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서병훈 옮김/ 책세상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유를 논한다는 것이 당최 무슨 말인가하고 생각할 지 모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유가 없다고 외친다. 더 많은 자유를 달라고 요청한다. 그렇다면 그 자유의 효용은 무엇이며, 그 한계는 무엇일까? 오래된 책이지만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서 그의 대답을 들어보자. 그의 <자유론>은 1859년에 출판되었다. 거의 150년전이다. 흥선대원군이 1863년 권력을 잡았으니, 조선 후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그 때 이미 존 스튜어트 밀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자유라는 가치를 논하고 있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와 권력의 상호관계로 관심을 끈다. 권력이 없는 곳에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생활하면서 권력의 필요성이 생기고 이로 인해 자유를 제한하는 일도 생기게 된다. 이 권력에는 사회적 조롱, 비난등 여론의 영향도 포함된다. 물론 특정한 행위에 대한 법적인 제재도 권력의 범주에 들어간다. 권력이 커지면 자유가 축소되고, 권력이 약화되면 자유가 확장되는 권력과 자유와의 반비례관계가 확인된다.

 

이와 관련하여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의 제한 문제'에 촛점을 둔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의 초반부에서 그의 저술의 목적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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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0  

나는 이 책에서 자유에 관한 아주 간단명료한 단 하나의 원리를 천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사회가 개인에 대해 강제나 통제-법에 따른 물리적 제재 또는 여론의 힘을 통한 도덕적 강권-를 가할 수 있는 경우를 최대한 엄격하게 규정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그 원리는 다음과 같다.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개인이든 집단이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될 수 없다.

 

본인 자신의 물리적 또는 도덕적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간섭하는 것도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당사자에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거나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또는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거나 옿은 일이라는 이유에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슨 일을 시키거나 금지시켜서는 안된다.

 

이런 선한 목적에서라면 그 사람에게 충고하고ㅡ 논리적으로 따지며, 설득하면 된다. 그것도 아니면 간청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는다고 강제하거나 위협을 가해서는 안된다. 그런 행동을 억지로라도 막지 않으면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일을 하고 말 것이라는 분영한 근거가 없는 한, 결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행위에 한해서만 사회가 간섭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개인이 당연히 절대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 자기 자신, 즉 자신의 몸이나 정신에 대해서는 각자가 주권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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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생각의 자유, 즉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절대 진리에 대한 회의'에 바탕을 둔 그의 사상은 어쩔 수 없이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게 만들었다. 서로 다른 의견은 어느 한 쪽이 맞고 다른 쪽이 그르다는 흑백논리에서 떠나,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가운데 진리를 확장해 나가고 정립해 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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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0

통념이나 전통과는 "다른 의견을 가질 자유와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는 인간의 정신적 복리를 위해 중요하다."  그 네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첫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모든 의견은, 그것이 어떤 의견인지 우리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하더라도, 진리일 가능성이 있다. 이 사실을 부인하면 우리 자신이 절대적으로 옮음을 전제하는 셈이 된다.

 

둘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린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이렁 부분 진리를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일이 아주 흔하다. 어떤 문제에 관한 것이든 통설이나 다수의 의견이 전적으로 옳은 경우는 드물거나 아예 없다. 따라서 대립하는 의견들을 서로 부딪히게 하는 것만이 나머지 진리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셋째, 통설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하자. 그렇다 하더라도 어렵고 진지하게 시험을 받지 않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 진리의 합리적 근거를 그다지 이해하지도 느끼지도 못한 채 그저 하나의 편견과 같은 것으로만 간직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네번째로, 그 주장의 의미 자체가 실종되거나 퇴색되면서 사람들의 성격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선을 위해서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 채, 이성이나 개인적 경험에서 그 어떤 강력하고 진심어린 확신이 자라나는 것을 방해하고 가로 막으면서, 하나의 헛된 독단적 구호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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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행동의 자유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와는 달리 행동의 자유에는 어느 정도 제약이 따라야 함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에서는 양심의 자유가 허용되기는 하지만 그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자유까지는 아직 허용되지 않고 있다. 이 점에 대한 밀의 생각은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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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08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문제에 대해 그들을 괴롭히지 않는 한편, 그저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일에 대해 자기 스스로의 기분과 판단에 따라 행동한다면, 각자가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책임아래 남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기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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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밀은 자유가 미치는 좋은 영향력을 보여준다. 책임지는 자유는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여 행동하는 능력을 발전시켜 준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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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1

사람의 지각, 판단, 특이한 감정, 정신활동 그리고 심지어 도덕적 선호와 같은 능력들도 오직 선택을 거듭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단련될 수 있다. 그저 관습이 시키는 대로 따라하기만 하는 사람은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무엇이 최선인지 구분하는, 또는 가장 좋은 것에 대해 욕망을 느끼는 훈련을 하지 못하는 셈이다. 근육과 마찬가질 사람의 정신이나 도덕적 힘도 자꾸 써야 커진다. 다른 사람이 믿으니가 자기도 믿는 경우도 그렇지만, 그저 어떤 일을 다른 사람이 하니까 따라한다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자기 자신의 분명한 이성적 판단에 따라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이성은 튼튼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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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자유를 통해 사회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여주기도 한다. 개별성과 독창성을 장려하는 것은 천재들이 사회에 기여하는 길을 열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개별성도 독창성도 꽃 피울 수 없으며, 특히 천재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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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1

개선을 가능하게 만드는 절대적이며 영원한 유일한 요소는 자유이다. 자유가 허용되는 곳에서만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독립적인 개선의 요소가 뿌리를 내릴 수 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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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은 그 당시 자신이 살던 시대에 자유와 개별성에 대한 대단히 적대적인 환경이 만들어 지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기전에 모두가 자유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의 사상은 그리 특별난 것은 없다. 워낙 우리가 자유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기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우려했던 상황 즉 자유가 제한되고 개별성이 부정되는 그러한 상황은 오늘날 우리시대에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권력에 의한 자유의 축소, 대중여론등에 의한 사상 및 표현의 자유에 대한 암묵적인 공격등은 여전히 우리시대에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소위 계몽되었다고 하는 우리 시대가 150년전의 밀의 세계보다 더 못하다는 말은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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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일연지음/ 이동환 옮김/ 장락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1206~1289년)이 기록한 삼국시대의 역사서이다. 일연은 저술을 위해 청년시절부터 원고를 수집했고, 70세 후반에 집필을 시작하여 84세 죽기전에 <삼국유사>를 완성했다.  

 

<삼국유사>하면 그 짝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떠오른다. <삼국사기>가 왕의 명령에 따라 편찬된 '관찬적 정사'라면, <삼국유사>는 개인이 편찬한 '사찬적 야사'이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 빠뜨린 고대의 기록들을 수록해 놓았다.

 

<삼국유사>에는 고조선의 개국신화인 단군신화를 비롯하여 기자조선 및 위만조선, 북부여, 동부여, 백제, 삼한, 가락국의 역사가 담겨있고, 고대의 신화, 설화, 지리, 민속, 사회, 사상, 신앙, 옛어휘와 불교와 관련된 내용이 풍부하다.  

 

<삼국유사>는 모두 5권 2책으로 구성되었는데, 권과는 별도로 아홉편목으로 나누어진다. 

1. 왕력: 신라, 고구려, 백제, 가락국, 후고구려, 후백제등의 간략한 연표 수록

2. 기이: 고조선에서 후삼국의 단편적인 역사를 수록

3. 흥법: 불교가 삼국에 수용되는 과정과 융성, 고승들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

4. 탑상: 탑과 불상에 대한 사실

5. 의해: 유명한 승려들의 전기

6. 신주: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에 대한 이야기

7. 감통: 신앙의 감응과 영험에 관한 기록

8. 피은: 은둔한 승려들의 행적

9. 효선: 불교적 선행과 부모에 대한 효도에 관한 미담

 

<삼국유사>는 신화와 옛 전설을 풍부하게 간직한 책이다. 연오랑과 세오녀, 만파식적등 익히 아는 여러 설화들도 만나게 된다. 특히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향가 14수는 고대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서동요, 융천사의 혜성가, 풍요, 광덕의 원왕생가, 득오의 모죽지랑가, 견우노인의 헌화가, 신충의 원가, 월명사의 도솔가와 제망매가, 충담사의 찬기파랑가와 안민가, 희명의 도천수관음가, 영재의 우적가, 처용가등이다. 향가의 배경 이야기들은 그 향가를 더욱 잘 이해하게 도와준다.

 

의해편에서 익히 아는, 세속 오계를 펼쳐 화랑도 정신의 원류가 된 원광, 신라불교의 법도를 세운 자장,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던 원효, 화엄종의 정통을 이은 의상등의 고승들의 기록들을 읽게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보면 유홍준 교수는 답사한 여러 절집의 창건자나 창건설화들을 들려준다. 부석사와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 의상과 당대에 어깨를 견주던 원효의 이야기등 절집의 역사를 이야기해준다. 의상과 원효는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도중에 원효는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있다'는 깨달음을 얻고 유학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화엄종의 한 유파인 해동종을 창시한다. 한편 의상은 원효와 헤어진 후 중국에서 유학하여 정통 화엄경을 배우고 돌아와서 부석종을 일으킨다. 원효는 실천적인 불교를 대중속에서 널리 알리고, 정교한 화엄체계를 이룬 의상의 불교는 체계적인 국가를 향한 통일 신라의 사상적 바탕을 이룬다. 

 

<삼국유사>를 읽으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이유는 고리타분한 번역, 많은 한자어와 어려운 불교용어, 예스러운 표현들때문에 어렵다고 느꼈기때문이다. 원전에 충실한 것도 중요하겠지만, 책이란 모름지기 읽어서 쉽게 이해되어야 한다. 이 책의 편찬자는 일반인만이 아니라 중고등학생이라도 수월하게 이해시킬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눈높이를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동양의 고전을 번역할 때는 한자어를 쉬운 우리말로 옮기려는 노력보다는 한자를 그대로 쓰려는 유혹에 빠지기가 쉽다. 한자를 잘 모르는 세대는 한자어 단어가 낯설고 어렵기만 하다. 동양고전의 번역에 있어서도 일대일 대응의 직역투보다는, 원전의 사상을 명확히 드러내는 방식의 현대어로 번역하려는 노력이 경주되기를 바란다.       

 

뉴욕타임즈가 선정 100권중 <간디 자서전> 함석현 옮김 / 한길사

 

간디(1869~1948)은 1922년 인도의 시성 타고르에 의해 '마하트마'라는 칭호를 얻은 이후 마하트마 간디라고 불린다. 마하트마라는 말은 '위대한 영혼'이란 뜻이다.

 

간디는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후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로 활동한다. 남아프리카에서의 인도인의 열악한 환경과 차별등을 보고 경험한 후에 인도인의 인권과 공민권을 개선하기 위해 자신을 바친다.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의 신망을 얻은 이후 인도 본토에서도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 법적 투쟁을 벌이면서 점차 영향력있는 지도자로 인정받게 된다.

 

간디는 1차세계대전이전에는 영국 정부의 여러 방침에 협조적이었고, 영국과 인도의 신뢰와 우의로 인도정부의 자치권을 획득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의 배신으로 반영독립에 힘을 쏟는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파키스탄과 인도의 분리 독립에 반대하여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화해를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 한 힌두교 광신자에 의해 암살당한다.

 

왜 간디는 '마하트마'(위대한 영혼)이라고 불릴까? 간디가 '위대한 영혼'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진실로 그러했기때문이다. 그에게는 다른 정치지도자들에게서 보기 힘든 숭고함과 순수함이 있다. 정치세계에서는 권력을 잡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책략을 사용하거나, 기만하고, 심지어 신의를 져버리는 등의 일을 서슴지 않는다. 속일 수만 있다면 비합법적이며 불법적인 행동도 불사한다. 그들에게 원칙과 진리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불신을 갖고 무관심과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다 그 이유가 있다.

 

그러나 간디에게는 그의 인생 전체를 관통해 흐르는 원칙이 있었다. 간디의 근본사상은 '사티아그라하'이다. '사티아'라는 말은 '진리'를, '그라하'는 '파악, 주의'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티아그라하'는 진리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행동해 나간다는 진리주의라 할 수 있다. 간디의 모든 행동 이면에는 이 진리에 대한 추구와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 간디는 자신의 인생을 진리를 파악하기 위한 실험의 장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그는 평생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 명령에 따라 행동한다. 진리는 그의 종교이며 그의 하나님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이러한 정신은 탁한 물 속의 연꽃처럼 그 숭고함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간디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이었다.

 

 

간디의 '사타아그라하'정신은 '브라마차리아'와 '아힘사'와 맥을 같이 한다. 간디의 브라마차리아는 자기정화, 금욕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간디는 어린 시절 힌두교 교의를 어기고 육식을 한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늘 지니고 있었다. 이후 그는 엄격한 채식주의를 늘 고수한다. 그리고 채식주의와 아울러 1906년 이후 일체의 성생활을 멀리하는 금욕주의 생활을 유지한다. 또한 모든 개인 재산을 포기하는 맹세를 하고, 공공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희생적인 생활과 소박한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간디는 금욕적인 생활을 통해 자기자신을 먼저 깨끗이 한 이후에 자신을 진리의 대의에 바치는 희생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것이 브라마차리아의 정신이었다.

 

간디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아힘사'이다. 아힘사는 '불살생'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로서 간디의 비폭력정신도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간디는 기독교에 비해 힌두교가 우월한 점을 '아힘사'에서 찾았다. 모든 생물에 대한 불살생, 비폭력, 동정, 자비등을 포괄하는 아힘사는 간디의 채식주의와도 맥이 닿아있다. 뿐만 아니라 간디의 '비폭력저항'정신의 근본원리이기도 하다. 간디의 반영투쟁의 근본원리는 비폭력저항이다. 이는 수동적 저항의 일종으로, 영국 정부에 대한 비협조, 시민적 불복종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간디는 영국정부에 대한 투쟁에서나, 압제적인 지주나 권위에 대한 투쟁에서나 항상 진실, 진리를 추구했다. 민중들의 불만이나 불평을 직접 조사하여 확인하지 않고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또한 잘못된 관행이나 압제등이 시정되기를 바라고 비폭력 법적 투쟁에 나섰지만 결국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았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처럼 사람에 대한 미움은 갖지 않았다. 투쟁하기 이전에 먼저 그들과 만나 상황을 진실되게 전달하고, 그들의 합리적 조치를 요구하고 양해를 구한 후에 행동을 취했다.

 

간디는 '위대한 영혼'이었다. 간디는 불완전한 인간이 갖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숭고하고 순수한 영혼을 지닌 인물이었다.     

 

 

 

<간디자서전>에서 발췌한 세문장

 

" 힘은 정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씨알이 그들 스스로 내세우는 진리를 위해 고통받을 각오를 할 때 그 자체가 곧 힘이란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불법이 있다고 느껴져 반항할 때 그 정부는 질서 있고 점잖은 이런 불복종에 대해 관용의 자세를 갖기때문입니다. ...제가 쓰고 있는 혼의 힘, 바꾸어 말해서 사랑의 힘을 널리 일반화하여 쓸 수 있다면 저는 전세계의 악에라도 능히 대항하는 인도를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때를 가리지 않고 제 생활에서 고통을 달게 받는다는 이 영원한 법칙을 나타내려고 제자신을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 인도 총독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진리에 대한 열의보다 강했다. 그래서 진리의 헌신자가 사티아그라하 투쟁의 열의 때문에 자기의 거룩한 이상을 한 번 양보해 버렸다. 이 행동의 기억은 지금도 가슴에 맺혀 있어서 내 마음을 후회로 가득채우고, 나는 늘 산양유를 언제나 그만 두나 그 생각만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유혹중에서도 가장 기묘한 열의, 즉 봉사하자는 열의 때문에 지금도 그것을 놓지 못하고 있다." - 우유를 먹지 않겠다고 맹세한 맹세를 깨뜨리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한 말. 간디의 채식주의는 우유나 달걀등도 먹지 않겠다는 아주 타이트한 것이었다.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 의사의 권유와 회유로 산양유를 섭취하게 된다. 원래 우유를 먹지않겠다고 맹세한 것은 이윤을 위해 암소로 부터 우유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기 위한 비인간적인 행위에 대해 들은 이후부터이다. 산양유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의사의 회유에 간디는 굴복하였다. 그가 살고 싶었던 이유가 인상적이다. "봉사하자는 열의"가 가장 큰 유혹이었다고...  

 

"나는 언제나 사람은 자기 잘못은 돋보기로 보고, 남의 잘못은 그와 반대로 보아야 둘을 정당하게 비교하여 평가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다고 여기기때문이다."  

 

뉴욕 타임즈 선정 100권 : <혁명의 시대>  에릭 홉스봄 지음/ 정도영, 차명수 옮김 / 한길 출판사

 

 

이 책 <혁명의 시대>는 일찍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계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이정표적인 업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우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념은 자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등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이념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이념들이 모두 한 시대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에릭 홉스봄이 이야기하는 '혁명의 시대'가 그것이다.

 

 

이 혁명의 시대는 1789년에서 1848년까지의 60년간의 시기이다. 이 혁명의 시대의 출발의 총성을 울린 것은 프랑스 대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이다. 그리고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는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1848년에 끝난다. 물론 혁명의 시대는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로 이어진다. 에릭 홉스봄의 3부작 시리즈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는 연속적인 근현대사를 분석하고 있다.   

 

 

에릭 홉스봄에 의하면 프랑스 대혁명과 영국 산업혁명은 근대 세계를 형성한 혁명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홉스봄은 이러한 이중혁명으로 중세세계가 종말을 고하고 근대세계가 등장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 당시 세계가 겪은 혁명적인 변화들에 대한 앎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크게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자유주의, 민주주의 세계에서 태어나, 그것을 기초로 한 교육을 받고, 그 혜택을 누리며 살아왔다. 물 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대다수는 우리가 자란 토양을 의식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체계내에서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우물안의 개구리와 같다. 하지만 우리 시대를 뛰어넘어서, 우리의 체계를 뛰어 넘어, 그 밖에서 바라볼 때 우리의 사회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근본적인 한계는 무엇인지 알게될 수 있다. 그러한 시각은 체계의 한계를 뛰어 넘기위한 기본적인 전제조건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는 우리에게 자각과 자성의 시간을 갖게 할 것이다.

 

우리는 1789년~1848년의 시기가 혁명의 시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제반 이유들을 <혁명의 시대>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의 봉건 사회를 무너뜨리고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 그리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어떻게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 밖에 없었는가?  이중혁명으로 인해 사회는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종교와 사상, 예술, 과학등은 이러한 변화에 어떤 기여를 했으며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프로테스탄티즘은 자본주의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이러한 흥미로운 고찰이 <혁명의 시대>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다.

 

뉴욕타임즈 선정작중 최근에 읽은 것들은 조지오웰의<1984>, 카프카의 <심판>, E.F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들인데, 이 책들은 공통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문제점이나 한계등을 생각해 보게 만든다. 최근에 읽은 이러한 책들은 나를 다소 우울하게 만들었다. 행복을 바라면서 책을 읽었는데, 오히려 불행한 느낌이 든 것은 아이러니하다.

 

어떻게 보면 책읽기는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불행의 원인들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게 함으로 풍성한 결실을 맺도록 하는 것은 아닐런지... 

 

명문 시카고대학은 설립초기에는 삼류대학에 불과했지만 허친슨총장의 '고전100권읽기운동'이후 85명의 노벨수상자와 44명의 로즈장학생 배출했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도대체 고전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준 것일까? 고전은 삶의 이면에 감추어진 원리나 실체를 깨닫게 하며, 현재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하며, 그 해결을 위해 도전하는 삶을 살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닐까? 그 도전을 짊어진 사람들은 그 무게때문에 때로는 불행하다고 느끼겠지만 그것은 모두의 행복을 위하는 길이라는 믿음으로 위대한 업적들을 이루어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풍성한 자연속에 조용히 눈을 감고 행복하게 잠들고 싶다. 소로우의 <월든>을 읽어 보고 싶다.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100권중  <작은 것이 아름답다>  E.F.슈마허 지음/ 이상호 옮김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가 슈마허란 것을 알았을 때, 먼저 생각난 사람은 카레이서 미하엘 슈마허였다. 그러나 이 책은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1911~1977)라는 경제학자가 쓴 것이다.  

에른스트 슈마허 및 전체 내용 소개   ☞  http://blog.daum.net/ccsj77/284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1911~1977)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슈마허는 근대 경제학에 비판의 칼날을 들이 대며 이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경제학을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 중심의 경제'이다.   

 

존 케인즈(1883~1946)은 모든 사람이 풍족해질 수 있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은 "다시금 수단보다 목적을 높이 평가하고 유용성보다는 선을 선호할 것이다. ...그러나 조심하라. 그러한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적어도 앞으로도 백년 동안은, 나쁜 일은 유용하지만 옳은 일은 그렇지 않기때문에, 옳은 일은 나쁘고 나쁜 것이 옳다는 점을 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상당 기간동안 탐욕과 고리대금, 그리고 경계심을 신으로 받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는 경제걱 궁핍이라는 터널에서 벗어나 밝은 햇살 속으로 나아갈 수 있다."

 

존 케인즈 (1883-1946)

 

 

즉 근대 경제학의 바탕은 탐욕과 이기심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무한한 영리 추구를 기초로 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은 필연적으로 풍요를 가져올 것이며, 그 풍요는 평화를 가져 올 것이란 믿음이 근대 경제학의 토대인 것이다. 탐욕과 이기심이 평화의 기초가 될 것이란 믿음은 이율배반적이지만 바로 그것이 근대경제학의 모토인 것이다.

 

슈마허는 근대 경제학의 맹점을 가차없이 폭로한다. 영속적인 성장과 번영, 그리고 그로 인한 평화는 환상일 뿐이다. 성장에 요구되는 자원의 소모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성장에 따른 자연의 생태계파괴나 환경문제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번영을 가능하게 한 이기심과 탐욕이 초래한 인간성의 파괴는 어떤가? 경제적 사고방식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면 비경제적 가치를 지닌 소중한 것들, 즉 아름다움, 건강, 깨끗함등의 전통적 가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한국 독자에게 널리 알려진 마이클 샌델 교수도 슈마허와 같은 관점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샌델 교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라는 책에서 경제적 사고방식이 사회에 침투하여  시장사회가 형성되면 발생할 문제점을 고발하고 있다. 

■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http://blog.daum.net/ccsj77/212

 

 

 

슈마허는 근대 경제학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대안 경제학을 제시한다. 그것은 영속성을 위한 경제학이다. 그것은 지속가능한 생활방식을 영위하게 해 주는 경제학이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건전하고 토지를 비옥하게 하고, 건강과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생산방법을 가진 경제학이다. 이 경제학에서는 임금(wage)만을 위해 일하는 노동은 없다. 그리고 여가시간에만 즐거움을 기대하는 노동도 없다. 그것은 즐기면서 일하는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경제학이다. 그것은 인간중심의 경제학이다.  

 

간디는 "대지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만, 모든 사람의 탐욕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고 말했다. 탐욕은 끝이 없다. 탐욕을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탐욕을 충족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줄이고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에 무게중심을 둘 때 행복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의 성장은 만족의 감소일 뿐이다. 이것은 우리가 인간 동료들만이 아니라 자연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연을 만들고 우리 인간을 만든 높은 존재와 평화롭게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함을 의미한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는 필연적으로 파국에 이를 수 밖에 없다. 인류는 지구의 약탈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지구는 우리의 거주지로서 보호하고 가꾸어 나가야할 대상이지 약탈의 대상은 아니다. 

 

대한민국은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어왔으며 그로 인해 물질적으로 한층 풍요롭게 되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어야 보면 슈마허가 지적한 것처럼 환경오염, 전통적 가치관의 파괴, 인간성 파괴 및 소외, 빈부의 격차등의 문제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로 인해 풍요의 토양에 불행의 꽃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다. 슈마허의 모든 예견들이 꼭 그대로 들어 맞는 건 아니지만, 그는 우리 사회를 위한 예언자적 목소리를 발하고 있다. 

 

이 시대의 아픔을 해결할 능력도 갖고 있지 않은 소시민들은 그저 예언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떨굴 뿐이다. 다만 "내려 올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그 꽃" 이라는 시구처럼 오른편, 왼편도 둘러보고, 뒤도 돌아보고, 위로 하늘도 쳐다보면서, 앞만 보고 달려 오느라 보지 못했던 것에 눈길과 마음을 둘 수는 있을 것이다. 작은 마음들이라 할찌라도 합쳐져서 점점 커지면 그 때에는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가족을 잃어 슬픔에 잠긴 분들께 함께 아픈 마음을 전합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에른스트 슈마허 지음/ 이상호 옮김/ 문예출판사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  (1911~1977)

슈마허는 독일에서 태어나 1930년 로드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영국 옥스퍼드 뉴탈리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스물두 살 때부터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을 강의했다.

 

실제 경험이 없는 이론화에 불만을 느낀 그는 여러 분야에 진출하여 기업가, 언론인, 경제학자로 알려졌으며, 전쟁중에는 옥스퍼드에서 잠시 학업을 재개했다. 그는 독일의 영국 점령지역 통제위원회 경제 자문관, 영국 석탄공사 경제 자문관, 영국 토양협회 의장, 스코트바더 사의 이사를 역임했다. 그리고 개발도상국을 위해 종간 기술 개념을 창안했고 중간 기술개발집단을 설립하여 의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농촌 개발에 대한 그의 권고안은 수많은 개발도상국 정부로부터 주목을 받았으며 1974년에 대영제국 지도자 훈장을 받았다.

 

현대 환경 운동사에서 최초의 전체주의적 사상가로 평가되는 슈마허는 매우 다양한 관심사를 하나의 참조 틀 속에 버무릴 줄 아는 위대한 경제학자였다. 주요 저서에 <혼돈으로부터의 도피> <좋은 작업> <경제 성장의 근원>등이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본래 몇 해 동안 걸쳐 썼던 수필과 강연문을 조금씩 수정해서 묶어 놓은 책이다. 그래서 다양한 부면에 대한 그의 관심을 잘 보여준다.

 

 

1부 <근대 세계>

근대 경제학의 문제점을 제시하면서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탐욕과 이기심에 토대를 둔 경제성장은 영속적인 생활방식을 보장하지 못한다. 대체불가능한 자원이 소진되면 더 이상의 성장은 불가능해 진다. 대안은 인간중심의 경제이다. 

 

2부 <자원>

가장 중요한 자원은 교육과 토지이다. 진정한 교육의 핵심은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근본적인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토지는 단순한 자원이 아니다. 인간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러므로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농업은 산업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기때문에 특별히 취급해야 한다.  

 

원자력을 자원으로 사용하는 것은 환경과 생태계에 영향을 미쳐 인류의 존속에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대량생산기술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자원을 낭비하며 인간을 기계의 노예로 만들며 인간에게서 기쁨을 주는 노동을 최소화함으로 인성을 망쳐놓는다. 그러므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이 필요하다. 인간에게 노동의 기쁨과 창조적 활동의 기회를 제공하는 기술, 인간에게 유용하도록 고안된 기술이 필요하다. 기술이 인간을 파괴하는 대신에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3부 <제3세계>

개발도상국의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대도시 위주의 개발 보다는 지역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즉 2백만촌락에 거주하는 20억 농민을 도와야 한다. 그들을 돕기 위해서는 중간기술의 개발이 필요하다. 

 

선진국의 기술, 인간노동이 필요없는 자동화 기술과 같은 첨단 기술은 제3세계의 빈곤문제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첨단기술과 전통기술 사이에 있는 중간기술은 일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줄 수 있으며, 이것이 제3세계의 빈곤문제를 해결할 기술이 된다.

 

4부 <조직과 소유권>

모든 조직은 질서의 정연함과 창조적 자유의 무질서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대규모 조직은 이러한 추구를 어렵게 만든다. 그러므로 조직을 소규모로 유지하는 것이 더 좋다.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사회주의적 관점을 도입해야 한다.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 소유와 노동의 관계가 희박해진다. 일하지 않는 소유자가 높은 이윤을 독점하는 것은 불공정하다. 이윤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조직구성원들에게 분배되어야 하고, 재투자되는 부는 원소유자의 개인의 부로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소유되는 자본으로 귀속되어야 한다.

 

현재 대기업의 소유구조에 따르면 대기업의 이윤은 공공의 복지에 기여하기보다는 개인 소유자에게 귀속된다. 그러므로 공공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기업의 소유구조를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대기업은 세금을 내지 않고 그 대신 주식의 1/2을 공공기관의 주식지분으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대기업의 소유권의 절반을 공공화하는 대기업소유 구조를 제안한다. 

 

 

 

뉴욕타임즈 선정 100권에 선정된 프란츠 카프카의 심판

프란츠 카프카 지음/ 김현성 옮김/ 문예출판사

 

 

아침에 곤히 자고 있는데, 생면부지의 사람이 갑자기 들이닥친다. 그리고 당신이 체포되었다고 말한다. 영문을 모르는 당신은 체포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나 그 질문은 묵살되고 만다. 체포한 사람들도 윗선의 지시에 따라 행동한 것일 뿐 체포 사유를 알지 못한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당신은 일상적인 자유를 다시 얻게 된다. 예심판사를 만나 심리를 받고 소송이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당신에게는 체포된 이유가 밝혀지지 않는다. 무슨 죄로 체포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무죄임을 입증해야 한다면...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심판>의 주인공인 요제프 K가 이러한 처지에 놓여 있다. 그는 유망한 은행원이다. 그는 자신의 일상 업무를 처리하면서 동시에 소송을 준비해야 한다. 처음 체포될 때의 당황스러움은 점차 사라지고, K는 자신의 업무처리 능력을 바탕으로 소송을 잘 진척시킬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K는 변호사나 기타 여러 사람으로부터 재판 사무소 관련 사항에 대해 하나씩 알게 되면서 그는 어쩔 수 없는 무력감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K는 자신이 완전히 무죄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소가 경솔하게 제기되지는 않으며, 일단 고소를 하면 재판소에서는 피고의 죄에 대해 굳게 확신하고, 그러한 확신을 버리게 하기는 어렵다고한다. 아니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탈리아 고객에게 성당을 보여주려고 방문한 대성당에서 K는 한 신부를 만난다. 신부는 "판결은 단번에 내려지는 게 아니고, 소송절차가 진행되며 점차적으로 판결로 이어지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신부는 법률입문서에 쓰여 있는 것을 하나 이야기해 주는데, 아마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카프카가 <심판>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나타난 부분이라 생각된다.  

 

법 앞에 문지기가 서 있다. 한 시골 사람이 이 문지기에게 법 안으로 들여 보내달라고 간청한다. 문지기는 지금은 들여보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 나중에는 들어 갈 수 있느냐고 묻자, 문지기는 '그럴 수는 있지만 지금은 안 돼.'라고 대답한다. 법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항상 열려 있고 문지기는 옆으로 물러서 있기때문에 시골 사람은 몸을 구부리고 그 안을 들여다보려 한다. '그렇게 들어가고 싶거든 내가 금지하는 것을 어기고라도 들어가 보게나. 그러나 내겐 권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둬. 그리고 나는 가장 낮은 문지기에 지나지 않아. 문마다 문지기가 서 있으며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권력이 강하지. 세번째 문지기를 보면 나도 겁이 나.' 라고 문지기가 껄껄 웃으며 말한다. 

 

시골 사람은 이런 난관을 예상하지 못했었고, 누구나 언제라도 법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문지기가 입장을 허락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심한다. 문지기는 의자를 내주며 문 옆에 앉게 한다. 여러날 여러해 동안 그는 거기 앉아 있다. 시골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려고 갖은 애를 쓰고 간청을 해서 문지기는 지쳐버린다.

 

문지기는 때때로 시골 사람에게 간단한 심문을 하며, 그의 고향이나 그 밖의 여러가지를 묻는다. 그러나 그것은 높은 사람들이 괜히 해보는 것과 같은 뜻 없는 질문이고, 결국은 언제나 아직 들여보낼 수 없다고 말했다. 여행을 위해 잔뜩 준비를 해갖고 온 시골사람은 대단히 가치 있는 것까지도 모두 문지기를 매수하기 위해 써버린다. 문지기는 무엇이든 다 받기는 하되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해보지 않았다고 후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받는 것뿐일세.'

 

여러해 동안 시골 사람은 끊임없이 문지기를 지켜보았다. 다른 문지기들이 있다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시골 사람은 이 첫번째 문지기만을 법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유일한 장애물로 여긴다. 처음 몇 해 동안 시골 사람은 이 불행한 재난을 큰 소리로 저주하지만 늙어서는 그냥 혼자 투덜거린다. 그는 어린아이같이 되었고, 여러 해 동안 문지기를 관찰한 끝에 문지기의 털외투 깃에 벼룩이 있는 것을 알아채고는 문지기가 마음을 돌리도록 도와달라고 벼룩에게 애원한다.

 

마침내 그는 시력이 약해져서 주위가 정말로 어두워진 것인지 자신의 눈이 흐려진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제 암측 속에서 법의 문들을 꿰뚫고 영원불멸의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인지한다. 이제 그는 오래 살지 못한다. 죽음을 앞둔 그의 머리 속에서 지난 세월 동안의 모든 경험이 한 가지 질문으로 집약된다. 그것은 이제까지 문지기에게 물어 본 적이 없는 질문이다. 굳어진 몸을 일으킬 기력도 없어 시골 사람은 문지기에게 눈짓을 한다. 서로 키다 다르기때문에 문지기는 허리를 깊숙이 구부리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이제 또 무엇을 알고 싶은 거지? 당신은 지치지도 않는군.' 문지기가 묻는다. '모든 사람은 법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오랜 세월동안 나밖에는 아무도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원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이죠?' 시골사람이 묻는다. 문지기는 이미 시골사람의 최후가 가까워진 것을 깨닫고 멀어가는 그의 귀에 들릴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외친다. '이 문은 당신만을 위한 것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들어갈 수 없었어. 이젠 가서 문을 닫아야지.'

 

이 문지기와 시골사람에 대해 신부와 K는 이야기를 나눈다. 마침내 신부는 '모든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고, 단지 필연적이라고 생각해야만 합니다.'라고 말한다. K는 '비참한 의견이군요. 거짓이 세계의 질서가 되는군요.'라고 말한다. 

 

 

묘한 소설이다.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한 것이 틀림없다. 아무 잘못한 일도 없는데 어느 날 아침 그는 체포되었기때문이다.' <심판>의 첫 문장이다. 첫 말 '누군가'는 독자의 시선을 확 잡는다. 읽는 내내 누가 K를 고발했을까? 무슨 죄로 K는 체포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그러나 꾸며낸 것 같지 않은 사실. 기묘한 느낌을 준다. 소설 <심판>은 거대한 메타포인 듯 한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심판>에 나오는 사법제도와 같은 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자신이 죽을 때까지 그 죄목을 알지 못한다는 설정이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인가? 분명 카프카는 이 소설을 통해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텐데... 그것이 무엇일까? 

 

온통 들여다 볼 수 없는 음모, 비밀, 숨기는 것, 속이는 것, 보여줄 수 없는 것, 보여지지 않는 것들로 가득찬 인간 존재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권위와 절차, 기밀, 또는 숨겨야 하는 것들로 가득찬 정치, 경제, 종교등 사회 시스템에 대한 것인지... 짙게 풍겨지는 또 하나의 뉘앙스는 아마 종교나 그 종교에서 대변하는 신의 처사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아닐런지... 인간은 애초에 태어나면서부터 심판의 대상이 되었고 살아가면서 행한 죄악에 따라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기독교적 사상에 신랄한 비판을 칼날을 들이대는 것은 아닌가? 대성당에서의 문지기와 시골사람의 이야기속에 카프카가 하고 싶었던 핵심이 있는듯 한데, 그게 무엇일까? 

 

그러고 보면 카프가는 <심판>이라는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인생, 존재, 종교, 제도등의 문제에 있어 끊임없는 질문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그리고 읽고 나서도 계속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질문들이었기때문이다. 아마 오랫동안 ?가 내 머리속을 방황할 듯 하다.     

 

서양 미술사  김영숙 / 휴머니스트

 

20세기 최고의 미술가 피카소, 아흔 살이 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2천점 가까운 그림을 그렸고, 도자기 3천점 이상, 조각 1200여점, 스케치는 약 7000점을 남겼다. 잡지나 책자에 그린 삽화는 무려 3만잠을 넘는다. 그의 작품들은 늘 새로웠고 현실에 대한 고뇌와 비판의식이 담겨있었다.

 

파블로 피카소는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 눈에도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나머지 부분을 그림 속으로 다 끌어오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물들을 다 분해한 뒤 다시 붙이는 것처럼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의 <다니엘-앙리 칸바일러의 초상화>는 자잘한 면들을 잔뜩 붙어있어 수많은 정육면체들이 붙어 있는 듯하다. 이러한 그림으로부터 큐비즘 즉 입체주의라는 말이 나왔다. 

 

파블로 피카소 <다니엘-앙리 칸바일러의 초상화>, 1910년, 피카소는 친한 화상 칸바일러의 모습을 여러 면으로 분해한 다음 다시 그려 넣었다. 배경 역시 분해되어 인물과 뒤섞여 있다.  

 

파블로 피카소 <황소머리>, 1942년, 버려진 자전거 안장과 핸들을 사용하여 황소머리를 만들었다. 피카소는 이전의 화가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재료들을 사용하였다. 길거리에 널브러진 쓰레기도 좋은 작품감이었다.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추상화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바실리 칸딘스키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모스크바대학에서 법과 경제를 공부하고 교수가 되었지만 모네의 그림을 보고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독일 뮌헨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그리고 청기사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의 작품 <청기사>에 등장하는 푸른 옷을 입고 말을 달리는 기사를 보면 선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칸딘스키는 자연스러운 색과 완벽한 형태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추상적 화풍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바실리 칸딘스키 <청기사>, 1903년 

 

추상화란 말이 나오면 칸딘스키와 더불어 이야기되는 화가가 피에트 몬드리안이다. 그는 세잔의 생각을 더욱 발전시켰다. 모든 사물이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공통적인 것만 남기면 기하학적인 모양만 남는다고 생각했다. 색깔도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색만 남기면 빨강, 노랑, 파랑만 남게 된다. 몬드리안에게 추상화란 어떤 것의 가장 기본, 즉 본질이 되는 것만 남겨두고 다른 것은 다 생략해서 단순화해 그리는 것을 의미했다.

 

몬드리안이 산책을 나갔다 돌아와서 작업실의 문을 열었을 때 아주 특이한, 강렬하고 아름다운 그림 하나를 보게 되었다. 한참을 쳐다보던 그는 그것이 자신의 그림인 것을 알아채게 되었다. 그림을 거꾸로 세워놓은 탓에 알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칸딘스키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무엇을 그렸는지 모르니까 자연히 눈이 그림 속의 색깔과 선에 집중되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몬드리안의 그림을 볼 때는 무엇을 그렸는가보다는 색깔 그 자체 그리고 모양 그 자체를 보고 감상하는 것이 몬드리안을 보는 방법이다. 아래의 나무 시리즈를 보면 몬드리안의 단순화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피에트 몬드리안 <붉은나무> 1908년     <회색나무> 1911년

 

 

<꽃피는 사과 나무> 1912년                 <구성 10번>, 1912년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은 같은 추상화라도 성격이 다르다. 다음 그림을 보면 칸딘스키를 '뜨거운 추상화'라 하고, 몬드리안을 '차가운 추상화'라 하는 이유를 이해할 것이다.

 

         

(좌) 바실리 칸딘스키 <즉흥 7>, 1910년, 칸딘스키의 즉층시리즈는 즉흥적으로 손이 가는 대로, 자유자재로 그렸다. 복잡하지만 뭔가 따뜻한 느낌이 든다.

(우) 피에트 몬드리안 <구성 8> 1939~1942년, 몬드리안의 그림은 색들 간의 관계, 선과 면의 관계에 집중한다. 하얀색 사이에 있는 빨강의 느낌과 노란색 사이의 빨강의 느낌이 달라 보이고, 까만색과 닿아 있으면 다른 느낌이 드는 색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김영숙 지음/ 휴머니스트

 

고흐는 고갱과 과격한 싸움중에 격분하여 자신의 귀를 자르기까지 할 정도로 정신병이 깊었다. 결국 발작이 심해져 서른 일곱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생전에 단 한점의 그림만이 형편없는 가격에 팔릴 만큼 고흐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오늘날에는 고흐의 그림은 한 점에 800억원에 팔리기도 한다. 

 

빈센트 반 고흐, 그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그들과 달랐다. 인상주의자들이 자연의 풍경이나 도시 사람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냈다면, 고흐는 자신의 마음을 그려 넣었다. 고흐는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그림을 그렸다. 

 

그는 물감을 덩어리째 발라 두껍게 색을 입혔다. 그의 그림은 일그러져 있으며 구불구불하고 거칠어 보인다. 강한 색깔과 꿈틀거리는 선들 때문에 불안한 느낌도 준다. 고흐는 '마음'을 그릴 줄 아는 화가였고, 그 그림들로 자신의 마음을 고치고자 한 화가였다.

 

고흐의 작품 <까마귀 나는 밀밭>은 폭풍이 몰아치는 밀밭의 풍경이다. 고흐의 화풍이 잘 나타나 있다. 묘하게도 이 그림 앞에 서면 화가의 힘겹지만 열정적이었던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 하다.

 

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 나는 밀밭>, 1890년, 

 

 

고흐와 이름이 비슷한 고갱, 그들은 서로 아무런 혈연 관계가 없다. 고갱은 고흐가 아주 존경하던 화가였다. 한 때 고호와 같이 생활하기도 했었다. 고갱은 그림을 위해 가족, 직장등 안정된 삶을 모두 버리고 방랑생활을 한다. 그리고는 먼 남태평양의 섬 타히티에서 생을 마친다.  

 

폴 고갱은 원근법에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고, 명암마저 사라진 그림을 그렸다. 인상주의 화가들과 고흐가 붓질을 짧게 해서 찍어 바르듯 색을 칠한 데 비해 고갱은 색을 넓고 고르게 칠했다. 

 

폴 고갱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고갱이 자신의 유언을 표한한 그림으로, 태어나 늙기까지 인간의 삶을 담았다. 원시적이면서도 부드러운 고갱만의 화풍이 잘 표현돼 있다

 

야수파 마티스, 마티스와 함께 한 화가들의 그림은 색채가 아주 화려하고, 형태는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어 애들이 장난친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한 미술평론가가 이를 보고 그림들이 야수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앙리 마티스는 실제처럼 혹은 아름답게 그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색깔들이 어떻게 어울리는지, 어떻게 하면 색깔들을 더욱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지에만 신경을 썼다. 세잔이 형태의 단순화를 연구했다면, 마티스는 색들의 관계를 연구했다. 

 

두번의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은 황폐되었고, 사람들은 절망감에 빠져있었다. 마티스는 그림으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되도록 쉽게 그림을 그렸으며 밝고 환한 색을 사용했다. 마티스의 그림을 보면 '나도 저렇게는 그리겠다'는 마음이 든다. 이에 마티스는 '바로 그런 마음이 들도록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소.'라고 대답했다고.

 

마티스의 <붉은 방>, 여인이 차를 따르는 모습을 그리기보다는 붉은 색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초록, 노랑, 파랑 등 생의 향연을 그린듯하다. 화사한 이 그림은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앙리 마티스 <붉은 방>, 1908년

김경숙 지음/ 휴머니스트

 

쿠르베의 사실주의 정신은 이후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에두아르 마네도 그 중 한 명이다. 마네는 쿠르베의 사실주의가 지향하는 것처럼 현실 속의 인물을 그렸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마네는 '빛'을 그리고자 했다.  

 

마네가 그린 '풀밭위의 식사'는 그 점을 잘 보여준다. 그림속의 여자는 아름다운 신화속의 여신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몸매를 지니고 있는 보통여자일 뿐이다. 또한 그림에서 밝고 어두운 부분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빛의 효과를 극명하게 보여주려한 마네의 의도가 보인다. 특히 마네의 빛의 표현은 인상주의에 깊은 영향을 주었기때문에 마네는 인상주의의 아버지라 불린다.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위의 식사> 1862~1863년

 

마네와 이름이 비슷한 모네.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라는 작품은 인상주의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모네는 같은 풍경이라도 빛이 달라지면 그 풍경과 색깔이 달라진다는 점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모네와 함께 한 화가들은 어떤 사물이나 풍경을 보았을 때 한 순간 느낀 그 '인상'을 잡아내서 그림을 그려내었다. 이들의 그림을 본 기자가 평하기를 제대로 사물을 보고 그린 게 아니라, 순간적인 인상만 남아 있다고 말했는데, 이에서 인상파, 인상주의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 1872년

 

 

폴 세잔은 인상주의자들과 어울려 전시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세잔은 독특한 그림을 그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았다. 그는 완전히 원근법을 무시하였다. 세잔은 생각하기를 사람들이 사물이나 풍경을 볼 때는 원근법과 같은 어떤 수학적인 규칙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본다고 생각했다.

 

아래의 그림은 폴 세잔이 그린 <부엌의 식탁>(1888~1890)이다. 자세히 보면 그림이 좀 특이하다. 탁자의 왼쪽 부분과 아가리가 훤히 보이는 화병은 위쪽에서 아래로 바라본 모습이다. 반면에 탁자의 오른쪽은 비교적 정면에서 본 모습이며, 뒤쪽 과일이 담겨있는 바구니는 거의 정면에서 본 모습이다. 이렇게 한 화면에 여러 시각이 섞여 있는 모습은 세잔이 사물을 보는 방식을 잘 드러내 준다.

 

 

 

사진이 등장하면서 대상을 사실 그대로 그리는 것은 큰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사진과 달리 얼마든지 화가 자신의 생각과 관심을 표현할 수 있었다. 폴 세잔은 모든 사물의 형태를 자세히 관찰하고 그것의 가장 근본이 되는 모습을 그리고자 하였다. <생 빅투아르 산>(1902~1904)은 그러한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난 그림이다. 그의 풍경화는 도형들이 빼곡히 가득 들어선 것처럼 보인다. 그는 눈에 보이는 풍경을 그리기보다는 형태를 단순화하여 그 근본이 되는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 

 

 

이러한 방식은 당시 그 어느 화가도 시도하지 않았던 기법으로 처음에는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잔의 그림은 서양의 미술을 급진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피카소는 세잔에게서 원근법 파괴를 배웠고, 몬드리안은 사물을 단순하게 보는 시각을 세잔으로 부터 배운 셈이다.

 

세잔과 같은 화가를 '후기 인상주의 화가'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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