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를 읽다 /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대략 비슷한 시기에 벚꽃이 동시에 피어나듯, 피서 인파도 그렇게 개미떼처럼 몰려드는 바람에 유명한 여름 관광지는 발디딜 틈 없이 붐빈다.  휴가란 차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바가지에 치이고...이렇게 사서 고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이런 고생을 사서 하더라도 남들 다 가는 휴가철에 집에 남아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는 것은 성에 차지 않는다. 그래서 보따리를 들쳐매고 고난의 길을 떠나는데, 차라리 가까운 조용한 곳을 찾는 것은 어떨까?

 

휴가 첫째날은 집 앞에 있는 광안리 바닷가에서 한나절을 물놀이하며 보냈다. 둘째날은 가까운 황령산 기슭게 있는 수영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논어를 읽다." 논어를 읽고 그 행간을 읽어내는 서로 다른 독법이 있다. 공자를 성인으로 우르러 보며 공자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심오한 진리가 담겨 있는 듯이 그 의미를 읽어내려고 하는 것이 그 한 편이라면, 또 다른 편에는 공자도 농담도 하고 실수도 하는 한 인간으로서 바라 보며 그러한 맥락에서 논어를 읽는 방법도 있다. 양자오는 "논어를 읽다."에서 공자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 주기 위해 애쓴다. 공자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제자인 자로는 때로는 공자의 잘못을 지적하며 화를 내기도 하고 대어들기도 한다. 이것은 공자와 그의 제자간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된다. 공자는 일방적인 가르침을 베푸는 스승상을 따르기보다는 제자들과 서로 상호 작용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스승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스승은 학생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특히 자신이 말하고 가르치는 내용에 대한 학생들의 의문과 반박을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 정진하는 사람이어야한다."

 

퇴계 이황과 기대승간의 치열한 이기론 논쟁이 생각난다. 기대승은 이황보다 나이가 한 참 어린 후배이다. 그런 그가 당시 유림에서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대성리학자 이황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황은 어린 기대승의 문제 제기를 배척하지 않고, 겸손하게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으로 인정하고 그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론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나간다. 이황은 공자가 보여준 스승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의문과 반박은 자신의 이론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 귀중한 자산임을 기억해야겠다. 

 

최근에 읽고 있는 신영복의 <담론>에서 독법이라는 말을 보았다. 논어에 대한 양자오의 독법과 신영복의 독법은 상당히 다르다. 양자오는 논어가 기록될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논어를 이해해야 한다는 독법을 가지고 있다. 신영복님은 논어에 나타난 사상들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논어를 읽고 있다. 서로 다른 독법이다. 이 두가지 독법을 결합시키면 고전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바탕에 서서 현실을 바라보면서 현실을 개조해 나가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한창 더위가 지나갈 무렵 오후 3시경에 도서관을 나와 자동차로 황령산 중턱에 있는 청소년 수련관에 들린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광안 앞바다와 광안대교이다. 푸른 바다에 걸쳐진 광안대교의 하얀색이 눈에 두드러진다. 어디까지가 바다이고 어디까지가 하늘인지 모호하다.

 

 

 

 

 

 

청소년 수련원에 있는 숲속 도서관에서 식물도감을 꺼내서 이전에 보았지만 이름을 몰랐던 꽃들을 찾아 본다. 산에서, 정원에서 보았던 꽃을 도감에서 만나니 묘한 반가움이 스친다.

보라색 '꿀꽃', 클라우드님이 어렸을 때 먹곤 했다는데, 아마도 꿀이 있는 모양이다.

 

덩굴에 피는 '계요등', 닭오줌등굴이라는 뜻이란다. 아직 냄새는 맡아 보지 않았는데, 지린내가 나는 모양이다. 꽃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줄기나 잎을 만지면 고약한 냄새가 나기때문에 구렁내덩굴이라고도 부른단다.

 

청소년 수련원 둘레 산책길을 어슬렁거리다 선선한 선들 바람이 부는 해질녁과 마주 대한다. 서산 가까이 기울어진 태양은 마지막 광선을 비스듬하게 쏘아낸다. 숲 사이를 뚫고 나온 빛이 길가에 서 있는 나무 기둥 위에 짙은 명암을 새긴다. 어둠에 자리를 내어 주며 생명을 마감하려는 빛은 죽음처럼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불현듯 저녁 햇살이 가득찬 숲을 걷고 싶은 충동이 인다. 숲속으로 향한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흙 길의 부드러운 촉감 때문일까, 오솔길은 아스팔트 길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사랑스런 숲 길을 오랫동안 걷고 싶다. 산을 그리 좋아 하지는 않는데, 무슨 까닭일까? 여름 한 낮의 열기는 서늘한 저녁 바람에 쫓겨 사라지고, 온 몸을 스치는 상쾌함이 날 행복하게 만든걸까? 아니며 빛과 어둠이 자리바꿈을 준비하는 이 즈음 특유의 뭐라 말할 수 없는 정겨운 분위기 때문일까? 황령산 중턱에서 우연히 마주친 서늘한 숲 바람 부는 저녁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기억이 될 것 같다. 이렇게 이틀간의 휴가는 끝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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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 하우저 씀/ 백낙청 반성완 염무웅 옮김/ 창비

<뉴욕타임즈 선정 100>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예술이란 무엇일까? 미를 추구하는 것이 예술이라면, 그렇다면 '미'란 무엇일까?

 

생존 문제가 당면한 최대 이슈였던 선사시대에 과연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있었을까? 서쪽 하늘에 걸린 붉은 노을은 수렵과 채취로 살아가던 시대의 사람들의 눈에도 아름답게 비쳤을까?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보면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순간에도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을 보며 말없이 그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극한 상황에서도 아름다움을 보는 눈은 여전한가 보다. 아주 오래된 시절에도 그러했을까? 붉은 노을이 다음 날 맑을 것이라는 징후로 인식되었다면 이것은 또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 더하여 또 다른 아름다움의 의미가 더해졌을 것이다. 저녁 노을은 다음날의 아름다운 사냥 활동을 보장해 주는 희망의 색깔이었을테니 말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시대별로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선사시대의 예술과 고대 오리엔트의 예술이 다르며, 그리스 로마 예술과 중세의 예술이 다르다. 시대별로 예술이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 다르다는 것은 미를 평가하는 안목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서로 상이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름다움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걸까? 이런 흥미를 자극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이다.

 

아놀드 하우저는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문학과 예술을 조명하면서 이것이 사회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우저의 예술과 역사에 대한 해박함만이 아니라 이 둘을 관통하는 연결고리를 탐색하는 그의 직관은 단지 예술뿐만이 아니라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통찰로 이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예술과 역사에 관한 책일 뿐 아니라 인간 보고서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 하다.  

 

구석기시대 동굴 벽화는 아주 생생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물을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연주의적인 양식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은 아주 흥미롭다. 오히려 시간이 흘러 문명이 발달하면서 표현 방식이 기하학적인 양식을 보이고 있다. 문명은 자연을 그대로 본 뜨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단순화 내지는 변형인 것이다. 선사시대의 초기 예술이 어린 아이들의 낙서와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면 오히려 받아들이기가 쉬웠을 것이다. 단순화과정은 인류 초기의 지적 발전의 한 단계였던 것이다. 

 

이집트의 절대 통치자 파라오의 권위를 드 높이는 수단으로서의 예술, 그리고 그리스 로마에서의 자연주의의 재등장 및 고전주의 예술, 중세에 이르러서는 종교적적 가치를 아름다움으로 보는 정신주의적 예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사고 방식도 달라지고 미를 바라보는 안목도 달라지고, 그것을 표현하는 양식도 끊임없이 변해 왔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예술을 통해 그 시대를 읽는 눈은 대단한 안목이다. 변모하는 예술을 통해 아름다움을 보는 안목의 변화를, 그리고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한 사고 방식의 변화을 , 더 나아가 그 사고 방식을 변화시켰던 역사의 흐름을, 그리고 궁극적으로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원인 인간 본성을 생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목차>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제1장 선사시대

1. 구석기시대: 마술과 자연주의

선사시대의 자연주의/ 생활의 방편으로서의 예술/ 예술과 마술

 

2. 신석기시대: 애니미즘과 기하학 양식

선사시대의 기하학 양식/ 마술과 애니미즘/ 농경문화의 전통주의/ 예술사회학의 애매성

 

3. 마술사 또는 성직자로서의 예술가

전문 직업 또는 가내수공예로서의 예술/예술활동의 분화/ 농민예술과 민중예술

 

제2장 고대 오리엔트의 도시문화

1. 고대 오리엔트 예술의 동적 요소와 정적 요소

도시문화와 도시예술/ 도시적 강제와 예술적 가치

 

2. 이집트 예술가의 지위와 예술 활동의 조직화

예술고객으로서의 사제층과 궁정/ 예술 작업장으로서의 사원과 궁정/ 예술품 제작의 조직화

 

3. 중제국시대 예술의 유형화

이집트 예술의 여러 전통/ 궁정예법과 초상/ 정면성의 원리/ 정석적 형식

 

4. 아메노피스4세 시대의 자연주의

새로운 감각성/ 양식의 이원성

 

5. 메소포타미아

 

6. 끄리띠

양식상의 대립

 

 

제3장 고대 그리스와 로마

1. 영웅시대와 호메로스 시대

영웅시대와 사회윤리/ 영웅시/ 서사시의 발생/ 궁정 가창시인과 유랑 음유시인/ 호메로스 서사시의 사회관/ 헤씨오도스/ 기하학 양식

 

2. 아케이즘과 참주제하의 예술

합창대용 서정시와 사상서정시/ 올림삐아 경기의 승리자상/ 개인주의의 맹아/ 참주의 궁정/ 종교예식과 예술/ 형식의 자율화

 

3. 고전주의 예술과 민주정치

고전주의와 자연주의/ 귀족계급과 민주제/ 비극/ 미무스/ 선전기관으로서의 극장/ 조형예술에서의 자연주의

 

4. 그리스의 계몽사조

쏘피스뜨들의 교양이상/ 계몽사조기의 예술양식/ 에우리삐데스/ 에우리삐데스와 쓰피스뜨 철학/ 플라톤과 당대 예술/ 시민적 취미

 

5. 헬레니즘 시대

사회적 평준화/ 합리주의와 절충주의/ 복제품의 제조/ 새로운 예술장르들

 

6. 제정시대와 고대 후기

로마의 초상조각/ 연속묘사법/ 로마시대의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7. 고대 그리스, 로마의 시인과 조형예술가

예술가와 예술 작품의 괴리/ 예술작품의 시장/ 로마에서의 예술가에 대한 평가

 

제4장 중세

1. 초기 그리스도교 예술의 정신주의

종세의 개념/ 고대 말기 및 초기 그리스도교 예술의 정신주의/ 로마 예술 전통의 붕괴/ 교육수단으로서의 예술

 

2. 비잔띤 제국의 정교합일체제하의 예술양식

비잔띠움의 비도시문화적 성격/ 관료귀족/ 궁정양식과 사원양식

 

3. 우상파괴운동의 원인과 결과

정치적 군사적 배경/ 예술양식에 미친 영향

 

4. 민족 대이동기에서 카롤링어 왕조의 문예부흥기까지

민족대이동 시대 미술의 기하학 양식/ 아일랜드의 미니어처와 문학/ 프랑크 왕국과 신흥 봉건귀족/ 도시에서 지방으로 문화적 중심의 이동/

교회에 의한 교양의 독점/ 칼 대제의 궁정/ 카롤링어 왕조의 문예부흥/ 궁정양식과 민중양식

 

5. 영웅가요의 작자와 청중

영웅가요의 쇠퇴/ 비전문인 시인과 직업시인/ 민중서사시에 관한 낭만파의 이론/ 무훈시(상송 드 제스뜨)의 발생/ 음유시인의 유래

 

6. 수도원에서의 미술품 생산의 조직화

수도원에서의 육체노동/ 공예미술품/ 밋ㄹ학교로서의 수도원/ 중세미술의 익명성

 

7. 봉건제도와 로마네스끄 양식

귀족계급과 수도사 집단/ 봉건제도의 발달/ 폐쇄적 가정경제/ 전통주의적인 사고방식/ 로마네스끄식 교회건축/ 로마네스끄의 형식주의/

로마네스끄 후기의 표현주의/ 최후의 심판과 그리스도/ 중세의 세속미술

 

8. 궁정적 기사적 낭만주의

도시의 재흥/ 새로운 화폐경제/ 시민계급의 대두/ 문화의 세속화/ 기사계급/ 기사의 계급의식/ 기사계급의 도덕체계/ 궁정적의 개념

문화 역군으로서의 여성/ 고대 그리스 로마 문학 및 기사문학의 모티프로서의 연애/ 기사계급의 연애관/ 주군에의 봉사와 연애에의 봉사/

기사적 연애의 허구성/ 성심리학적으로 본 기사적 연애/ 문학사적 전거의 문제/ 성직 시인의 몰락/ 트루바두르와 음유시인/ 독서를 위한 소설/

메네스트렐/ 방랑문인/ 파블리오

 

9. 고딕 예술의 이원성

고딕의 범신론과 자연주의/ 개인주의의 맹아/ 진리의 이중성/ 유명론의 세계관/ 순환적 구도형식/ 고딕 건축의 예술 의욕과 기술/

고딕 예술의 역동성/ 새로운 감수성과 기술만능주의

 

10. 건축장인조합과 길드

건축장인조합에서의 예술활동이 조직화/ 미술품의 집단적 제작/ 길드조직/ 건축현장과 제작소

 

11. 고딕 후기의 부르즈와적 예술

중세 말기의 사회적 대립/ 기사계급의 몰락/ 중세의 자본주의/ 문화담당자로서의 시민계급/ 중세 말기의 민중문학/ 후기 고딕의 자연주의/ 영화적 시각/

필사본 삽화와 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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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 최인호 지음/ 열림원

 

최인호 작가는 <유림>을 쓰기 위해 3년동안 수십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유림이란 유학의 숲이란 뜻이다. 이 책 <유림>에서는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로부터 시작해서 맹자, 주자, 조광조, 이율곡, 이퇴계등의 중국과 조선의 유학자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정점은 퇴계 이황이다. 공자와 맹자의 전통을 이어받은 주자, 주자로부터 시작된 성리학은 조선의 건국이념이 되었고, 조선은 수많은 성리학자들을 낳는다. 그 중에 퇴계 이황은 주자의 '성즉리(性卽理)"의 사상을 충실히 발전시켜 성리학 최고봉의 자리에 앉아 '해동주자'라 불린다.

 

유학은 오랫동안 거대한 중국의 통치이념으로서 역할을 했고, 조선의 건국 이념이기도 했지만, 정작 우리네가 유학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많지 않다는데 순간 깜짝 놀란다. 서구 문명과 문물에 밀려 보이지 않는 구석에 초라하게 자리한 유학의 실체는 무엇일까? 예로부터 충효를 중시하는 정신은 유학에서 비롯된 것이며, 조선의 철학사를 풍미하던 성리학이니, 또는 양명학이니, 퇴계 이황의 이기이원론, 이율곡의 이기일원론이니 하는 말은 들어 보았지만 도대체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도통 알지를 못했다는 점을 실토해야겠다. 최인호의 유림 1~6권은 유학의 숲이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하여 아시아의 동쪽 작은 나라인 조선에서 이황에 의해 꽃을 피우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유림 1권은 유학의 왕도를 현실 정치에 접목하려다 실패한 정치가 조광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공자가 자신의 사상을 정치에 접목하려다 실패하였고, 맹자 역시 동일한 길을 밟았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한일까? 조광조는 중종의 총애를 받고 혜성처럼 등장하여 유학의 정신을 바탕으로 정치를 개혁하려 하였으나, 훈구파에 밀려 생명을 내어 놓아야 했던 비운의 정치가이다. 조광조와 함께 한 사림파의 앞날이 촉망되던 수많은 젊은 선비들도 사화에 말려 추풍낙엽처럼 스러져 간다.

 

 

 

유림 2권은 공자의 이야기이다. 최인호의 <소설 공자>와 거의 같다. 18년동안 수많은 나라들을 주유하며 자신의 뜻을 펴 보이려 했지만, 패도정치가 만연하던 춘추전국시대에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공자의 꿈은 허망하기만 하다. 고향 노나로 돌아온 공자는 현실정치에 대한 열망을 접고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며 저술에 힘쓴다. 

 

 

 

유림 3권은 퇴계 이황의 이야기. 퇴계의 불행했던 결혼생활과 노후에 나비처럼 날아든 사랑 - 퇴계를 향한 기생 두향의 일편단심을 이야기한다. 이황의 부인 권씨 부인은 어릴 때 받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여자였다. 사화로 인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퇴계는 권질이라는 분을 존경하고 있었는데, 유배되어 간 권질을 방문했다가 그로 부터 간곡한 요청을 받는다. 염치없지만 모자란 딸을 맡아달라는 것이다. 퇴계의 부인 권씨부인은 바로 권질의 딸이었던 것이다. 퇴계는 정신적으로 모자란 부인때문에 평생 마음의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한 번도 이를 내색하지 않고 군자의 도로 한결같은 정성으로 부인을 대한다. 퇴계는 가정생활에서 먼저 군자의 도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는 실제로 이러한 상황을 오히려 자신을 수양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고 한다.

 

퇴계는 나이 사십후반에 임금의 명으로 단양군수로 부임하게 된다. 19세의 기생 두향은 퇴계를 존경하며 연모한다. 퇴계도 두향을 지극히 아낀다. 9개월간의 두향과 꿈같은 세월을 보낸 후 퇴계는 단양을 떠나게 되고 두향과는 영원한 이별을 맞는다. 고향으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하고자 했던 퇴계에게는 두향의 사랑이 오히려 거침돌이 될 것이라 여겼던 탓이리라. 이후 두향은 퇴계를 그리워하며 평생 수절하며 지내다 퇴계가 죽은 해 물위에 몸을 날린다. 그리워하면서도 더 이상 만나지 않았던 그들. 퇴계가 두향을 이별하며 남긴 전별시는 가슴이 아린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더라

서로 보고 한 번 웃은 것 하늘이 허락한 것이었네.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봄날은 다 가려고 하는구나." 

 

 

 

 

 

4권은 맹자의 이야기, <소설맹자>와 거의 동일한 내용이다. 맹자는 성선설로 공자의 유학을 형이상학의 경지로 끌어 올렸으며, 제자쟁명의 시대에 수많은 사상가들과의 논쟁을 통해 유학을 지켜내고 유학을 발전시킨 맹장이다. 맹자가 성선설의 근거로 제시했던 사단 -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에서 인의예지가 나타난다고 보았다. 공자는 성인이라 불리고, 맹자는 아성으로 불린다. 유교사상을 공맹사상으로 부를 정도로 유교에 대한 맹자의 기여도는 지대했다.

  

 

 

<유림> 5권은 율곡 이이의 이야기이다. 율곡의 어머니는 유명한 신사임당, 율곡은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명석함을 보여주었다. 태몽으로 용을 보았다고 해서 아명은 몽룡이었다. 율곡의 나이 15세에 신사임당이 죽고, 새로 들어온 새어머니와 형과의 갈등으로 가정에 우환이 있어 고통스런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아마 나이 19세에 불문에 귀의한 것도 이 때문이 아니련가. 하지만 1여년의 방황끝에 율곡은 다시 유교로 돌아온다. 율곡은 퇴계를 찾아가 2박3일을 머물며 이야기를 나눈다. 퇴계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은 율곡은 퇴계를 정신적 지주로 삼고 유학에 정진하고자 하는 듯을 굳히게 된다. 이후 과거시험에 <천도책>으로 장원급제하게 되는데, 그 과거시험의 답안지였던 <천도책>이 소개되고 있다.  

 

 

 

6권, 다시 이퇴계의 이야기이다. <유림> 6권에서는 조선 성리학 역사상 최대의 이슈였던 기대승과과 사단칠정논변이 전개된다. 한참 연배가 아래인 기대승과 편지를 통해

심도깊은 철학적 논의가 이루어진다. 퇴계의 사상에 대한 기대승의 의문제기에 퇴계는 자신의 사상을 돌아보고 미흡하고 잘못된 점은 겸손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이론을 수정한다. 참 대인배다운 모습이다. <유림> 6권에서는 이기론의 역사가 실려있다. 주돈이의 태극사상, 정이 정호 두 형제의 성리론, 유학의 전통과 당시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주희)의 성리학, 육구연으로 부터 왕양명에 이르는 양명학등등...일종의 정치사상으로 시작된 유학이 어떻게 형이상학적 철학으로 발전되었는지 그 경위를 흥미있게 보여준다. 성즉리(性卽理)는 성리학의 신조, 심즉리(心卽理 )는 양명학의 신조...양명학은 선불교와 유사하다. 주자 역시 젊어서는 선에 심취했으나 이연평을 만나 성현들의 책을 읽은 이후 유학의 오묘함에 눈을 뜬다. 아버지 주송으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던 중 아버지가 하늘을 가리키며 '천'이라고 이야기하자, 하늘위에는 무엇이 있느냐고 질문한 주희는 어른이 되어 물질적인 우주의 배후에는 더 높은 근본 원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수십년이 지난 후에 그것이 '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퇴계가 9살때 숙부로부터 '성즉리'를 배우다가, '리'가 무엇인가라고 숙부에게 물어 숙부를 당황케 하였다. 숙부는 대답을 미루고, '직접 생각해 보아라'고 말한다. 퇴계는 몇일을 생각한 끝에 '리'는 '마땅히 그래야 할 (시)라고 생각된다'고 숙부에게 대답한다. 퇴계는 이후 평생 '리'라는 화두를 붙잡고 파들어간다. 퇴계의 이기이원론의 원류는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매화를 극진히 좋아했던 퇴계는 '매화에 물을 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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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맹자 /순자  (0) 2015.05.12

<다산 - 그에게로 가는 길> / 김은미 김영우 지음 / 동녘

 

정약용을 알고 싶어 한승원의 소설 <다산>을 읽었다. 하지만 정작 다산이라는 인물과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는 미진했었다. 이번에 읽게 된 <다산 - 그에게로 가는 길>은 정약용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인간 정약용의 모습을 가감없이 바라 볼 수 있도록 지나치게 미화하지 않고 그의 약점이랄 수 있는 것까지 보여주고 있다. 구성 자체는 사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되어 있어 청소년을 위한 책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꽤 많은 양의 정보를 담고 있어 다산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될 만한 책이라 생각되었다  

 

정약용의 고향 마재, 그 건축에 정약용이 일익을 담당했던 수원화성, 정약용이 결혼한 살았던 서울, 18년간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등, 네군데의 정약용의 주요 거점을 답사하며 정약용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형태로 쓰여진 이 책은 읽기가 수월한 편이다. 

 

1. 어디에서나 한강이 보인다. - 정약용의 고향 마재

다산, 사암, 열수...정약용을 부르는 다른 이름들이다. 정약용 선생은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 중 근 10여년간을 야생차가 많이 나는 만덕산의 기슭에 있는 다산초당에서 보냈다. 다산이란 '차가 많이 나는 산'이란 뜻이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이라 부른다. 한편 정약용의 일생을 다룬 <사암연보>라는 책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에 사암 정약용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정약용 선생은 고향 마재의 한강을 그리워했으며, 이 한강의 옛이름이 '열수'라고 고증하여 주장하면서 열수에 대한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서 '열수'선생이라 부르기도 한다. 선생의 어릴 때 이름은 '귀농'이었다. 정약용의 아버저 정재원은 당파 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귀농하여 마재에 살면서 정약용을 낳았기에 그렇게 불렀다 한다. 또한 어릴 때 마마(천연두)를 앓아 눈썹 위에 상처가 생기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한 쪽 눈섭이 두개로 보였다. 그래서 눈썹이 세개처럼 보여 '삼미자'라는 별명도 있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 대부분 한강을 끼고 있는 지역에 포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아마도 물길을 따라 서울로의 접근성이 좋아 신 문물에 일찍 접할 수 있었다는 점과 서로 왕래하기에 편리했다는 점이 그 이유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실학의 집대성이라 불리기도 하는 정약용의 고향 마재 역시 한강을 끼고 있는 지역이다. 정약용은 18세(1784년)에 큰 형수의 동생인 광암 이벽을 통해 서학(천주교)를 처음 접했다. 이 서학은 정약용의 운명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남인 정약용은 노론으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게 되는데, 그 빌미가 된 것이 바로 서학이다. 서학은 유교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게된다. 천주교 탄압사건인 신유사옥때 정약용의 형 세째형 정약종은 사형당하고,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가고,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고향 마재에 살게된 정약용은 자신의 집을 '여유당'이라고 불렀다. '여유'란 <노자>에 나오는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 같은 조심스러움'을 뜻하는 말이다. 당시 노론이 득세하고 있던 시대적 상황에서 남인 정약용이 삶을 부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심초사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2. 생각한 대로, 그대 생가한 대로 - 경기도 수원 화성

정조는 왕이 된 후에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겼고, 이로 인해 화성에 신도시가 건설되게 된다. 정조가 사도 세자의 묘에 참배하러 올 때 임시 거처로 머물 수 있도록 화성 행궁을 짓는데 있어, 정조는 3년 상중에 있던 정약용에게 화성의 설계를 맡겼고 정약용은 설계는 물론 거중기를 만들어 화성의 건축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수원 화성에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설치된 군영인 장용영이 있었다. 장용영은 임금을 호위하던 친위병이었는데, 장용내영은 한양에, 장용외영은 수원 유수부에서 임금을 호위했다.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는 곳이 '장대'였는데, 서쪽에 있는 장대는 서장대, 동쪽에 있는 장대는 동장대라고 부른다.   

 

정약용은 삼년 상이 끝난 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을 때, 서용보의 과실을 밝혀냄으로 이 때부터 평생 서용보와의 악연이 시작된다. 1801년 신유사옥때 서용보의 반대로 석방이 무산되는가 하면, 1803년 정약용을 해배하라는 명에 서용보가 반대하여 무산되었고, 1819년(58세) 정약용을 중용하려는 논의에서 서용보 반대하는 등, 이렇듯 결정적인 순간마다 서용보와의 악연이 질기게 정약용을 따라 다니게 된다.

 

정약용이 속해 있던 남인은 천주교에 우호적인 신서파와 천주교를 반대하는 공서파로 나누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정치적 입지가 약한 남인에게 서학(천주교)는 아킬레스의 건이었다. 일찌기 서학에 접한 남인들 사이에 서학이 번져 나가고, 서학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커지자, 남인 사이에서도 서학을 경계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공서파의 서학을 싫어하는 경향은 당시 입지가 좁았던 남인의 세력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런지도 모른다. 정약용은 신서파에 속해 있었는데, 주문모 사건으로 공서파의 공격의 타켓이 된 정약용을 보호하기 방편으로 정조는 정약용을 외지인 금정찰방으로 보낸다. 중앙 정치에게 격리시켜 공격의 예봉을 피하게 하려는 수단이었다. 이 때 정약용은 정조에게 <변방사동부승지소>라는 글을 올려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한편 천주교와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정조에게 고한다. '자명소'라고도 불리는 이 글에 정약용은 자신이 천주교 책을 읽은 적은 있으나 천주교 신자는 아니라고 밝힌다.

 

이후 정약용은 황해도 곡산 부사로 1년 11개월 부임하게 된다. 이 때의 목민관의 경험이 <목민심서>를 집필하는 데 기초가 된다. 곡산 부사로 부임할 당시 주세 거부 시위를 주동했던 이계심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하였고, 호구 조사후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표로 정리한 종횡표도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지석영 선생의 종두법이 나오기 전에 이미 홍역의 치료 방법을 소개한 <마과회통>도 쓴 것도 이 즈음의 일이었다.

 

곡사 부사 이후 서울로 돌아온 정약용은 형조 참의로 두달간 일했는데 그 때의 경험은 <흠흠신서>을 집필하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후일 정약용은 자신이 접하고 조사한 사건을 바탕으로 <흠흠신서>를 쓰게 된다. '흠흠'이란 걱정이 되어 잊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재판을 할 때 아주 신중하게 생각하고 조사하여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3 설혹 너무 태양 가까이 날아

정약용의 가족 역사는 천주교 초기의 역사와 맞물려 있다. 정약용의 세째 형 정약종의 가족은 온 가족이 모두 몰살당한다. 정약종은 물론이요, 그의 아들 철상, 하상, 며느리, 딸까지 온 집안이 모두 순교를 당하게 된다. 당시 천주교와 관련이 있던 많은 사람들이 정약용과 인척 관계에 있었다. 처음 천주교를 책을 통해 배워 받아들인 이벽은 큰 형의 처남으로 사돈관계에 있었다. 이벽은 이승훈을 북경으로 보내 최초로 영세를 받게 하는데,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다. 그리고 천주교 백서사건의 주요인물인 황사영은 조카 사위, 모친상을 당하여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해서 죽임을 당한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사촌, 윤지충의 외사촌인 권상연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순교를 당하였다. 

 

천주교 박해의 이면을 들여다 보면, 이는 딩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이 천주교를 빌미삼아 남인들을 공격한 것임을 알게 된다. 특히 남인이었던 정약용을 공격하기 위한 방편으로 천주교 탄압이 이루어졌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약용 은 자신이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고 해명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먼 유배길을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정약용을 총애하던 정조가 죽은 이후 그를 막아줄 방패막이가 없었던 것이다.  

 

 

4 언제나 마음은 - 강진 유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되어 갔을 때, 처음에는 거처를 구하기조차 힘이 들었다. 마침 주막집 노파가 방 한 칸을 내 주어 4년을 보내게 되는 데 이 방을 '사의재'라고 한다. '사의'란 생각과 용모와 언어와 행동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이후에 고성암이라는 절의 한 쪽 방인 보은 산방에서 2년을 거처했다가 제자인 이학래의 집으로 가게 되고, 유배당한 지 8년만에 다산 초당으로 자리를 옮긴다. 귤동마을에 살던 귤림처사 윤단과 그의 아들 귤원처사 윤규가 정약용을 다산 초당으로 초대하였다. 다산 초당은 윤단의 아버지 윤취서가 지었으며, 다산 초당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였다.

 

강진은 정약용의 어머니 해남 윤씨의 고택이 가까운 곳이었다.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가 유명한 화가 윤두서이고, 윤두서의 증손자가 정약용이다. 어쨌든 이 고택에는 엄청난 책이 있었고 정약용은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학문에 열중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되어 있을 당시 수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강진에 있을 때 정약용이 친하게 지내던 아암 혜장이라는 승려가 있었으며, 혜장의 제자 초의 선사는 정약용과 친분이 깊었을 뿐 아니라, 추사 김정희, 정약용의 아들 정학유와는 동갑으로 친구 사이였다. 강진에서 정약용을 수발하던 홍씨라는 여인이 있었으며, 정약용과의 사이에 홍임이라는 딸이 있었다고 한다. 정약용이 18년동안의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마재에 살고 있을 때, 홍씨와 홍임이 정약용을 찾아 왔으나,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다시 강진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정약용이 18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마재로 돌아온 때가 57세인 1818년, 그리고 그가 1836년 75세로 사망할 때까지 노소론계의 여러 학자들과 교우관계를 유지하며 학문에 매진하며 저술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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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맹자> / 최인호 지음

 

■ 묵자와 양자

 

■ 묵자의 사상 

 

묵자는 중국 역사상 가장 특이한 사상가이다. 묵자는 유가의 제자였으나 유교의 문제점에 실망한 이후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을 발전시킨다. 묵자가 공자에게 느낀 최초의 불만은 봉건제도가 지닌 모순으로 부당하게 고난을 겪어야 되는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에 눈을 떴던 데 있다묵자 자신도 천민 계층 출신으로 동일한 고난을 당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가가 통치계급의 입장을 옹호하며 예악을 위주로 하여 서주 초기의 봉건 사회를 재현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큰 반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묵자는 사람들의 가깝고 먼 관계와 존비 관계를 엄격히 따져 봉건 계급 제도를 확고히 하려는 유가의 태도, 그리고 예악이나 따지며 귀족이나 제후들에게 기생하는 유가의 비생산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묵자의 사상을 전하는 책 <묵자>는 유가의 모순을 공격하는 통렬한 비판적 성격을 띠고 있다. 

 

묵자의 사상의 핵심은 '겸애'이다. "자기를 죽여 천하를 보존케 할 수 있다면" 그 길을 따라 "자기를 죽여 천하를 이롭게 하"려는 사상이 묵자의 사상이다. '천하의 모든 나라도 하늘의 고을이요 천하의 모든 사람도 하늘의 신하이니, 하늘은 모든 신하들인 만 백성을 차별없이 공평하게 사랑하고 있다.' 이러한 공평한 하늘의 사랑은 겸애라는 사상으로 발전된다. '겸'이란 자기와 남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 자기와 남의 구별이 없는 것차등을 두지 않고 사람들을 모두 똑같이 대해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묵자의 겸애론은 나와 너의 구별이 없는 절대적인 사랑을 뜻하는 것이다. 

 

묵자의 사상은 평화와 사랑을 기치를 드 높인다. 묵자의 평화는 비폭력 평화가 아닌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여 평화를 이루려는 현실참여적 평화였다. 묵자의 사상을 따르는 제자들은 하나의 학파를 초월한 일종의 종교 집단을 형성했다.

 

 

 

■ 양주의 사상

 

양주는 노자가 주창한 자연주의 옹호자로 도가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가이다. 양주는 '삶을 대하는 유일한 방식은, 인위적으로 방해하거나 바꾸려 하지 말고 삶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라고 주장함으로 즐겁게 사는 것이 바로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며, 이는 남이 아닌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한다. 지나친 집착과 탐닉은 지나친 자기 억제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고, 남을 돕든 사랑하든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이다. "사람마다 천하를 이롭게 하려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천하는 안정될 것이다." 라는 말은 노자의 사상인 '무위'를 강조한 말이다. 저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나서는 사람들로 인해 세상은 더욱 더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오히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무위야 말로 세상을 구할 방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무위야말로 실로 못하는 일 없이 다 하고 있다'(무위무불위) 노자적 무위사상에, '내 터럭 하나로 온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다해도 내 터럭 하나라도 뽑아 주지 않겠다.'는 철저한 무위를 덧붙였던 것이다. 양주의 눈으로 보면 묵자의 겸애는 '유위'의 극치였다. 이러한 사상으로 인해 양주는 극단적인 이기주의, 개인주의, 쾌락주의자로 간주된다. 반면에 묵자는 극단적인 이타주의자집단주의자엄격한 율법주의자로 간주된다. 

 

하지만 양주는 백가쟁명의 시대에 학문의 진리를 찾으려고 치열하게 노력하였던 또 하나의 횃불이었다. 양주와 관련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다기망양'이란 고사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어느날 양자가 사는 이웃집의 양 한마리가 달아났다. 그래서 그 이웃 사람은 자기 집 사람들을 다 동원하여 양을 찾으러 나서도록 한 후 양주에게도 찾아와 사람을 보내달라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저라 양자는 이렇게 물었다. "허허, 양 한마리를 찾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단 말이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웃 사람이 대답하기를, "양이 갈림길이 많은 길 쪽으로 달아났기 때문입니다." 이말을 들은 양자는 갑자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하루종일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았다. 이를 본 양주의 제자 심도자는 왜 그런지 궁금해 하는 후배 맹손양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큰길에는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양을 잃어버린 것처럼 학문하는 사람들은 다방면으로 배우기 때문에 본성을 잃는다. 또 학문은 원래 근본은 하나인데, 그 말단에 와서 이처럼 달라지고 만 것이다. 따라서 그 근본으로 돌아간다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은 것이라네"

 

이런 이야기를 통해 보자면 양자를 극단적인 개인주의자 쾌락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양자도 여러 갈래의 길로 사라진 잃어버린 양, 즉 학문의 진리를 찾으려고 치열하게 노력하였던 백가쟁명의 난세 속에 타오르던 또 하나의 횃불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더 옳은 일이다.

 

 

■ 유학과 묵자, 양자

 

유학은 이타적인 묵가의 겸애사상이나 이기적인 양자의 사상과는 달리 자기를 위하면서도 남을 위하는 중용을 내세우고 있다. 유가에서 말하는 사랑은 차별성을 유지하고 또한 보편성을 가진 것이다.  유가의 사랑은 인간 본성에 근거한 것으로 만천하에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인륜관계는 반드시 친소(친함과 소원함)와 원근이 있는 것처럼 사랑을 펴는 데도 또한 선후의 순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유가의 논리였다.

 

맹자는 굳이 묵자처럼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발꿈치의 털까지 다 닳아 없어질 만큼 두루 사랑하고, 사람을 두루 이롭게 하기 위해서 분골쇄신하지 않아도, 인간의 심성속에 는 선천적인 선의 뿌리인 선근(양심)이 있어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선한 마음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여 '성선지설'을 주장한 것이었다. "측은 지심, 수오지심, 공경지심, 시비지심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다. 측은지심은 인이요, 수오지심은 의이며, 공경지심은 예이고 시비지심은 지이다. 인의예지가 외부에서 나에게 스며드는 것이 아니요, 내가 본래부터 갖고 있는 것인데,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라고 맹자는 말하고 있다.

 

 

■ 묵자와 양자

 

묵자가 유가에서 파생되었다면 양주, 즉 양자는 노자에서 파생되었다. 묵자가 유가의 모순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극대화 시켰다면 양자는 노자의 사상을 더욱 심화시키고 극대화 시켰다. 묵자와 양자는 심각한 양극단의 대립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양자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묵자의 겸애론을 실현 부가능한 공리공론으로 보고 맹렬히 비판한다. 맹자는 이 두 유파를 모두 비판함으로 유가를 더 우위의 사상으로 정립하고 있다 

 

 

■ 영화 '묵공'내에 나타난 묵자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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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맹자> / 최인호 지음/ 열림원

 

 

■ 순자

 

순자는 맹자보다 50년 후에 태어난 유가 사상가였다. 본디 공자의 가르침에는 어짊과 의로움, 또는 충성과 믿음과 같은 덕을 숭상하는 내면적인 정신주의와 실행과 예의를 존중하는 외면적인 형식주의라는 두 가지의 양면이 있었다. 정신주의적인 면은 증자를 거쳐 맹자에게서 크게 발전하는 데 비해 형식주의적인 면은 자유와 자하를 거쳐 순자에게로 계승되었다. 따라서 맹자가 주관적이고 이상적이었다면 순자는 객관적이고 현실적이었다.

 

 

■ 순자의 사상

 

공자와 맹자는 하늘을 도덕적인 권위의 근원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중국 사람들은 자연과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하늘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은 착하고 악함에 따라 사람들에게 복을 내리기도 하고 화를 내리기도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순자는 이러한 전통적인 하늘관을 부정하면서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분리시켰다. 자연에는 자연의 법칙이 있고, 사람에게는 사람의 법칙이 있다는 것이었다. 순자는  "하늘은 만물을 생성하게는 하지만 만물을 분별하지는 못하며, 땅은 사람들을 그 위에 살아가게는 하지만 사람들을 다스리지는 못한다." 라고 말한다.  

 

이처험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분리시킨 순자의 혁명적인 생각은 한편으로는 무당, 점쟁이에 현혹되어 길흉화복을 믿는 미신행위를 멀리하도록 하는 긍정적인 사회현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또 한 편으로는 이러한 생각에서 법가의 사상이 태동하게 된다. "하늘과 땅은 군자를 낳았고, 군자는 하늘과 땅을 다스린다." 순자의 가르침대로라면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군자는 일정한 법칙에 따라 땅을 다스리고 백성들을 다스려야 한다. 백성을 다스릴 이 일정한 법칙이 바로 법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순자는 법의 중요성을 누누이 이야기한다. "법은 다스림의 시작이고 군자는 법의 근원이다."

 

순자의 '성악지설'도 이러한 논의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즉 사람의 본성이 태어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에 반드시 '스승과 법도에 따른 교화와 예의의 교육' 있어야 하는데, 그 교화와 교도의 수단이 바로 법이라는 것이었다. 순자는 맹자가 주장한 사단지심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도덕능력이 아니라 반드시 스승과 법도의 가르침에 의해서 고쳐지는 후천적 '작위'라고 말한다. 순자가 주창하는 성악지설의 골수는 작위이다. 맹자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양심을 근거로 사람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순자는 사람의 본능을 근거로 사람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본능은 나면서 부터 이익을 좋아하고, 아름다운 소리와 좋은 빛깔을 추구하는 욕망이다. 이를 절제하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의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작위'이다. '본성으로 본다면 성인이나 여러 다른 사람들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성인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것은 작위이다.'라고 말함으로, 순자는 인간은 본래 태어날 때부터 악해서 인위(작위)를 거쳐야만 바르게 교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순자와 법가 

 

법가의 창시자인 한비자, 그리고 진시황을 도와 강력한 법으로 통치한 이사 모두 순자의 제자였다는 것은 흥미롭다. 법을 중시하는 순자의 사상은 그의 제자인 한비자에게서 극도로 발전해 법가를 이루게 되었다. 법가는 중국 고대 철학의 한 학파로 일종의 법치사상이다. 전국 시대에 노예들의 끊임없는 폭동과 신흥봉건 지주 계급의 발흥으로 인해 기존의 유가적 예치가 점점 붕괴되어 효력을 상실하자 엄격한 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자고 주장하는 사상이었다. 이사는 순자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나 유가보다는 법가에 가까웠다. 그는 진나라의 재상으로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 데 일조를 담당했으며, 대제국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통치자와 국가 권력을 강화해야 하고, 오직 국가의 강력한 통제와 황제에 대한 절대 복종을 통해서만 사회적 통합이 가능하다고 믿고, 엄격하게 상벌을 내리는 법률체계로써 다스렸던 재상이었다.

 

순자는 맹자의 성선지설을 공격하여 성악지설을 주장하였고, 그의 제자 이사는 천하를 통일한 후에 분서 갱유를 단행함으로, 결국 순자는 전통적인 유가로부터 이단자처럼 취급받고 소외되었다. 더구나 이사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악랄한 간신으로 간주되고 있어, 이러한 이유들로 순자는 유가에서 이단적이라고 배척을 받게 된다.   

 

 

■ 맹자와 순자

   

맹자가 공자의 인의 사상을 구체화시켰다면, 순자는 예악 사상을 구체화했다. 유학의 종지를 수기치인이라고 한다면, 맹자는 수기(자신을 수양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고, 순자는 치인(다스림)에 주안점을 두어, 두 사상이 함께 어우러져 유학이 더욱 풍성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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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맹자> / 최인호 지음/ 열림원

 

동양의 정신을 지배해 온 거대한 강의 발원지는 유교의 시조 공자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수많은 제자백가의 사상중 하나에 불과했던 유가사상이 거대한 강줄기를 이루게 된 것은 백가쟁명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고사직전에 있던 유가를 우뚝 세운 공로자는 공자가 죽은 지 107년 후에 태어난 맹자. 맹자는 유가의 투사가 되어 다른 사상과의 수많은 논쟁에서 승리하고 유가사상을 체계화하여 중국의 중심사상으로 정립한다.

 

맹자는 기원전 372년 추나라에서 태어난다. 노나라에서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삼환씨중 하나인 맹손씨(중손씨)의 후손이다. 그는 편모슬하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맹자의 어머니의 교육열은 대단하여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번이나 이사를 하였고, 짜고 있던 베를 단숨에 잘라버리고는 '공부를 중단하는 것은 다 짠 베를 잘라 버리는 것과 같다'라는 불호령으로 맹자에게 잊지 못할 교훈을 베푼다. 여기서 '맹모삼천', '맹모단기'라는 고사성어가 나오게 되었다. 맹자는 삼십대에 이미 유명한 스승이 되었고, 삼십팔세에 자신의 사상을 펼치려 제, 양, 진나라를 주유하며 23년의 세월을 보낸 후 예순살에 고향 추나라로 돌아와 제자들과 함께 책을 저술하고 학문에 정진한다. 그리고 기원전 289년 여든 세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게 된다. 

 

맹자가 살던 전국시대는 백가 쟁명의 시대였다. 당시 수백의 학파들이 있었고, 중심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10대학파에는 유가외에 도가, 묵가, 법가, 음양가, 명가, 종횡가, 농가, 병가, 소설가, 잡가등이 있었다. 맹자는 이와 같이 많은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나는 백화제방의 시대에 수많은 논쟁속에서 유학을 지켜내면서 유가의 이론을 체계화하고 심오한 사상을 다듬어 나갔다. 그래서 맹자를 일컬어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하기도 하고, 유가의 검객, 검투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 맹자의 경세지략

 

맹자가 처음 찾아간 나라는 전국시대 최고의 변설가로 알려진 '순우곤'이 있던 제나라. 맹자는 제나라 위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순우곤과의 설전에서 승리한다. 제나라 선왕을 만난 맹자는 '무항산무항심'의 경세책을 권한다. "일정한 소득이 없으면 일정한 마음도 없다" 맹자는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경제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형이상학적인 도덕만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인간다운 삶을 살게하는 경제적 기반부터 다까야 함을 이야기함으로 현실주의의 면모도 보인다.

 

 

■ 맹자의 호연지기 

 

맹자의 제자 공손추가 "선생님께서 제나라 경상의 자리에 오르셔서 도를 행할 수 있게 되신다면 이로 말미암아 패업을 이루거나 왕업을 이룬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마음이 동요되십니까, 동요되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질문하자, "나는 마흔살이 되었으니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다."라고 대답한다. 공자는 나이 마흔을 '불혹'이라 했지만 맹자는 '부동심'이라고 했다. 공손추가 다시 "마음이 동요되지 않도록 하는 데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하자, "오직 한 가지 일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부동심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다고 대답한다. 이에 공손추가 "스승께서는 어디에 장점이 있으십니까?"라고 묻자 맹자 왈 "나는 호연지기를 잘 기르니라."라고 대답했다. 호연지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호연지기는 지극히 크고 강한 것이니, 곧은 마음으로써 잘 기르고 해침이 없으면 하늘과 땅에 가득 차게 된다. 또한 호연지기는 의로움과 도에 달려 있는 것이니, 이것이 없어지면 쭈그러든다. 호연지기는 의로움을 거듭하여 만들어지는 것이지 갑자기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름에 있어 효과를 미리 성급하게 기대하지 말고 마음에도 잊지 말아야 하며 억지로 조장하지도 말아야 한다." 라고 대답했다.

 

호연지기란 의와 도가 쌓여 충만함으로써 저절로 생기는 것으로, 정도를 행하여 절도를 지키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대장부의 기상이다. 오늘날 공명정대한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호방한 마음이나 또한 도의에 뿌리를 박고 공명정대하여 무엇에도 구애됨이 없는 도덕적 용기를 가리키는 말로 흔히 쓰인다.

 

 

■ 맹자의 성선지설

 

중용에 이르기를 사람의 본성은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것으로,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하늘이 준 성품을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라고 한다.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라 했다. 그러나 공자는 하늘이 내려준 천명을 인간의 본성이라고만 말하였지 무엇이 인간의 본성인가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한 바가 없다.

 

공자의 사상과 행동의 밑바닥에는 하늘 또는 하느님에 관한 확고한 믿음이 깔려 있었지만, 공자는 인간의 본성이나 천도와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는 심도깊게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맹자는 공자가 말한 천명과 천도가 무엇인지에 집중적으로 몰두하였다. 이렇게 하여 맹자는 공자의 유가 사상을 형이상학으로 이끌어 올렸다. 맹자는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성'이라고 한다는 명제를 깊이 숙고하여 천성의 본질과 천성의 근본원리를 사유와 직관에 의해서 집대성하여 그 유명한 '성선지설'을 주창하게 되었다. 공자의 원시 유교가 학문적으로 체계화도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위대한 철학자 맹자 때문이었다.

 

 

■ 맹자의 핵심사상 사단설

 

맹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사단설을 주장한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인의 단서이고, 부끄러워하고 죄를 미워하는 마음은 의의 단서이고, 사양하는 마음은 예의 단서이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의 단서이다. 사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할 수 없다고 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이고, 자기 임금은 할 수 없다고 하는 자는 자기의 임금을 해치는 자이다. 무릇 사단이 나에게 있는 것을 모두 넓혀서 채울 줄 알면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며, 샘물이 처음 솟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진실로 이것을 세울 수 있다면 사해를 보호할 수 있거니와 진실로 이것을 채우지 못하면 제 부모조차 섬길 수 없을 것이다."

 

남을 사랑하여 측은하게 여기는 측은지심,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수오지심, 양보하고 공경하는 사양지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시비지심, 이 네가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맹자의 주장은 후에 사단 칠정론으로 확대된다. 맹자의 성선지설은 맹자가 첫번째로 언급한 바로 측은지심에서 나온다. 인간에게는 태어나기 전부터 선천적으로 선을 행해 가는 본성이 있다는 말이다.

 

 

■ 인간의 본성이 선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불선해지는 이유

 

맹자는 사람이 불선해지는 이유로 세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함닉, 주위 환경의 제약에 따라 사람의 마음이 그 속에 빠짐으로 성선의 기초가 허물어져 드러나지 못한다.

즉 천재지변과 같은 자연 환경과 혼잡한 사회악과 같은 외부의 상황 때문이다. 둘째, 곡망, 인의지심이 일어나지만 사리사욕의 훼방으로 성선의 마음을 잘 보존하여 기르지 못하고 오히려 소멸되기 때문이다. 세째, 방실, 반성할 줄 몰라 마음을 보존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양심이 작용하지 못하는 타락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어리석음, 게으름과 같은 놓아버린 마음(방심)이 그것이다. 이 놓아 버린 마음이야말로 타고난 성선을 파괴하는 최고의 악행인 것이다.

 

"인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는 사람의 길이다. 그 길을 버리고 따르지 아니하며 그 마음을 놓아버리고 찾을 줄 모르니, 아아, 슬프도다, 사람이 개나 닭이 나간 것이 있으면 찾을 줄을 알지만 마음을 놓아버린 것이 있으면 찾을 줄을 모른다. 학문의 길이란 다른 것이 없다. 바로 그런 놓아버린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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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로> / 버지니아 울프 지음 / 이미애 옮김 / 민음사 <뉴욕 타임지 선정 100선>

 

 

목마와 숙녀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중략>

 

등대...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중략>

 

 

 

버지니아 울프, 영국의 여류 작가. 자주 발생하는 정신 질환이 두려워 나이 육십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포기해야만 했을까? 어릴 때의 상처가 너무 깊었던 탓일까? 어린 시기에 격었던 가족들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의 고통.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시절 의붓 오빠들의 못된 짓으로 인해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연약한 영혼. 평생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해 준 남편의 품도 피해야만 했던 영혼. 인생은 빛이 보이지 않아도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가?

 

 

 

1부, 램지씨 가족은 지인들을 초대하여 등대섬이 보이는 해안의 별장으로 온다. 막내 제임스는 램지부인에게 등대로 가자고 한다. 램지씨는 날씨때문에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제임스를 실망시킨다. 램지부인은 손님들이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신경을 쓴다. 2부,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별장은 황폐해진다. 세월의 바람이 온 별장을 휘집고 다니며 황량하게 만든다. 그동안 램지 부인도 세상을 떠났고, 수학적 재능을 갖춘 아들 앤드루와 아름다운 딸 프루도 죽었다. 수려한 시적 표현들이 바람에 날리는 벚꽃처럼 2부를 가득채우고 있다. 3부, 10년후 램지씨 가족이 다시 별장을 찾아온다. 다시 초대된 손님들 가운데 노처녀 릴리 브로스코도 있고, 램지부인을 경원시하던, 이제는 유명한 시인이 된 노친네도 함께 한다. 릴리는 10년전에 완성하지 못한 그림을 완성하려 애를 쓴다. 아들 제임스는 억지로 램지씨를 따라 10년전에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등대에 도착한다. 그 순간 릴리의 마지막 한 획으로 그림이 완성된다. 그리고 소설은 끝이 난다.  

 

여성의 마음속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버지니아 울프는 램지부인과 릴리 브로스코에게 자신의 여성적 감성을 섬세하게 불어넣는다. 아마도 그들은 버지니아 울프의 분신이 아닐까? 그들의 마음 속 풍경, 섬세한 여성적인 감성을 따라 가다 보면 독자는 어느새 자욱한 안개 속에서 길을 잃게 된다. 뿌연 안개가 자욱해지며 목적지가 어디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워진다. 작중 인물인 릴리 브로스코도 어떻게 해야 자신이 보는 것을 제대로 재현해 줄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가 램지씨와 제임스가 등대에 도착하는 순간 릴리 브로스코의 그림도 완성이 되는데, 도대체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릴리는 목적지에 도달했지만, 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시간은 창조적일까? 파괴적일까? 생각의 방향은 양극단으로 가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양극단이 옳은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것이 양극단의 사이에 존재한다. 시간도 마찬가지. <등대로>에 나타난 시간은 파괴적이며 예측 불가능성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 시간은 우리의 바램대로 흘러가지도 않는다. 가족의 기둥 역할을 하던 램지 부인은 죽고, 장래가 촉망되던 아들 앤드루는 폭탄과 함께 산화하고, 아름다운 딸 프루는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다. 10년전 막내 제임스의 등대로의 희망의 불을 무자비하게 꺼버린 램지씨는 등대로 향한다. 10년전 등대로 가고 싶어했던 제임스는 이제는 억지로 아버지의 손에 끌려 등대로 향한다. 그러나 아내의 괼시를 받던 무능력한 아편쟁이 시인 노친네는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등대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시간의 흐름에 도도하게 맞서고 있던 릴리 브로스코, 그녀는 변한 게 없다.  세월과 함께 변하지 않은 것은 없어 보이건만, 그리고 시간은 뜬 구름처럼 정처없이 흘러가건만, 그녀는 바람 한 점없는 호수의 잔잔한 수면에 떠 있는 나뭇잎 마냥 변한게 없다. 릴리는 여전히 노처녀로 10년전의 그 그림에 매달려 있다. 멈춰선 릴리의 눈에 흘러가 버린 세월이 열차 차창밖 풍경처럼 스쳐 지나간다. 릴리는 마지막 붓질로 그림을 마무리한다. 미래는 등대처럼 찾아 오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법. 릴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모습이다. 버지니아는 릴리처럼 자신의 지나온 삶에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문장을 시작하고 싶었을런지 모른다. 불이 보이지 않아도 미래는 다가 오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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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 F. 막스 뷜러(1823~1900)/ 오영훈 옮김/ 도서출판 북스토리

 

 

동화같은 소설이 있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그렇고, 코엘료의 <연금술사>가 그랬다.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도 그렇다. 아름다운 사랑을 회상하며 쓴 이 잔잔한 서정시같은 이야기는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이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한 소년과 소녀의 사랑이 하 순수해서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황순원의 <소나기>가 오버랩된다. 

 

 

<독일인의 사랑>은 한 편으로는 아름다운 동화와 같은 느낌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읽기가 쉽지만은 않다. 아름답고 수려한 직유와 은유가 문장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어 그 실체를 잡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신과 신앙을 논하는 이야기는 그들의 젊음에 비하면 상당히 놀랄 정도의 깊이가 있다. 그들의 풋풋한 생각속에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소한 일이라도 신의 섭리가 숨어 있다고 믿는 경건한 종교심이 숨쉬고 있다. 그들의 대화속에는 마음 속에 숨은 사랑, 표현하지 못한 들끊는 사랑의 열정, 사랑의 불꽃을 잠재우고 담담한 사랑으로 살아가려는 마음등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다.  

 

<독일인의 사랑>에는 사랑을 마음 속에 간직한 재 우정으로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소녀의 사랑과 열병같은 사랑을 숨길 수 없어 어떤 희생을 치루어서라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려는 소년의 사랑,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희생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멀리서 바라보는 노의사의 사랑이 보인다. 사랑은 인류 공통 감정으로 국경이 있을리 없지만, 지역의 풍토나, 개인의 성격에 따라 사랑이 표현되는 주된 방법은 차이가 있을 수도 있을 듯하다. 햇살이 강렬한 밝은 지중해 연안의 남유럽의 사랑법과, 험한 날씨에 햇빛을 그리워해야만 하는 북유럽의 사랑법은, 풍토가 사람의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사랑법도 다소 다르지 않을까? <독일인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보아서는 독일인 특유의 사랑법이 있다는 작가의 믿음이 엿보이는 것도 같다.   

 

<독일인의 사랑>은 지난 날을 돌아보게 만들어 아름다웠던 인생의 봄을 다시 생각나게 하고, 다시 한 번 사랑이 뭔 지를 생각하도록 마음에 조약돌을 던지지만, 군데 군데 번역의 미흡함으로 인해 아리송한 부분이라든지, 또는 부적절한 표현으로 감정선이 끊는 아쉬움이 있어 다른 번역판으로도 한 번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간단히 <독일인의 사랑>의 줄거리를 요약해 본다.

 

회상!  어린 시절, 순수함이 더럽혀지지 않는 그 시절의 회상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어린 시절은 막 피어나는 신록과 같은 천진난만한 순진 무구의 세계이다. 이는 회상이라는 불완전한 망원경을 통해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세계를 돌아 보는 것이기에, 그리고 망각과 미화라는 강력한 질량에 의해 그 떨어진 사이의 시공이 휘어져, 실제보다 더 아름답게 왜곡되어 보이는 걸까? 어찌 되었건 어린 시절 두뇌 깊숙이 각인되었던 아름다움은 전 생애에 걸쳐 그리움으로 불쑥 불쑥 튀어 나온다. 엄마와 함께 창문에서 보았던 밤 하늘의 별, 풀 밭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코 속으로 흘러들던, 엄마가 들고 있던 오랑캐꽃의 향기, 부활절날 교회 창문밖으로 들려오던 잊을 수 없는 하모니...

 

그러한 기억들은 어린 시절의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다. 그런 기억위에 영원히 지울 수 없을 것 같은 또 하나의 숭고한 기억이 덧붙여 진다. 마리아! 심장병을 앓고 있어 언제 생명의 촛불이 꺼질 지 모를 소녀, 언제나 말없이 그녀의 동생들과 그가 함께 노는 모습을 지켜 보던 마리아. 견진성사를 받았던 날, 마리아는 동생들에게 자신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잊지 말아 달라면서 하나씩 반지를 주는데... 그와 눈이 마주친 마리아는 자기가 가지고 가려고 마음 먹었던 마지막 반지를 주면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한다. 그는 반지를 되돌려 주며, 더듬거리면서 '너의 것은 모두 나의 것이야'라고 말한다.

 

 

어느새 고교 생활도 지나고 대학의 화려한 시간도 지난 때, 그는 여름방학을 지내려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마리아가 어떻게 지내는 지 궁금해하며 그녀가 살고있는 성 주위를 서성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마리아로 부터 방문해 달라는 편지를 받게 되고, 둘은 어린 시절의 친구로 만나 신과 믿음, 사랑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행복해 한다. 그는 자신이 마리아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되지만, 차마 말하지 못한다. 다만 <파 묻힌 생명>이라는 시를 읽어 보라는 것으로 고백을 대신한다.   

 

다음 날, 자기 가족의 존경하는 주치의이자 마리아를 돌보고 있는 늙은 의사가 찾아 온다. 어젯밤 마리아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하면서 더 이상 마리아를 만나지 말라고 당부한다. 진정 마리아를 사랑한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갈등에 휩싸인 그는 마리아를 떠나 여행길에 오르고, 깊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 방황하는 그는 무엇이 마리아를 위해 나은 것인지 끝없이 고민한다. 자신이 사랑한다는 것을 꼭 알리고 싶은 그는 마리아를 만나 고백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는 시골의 성에 내려와 있는 마리아를 방문한다.

 

마리아는 그와 자신 사이에 우정과 같은 사랑이 지속될 수 있다고 믿느다. 노의사가 마리아를 사랑하듯, 그리고 마리아도 노의사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것처럼, 그런 사랑이 그와의 사이에서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마리아가 생각하는 사랑과는 다르다. 그는 마리아에 대한 자신의 열렬한 사랑을 고백한다. 이에 마리아는 고통스러워 한다. 자신이 원한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그를 만난 마리아는 더 이상 만날 수 없음을 슬퍼한다. 둘 사이의 관계를 알게된 아버지가 둘의 만남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그는 세상의 편견과 맞서 싸워서라도 자신의 사랑을 지키겠다고, 영원히 그녀의 고통을 함께 지고 가겠다고 말한다. 

 

그 날 밤 그는 불안한 밤을 보낸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그를 찾아온 노의사는 마리아의 죽음을 알린다. 그리고 노의사는 마리아에 대한 숨겨진 사랑을 고백한다. 마리아는 자신이 사랑하던 연인의 딸. 지독히 가난했던 그들. 그러던 차에 젊은 후작이 그 여인을 사랑하게 되고,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랬던 그 남자는 그녀를 영원히 떠난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 그녀가 후작의 첫 딸을 낳으면서 세상을 떠날 때 운명처럼 만나게 된다. 그 딸이 마리아였다. 연인을 잊지 못하는 의사는 마리아를 돌보며 마리아가 하루라도 더 살아 자신의 사랑이 끝나지 않기를 바랬다는 것이다. 

 

노의사는 그에게 '자네도 나처럼 참고 견뎌야 되네, 쓸데없는 슬픔 때문에 단 하루라도 허비해서는 안되네. 될 수 있는 대로 인간들을 위해 애써 주게나.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이 세상에서 마리아와 같이 아름다운 영혼을 보고 그녀를 알게 되었고 또 사랑하다 잃어버렸다는 것을 신에게 감사하게나'라고 말한다. 마리아를 만났던 것 자체를 행복으로 여기고, 그녀에 대한 사랑을 승화시켜 온 세상을 사랑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독일인의 사랑>을 읽고, 어떤 사랑이 올바른 사랑법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연인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음에도 사랑을 반드시 고백하고 확인해야만 했던 끓어 오르는 무모한 열정적인 사랑? 아니면 들끓는 사랑을 억제하고 다만 친구처럼 서로 존중하며 우정으로 간직하려는 호수처럼 잔잔한 사랑? 자신의 사랑을 내던지고 연인의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랑? 올바른 사랑법이란 모두를 행복하게 해 주는 사랑법일 텐데. 하지만 모두의 행복이라는 그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서로 어긋난 사랑법은 일견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마리아는 그의 사랑을 확인한 그 날 밤 생명의 촛불이 꺼질 때 행복했을까? 더 누리지 못한 행복을 안타까워하며 눈을 감았을까? 아니...모든 것에 신의 섭리가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이 조차도 신의 사랑이라 여겼을 지도 모른다. 언제 생명의 불씨가 꺼져 버릴 지 모를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사랑이란 자신에게 과분한 것이라고 생각한 마리아. 그녀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생명의 나날을 보낸 것 자체를 신의 사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마리아를 사랑한 그는 행복하게 되돌아 볼 수 있는 사랑이 있었음에 감사했을 것이고, 그 사랑을 승화시켜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 것에 감사했을 것이다. 그 둘은 신의 섭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올바른 사랑법이란 결국 신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막스 뮐러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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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공자/ 최인호/열림원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는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우리 시대와는 2천5백년이란 시간의 장벽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공자의 언행이 전후 맥락이 없이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논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인간 공자를 알아야 하며,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배경을 파악해야 한다. <소설 공자>는 공자의 생애를 다루면서 당시의 흥미로운 시대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공자 자신은 물론이요, 공자의 제자들과 당시의 현자들, 더 나아가, 요순시대를 거쳐 하,은.주 시대를 거쳐 춘추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유명한 현인들의 이야기들이 <소설 공자>에 담겨 있다. <소설 공자>를 읽다 보니 논어를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구절들이 생각나면서, 그 상황이 눈으로 그려지 듯 이해가 된다. <소설 공자>는 <논어>를 읽기 전에, 또는 <논어>를 읽은 후에 꼭 읽어 보도록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작가 최인호는 세계 3대성인인 예수, 석가, 공자를 자주 비교한다. 예수, 석가는 신적인 존재로서 한 종교를 창시한 성인으로 보는 한편, 공자는 인간적 고뇌와 약점을 가지고 있었던 철인으로 평가한다. 그의 사상을 담은 유교도 하나의 종교라기 보다는 학문의 한 범주로 생각하고 있다. 공자는 당시의 위정자들로 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하였고, 노장사상을 가진 은둔 자들로부터 비아냥을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을 담은 책과 그를 따르는 유생들은 한나라 진시황시대에 분서갱유의 참화를 당하기도 했다. 공자의 사상은 탁상공론으로 치부되다가 상황이 역전되어 오래동안 동양 문화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공자의 사상을 받아들인 동양권 국가들은 공자가 바라던 이상적인 사회로 인도하지 못했다.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인 조선만 보아도 그렇다. 조선이 유교를 바탕으로 한 유교국가임에도 권력을 쥐기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정쟁이 에 휘말렸는 지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근대에 들어서서 물질 문명을 앞세운 서구 문명의 발 아래 짓밟히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공자의 사상은 훌륭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이라는 그릇이 작아서 그것을 제대로 담을 수 없었던 것 때문일까? 공자의 예와 인 사상은 오로지 천성적으로 타고난 인격자를 위한 것인가? 범인은 공자가 지닌 그러한 경지까지는 올라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공자는 마음 속의 "예"의 정신을 올바로 나타내는 방법을 정립하고자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밖으로 드러나는 예의 형식을 정립하려 하므로 형식주의라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예의 형식에 너무 치중함으로 정작 마음의 예보다는 형식을 중요시 하는 폐단이 생길 수 있음을 미처 내다보지 못한 것일까?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예의 정신은 어떻게든 밖으로 드러나겠지만, 형식적인 예를 지킨다고 마음 속의 예가 새로워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의 정신이 나타내는 행동 하나 하나가 오히려 더 가치있는 예례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의 정신에 입각하여 올바른 "예"를 나타내고자 했던 공자의 자세에는 고개가 수그려진다. 그리고 공자가 내세웠던 "예의 형식"은 그대로 받아 들일 수는 없지만, 공자의 "예"의 정신만은 마음 한 켠에 소중히 간직해 두고 싶다.

 

<소설 공자>의 줄거리를 요약해 본다.  

 

제1장 <첫 번째 출국 - 공자와 안자>

기원전 517년 나이 35세에 공자는 계씨를 포함한 삼환씨가 정국을 농락하는 노나라의 정국에 염증을 느끼고, 존경하는 '안영'이 재상으로 있는 제나라로 가서 정치적 이상을 펼쳐 보려 한다. '안영'은 <안자춘자>의 주인공으로 당시 제나라 경공을 섬기고 있는 전국 시대 대표 명재상중의 한 명이었다. 놀랍게도 공자는 안영의 반대로 중용되지 못한다.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던 안영이 보기에 공자는 지나치게 제사와 상례를 중요시하는 형식주의자로 보였던 것이다. 결국 공자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38세에 노나라로 돌아오게 된다.

 

제2장 <두 번째 출국-노자와 공자>

공자는 46세 되던 해에 고국 노나라를 떠나 주나라로 향한다. 노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청하기 위해서이다. 드디어 기원전 506년에 공자와 노자의 극적인 만남이 성사된다. 공자와 더불어 중국이 낳은 최고의 사상가, 오늘날 중국의 정신을 지배하는 도교를 창시한 신비의 인물인 노자는 서양 사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톨스토이도 노자의 도덕경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으며, 헤겔의 관념철학도 노자의 무사상에서 사유방법이나 사상체계를 받아들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노자의 사상은 야스퍼스, 키에르케고르, 니체로 이어지는 실존철학의 형성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도 한다. 인류 사상 최고의 롱셀러는 '성경'이지만 두 번째의 베스트 셀러는 <도덕경>이라고 한다. 이러한 노자와 공자의 만남은 어떠했을까?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공자가 존경하였던 인물로는 주의 노자, 위의 거백옥, 제의 안평중, 초의 노래자등이다."라고 한다. 공자가 가장 존경했던 노자. 공자는 노자를 만나 "예에 대해서 가르침을 주십시오." 라고 가르침을 청한다. 노자는 "예에 대해서라면 더구나 나는 할 말이 없네."라고 대답한다. 공자가 계속 가르침을 청하자 노자는 "그대가 우러러 보는 옛 성인들은 이미 살도 썩어지고 뼈마저 삭아 없어졌겠지. 군자라는 작자도 때를 잘 만나면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그 위에서 건들거리는 몸이 되지만 때를 잘못 만나면 어지러운 바람에 흩날리는 산쑥 대강이 같은 떠돌이 신세가 되지 않겠는가. 내가 아는 바로는 예를 아는 군자는 때를 잘 만나고 못 만나고의 문제가 아니란 말일세.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숙이 감추고 있어 얼핏 보면 점포가 빈 것처럼 보이듯 군자란 많은 덕을 지니고 있으나 외모는 마치 바보처럼 보이는 것일세. 그러니 그대도 제발 예를 빙자한 그 교만과 그리고 뭣도 없으면서도 잘난 체하는 말과 헛된 집념을 버리라는 말일세." 공자가 때를 잘못 만나 천하를 떠돌이처럼 돌아 다닐 것을 미리 예견한 듯한 말이었다. 공자는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예에 대해 묻는다. "그것이 예입니까?" "그런 건 나도 몰라. 다만 예를 묻는 그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이것뿐일세. 자, 이제 그만 가보게나." 이렇게 공자와 노자의 만남은 끝이 난다.

 

후에 공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도 예의 진수를 몰라 노자에게 가서 물었는데, 다만 이렇다. 내가 만나 뵌 노자는 마치 용과 같은 분이셨다."  용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면 그 용의 행적을 알 길이 없는 것과 같이 노자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하였다.

 

어쨌든 현실참여적인 공자의 도와 은둔지향적인 노자의 도는 서로 맞지 않아서 그 둘은 서로 화합이 불가능했을까? 공자의 도는 인간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행해야 할 바를 논하는 것이었던 반면에, 노자의 도는 우주 만물의 생성과 작용의 원리를 논하는 것이었으니, 인간세상도 우주 만물의 한 부분이라고 보면 둘 사이의 접점이 있을 법도 하건만, 당시로서는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물과 기름과의 사이였다. 아마도 공자의 도는 노자의 도에 비추어 볼 때 올바른 것이 아니었나 보다. 노자의 뒤를 이은 장자도 공자의 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두사람은 헤어지고 나서 서로 완전히 다른 행보를 가게 된다. 공자는 더욱 현실 정치에 참여하고자 하여 열국을 주유하게 되고, 노자는 소를 타고 함곡관을 지나 홀연히 사라지게 된다. 함곡관을 지날 때 윤희라는 관리의 간곡한 요청 끝에 그의 사상을 담은 5천여자의 <도덕경>을 남기고 흔적도 없이 홀연히 사라진다.

 

제 3장 황금시대

공자 나이 51세에 드디어 벼슬을 받아 정치에 뛰어든다. 노나라 제 2의 도시인 중도를 다스리는 직책을 받은 것이다. 공자는 1년만에 중도를 확 바꾸어 놓는다. 중도는 다른 고을이 본 받을 정도로 질서가 잡혔고 예의와 기틀이 잡힌 곳이 된다. 공자는 제나라와의 외교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이고, 드디어 중앙의 행정장관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잘 이끌어 나간다. 공자는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대부들인 계환자를 비롯한 삼환씨의 횡포를 제거하려는 목표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을 때, 안영의 뒤를 이은 제나라 재상 여서는 노나라의 발전에 크게 위협을 느끼고 노나라를 흔들 계책을 마련한다. 여서는 80명의 미인과 좋은 말 120필을 노나라 정공에게 선물로 보낸다. 여서의 계책이 성공하여 정공은 미색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게된다. 이에 공자는 정공이 군주로서의 최소한의 예를 가지고 있는지 시험한 후에 일말의 가능성도 보지 못하자 노나라를 떠난다. 공자는 5년동안 정치가로서의 황금시대를 마감하고, 열국을 순회하는 고난의 시대로 접어든다. 노나라 재상직을 버릴 때가 55세, 그리고 56세에 자신의 이상을 정치적으로 실현할 나라와 임금을 찾아 여행길에 오른다. 13년동안 가시밭길과 같은 열국을 돌아다니다 기원전 484년 나이 68세에 다시 노나라로 돌아오게 된다.

 

제4장 세 번쩨 출국- 상가지구

공자는 56세의 나이에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를 찾아 간다. 사기에 의하면 공자는 70여 나라를 유세하였다고 하나 공자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서너개의 나라를 반복해서 순회하였으며, 공자 자신은 더 많은 전국 시대의 임금들을 만나고자 했지만 다른 나라의 임금들은 회견할 길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공자는 자신의 정치젹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임금은 만나지 못하고 오히려 '상갓집의 개'처럼 초라하게 제국을 진전하면서 여러번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고, 경제적 곤경에 빠지기도 한다. 

 

위나라에서 처음에는 위영공의 환대를 받고 융성한 대접을 받았지만, 공자에 대해 참언하는 신하들의 말에 현혹된 영공은 공자를 위리안치, 즉 가택연금을 시킨다. 10개월을 위나라에 보낸 공자는 위나라를 빠져 나와 진나라로 향한다. 가는 도중 광 땅에서 첩자로 오인 받은 공자 일행은 주민들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당하다 다시 위나라로 돌아온다. 영공의 치욕적인 대접에 환멸을 느끼고 공자 일행은 다시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향한다. 도중 송나라에서 공자를 죽이려는 시도가 있어, 공자 일행은 뿔뿔히 흩어진다. 정나라에 도착한 공자의 제자 자공은 행인으로부터 공자가 '상갓집 개'같은 몰골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정나라를 지나 진나라에 도착한 공자는 3년을 머물렀으나 진나라 민공을 만나지도 못한다. 진나라에서 공자는 철저히 소외당했으며 허송세월만 보낼 수 밖에 없었다.

 

59세때 다시 위나라로 돌아가는 도중 위나라에 반기를 든 공숙씨 일당을 만나 위협을 받지만 무사히 위나라에 도착한다. 공자는 영공에게 공숙씨 일당을 공격하도록 조언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다시 위나라를 떠나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달성하도록 도와 줄 임금을 만나지 못한 공자는 점점 초조함을 느끼게 된다. 진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필힐의 초청에 응하려 했었는가 하면, 진에서 정적을 제거하고 실권자가 된 간웅 조간자에게 몸을 의탁할 생각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도에서 조간자의 사람됨을 알게 된 공자는 길을 돌이켜 위나라 대부 거백옥에게로 향한다. 

 

여전히 위나라의 영공은 공자를 무시하며 이제는 공자의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는다. 공자는 60세에 다시 진나라로 가서 2년을 머물렀으나 아무 소득이 없다. 그동안 노나라에서는 실권자 계환자가 병으로 죽으면서 아들 계강자에게 공자를 불러들이도록 유언을 남긴다. 계강자는 공자를 초빙하려 하나 공지어가 나서 반대하면서 차라리 공자의 제자인 염구를 불러들이도록 조언한다. 염구는 자유, 염유라고도 불리는데 공자의 제자중 자로와 자공과 더불어 정치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다. 자로가 군사, 자공은 외교에 뛰어났던 데 비하여 염유는 행정과 군사 두 방면 모두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인물이다. 염구는 노나라에서 기대 이상으로 정치적 성공을 거두어 계강자의 가재가 되었다. 염구의 뛰어난 정치적 성공은 후에 공자가 다시 노나라로 돌아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제5장 네 번째 출국 - 양금택목

공자 62세때는 공자의 주유 열국의 전반기가 끝나고 후반기가 시작되는 분기점이다. 후반기 7년은 전반기 7년보다 혹독하여 공자는 채, 섭과 같은 소국, 독립된 나라라고는 볼 수 없는 강대국의 속국을 찾아 다닌다. 지금까지 묵묵히 스승을 따라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수행하던 제자들도 스승의 권위와 가르침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진나라에서 2년의 세월을 보낸 후 공자는 채나라 소후의 초청을 받고 그리로 향하던 중 소후가 암살되는 바람에 방향을 돌려 섭이라는 나라로 피신하게 된다. 섭공과 면담한 공자는 서로의 가치관의 차이를 확인하면서 섭나라를 떠나 채나라로 돌아 오게 된다. 그 도중  노자의 고향이었던 초의 속국 채나라에서 노자의 사상을 따르는 숨어 사는 현자들로 부터 비웃음을 당하게 된다. 이 무렵 공자는 위로는 정치가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안으로는 제자들로부터 의심을 받고 밖으로는 전혀 사상이 다른 이교도들로부터 비웃음을 받고 있어 사방이 모두 적으로 둘러 싸인 형국이었다.

 

채나라에서 3년을 보내던 중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최고의 임금으로부터 초빙을 받게 된다. 초나라의 소왕이 공자를 초청했던 것이다. 공자는 소왕을 어진 임금이라 칭찬하며 인격과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당시 소왕은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 땅에 머물고 있었다. 공자는 크게 기뻐하며 진나라로 들어 가려 하지만 진나라와 채나라의 제후들과 대부들은 자신들의 약점과 비행을 낱낱이 알고 있는 공자가 소왕에게 등용이 된다면 자신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공자 일행을 억류한다. 이를 알게된 소왕은 군사를 풀어 공자 일행을 구해 주고 땅 7백리를 봉토로 떼어주는 조건으로 공자를 초빙하려고 한다. 이에 초의 재상 자서가 반대하고 나선다. 공자가 이 땅을 근거로 자신의 세력을 키워 나간다면 초나라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음을 근거로 반대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소왕은 오랜 망설임 끝에 공자를 초빙하려는 계획을 취소한다. 공자의 마지막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63세에 다시 초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들어간다. 위 영공이 죽은 후 왕이 된 출공은 외국으로 망명해 있다 돌아오는 아버지 괴외의 귀국을 무력으로 막았던 일이 있었다. 행여 왕위를 빼앗길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출공은 뭇 제후로부터 질타를 받고 있었다. 이에 출공은 공자를 등용하여 이를 모면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공자는 불의를 쫓지 않고 명분이 없는 출사의 길을 원하지 않았다. 이제 참다 지친 제자들은 스스로 자기 살 길을 찾아 떠난다. 외교에 뛰어난 자공은 노나라의 초빙으로 사신으로 등용되며, 자로는 위나라의 작은 마을의 읍재가 된다. 

 

위나라에서 대부 공문자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던 공자는 위나라를 떠나면서 '새가 나무를 선택해야지 어찌 나무가 새를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통해 신하가 마땅히 훌륭한 군주를 가려서 섬길 줄 알아야 한다는 심정을 내 비친다. 특별히 관심을 가져 네 번이나 찾아간 위나라도 이제 공자의 마음에서 떠나 있었다. 이 때 노나라의 계강자가 폐백을 갖추어 공자를 초빙한다. 이제 공자는 노나라로 귀국하고, 이로서 공자의 주유열국은 끝이 난다.

 

제6장 공자천주

기원전 484년 공자는 나이 68세에 13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13년의 혹독한 여정의 결과로 공자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현실적 정치에는 결코 접목시킬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게 되었다. 공자는 비로소 깨달았다. 정치적 이상을 통해 국가를 바로 잡으려는 외부적 노력보다는 학문적 사상을 개발해 내적 자아를 완성하려는 노력이 훨씬 더 값어치가 있다는 사실을 ... 고향으로 돌아온 공자는 73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6년간 더 이상 노나라의 정치에 뛰어들지 아니하고 오로지 학문에 정진한다.

 

노나라로 돌아 올 때 공자는 아홉 구비나 구부러진 구멍이 있는 진귀한 구슬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진나라를 지날 때에 누에를 치기 위해 뽕을 따는 아낙네를 만나 구슬에 실을 꿰는 방법을 물었다가 깨달은 바가 있어 구슬에 실을 꿸 수 있게 된다. 아마도 13년의 천하주유가 아홉 개의 구멍에 실을 꿰어주는 군주를 만나기 위한 순회였다면 노나라에 있었던 공자의 말년기 6년은 아홉개의 구멍에 학문과 사상을 실로 꿰는 공자 인생의 절정기였다. 공자천주란 공자가 구슬을 꿰다란 뜻이다.

 

공자의 제자들

공자는 스스로 10명의 제자를 거론하며 "덕행에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국이 있고, 언어에는 재아와 자공이 있고, 정사에는 염유와 계로가 있고, 문학에는 자유와 자하가 있다." 라고 했다. 이를 '공문십철'이라 부르고 '덕행, '언어', '정사', '문학'을 공문사과라 부른다. 공문십철 중 염백우는 나환자가 되어 학문의 길에서 탈락되었으며, 나머지 대부분의 제자들은 학문을 버리고 정치로 나아갔다. 끝까지 스승을 좇아 공문에 남아 있던 제자들은 안연, 민자건, 자하등 서너 사람에 불과하였다.

 

이중 복상이라고 불리는 자하는 공자의 제자중 가장 막내였지만 유가의 경전을 후대에 전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논어>의 편찬도 자하의 작품이라는 설이 있다. 증삼은 자는 자여인데, 그는 공자의 제자중 공문십철에는 들지 않지만 유교 사상의 전래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자하와 증삼은 공자의 사상을 전파한 쌍두마차로 불리고 있다. 증삼은 큰 존경을 받아 증자라고도 불린다. 증자는 공자의 손자였던 공급(자사)에게 공자의 사상을 전수하고, 자사는 그것을 맹자에게 전수함으로써 유가의 도통은 공자에게서 증자를 통해 맹자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공자는 인류의 교과서가 될 경서의 편저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의 교과서는 육경이라고 불리는 시, 서, 역, 예, 악, 춘추의 6가지가 중심을 이룬다. 시경, 서경, 예기, 악기, 역경, 춘추의 6경에 논어와 효경을 덧붙여 9가지의 경전은 아홉 구비의 구명에 새로운 실을 꿰어 넣으려는 공자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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