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브레히트학회편/ 연극과 인간

 

바알

남자는 남자다

서푼짜리 오페라

마하고니 시의 번영과 몰락

린드버그들의 비행

동의에 관한 바덴의 학습극

예라고 하는 사람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

조처

 

 

희곡은 낯설다. 연극을 본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 본다. 아니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도 같다. 기억이 희미하다. 희곡을 읽은 일은 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그리고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이렇게 두 편을 읽었다. 그 외에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사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처음 읽을 때 황당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건 뭐지??? 다 읽고 나서 <고도>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밤으로의 긴 여로>의 불행한 가족 이야기는 인상적이긴 했다. 

 

브레히트의 희곡을 읽자니,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을 때의 난감함에 다시 마주친다. 그래서 읽다 말다, 읽다 말다 하는 통에 세세한 그림들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권을 다 읽은 시점에서 생각하면, 브레히트가 이러한 희곡을 통해 말하려고 했던 무언가가 있구나하는 것을 느낀다.

 

<바알>에서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시인의 방탕한 생활을 묘사한다. 천부적인 재능을 악용하여 여자를 농락하는 인간의 이야기이다.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당한다.

 

<남자는 남자다>는 꼬드김에 빠진 한 남자가 전쟁터에서 용맹을 보이게 된다는 이야기.

 

<서푼짜리 오페라> ???

 

<마하고니 시의 번영과 몰락> 아마도 미국의 라스베가스를 은유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글쎄 뭔가 자본주의를 풍자하는 내용인 듯...

 

<린드버그들의 비행> 비행기를 타고 처음 대서양을 가로 질렀던 린드버그의 이야기인데, 자연과의 사투에서 승리한 인간의 모습.

 

<동의에 관한 바덴의 학습극> 추락한 비행사들을 도와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토의하는 내용이다. 서로 돕는다는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평가하고 있다. 서로 도울 필요가 없는 세상을 꿈꾼다. 세상의 폭력으로 말미암아 도와야 할 필요가 생기고, 돕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폭력이라고... 사실 모르는 사람을 돕는 것은 위험성이 상존한다. 만일 어떤 사람을 도왔는데 이 사람이 살인마가 되어 다른 사람을 해친다면, 이 도움은 옳은 것인가? 내가 그 사람을 돕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다른 사람이 희생되는 일은 없었을텐데...

 

<예라고 하는 사람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 동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참신하다.  병든 동네 사람들을 위해 함께 먼 곳에 있는 의사를 찾아 가는 일행의 이야기이다. 일행중 한 사람이 아프게 된다. 이 사람을 데리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시 마을로 돌아가기도 어렵다. 관습에 따르면 이 사람을 내버려두고 가야한다. 그리고 아픈 사람은 이러한 조처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가지 길이 있다.

 

첫째,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황이 변하지는 않겠지만, 당사자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 자체가 필요하다. 또한 당사자는 동의하기 싫더라도 일반적인 관습에 의해 동의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면 어쩔 수 없이 동의하게 된다. 예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픈 사람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내 놓아야 한다.

 

둘째,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에서는 그와는 다른 상황이다. 동의를 구하는 절차는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당사자는 어쩔 수 없이 동의해야만 한다는 전통이나 관습에 반기를 든다.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관습에 의해 행동하지 않고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한다. 즉 아니오라고 말함으로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극 중에서 아픈 사람은 자신이 죽도록 버려지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른 일행들은 이 사람의 부동의에 동의하여 아픈 사람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간다. 새로운 행동 양식이 시작된 것이다.

 

어느 것이 옳은가? 어느 것이 바람직한가?

 

<조처>중국의 공산화를 위해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선동가들과 동행하는 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인간적인 감정에 휘둘려 인정을 베푸는 바람에 공산화 작업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된다. 그가 죽어야만 공산화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죽음에 동의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죽음에 동의한다.

 

이러한 동의에 의한 죽음은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겠다. 비인간적이다. 하지만 조직과 사회 즉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만 한다면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과연 무엇이 대이고 무엇이 소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대'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것도 어떤 인식의 테두리내의 일이라면, 다른 인식의 틀을 기준으로 보면 어떻게 될까? 아니면 그 인식의 틀을 거두어내버리면, 그래도 그것이 '대'일까?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것을 찾기란 쉽지 않다. 다 상대적일 뿐이다. 이 희곡에서 처럼 공산화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한, 그 틀에서 결정된 것이 절대적인 선 또는 '대'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절대적인 것일까? 그 무엇이 있기는 있을텐데...

 

브레히트의 희곡을 읽고 생각하게 된 점들이 있다고 해도, 희곡의 낯섬은 가시지 않는다. 단 상연할 연극의 시나리오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어 묘사에 있어 소설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 한계내에서 그 한계를 초월하는 무엇인가를 표현하려는 시도,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도 같은 노력이 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음에 놀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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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미셸 투르니에/ 김화영 옮김/ 민음사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에서 추천받은 책이다.

☞ 이윤기의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http://blog.daum.net/ccsj77/353

 

책을 읽다 보면 무슨 책을 읽을까하는 고민이 절로 해결되는 때가 있다.

책 속에 추천된 책, 그리고 책 속에 언급된 책들이 있기 때문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책의 행렬을 따라 가다 보면 어디로 가게 될까?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뱀처럼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될까?

그 끝이 나올 때까지 모든 책을 읽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지만, 그 걸음의 방향은 아마도 인류의 이성이 빚어낸 고전들로 향하지 않을까?

시간의 파괴성을 견디어 낸 책들, 인간들의 지성의 향연이라할 그런 책들 말이다.

그러면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는 어떤 책, 그리고 누구와 선이 닿아 있을까?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대니엘 데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복사판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로빈슨, 난파한 버어지니아호에서 혼자 살아남은 그는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다. 

무인도를 개척해 나가는 삶, 그리고 동반자의 등장. 딱 여기까지이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과 <로빈슨 크루소>가 닮은 것은.

 

대니엘 데포의 '로빈슨'은 동반자 '프라이데이'를 만난다.

'로빈슨'은 야생의 세계인 무인도를 개척하고, 프라이데이를 문명인으로 교화시킨다.

데포의 <로빈슨 크로소>은 야생을 이긴 문명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미셸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다르다. 그는 야만인 '방드르디'를 만나 교화받는다.

'방드르디'를 만나기 전까지 쌓아놓았던 문명은 파괴되고, 그는 야생으로 돌아가게 된다.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문명에 대한 야생의 승리의 증인이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에 맞닿아 있기도 하다.

미셸 투르니에는 레비스트로스의 강의와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유명한 인류학자로 <야생의 사고>,<슬픈 열대>와 같은 저서를 남긴, 구조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문명의 우월성을 자랑하는 서구의 지성들에게 야생 즉 반문명의 원시문화가 더 우월할 수도 있다고 일갈했다. 

 ☞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http://blog.daum.net/ccsj77/174

 

아마도 미셸 투르니에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 이러한 야생의 우월성을 담고 싶었을 것이다.

문명이 야생보다 우월한 것이 무엇일까?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문화는 야생을 갉아먹고 산다. 후손 대대로 살아야 할 자연을 파괴하고 자원을 고갈시킨다.

에른스트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을 통해 거대경제의 위험성을 지적한 바 있다.

 ☞ 에른스트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http://blog.daum.net/ccsj77/287

 

로빈슨도 끊임없이 스페란차의 생산력을 고갈시켜가면서 곡물을 생산해 낸다.

혼자서 사는 삶임에도 불구하고 창고에 가득 생산물을 쌓아 놓고도 또 더 많은 생산을 위한 계획과 실행으로 바쁜 삶을 보낸다.

만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먹고 살 만큼만 생산하고 거기에 만족한다면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까?

하나 더 가지려면, 하나 더 만들든지, 아니면 하나를 더 뺏어야한다.

그러나 하나 더 만든다는 것은 장차 올 미래세대, 우리의 아들 딸에게 속한 것을 빼앗는 것과도 같다.

 

필요한 하나의 것만 가지고, 잉여의 것을 탐하지 않는 것이 야생의 사고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자신들이 먹을 만큼만 사냥한다고 한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더 많은 사냥을 하는 것은 자연의 균형을 깨뜨리게 되고,

결국에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들의 삶도 파괴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명의 붕괴를 막고 지속적인 문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야생의 사고일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인류의 문명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미셸 투르니에는 철학자로서 철학과 소설의 융합을 지향했다고 한다.

무인도에서 타자없이 살아가는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에게 타자란 어떤 의미일까?

이러한 철학적 질문에 대한 철학적 생각거리도 던져주는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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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스콧 피츠제럴드/ 김욱동 옮김

 

읽지 말 걸 그랬나?

<위대한 개츠비>에 취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 단편선에 수록된 소설들은 모두 제2, 제3의 <위대한 개츠비>로 보인다.

문체는 여전히 차갑게 빛나고, 소설 속의 분위기에는 아름다운 슬픔이 배여있다.

그의 소설에는 여전히 데이지처럼 아름다운 소녀, 숙녀들이 등장하고, 

개츠비처럼 그녀를 사랑하고 동경하는 남자들이 나온다,

반짝 빛나던 사랑과 헤어짐, 시간이 흐른 후 해후. 시간은 모든 것을 색 바랜 추억으로 만드는 마술사이다.  

지나간 아름다웠던 젊은 한 때의 추억은 잃어버린 시간 속에 다시 갈 수 없는 슬픔으로 남는다.

"아무리 영원히 찾아 헤매더라도 잃어버린 4월의 시간은 절대로 되찾을 수 없다."

지나버린 청춘, 4월처럼 빛나던 그 시절은 돌이킬 수 없는 추억이다.

언제나 그대가 아름답게 남아있기를 바라지만, 시간을 바람처럼 갈대를 흔들고 어디론가 가 버린다.

 

이 단편선에는 아홉개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하나 하나 되짚어 되돌아 보면 제각각 다른 이야기임에도,

얼핏 생각할 때 다 비슷한 이야기로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내용이 뒤섞여 버린 그런 느낌이다.

그것은 모든 이야기들이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과 피츠제럴드 특유의 문체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아뭏든 수록된 작품은 다음과 같다  

다시 찾아온 바빌론/ 겨울 꿈/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 광란의 일요일/ 기나긴 외출/ 컷글라스 그릇/ 분별 있는 일/ 부잣집 아이/ 오월제

'다시 찾아온 바빌론'은 대공황으로 온 재산을 날린 주인공이 다시 회복해서 처형집에 맡겨둔 딸을 찾으러 온 남자 이야기

'겨울 꿈'은 골프장 캐디를 하며, 부잣집 딸을 사모하던 소년이 자수성가하여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는 이야기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시간'은 어릴 때 좋아하던 여자를 찾아가 엇갈린 사랑을 맛보는 이야기

'광란의 일요일'은 전도양양한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영화계의 인사들의 파티에 참석하여 벌어지는 이야기 

'기나긴 외출'은 정신병동에 있는 부인이 매일 남편을 기다리는 이야기.

'컷글라스 그릇'은 결혼 선물로 받은 컷글라스 그릇이 그 가정에 가져다준 파국에 대한 이야기,

'부잣집 아이'는 명문가에서 태어난 서민들과는 다른 종족으로 자란 남자 이야기,

'오월제'는 오월제의 축제가 한창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 절망에 빠진 남자의 파국,

 

'문학의 주제는 모두 동일하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했는가만이 다를 뿐이다.'라고 말한 김연수의 말이 떠 오른다.

모든 문학의 주제가 동일하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대동소이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듯 하다.

대부분의 문학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하지만 한 작품이 표현해 내는 사랑은 다른 작품에 표현된 사랑과는 다르다.

각각의 사랑법이 다른 것이다. 사실 사랑의 모양은 사랑하는 사람의 수 만큼이나 많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작품이란 독자들이 경험하지 못한 사랑의 모습을 그려내면서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닐런지? 

 

피츠제럴드의 사랑법은 투명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것은 전후 미국 재즈시대 상류계층의 정서를 반영하는 사랑일 것이다.

만일 그 사랑법은 우리네 사랑법은 아닐 것이라고 말하면 내가 사랑을 모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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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산문/ 문학동네

 

소설가 되기? 소설가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굳이 소설가가 되겠다는 원대한 목표 같은 것일랑 필요 없어. 다만 소설을 쓰면 되지. 소설?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냐. 그냥 써 봐. 쓰는 것이 중요하지. 많이 쓰는 것이 필요해. 그런데 쓸 때 몇가지 알고 있으면 좋은 소설을 쓰는 데 도움이 되지.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은 대충 이렇다. 아는 형이 추천해 주었더랬다. 글을 잘 쓰고 싶으면 읽어 보라고 하면서, 핍진성을 이야기하고, 설명보다는 묘사하는 것이 요령이라면서. 이 책을 읽고 자신도 소설을 써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그렇다면 이 책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나도 읽어 보고 싶었다.

 

'토고'라는 말에 평범한 사람은 위로를 받는다. 소설가 김연수는 '초고'를 '토고'라고 한다. 다시 읽어 보면 구토가 난다는 뜻이란다. 잘 나가는 소설가도 처음 쓴 글이 그렇게 부끄러울 만큼 조잡하다면, 그리고 초고를 고치고 또 고치고 고치면서 소설이 완성된다고 한다면, 범인들의 글은 오죽할까?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글쓰기 책은 글을 쓰고 싶도록 만드는 책이다. <제멋대로 써라> 또는 <뼈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라는 책은 둘 다 공통점이 있음을 뒤 늦게 깨닫는다. 요는 펜을 들고 써 내려 가라는 것이다. 주저하지 말고, 제멋대로 써도 괜찮고, 쓰레기같은 글을 써도 괜찮으니 말이다. <소설가의 일>도 같은 맥락이다. 글, 아니 소설을 쓰고 있는 순간, 그 소설이 명작이 될 지, 아니면 그냥 잊혀질 지, 아니 완성될 지 조차 알 수 없겠지만 쓰고 있는 그 순간만은 이미 소설가임을.

 

이연수는 몇가지 팁을 준다. 감정을 설명하려 들면 안된다. 마음 속 욕망도 마찬가지로 설명하려 하지 마라. 오직 주인공의 표정, 몸짓, 행동으로 그 욕망이 드러나도록 하라. 'A가 굉장히 화가 났다.'란 표현은 좋지 않다. 'A의 얼굴이 시뻘게 진다. 주먹을 쥔 손이 벌벌 떨린다.' 예를 들면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화가 났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주인공이 화가 났음을 보여주는 것이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이란 것이다. 독자의 생생한 감각에 호소하라.

 

"절망보다 중요한 건 절망의 표정 및 몸짓, 그리고 절망 이후의 행동"

 

<소설가의 일> 포스팅을 하려다 책 목차를 훓어보다 문득 눈이 멈춘다. '펄펄 끊는 얼음에 이르기 위한 5단계' 참 이상도 하다. 저렇게 딱 잘라서 몇 단계 이렇게 말하면 뭔가 아주 중요한 비결이 숨어 있는 것만 같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1. 생각하지 말자. 생각을 생각할 생각도 하지 말자.

생각하다 보면 정작 글을 시작할 수가 없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오르고, 어떻게 표현해야 하면 좋을 지 고민만 된다. "그러니 생각하지 말자. 일단 한 문장이라도 쓰자." 한 문장이라도 쓰고 나면 이제는 그 문장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표현을 달리 할 수 있을런지, 아니면 완전히 다른 식으로 쓰야 할 것인지...."이렇게 한 글자라도 쓰고 나면 우리는 비로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소설을 쓰겠다면 생각하지 말고 쓰고 나서 생각하자."

 

2. 쓴다. 토가 나와도 계속 쓴다.

"소설가의 첫번째 일은 초고를 쓰는 일이다. 그 초고를 앞에 놓고 이렇게 묻는다. 내가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쓸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해서 일단 모르는 것, 쓸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게 소설가의 두번째 일이고, 모르는 것을 알고 쓸 수 없는 것을 쓰는 게 세번째 일이다."

쓸 수 없는 것을 쓴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오랫동안 읽히는 책이 되기 위해서는 내용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문장이 좋아야 한다. 미래에도 읽힐 수 있는 명문은 어떻게 쓰는걸까? 지금 내가 쓸 수 없는 것을 쓰면 된다. 모든 위대한 소설가는 자신이 쓸 수 없는 것을, 몰랐던 것을 쓴 사람이다.

쓸 수 없는 것을 쓰기 전에 쓸 수 있는 걸 정확하게 쓰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3단계로...

 

3. 서술어부터 시작해서 자기가 토해놓은 걸 치운다.

문장을 손 볼 때는 서술어 부분을 최대한 줄여야만 한다. '~을 하다.'를 '~하다'로 바꾸어 진짜 동사를 드러낸다. 가능하면 동사와 시제만 남도록 서술어 부분을 단순하게 만든다. 이렇게 하면 문장이 명확해 지면서 글의 내용의 빈약함이 드러난다. 이제서야 내가 무엇을 쓰지 않았는지 알게 된다. 그래서 쓰지 않은 걸 채우기 위해 책상 앞에 앉는다. 하지만 그 순간 '토고'의 문이 열린다.

 

4. 어느 정도 깨끗해졌다면 감각적 정보로 문장을 바꾸되 귀찮아 죽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계속!

소설 속의 문장은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맡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맛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단어들로 이뤄졌다면, 소설 문장을 쓰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나눠줄 때 아름다워진다.'는 문장 보다 '다른 사람을 안으면 둘 모두 따뜻해진다'는 것이 소설의 문장에 가깝다.

 

소설 잘 쓰는 법 30초 강의

"삼십 초 안에 소설을 잘 쓰는 법을 가르쳐 드리죠. 봄에 대해서 쓰고 싶다면, 이번 봄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쓰지 말고, 무엇을 보고 듣고 맛보고 느꼈는지 쓰세요.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쓰지 마시고, 연인과 함께 걸었던 길, 먹었던 음식, 봤던 영화에 대해서 아주 세세하게 쓰세요. 다시 한번 더 걷고, 먹고, 보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언어로는 직접 전달되지 않든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우리가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건 오직 감각적인 것 뿐이에요. 이 사실이 이해된다면, 앞으로 봄이 되면 무조건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사람과 특정한 꽃을 보러 다니고, 잊지 못할 음식을 먹고, 그날의 날씨와 눈에 띈 일들을 일기장에 적어놓으세요. 우리 인생은 그런 것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설도 마찬가지예요. 이상 강의 끝" 

 

5. 소설을 쓰지 않을 때도 이 세계를 감각하라.

글을 쓰기전에 소설가는 생각하지 않고 감각한다. '감각한다'는 원고를 쓸 때 사용하고, '생각하다'는 교정할 때 사용한다. 감각해서 알아낸 단어와 표현으로 원고를 쓰고, 그 원고에 대해 생각하면서 새로운 단어와 표현으로 교정한다.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은 재미있게 쓰여있다. 그리고 쉽게 읽을 수 있다. 오래 기억해 두고 싶은 말도 있다.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정말 내가 할 수 있을까? 소설은 아니더라도 감각적인 글을 쓰는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메모한 글

 

우리가 욕망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신에 그 욕망을 가리기 위해 짐짓하는 말들이 바로 문학의 말들이다.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건 대사와 행동과 표정과 몸짓같은 것 뿐이다.

 

혹독한 겨울을 보내지 않은 자는 이 봄을 누릴 자격이 없노라. (이윤기)

 

문학적 표현의 본질은 진부한 말들을 새롭게 표현하는 걸 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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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1 / 국토종주 편

글. 사진 / 김남희 / 미래인

 

"걷다 보면 생각은 담백해지고, 삶은 단순해진다."

 

걷기 여행 전문가 김남희씨는 땅끝마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29일간 국토를 종단한 기록을 남긴다.

김남희씨는 여행도중 만난 아름다운 길, 숲, 사람들을 추억한다. 

 

여행도중 만난 순박한 사람들, 아직까지 인심은 남아 있구나 안도감이 든다.  

하지만 세월이 흘쩍 10년이 지났는데, 올해 2015년에도 그 인심은 여전할까하는 의문이 이는 내가 싫다. 

그 인심이 언제까지나 한결같기를 바래본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면서 끝까지 걸었던 정신은

여행의 낭만과 아름다움 속에 녹아들어 단지 스쳐지나가는 희미한 바람으로만 남아 흔적만 보일 뿐

<걷기 여행>은 걷고 싶은 원초적 욕망에 불을 붙인다.

 

도보여행이야말로 최고의 여행이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리고 마침 집 부근의 갈맷길을 걸으면서 걷기가 좋아지려는 차라 

걷기 여행이 더욱 마음에 와 닿는지도 모른다. 

 

'숨어있는 우리 흙길 열곳을 찾아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2부 <가을 흙내음의 즐거움>은 아름다운 흙길 열 곳을 소개하고 있다.

1. 울진 소광리 금강 소나무 숲, 우리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가는 길

2. 정선 자개길, 아라리 한 자락에 종일토록 굽이도는 길

3. 섬진강 따라 걷는 길, 새들이 날아 오르는 호젓한 강변

4. 정선 송천 계곡 백 리 길, 곳곳에 이어지는 아늑한 숲길

5. 대관령 옛길, 연인의 손을 잡고 걷고 싶은 길

6. 인제 곰배령, 꽃 진 자리에 만개한 단풍 터널

7. 영월 동강,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걷는 상쾌한 산행

8. 인제 아침가리, 원시의 계곡처럼 청량한 숲길

9. 홍전 명개리에서 오대산 상원사까지, 단풍잎 도배지가 깔린 흙길

10. 송광사 굴목지재, 잡목숲 스치는 바람 따라 걷는 길

 

참, 이 분 많은 길을 걷기도 걸었다. 걸었던 길과 사랑에 빠진 여자. 사랑 편지를 쓰듯 써 내려간 이야기. 나 또한 그 길을 걷고 싶다.   

여덟 개 길이 강원도에 있고, 나머지는 섬진강 따라 걷는 길과 송광사 굴목지재. 이 두 길은 전라도에 있다.

기회를 잡아 가까운 곳에 있는 이 두 길을 먼저 밟고 싶다. 

 

언젠가 섬진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며 하동 가던 길이 생각난다. 처음 가는 길이었지만 그 길은 오랜 친구처럼 정다웠었는데.

차로 휙 지났던 그 길이 이제서야 아쉽다. 

 

그런데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이어지는 길은 왜 그리울까?

배가 살살 아파온다. 그러면 선암사의 해우소가 그립다. 선암사쪽으로는 쳐다 본 적도 없건만.

선암사의 해우소에 가면 아픈 배가 다 나을 것 같아서.

선암사 해우소 이야기를 아마도 김훈씨의 <자전거 여행>에서 보았을까?

아니면 유홍준씨의 <나의 문화 유적 답사기>에서 보았을까?

정호승 시인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라고 했다고 하는데...

선암사의 해우소엔 무엇이 있길래 저 야단들일까?

 

이 두 곳을 마음 한 쪽에 챙겨놓는다.

먼저 부산의 갈맷길을 맛보고 나서.

 

"길 위에 홀로 설 모든 사람들에게 나바호족 인디언의 인사말을 건넨다. 호조니- 당신이 아름다움 속에서 걷게 되기를" 

 

밑줄

잡목 숲을 스치는 이 기막힌 바람소리, 두레박 가득 이 바람 소리를 찰랑 찰랑 넘치게 담아 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누군가의 귀전에 부어주고 싶다.

함께 걷는 그녀가 말한다. "풍경은 담을 수 있지만 소리와 향기는 사진에 담을 수 없어 아쉬워요." 사진에 담을 수 없는 것이 어찌 소리와 향기뿐일까? 어깨를 어루 만지는 따스한 햇살의 감촉도 담을 수 없고,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하다고 느끼며 깨어나는 내 생생한 감각도 담을 수 없다. 담을 수 없는 것을 담고자 하는, 남길 수 없는 것들을 남기고자 하는 어리석은 노력이 결국 시간일까?

 

따뜻한 슬픔 <홍성란>

 

차마, 사랑은 여윈 네 얼굴 바라보다 일어서는 것

묻고 싶은 말 접어 두는 것,

말 못하고 돌아 서는 것,

하필, 동짓밤 빈 가지 어둠 별에서,

소톱달에서 가슴 저리게 너를 보는 것.

문득, 삿갓 등 아래 함박눈 오는 밤  창문 활짝 열고 서서

그립다, 네가 그립다. 눈에게만 고하는 것.

끝내, 사랑한다는 말 따윈 끝끝내 참아내는 것,

 

 

물빛 1 <마종기>

 

정말 깨끗한 물이 될 수 있다면 그 때는 내가

당신을 부르겠습니다.

당신은 그 물 속에 당신을 비춰 보여주세요.

내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세요.

나는 허황스러운 몸짓을 털어 버리고 웃으면서,

당신과 오래 같이 살고 싶었다고 고백하겠습니다.

 

 

청년과 함께 이 저녁 <허수경>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스칠 때

한 사람, 또 한 사람을 흔들고 갈 때

터닌 곳, 꿰맨 자리가 아무리 순해도 속으로

상처는 해마다 겉잎과 속잎을 번갈아 내며

울울한 나무 그늘이 돌 만큼

깊이 아팠는데요.

 

 

길 <고은>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감자꽃 피는 길 <김점용>

 

오늘 하루 얼마나 걸었을까

지는 해의 부르튼 발바닥이 보여

문을 잠근 그대여

너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을테지

이 길의 두근거림

가도 가도 계속되는 흰 꽃들의 속삭임

 

 

        * 부산 서동의 작은 산 옥순봉에서 바라본 금정산, 그리고 옥순봉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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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 민음사

 

북 아프리카 알제리 해변의 모래 사장... 태양은 사정없이 내려 쪼인다. 그러나 아랑곳 없이 출렁이는 바닷물은 상쾌하다. 바다로 향하는 사람들은 달구어진 백사장 위를 겅중겅중거리며 달린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 송글 맺힌다. 눈썹가로 흐르는 땀방울이 눈가로 스며 든다. 눈이 따갑다. 저 놈의 태양...눈을 찡거리며 가늘게 태양을 치어다 본다. 

 

뫼르소는 살인의 동기를 해명하도록 요청받았을 때 '우스꽝스러운 대답인 줄은 알지만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어머니의 장례식날도, 총으로 아랍인을 살해한 그 날도, 예비 심문을 받는 날도, 재판이 진행되는 날도 어김없이 피부에 스며나오는 끈적끈적한 땀으로 몸은 너덜 너덜하다. 뫼르소가 사형을 당하는 날도 그럴 것이다. 뫼르소의 인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작열하는 태양의 숨막히는 열기는 떨어지지 않는 허물처럼 따라 다닐 것 같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의미가 있는 것은 무엇일까? 뫼르소에게는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 소설 전체에 걸쳐 의미가 있는 것, 중요한 것은 없다는 말이 집요할 정도로 반복되고 있다. 사랑이야말로 살아가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최소한 뫼르소에게는 그렇지 않다. 뫼르소는 야망도, 결혼도, 엄마를 사랑한 것도... 그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학생 때에는 그런 종류의 야심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학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 그러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던 것이다. 저녁에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그래도 좋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나하고 결혼을 해요?"하고 마리는 말했다. 나는, 그런 건 아무 중요성도 없는 것이지만 정 원한다면 결혼을 해도 좋다고 설명을 했다. ...마리는 결혼이란 건 중대한 일이라고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나는 "아니야"하고 대답했다." 51-52쪽

나는 엄마를 사랑했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거다.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다. 75쪽

 

그렇다면 뫼르소에겐 아니 <이방인>의 작가 카뮈에게는 무엇이 중요한 것이었을까? 죽음이다. 카뮈의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 신화]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란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 된다." 카뮈의 최대 관심사는 죽음이었다. 이 소설 속에서도 주인공 뫼르소는 사형 집행보다 더 중대한 일은 없다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흥미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사형집행을 보러] 갔고, 돌아오자 아침에 먹었던 조반의 일부분을 토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아버지가 좀 역겹게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은 이해가 되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사형 집행보다 더 중대한 일은 없으며, 요컨대 그것이야말로 사람에게는 참으로 흥미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것을 어째서 그 때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일까!  122쪽

 

카뮈는 사형반대론자였다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아마도 카뮈가 죽음을 이야기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삶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리라. 사형집행을 당하는 사람에게도 최소한 삶에 대한 희망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제시하는 사형 방법론에는 어이 없는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삶의 희망이라는 것이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어이없어 보이는 주장은 수형자가 사형이라는 비인간적인 제도에 어쩔 수 없이 정신적으로 동의하고 협력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부조리함을 고발하고 있는 것 같다.   

  

예컨대 또 어떤 때는 법률의 초안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형법체계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사형선고를 받은 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임을 나는 알아차렸다...단두대의 칼날을 사용할 경우 결함은 그것이 아무런 기회도, 절대로 아무런 기회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수형자의 죽음은 결정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처리가 끝난 일이며 확정된 배합이요 성립된 합의여서 취소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만에 하나 어쩌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있으면 다시 할 뿐이다. 그러므로 난처한 일은, 수형자로서는 기계가 아무 고장없이 작동해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내 말은, 바로 그것이 결함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수형자는 정신적으로 협력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탈없이 진행되는 것이 그에게 이로운 것이다. 123쪽

 

그렇다면 정말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 무슨 의미가 있길래 살아야 하는 것일까? 뫼르소는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개인의 죽음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 걸까? 죽든 죽지 않든 세상은 그냥 무심할 뿐이고, 달라질 것도 없는데... 뫼르소는 사형 선고를 받고 상고한다.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마음속에서 용솟음치는 삶에 대한 무서운 욕망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상고에 대한 기대를 가진다. 하지만 상고가 받아들여진들 어차피 죽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사형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국은 죽어야 할 인생이 아니냔 말이다. 뫼르소는 혼란을 느낀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상고가 기각되어도 아무렇지도 않아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 스스로 모멸감을 느낀다.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결국, 서른 살에 죽든지 예순 살에 죽든지 별로 다름이 없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 어떤 경우에든지 당연히 그 뒤엔 다른 남자들 다른 여자들이 살아갈 것이고 여러 천년 동안 그럴 것이니까 말이다. 요컨대 그것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 지금이건 이십년 후건 언제나 죽게 될 사람은 바로 나다. 그 때 그러한 나의 추론에 있어서 좀 거북스러웠던 것은, 앞으로 올 이십년의 삶을 생각할 때 나의 마음속에 느껴지는 저 무서운 용솟음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십 년 후에 어차피 그러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내 생각이 어떠할까를 상상함으로써 눌러 버리면 그만이었다. 죽는 바에야 어떻게 죽든 언제 죽든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그러므로(그리고 어려운 일은 이 '그러므로'라는 말이 나타내는 모든 추론을 잊지 말도록 명심하는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내 상고의 기각을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다. 126-127쪽

 

하느님, 종교는 죽음에 직면한 사람에게 의미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 많은 사형수들은 죽음 직전에 사제를 만나고 신을 찾고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는다. 사제는 뫼르소를 도우려고 노력하지만 뫼르소는 단호하게 그 도움을 거절한다. 뫼르소에게는 그것도 역시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 것이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지금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사후의 세계는 그의 관심 밖이다.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 점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느냐고 묻기에 나는, 그러한 것을 자문해 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내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내가 관심이 없는 것이었다. 128쪽

 

뫼르소는 사제와의 대화 도중 폭발한다. 뫼르소는 속 마음을 폭풍처럼 쏟아 놓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죽음에 임박한 즈음 그의 내부에서는 무엇인가 터지고, 그 터뜨려짐은 절규가 된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송두리채 솓아낸다. 가장 확실한 것은 죽음 뿐이다. 모든 것이 죽음 앞에서는 무의미할 수 밖에 없다. 숙명처럼 다가 오는 죽음은 모든 것을 부조리하게 만들어 버린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죽음의 불길한 바람이 항상 곁에서 냄새를 풍기는 삶은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가? 사람들은 이 엄연한 진실을 무시하고 모르는 체 살아간다. 이 풀 수 없는 부조리를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삶을 어떻게 할거나?

 

그 때, 왜 그랬는지 몰라도, 내 속에서 그 무엇인가가 툭 터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목이 터지도록 고함치기 시작했고,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기도를 하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사제복 깃을 움켜 잡았다. 기쁨과 분노가 뒤섞인 채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마음 속을 송두리째 쏟아 버렸다. 그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다. 그렇지 않고 뭐냐? 그러나 그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 한 가치도 없어,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그에게는 없지 않으냐? 보기에는 내가 맨 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 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나는 이렇게 살았으니, 또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을 했다. 그러니 어떻단 말인가? 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내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저 신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 온 것만 같다. 아무것도, 아무 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그 역시 그 까닭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 불어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그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운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나와 더불어 그처럼 나의 형제라고 자처하는, 특권 가진 수많은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알아듣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 가진 존재다. 세상엔 특권 가진 사람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다른 삶들도 또한 장차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그 역시 사형을 선고 받을 것이다. 그가 살인범으로 고발되었으면서 자기 어머니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받게 된들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말인가? 살라마노의 개나 그의 마누라나 그 가치를 따지면 매한가지다. 자동인형 같은 그 작은 여자도, 마송과 결혼한 그 파리 여자나 마찬가지로, 또 내가 결혼해 주기를 바라던 마리나 마찬가지로 죄인인 것이다. 셀레스트는 레몽보다 낫지만, 셀레스트나 마찬가지로 레몽도 나의 친구라고 한들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마리가 오늘 또 다른 사람의 뫼르소에게 입술을 내바치고 있은들 그것이 어떻다는 말인가? 이 사형수야, 도대체 알기나 하느냐? 미래의저 밑바닥으로부터...이런 모든 것을 외쳐 대며, 나는 숨이 막혔다. 133-136쪽

 

먼 미래에서 불어 오는 암울한 바람이 실제 현실이 되었을 때에야 뫼르소는 이제까지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의 실체를 깨닫는다. 왜 그토록 모든 것에 냉소적이었는지, 왜 모든 것을 '의미가 없다. 가치가 없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 지를 깨닫는다. 발악에 가까운 소동이 끝난 후 뫼르소는 오히려 평온함에 잠긴다. 이 평온함 속에서 뫼르소는 또 다른 것을 깨닫는다. 그는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인생은 언젠가는 가게 되어 있는 것인데, 무엇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희망도 없지만 두려움도 없다. 뫼르소는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다. 뫼르소는 참으로 '희한한 평화'를 느끼며 세계의 무관심이 정답게 느껴진다. 그 순간 뫼르소는 언제나 자신이 행복했으며 지금도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나가 버린 뒤에, 나는 평정을 되찾았다. 나는 기진 맥진해서 침상에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눈을 뜨자 얼굴위에 별이 보였으니 말이다. 들판의 소리들이 나에게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밤 냄새, 흙냄새, 소금냄새가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 잠든 그 여름의 그 희한한 평화가 밀물처럼 내 속으로 흘러 들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이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 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 같았었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잇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 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133-136쪽

 

처음 <이방인>을 읽었을 때에는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 소설이 어떻게 노벨상을 수상할 정도의 대단한 작품인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더 읽고 났을 때는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건조해 보였던 문장들이 오히려 습기 빠진 대기를 통해 비치는 별처럼 초롱 초롱함을 느꼈고, 어지러워 보였던 생각의 조각들이 짝을 맞추어 가면서 커다란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비록 풍경화가 아닌 추상화인 듯 하지만... 이 소설의 의도를 글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펄떡이는 심장을 감지한 것만 같았다. 아마도 작가도 소설의 형식을 빌리지 않고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지나 간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추상화는 죽음이 아니라 삶을 그린 것이라고 강하게 느낀다. 이방인 뫼르소의 마지막 절규와 희한한 평온 가운데의 독백은 두고 두고 곱씹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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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 / 황선미 장편동화

 

딸애가 빌려온 책이다. 가끔은 초등 5학년 딸아이가 보는 책도 읽는다. 밤 12시경에 잡은 책을 놓을 수가 없다. 다 읽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으나 진한 여운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잎싹'은 제 한 몸을 돌리기에도 빡빡한 양계장 케이지 안에서 알을 낳아야만 하는 암탉이다.  잎싹은 향기나는 아카시아 잎이 피고 지는 안 마당을 동경한다. 그리고 알을 품어 새끼를 갖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 이룰 수 없는 꿈이다.  

 

     마당을 나온 암탉

 

 

잎싹은 죽은 닭들과 함께 구덩이에 버려지지만 다행이 청둥오리 나그네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그러나 안마당 암탉의 텃세로 마당에서 쫓겨난다. 잎싹은 숲속에서 주인없는 알을 발견하게 되고, 그 알을 품게 된다. 그것은 청둥오리 나그네의 알이었다. 알을 낳은 어미는 족제비에게 물려갔고, 아빠 청둥오리는 잎싹과 알을 보호하기 위해 제 몸을 족제비에게 내 준다. 무사히 알을 깐 잎싹은 새끼가 청둥 오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잎싹은 안 마당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고 새끼 '초록'이와 함께 자연에서 살기로 마음을 굳힌다. 

 

자연은 자유를 주었지만 또한 생명을 위협하는 족제비가 있는 위험천만한 곳이다. 안 마당 밖으로 나온 잎싹은 족제비를 따돌리기 위해 끊임없이 거처를 옮겨다닌다. 그러나 영원히 족제비를 피해다닐 수는 없는 법, 잎싹은 족제비와 마주치고, 족제비는 새끼 초록이를 물고 가는데, 눈에 불이 난 잎싹은 모성의 본능으로 족제비에게 달려들어 뒤엉켜 부리로 무지막지하게 쪼아댄다. 잎싹의 예상치 못한 공격으로 눈을 하나 잃은 족제비는 새끼를 내버려 두고 도망을 치고만다. 잎싹은 야생 닭으로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어느 날 하늘의 뒤덮은 한 무리의 청둥오리 떼가 연못을 찾아 온다. 잎싹의 새끼 초록이는 본능적으로 청둥오리 떼와 함께 하려고 한다. 자신을 떠나려는 초록이를 보고 잎싹은 쓸쓸해 진다. 초록이는 청둥오리떼의 따돌림에도 불구하고 그 무리에 속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쓴다. 그러다 청둥오리떼의 파수꾼이 되어 그 무리와 함께 하게 된다. 어느 날 저녁 갈대숲을 지켜보고 있던 잎싹은 족제비가 숨어 사냥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청둥오리들이 잠자리를 잡으려는 것을 알게된다. 가장 먼저 자리에 내려 앉는 파수꾼은 족제비의 딱 알맞은 먹이가 될 것이다. 잎싹은 자기의 새끼가 절체절명의 위험에 처한 것을 알게 된다. 잎싹은 온 힘을 다해 언덕을 뛰는지 구르는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황급히 날개짓 퍼덕이며 언덕을 내려와 족제비에게로 달려간다. 새끼를 보호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잎싹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잎싹은 언젠가 보아 두었던 족제비의 굴에서 족제비의 어린 새끼들을 물고 나와 족제비를 위협한다. 발에 물컹하게 잡히는 부드러운 그 생명을 죽이겠다고...어미 족제비는 사정을 한다. 타협은 이루어지고 잎싹의 새끼 초록이는 무사하다.

 

청둥오리들이 겨울을 지나고 떠날 때가 되었다. 잎싹의 새끼 초록이도 청둥오리떼와 함께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입싹을 찾아 온 초록이는 하늘을 몇 바퀴돌며 인사하고는 무리에게로 날아간다. 잎싹은 그래야만 한다는 건 이해하지만 쓸쓸함은 어쩔 수가 없다. 넋을 놓고 있던 잎싹은 족제비가 자신의 앞에 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할 바를 다했다고 느낀 잎싹은 때가 다 되었다고 생각한다. 잎싹은 이제 자신의 몸뚱이가 족제비의 어린 새끼들의 밥이 되고 그렇게 족제비들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잎싹은 자신의 몸을 기꺼이 족제비의 이빨에 맡긴다. 잎싹은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훨훨 날고 있다. 저 아래에 잎싹을 물고 가는 족제비가 보인다.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으면서 울컥해 지는 순간도 있었고, 스쳐 지나가는 생각도 많았지만, 글로 쓰자니 소중하게 느껴졌던 무엇인가가 빛을 잃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앞선다. 아마도 책을 일고 난 후의 안타까움과 여운을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아니면 뭔가 숨겨져 있는 그 무언가를 발견해 내지 못했음을 느낀 때문일까? 생각이 무르익어 흘러 넘칠 때까지는 그냥 내 버려 두는 것이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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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S. 콜린스 / 이창신 옮김/ 김영사

 

프랜시스 S. 콜린스,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일했었다. 그는 물리학과 화학을 공부했지만, 결국 의학에서 자신의 길을 찾았다. 콜린스는 불가지론자였다가 무신론자가 되었고, 27세에 유신론자가 된다. 그는 신의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조사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조사해 보지도 않은 문제에 대해 특정한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과학자로서 올바른 처신이 아니라는 점도 생각하게 된다. 그는 신에 대한 의문에 대한 답을 들어보고 찾기로 한다. 그런 와중에 C.S. 루이스의 책을 접하게 된다. 그 속에서 그는 자신이 신에 대해 품었던 많은 의심과 회의가 논리정연하게 설명되어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신을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책은 과학자로서 어떻게 신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었는지 자기 고백이다. 그가 신의 존재를 확신하게 만든  것은 "도덕법"의 존재이다. 인간에게는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선천적인 감각이 있다는 것이다. 그 도덕법의 존재는 신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그를 이끈다. 

 

그리고 그는 신의 존재와 관련된 형이상학적인 질문들, 즉 신은 단지 욕구 충족을 위해 만들어진 희망사항이 아닌가? 종교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그 모든 해악은 어찌하려는가? 자애로인 신이 왜 세상의 고통을 내버려둘까? 이성적인 사람이 어떻게 기적을 믿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시도한다.

 

또한 우주의 기원과 관련하여 신의 개입이 없었다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른바 '미세조정'이라는 문제도 언급한다. 생명체의 기원과 DNA의 연구를 언급하며 경외감을 표시한다. 그러면서 신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진화론 조차도 신의 존재를 지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최고의 유전학자로서 진화론을 굳게 신봉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모든 과학적 진실들은 종교에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신의 존재를 설명하려는 네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첫번째는 무신론과 불가지론이다. 두번째는 창조론이다. 이른바 '젊은 창조론'이다. 세번째는 '지적설계론'이다. 콜린스는 이 모든 선택지를 거부한다. 그가 제시하는 네번째 대안은 '바이오로고스'이다. '유신론적 진화' 이랄까, 아니면 '진화론적 유신론'이랄까? 그는 신이 진화라는 과정을 통해 모든 것을 창조하였다고 믿는다. 이것이야말로 진화와 창조를 모두 포용하는, 다시말하면 과학과 종교를 아루르는 화해의 장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콜린스는 유전학적으로 볼 때 진화는 확실한 과학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창조한 신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과학과 종교의 화합을 꿈꾸고 있다. 신의 존재 증명은 과학의 한계를 벗어난 일이며, 과학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그는 아인쉬타인의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한다. "종교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며, 과학없는 종교는 장님이다." 그는 종교과 과학의 화해를 모색하고 있다.  

 

밑줄 친 부분들....

 

있을 법한 것과 증명된 것 사이에 커다란 틈이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우리는 뛰어 넘기가 겁나 바보처럼 서 있다가

우리 '뒤에서' 땅이 꺼지는 것을, 설상가상으로

우리의 세계관이 무너지는 것을 본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든다. 말씀으로 뛰어들자.

닫힌 우주를 여는 말씀으로.

p37 (쉘던 베너컨의 소네트에서)

 

신은 희망 사항이라는 주장을 완전히 뒤집어 볼 수도 있다. 인간 특유의 보편적인 그러한 갈망이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애초에 왜 존재하겠는가? 루이스는 이번에도 이를 매끄럽게 설명한다. "욕구를 충족할 수 없다면 생명체는 아예 욕구를 가지고 태어나지도 않았다. 아기는 배고픔을 느낀다. 당연히 음식이라는 게 있다. 새끼 오리는 수영을 하고 싶다. 당연히 물이라는 게 있다. 인간은 성적 욕구를 느낀다. 당연히 성행위라는게 있다. 만약 세상 어떤 경험으로도 충족할 수 없는 욕구를 내 안에서 발견한다면, 나는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졌다는 말이 가장 그럴 듯한 설명이 된다. p44 

 

"나를 끊임엇이 존경심과 외경심으로 가득 채우는 게 두 가지 있는데, 그것들에 더 오래 더 진지하게 의지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밖으로는 별이 총총한 하늘이, 안으로는 도덕법이 그것이다." p63 (임마누엘 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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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신영복 지음/ 돌베개

 

<책은 도끼다> 박웅현의 책 제목이다. 아주 인상적인 제목이다. '철학은 망치로 한다. 완고한 인식의 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이다. 중세인들은 알콜로 견뎠다. 최면제인 알코올이 각성제인 커피로 바뀌면서 근대가 시작되었다."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어떤 체계내에서 작업하는 것과 그 체계밖에서 판단하는 것"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호프스태터의 <괴델,에셔, 바하-영원한 황금고리>도 생각난다. 물속에서 살고 있는 물고기가 물을 좀 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어떤 체계내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체계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호프스태터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많은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체계, 그 이전에는 전혀 체계로 인정받지 못했던 체계를 인식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체계가 존재하고 사람들이 그 체계를 떠나야 한다고 설득시키는 일에 종종 생애를 바친다."라고 지적했는데, 아마도 신영복님이 그런 소수의 사람이 아닐까 한다.

 

             담론           책은 도끼다            괴델 에셔 바흐(상)(까치글방 150)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체계는 인식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생활공간이 되었다. 이 체계내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대부분에게 그것은 좋고 나쁘고의 판단 대상이 아니다. 다만 거기에 맞추어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체계 자체를 생각하는 사고방식도 있다. "우리가 의지하는 이론이 현실과 모순된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대체로 두가지의 대응 방식을 취합니다. 첫째 실사구시의 대응방식입니다. 현실에 비추어서 그것의 해답을 모색하는 방식입니다. 탁상의 이론이 아니라 현실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방식입니다. 이론과 현실이 불일치될 때 현실 중심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 실사구시입니다. 강화학에서는 이러한 실사구시의 방식을 '물리'방식의 대응이라고 합니다. 강화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진리'방식의 대응입니다. 이것은 이론의 준거를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비근한 예로 경제 불황이라는 현실과 경제 이론이 차질을 빋을 때 실사구시적 대응방식은 현실 경제를 중심으로 구조 조정에 나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경제를 살리는 방식이 현실의 물리를 중심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진리 방식의 대응은 '경제란 무엇인가?" "경제는 왜 살려야 하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경제'라는 개념의 준거를 재구성하는 방식입니다. 해고와 법정관리를 통해 경제를 살린다는 것이 과연 '경제'의 근본적 개념과 일치하는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경제를 살리는 이유는 사람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개념 자체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것을 진리 방식의 대응이라고 합니다.'물리'방식의 대응입니다. 'Here and Now' 그리고 How가 물리 방식의 실사구시라면, 'Bottom and Tomorrow'와 Why가 진리 방식의 대응입니다. 양명학과 강화학은 근본을 천착합니다."

 

현실이라는 틀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또한 현실이라는 틀 자체를 다시 성찰해 보는 보다 근본적인 대응방식이 있다. 완고한 인식의 틀을 깨뜨리고 새로운 틀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와야만 자신을 둘러 싸고 있던 알 껍질을 바라 보듯이, 그리고 우물안의 개구리가 우물을 벗어나 우물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듯이, 상위의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자신이나 자신이 속해 있는 인식의 틀을 성찰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이 "깨닫음" 이라는 말은 신영복 <담론>의 주된 흐름 중 하나이다. 그의 강의는 깨닫게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가르치는 것은 깨닫게 하는 것, 이미 알고 있었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불러내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결론이다.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다. 다른 사람이 설득하거나 주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깨달음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공감을 불러 일으켜 냄으로 깨달음을 얻도록 도와 줄 수는 있다. 무심함을 깨우치는 것이 그의 강의의 목표이다. "예술의 본령은 우리의 무심함을 깨우치는 것이다." 라는 말에 비추어 보면 그의 강의는 예술이어야 했다.

 

'관계'라는 말은 <담론>의 또 다른 화두이다. 근대 사회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에서 시작된다. 나의 존재의 확실성을 기초로 출발하는 자기 인식 및 세계 인식은 결국 자신의 존재를 중심으로 모든 것들이 판단하게 한다. 이러한 인식체계는 현대 사회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더불어 사는 삶 보다는 존재와 존재의 충돌에서 비롯된 치열한 경쟁속의 삶, 그리고 삶의 비인간화는 근대 존재론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이런 존재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담론으로 '탈존재', '존재의 해체'가 이야기되고 있다. 핵심은 '존재'가 아니라 '관계'라는 것이다. 관계가 거세된 존재는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이 관계에 의해 규정되어진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관계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인문학 공부는 세계와 인간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사이의 관계를 깨닫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사회가 '홀로 존재하는 존재들의 집합체가 아닌 상호 공감이라는 관계속에 형성된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공부의 시작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것이다. 우리가 일생동안 하는 여행중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다. ...또 다른 먼 여행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다." 공부란 머리에서 시작한다. 배움이 첫번째 고리이다. 하지만 머리 속에 든 지식은 마음 속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 마음에 이른다는 것은 공감한다는 것이며 공감이란 대상에 대한 동질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마음으로 함께 하는 것이다. 대상과의 관계의 형성이다. 이제는 마음만이 아니라 몸도 함께 하는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바로 발로의 여행이 그 다음 과정이 된다. 발로의 여행은 실천으로의 먼나먼 행로이다.

 

책읽기와 공부가 어떠해야 하는 지 자문해 보게 된다. "책은 혁명이다'라는 말이 있다. 책은 혁명을 불러 일으킨다. 가슴과 발에 변화를 일으킨다. 공부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갈 길을 찾는 작업이어야 할 것이다. 책 속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길은 내가 만들어 나가야 한다.  

 

* 메모해 놓은 글귀

추억은 세월과 함께 서서히 잊혀 가다가 어느날 문득 가슴을 찌르는 아픔이 되어 찾아 오는 것이다.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한다." (맹자)

"대교약졸"  최고의 기교는 졸렬한 듯하다. (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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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놀트 하우저/ 백낙청 박성완 옮김/ 창비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2

 

생존만이 지상 과제였던 시대가 있었다. 또한 지금도 생존만을 당면 과제로 여기는 계층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예술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이들에게도 아름다움을 느끼고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원초적인 본능이 없을리야 없겠지만, 어차피 예술이란 풍요와 더 깊은 관련이 있을 듯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술의 발전은 풍요로 말미암은 바가 크다. 예술가들은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예술 소비자들의 구미에 맞추어 작품을 만들어 왔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권력을 정당화하고 공고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예술을 사용해 왔다. 그 때는 예술이 권력에 봉사하던 시대였다. 시민사회가 등장하고 권력자에 버금가는 부를 쌓은 시민들이 나타남에 따라 이들도 예술의 소비자가 된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시민들의 요구에 예술도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게 된다. 역사의 변화에 예술은 큰 영향을 받지만, 반대로 예술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그렇게 크지 않은 듯 보인다.

 

시간의 흐름을 역행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도 없다는 면에서 예술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고 형식화하는 시대가 있었고, 권력의 시녀였던 때도 있었다. 예술이 소비자의 요구에 맞추어 예술품을 생산하는 때가 있었다면, 오늘날 자의식이 강한 예술가들이 표방하는 '자기를 표현하는 예술'은 고객의 요구와는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자기 성취가 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미를 바라보는 시각이 극적으로 변해 왔음을 보여준다. 객관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에서 주관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예술, 뭔가 근본적인 것을 형상화 하려는 시도, 더 나아가 '자기 표현' 자체를 미라고 생기에 이르렀다. 예술의 본래 목적이 미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자신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을까? 예술의 미래는 어떠할까? 미에 대한 관념은 어떻게 바뀔까? 순환의 고리 속에서 돌고 도는 것일까? 아니면 무한의 시공간을 직전하는 것처럼 계속 새로운 미적 개념이 등장하게 될까?  

 

하우저가 제시하는 르네쌍스의 개념이 학교에서 배웠던 것과 사뭇 다르다. 르네쌍스는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획기적인 역사적 시대라고 배웠던 것 같은데, 신 중심의 중세세계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로의 전환, 고대 인간본위의 세계로의 복귀를 뜻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하우저는 르네쌍스도 시대의 흐름의 일부분일뿐 칼로 무 자르듯이 자를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아마 하우저의 말이 맞을 것이다. 역사란 원래 시대 구분을 허용하지 않는 연속체이다. 시대의 구분이란 역사가들의 인위적인 재단일 뿐이다. 역사란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 질 수 밖에 없다. 역사는 입체적이다. 앞에서 보는 모습 다르고, 뒤에서 보는 모습이 다를 것이며, 위에서 보는 모습이 다르고 옆에서 보는 모습이 다를 것이다. 아래에서 보는 모습은 더 다를 것이다. 보는 시각이 다양한 만큼 역사 해석도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다양한 역사 해석 심지어는 서로 상반되는 역사 해석은 역사를 올바로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일까? 긍정적으로 보자면 다양한 해석의 종합은 객관적 실체에 다가가는 길이 될 수도 있겠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읽으면서, 왜 책을 읽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고 한다. 책을 많이 읽고 교만하게 되는 일을 경계하는 말이다. 진정한 책읽기는 지식을 쌓는 것에 있지 않고, 그 지식을 통해 세계와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는데 있는 것이리라. 세계와 인간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바탕으로 인생을 살아가며 세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사람이 책을 잘 읽은 사람이리라. 신영복씨의 <담론>에 '한 발로 뛰기'라는 표현이 있다. 책을 읽기만 하는 것은 한 발로 뛰는 것과 같이 부자연스러운 것이란 말이다. '두발로 뛰기'위해서는 책을 읽는 행위와 자기 변화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예술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예술이 역사와 분리될 수 없듯이, 우리의 살아가는 삶도 역사와 분리될 수 없다. 결국 우리의 삶은 예술과도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책의 예술 이야기로 부터 삶을 읽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끊임없는 상호작용, 관계속에 지속되는 삶은 어떤 원리,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예술을 변화시키는 것이 역사라면, 역사는 무엇을 동력으로 흘러가는 것일까? 불가해한 시공간을 부유하는 역사는 인간 본성을 추진력으로 삼는다. 그 본성 중에서도 역사에 유달리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 돈과 명예와 권력을 향한 지독스러운 집착이다. 인간사의 가장 비참한 역사적 사건들이 바로 그 집착 때문에 발생하였다. 비참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 본성의 그 추악함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이게 쉬운 일은 아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 집착에서 벗어나는 과정이어야 한다. 

 

 

제1장 르네쌍스

 

1. 르네쌍스의 개념

자유주의적 르네쌍스관/ 관능주의적 르네쌍스관/ 국민적 민족적 특징들/ 형식원리로서의 통일성/ 중세와 르네쌍스의 연속성/ 르네쌍스의 합리주의

 

2. 꾸아뜨로첸또의 시민적 예술과 궁정적 예술의 감상자층

중세말기의 이탈리아의 계급투쟁/ 길드를 둘러싼 투쟁/ 메디치가의 지배/ 자본주의의 발전/ 지오또와 뜨레첸또/ 르네쌍스의 궁정예술/

꾸아뜨로첸또의 시민적 자연주의와 양식의 혼합/ 자연주의의 변모/ 꾸아뜨로첸또 후기의 미술/ 길드의 예술활동/ 헌납자에서 수집가로/

메디치가의 예술보호/ 르네쌍스의 궁정문화/ 예술감상자와 여러 계층/ 르네쌍스 문화의 엘리뜨층

 

3. 르네쌍스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

르네쌍스의 아틀리에 활동/ 예술 시장/ 길드로부터의 예술가의 해방/ 예술가와 인문주의자/ 새로운 미술이론/ 예술가의 전설/ 르네쌍스의 천재 개념과 독창성에의 의지/

스케치에 대한 평가/ 예술의 자율성/ 예술의 과학화/ 전문화와 다면성/ 인문주의의 사회적 가원/ 인문주의자들의 소외

 

4. 친꾸에첸또의 고전주의

예술중심지로서의 로마/ 고전주의와 자연주의/ 르네쌍스의 형식주의와 규범성/ 깔로까가티아

 

제2장 매너리즘

1. 매너리즘의 개념

매너리즘과 고전주의/ 매너리즘의 발견/ 자연주의와 정신주의/ 매너리즘과 바로끄/ 매너리즘과 고딕

 

2. 정치적 현실주의의 시대

외세지배하의 이딸리아/ 근대 자본주의의 시작/ 종교개혁/ 카톨릭의 개혁운동/ 미껠란젤로 / 현실주의 정치의 이념/ 마끼아벨리/ 뜨렌또 종교회의와 예술/

종교개혁과 예술/ 반종교개혁운동과 예술/ 매너리즘의 예술이론/미술아카데미 이념의 전개/ 아마추어 비평의 문제/ 피렌쩨에서의 매너리즘/ 매너리즘의 공간묘사/

띤또레또/ 그레꼬/ 브뢰겔

 

3. 기사도의 두번째 패배

세르반떼스/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 세익스피어의 정치적 세계관/ 셰익스피어와 기사계급/ 작가와 패트런/ 셰익스피어의 관객층/ 엘리자베스 시대의 민중극장/

셰익스피어적 형식의 전제조건/ 셰익스피어와 인문주의 희곡/ 셰익스피어의 자연주의. 셰익스피어의 매너리즘

 

제3장 바로끄

1. 바로끄이 개념

인상주의를 통한 바로끄의 재평가/ 뵐플린의 근본개념들/ 통일성의 원리/ 예술사의 논리/ 우주적인 세계감정

 

2. 궁정적 카톨릭적 바로끄

근대적 교회예술의 성립/ 바로끄 시대의 로마/ 절대군주제/ 프랑스의 귀족/ 프랑스의 궁정예술/ 고전주의/ 아카데미/ 왕실의 매뉴펙쳐

아카데미즘/ 공인 예술과 비공인 예술/ 시민계급과 고전주의/ 근대적 심리학의 시초/ 쌀롱

 

3. 시님적 개신교적 바로끄

플랑드르와 홀란드/ 홀란드의 시민적 문화/ 시민적 자연주의/ 시믽거 예술감상자층/ 홀란드이 미술품 매매/ 홀란드 화가의 경제상태/ 루벤스와 렘브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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