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숙 지음/ 휴머니스트

 

프랑스 대혁명! 사치와 향락의 로코코는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미술도 마찬가지였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신고전주의의 깃발을 쳐들었다. 그리고 프랑스는 신고전주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다비드를 비롯한 신고전주의자들은 표현양식에 있어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르네상스시대에 중요하게 생각했던 질서와 비례 및 조화로움을 화풍으로 삼았다. 또한 정신적인 면에 있어서는 '나'보다는 '전체'를 위하는 삶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리스와 로마의 위대함을 그렸고, 혁명에 몸담았던 동료들을 그림으로 칭송했으며, 나폴레옹 같은 당대의 영웅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림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신고전주의는 이성에 바탕을 둔 이성에 호소하는 예술 사조였다.  

 

자크 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맹세> 1784년, 전쟁에 나가는 호라티우스 집안의 형제들이 싸움에서 지면 목숨을 버리겠다는 맹세를 하고 있다. 도시국가 로마와 알바는 전면전 대신 결투를 하기로 한다. 그래서 로마 호라티우스가의 삼형제와 알바의 큐라티우스가의 삼형제가 국가의 운명을 건 결투를 벌인다. 그런데 비극적이게도 호라티우스가의 딸 카밀라는 큐라티우스가의 아들 한명과 약혼한 사이이다. 결국 호라티우스의 아들 한 명만이 결투에서 살아남는다. 카밀라는 약혼자를 죽인 오빠를 원망하고, 비정한 오빠는 그런 카밀라를 죽인다. 호라티우스가문은 개인의 사소한 감정보다는 국가를 우선시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정신태로를 그림으로 전달하고자 한 것이 신고전주의 미술이다. 또한 다비드는 로마식 실내를 배경으로 대리석 조각상 같은 그들을 그림으로 고대 그리스 로마에 대한 동경을 표현했다.

 

 

극단적 이성주의로 흐르는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발로 낭만주의 등장하였다. 페르디낭 외젠 빅터 들라크루아는 낭만주의의 대표적 화가였다. 인간은 도덕, 교훈, 질서 등과 관련한 이성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풍부히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감정은 때론 폭력적이고 어수선하고 무질서하게 표출되기도 한다. 낭만주의는 이런 다양한 감정의 분출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화풍에 있어 신고전주의는 피렌체의 뒤를 이어 안정된 구도를 중요시했으며, 색보다는 선을 강조하였다. 반면에 낭만주의는 베네치아의 티치아노처럼 색과 질감을 중요시했다. 또한 들라크루아는 고전주의의 안정된 구도 및 질서들을 오히려 답답하게 여겼다. 그는 자유분방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바로 이것이 낭만주의의 정신이었다.

 

페르디낭 외젠 빅터 들라크루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1827년, 아시리아왕 사르다나팔루스의 몰락을 주제로 한 바이런의 시극에 감동을 받아 그린 그림, 적들이 궁전에 난입하기 전, 사르다나팔루스 왕은 사랑하던 애첩과 애마를 죽이고 자신도 불에 타 죽는다. 들라크르아는 너무 화려해서 오히려 섬뜩해 보이기까지 한 색들을 사용했다. 사랑과 격정, 죽음의 고통을 강한 색조로 나타내어 시각적, 심리적 흥분을 불러 일으킨다. 극적인 순간들, 여인들의 풍만한 몸매와 왕의 우울한 표정, 널브러진 보석들은 낭만주의의 극치를 보여준다.  

 

 

낭만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사실주의가 등장하였다. 쿠르베는 사실주의를 시작하여 현대 회화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진실만을 그리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천사를 그려 달라고 말하자 쿠르베는 "나에게 천사를 보여 주시오, 그러면 천사를 그리겠소."라고 대답했다. 고전주의나 신고전주의에서는 이상화된 모습을 그리려 했다면, 사실주의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과장하거나 이상화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그리려 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쿠르베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이야기를 그렸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 현실의 평범한 이야기를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그리고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그렸다. 이러한 점들은 당시 프랑스 미술계에 무척이나 신선하고 획기적인 것이었다. 

  

 귀스타브 쿠르베 <돌 깨는 사람들>, 1849년, 당시 돌을 깨는 일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천한 직업으로 여겨졌다. 쿠르베는 주변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쿠르베는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몇몇 영웅들이 아니라  평범한 보통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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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숙 지음/ 휴머니스트

 

이탈리아의 피렌체의 메디치가는 르네상스의 부흥에 큰 기여를 하였다. 베네치아는 피렌체나 로마와 같은 이탈리아에 있었지만 비잔틴 문명과 더 가까운 동쪽에 위치한 까닭에 비잔틴 유산중 하나인 색유리 모자이크가 많이 발달했다. 그 덕분에 베네치아인의 그림은 피렌체나 로마보다 훨씬 더 색채가 곱고 선명하며, 화사하고 장식적이다.

 

또한 피렌체 사람들은 그림을 그릴 때 선을 잘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에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들은 형태보다는 색채를 중요시하였다. 피렌체와 로마 화가들에게 풍경이란 배경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베네치아 화가들은 풍경 자체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좌) 조르조네 <폭풍> 1505년 - 조르조네는 베네치아의 유명한 화가이다. 그는 폭풍이 볼아치는 날 번개가 떨어지는 풍경을 그림으로 그렸다. 풍경이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전경과 같은 아름다움을 지니며 나타난다.

우) 라파엘로 <카니지아니 마리아>1507년 - 라파엘로의 그림은 시선이 배경인 풍경보다는 인물에 향하도록 그려져 있다.  

 

피렌체에는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로마에는 라파엘로, 미켈란젤로가 있었다면 베네치아에는 베첼리오 티치아노가 있었다. 사람들은 미켈란젤로의 형태와 티치아노늬 색채가 합쳐진다면 이 세상 그 누구의 그림보다 훌륭할 것이라고 말했다. 티치아노는 질감을 자연스레 표현하기 위해 붓이 아닌 손가락과 그림용 나이프를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은 목판위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베네치아 화가들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다. 이 방법으로 훨씬 적은 물감으로 선명한 색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티치아노는 붉은 색 물감으로 전체 바탕을 칠한 뒤 연필이나 목탄이 아닌 붓으로 밑그림을 그렸다. 그 대상들 위해 색들을 계속 덧입히면서 자신이 원하는 분위기를 찾아내는 기법은 베네치아 특유의 방식이었다. 

 

라파엘로가 죽은 1520년부터 16세기까지의 미술은 '후기르네상스 미술' 또는 '매너질즘 시대 미술'이라고 부른다.  왜곡된 형태의 파르미자니노 그림이나 어긋난 구도, 탁한 색채의 틴토레토 그림등이 당시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앞선 거장들을 뛰어넘으려는 미술가들의 노력과 그 시대의 환란이 합쳐져서 색다른 방식의 미술이 형성된 것이다. 라파엘로보다 오래 살았던 미켈란젤로도 후기에 갈수록 매너리즘의 영향을 받아 <최후의 심판>이란 작품에는 복잡하게 얽혀 있고, 원근법에 맞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좌)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 원근법 및 좌우 대칭 구조가 잘 잡힌 구도

우) 틴토레토 <최후의 만찬> 1592~1594년, - 어디가 중심인지 모호하고 대칭되는 느낌이 없는 구도에 어둡고 탁한 색상, 움직임이 크고 소란스러운 느낌이 든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바로크미술이 등장한다. '바로크'라는 말은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이며, 바로크 미술은 고결함이 무너진 미술이란 뜻이 된다. 이는 르네상스를 높이 평가한 반면 그와 다르게 발전한 17세기 미술은 르네상스를 타락시킨 예술이라하여 '바로크'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간결하고 단순한 모양을 좋아했지만, 바로크 시대에는 화려하고 복잡한 장식물을 다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림도 보다 더 감정을 울리는 방식으로 그렸다.

 

이 시대의 유명한 화가는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이다. 그의 특징은 빛의 과장이 심하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인물의 생동감이 더 돋보이게 된다. 또 다른 특징은 성경 속 인물들을 매우 평범한 당시 가난한 서민들처럼 묘사했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린다는 점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와 마찬가지였지만 바로크 시대에는 르네상스때보다 더 현실감있게 그려서 차분하고 조용한 감정보다는 더 크고 복잡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 <마태를 부르심>, 1599~1600년, 캔버스에 유채, 예수님이 마태가 일하는 곳에 찾아와 제자가 되라고 명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밝고 어두운 부분의 차이가 두드러져 생동감이 있어보인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이 고요한 아름다움 즉 정적인 미를 특징으로 한다면 바로크 미술은 동적인 특성을 가진다.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는 것이다.

 

벨기에 북쪽 지역을 플랑드르라고 부르며 그 곳의 미술을 '플랑드르 미'이라 한다. 17세기 플랑드르의 유명한 화가는 피터 파울 루벤스이다. 루벤스는 카라바조처럼 명암의 대조가 현격하진 않지만 그림 속 인물들이 꿈틀거리듯 크게 느껴진다.

 

피터 파울 루벤스 <파리스의 심판>, 1636년, 아테나, 헤라, 아프로디테 세 여신이 파리스 앞에 나타나 서로의 미로를 뽐내고 있다. 파리스가 들고 있는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적혀 있다. 구불구불한 선 때문에 그냥 서 있기만 한 세 여신의 몸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보인다.

 

플랑드르는의 북쪽 신교의 영향력 아래 있던 네덜란드에서는 교회 장식용 대형 그림 주문이 거의 사라졌다. 대신 상업의 발달로 부유해진 부르주아들은 개인 초상화나, 자신의 집을 꾸미기 위한 아기자기한 풍경화나 정물화, 민병단등의 단체에서 주문한 단체 초상화등이 주로 그려졌다. 렘브란트는 이 시대의 네덜란드화가이다. 

 

프랑스의 루이14세가 건축한 베르사이유 궁전은 화려한 장식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실내는 수정으로 만든 상들리에, 온갖 색의 대리석 계단과 바닥, 금이나 은으로 장식한 가구들로 가득차 있다. 엄청난 크기의 궁전과 호사스러움의 극치에 달하는 궁전은 바로크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루이 14세가 죽자 귀족들은 베르사이유를 떠나 파라의 저택으로 돌아와서 다시 그들의 저택을 꾸미기 시작한다. 그들은 앙증맞고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좋아하여 미술도 이와 같은 취향을 지니게 되었다. 이 시기의 미술을 '로코코'라고 부른다. 바로크가 웅장하고 거대한 남성적이라면, 로코코는 작고 귀여운 느낌의 여성적이다. 

 

로코코 미술이 절정을 달리던 때 프랑스는 사치와 부패로 무너진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것이다. 이제 새로운 시대에 또 다른 미술...

서양 미술사  김영숙 지음/ 휴먼니스트

 

에스파냐어를 전공했던 사람이 마흔 살 즈음에 미술사를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한다? 열정이 부럽다. 이 책의 지은이 김영숙씨는 그림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모두가 쉽고 재미있게 미술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책까지 남겼다. 이 책에서는  원시시대의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으로부터 현대의 피카소, 몬드리안에 이르기까지의 서양의 미술사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서양의 미술사는 그리스로부터 시작한다. 그리스인들은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그래서 실제의 인간의 모습보다는 완벽하다고 생각되는 신들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주로 조각하였다. 프락시텔레스의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운 아프로디테를 묘사한 누드상으로 이를 기점으로 아름다운 여체를 묘사한 작품들이 뒤를 이었다.

 

프락시텔레스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 기원전 350년경, 한 쪽 다리에 약간 힘을 뺀 콘트라포스토 자세는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전에는 항상 옷을 입은 여자의 모습을 표현했지만 프락시텔레스는 과감하게 아름다운 여체의 누드를 표현하였다.

 

고대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의 문화와 예술을 적극 받아들였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이 만든 청동조각을 석고로 본뜨고 대리석으로 복제했다.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작품은 로마인들이 복제한 것들이다. 

 

로마인들은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한 초상이 발달했다. 그리스의 조각상들이 이상적인 모습을 추구하면서 서로 비슷한 느낌을 주는 반면에 주인공의 개성과 표정이 두드러진 로마의 조각들은 그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그리고 로마의 예술은 건축물에 두드러진 장점을 보인다.

 

콜로세움, 석회석, 48.5m,5만명이 들어갈 수 있는 원형경기장, 3층으로 지어졌으며, 기둥들은 1층 도리아식, 2층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으로 되어 있다.  

 

중세시대는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인정된 4세기경부터 비잔틴 제국이 힘을 잃었던 14세기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에 미술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동로마제국에서는 성상 숭배 금지로 인해 조각, 그림등의 미술이 제약을 받았지만 성당 건축물과 부속 장식물들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성당에는 기독교와 관련된 모자이크로 꾸며졌다. 반짝이는 유리조각을 표면을 깍지 않은 채 사용하여, 햇살이 비치면 반사된 빛으로 신비로운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중세시대의 종교화는 성경의 인물들을 묘사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일반 백성들에게 교육적이었다.

 

아기아 소피아 대성당 내부, 532~537년, 거대한 돔을 지탱하는 기둥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세계 8대 불가사이중 하나라나요.

 

1290년에 십자군 전쟁이 끝나면서 유럽에는 큰 변화가 인다. 십자군 전쟁의 패배로 유럽인의 시각은 신으로 부터 인간에게로 향하게 된다. 이슬람 문화와의 접촉으로 동방과의 교류를 촉진되었다. 무역과 교류의 중심지로 항구 도시가 번성하면서 부를 쌓은 가문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있는 메디치가는 문화와 예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후원함으로 르네상스 문화가 피어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르네상스는 '다시 태어나다'를 의미를 가진 프랑스 말이다.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인간 중심의 문화가 다시 살아난 시기였다. 이슬람문화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었다. 고대 인본주의적인 그리스 로마의 문화가 이슬람과의 접촉으로 유럽으로 유입되면서 르네상스의 기운이 움텄던 것이다.

 

조토 디 본도네는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리는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그림은 중세의 그림과는 달리 자연스러웠다. 인간적인 모습을 그려냄으로 중세의 벽을 깨고 자연주의 그림을 다시 부활시켰다.

 

조토 디 본도네 <애도>, 1304년, 프레스코, 파란색 배경에 사람들과 천사들의 표정들이 자연스럽다

 

중세에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를 그린다거나 여자의 몸을 누드로 그리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가 되면서 고대 그리스처럼 인간의 몸이 그림이나 조각을 통해 누드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보티첼리는 14세기 최고의 화가중 하나였으며, 신화속 여신들의 아름다운 누드화를 그려 르네상스 미술을 꽃 피우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85, 캔버스에 템페라, 제피로스가 봄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오른쪽에는 봄을 상징하는 꽃의 여신이다.

 

르네상스하면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야말로 천재였다. 천문, 기술, 생물, 예술등 모든 학문 분야를 아우르는 1만 5천장 분량의 노트를 남겼다. 그의 노트들도 하나의 작품이었다. 다 빈치의 해부학에의 관심은 인간의 몸을 자연스럽게 그리는데 기여한 바가 많다.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보이는 대로 그리려는 자연주의적 방식의 한 가지인 원근법을 완벽하게 사용하여 어디까지가 벽이고, 어디서부터가 그림인지 헷갈릴 만큼 사실적이다. 

 

다 빈치의 노트의 일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1503~1505, 목판에 유채, 자연주의의 부활이라는 르네상스시대의 화가답게 이전의 초상화와는 달리 무척 사실적이며 자연스럽게 인물의 표정을 표현했다. 옆모습이 아니라 살짝 옆으로 비켜 앉아 몸의 4분의 3이 정면을 향하는 초상화는 이전과는 달리 자연스럽게 보였다. 윤곽선을 진하게 그리지 않고 흐릿하게 처리하는 스푸마토 기법은 모나리자의 미소를 신비롭게 만든다. 

 

중세에는 대상을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더 관심을 두었지만 르네상스시대의 자연주의는 사실적으로 자연스럽게 그리려한 경향을 잘 보여준다.  

다빈치는 "미술에서 가장 으뜸은 회화이다"라고 말하는데 대해 미켈란젤로는 "조각이야말로 미술의 꽃이다"라고 주장했다. 미켈란젤로는 다빈치와 쌍벽을 이루는 르네상스의 대가이다. 교황의 명에 따라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도 <천지창조>를 4년에 걸쳐 그려냈다. 시스티나 성당 정면의 제단화인 <최후의 심판>에서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자세를 그림으로 표현했고 덕분에 이후의 미술가들은 이 작품을 토대로 쉽게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할 수 있었다. 한편으론 미켈란젤로를 뛰어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피에타>, 1499, 대리석, 미켈란젤로를 대가의 자리에 올린 작품, 피에타는 이탈리아말로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라는 의미이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에 너무 평온해 보이는 마리아의 모습에 대해 미켈란젤로는 "어머니는 인간의 어미와 다르게 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고대 그리스의 조각처럼 마리아를 특별히 더 젊고 아름답게 이상화했다.

 

라파엘로 산치오는 르네상스의 위대한 예술가를 말할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와 늘 어깨를 나란히 하는 화가이다. 라파엘로는 두 거장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의 뛰어난 작품들을 보면서 그것을 자신의 작품에 완벽하게 응용하였다. 그는 다빈치로부터 스푸마토 기법과 삼각형 구도를 배워, 편안하고 안정감을 주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에게서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다양한 자세를 어떻게 그릴 수 있는지를 배웠다.  그가 그린 아테네 학당에는 다 빈치, 미켈란젤로는 물론 그 자신의 얼굴도 그려놓았다 한다.

라파엘로 산치오 <카니지아니 마리아>, 1507, 목판에 유채, 서 있는 요셉과 왼쪽의 요한과 그 어머니, 오른쪽의  마리아와 예수가 전체적으로 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다

 

 르네상스의 미술은 보이는 대로 그리려는 자연주의적 성향을 보이긴 했지만 과격하게 슬픈 장면이나 흥청망청 즐거워하는 식의 감정 표현을 무척 자제했다. 아름다움의 이상적인 표현을 중시하였던 고대 그리스의 문화의 정신을 이어 받아 그림이나 조각품에서 등장인물이 더욱 우아하고 품위있고 차분해 보이기를 원했다. 감정을 표현해도 되도록 조용한 느낌이 나도록 처리했다. 그래서 르네상스는 '정적이다'라고들 말한다.

 

라파엘로가 사망한 1520년 경, 마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이 시작된다. 1527년에는 에스파냐제국의 왕이 군사를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 와 엄청난 학살을 저질렀다. 그리고 도시는 하루 아침에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라파엘로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시작된 혼란스러운 상황은 미술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평온한 표정, 완벽하고 이상적인 인물들의 우아한 자태, 안정된 구도와 우아한 색감을 자랑하던 르네상스 미술이 점점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라파엘로가 죽은 후 르네상스의 전성기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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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조지오웰 지음/ 정희성 옮김

뉴욕 타임즈 선정 100선 (http://blog.daum.net/ccsj77/48

 

생각보다 훨씬 끔찍하다. 공포와 전율이 온 몸을 휘감아 돈다. '빅 브라더'의 감시의 시선은 이미 귀에 익은 상투적인 문구가 되었고, 현대 정보화 사회에서 사적 영역의 감시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점점 높아지면서 현대판 빅 브라더의 등장에 대한 각성의 목소리 역시 큰 소리를 발하고 있다. <1984>가 오늘날 우리 시대를 위한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시작부터 독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복도에서는 양배추 삶는 냄새와 낡은 매트 냄새가 풍겼다> <커다란 얼굴의 포스터가 그를 노려보았다...마치 눈동가자 사람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얼굴 아래 '빅 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소설은 내내 불편한 느낌을 강요하고 있다. 모든 사무실과 방에 설치되어 있는 텔레스크린, 텔레스크린을 통해 일거일동을 엿보며 감시하는 사상경찰. 거리에선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사상경찰의 끄나풀들과 거리의 상공을 비행하는 헬리콥트. 교외의 한적한 숲길에도 몰래 숨겨져 있는 마이크로 폰. 어디에나 빅 브라더의 눈을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

 

밀폐된 공간의 불편한 느낌은 윈스터와 줄리아의 교외에서의 만남으로 조금 해소되는 듯 하다. 비교적 감시가 취약한 시골의 숲 속에서 비밀리에 만난 그들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욕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감시의 눈길을 교묘하게 피해 윈스터와 줄리아는 서로의 육체를 탐닉한다. 그러나 언젠가는 탈선행위가 당에 적발되어 비참하게 끝이 날 것을 의식하면서, 아슬아슬한 관계를 이어나간다. 

 

그러다가 꽝!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고문과 회유와 세뇌, 위협등 온갖 끔찍한 일을 겪으면서 윈스터는 결국 빅 브라더를 사랑하게 된다. 마음속 깊이! 그리고 그 때 그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총알이 그의 머리에 박힌다.

 

<윈스턴은 빅 브라더의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그 검은 콧수염 속에 숨겨진 미소의 의미를 알아내기까지 사십 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오, 잔인하고 불필요한 오해여! 오, 저 사랑이 가득한 품안을 떠나 스스로 고집을 부리며 택한 유형이여! 그의 코 옆으로 진 냄새가 나는 두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잘 되었다. 싸움을 끝났다.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윈스터가 죽어가면서 순간적으로 생각하고 느꼈던 이 말은 소름이 오싹 돋게 한다. 그렇게 증오하고 혐오했던 빅 브라더를 사랑하게 되다니? <1984>의 무자비함!!!

 

 1984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권력의 잔혹성, 진실의 은폐 가능성, 자유의 말살, 허수아비 인생들, 배타적 폐쇄 사회, 인식의 조작...읽는 내내 정말 이런 비인간적이며 탈인간적인 상황이 가능할 것인가하는 생각만으로도 등짝이 으스스해졌다.

 

이러한 상황은 오직 조지 오웰의 상상에서만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한 때 5년간 버마 경찰로 근무했으며,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사직했다는 데 있다. 아마 버마에 대한 식민지배를 영구화하기 위한 영국 제국주의 경찰의 행태의 일부가 이 소설의 한 뿌리가 아니겠는가?

 

일제 식민시대를 겪어본 우리는 그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더구나 우리의 현대역사에서도 수치스럽고 저주스러운 망령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영화 <변호인>에서의 악질 경찰 차동영역을 맡았던 곽도원이 오버랩된다. 예방하는 것이 최고의 경찰들의 일이라고.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권력을 위해 무죄한 사람들이 죽어나가야만 하겠는가? 어디 이것이 영화에서의 일이기만 할까?

 

1984년은 이미 지나갔지만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1984>의 망령은 호시탐탐 전세계를 노려보고 있다.

 

미셀 핀레이 지음/이정현 옮김/ 에듀박스

 

This is English 는 영어 글쓰기에 대한 내용이다. 필요한 부분을 간추려 보았다.

 

***수동태

수동태 문장들은 어색하고 형식적인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용하게 수동태를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1. 누가 그 행동을 했는지 그다지 문제 삼지 않을 때는 아주 유용하게 쓰입니다.

 The house has been repainted inside and out.

2. 그 행동을 누가 했는지 모를 때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His bicycle was stolen.

 The broken fence has been mended.

3. 완곡하게 비난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소극적으로 은근슬쩍 시인할 때도 매우 유용합니다.

 Top-secret papers were mislaid.

 The CDs were dropped on the floor.

 

너무 자주 수동태를 사용하면 지나치게 점잔 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뜻이 애매해지기도 합니다. 굳이 수동태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someone을 사용하여 '그 누군가'를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Someone has dropped mud all over the floor.

 

 

*** 한정사

한정사는 명사에 대한 정보를 준다는 점에서 대명사나 형용사와 비슷하지만 명사를 묘사하기보다는 지정하는 느낌입니다. 정관사, 부정관사도 한정사입니다. 형용사나 소유대명사와는 달리 한정사는 연관된 명사와 절대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관사

정관사 the와 부정관사 a/an의 구별은 지칭하는 명사를 상대방이 이미 알고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부정대명사

관련된 사람이나 사물을 한정하여 말할 수 없을 때 사용합니다.

 

***부사의 위치

부사가 3음절 이상이 될 때는 동사 바로 뒤에 넣는 것이 문장의 흐름상 좋습니다.

 The politician spoke eloquently at the meeting.

부사의 위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I only kicked the dog once.

 I kicked only the dog once.

 I kicked the dog once only

 

*** ly로 끝나는 부사의 비교급은  more ~

 

***quite

 He is quite nice. 그는 매우 좋은 사람이다.

약한 강세

He sewed on the button quite well. '상당히'

강세

It's quite gorgeous. '정말'

He is quite the nicest man I've ever met. '정말' 최상급 앞에 쓰여서 강조를 하기도 한다.

약강세

This is quite an improvement. 제법 좋아졌네.

 quite a 명사 '정도'를 강조해준다.

 

**** 과거진행은 과거에 일어난 일 도중에 다른 행위가 끼어들 때도 사용한다.

중간에 끼어든 행위는 과거시제로 쓴다.

 I was walking to the park when it started to rain.

하고 있던 행위는 was walking

끼어든 행위는 started to rain

 

***현재완료는 제한을 두지 않은 시점에 일어난 행위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현재완료는 과거의 일을 나타내긴 하지만 현재에서 바라본 과거라고 할 수 있다.???

특정 과거를 나타내는 말고 함께 쓸 수 없다.

 

 

***능숙한 영어를 우한 7가지 법칙

조지 오웰의 <정치학과 영어>에서 서툴고 재미없는 작문을 타파하기 위한 6가지 규칙이 있다.

1. 활자로 자주 접하는 직유, 은유, 과장된 표현들을 쓰지 마라.

2. 짧은 단어로도 표현할 수 있다면 긴단어는 쓰지마라.

3. 단어를 뺄 수 있다면 빼라

4. 능동태가 가능하다면 수동태를 쓰지 마라

5. 일상용어로 표현 가능하다면, 외래어와 전문용어를 피하라

6. 규칙을 넘어서라

 읽고 읽고 또 읽어야 한다. 언어를 이해하는 방법은 그 안에 몰입하여 흠뻑 젖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규칙을 완전히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면 거기서 벗어나라

 

***

 cliche - 이미 독창적이었던 생각을 오랜 시간에 걸쳐 수정한 표현

It's not rocket science.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push the envelope 인간 위업의 한계를 넓히다.

think outside the box  새로운 사고를 하다

can't see the weed for the trees.

over the moon 아주 행복하여

sick as a parrot 크게 실망하여

skating on the thin ice 아슬아슬한 상황에 처한

walking on the eggshells 위험한 지경에 처한

get a life 정신차려

separate the sheep from the goats

the men from the boys 용기있는 사람을 가려내다

the bee's knee 최적임자

in your dream  그렇게는 안될 걸

You're as old as you feel 나이는 느끼기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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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오닐/ 민승남 옮김/ 민음사

 

 

유진의 부인 칼로타는 "들어갈 때보다 십 년은 늙은 듯한 수척한 모습으로, 때로는 울어서 눈이 빨갛게 부은 채로" 작업실에서 나오곤 했던 유진을 회상한다. 유진 오닐은 자신의 사후 이십오 년 동안 이 작품을 발표하지 말고, 그 이후에도 절대 무대에 올려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았다고 한다. 가슴 아픈 가족사를 이야기하면서 오닐은 얼마나 울었으면 눈이 부은 채로 나왔을까? 왜 아픈 이야기를 썼어야만 했을까? 

 

목련꽃이 꽃봉우리를 막 피우기 시작할 때처럼 누구에게나 인생의 절정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목련꽃이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인생의 내리막길은 막을 수가 없다. 희곡 <밤으로의 여로>에 나오는 제임스 티론의 가족들 처럼... 

 

 

제임스 티론은 아름다운 아내 메리, 첫째 아들 제이미, 둘째 아들 에드먼드와 함께 여름별장에 와 있다.  이 여름 별장의 거실에서 1912년 8월의 어느 하루에 있었던 가족간의 애증이 담긴 대화가 오고간다. 아름답고 건강해 보이지만 묘하게 병색이 있어 보이는 부인에게 티론씨는 친절하게 말을 건네고, 주방에서는 두 아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며 희곡이 시작된다.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티론씨네 가족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언가 비밀스러운 것이 숨겨져 있다는 느낌이 강해진다. 별장 밖에 자욱한 안개가 거실에까지 스며들어 뿌엿게 가리고 있는 듯한 그 실체가 무엇인지 점점 안달이 난다.

 

벗꽃이 활짝 피기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아니 그와는 다른 초조함으로...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여로>의 극중 인물 에드먼드는 유진 오닐 그 자신이다. 티론씨의 가족 이야기는 유진 오닐의 불행한 역사인 것이다. 티론씨 가족은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기 어려운 치부를 가지고 있다. 제이미는 인생의 실패자요, 돈만 생기면 술을 마시고 창녀에게로 달려가는 알콜중독자, 티론씨는 자수성가한 부유한 사람이었음에도 지독한 수전노이다. 가족의 건강이나 안위보다는 노후를 보장해 줄 돈이나 토지에만 열을 올리는 속물이다. 그리고 메리도 차마 입밖으로 말하기가 부끄러운 수치스러운 입장에 있다. 자신의 가족의 치부를 까발리는 것을 감당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런 가족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왜 써야만 했을까? 왜 눈이 퉁퉁 붓도록 눈물을 흘려가며 그것을 쓰야만 했을까?

 

인생의 슬픔에 아랑곳 하지 않고 꽃은 피었다 지는 것을...  

 

<밤으로의 여로>는 부끄러운, 그리고 야속했던 가족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시각을 보여준다. 오닐의 가족은 최소한 혈육간의 애정도 버린 악한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운명이 짊어지운 그 비극 속에서도 끈끈한 가족간의 사랑을 눈물겹게 나타내고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오닐은 이 작품을 통해 가족의 불행을 초래했던 아버지, 어머니, 형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 그들을 용서하고 서로 화해할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미노처럼 연속되는 많은 불행의 씨앗을 뿌렸던 아버지의 구두쇠짓을 마냥 그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아일랜드에서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 생존을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온 극빈민출신인 그는 구두쇠가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던 것이었다.  오닐의 가족 문제는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 시대에 태어난 운명의 장난과 같은 것이었다.

 

아마 이 희곡을 쓰면서 유진 오닐은 불행의 원인, 수치를 초래한 책임을 더 이상 가족 들에게 짊어지우기를 거부한 것 같다. 그들 모두는 비난보다는 동정을 받아야 할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오닐이 사랑했고, 오닐을 사랑했던 그들은 모두 희생자들이었던 것이다. 오닐에게는 그들을 힐난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다만 그토록 불행한 가운데서도 어쩔 수 없이 묻어나는 혈육간의 애정을 확인하고 눈이 충혈되고 붓도록 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오닐을 수렁에거 꺼집어 내 줄 밧줄이었을 것이다.

 

우리 시대를 위한 밧줄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고단한 인생길에서 우리를 끌어 올려 줄 수 있는 것은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달려 있다는 깨달음, 그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 유진 오닐이 이야기하고자 한 것도 바로 그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신경숙 지음 / 창비출판사

 

책을 읽고 난 후 감동이 살아 있을 때 글을 쓰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곰 씹고 되새기면서 충분히 발효를 시킨 후에 글을 쓰는 것이 좋을까? 여과되지 않은 느낌들은 좀처럼 다시 떠올리기가 어렵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엉클어진 부유물들은 바닥으로 침잠해 버리고, 다시는 그러한 상태를 되돌릴 수 없을 거다. 그렇다면 책을 읽은 후의 생생한 느낌과 생각들을 내지르듯 써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생각날 때 내지르고, 또 내지르듯 써 버리자. 후일 그 느낌을 확인하고 생각들을 정리할 기회가 있을테니까... 

 

어떤 책은 읽는 도중 감정이 북받쳐 오르게 하는 반면에, 읽을 때는 큰 울림이 없었지만 이후에 점점 더해가는 무게를 느끼는 책이 있기도 하다. <엄마를 부탁해>는 나에게는 전자에 가깝다. 엄마의 아픔을 뒤 늦게 깨달은 자식들과 남편, 깨닫고 이해한 순간 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잃어버린 것이다. 엄마는 언제나 당연히 엄마였었고, 엄마의 정성이 지극히 정상적이라 여겼던 생각이 일시에 부서져 버리면서, 엄마를 껴안고 '엄마 왜 그렇게 살았어?' 하고 말하고 싶었던 그 순간, 엄마는 ...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가 지금까지 읽은 한국 여류작가의 작품이란 박경리의 <토지>, 정유정의 <7년의 밤> <네 심장을 쏴라> <28> 등이 다 인듯하다.  박경리는 그 장대한 스케일에서, 정유정는 그 사건전개의 치밀함등에서 큰 인상을 받았다면, 신경숙씨는 또 감탄할 만한 면모를 보여준다. 

 

글쟁이는 따로 있는 걸까? 신경숙씨는 천상 글쟁이인 것 같아 하는 말이다. 그녀는 시골 생활을 해 본적이 없는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풍경들을 그린다. 그러나 그녀가 그리자마자 놀랍게도 나의 풍경이 아니었던 그 풍경들이 나의 풍경이 되어 버렸다. 그녀의 머리 속에는 모든 영상이 담겨져 있고, 필름이 돌아가자 그녀가 할 일은 단지 그것을 글로 변환하는 작업인 듯 했다. 작업이 아니다. 그녀는 글로 추억과 기쁨, 회한을 그리는 화가인 듯 했다. 

 

 딸은 "엄마는 부엌이 좋았어?"라고 물어본다. 하루종일 부엌에서 일하는 엄마는 당연히 부엌을 좋아하는거라고 생각했었다. 과연 엄마를 알기나 했던 것일까?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많이 안다고 할 수록 정작 그 사람을 잘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상황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익숙함에 묻혀버리는 진실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 이상의 앎은 무지 속에 잠겨버리는 것을...

 

나는 어머니에 대해 얼마나 잘 아는가? 하고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 숨겨진 그 수많은 모습들은 얼마나 애달프게 나의 마음을 휘저어 놓을까? 지금 알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머니의 모든 모습이 아닐찐대, 숨겨진 사랑이 얼마나 더할 것인가 생각하면 눈가에 뜨뜻해진다. 다행이 어머니가 아직 곁에 있으니, 잘 해야지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정작 어떻게 하는 것이 잘 하는 것인지 내내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김욱동 지음/ 글항아리

 

에코의 말 처럼 '번역은 실패의 예술'일 수 밖에 없을까?

 

번역가들은 무한 공간의 끝자락을 붙잡으려는 무모한 예술가들이다. 번역가들은 축역(직역)과 의역의 스펙트럼 사이에서 방황하는 고된 예술가들이다.

 

신의 분노로 언어가 혼잡해 지고 바벨탑이 무너진 이후 끊임없이 번역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왔다. 세월이 흐르면서 심지어 신의 말씀도 번역이 되어야만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번역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론적 문제가 오랫동안 논의되어왔다. 김욱동교수는 통번역학과의 교수로 번역의 문제에 학문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김욱동 교수는 의역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원전에 따라 축역과 의역의 스펙트럼사이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번역의 필요성을 드러내고 있다. (축역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직역을 의미한다. 그리고 직역의 원래 의미는 원전에서 직접 번역한 것을 뜻한다고 한다. 직역과 상대되는 말은 중역이다. 영어에서 일본어로, 일본어에서 한국어로 번역하는 경우를 중역이라 한다. 축역의 상대어는 의역 또는 자유역이 된다.)

 

제대로 된 번역을 하기 위해 번역가가 타파해야 할 세가지 우상이 있다. 첫째 모국어에 대한 편견  둘째 번역을 암호 해독 행위에 비하는 태도, 세째 완벽한 번역에 대한 그릇된 믿음. 번역가는 이 세가지 우상에서 벗어 날 때 비로소 번역가로서의 제대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원천언어만 제대로 알고 있으면 제대로 번역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원천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필수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원천언어만이 아니라 목적언어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번역을 암호 해독으로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번역가는 원천텍스트의 표층적 의미 뒤에 숨어 있는 심층적 의미를 충분히 파악해야 한다. 텍스트의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을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완벽한 번역은 있을 수 없다. "번역은 결코 끝나지 않으며, 그것은 열려 있고 무한히 계속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번역을 미완의 작업으로 여기는 그레고리 라바사의 말이다. 이 때문에 하나의 원전에서 다양한 번역이 나오는 것이며, 다양한 번역들은 모자이크를 이루어 원전을 보다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도와 줄 수 있다. 

 

<번역의 미로>는 한편 딱딱하기도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번역 이론을 실제 번역 사례와 더불어 제시하고 있어 흥미로운 부분이 적지 않다. 또한 어떻게 번역을 해야 할 것인지 각자의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함도 지적하고 있다.    

 

 

-

이종인 지음 / 즐거운 상상

 

"이제 번역가는 글쓰기로 말한다"

 

직역인가, 의역인가? 이 문제는 점점 도를 더해 가며 논쟁의 불씨가 되고 있는 이슈이다. 원문의 결도 살리고, 원작의 내면을 잘 드러낸다면 이보다 좋은 번역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양자 택일을 해야만 하는 때가 비일비재할 것이다.

 

출판사의 입장에서는 원문의 향기는 살아있지만, (물론 번역 과정에서 원문의 향기가 온전히 살아 있을 리 만무하겠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번역보다는, 원문의 결을 조금 손상시키더라도 독자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을 선호할 것이란데 이론은 없을 것이다. 점점 의역이 대세를 잡아가는 데에는 이러한 상황이 큰 몫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번역은 글쓰기이며, 번역은 창작이다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창작은 자연의 언어를 원어로 하는 번역물이다. 자연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바꾼 것이 원작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창작이자 또한 번역이다.

 

그러므로 좋은 번역을 위해서는 좋은 글쓰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좋은 번역가가 되려면 글쓰기에 집중하라'는 제하에 번역가의 글쓰기를 위한 7가지 법칙을 소개한다.

 

첫째 상투를 잡지 마라

상투적 표현을 멀리하라는 것이다. 조지 오웰은 '신문과 잡지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직유, 은유, 기타 비유법은 절대로 사용하지 말라'라고 말했다. 진정한 창작이 되려면 개성, 독창성이 살아 있는 표현을 찾아야 한다.

 

둘째, 불분명한 단어를 피하라

작가의 생각을 분명히 전달할 수 있는 표현을 선택해야 한다.

 

셋째, 수식어를 억제하라

러시아의 소설가 체홉은 수식하는 명사와 형용사와 동사가 너무 많으면 문장이 독자의 주의력을 사로잡기 어렵다고 말했다. 일부러 수식어를 동원하여 아름답게 꾸미려고 하면 문장이 애매모호해 질 수 있다. 수식어를 사용하려면 그 사용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네째, 연결이 좋아야 한다

하나의 문장 내에서 각 단어와 어구들이 잘 연결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문단내에서 각 문장들이 잘 연결되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문단과 문단이 서로 잘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각 문단의 첫번째 문장을 어떻게 제시하는가에 따라 그 문단의 성격이 결정된다.  

 

다섯째, 구조를 갖추어라

기승전결과 같은 구조가 뚜렷한 글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구조에 기여하지 않는 디테일(세부사항)은 아무리 인상적인 표현, 인용, 대화라 해도 제거해야 한다.

 

여섯째, 여백을 남겨 놓아라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열 마디로 말할 것을 일곱 마디 정도로 말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일곱째, 솔직하라

공감대를 형성하려면 솔직한 인상을 주어야 한다. 

 

글쓰기는 작가마다 다 그 방법론이 다를 것이다. 이종인씨가 제시하는 일곱가지 중에서도 나름 필요한 요소를 뽑아 자신의 글에 적용할 수 있다면 보다 향상된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글 쓰기는 번역을 하기 위한 좋은 기초가 될 것이다.

 

번역가들의 노고가 없다면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정보들에 제대로 접근할 수가 없을 것이란 점에서 본다면, 그들에 대한 대우가 사뭇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번역가들은 더욱 큰 책임을 가지고 이 일에 임해야 함에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완벽하게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는 법이라 생각하며, 꽤 매력적인 번역가의 길을 흘낏 쳐다본다. 과연...?

 

귄터 그라스 지음/ 장희창 지음

 

귄터 그라스는 1927년 독일계 아버지와 카슈바이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폴란드의 자유시 단치히 교외 랑푸우르에서. 권터 그라스는 1959년 출간한 양철북으로 오랫동안 명성을 떨쳐왔다. 그리고 해마다 노벨상 수상자로 물망에 올랐지만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1999년에야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이 소설은 타이틀이 화려하다. 노벨상 수상자의 작품인데다가, 그의 소설 양철북은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 미국 대학위훤회 선정 SAT 추천도서, 뉴욕타임지 100선에 선정되어 있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을 읽으면서 내내 불편했다. 어떤 책은 행복 에너지를 발산하여 나를 전염시킨다. 집을 나서면 밝은 햇살과 푸른 하늘이 나를 반기고, 때로는 자연의 신비가 속 모습을 드러내는 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양철북은 혼란스러운 느낌, 끈적 끈적한 보이지 않은 오물이 묻은 느낌을 주었다. 집 밖을 나설 때 나를 반기는 것은 우중출한 회색의 대기였다. 어디서 이러한 느낌이 나오는 것일까?

 

귄터 그라스는 전후 독일의 작가이다. 그는 엄청난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맨 몸으로 부딪혔었다. 그것도 가해국인 독일의 국민으로, 실제로 전차병으로 참전하여 미국의 전쟁포로가 되기까지 하였다. 아마 전쟁이 끝나고 그 의미를 돌이켜 보면서 그의 예리한 감성이 포착했던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 자신도 어쩔 수 없었던 시대의 흐름, 그리고 그에 역행하지 못했던 회한이 그의 책 속에 스며 있어 독자인 나에게 까지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닐까?  

 

 

 

그라스는 추악한 전쟁으로 무작정 끌려 들어갔던 독일의 소시민들 모습, 그리고 지성인들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자 한 것일거다. 이 소설에 나오는 수많은 소시민들의 모습은 중심을 잃고 시대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는 꼭두각시처럼 그려진다. 숭고한 도덕성은 찾아 볼 수가 없으며, 단지 탐욕스러운 인간 육체의 욕망에 따라, 저항하지 않고, 아니 이미 저항할 마음도 정신도 없는 것인지 모른다. 어쨌든 이성과 지성이 지배하지 않는 영역을 활보하는 소시민들의 모습들.

 

오스카는 98센티미터의 난쟁이이다. 세살때 계단에서 떨어져 뇌를 다친 이후로 성장이 멈추어 버렸다. 하지만 그의 지성은 이미 날 때 부터 성인의 틀을 가지고 있었다. 소설 속의 오스카와 화자인 '나'는 동일 인물이기는 하지만, 엄연한 구별이 있다. 오스카는 성장하기를 거부하는 외부에서 비치는 존재이며, '나'는 이미 성장한 내면의 오스카를 가르킨다.

 

양철북의 주인공인 오스카는 당시의 표리부동한 지성인들의 모습을 풍자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독일 사회주의의 발호를 경계하고, 그것에 저항해야 한다는 부르짖음이 분명 그들의 마음과 정신 속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두려움 또는 현실에서의 안위등의 욕망에 이끌려 타협해 버렸다. 이러한 표리부동의 행동하지 않는 지성인들은 성장하기를 거부한 오스카, 뒤틀어진 오스카의 모습으로 표상되었을 것임데 틀림없다.

 

귄터 그라스는 그러한 지성인들을 오스카에 비한다. 양철북에 나타난 오스카의 모습은 비틀어진 악인의 모습이다. 비록 갈색 고수머리에, 깊고 깊은 초록색 눈, 그리고 부드럽고 우아한 손을 가지고는 있지만 난장이에다 곱추의 등을 가진 이중적인 모습의 나쁜 놈이다. 오스카는 천진난만한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어머니, 얀 브론스키, 마체라트, 그리고 먼지떨이 단원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심지어 오스카가 사랑했던 간호사 도르테가도 그가 죽였음에 틀림없다. 그는 뻔뻔하게도 그 사실을 부인하지만.

 

오스카의 양철북 소리는 소시민들을 춤추게 한다. 지성인들의 허황된 사탕발림과 같은 소리에 아무 것도 모르는 소시민들은 장단을 맞춘다. 이러한 짝짜꿍은 인류를 비참한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게 하였다. 지성인들의 책임을 일깨우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대는 어떤 북소리를 발하는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귄터 그라스의 자기 변명인지 가혹한 풍자인지, 헷갈리게 한다.  그 부분에서 오스카는 계속해서 '검은 마녀'에 대해 이야기한다. 쫓고 있는 검은 마녀, 실재하는 검은 마녀... 귄터 그라스는 인류는 어쩔 수 없이 검은 마녀에 의해 쫓기는 신세이니, 그들의 정의롭지 못하고, 위선적인 모습은 인류의 숙명적인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그가 경멸하고 모욕했던 독일의 소시민들과 지성인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것이 풍자라면, 오히려 그 추악한 전쟁의 당사자로서의 부끄러움을 검은 마녀에게 돌리려는 당시의 독일 지성인들의 얄팍한 속마음을 까발리는 또 하나의 속 시원한 외침일 것이다.

 

귄터 그라스는 양철북을 통해 전후 독일 사회의 추잡한 모습을 여과없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떠한가? 귄터 그라스는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바늘로 찌르는 아픈 질문을 던진다. 

 

 

 

 

양철북은 1899년에서 1954년에 걸친 독일의 역사를 그리고 있다. 1부는 오스카의 할머니 안나 브론스키가 방화범인 콜야이체크와 만나는 오스카의 어머니 아그네스를 낳는 장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오스카의 탄생과 그의 아동기를 거쳐 정치적 파국, 즉 단치히에서 <수정의 밤> 사건이 일어나는 시기까지를 다룬다. 제2부는 그라스의 고향이기도 한 단치히의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을 발단으로 하는 전쟁 시절부터, 과거의 애인이자 의붓 어머니인 마리아와 의붓동생 쿠르트를 데리고 러시아군에 의해 점령된 단치히에서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 3부는 전후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뒤셀도르프로 온 오스카의 개인적 운명과, 정신 병원에 수감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는 무명지 사건에 얽히 이야기등으로 이어진다. (장희창의 해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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