건축과 조경등이

조선 미술의 특징이 되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미술은 회화였다.

조선 회화의 4대 거장은

조선전기의 안견, 후기의 정선, 김홍도, 장승업이다.

 

안견은 단 한편의 걸작으로 거장의 반열에 올랐는데,

바로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이다.

몽유도원도란 '꿈속에 노닐었던 도원(복숭아 동산) 그림'이다.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내력이 있다. 

 

세종의 세째 아들이었던 안평대군이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안평대군은 박팽년과 함께 온통 복숭아나무가 심어져 있는 어느 산 아래에 다다랐다.

산으로 들어가자 길은 끊어지고, 어디로 갈지 망설이고 있던 차에,

한 사람이 나타나 북쪽으로 돌아 골짜기로 들어가면 도원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따라 골짜기로 들어가니 높은 벽처럼 치솟은 산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여기 저기 복숭아나무가 심겨진 숲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마을의 집들은 텅 비어 있었는데, 싸리문은 반 쯤 열려 있고 토담도 무너져 있었다.

오직 시냇가에 빈 조각배만 물결에 이리 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안평대군은 박팽년과 함께 도원을 노닐다가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안평대군은 이 꿈을 꾼 후에 그것이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깊은 친분이 있었던 안견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그려달라고 했고, 

안견은 단 3일만에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이것이 조선시대 최고의 걸작 '몽유도원도'이다.

 

 

왼쪽 부분이 복숭아 나무가 심겨져 있는 인간세상이다.

산속으로 들어가자 기암괴석에 흐르는 물이 진경이다. 

어느새 길은 끊어져 갈 길이 묘연하다.

시내를 건내 북쪽 골짜기를 따라 들어가자 폭포에 다다르게 되고, .

그 뒤 골짜기로 들어서니 

도원이라, 무릉도원이 이런 곳이었던가?

복숭아 나무 숲, 그리고 인적이 없는 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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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 이윤기 / 열린 책들

 

서점에 꽂혀 있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고 설레는 마음, <월든>을 보았을 때도 이 같은 약간의 흥분을 느꼈던 기억이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읽는 데 여러날이 걸렸다. 아껴서 읽는 탓은 아니다. 읽기가 힘들었다고나 할까? 무의식중에 카잔차키스의 표현에서 은유를 찾아내려한다. 표현 하나 하나에서 주인공의 심정이나 작가의 은밀한 생각을 읽어내려는 의식이 책을 읽어 나가기 힘들게 한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 탓이려니 생각한다. 아무 생각없이 읽고 싶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두목과 조르바의 우정이야기, 서로 다르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두목은 물주이고, 조르바는 고용인이다. 두목은 30대, 조르바 60대? 아마 그럴 것이다. 두목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책으로 향한다. 동양의 종교에 심취해 있는 듯, 매일 불경을 읽으며 뭔가를 찾는다. 조르바는 삶에서 무엇을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 다만 삶속에서 삶을 즐긴다. 관습도, 도덕도, 종교도 그를 막아 설 수가 없으리만큼 그는 자유롭게 살아간다. 그에게는 원시의 처녀림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냄새가 난다. 두목은 조르바가 마음에 든다. 조르바는 두목이 가지고 있지 않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 자유로운 영혼을... 조르바는 책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진짜 생생한 삶을 살고 있는 삶의 화신인 것이다. 조르바의 삶, 조르바의 자유는 그저 모순 덩어리이다. 삶은 욕망이며, 자유는 욕망의 충족이며, 욕망의 상호 충족의 원칙만이 조르바를 구속할 뿐이다. 갈탄을 캐내려는 시도가 완전히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모든 것을 날려버렸을 때에도, 조르바는 춤을 춘다. 해변 모래사장에서, 두목도 함께 춤을 춘다.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건 없다. 실패도, 가난도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자유란 그런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반 종교적인 색채가 진하게 풍긴다. 신을 부정하는 듯한 느낌들, 불신. 부패하고 타락해져 가는 종교를 향한 혐오감일까? 절대적 자유를 찾기위해종교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일까? 신에 대한 완전한 부정일까? 아니면 신에게 던지는 질문일까?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관습, 도덕, 종교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삶의 모습을 허물어뜨리고, 자유로운 삶을 보여주려한다. 그는 두려워한다. 자유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지, 그는 확신할 수 없다.

 

<그 사람들이 눈을 떴을 때, 당신이 지금의 암흑 세계보다 더 나은 세계를 보여 줄 수 있다면.... 보여 줄 수 있어요?"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꿈이 짜낸 빛의 천이다. 보랏빛 바람에 둘러 싸인 구름... 이땅의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도, 이제는 암호 이상의 예언을 들려 줄 수 없다. 암호가 모호할수록 선지자는 위대한 것이다.> 92쪽

 

자유란 달콤한 꿀처럼 유혹적인 마력을 가지고 있지만, 자유가 진정한 삶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두목은 유보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목은자유를 갈망한다. 그래서 그는 자유의 삶을 사는 조르바를 좋아하는 지도 모른다.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선택할 자유와 능력이 있다면 자유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틀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비록 외면적으로는 자유롭지 않아 보이겠지만, 여전히 그는 자유인이다. 그러면 물고기가 물 속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스스로가 처한 틀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자유롭다고 느깐다면, 자유로운 걸까? 그것은 선택에 의해 자유를 획득한 것이 아닐텐데. 그것은 주어진 자유일텐데...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못하고 물에서 자유로운 것과, 물이라는 구속을 의식하면서도 그 가운데 자유로운 것중 어느 것이 더 큰 자유일까? 물고기가 물 밖 세상을 동경하여 물을 뛰쳐 나와 장렬히 죽음을 맞는다면, 그것은 그의 선택이므로 자유로웠던 것일까?

 

자유란 절대 선이 아니다. 자유란 상대적 선일지도 모른다. 자유란 상대적인 악일 수도 있다. 상대적이란 것은 필시 잣대가 요구되는데, 그러면 상대적 세계에서의 잣대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 생각난다. 자유를 한계지으려는 시도, 어차피 자유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일 뿐....

 

이 길을 내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바보들은 다 죽어 버려라> 카를르 아데롤드 지음/ 강미란 옮김/ 열림원

 

140명의 사람을 살해한 살인마의 이야기를 왜 쓰야했을까?

 

백수로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전직 뮤지션, 그는 귀찮은 존재인 옆집 고양이를 죽이고 나서 또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애완고양이의 죽음으로 그 동네에는 훈훈한 인간애가 발전된다. 애완묘를 잃은 아가씨에 대한 위로와 온정의 마음들, 그런 마음의 발로에서 개최된 아파트 주민들의 조졸한 모임. 하나의 모멘텀에 의해 세상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또 다른 애완동물 사냥을 시작한다. 연속적인 애완동물 살해사건으로 동네는 처음에는 더욱 더 단합이 되는 듯 보였지만, 차츰 차츰 동네는 뒤숭숭해지고 이웃간의 의심의 눈길과 반목등으로 인심은 황폐해져 간다.

 

고양이 살해범을 찾고 있던 아파트 관리인 노파 수잔은 마을의 문제 발생의 원인이 되어가던 중, 그의 실수로 인한 우연한 사고로 수잔할멈이 죽게된다. 수잔의 죽음으로 동네의 분란은 진정 기미를 보이고, 그는 짜증나는 한 사람의 죽음이 사회를 개선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이제는 사람 사냥에 나서게 된다. 마치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콜리니코프가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살해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했던 논리로 무장한 이 종결자는 주위에 있는 짜증나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제거해 나간다. 그는 짜증나는 사람들을 씹새라고 부르며 사람들을 처형하는데, 급기야는 아는 사람에게까지 그 마수를 뻗치더니, 아내인 크리스틴까지 희생 제물이 되고 만다. 

 

아내의 죽음으로 형사 반장 마리는 그의 집에 수사차 수시로 드나 든다. 그러나 반장은 차츰차츰 씹새에 대한 그의 이야기에 대단한 흥미를 갖게 되고, 그들은 함께 씹새에 대한 이론을 정립해 나간다. 씹새에 대한 정의를 내라고, 다양한 씹새에 대한 분류 작업을 해 나가며 그는 마리 반장과의 우정과 신뢰를 쌓아 나간다. 마리 반장을 알기 전, 처음에는 짜증나는 사람들, 제복을 입은 사람들, 권력을 오용, 남용하는 소시민들을 씹새라고 정의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마리 반장과의 교감을 씹새에 대한 정의를 확장하게 된다. 씹새를 길러내는 교육은 더 큰 씹새라는 것이다. 이로써 정치가, 기업가, 학자, 종교지도자등도 그의 씹새 목록에 포함된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처단한다. 

 

한편 동료와의 다툼으로 울화가 치민 마라 반장은 '짜증나는 인간들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 마라 반장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을 느낀다. 살해범이 누구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마라 반장은 그와 함께 경찰서를 향한다. 그는 반장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다. 

 

"시야가 흐려졌다. 온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권총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마라 반장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을 감겨 주었다. 나는 절망에 휩싸여 마라 반정 곁에 그렇게 앉아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갑자기 내 머리를 스치는 끔찍한 생각..... 태어나서 처름으로 별다른 이유없이 사람을 죽인 것이다. 내 몸 하나 지키자고 그렇게 사람을 죽인 것이다. 배신을 당해 억울해하는 씹새처럼 사람을 죽였다. 감옥에 가기 싫은 씹새처럼 사람을 죽였다. 나는 살인자였다."

 

왜 카를르 아데롤드는 <바보들은 다 죽어버려라>라는 소설을 쓰게 된 것일까?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시발점은 바로 텔레비전에서 어느 파리 시청 공무원을 본 날이었다. 그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아주 편리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전혀 현실성없는 그의 얘기가 나를 화나게 했다. 나는 텔레비져늘 부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선택의 기로에 섰다. 텔레비젼을 부술 것인가, 글을 쓸 것인가, 아니면 그 공무원을 죽여버릴 것인가. 나는 글로 대신하여 그를 죽이기로 했다."

 

분명히 주위에는 사람들을 짜증스럽게 하는 인간들이 존재한다. 모르고 하는 짓이든, 아니면 알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는 짓이든, 그런 인간이 존재한다. 사회의 하층부에서부터 상층부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 그런 인간이 있다. 혹시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닐까? 카를르 아데롤드의 <바보들은 다 죽어버려라>에는 그런 인간들을 나열하고 있다. 아마 이 글은 자신이 그러한 짜증나는 사람들에 속하는 지의 여부를 평가해 볼 수 있는 색인 목록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누가 자신은 그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이 글의 화자는 자신이 살인자가 아니라 종결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그리고 짜증나는 인간들은 도저히 갱생불가한 타고난 씹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자신도 그 씹새중의 하나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종결자가 아니라 살인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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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기원-한나 아렌트 지음/이진우 박미애 옮김/ 한길 출판사

 

한나 아렌트는 유대계 여성 정치 철학자로 전체주의 치하의 유대인 대량학살 문제를 깊숙히 파고 들었다. 자신이 유대인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한나는 어떻게 그런 끔찍한 학살이 가능하기나 한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족의 비극을 목격한 그녀는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음에 틀림없다.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학살의 배후를 파내고 그것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것이 그녀의 책임이라고 느꼈을까?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통해 금세기 완전히 새로운 정치체계로 등장하여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전체주의를 해부하고 있다. 히틀러의 나치 전체주의와 스탈린의 철의 장막 전체주의는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언제든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설 수 있다는 끔찍한 사실을 경고하려는 것일테다.

 

한나 아렌트의 다른 저작들 <인간의 조건> <과거와 미래 사이> <혁명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등에서 발전된 사상의 기초는 모두 <전체주의의 기원>에 놓여있다고 한다. <예루살렘의 아히히만>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도 히틀러의 추악한 범죄행위에 연루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 것이라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전체주의의 기원>은 제1부 반유대주의, 제2부 제국주의, 제3부 전체주의로 나누어져 있다.

제1부에서는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체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의 반 유대주의의 발전을 다루고 있다.

제2부에서는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의 기반이 된 인종사상이 어떻게 제국주의로부터 발전해 나왔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는 전체주의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유대인은 히틀러의 인종말살 정책의 최우선 희생자였다. 오랫동안 서구 사회에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반유대주의. 히틀러는 이 반유대주의로 대중을 선동하게 되는데... 도대체 이 반유대주의는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유대민족은 오랫동안 서구 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이방인으로 그들 자신만의 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소속되어 있는 사회에서 나름대로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가는데, 그들이 주로 종사하던 일은 금융업이나 전문직이었다. 특히 봉건시대 왕실의 재정을 맡아 관리하던 유대인들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재정에 긴밀히 관여하고 있었다. 국제 금융 그룹은 유명한 로스차일드가문 역시 정부의 재정을 담당하면서 국제적으로 그 세력을 키워나갔다고 한다. 반유대주의는 여기에 근거한 바가 큰다. 대중들이 왕정이나 정부들에 불신을 가지고 대항할 때면 언제나 유대인들은 왕실과 정부의 친구로 간주되어 대중의 미움을 받았다. 또한 유대인 금융그룹이 국제적으로 크지면서 유대인의 세계정복 음모론이 대두되면서 반유대주의 바람이 불기도 했다. 반유대주의는 이런 것을 바탕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또한 반유대주의의 일부 책임은 유대사회에 있었다.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고 방랑한 지가 그토록 오래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메시야를 기다린 것은 한편으로는 놀라운 일이기는 하다. 그런데 이를 가능하게 한 요인 중 한 가지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은 반유대주의를 역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반유대주의를 직면할 때마다 유대사회는 움추려들면서도 내부적으로 끈끈함을 공고히 해 왔던 것이다. 

 

게다가 문제는 유대인들이 금융업등을 통해 부를 쌓기는 쌓았지만 권력에는 욕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메시야를 바라보던 그들의 신앙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만의 나라를 설립할 메사야를 기다리고 있던 신앙때문에 세속 나라의 권력에는 무심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정치적 힘, 권력이 전무했던 유대인들은 사실 반유대주의의 위험에 무방비상태로 던져진 것이나 다름이 없는 입장이었다. 그들이 봉사하는 왕실이나 국가에서 보호를 해 주고 있기에 망정이지 만일 그 울타리가 사라진다면 굶주린 야수앞에 던져진 먹이나 다름이 없는 입장이었다. 유대인이 전체주의의 첫 희생물이 된 것도 이러한 연유가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한나 아렌트는 추리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유대종족 전체를 말살시키려는 시도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이러한 반유대주의와 결합한 다른 요인이 있었다. 바로 제국주의에서 유래한 인종사상이다. 산업혁명 이후 산업이 발달한 영국에는 오갈 데 없는 잉여자본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산업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잉여인력도 생기게 되었는데, 활로를 뚫어주지 않는 한 이 문제는 사회에 큰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의 일환으로 팽창주의를 표방하게 된다. 해외로 잉여자본과 잉여인력을 수출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서유럽국가들은 아프리카, 아시아등지에 식민지를 개척하게 된다. 이 식민지에 잉여자본과 잉여인력을 투입하여 수익을 산출하게 된다. 그런데 식민지를 관리하다 보니 식민지의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가 문제가 되었다. 식민지인들을 자신과 동일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도저히 그들을 수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의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인종사상이 등장하게 된다. 식민지인들은 다른 미개한 인종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수한 인종에 봉사해야 하는 열등한 인종인 것이다. 사실 오랫동안 유럽사회 자체내에서도 귀족들은 일반 시민이나 평범한 사람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혈통을 가지고 있는 우월한 인종이라는 사상이 끊임없이 이어져 온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사상이 한 발 더 나아가 인종사상으로 이어지는데, 이 열등한 인종은 동물과 같아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되었고 이것은 그들의 양심을 편하게 해 주었다.

 

대륙제국주의에서도 인종사상이 드러난다. 해외로 팽창할 입장이 안되는 동부 유럽에서는 국경을 초월하여 같은 종족으로서의 민족이 연합하려는 범민족운동이 발생한다. 범슬라브주의니, 범게르만주의니 하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사는 곳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다 하더라도 한 혈통에서 나온 종족이라면 같은 민족이라는 것이다. 이전에는 민족이란 것이 같은 언어, 같은 문화,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로 정의되었다면 범민족운동의 민족의 범위는 그것을 초월한다. 이러한 범민족운동은 타 종족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나타내게 된다.

 

그리고 제국주의의 유산 가운데 또 하나는 관료주의이다. 식민지의 백성은 본국의 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를 관리하는 관료들의 지배를 받는다. 이러한 관료들은 식민지 상황에 따라 필요한 법령을 자의적으로 만들어 식민지를 관리하게 된다. 식민지는 온전히 관료들의 지배하게 있게 되는 것이다. 제정러시아를 비롯한 많은 봉건국가들도 관료주의적 지배하에 있었다.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이나 관료들이 상황에 따라 법령을 만들고 시행하여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특징이 전체주의에 스며들어 가게 된다. 이렇듯 전체주의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그 전제들이 기반을 서서히 다지고 있었다.

 

제3부에서 다루는 전체주의의 정체는 한편으로 공포스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과연 그러한 체제가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전체주의의 대명사 히틀러와 스탈린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일반 국민에 대한 테러를 기반으로 성립하고 유지되는 체제가 전체주의이다. 일반적으로 권력을 잡기 위해 정적이나 반대자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일은 동서고금을 통해 있어왔던 일이기때문에 새삼스러울 것까지는 없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그리고 죄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일반 국민에게 테러를 가하는 체계가 전체주의라니 아찔하다.

 

나치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는 다윈의 자연의 법칙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쓸모없는 개체는 자연의 힘에 의해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열등한 종족, 없어져야 할 종족은 없어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며, 나치는 자연이 해야 할 일을 인위적인 테러를 통해 앞당기는 것이라 생각했다. 없어져야 할 첫 번째 희생물은 유대인들이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폴란드인등등...그런데 자연은 영속적이며, 자연이 존재하는 한 자연의 법은 영원히 시행되어야 한다. 유대인들을 제거하고 나면, 폴란드인...그리고 그 다음에는 또 누구, 그리고 나서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렇게 계속 자연의 법은 시행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그들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나치는 독일 국민들도 등급으로 분류하여 한 그룹씩 말살할 생각이었다니, 끔찍하다. 전체주의는 일반 사람들을 이러한 전체주의적 운동에 가담시키고, 전체주의적 통치에 순응하게 만들기 위해 영혼없는 인류의 생산에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완전히 다른 신인류의 출현을 바라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유하지 않고 복종하는 기계적인 인간을 만들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끔찍하다.

 

스탈린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의 역사의 법칙이다. 계급 투쟁으로 사라져야 할 계급은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의 법칙이며 역사가 끝나지 않는 한 그 과정은 계속되어야 한다. 즉 반복되어야 한다. 그래서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하에서는 언제나 끊임없이 사라져야할 대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대상이 더 이상 없다면 그러한 대상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서 심지어 이전에 전체주의 체제의 가해자가 마침내 희생자가 되는 순간도 오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면 그들은 이데올로기를 위해 불평없이 제물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신봉하는 논리는 깨어지면 안되기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희생물이 되면서 그 이데올로기를 지켜내는 것이다. 전체주의의 특징중 한 가지가 전제가 되는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모든 체제가 논리적으로 완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은 반듯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전체주의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희생자들은 완전히 산 자들의 세계에서 단절되고, 망각되어야 한다. 그들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전체주의 체제하에서는 강제수용소가 필수적인 것이 된다.

 

전체주의에 대해 읽으면서 이게 정말 그러할까? 히틀러와 스탈린과 그 신봉자들이 정말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한나 아렌트가 분석하다가 더 나아간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내내 일었다. 다시는 나타나서는 안 될 전체주의, 하지만 언제든지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의 손쉬운 해결책으로 전체주의에 눈길을 보낼 수 있는 가능성 사이 세계는 처해 있다. 한나 아렌트가 유대인 학살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나 자신은 전체주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 이런 비인간적인 체제가 존재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런 사악한 체제는 인간의 본성에 숨겨져 있는 사악함의 발로인가? 한 개인의 사악함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온 독일 국민들과 온 소련 국민들이 침묵으로 일관할 수 있단 말인가?

 

한나 아렌트는 이 책에서 인권에 대해서도 논하는데, 천부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난한다. 천부의 인권이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문명사회의 한 사람이 천부의 인권에 호소해야 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저 아득한 옛날 원시의 동굴에 살았던 미개한 원시인이 인간이라는 이유로 가지고 있었던 것과 똑 같은 인권에 호소해야 한다면 이는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영국의 철학자 버크는 천부의 인권보다는 차라리 영국인의 권리를 갖겠다고 했다. 실제로 1차세계대전 이후 민족국가가 형성되면서 수많은 무국적자들이 국경을 이동하게 되자 큰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그들은 인간으로 태어났기때문에 소유하게 되는 인권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라리 아무 쓸모도 없는 국적을 계속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한나 아렌트가 주장하는 것은 권리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정치라면, 정치를 해야 하는 것이며, 정치에 무관심하고 냉소적이 되는 것은 전체주의의 망령이 다시 살아나도록 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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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 지음 /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을 때, 묘하게도 생텍쥐베리의 <야간비행>이 생각났다. <야간비행>은 생텍쥐베리의 친구 기요메의 이야기를 모델로 하여 쓰여진 작품이다. 생텍쥐베리의 친구 기요메는 비행기 조난사고로 안데스 산맥에 불시착하게 되는데, 기요메는 생사를 넘나드는 8일간의 사투끝에 생존하여 귀환했다. 기요메는 안데스 산맥을 헤맬때, 추위와 배고픔의 고통에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하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그럼에도 그가 생존하여 귀환하게 된 것은 무엇때문일까? 기요메의 대답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생존한 빅터 프랭클의 이야기와 기묘하게 닮아있다. 기요메는 자기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동자를 생각하며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귀환하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기요메는 자신이 생존하여 귀환하는 것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고립무원의 살인적인 험란한 안데스산속에서도 살아 귀환할 수 있게 만든 것은 바로 이러한 생존동기였다. 

 

이 이야기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이럴 수도 있는 것이구나. 생각의 전환이라고나 할까? 전혀 내가 생각하지 않았던 관점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면서, 이제는 30년 가량의 세월이 흘러 잊혀졌을 법한 그 이야기가 다시 떠오르는 것은 그 때의 인상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말해준다. 빅터 프랭클도 독일의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귀환한 생존자이다. 빅터 프랭클을 죽음의 소용소에서 끝까지 살아 남게 한 것은 무엇일까?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은 그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최근에 밀란 쿤데라가 <무의미의 축제>라는 새로운 책을 냈다.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야만 한다'라는 말이 <무의미의 축제>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이다. 빅터 프랭클은 인생에 의미가 없다고 단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생에 의미가 없어지면 그 때부터 인간은 죽기시작한다고 말한다. 각 사람은 나름대로 인생을 살아야만 할 중요한 이유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말한다. 아니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살아갈 이유도, 희망도, 의미도 없는 사람은 생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쿤데라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에서 깨닫게된 사실들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대를 갖기 위해 때대로 자기 마음을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132쪽)

 

니이체의 말을 인용하면,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137쪽)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142쪽)

 

그리고 빅터 프랭클박사는 이러한 말로 자신의 체험담을 끝맺는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제 이 세상에서 신이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161쪽)

 

혹독한 시련끝에 생존한 빅터 프랭클 박사는 <로고테라피>라는 이론을 개발하였다.

"이 이론은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나가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맞맞춘 이론이다. 로고테라피 이론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보고 있다."  프로이트 학파에서는 '쾌락의 원칙'(쾌락을 찾고자 하는 의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아드리안 학파에서는 '우월하려는 욕구' 로 불리는 권력에의 추구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로고테라피에서는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중요시한다. 

 

이 이론을 정신의학분야에 적용하여 실제적으로 환자들을 치료해온 임상 결과들이 많이 누적되고 있다.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깨우치도록 만들어 정신병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실질적인 효과를 보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빅터 프랭클 박사의 로고테라피는 검증된 이론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전통적 가치관이 무너져 내리면서,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알 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현대 사회가 직면한 실존적 공허를 대처하는데, 빅터 프랭클 박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은 빛을 던져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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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중국사 3 / 김희영 편저/ 청아출판사

 

이야기 중국사는 술술 잘 읽힌다. 외울 것도 없고 그냥 이야기 읽듯이 줄줄 읽어내려가면 된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역사서라 역사의 개요을 알고 싶다면 이야기로 풀어가는 역사를 읽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나라>

이야기 중국사 3권은 송나라를 멸망시킨 원나라로 시작한다. 원나라는 징기스칸이 세운 몽골족의 나라. 칸이 통치하던 나라, 서방과의 교역의 문을 연 나라이다.

원나라는 철저히 한족을 배격했었다. 몽골인이 모든 요직을 차지하고, 색목인이 그 다음 서열로 중간 관리직을 하였다한다. 쿠릴라이 칸의 총애를 받은 마르코폴로도 색목인으로 원의 조정에서 일했을 것이다. 중국의 90%이상을 차지하는 한족을 전혀 등용하지 않고, 거기다가 한족의 유수한 중국사상이나 문화유산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초원을 떠돌았던 유목민족의 사고방식으로 거대한 중원을 다스리려 했다니, 원 제국이 오래 갈 수 없었음은 다 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원나라는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한 지 90년만에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원나라의 고려침입으로 고려는 전국토가 유린당하는 아픔을 겪었으나 최씨무신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결사항전을 하였지만,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후 삼별초의 대몽항전이 계속되었다. 원나라의 2차에 걸친 일본 원정은 태풍으로 실패하고 만다.

 

최근 텔레비젼에 방영되었던 '기왕후'란 사극에 탈탈이라는 인물이 등장했었는데, 그는 실제 역사상의 인물이었다. 탈탈이 재상으로 분전했었지만 이미 기울어져 가고 있던 원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는 없었다. 

 

원나라는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나라로서 동서양의 교역을 촉진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원대에 발명된 나침반이나 화약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후대의 발전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명나라>

명나라. 오랑캐의 나라를 물리치고 한족의 나라를 부활시키려는 한족의 꿈은 주원장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후 영락제때 정화로 하여금 대선단을 이끌고 동남아시아 일대와 인도양 일대를 항해하도록 하여 명나라의 국위를 선양하였다. 1421년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하여 그 이후 북경은 중국의 수도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고, 명나라의 주의가 이에 쏠리는 틈에 여진족의 세력이 강해진다. 누르하치는 여진족을 통일하여 중국을 침입한다. 만주족에 의해 설립된 청나라에 의해 명나라는 국운을 다하고 만다. 명나라는 태조 주원장이래로 17대 277년만에 멸망하게 되엇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세력이 부딛힐 때, 조선에서는 명과 청 사이에 줄다리기 외교를 행한 광해군이 있었고, 광해군을 이은 인조때 청의 세력을 무시하여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게 된다. 명분을 내세우는 것도 중요하긴 한데...결국은 명분도 실리로 챙기지 못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명대에는 동방의약의 원전인 본초강목이 이시진에 의해 출간되었다. 그리고 중국 고대 과학 기술 전서로 일컬어지는 송응성의 <천공개물>이 발간되기도 하였다. 명대의 사상가 이탁오는 삼강오륜에 바탕을 둔 봉건 윤리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사상을 가르쳐 당시 사람들로 부터 이단자로 취급을 당하였다. 그는 인간의 물질적 생활만이 사회의 윤리 내지 도덕을 결정하는 요소로서 백성들의 의식 문제를 떠나서는 윤리를 논할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청나라>

청나라는 여진족- 나중에는 만주족이라 개칭하였다-이 세운 나라로 중국은 또 다시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원나라와는 다른 지배정책을 시행하였다. 청나라는 만주족과 한족이 협동으로 정치를 수행하는 정책을 펴 나갔다. 고급관료는 대개 만주족, 한족이 반반씩 차지하여 상호보완하는 이중 체제를 채택하였다. 공용어는 만주어였지만 중국어를 곁들어 사용하였다. 지방행정은 모든 것을 중국인의 자치에 위임하는 방침으로 중국인에게 많은 지위를 할애하고 이를 감시하기 위해 만족족을 배치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청의 전성기가 지나고, 정치가 부패하고 사회적 모순등이 드러나면서 백련교의 난, 아편전쟁(1840), 태평천국의 난(1851)등으로 청나라의 무력함이 드러났다. 이후 청일전쟁에서의 배배로 열강이 중국으로 물밀듯이 진출함으로 중국 전토는 열강들에 잠식되기에 이르렀다. 1900년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 열강의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기도 하는 우여곡절끝에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선통제가 퇴위함으로 청조는 막을 내렸다.  

 

<중화민국>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손문의 삼민주의를 강령하는 하는 중화민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손문은 1912년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으로 취임하지만 곧 원세계에게 총통자리를 물려주게 되고, 원세개는 황제제도의 부활을 꾀하다 실패한다. 이후 각종 군벌의 세력다툼의 아귀 싸움이 되풀이 된다. 이러한 다툼 와중에 세계 열강의 중국에서의 이권 쟁탈전은 불붙게되고, 이에 불만을 가진 중국의 지식인, 학생, 노동자들은 외세배쳑운동을 벌이게 된다.

 

<중화인민공화국>

1924년 국민당 제1회 전국 대표대회가 열려 1차 국공합작이 성립되고, 1925년 국민당은 국민정부를 수립한다. 국민정부는 일본의 침략에 무저항주의를 택하고 오로지 공산당 타도에 중점을 두는 정책을 폈으나 서안 사건을 계기로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어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종결과 함께 국공합작은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후 국공내전에서 패한 국민당 장개석 정부는 대만으로 이동하고 1949년 모택동을 주석으로 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인간 역사는 끊임없이 권력을 쟁취하려는 전쟁, 싸움의 역사를 동반하고 있다.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을 몰아내기 위한 싸움도 나중에는 권력을 누가 차지하는가 하는 문제로 이어지고 만다. 그 와중에 수많은 힘없는 백성들이 죽어나간다. 인간의 통치의 끝없는 악순환, 그 고리를 끊어버릴 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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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문학동네

 

어른을 위한 동화 느낌? 인생의 여명기에 읽어야 할 책이기는 하겠지만, 여전히 인생의 황혼녘에도 유효한 이야기가 아닐런지. 산티아고라는 한 양치기 청년이 꿈을 찾아 기나긴 여행을 하면서 여러가지 가르침을 얻고 마침내 꿈을 이룬다는 상투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코엘료는 신비주의적인 감성과 성경과의 만남을 통해, 신비주의를 인생의 스승으로 승화시키는 동시에 성경을 신비주의에 동화시키는 연금술을 선보인다.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드러나 있는 신비주의는 서양의 합리적 과학이나 이성적 철학과는 궤도를 달리하고 있다.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세계, 마음과 우주의 합일을 통한 '자아의 신화'를 이룬다는 개념은 도저히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세계는 아니다. 합리, 이성에 기초를 세계는 보편 타당한 세계로서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세계이다. 그러나 코엘료가 <연금술사>에서 다루고 있는 세계는 그와는 다르다. 오롯이 그것을 느끼는 개개인만이 사적인 경험의 세계이다. 경험한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는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온 우주와 합일의 순간을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살렘의 왕 멜기세덱이라고 주장하는 한 노인이 산티아고에게 말한다.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48쪽)

 

자아의 신화란 무엇인가? 아마도 산티아고가 꿈 꾸었던 것, 그가 찾고자 했던 보물이 자아의 신화가 아닐까? 코엘료가 <연금술사>를 통해 독자의 마음속에 심어주려 했던 것은 '꿈을 쫓는 일을 그만 두지 말라. 계속 그것을 추구하는 한 온 만물은 당신이 그 꿈을 이루도록 도와줄 것이다.' 아마 이런 말이 아니었을까? 연금술사가 평범한 납을 가지고 금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우리네 평범한 인생도 금과 같은 인생, 자아의 신화를 완성한 인생, 꿈을 이룬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게다.

 

만약 자아의 신화를 향해 나아가지만 마지막까지 그 곳에 도달하지 못한 인생은 어떠할 건가? 코엘료는 그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꿈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은, 제자리에 안주해 있는 사람이 결코 알 수 없는 다양한 경험, 가르침, 아름다움을 느끼게 될거라고...꿈을 이루지 못한 인생도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라고...나름대로의 성공한 인생이라고...

 

이러한 인생을 가능하려면 먼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마태6:22) 마음의 보물을 깨달았다면 '행동'해야 한다. 왜 평범한 산티아고가 살렘왕 멜기세덱의 선택을 받아 자아의 신화를 찾기 위한 이른바 계시란 것을 얻게 되었을까? 왜 그는 사막의 오아시스의 연금술사를 만나 자아의 신화를 이룰 수 있는 가르침을 얻게 되었을까? 그는 애초에 꿈과 관련해서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꿈을 위해 행동하는 청년이었다. 부모는 산티아고가 신부가 되기를 원했지만 산티아고는 더 넓은 세상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 꿈을 위해 아버지를 설득시켜 안달루시아 지역을 돌아다니는 양치기가 된 것이다. 이러한 산티아고에게 새로운 꿈이 생겼던 것이다.

 

꿈은 행동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연금술사>의 막바지에 이르러 산티아고가 드디어 꿈에서 보았던 피라미드가 보이는 언덕에서 만난 병사는 산티아고와는 달랐다. 산티아고는 꿈을 찾아 스페인에서 바다를 건너, 사막을 건너, 그리고 운명적인 사랑도 사막의 오아시스에 남겨놓은 채, 이집트의 피라미드까지 왔지만, 그 병사는 산티아고와 동일한 꿈을 꾸었지만 결코 사막을 건너는 바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그 병사가 꿈을 좇아 사막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 스페인의 어느 평원에 있는, 양치기가 양떼를 몰고 와서 종종 잠을 자던 곳, 다 쓰러져 가는 교회에 찾아와 교회앞의 무화과 나무 아래를 파보았더라면 보물을 차지할 수 있었을 터인데...

 

 

<연금술사>의 초중반부의 안개처럼 희뿌엿게 보이지 않던 점들이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이해되는 것은 작가의 치밀성때문이리라. 다만 산티아고가 찾은 자아의 신화, 즉 꿈이 단순한 물질적 보물이었다는 것이 슬프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인 자아의 신화가 물질적 보물이었다니...차라리 이것은 하나의 은유로 받아들이고 싶다. 사실 <연금술사>에 나오는 왕, 집시여인, 영국인, 연금술사등도 모두 은유가 아니었던가? 그래도 나는 허무한 생각이 든다. 자아의 신화가 그것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울로 코엘료는 언어의 연금술사임을 부인할 수 없다. 다음의 나르시스(나르키소스)이야기는 코엘료의 작품인가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인가?

 

호수는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는 지금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지만, 그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저는 그가 제 물결 위로 얼굴을 구부릴때마다 그의 눈 속 깊은 곳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운 영상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죽었으니 아, 이제 그럴 수 없잖아요."

 

"오,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다!" 

연금술사는 감탄을 터뜨렸다.  (14~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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