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lywood Science 

30편의 문제적 영화로 본 현대 과학 기술의 명암 할리우드 사이언스

김명진 지음/ 사이언스 북스


종교가 진리 근원으로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 역할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종교는 과거의 영화를 잃어버리고 있으며, 과학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사실은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과학적 사고방식은 가장 믿을만한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과학은 인류가 처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과학 만능주의의 생각도 만연해 있습니다. 

 

 

일반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에 대한 이러한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은 사실에 근거를 둔 절대적 진리라고 받아들이고 있던 나에게 과학의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은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였습니다. 게르하르트 뵈르너의 <창조자 없는 창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과학적 사실은 절대적 진리가 아닙니다. 과학은 진리를 찾아  나아가는 여정일 뿐입니다. 과학적 패러다임은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해 갈 것입니다. 진리에 더 근접하기 위한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면서 말입니다.

 

☞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고 http://blog.daum.net/ccsj77/45

☞ 과학혁명의 구조소개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72915546

과학혁명의 구조

 

 

레비 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는 과학적 사고와는 다른 사고 체계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 야생의 사고체계 역시 정교하며 깊은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과학적 사고만이 가장 우월한 사고체계라는 서구인들의 편견을 무참하게 깨어버립니다. 분명한 것은 과학이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와 과학의 만남! 그것은 동반자적인 만남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긋난 만남이 되기도 합니다. 과학은 장미빛 미래를 약속합니다만, 영화는 예언자적 역할로 과학에 대해 경고의 소리를 발합니다. 과학의 한계을 지적하며 과학의 오만함을 경계합니다. 미래 사회가 직면할 과학적 디스토피아적인 상황에 대한 각성을 촉구합니다. 과학에 대한 맹신을 경고합니다. 

 

 

<할리우드 사이언스>은 과학을 소재로 한 영화를 소개하면서, 과학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합니다. 어떤 영화들은 과학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과학이 가져올 끔찍한 미래의 가능성, 즉 핵전쟁으로 인한 파멸, 방사선으로 인한 돌연변이가 가져올 위험, 온난화로 인한 대재앙 등을 경고합니다. 또 다른 영화들은 과학이 직면한 윤리적인 문제를 부각시킵니다. 인간복제로 야기되는 윤리적 문제, 최첨단 감시 체계의 등장으로 인한 인권의 침해, 권력이나 금권에 휘둘리는 과학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 다양한 과학자들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 책 <헐리우드 사이언스>는 과학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폭주하는 과학기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합니다.  

 


소개된 영화와 그로 부터 이끌어낸 담론들입니다. 

 

1부 책, 우주, 컴퓨터 - 20세기 거대 확학 기술의 명암

1. 뎀! - 핵실험과 핵전쟁의 그늘에 숨은 죄의식과 공포

2. 아이언 자이언트 - '정치'와 '기술'에 대한 엇갈린 태도

3. 핵전략사령부 - 핵무기, 인류 절멸에 대한 강력한 경고

4. 차이나 신드롬 - 핵발전소 사고 속의 무기력한 과학 기술자

5. 왕립우주군-우네아미스의 날개 -  "What-If"의 세계, 순진한 우주 비행의 열망

6. 필사의 도전 - 냉전, 마초주의, 유인 우주 비행의 미혹

7. 콘택트 - 과학과 종교, 과학과 비과학의 흐릿한 경계

8. 명왕성 파일 - 과학의 역사성이 지닌 무게

9. 누가 전기 자동차를 죽였나 - '순결'한 기술과 '오염'된 사회

10. 시리아나 - 석유: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11. 극비계획로지 - 여성과학 기술자가 역사에서 지워지는 방식

12. 에이아이 - 60년대적인, 너무나 60년대적인

13. 컨버세이션 - 감시 기술 속에 갇힌 과학기술자의 자화상

14. 인사이더 - 비밀주의 과학 속, 공익 제보자의 고단한 삶

15. 매트릭스 3부작 - 참신한 발상과 확장된 전개, 그리고 안이한 결말


2부 환경과 생명

21세기 과학 기술의 과제

16. 프레데릭 백의 선물 - 생태주의 담론이 주는 감동과 한계

17. 미래소년 코난 - 거대한 독재적 기술 vs  소규모의 민주적 기술

18. 정글 속의 고릴라 - 과학을 하는 '여성적 방식'은 과연 존재하는가?

19. 시빌액션 - 독성 폐기물 유출 피해에 맞서는 지역 주민의 활동

20. 투모로우 - 유용한 '교육적 도구'인가, 현실 도피적 왜곡인가?

21. 리애니메이터 - "미치고, 나쁘고, 위험한" 과학자의 전형

22. 뇌엽절제술사 - 사회 문제에 대한 '기술적 해결책'의 한계

23. 천성적으로 집착이 강한 - 과학(자)은 어떤 일을 하는가?

24. 브라질에서 온 소년 - 대중적 상상력 속의 인간 복제

25. 아일랜드 - '세속화'된 과학, 시니감이 거세된 복제 인간

26. 블루프린트 - '현실적'인간 복제의 근 미래상

27. 가타카 - 다가올(온) 미래, 다가오지 않을 미래

28. 플라이 - 과학자, 괴물, 유전 공학

29. 미믹 - 통제를 벗어나 진화하는 괴물

30. 카우보이 비밥 극장판 - 새로운 프랑켄슈타인, 나노 기술


과학은 기본적으로 윤리, 비윤리를 따지지 않습니다. 윤리적이지 못한 연구, 비윤리적인 방식의 연구, 또는 과학 기술의 비윤리적 사용등은 현재에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그 자체의 힘으로 폭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이를 통제할 수단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윤리, 도덕, 의무등을 배제하고 무한정한 자유를 과학에 부여할 수는 없기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과학을 길들여야 할까요? 종교와 철학의 역할이 여기에 있습니다. 과학에 있어 무엇이 윤리적이며 무엇이 비윤리적인지를 판단하는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적 동의를 그 근거로 하든지, 아니면 종교의 도덕을 바탕으로 판단한다든지, 어쨌든 폭주하는 과학 기술을 길들이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죠. 

 

 

영화는 재미있는 소일거리이기는 하지만, 또한 알게 모르게 예언자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즐기면서도 이러한 성찰의 지혜를 갖게 된다면 이석이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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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디샤의 여섯 번째 선물> 아흐멧 위밋 지음/ 이난아 옮김

 

여행은 준비가 반이다라고 생각하고 터키를 알기 위해 집은 책이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과 아흐멧 위밋의 <파디샤의 여섯 번째 선물>입니다. <파디샤의 여섯 번째의선물은 어른을 위한 동화입니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초등 4학년 딸애에게 읽어보라고 주었더니 재미있게 읽더군요. 한 터키의 신문에서는 "이 책을 읽을 만한 연령의 자녀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사주세요. 아마 당신이 먼저 읽게 될 겁니다." 라고 소개했네요. 


 

파디샤는 이슬람 교를 믿는 나라의 군주입니다. 한 나라에 베풀기를 좋아하여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훌륭한 파디샤가 있었습니다. 그는 칭찬받기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의 충직한 신하이자 친구인 총리대신은 파디샤가 이 나쁜 버릇을 고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총리대신은 "폐하보다 너그러운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파디샤와 총리대신은 파디샤보다 너그러운 사람을 찾아보려고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에서 그들은 다섯명의 기이한 사연을 가진 사람을 만나서 그들의 기구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첫번째 사람은 장님인데, 놀랍게도 매일 장터에서 그의 목덜미를 힘껏 내리치는 사람에게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말하며 금화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두번째 사람은 보석상인입니다. 그는 매일 장터에서 진귀한 황금달걀을 경매에 붙이고서는 고가에 황금달걀이 낙찰되자 마자, 그것을 쇠절구에 빻아 공중으로 날려보냅니다.


세번째 사람은 대장장이입니다. 그는 매일 일을 시작하려다 말고, 갑자기 벽으로 뛰어들어 머리를 부딪히고는 피를 흘리며 쓰러집니다.  


네번째 사람은 뮤에진입니다. 뮤에진은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시간을 알리기 위해 기도문을 읽는 사람입니다. 그는 정오 날마다 기도 시간을 알리기 위해 사원으로 가다가 첨탑의 꼭대기를 바라보고는 기쁨에 역력한 표정으로 갑자기 첨탑의 계단을 황급히 뛰어 올라갑니다. 그러나 조금 후 그는 아주 허탈한 표정으로 어깨를 죽 늘어뜨린 채 밖으로 나옵니다. 


다섯번째 사람은 모자장수입니다. 일주일마다 정성껏 만든 유명한 모자를 시장에서 흥정을 하는 도중 무언가를 보고 '날 떠나지 마시오.'하고 외치며 묘지까지 죽어라 달려가서는 두 개의 무덤 앞에 엎드려 기절할 때까지 울고 또 웁니다. 


파디샤와 총리대신은 이 다섯사람의 기구한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파디샤는 이 다섯사람을 궁궐로 불러서 자문관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는 총리대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 인간의 기억력은 불행하게도 그리 오래가지 않지. 머지 않아 이 여행중에 배우게 된 것들을 모두 잊어버리지 않겠나? 세월이 더 흐르고 나면 우리가 들었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오류들을 나도 똑같이 범할 수도 있고.... 나는 그것이 두렵네. 차라리 내게 경고해 줄 수 있는 자문관들을 곁에 두는 편이 훨씬 더 현명하리란 생각이 들어." 197쪽


도대체 다섯사람은 어떤 기구한 이야기의 소유자일까요? 파디샤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인생에 꼭 필요한 교훈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다섯 사람을 궁궐로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네는 탐욕 때문에 눈이 멀었고, 대장장이는 나눌 줄을 몰라서 중요한 기회를 놓쳤지. 또 보석 상인은 흥청망청 쓴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이고, 뮤에진은 인내심이 없어서 사랑하는 여자를 잃지 않았소? 모자장수는 또 어떤가? 질투심 때문에 아내와 아들을 죽임으로 몰아넣었소. 자네들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오류들의 생생한 증거들일세. 모두 내 곁에 머물면서 바른 길을 제시해 주길 바라오." 199쪽


파디샤는 여행을 통해 탐욕, 나눔, 낭비, 인내, 질투와 관련된 중요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는 그 교훈을 잊지 않고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파디샤의 나라는 더욱 행복해졌고, 그는 백성으로부터 더 큰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네 인생을 살아가는 길에도 이정표가 될 가치들이 존재하겠죠. 나 자신은 어떤 가치를 우선시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내가 배운 가치는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해 봅니다. 다만 눈을 즐겁게 하는 여행으로 만족한다면 더소중한 교훈을 놓쳐버릴 수 있다는 생각도 문득 듭니다만, 한편으로는 너무 그런 점에 연연해 하지는 말자는 생각도 듭니다. 이후의 나의 생각과 행동은 나의 여행이 가치가 있었는지의 여부를 결정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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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 / 이난아 / 민음사


오르한 파묵은 노벨 문학상을 받은 터키의 소설가입니다.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작품은 16세기 오스만제국에 살던 이슬람의 세밀화가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르한 파묵은 이 화가들이 소속되어 있는 술탄의 화원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통해 동양과 서양의 문화 충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비단 그 당시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터키는 동양에 위치해 있고, 이슬람권에 속해 있기때문에 서양과는 이질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러면서도 서양에 인접해 있어 그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유럽연합인 EU에 가입하기를 오랫동안 염원해 왔습니다. 


그러면 오르한 파묵은 이러한 터키의 서양 지향적인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오르한 파묵은 <내 이름은 빨강>을 통해 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려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소설의 배경은 16세기 오스만 제국 술탄의 화원입니다. 술탄의 화원에서는 책의 겉표지를 아름답게 장식하거나 책에 삽입될 그림을 그릴 때, 나무나 꽃, 동물등을 아주 섬세하게 그리는 장인들인 세밀화가들이 술탄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밀화가라는 이름값에 맞게, 쌀알등 아주 작은 물체위에도 깨알같은 그림을 그릴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오래전 헤라트파의 거장 비흐자드의 아름다운 그림을 원본으로 하여 온 평생 그의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려 완벽한 모사품을 만들어내는 장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눈이 멀고 난 후에도 손으로 익힌 기억을 그것을 완벽하게 복사해 내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하여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사물을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신이 보는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신이 보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탈이아 베네치아에서 들어온 서양 화풍은 그와 달랐습니다. 서양화가들은 자신의 개성을 그림속에 나타내고자 하였으며, 인간의 눈에 비치는 대로 사물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원근법도 사용하고, 인물을 그릴 때는 그 인물의 개성을 온전히 살려 그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서양의 화풍을 술탄의 화풍에 소개하려는 에니시테의 시도와 세밀화의 화풍을 지키려는 화원장 오스만사이에는 알력이 생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에스테르는 술탄을 설득하여 서양 화풍을 사용한 그림이 포함된 책을 만들고자 합니다. 술탄의 화원에서 일하는 장인 황새,나비, 올리브와 금박세공사 엘레강스가 오스만 몰래 이 작업에 참여합니다. 이 와중에 엘레강스가 살해되고, 20여년만에 고향을 찾아온 카라는 삼촌 에니시테와 함께 살인자를 찾습니다. 이 도중 에니시테마저 살해를 당하자, 술탄은 오스만과 카라가 이 사건을 해결하도록 명을 내립니다. 이러한 추리소설적인 전개에 더하여 에니시테의 딸이자, 카라의 예전 연인이었던 세큐레가 등장하여 소설의 흥미를 더 돋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의 화풍이 충돌하면서 살인사건까지 터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두 화풍의 충돌은 단지 회화부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교의와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슬람교의 전통은 우상숭배를 혐오하였고, 초상화를 우상숭배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에, 화면의 중앙에 인물을 크게 배치하고, 그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려넣는 서양의 초상화는 이단적이며 신성모독적인 것이라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림에 종교적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합리적일까요? 47장 '나는 악마다'라는 장에서는 서양풍의 그림이 악마의 영향, 또는 사주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논리적 반박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의 회화 전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만한 점을 제시합니다. 세밀화가들은 전통적으로 세밀화를 완성한 대가들은 눈이 멀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어떤 나이든 장인들은 다른 사람의 이목을 두려워합니다. 마치 눈이 멀지 않으면 그만큼 그림에 덜 열중했다는 표시가 된다고 여기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눈이 멀지 않으면 세인들과 세밀화가들로 부터 대가로 인정을 받지 못하기때문에 명예를 얻기 위해 눈 먼채 행동하거나, 일부러 눈을 멀게 만드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술탄의 화원장 오스만도 결국 바늘로 스스로의 눈을 찔러 눈이 멀게 됩니다. 


그림이란 단순히 사물을 그린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물을 어떻게 보는가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인간 중심의 시각인지, 아니면 신 중심의 시각인지와 같이 말입니다. 회화는 그런 의미에서 종교, 철학과 나란히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은 묘하게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겹쳐집니다. 살인자를 쫓는 구성도 그러하며, 더우기 살인자와 에니시테의 대화는, 윌리엄수사와 호르헤수사와의 종교,철학,예술을 넘나드는 격조높으면서도 격렬한 대화가 오버랩됩니다. 주관적 당위성에 근거한 광신적 신념은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호르헤수사와 같은 괴물을 양산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내이름은 빨강>에서도 <장미의 이름>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림과 관련된 살인사건에는 주관적 당위성에 근거한 광신적 신념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세밀화가, 종교성에 투철한 세밀화가들이 그림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등의 당위성을 내세우는 장면에서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성에 거부감을 느끼는 토마스가 생각납니다. 토마스는 스스로의 결정이 아닌 '그래야만 한다'는 외부의 도덕적 의무 또는 명분에 따라 행동하는 것도 일종의 구속이라 생각하고 그를 거부합니다. 주관적 당위성 안에 안주하는 거장 화원장 오스만과 그 당위성을 부정하며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는 에니시테, 그렇다면 에니시테는 '토마스'와 같은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일테죠.




장님이 되어 기억으로 그림을 그리는 대가에 대한 이야기는 인상 깊었습니다. 그린다는 행위는 기억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 즉 대상과 그림을 동시에 볼 수 없기때문에, 그린다는 행위는 첫째 대상을 보고 기억한 다음, 둘째 그 기억에 의지하여 그린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수십년간 같은 그림을 그리며 몸에 익힌 기억은 눈을 감고서 단지 몸의 기억만으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 몸이 기억하고 있다는 점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에서 읽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과자'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아주 사소한 행동에 의해 기억이 되살아 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터키여행을 다녀왔더랬습니다. 이 여행에서 <빨강>의 의미를 약간 짐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내 이름은 빨강> 이 제목의 의미가 무엇일까 궁금했었거든요. 먼저 눈에 뛴 것은 터키 국기입니다. 그 국기를 월성기라고 하지요. 초승달과 별로 되어 있기때문이지요. 이 국기에서 눈에 확 띄는 점은 바탕의 빨강색입니다. 



또 한가지 터키의 집들입니다. 지붕이 한결같이 붉은 색 계통입니다. 



아래는 보스포러스해협에 면한 해안가에 있는 건물입니다. 역시 붉은 색 지붕을 볼 수 있습니다. 



아래는 블루모스크의 바닥에 깔려 있는 양탄자입니다. 



터키를 대표하는 색깔을 말하라고 하면 단연 빨강색일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이름은 빨강>이란 제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비록 터키가 서구화를 추구하고 있기는 하지만, 누가 뭐래도 우리는 터키일뿐이다라고 소리치는 오르한 파묵의 고함이 들리는 듯합니다. 터키가 서구화되고 있지만 그래도 그 속에는 터키의 정신, 문화가 남아 있을 거라는 소리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서양화풍을 도입하려했던 에니시테나 이슬람 전통화풍을 유지하려했던 오스만이나, 둘 다 오르한 파묵의 분신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음은 <내 이름은 빨강>에서 발췌한 몇 구절들입니다.  


◆ 책에 대해서

'책은 영원히 남아." 1권 293쪽

<내 이름은 빨강>은 그림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책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에니시테는 책은 영원하지 않다고 반박한다. 책이 영원하지 않다는 말을 듣자 살인자는 정신없이 에니시테의 머리를 내리칩니다. 과연 책은 영원할까요?


책은 우리의 슬픔에 스스로 위안이라고 착각하는 깊이를 더해줄 뿐이다. 

2권 221쪽 (카라)


◆ 사랑과 행복에 대해서 

"사랑은 결혼한 뒤에도 생기니까요. 잊지 말아요. 결혼하기 전에 타오르는 사랑의 불길은 결혼과 함께 꺼져 버려요. 그 다음은 공허하고 슬픈 흔적만 남게 되죠. 결혼한 후에 느끼는 사랑도 물론 언젠간 끝나기 마련이지만 행복이 그 자리를 대신해 주죠. 그런데도 성미 급한 바보들은 결혼하기 전에 사랑을 활활 태워서 모든 사랑을 소진해 버리고 말죠. 왜냐고요? 그들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때문이예요." 


"그럼 가장 중요한 게 뭐란 말이요?" 


"행복이죠. 사랑과 결혼도 행복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거예요...." 

1권 329쪽(세큐레와 카라의 대화중에서)


사랑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계속 머리를 짜내는 저 같은 사람의 논리가 아니라, 비논리를 통해 이해될 수 있는 그 무엇인 것 같습니다. 2권 327쪽 세큐레


나의 모든 생애를 세밀화에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우리화원이 예헤라트파 거장들이 이룩해 낸 아름다움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음을 나는 고통스럽게 깨닫고 있다. 이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야만 삶이 쉬워진다. 이런 겸양이 우리에게 고귀한 미덕이 되는 까닭은 그 것이 삶을 쉽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2권 56쪽


◆ 종교와 철학, 미술에 대해서 

산다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 1권 321쪽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 이단자, 불신자들은 신을 부정하고자 할 때 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네. 그러나 신은 보는 사람에게는 보이네, 그래서 코란에는 보는 사람과 보지 않는 사람이 절대로 같지 않다고 씌어 있지. 1권 323쪽


갑자기 세상이 서로 통하는 문이 달린, 수많은 방을 가진 궁전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기억하며, 상상하며 드나들 수 있지만, 대부분 게을러서 조금만 움직일 뿐 항상 같은 방에 머무르고 있는 거지요. 2권 326쪽 세큐레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생각하려는 바보 같은 제 아들 오르한은 시간을 멈추게 한 헤라트파의 장인들은 절대로 저를 저처럼 그릴 수 없다는 걸 상기시켰어요. 반면에 아들을 안은 아름다운 어머니 그림을 쉬지 않고 그리는 유럽화가들은 절대로 시간을 멈추게 하지 못할 거라며, 아무튼 저의 행복의 그림은 절대로 그려질 수 없다고 수년간 줄기차게 제게 말했지요. 2권 333 세큐레

 

서양화속에 우리가 그려진다면 우리는 그림과 테두리 밖으로 걸어 나오게 될 것이다. 헤라트파 장인들이 그린그림에 들어가 있다면, 우리는 신께서 우리를 보시는 곳으로 인도될 것이다. 만일 중국 그림에 들어가 있다면 그림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의 그림은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기때문이다. 2권 57쪽


오르한은 현재 연금상태에 있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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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제임스 조이스/ 이창희 그림/ 박성문 글/ 채우리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06

 

제임스 조이스(1882-1941)는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 <율리시스>는 현대소설의 지평을 연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율리시스>는 두번째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난해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왜 조이스의 대표작 <율리시스>는 이런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을까요?

 

조이스 이전의 소설들은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러나 조이스는 그와는 달리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초점을 맞추어, 내면 세계의 묘사에 집중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완전히 새로운 소설을 시작한 것입니다.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의식의 흐름'은 한 개인의 총체적인 삶에서 흘러나오기마련입니다. 그를 이해하려면 주인공의 내면을 형성한 배경등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조이스는 설명을 하려들지 않습니다. 단지 의식의 흐름을 서술할 뿐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의식이란 때때로 불연속적이며, 불합리하고, 불가해하기때문에 이해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율리시스>가 난해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율리시스>는 1904년 6월16일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을 배경으로 하여 주인공 레오폴드 블룸씨와 스티븐 디덜러스를 중심축으로 소설이 전개되어 나갑니다. 그러므로 <율리시스>의 배경이 되는 '더블린', 그리고 주인공인 스티븐 디덜러스에 대해 더 많이 알게되면 <율리시스>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이스의 더블린 3부작인 <더블린 사람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율리시스>중  <더블린 사람들>과 스티븐 디덜러스가 주인공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먼저 읽는다면 <율리시스>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조이스 자신의 자서전적인 소설입니다.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의 이야기는 조이스 자신의 이야기인 셈이죠.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스티븐의 어린 시절에서 시작하여 대학을 졸업한 후 종교와 가족, 국가와 민족을 뒤로 하고 예술가의 삶을 찾아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때까지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꽤나 이해하기 어렵다던 이 작품을 만화로 만나게 되어 재미있게, 쉽게 접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만화로 된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는 중간 중간에 보조 자료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조이스의 문학, 그의 조국 아일랜드의 역사와 종교 등의 자료들은 조이스와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는 자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성장과 함게 했던 종교와 가족, 민족과 국가등은 예술가를 위한 자유의 길을 막는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뛰어 넘어 자유의 길을 나아갑니다.

 

 

스티븐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이달로스처럼 자유를 향해 날아오르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이름 디덜러스는 그리스어로 다이달로스입니다. 다이달로스는 갇혀있는 탑에서 탈출하기 위해 밀랍과 깃털을 이용하여 날개를 만듭니다. 그리고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목숨을 걸고 자유를 향해 탈출합니다. 이카루스는 너무 높이 날아 올라 태양의 열로 날개밀랍이 녹는 바람에 떨어져 죽게됩니다. 자유를 향한 열망에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필경 함께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븐의 자유혼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가족도, 종교도, 국가와 민족도 스티븐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스티븐은 영국의 국교회에 예속되어 세속화된 종교에 분노합니다. 그리고 스티븐은 조국 아일랜드에도 심한 환멸감을 느낍니다. 자기네 언어를 버리고 다른 나라 언어를 택한 나라, 아일랜드의 애국자 파넬의 파멸을 기뻐하던 나라... 그는 '아일랜드는 제 새끼를 잡아먹는 늙은 암퇘지'라고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이렇게 그는 종교와 조국에 등을 돌리고, 가족을 뒤에 두고 아일랜드를 떠납니다. .  

 

 

 

어디에도,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스스로의 결정을 통해 예술가의 길을 걷기 위해 자유의 길을 떠납니다. 이렇듯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자유를 향한 스티븐의 몸짓을 보여줍니다. 

 

 

 

<한 권으로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김창석/국일미디어

-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꼭 읽어야할 책 100권 http://blog.daum.net/ccsj77/48

 

장황함과 난해함을 무기삼아 독자를 잠의 무자비한 손아귀로 끌고가는, 그러나 명료한 정신으로 그 속을 들여다 보면, 맑은 에메랄드빛 바다속에 각양각색의 산호초와 그 사이로 형형색색의 크고 작은 열대어들이 노니는 바다속 풍경을 보는 듯한 즐거움을 주는 책,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입니다.

 

 

위대한 작품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결정체이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 유독 독자의 시선을 끄는 정수 즉 백미가 있기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토마스 만의 <마의 산> 중 '눈(雪)'의 풍경이 그러합니다. 

 

알프스 산의 고산지대에 위치한 요양원, 한스 카르도르프는 눈이 내리는 날 혼자서 스키를 타고 온 산을 돌아다닙니다.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경사진 전나무 숲은 눈으로 뒤덮여 온통 하얗습니다. 눈 외투를 두툼하게 걸친 자연은 절대 침묵으로 도도한 장엄함을 뿜어내고, 점차 심해지는 눈보라로 땅과 하늘은 물론 그 사이의 공간도 온통 하얗게 뒤덮여버립니다. 한 치 앞도 분별할 수 없는 백색의 어둠속에서 한스는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입니다. 마침내 아무도 없는 작은 오두막집을 발견하고는 통나무벽에 기대어 쉬는 순간 한스는 깜박 까무라치고 맙니다. 그 짧은 까무라침속에 한스는 밝은 햇살이 가득한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즐겁게 노래하며 뛰노는 꿈을 꿉니다. 

 

이 장면은 완전히 압도적인 힘으로 다가와, 조금 과장하자면, 나 자신이 거의 무아지경에서, 고요하고도 장엄한 그 눈의 풍경속에 한스가 되어 버린 것 같았습니다.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겠지만, 나에게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알베르틴이 잠든 모습'을 묘사한 부분이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 왔습니다. 그 때는 온 몸의 신경이 책의 지면을 뚫을 듯이 모아지면서, 글자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며 영상을 그려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비 갠 투명한 대기속을 날아온 선명한 빛깔의 풍경이 망막에 꽂히듯이, 잠든 알베르틴의 모습이 내 마음의 막위에 생생한 모습으로 새겨졌습니다. 마르셀은 잠자는 알베르틴의 모습에서 수많은 알베르틴의 얼굴이 숨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Sleeping Beauty Colored by PinkParasol

 

오랫동안 마르셀는 지나간 시간속에 사라져 버린 시간의 기억을 찾아서 그것을 생생하게 형상화하기를 바랬지만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한 일로 인해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기억을 되찾게 됩니다. 우연히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의 맛을 보는 순간 어린 시절 레이나 고모집에서 먹었던 마들렌 과자의 맛이 되살아나는 동시에 그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후에도 우연한 사건들에 의해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 하나 되살아나면서 그는 이를 형상화하기 시작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렇게 해서 탄생하게 됩니다. 

 

마들렌 과자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다양하게 회자되고 재현되고 있습니다. 생쥐 요리사 이야기 <라따뚜이>는 유명한 애니메이션입니다만, 여기에서도 마들렌 과자 이야기와 비슷한 상황이 나옵니다. 라따뚜이의 요리를 맛 본 요리 전문 감식가의 눈이 순간적으로 휘둥레집니다. 순식간에 그의 기억은 어린 시절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어머니를 생각하게 되죠.

 

☞ 라따투이 장면 감상 (주요장면 1:00 ~ 2:2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에는 마르셀의 유머, 재치, 위트가 반짝인다고 하더군요. 이러한 구절이 그 중 하나일까요?

 

어느 생면부지가 전재산을 자기에게 남겨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말라빠진 빵만 있는 식탁에 떨어뜨리는 눈물이 덜 나오는 가난뱅이와도 나는 같았다. 현실을 견딜만하게 만들려면,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서 뭔가 철없는 사소한 말을 이야기해야 한다. 92쪽

 

 

마르셀은 평생 천식으로 고생을 합니다. 잠 못 이루는 밤이 그에게는 계속되었습니다. 그에게 잠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날마다 24시간의 절반을 쪼개서 봉사해야 하는 또 하나의 주인이 나를 부르고 있는 시간이기도 하였기때문에. 우리를 속박하는 이 노무는, 우리가 눈 감으면 완수한다. 아침마다 또 하나의 주인에게 우리는 돌아간다. 그렇지 않으면 밤의 강제 노무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다. 641쪽

 

그는 공쿠르의 미간일기(未刊日記)를 읽고 커다란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는 예술적 감동이라는 문제에 대해 이렇게 자문해 보는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예술의 감동은 어떻게 오는가? 평범한 사람들을, 보도 듣도 못한 매력을 가진, 방문해보고 싶고, 만나보고 싶고,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은 사람으로 만드는 놀라운 마법과도 같은 힘을 느낄 때 감동이 오는 것일까?

 

 

때로는 그의 글 가운데 동양의 노장사상과도 비슷한 생각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한 세계에서 또 하나의 세계를 감촉하고, 생각하고, 이름을 붙이고, 그 두 세계 사이에 서로 부합하는 다리를 걸 수 있으나, 그 헤아리지 못할 간격을 메우지 못한다. 277쪽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전 7권으로 집필된 대작입니다. 번역자 김창석씨는 독자들의 요청에 부응하여 한권으로 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을 내 놓았습니다. 전체의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원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발췌하여 한권으로 꾸몄다고 합니다.

 

 

아름다움과 깊이를 소유한 그의 생각들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보석처럼 흩뿌려져 있다고 하건만, 나에게는 그저 희뿌연 안개속에 언뜻 언뜻 보일 뿐, 그것을 다 찾지는 못하였습니다. 언젠가는 또 다시 이 책을 집어들고, 아마 그 때는 한 권으로 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아니라 7권으로 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되겠지만, 일종의 보물 찾기를 할 기회가 찾아 오기는 하겠지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권중 각 권은 그 독자적으로도 하나의 완결된 작품처럼 느껴지기때문에, 때로는 한 권씩 읽어도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고 하니, 천천히 기회를 내어 전권에 하나씩 도전해 보렵니다.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웅진 지식하우스

 

이윤기는 소설가이자 번역가이다. <하얀 헬리콥터> <하늘의 문>과 같은 소설도 있고, 각별히 신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번역가로 정평이 나 있는데, <장미의 이름>, <그리스인 조르바>등은 유명하다.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는 이윤기의 글들을 모아 놓은 일종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글쓰기에 관한 책이기는 하나 그것을 목표로 쓰여진 책은 아니다. 차라리 이 책은 인간 이윤기가 누구인지에 답하는 글이라 생각된다.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 중 몇가지 인상적인 점중 한가지는 '날려먹기'와 '다시쓰기'이다. 이것은 글쓰기에서 퇴고, 즉 글 다듬기가 얼마나 주요한 요소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에게 상을 안겨준 작품들,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대부분의 작품들은 '날려먹기'와 '다시쓰기'의 아픈 경험과 관련이 있다. 글이 술술 풀린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술술 풀린 글, 글쓰기의 고된 노동을 거의 면제받은 듯한 글로써 나는 호평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늘 아프다. 87쪽

 

이 글을 읽으니 유명한 카알라일의 일화가 떠오른다. 그의 유명한 작품 <프랑스 혁명사>는 '날려먹기'와 '다시쓰기'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존 스튜어트 밀과 우정과도 잇닿아 있는 교훈적인 이야기가 있다.   

 

카알라일 이야기  ☞ http://blog.daum.net/ant45oks/8792822

 

그의 글중에 고된 인생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위한 격려가 되는 말도 있다. 인생도 나름의 글쓰기련가?

 

겨울이 오고 있는데도 나는 화분 중 몇 개는 집 안으로 둘여놓지 않고 있다. 겨울을 경험하지 않으면 다음 해 꽃을 피우지 못하는 식물도 있다. 89쪽

 

인생살이에 대해 한 문장 더 덧붙이면

 

약삭빠르게 찾아낸 지름길은 종종 먼 길이 되는 수가 있다. (비결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117쪽

 

그래. 글쓰기도 인생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윤기는 글쓰기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고, 글쓰기 자체가 인생이었지만, 우리네 글을 쓰지 않는 사람도 사실은 우리의 몸으로 인생이라는 거대한 원고지에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이겠지.

 

 

 

 

 

<번역에 대하여>

 

이윤기는 '번역은 우리말과의 씨름이다'라고 정의한다. 번역을 잘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가 추천하는 것은 세가지이다.

 

첫째로 사전과 싸워야 한다. 자신이 사용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사전과 싸워야 한다. 그 과정을 지나면 이제는 펄펄 살아있는 저잣거리의 입말을 사용하기 위해 사전을 버리는 싸움을 해야 한다.

 

둘째, 어구와 어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야 한다. 영어의 복문의 종속절은 되도록 우리말의 어구로 정리하여 단문으로 만들면 훨씬 이해하기 쉬운 글이 된다.

 

세째, 살아있는 표현을 찾아 내는 일이다. 원문의 배후에 숨어 있는, 푹 익은 우리말을 찾아내는 일이다. 예를 들어 A littel learning is a dangerous thing. 을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라는 말로 번역하는 일처럼. 

 

 

번역과정에서 일어나는 언어의 변화가 '단순한 물리적 변화'여서는 안된다. 텍스트의 문장이 우리말로 변하게 하되 화학적으로 변해야 한다. 103쪽

 

 

이윤기는 번역작업이 이루어 지는 과정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먼저 원문을 해체하는 일입니다. 그 다음은, 해체한 원문에 대응하는 역어를 찾아내는 일입니다. 우리말 문장이 짜이면 이제 이걸 천칭에다 다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원문의 말결은, 역문의 뉘앙스와 동일한가? 동등한가? 등가를 보증할 수 있는가? 정확하게 대응하는가?" 133쪽

 

 

 

이윤기는 글쓰기를 통해 진리를 내 보이고 싶어했다. 오랫동안 그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지 있었지만 결국은 패배를 인정하고 만다. 그러나 단지 진리의 한 점만이라도 건드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토로한다. 그의 글쓰기와 번역은 진리에로의 부단한 접근이었다. 

 

 

'번역하는 행위'는 역어라는 이름의 직선으로써 원어 텍스트라고 하는 원의 한 점을 살짝 건드리고 지나가는 행위이다. 나에게 이 세상의 모든 삶의 현상은 '원어 텍스트', 내가 부리는 언어는 '원어'의 한 점을 살짝 건드리고 지나가는 운명에서 조금도 자유롭지 못한 '역어'이다. 직선에 지나지 못하는 나의 언어로써 원에 가까운 원융한 진리를 그려낼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나는 단지 한 점만을 건드리고 지나갈 수 있을 뿐이다. 불립문자가 나에게 절망만을 안기고 있지는 않다. 다가갈 수 있을 뿐이다. 다만 건드릴 수 있을 뿐이다. 298~299쪽

 

 

 

<목차와 딸린 말>

 

1. 글쓰기는 내 몸을 가볍게 한다.

'멋있게 보이고 싶다고 제 생각을 비틀지 마라'

 

2. 옮겨지지 않으면 문화는 확산되지 못한다.

'번역을 할 때 말의 무게를 단다고 생각하라'

 

3. 문학의 정점에 신화가 있다.

'당신의 글에서 당신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져야 한다'

 

4. 우리말 사용설명서

'유행하는 언어에도 보석같은 낱말이 무수히 반짝인다'

 

5.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궁극적인 진리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는다면 신화의 언어를 보라'

 

 

 

<이윤기가 추천하는 책과 사람들 일부>

 

- 철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딸아이에게 추천해 준 책

 <짧은 글 긴 침묵> <예찬> 미셸 트루니에 지음/ 김화영옮김

- 미셸 트루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 김화영의 저작들

- <리진 서정시집>

-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플루타르코스 영웅열전>

   <변신이야기> <아이네이아스>

-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니코스 카잔차스키의 <그리스인 조르바>,

   카다레의 <H 서류>

- 아름다운, 지나치게 아름다운 책들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나생문)>,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미시마 유키오의 <킨가쿠지(금각문)> <4인집> 

 

 

  

터키 - 신화와 성서의 무대, 이슬람이 숨쉬는 땅 / 이희철 지음/ 도서출판 리수

 

언젠가 한 외국인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가장 여행하고 싶은 나라는 터키라고... 왜?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특이한 자연경관은 잊을 수 없는 풍광이라고...

 

 [해외여행] 터키 카파    파묵칼레 고대로마 유

 좌) 카파도기아    우) 파묵칼레

 

몇 년전에 중국 청도에 사는 지인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아무런 사전 정보없이 떠난 그 여정은 나에게 여행이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복잡한 시내에 쇼핑하러 갔을 때였다. 나는 슬며시 걱정이 일기 시작했다. 난 중국어를 전혀 모르며, 더구나 지인의 집주소와 전화번호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안내하는 지인을 놓치면 끝장이다 싶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 복잡한 군중속에서 그 지인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따라가야만 했다. 아픈 기억이었다. 

 

여행에 문외한인 내가 그 때 배운 사실은 '여행의 성공여부는 오로지 사전 준비에 달려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진리였다. 유홍준씨가 <나의 문화유적 답사기>에서 말한 바,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만큼 보인다."라는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 이번 터키여행을 즈음하여 사전준비차원에서 책을 두권 읽었다.

 

그 중 하나가 <터키- 신화와 성서의 무대, 이슬람이 숨쉬는 땅>이다. 

 

 

 

 

 

왜 터키를 최고의 여행지라고 할까? 여기에는 두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터키는 역사와 문화의 보고이라는 점과, 둘째, 터키의 독특한 자연경관때문이다. 

 

터키의 역사와 문화는 풍요롭다.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동양과 서양이 길목에 위치해 있어 두 문화가 교차하고 있는 곳이 터키이다. 유럽문명과 아시아 문명,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 문화 등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문화들이 얽혀있는 터키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신비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터키는 동서고금, 그리고 성과 속이 한자리에 얽혀 있는 다양성의 나라이다. 

 

<터키의 역사>

터키는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터키가 위치안 아나톨리아 반도의 굻직한 역사적 시대는 멀리 구석시시대에까지 이른다.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히타이트 시대, 프리기아 시대, 우라르투 시대, 리디아 시대, 페르시아 지배 시대, 헬레니즘 시대, 로마 시대, 비잔틴 시대, 셀주크 시대, 오스만 제국시대를 거쳐 오늘날 터키 공화국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차탈회윅에서는 그 역사는 기원전 6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신석기시대 인류 최초의 집단 주거지가 발굴되었다. 최초로 철기를 사용한 히타이트제국의 유적인 '보아즈칼레'가 있고, 프리기아왕국의 황금의 손 미다스왕의 유적인 고르디온 유적도 있다. 그 유명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의 배경이 된 트로이도 오늘날 트루바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시대를 거쳐 BC 546년 이후 페르시아의 지배아래 있다가 알렉산더의 정복으로 헬레니즘 문화에 편입된다. 그리고는 로마의 지배를 받다가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영토가 되어 고대 그리스도교의 영향력 아래 있게 된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은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숨쉬는 곳이 되어 그와 관련된 유적도 많이 남아 있다.

 

AD 1071년 셀주크투르크 제국이 아나톨리아 반도에 침공하자, 이로부터 그리스 로마 세계로부터 터키 이슬람 세계로 바뀌게 된다. 셀주크제국의 변두리에서 시작된 오스만제국은 1453년 비잔틴을 점령함으로 동로마제국에 종말을 고하고 대제국을 건설한다.

 

이후 600여년간 세계를 호령하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서방 열강 세력아래 떨어진다. 이 때 터키 공화국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의 혁혁한 영토회복 전쟁의 승리로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설립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현재 터키인들의 조상은 기원10세기경에 아나톨리아 반도에 들어온 터키족이다.  터키족은 990년 아나톨리아에 강력한 셀주크 제국을 건설하였고, 셀주크제국 말기에 부르사지역에 있던 오스만토후국이 1299년 셀주크로부터 독립하여 오스만 제국을 이룬다. 이 오스만 제국이 터키 공화국에 이어진다. 

 

흥미롭게도 터키는 튀르크라고 불리는 돌궐족의 후예라고 한다. 고대 중국의 북방을 위협하여 만리장성을 쌓게한 장본인들인 유목민족 흉노족(훈족)과 돌궐족이 아나톨리아 반도로 들어와 터키인의 조상이 된 것이다. 

 

아뭏든 만여년에 이르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역사의 숨결이 이 지역 곳곳에 산적해 있어 역사와 문화의 보고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유명한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터키를 인류 문명이 살아있는 야외 박물관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터키-신화와 성서의 무대, 이슬람이 숨쉬는 땅>에서는 간략한 터키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아울러 관광지, 휴양지등을 역사에 비추어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터키인의 생활양식이나 사고 방식등을 이해하도록 돕고 있다.

 

이제 하나의 욕심이 더 난다. 간단한 터키말을 구사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하는 바람이 그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문학 고전의 감동을 만화로 만난다.

(서울대 선정 문학 고전 15)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그림 한종천/ 글 최윤정/ 학산문학사 (채우리)

 

만화! 초등학교때 무척 만화를 좋아했었다. 멋진 그림을 근사하게 베끼는 것도 좋아했었다. 이제 초등4학년인 딸애도 만화의 캐릭터를 즐겨 그린다.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만 매일 그리고 또 그린다. <쵸파>는 가끔... 부전자전인가? 하하

 

그러다 20대엔 <슬램덩크>에 푹 빠져 신간이 출간될 때마다 서점에서 사서 동생과 함께 보던 재미란... 새 만화책을 펼 때 느끼던 두근거리는 마음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러다 우연히 40대 중반에 <로지코믹스>라는 버트란트 러셀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만화를 만났다. 그 부제가 아마 <토대를 찾아서> 였지.

 

로지 코믹스를 보면서...와~ 이런 만화도 가능하다니, 철학자로 널리 알려진 러셀을 만화로 다시 살려내다니 참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수리논리학자로 수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수학사에서 '러셀의 역설'을 모른다면 그는 이단아일 정도이다. 러셀의 역설은 수학의 기초를 흔드는 것이었다. 러셀은 수학을 가장 견고한 기초가 있는 학문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자신이 흔든 그 기초를 다시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 결과 나온 책이 화이트 헤드라는 수학자와 공동집필한 <수학원리>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아뭏든 그의 범상치 않은 일생과 그의 논리, 사고를 한 권의 만화책에 담아 내다니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로지코믹스

 

그 이후 오늘 도서관에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찾다가 우연히 또 진주를 하나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게 바로 이 책이다. 만화다. '원작의 재미와 가치를 이렇게 충실하게 살려낸 만화책이 또 있을까요?' 어떤 교사는 이렇게 말하며 깜짝 놀랐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

 

전에 <한권으로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조금 읽었는데, 상당히 어렵운 책이라고 느꼈었다. 그 때 미처 다 읽지 못하고 반납을 했었는데, 이 번에 다시 읽어보려고 찾는 중에 내 눈에 문득 들어온 책이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만화를 다 보고나서는,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온통 빠진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생애, 그리고 그의 작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흐름과 그 속에 숨겨져 있는 프루스트의 정신 - 흘러간 시간을 어떻게 되찾게 되는지 그의 긴 여정을 알게 되었다.

 

이제 <한권으로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보다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아마 7권으로 된 전권을 읽어보려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슬며시 든다. 

 

 

제목에도 나타나 있듯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시간이라는 불가해한 대상물을 그 뿌리로 하고 있다. 시간의 신비라고나 할까, 그 불가해한 성질을 해독해 보려는 프루스트의 집념이 담겨있다. 프루스트는 과거의 기억들이 시간에 의한 망각의 작용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득 마르셀은 아주 사소한 일로 인해 우연찮게 어릴 적의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시간과 결부된 그 기억들이 어떻게 현실을 구체화하는지에 대한 깊은 상념에 빠져든다. 현실과 기억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걸까?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상념의 여행을 떠난다.

 

 

 

결국 이 책의 주인공 마르셀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게 된다. 그리고는 그 되찾는 시간, 기억들을 잡아놓기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원했던, 그러나 포기했었던 작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너무나 평범하고 사소한 일들에 의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게 된다. 그는 우연히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의 맛을 보다가, 아주 어린 시절 레이니 고모가 주던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의 맛을 기억해 내면서, 그 시절의 모든 기억이 되살아 난다. 또한 길을 가다 반듯하지 못한 포석에 걸려 비틀거리다 불현듯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행복감에 젖기도 한다. 그러한 세세한 기억들이 살아 나면서 그의 작가적 재능에 대한 의혹도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는 글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경위이다. 

 

 

 

 

리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반백이 된 머리를 보거나, 쭈그러진 얼굴을 보면서 문득 시간이 아득히 흘렀음을 느낀다. 그리고는 그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하고 의아해 한다. 시간은 파괴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물리학적 관점에서 본 엔트로피의 법칙에도 시간의 흐름은 되돌릴 수 없으며, 시간의 흐름은 무질서를 증가시키는 방향 즉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이라 한다. 그 뿐아니라 시간은 우리의 기억마저 송두리째 삼켜버리기 조차 한다. 단지 지나간 시절의 단편적인 모습들만 띄엄 띄엄 떠오를 뿐이다. ·

 

간이란 희랍어 어원으로 크로노스, 즉 자신의 자식들을 잡아먹는 신이라고 한다. 시간은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힘을 갖고 있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나는 시간 그 자체이고, 공간을 갖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지나온 장소는 되돌아 갈 수 있는 반면 지나온 시간은 되풀이 하여 살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철학자 쥘 라뇨 역시 "공간은 나의 힘의 표상이고, 시간은 나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형태"라고 말함으로써 시간의 불가역성 앞에 놓인 인간 존재의 비극적 모습을 명확하게 표현했다. p202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의 그토록 슬펐던 일들이나 아픔들이 아련해지고 심지어 그 아픔까지도 추억이 되어 아름답다고 느껴지니 이야말로 신기한 노릇이다. 우수와 슬픔도 예외가 아니어서 시간의 흐름 속에 파괴되어 그 온전한 형체나 느낌을 되찾을 수 없지만, 오히려 그 기억속에 아름다움이 덧붙여진다는 것은 왜 그럴까? 아름다운 슬픈 추억?

 

 

그는 세월 속에서 모든 것이 파괴되며, 그 가운데 아름다움만 남겨 놓고 완전히 파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수와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p210

 

 

 

시간이란 신비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프루스트는 이러한 시간의 가면을 벗기기를 원한 것이리라. 그는 시간의 본질을 찾으려 한 것이다. 그는 시간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마르셀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젊었을 때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될 때, 그들이 몰라보게 변신한 모습을 보고 경악한다. 프루스트는 그 광경을 마치 시간이 베푸는 가면무도회 같다고 표현한다. 프루스트는 이런 시간의 무자비한 파괴의 모습과 덧없이 사라지면서 물질적인, 감각적인, 지취를 남기는 도망자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소설가가 시간의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p222

 

나는 생각했다. 내게 아직도 작품을 완성할 힘이 있다면, 평소 우리 눈에 안 보이는 '시간'의 꼴을 똑똑히 표시하리라고... 그리고 시간 안네 차지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보리라고...! p225

 

 

그가 발견한 시간의 정체는 무엇일까?  마르셀이 경험한 것처럼 숨어 있던 기억들이 아주 사소한 우연한 자극에 의해 되살아나는 과정은 신비로운 황홀한 경험이다. 갑자기 허영만 화백의 <식객>의 고구마편이 생각이 난다. 성찬이가 넣어준 고구마을 베어먹는 순간 사형수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룩 흐른다. 엄마 생각이 났기때문이다. 어릴 때 엄마가 삶아주었던 고구마. 고구마는 엄마에 대한 기억을 소생시킨 것이다. 그리고 엄마를 그리는 마음과 사랑에 목이 메여...

☞ 식객 고구마편 1편 감상

http://cafe.daum.net/jeju-uneedpartners/M3mR/23?q=%BD%C4%B0%B4%20%B0%ED%B1%B8%B8%B6

☞ 식객 고구마편 2편 감상

http://cafe.daum.net/jeju-uneedpartners/M3mR/23?q=%BD%C4%B0%B4%20%B0%ED%B1%B8%B8%B6

 

 

기억은 결코 지워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어딘가에서 자극을 기다리며 숨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기억은 현실을 구체화하는 현존하는 그 무엇이다. 아마 프루스트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이것이 아닐까?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보면서 이 점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과연 프루스트는 시간의 본질을 발견한 것인지 확인해 보려한다. 자 이제 시간 여행을 떠나 보련다. 프루스트와 함께.

<월든 Walden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은행나무>

 

 

아득한 그리움을 자극하던 책 월든, 서점에서 보자마자 사서, 집으로 돌아온 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펴본다. 자연과 벗삼아 월든 호수에 통나무집을 짓고 2년동안 살았던 소로우가 남긴 불후의 책이라는 타이틀은 단번에 나의 관심을 사로 잡았었다.

 

미국 동북부의 메사추세츠주의 아름다운 마을 콩코드에서 1817년 태어난 소로우는 거의 평생을 고향마을에서 살아가면서 주변의 숲과 강, 호수와 언덕을 다니며 자연을 관찰하기를 즐겼다. 하바드대학을 졸업한 후 여러해가 지나 1845년 그의 나이 28세때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숲 속에서의 생활을 실현에 옮긴다. 소로우는 그 해 3월말 콩코드 마을 가까운 숲 속에 있는 월든 호수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1847년 9월까지 숲속 생활을 한다. 

 

<월든>은 그 때의 생활을 기록으로 옮긴 작품이다. 초록색 책 표지에 희미하게 보이는 호수가 숲으로 둘러싸인 월든 호수이다. 월든호수는 길이가 약 800미터, 폭이 200~300미터, 둘레가 3킬로미터쯤 되는 작은 호수이다. 소로우의 표현을 빌리면 

 

"이 호수는 길이가 반 마일에다 둘레의 길이가 1 3/4마일에 이르는 맑고 깊은 초록빛의 우물이며 61에이커 반쯤되는 넓이를 가지고 있다." 265p

 

 

인근 마을과는 꽤 떨어져 인적이 거의 없는 숲속에 있는 이 작은 월든 호수는 소로우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아름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고, 오로지 소로우에게만 그 비경을 펼쳐놓았다. 소로우는 사랑하는 월든 숲속에서 혼자 생활하면서 무엇을 바랬던 것일까? 그리고 무엇때문에 <월든>이라는 책을 썼던 것일까? 

 

시 한 줄을 장식하는 것이

나의 꿈은 아니다.

내가 월든 호수에 사는 것보다

신과 천국에 더 가까이 갈 수는 없다.

나는 나의 호수의 돌 깔린 기슭이며

그 위를 스쳐가는 산들바람이다.

내 손바닥에는

호수의 물과 모래가 담겨 있으며,

호수의 가장 깊은 곳은

내 생각 드높은 곳에 떠 있다.

 

소로우는 무엇보다도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싶었던 게다.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삶은 그에게는 신과 천국에 가까이 가는 행복의 길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세속적 성공을 꿈꾸며 인생을 살아가는 삶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는 삶의 양식을 보여주고 싶었을거다. 자연과 함께 하는 단순한 삶, 단순성의 아름다움과 행복을 그는 노래한 것이다.

 

<월든>은 산문이기에 앞서 시적인 작품이라 느껴진다. 나는 '겨울의 호수'에 뒤이은 마지막 17장 '봄'을 읽으면서 나 자신이 걷잡을 수 없이 '봄'의 풍경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소로우는 월든 호수와 그 주위 숲속에 봄의 여신이 그 투명한 옷자락을 스치면서 봄의 생명력을 회복시키는 모습을 상상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바로 눈앞에서 보면서 그 정경을 그려냈다. 그의 기록의 대다수가 바로 체험과 관찰과 사색의 기록이다.  

 

"숲에 들어와 사는 생활의 한 가지 큰 매력은 봄이 오는 것을 지켜볼 수 잇는 여유와 기회를 갖게 된 점이었다." 447p

 

겨울 호수가 잠에서 깨어나는 "쩌-엉"하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 소리는 '호수의 천둥소리'라고 불린다.

 

"내가 도끼머리로 얼음을 치자 마치 정이라도 친 것처럼 혹은 팽팽한 북을 친 것처럼 사방 몇 십 미터에 소리가 울려퍼져서 나를 놀라게 했다. 해가 뜬 지 한 시간 후 언덕 너머로 비스듬히 비치는 태양 광선의 영향을 받으면서 호수는 울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호수는 마치 잠을 깬 사람처럼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하면서 점점 더 시끄러운 소리를 냈으며 이런 상태가 서너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446p

 

흥에 겨운 봄기운을 소로우는 이렇게 노래한다.

 

"마침내 햇살은 직각을 이루고 따뜻한 바람은 안개와 비를 몰고와서 눈 덮인 둑을 녹인다. 안개를 흩어버리는 태양은, 향을 피우듯이 김이 모락모락 오른 적갈색과 흰색이 교차된 풍경위에서 미소짓고 있다. 졸졸 흐르는 수많은 실개천과 개울의 음악에 흥이 겨운 나그네는 이 섬에서 저 섬으로 뛰어 건너며 이 풍경속의 길을 간다. 개울들의 혈관에는 겨울의 피가 가득차서 떠내려가고 있다." 450p

 

난 상상 속에서 소로우와 함께 숲속 생활을 한다. 그러다 자연에 대해 너무도 무지한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전에 자연은 과학의 이름으로 내게 존재했었다. 이전의 자연은 나에게 진정한 자연이 아니었다. 숲 속에 있는 생물들, 나무들과 꼭과 풀들은 딴 나라, 딴 세계였었다. 

 

떡갈나무, 자작나무, 느릎나무, 밤나무, 가문비나무, 삼나무, 솔송나무, 옻나무, 사시나무, 오리나무, 월귤나무, 백송나무, 참피나무, 서어나무, 산딸나무, 감탕나무. 더러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고작 내가 아는 건 소나무뿐...  

 

패랭이꽃, 가래풀, 심장초, 부들, 물레나물, 돼지풀, 괭이밥, 개밀, 창포, 부들, 박주가리, 허클베리, 넌출월귤, 로마풀, 노박덩굴... 숲속에 피어있는 이름없는 꽃들도 실상은 다 이름이 있다. 다만 내가 모를 뿐. 

 

되강오리, 도요새, 물수리, 개똥지빠귀, 딱새, 티티새, 들꿩, 퍼치, 피라미, 황어, 기름종개, 메기, 송어, 장어, 강꼬치고기, 소금쟁이, 물매암이.우드척, 수달, 사향쥐... 숲 속과 호수에 사는 아름다운 동물들...

 

수많은 식물과 동물들의 이미지를 찾아 보는 것도 하나의 큰 재미였다. 밖을 나섰을 때 나의 눈은 아파트 정원에 심겨진 나무들과 꽃들의 팻말을 향하고 있었다. 

 

소로우의 철학은 무엇인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는 블랙홀과 같아서, 자연과 함께 할 여유의 시간의 수분을 빨아들여 삶을 메마르게 한다.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얻으면, 그에 만족하고 나머지의 시간은 자연과 벗하여 살아가며, 영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보내라. 이것이 가치있는 행복한 삶이다. 이것이 소로우의 단순성을 향한 철학이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그리고 법정과 같은 인물들은 소로우와 같은 철학을 지니고 있다. 간디는 "나는 큰 즐거움을 가지고 <월든>을 읽었으며, 그로 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법정은 열반에 들기까지 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영국의 시인 예이츠는 "한 때 나는 <월든>을 읽고 아니스프리 섬에서 소로우와 같은 생활을 해보려는 야심을 가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단순성의 미학은 제1장 숲 생활의 경제학에서 어떻게 보면 지나치리만큼 편협하게 전개되고 있다. 토를 달고 싶은 마음도 들게 된다. 하지만 끝까지 읽고 나면, 가장 절실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월든>의 경이로운 문장은 우리의 마음의 우물속에 들어앉아서 자연에 대한 그리움의 샘물을 끊임없이 솟구쳐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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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즈 선정 100권 중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인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 오, 멋진 신세계여......"

(<템페스트> 5막 1장중에서)

 

지금까지 읽었던 뉴욕타임즈 100선 중에서 가장 일기 쉬웠다. 하지만 그 속에 인간, 자유, 행복, 신, 종교등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겨주는 책이기도하다.

 

 

특히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문명국으로 온 야만인 존이 문명국의 세계총통 무스타파 몬드와 인간과 행복, 자유와 종교, 예술등에 대해 나누는 대화는 자유냐, 행복이냐 하는 어려운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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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99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긴 침묵이 흘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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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야만인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무스타파 몬드는 어깨를 추슬렀다.

"마음대로 하게"하고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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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의 시대적 배경은 포드 기원 632년이다. (헨리포드는 미국의 자동차 왕으로 1863년~1947에 살았다.) 기원 2495년인 셈이다.

 

전체주의 정부는 과학기술을 사용하여 안정된 사회를 구축해 놓았다. 총통은 "안정, 사회 안정이 없이는 문명은 있을 수 없다. 개인적인 안정이 없이는 사회의 안정도 없다...안정이야. 이것이야말로 원초적인 필요조건이며 궁극적인 필요조건이야. 안정! 여기에서 현재의 모든 것이 탄생한 것이다." 라고 말한다. 안정된 사회가 형성되었지만 그 댓가로 인간적인 감정과 격정의 상실, 획일화등으로 인해 원초적인 자유는 사라지고 만다. 

 

이러한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불만스러운 버나드 마르크스는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여행하던 중, 한때는 문명국에 살았던 린다와 그녀의 아들 존을 만나게 된다. 그들을 문명국으로 데려 오면서 존은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게 된다. 

 

존은 레이나에게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만인은 만인의 소유물"이란 구호아래 완전히 개방된 성문화에 환멸을 느낀다. 또한 린다의 죽음에, 아니 모든 죽음에 대해 무덤덤한 비인간적인 문명에 극심한 혐오감을 갖는다.

 

존은 세계총통 무스타파 몬드와 이야기하는 중, 이 문명 사회는 안정과 행복을 위해 인간의 존엄성과 개별성등을 포기한 사회라는 것을 알게된다. 인간이 꿈꾸어왔던 사회가 바로 이것이란 말인가? 존은 환멸과 혐오감속에 문명사회를 벗어나 새로운 자신만의 사회를 만들려고 하지만... 

 

<멋진 신세계>는 여러번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  http://n_dimension.blog.me/120108284571

 

 

영화 <매트릭스>에 보면, 인체에너지를 기계에게 빼앗기고 가상세계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가상세계에서 벗어나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대비되는 모습을 보게된다.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며 만족하며 살아가는 삶을 진정한 행복이라 할 수 있는가? 가상세계에서 만족하며 살아가는 삶을 구출할 필요가 있을까?

 

최근에 읽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도 생각난다. 밀은 자유가 사라지고 몰개성화된 사회, 획일적 사회는 발전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밀의 주장에 따르면 <멋진 신세계>의 문명 사회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결국은 붕괴할 운명인 셈이다. 

 

<멋진 신세계>는 그리 멋지지 않다. <멋진 신세계>에서 제시하는 완전한 사회는 우리가 바랄만한 그런 사회는 아니다. 단지 올더스 헉슬리는 이런 세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메세지를 전하고 싶은게다.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열매에 너무 취하게 되면 그것은 독이 되기도 한다는 메세지?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면서 동시에 행복을 주는 사회를 기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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