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방탈출 카페에 가자?"
"가기 싫다. 안 간다."
"친구들이랑 방탈출 카페에 가기로 약속했는데, 아이들만 입장시켜주는 건 안 된대. 아빠가 같이 가야 돼."
"싫은데"
"같이 가 줘"
"좀 조르지 마라. 귀찮다."
"아빠아~"

옆에 있던 아내가 듣다 못해 한 마디 한다.

"방탈출 카페에 갔다가 갈맷길 데리고 가면 어때요?"

귀가 솔깃해진다. 아이들에게 길 걷는 기쁨을 알려주고 싶었는데, 딸아이는 극구 함께 가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갈맷길 아빠와 함께 가면 생각해 볼게."

딸아이는 친구들에게 카톡을 보낸다.

"아빠, 애들이 다 갈맷길 따라 간대."

"좋아, 그러면 가자."


방탈출 카페는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KGB에 붙잡혀 수감된 스파이가 탈출한 흔적을 찾아 똑같은 방법대로 방을 탈출해야 했다. 1시간 안에 탈출하지 못하면 실패다. 우다섯 명 모두 탈출 비밀을 찾아 헤매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는 갈맷길을 갈 차례다. 아이들과 39번 버스를 타고 송정까지 갔다. 송정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하나씩 먹고 다시 181번을 타고 대변으로 갔다.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계획에는 한치의 변경도 없다.


대변 척화비 앞에 섰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아이들에게 척화비 안내문을 읽어 주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했다.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에서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친 흥선대원군은 쇄국 의지를 알리고 서양 오랑캐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대변에 있는 척화비는 일제 시대 부두 공사 때 바다에 버려졌던 것을 해방 후 인양하여 지금 대변 초등학교 교정에 옮겨놓았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我戒萬年子孫(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아계만년자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였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하자고 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이에 우리 자손만대에 경계 하노라."


아이들은 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듯 시큰둥하다. 아이들에게 역사란 무엇일까? 반드시 알아야 할 자신의 뿌리이며 민족혼을 일깨우는 스승일까? 아니면 아이들은 아직은 역사를 알기에 이른 나이일까?


아이들은 척화비에서 죽도공원으로 가는 길에 거대 해파리를 보고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와~ 이렇게 큰 해파리는 처음 본다."

"이렇게 큰 해파리는 기장에서만 볼 수 있는 거야." 기장에서 나고 자란 한결이가 말한다.

아이들은 해파리의 독을 무서워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일회용 우산으로 해파리를 찔러보기도 하면서 신기해한다.


아이들은 움직이는 동물에 흥미가 많다. 하지만 식물과 풍경처럼 정적인 것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떨어진다.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들에게는 정적인 것이 아직은 눈에 들어오지 않나 보다. 언제쯤이면 정적인 사물이 눈에 들어오는 걸까? 나는 어땠을까 돌아보니 꽤 나이가 든 후에야 그랬던 것 같다. 역시 아이들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리라.



죽도 공원으로 들어갔다. 갈맷길을 면한 동해안에는 섬다운 섬이 없다. 대변항에 있는 죽도가 유일한 섬이다. 걸어서 지나갈 수 있는 다리가 놓여있어 죽도까지의 쉽게 들어갈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섬은 사유지이다. 시온그룹이라는 종교단체의 소유로서 울타리와 철조망에 막혀 섬 중앙으로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이 섬을 개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소유자로부터의 반응이 없는 실정이다. 아쉽지만 우리는 갯바위를 밟고 아슬아슬하게 섬 둘레를 한 바퀴 돌았다. 죽도에 발을 들여놓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게 전부인 듯하다.

하루빨리 섬이 개방되기를 기원해 본다.  


섬 내부로 나 있는 커다란 대문 쪽으로 돌아가는 길은 이게 길이 있는 게 맞는지 의아할 정도로 좁은, 그냥 발 디딜 곳을 조심스럽게 찾아 밟고 지나야 만 할 그런 길 아닌 길(?)이었다. 물이 들어오면 사라질 그런 길, 아슬아슬 밟고 지나갈 수 있는 길, 설마 이 좁은 공간을 지나 섬을 한 바퀴 돌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길, 이 쪽으로는 거의 사람들이 발길을 돌리지 않을 길, 오직 호기심 많은 아이들 같은 성격의 사람들만이 무작정 가 볼 마음을 가질만한 길, 하지만 수심이 깊지 않아 위험하지는 않았다.


섬 둘레를 1/4 정도 돌 때까지는 발 디딜 데를 찾아야 했지만 그 뒤로는 비교적 너른 갯바위 위를 밟고 지날 수 있었다. 그러다 섬의 저쪽 끝에서는 드디어 길이 끊어졌다. 물이 빠지면 운동화를 적시지 않고 지날 수 있겠지만, 지금의 상황으로는 발목까지 오는 물속을 덤벙덤벙 건너든지, 아니면 아슬아슬하게 물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작은 돌들을 징검다리 삼아 건너야 할 형편이다. 자칫 징검다리 돌이 삐끗하면 발이 물에 빠질 것을 감수해야 하는데, 아이들은 좀처럼 건너오려 하질 않는다. 다시 돌아가겠다고 우긴다. 중학교 1학년인 한결이만 나를 따라온다. '여자 애들은 못 온다 쳐도, 진서 이놈! 너라도 따라와야지.' 속이 부글거린다.


먼 바다와 마주하고 있는 쪽으로 나오니 낚시꾼들이 무리가 보인다. 그리고 저 먼 바다 쪽으로 파도를 막아 주는 방파제와 그 끝에 어김없이 우뚝 서 있는 등대가 보인다. 이 방파제는 상당히 넓은 공간을 안고 있다. 변항은 생각보다 훨씬 큰 항이었다.


동해안의 등대는 대변에 와서 절정을 이룬다. 2002년 월드컵 4강을 기념하는 월드컵 등대와 일명 마징가 등대 및 태권브이 등대라 불리는 장승등대가 죽도 앞바다에 우뚝하다.  


그리고 죽도와 오랑대공원 사이에 있는 닭벼슬 등대와 젖병등대. 이 다섯 등대는 제각각  다른 형상이다. 아이들 장난같은 모양의 등대 다섯이 한 눈에 보인다.


다음 행선지를 멀리 바라본다. 저 멀리 점점이 바닷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갯바위, 오랑대가 보인다. 어떻게 할까 순간적으로 갈등한다. 날씨가 무더운데, 빗방울도 떨어지는데, 아이들과 걷는 길을 여기서 마감할까? 어렵게 아이들과 함께 온 이 길인데, 어쩌지? 아이들의 마음속에 오늘의 갈맷길 걷기가 오랫동안 남으면 좋겠다. '고생한 만큼 기억에 남는다'는 상투적인 상식에 기대어 조금 더 걷자고 마음먹는다.


"애들아, 힘들지."

"예"

"오늘은 저기 보이는 오랑대까지 갈 거다. 조금만 더 가자."

"와 저렇게 멀리요."

"멀어 보이지만 걷다 보면 금방이다."

"..." 


이제 오랑대 공원 입구까지는 시원하게 뻗은 일직선 도로이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걷는다. 아마도 이 더운 날에 갈맷길 따라와서 고생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다음에 갈맷길에 나서자고 하면 아이들이 또 따라나서려고 할까?


"다음에 또 따라 올래?"

"방탈출 카페에 가면 따라올 수 있겠어요."

"하하하"

"저도요."

"그냥은 안 따라올 거예요."


그래. 아이들은 방탈출 카페가 더 마음에 들었구나. 그리고 갈맷길 걷기가 죽도록 싫었던 것도 아니었구나.



오랑대란 이름의 유래는 불분명하지만,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시랑 벼슬을 하던 다섯 명이 기장에 유배된 친구를 찾았다고 이렇게 불린다고 한다. 다음 행선지인 해동 용궁사 부근의 시랑대도 그렇게 해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오랑대 바위 위에 걸터앉은 용왕단을 배경으로 태양이 떠 오르는 풍경은 사진작가들이 좋아하는 장면이다.


오랑대 용왕단 아래에 삼면이 바위로 둘러싸인 조그만 공간은 거의 삼십 년 전의 기억을 일. 한번 와본 듯한 장소, 하지만 기억과 다소 차이가 있는 곳, 여기가 그때 그곳이라면 분명 저 공간 가운데 큰 바위가 하나 있어야 하는데... 기억에 남아 있는 장소는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이 한순간 되살아 나다니 놀랍기만 하다.


그때 동생이 하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행님은 손과 발이 완전 따로 움직이네."

개구리헤엄을 치던 나를 보고 하던 말이다.


한 여자애가 우리 보고 하던 말도 생각이 난다.

"아저씨, 제가 저 바위까지 헤엄쳐 가고 싶은데 혹시 제가 빠지면 구해줄 수 있나요?"

수영을 좀 하던 동생이 콧방귀를 뀐다.

결국 그 여학생은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기억의 메커니즘이 신기하기도 하다. 한순간의 인상이 잠자고 있던 기억을 일깨우다니. 그것도 큰 의미가 있는 기억도 아닌데.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에 보면 오래 전에 잃어 버렸던 시간을 일깨워낸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의 맛 이야기가 나온다. 그 기억은 잃어버렸던 것이 아니라 아주 깊은 구석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깊은 곳을 건드리는 찰나의 자극은 그 숨은 기억을 되살려 낸다.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거의 모든 것이 사실은 우리 두뇌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아니야. 그럴 순 없지. 허공에 흩어져 사라진 기억이 설마 하나도 없으려고.


갈맷길 1코스의 남은 길을 가면서 찾아볼 것이 하나 생겼다. 송정까지 해안길을 따라가면서 그 옛날 기억의 장소를 찾아보는 것. 혹 이 곳 오랑대가 기억 속의 그곳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 그 바위는?



오늘의 갈맷길 걷기는 여기서 마무리한다. 아이들과 함께 걸었던 덕분에 정말 짧은 길을 걸었던 걸음이었다.

이따금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걷는 길이었지만 비 때문에 더위를 조금이나마 견딜 수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며 그 비를 맞고 걸었어도 좋았을 것을.


다음 갈맷길 기행은 오랑대공원에서 시작하여 해동 용궁사, 시랑대, 송정을 거쳐 해운대 달맞이 고개까지이다.





    갈맷길 1-2코스는 기장군청을 출발하여 대변항, 해동용궁사, 송정을 거쳐 해운대 문탠로드 입구까지 21.4km의 길이다. 1시간에 3km를 걸으면 7시간이 걸리고, 1시간에 4km를 걸으면 5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갈맷길 안내서에 소개된 표준 시간은 6시간이다.

      

    잠자리에 들고서도 머릿속은 갈맷길 생각으로 설렘 반 걱정 반이다. '폭염이 예고된 7월의 마지막 날에 21.4km를 다 걸을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이번 기회에 1-2코스를 다 걷고 싶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무리하지 말라고 한다. '그럼 해동용궁사까지 3시간 정도만 걷는 것은 어떨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걱정을 하다가 마침내 일정에 너무 얽매이지 말자고 생각한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그래. 길을 많이 걷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길을 가면서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생각하면 된다. 힘이 들거나 멈추고 싶으면 거기에서 멈추면 된다. 이 길을 걸으면서 나의 인내력을 시험하거나 나의 한계를 확인할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자유롭게 걸을 뿐이다. 

     

    아침에 길을 나서려 할 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여름 방학이라고 창원에서 조카 둘이 와 있다. 게다가 오늘은 나흘간의 휴가가 시작되는 날이다. 나 혼자 길을 걷자고 아내와 딸을 두 조카와 함께 두고 가자니 꺼림칙하다. 무슨 대답이 나올지 뻔히 알면서 물어본다. "나와 함께 갈맷길 갈 사람? 은유야 같이 가자. 너희들 함께 가지 않을래?  당신은 어때?" 아무도 함께 갈 뜻이 없음과 나 혼자 나가는 것에 아무도 불만을 표하지 않음을 확인하고 조금은 마음 편하게 집을 나섰다. 오전 9시이다.


    39번 시내버스를 탄다. 10시경 갈맷길 1-2코스가 시작되는 죽성 사거리에 내려 죽성로에 들어선다. 바람에 살랑이는 잎새처럼 이는 기대감. 봄 비 내리는 4월의 죽성로는 차창밖으로 그냥 그대로 한 폭의 초록 수채화였는데, 한 여름의 죽성로는 어떨까?


    기대가 크면 그만큼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죽성로는 잠깐 쭉 뻗은 시원한 모습을 보여 주더니, 곧 뜨거운 여름 길이 되었다. 비에 젖은 사월의 죽성로와 뙤약볕쬐는 한여름의 죽성로가 같은 길일 거라고 애초에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다. 인가가 드물어지면서 도로가의 보행로도 점차 없어지고, 좁은 이차선 도로를 오가는 차량들에 신경을 쓰면서 갓길을 조심스레 걸어야 했다. 죽성로를 40~50분 걸었을 것이다.


    두호마을, 갈맷길 1-2코스에서 처음 들리는 마을이다. 두호마을에는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두모포라 불리었는데, 이곳은 연안방어를 위한 수군이 주둔했던 군사요충지였다. 지금도 두모포진성의 일부가 남아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왜군이 축조한 왜성이 마을 뒷산에 남아 있다. 왜란 후 두모포진은 부산 수정동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북쪽에서 죽성천이 흘러드는 곳에 작은 지방어항인 두호항이 들어서 있다.


    마을의 언덕 위에는 노거수老巨樹 다섯 그루가 사방으로 가지를 뻗고 있으며, 그 가운데 국시당이라 불리는 서낭당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서쪽에는 봉대산이 죽성만을 내려다보고 있고 그 정상에는 봉수대가 남아 있다. 마을 동쪽에는 해안 암석과 어우러진 동해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해안을 따라 황학대, 기장 죽성 성당, 어사암이 있다.  



    기장 죽성리를 찾는 관광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시원한 동해 바다를 배경으로 해안 암석에 그림처럼 올라앉아 있는 죽성 성당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이다. 이곳에서 예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하지만 조선시대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이 죽성을 자주 찾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죽성은 예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명소였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김없이 사람이 살다 간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다. 그 이야기가 잘 알려진 역사적 인물의 이야기라면 더욱 흥미가 간다. 조선시대 시조문학의 대가였던 고산 윤선도가 여기에 있었다. 기장에서 7년간 유배생활을 할 때, 그는 죽성 해안의 작은 섬 송도의 아름다움에 끌렸다. 아름다운 바다, 시원한 바람, 코 끝을 스치는 바다 냄새와 해송 향기, 파도와 갈매기 소리가 그의 시름을 달래 주었다. 그는 이곳을 양쯔강 하류의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황학루에 비하면서 황학대라 이름하였다.


    봉대산 높은 곳에서 죽성만을 내려다보면 날개를 활짝 편 학 한 마리가 북쪽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이 연상된다.

    기가 막히게도 방파제는 학의 긴 부리처럼 보인다. 해송이 드문 드문 자란 황학대는 학의 머리, 오른쪽 암석 해안과 왼쪽 해안은 좌우 날개를 펼친 모습이다. 푸른 학의 머리에 황금빛 암석과 모래사장이 두 날개가 되어 황학은 북쪽을 향해 날고 있다. 고산은 백성의 병을 치료할 약초를 캐러 봉대산에 올랐다가 죽성만을 내려다 보고 학의 모습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 옛날 유배생활의 시름을 씻어주던 황학대의 절경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고 30여 그루의 해송만이 옛날의 흔적을 지키고 있다. 10명 남짓 올라설 수 있는 6~7m 정도 높이의 조그만 바위 언덕 앞에 초라한 황학대 안내문이 안쓰럽다.  


    두호마을 전경


    아름다운 자연을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짓이겨 버리는 인간의 몰지각함이 슬프다. 조선 최고의 시인 윤선도가 극찬한 황학대의 절경을 지루한 회색 시멘트로 덮어버리고, 볼썽 사나운 전봇대와 황학대 주위 공간을 가로지르며 시야를 방해하는 전기줄로 궁색하게 만들어 버리다니. 기장 군청에서는 하루 빨리 황학대의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초라하게 남아있는 황학대에 올라 본다. 바다를 바라본다. 아! 아직도 여전히 황학대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풍경은 아름답다. 


    윤선도의 비 온 뒤 풍경을 그린 시 한수로 아쉬움을 달래 본다.  


    우후요 雨後謠

    구즌 비 개단 말가 흐리던 구룸 걷단 말가,

    압 내희 기픈 소히 다 맑앗다 하나산다

    진실로 맑디 옫 맑아시면 갇긴 시서 오리라


    궂은비 개인다 말인가 흐리던 구름이 걷힌다 말인가

    앞 시내 깊은 연못이 다 맑았다 하는구나

    진실로 맑디 맑아지면 갓끈 씻어 오리라





    황학대 옆에 황학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매력적인 정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희봉 님의 "한국 건축의 모든 것 - 죽서루"에 나오는 '한국의 누정은 밖에서 바라보는 건축물 이상의 의미가 있다. 누정의 존재 의미는 누정의 안 공간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데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줄줄 흐르는 땀도 식힐 겸 피곤한 다리도 쉬어줄 겸 신발을 벗고 황학정을 올랐다. 황학정의 계자 난간에 기대어 앉아 죽성 앞바다를 바라보면서 어느 듯 나는 400여 년 전 윤선도처럼 그 절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땀을 식힌 후 기장 죽성리 해송을 보기 위해 두호마을 뒷 언덕에 올랐다. 기장 죽성리 해송은  400년 수령의 거대한 해송 다섯 그루이다. 다섯 그루가 그 한 가운데 서낭당인 국수당을 품고 있다.  400년 전 이 언덕에 돌무덤을 쌓고 그 주위에 여섯 그루의 해송을 심어 국수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 해방 이후에는해마다 정초에 마을을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서낭당이 되어 현재는 국수당이라 불리고 있다. 











    언덕 아래 두호마을의 벽에는 가지 가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아쉽다. 벽화보다는 오히려 황학정을 살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을 해 본다.









    두호마을 해안에는 또 다른 역사의 흔적이 있다. 마을 앞바다에 있는 널찍한 해안 바위 '어사암'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고종 때 대동미를 실은 조운선이 풍랑으로 죽성 앞바다에 침몰하였다. 굶주린 어촌 주민들이 이 곡식을 건져 먹었다가 절도 혐의로 기장 관아에 붙잡혀 가 문초를 받다 죽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이도재를 어사로 파견하였다.


    주민들은 기장 관기 월매에게 자신들의 억울함을 어사에게 호소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어사가 현장을 조사하기 위해 매바위(어사암)를 찾았을 때 월매가 동행하여 춤과 노래를 선보였고, 이곳의 절경과 월매의 교태로 흥이 난 어사는 흔쾌히 "그 불쌍한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겠소"하며 주민들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매바위 위에 "하늘은 비어서 다시 형상하기 어렵고, 바다는 넓어서 시를 짓기 어렵네. 세상 구만리에, 한 조각 갈대배로 항해해 갈 뿐이라네.(天空更無物 海闊難爲詩 環球九萬里 一葦可航之)"라는 시를 새겨 넣었다.


    어사의 은혜를 고맙게 여긴 주민들은 매바위를 어사암이라고 불렀다.






    두호마을 다음 마을이 월전마을이다. 두호마을에는 죽성드림 성당을 보러 온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월전마을에는 횟집 찾는 손님들이 붐빈다. 


    월전마을에서 대변항으로 가는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해변을 따라가는 길이며, 또 다른 하나는 작은 고개를 넘어가는 기장 옛길이다. 해변길은 많이 걸었으니, 이제는 산길을 걷자고 마음먹고 숲으로 들어선다.


    산길을 20~30분을 걸었더니 여름 소나기와 퍼붓는 햇살을 듬뿍 먹고 무성히 피어난 풀들이 길을 온통 덮어 버렸고, 길은 그 흔적을 잃는다. 이따금 나타나는 갈맷길 표식, 파랑 분홍 리본만이 여기가 길임을 알려준다. 풀숲에 숨어있는 뱀이 무서워 작대기를 휘둘러 풀을 이리저리 치며 걷는다. 진한 풀냄새와 흙냄새, 내리쬐는 햇볕, 줄기차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와 함께 걸었던 고생 길이다.  


    자연이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한 편 무섭기도 하다. 자연을 벗어나 사는 인간은 원초적인 자연 속에서 무서움을 느낀다.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들며 나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느낀다. 


    길 / 고은

    길이 없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숨막히며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중략)


    '길이 없는 곳에서부터 진정한 희망이 시작된다.'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다시 사람이 지나 다니던 흔적이 보이고 산등성이 사이로 멀리 대변항이 보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대변항이다. 갈맷길 1코스 중에서 가장 큰 항이다. 큰 해변이란 뜻의 대변. 해마다 대변 멸치축제가 열린다. 대변의 멸치회는 꽤 유명하다. 항구에는 수산물을 파는 가게가 즐비하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 몇몇 화가들이 대변항의 모습을 화폭에 옮기고 있었다. "그림 그리는 모습을 찍어도 될까요?"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고 한 컷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으로는 너무나 쉽게 찍어낼 수 있는 장면을 화가들은 붓끝으로 일일이 터치를 해가며 마음속의 심상을 그려내고 있다. 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감흥을 표현하고 있다.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이들과 함께 수산과학관을 갔다가 지금 송정 맥도날드에 와 있다. 와서 같이 점심 먹자." 폭염 속을 걷는 고생을 멈출 명분이 생겼다. 세 시간째 무더위 속을 걷자니 예삿일이 아니다.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멈출 때는 멈추자. 무리하지 말자. 혼자 걷는 길이 좋은 이유는 나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는 데 있다.  


    대변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대원군 척화비 앞에서 죽도를 바라보며 오늘의 갈맷길 답사를 끝내기로 한다.  다음 갈맷길 답사는 척화비에서 시작하기로 기약하고 181번 버스를 타고 송정으로 향한다. 

     



    우여곡절 끝에 임랑 삼거리에 도착했다. 버스가 떠나버린 빈 시골길에는 햇살이 가득하다. 저 건너 송림 위에도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낮엔 푸른 송림이 아름답고 밤엔 달빛 아래 은빛 파랑이 아름다운 임랑이다. 길가에 피어있는 노란 꽃 무더기 위에 흐드러진 햇살은 이미 자유다. 나는 자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10시 20분 드디어 임랑을 출발하여 갈맷길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임랑해수욕장을 나와 임랑교 옆에 있는 조그만 임랑마을 도시숲 공원을 통과하여 좌광천을 건넌 후 해안도로를 벗어나 바닷길 쪽으로 접어든다. 이제 내내 푸른 바다를 왼쪽 어깨에 두고 걸을 참이다. 차례로 문동리, 문중리, 칠암리, 신평리, 동백리, 이천리를 거쳐 일광까지는 계속 바다를 벗 삼아 걸을 것이다. 갈맷길 1코스에는 만나는 이 마을은 신평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포구를 끼고 있는 전형적인 어촌 마을이다.


    길을 떠나 만난 첫 마을 문동리는 조용한 어촌 마을이다. 마을과 바다 사이 너른 공터에 펼쳐 놓은 그물, 바다로 길게 뻗은 방파제, 그 방파제 끝에 있는 빨간 등대, 방파제에 설치된 하역작업용 소형 크레인, 여기저기 정박해 있는 선박들은, 인적이 드문 이 어촌 마을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문동리에는 조선시대 공납미를 보관하던 '해창海倉'이 있었다. 지금은 기록으로만 남아 있고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이 마을은 그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마치 마을의 담벼락 아래 시멘트를 뚫고 올라오는 질긴 잡초처럼 문동리는 질기게 그 생명력을 이어왔다.   


    갈맷길은 마을과 바다 사이에 있는 널찍한 시멘트 공터를 가로질러간다. 길이라기보다는 공터처럼 보이는 애매모호한 그 길은 그늘 하나 없는 회색 시멘트 길이다. 길 위로 사정없이 땡볕은 내리고, 바닥에서 퉁겨져 나온 허연 빛 속을 걷는 걸음은 곤혹스럽기도 하다. 바로 옆에 푸른 바다가 있음에도 뜨거움이 시원함을 압도한다.  


    포구 중간 부분에서 문중리와 문동리가 맞닿아 있다. 두 마을은 문동리 방파제와 문중리 방파제가 품은 잔잔한 바다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


     

    문중리를 지나자 칠암(七岩)리이다. '일곱 개의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서 칠암인 줄 알았다.  사실은 마을 앞바다에 '옻바위'라는 검은 바위가 있어서 칠암(漆岩)이라 불렀는데, 옻나무 칠(漆) 자를 쉬운 일곱 칠(七) 자로 바꾸어 오늘날 칠암(七岩)이 되었다.  

     

    칠암으로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모습은 칠암 앞바다에 떡 하니 가로 놓여있는 방파제였다. 육지에서 길게 뻗어나온 칠암 방파제에서 떨어져, 칠암 앞바다 한가운데 일자로 서 있는 방파제. 칠암은 깊숙한 포구는 아니지만 먼 바다의 파도를 막아 주는 이 일자형 방파제 때문에 그나마 아늑해 보인다. 


    갈맷길 1코스에는 등대가 부지기수이다. 들리는 포구마다 마을의 수호신인 장승처럼 서 있는 등대, 등대, 등대.그중 칠암에는 등대가 세 개나 있다. 칠암 부근의 문중 등대와 신평 등대까지 합하면 다섯 개의 등대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 칠암이다. 더구나 칠암의 등대는 예사 등대와는 다른 모양으로 시선을 끈다. 붕장어(아나고)가 서로 얽혀 위로 향하는 듯한 형상의 노란 붕장어 등대, 떠 오르는 붉은 태양과 갈매기를 형상화한 빨간 갈매기 등대, 야구 배트와 글러브 모양으로 2010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우승을 기념하는 하얀 야구등대. 칠암에는 등대 여행을 와도 좋을 그런 곳이다.

     


    조용하고 한가로운 문동리와 문중리에 비해 칠암은 단연 활기가 돈다. 건어물을 파는 상인들의 파라솔이 어지럽고, 다른 쪽 횟집거리는 시끌벅적하다. 칠암에는 붕장어 회를 먹으러 온 손님들과 등대 구경을 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칠암은 사람 사는 냄새가 왁자지껄하다. 



    문동에서 칠암까지의 길은 포구를 따라 걷는 길이다. 그리고 멀리 일자로 뻗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다. 잔잔한 바다의 모습은 단조로워 보인다. 그러나 그 단조로움 속에서도 변화가 있다. 눈여겨보면 바닷물 빛이 미세하게 달라진다. 바다의 깊고 얕음에 따라 바다의 색은 짙고 옅어진다. 또한 바다는 하늘의 색깔을 반영한다. 하늘이 찌푸리면 바다도 찌푸리고 하늘이 맑으면 바다도 맑아진다. 



    길가로 나 있는 방파제 위로 올라서면 거대한 바다는 끊임없이 일렁인다. 바다는 쉬지 않는다. 가볍게 찰랑거리는 물결은 얕은 물속 모래 바닥이나 자갈 위에 물결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 물이 맑을수록 그림자의 무늬는 맑아진다. 바다는 언제나 그렇듯이 일렁이며 생동하고 있다. 



    칠암을 지나 신평리이다. 계속 포구를 따라 걸어온 길은 신평리에서 다른 모습을 갖는다. 손대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해안이다. 아이들은 얕은 자갈밭에서 물놀이도 하고 바위틈에서 게도 잡으면서 놀고, 어른들은 낚싯대를 드리운다. 신평소 공원이 아름다운 해안을 내려다보고 있다. 해안도로 저쪽에는 바다와 신평소 공원을 내려다보는 곳에 카페가 두서넛 들어서 있다. 


    울산 출신의 소설가 오영수의 소설 '갯마을'은 기장 일광면 학리를 배경으로 쓰인 소설이다. 거친 바다는 어부들을 삼키고, 갯마을에는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 모여 산다. 그네들은 남편을 앗아간 바다를 떠나지 않고 바다를 삶의 터전 삼아 살아간다. 갯마을 과부들의 애환이 담긴 '갯마을'은 영화로도 연출되었다. 영화 '갯마을'의 주요 촬영 무대는 일광면 이천리이다. 하지만 '해순'이와 '상수'의 밀회 장면은 이 신평소의 아름다운 해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걷기 시작한 지 거의 2시간이 흘렀다. 이제 길은 신평리를 뒤로 하고 동백리로 들어선다. 육지로 오목하게 들어앉은 포구는 아담한 동백항이다. 바다에서 동백항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어김없이 등대가 서 있다. 항구로 들어오는 입구의 등대는 언제나 왼쪽에는 빨간색, 오른쪽에는 하얀색 등대가 뱃길을 안내한다. 밤이 되면 빨간 등대는 빨강 빛을 비추며 오른쪽은 위험하니 왼쪽으로 입항하라고 신호를 준다. 하얀 등대는 녹색 빛을 비추는데, 왼쪽에 암초가 있으니 안전한 오른쪽으로 입항하라는 뜻이다.  



    동백리에 있는 부경대 수산과학 연구소. 예전에 일여 년간 기장에서 살 때 여러 번 이 연구소 앞을 지나다녔다. 아니 그때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전에는 알지 못했다. 부경대 수산과학 연구소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은 이 길을 걸으면서 처음 알았다. 수산과학 연구소 둘레를 도는 이차선 도로가 있다는 사실과 그 도로 아래 바닷가에는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는 또 다른 작은 시멘트 길이 있다는 사실도, 수산과학 연구소를 지나 온정마을이라는 곳에 바다를 바라보는 카페와 펜션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차를 버리고 걸어가는 길에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나타난다. 내 발바닥이 닿은 땅은 이제 나의 인식의 테두리 안으로 걸어 들어와서는 나의 세계의 일부가 된다. 내가 밟은 땅을 구석구석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는 이 느낌은 마음 한 구석을 뿌듯하게 한다. 천천히 걷는 길은 햇볕을 보지 않은 뽀얀 속살이 드러난 길이다.  



    온정마을을 지나 이제 갈맷길은 1코스 1구간 중 가장 아름다운 길을 간다. 자갈밭을 가로지르는 길. 차를 타고 이 해안이 내려다 보이는 해안도로를 지날 때마다 송림 사이로 보이는 이 해변은 마치 주문을 걸어 마법을 걸려는 마법사와 같았다. 더욱이 무더운 여름철 그 길을 지날 때는 당장이라도 수경을 끼고 물속으로 들어가 바닷속 비경을 보고픈 충동을 느끼곤 했지만 그때마다 난 간신히 그 마법에서 빠져나가곤 했었다. 


    이 해변을 이제야 두 발로 걷는다. 한가로운 일요일을 즐기는 사람들이 이 해변을 차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 때문일까? 물이 생각만큼 맑지 않다.  




    자갈밭 위를 걷는 발걸음이 피곤해진다. 푹신한 모래사장처럼 발을 붙잡는 곳이 있는가 하면 자갈 위에서 삐끗해지지 않으려는 발목에 힘을 주는 통에 피로해진다. 자갈길을 버리고 해안도로로 올라가 데크길을 걸으며 송림 사이로 바다와 해변을 보며 걷는다. 여전히 매력적인 해변이다.

       


    이동항이다. 이천리 동쪽에 있어서 이동이라고 하는 이동마을은 기장 미역 특구이다. 부두 바닥에는 미역 말리는 손길이 분주하다. 문동리와 문중리의 텅 빈 부두보다 사람 사는 냄새도 바다 냄새도 더 하다. 손님들로 북적이는 칠암과도 다른 느낌의 이동항이다.



    갈맷길 1코스 중에서 가장 특이한 길은 이동항을 지난 후에 나타난다. 한국유리공업 부산공장을 둘러가는 길이다. 이 길 특이하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길인 듯 키높이의 수북한 잡초에 가려 보이지 않는 길, 다만 한국유리공업 부산공장의 담벼락에 달린 파랑 분홍 갈맷길 리본만이 이 곳이 갈맷길임을 알리는 표지이다. 이 리본이 없으면 길인지 아닌지 당황스러운 길이다. 도로에서 이 곳 해변을 오려면 한참이나 걸어와야 하기에 여기는 참 여유로운 해변이다. 북적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한가히 한 때를 보낼 수 있는 해변이 이곳이다.  



    소설 "갯마을"은 원래 일광면 학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 "갯마을"은 그 무대가 학리와 인접한 "이천리'이다. 이천리 해변에서 보이는 일광 앞바다 너머 학리의 풍경은 영화를 만든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다. 다만 영화에서 보던 예스러운 돌담 초가 어촌 마을은 찾을 길 없고, 지금은 현대식 양옥집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곳에서는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그 모습이다.


    <영화 '갯마을'> https://youtu.be/BwbQgeavk-Y


    2시 30분에 가까워진다. 점심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 아침에 임랑으로 가는 버스에서 본 열무 국숫집을 찾아간다. 길게 늘어선 줄의 의미를 놓칠 수는 없다. 마을 골목을 빠져나와 도로에 인접한 그 가게를 찾았다. 어라? 아직도 줄을 서 있다. 순간 기대감은 더 커진다. 나도 그 뒤에 줄을 선다. 주인아저씨가 나에게 말을 건다. "4시에 다시 영업 시작합니다."  이런 이런 이런... 안내문을 보니 2시 30분부터 4시까지 재료를 다시 준비하고 4시에 다시 시작한다고. 시계를 보니 2시 32분이다. 


    일광천을 따라 강송정 공원 옆을 지나 일광 해수욕장으로 들어서서도 두리번거리며 점심을 먹을 곳을 찾아보지만 마땅한 곳이 없다.  일광해수욕장을 나와 기장 군청으로 향한 도로가로 나서니 열무 국수 식당이 눈에 띈다. 저기서라도 열 국수를 먹어야겠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 좋다. 시원하게 열무 국수 한 그릇을 비우니 기분이 좋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시원하게 뻗은 기장 대로를 따라 땡볕 속을 걷는다. 삼사십 분을 걸었을까? 오후 4시에 목표점 기장 군청에 도착한다. 11시 20분에 임랑을 출발했으니 4시간 40분이 걸렸다. 갈맷길 1코스 1구간. 다리는 뻐근하고 몸은 다소 피로하다. 하지만 기분 좋은 피로감이 몸을 감싼다.



    갈맷길 1코스 1구간은 바다와 어항과 등대가 함께 하는 길로 정의해 본다. 아름다운 길도 있었고, 평범한 길도 있었고, 당황스러운 길도 있었다. 해안도로, 포구길, 시멘트길, 자갈길, 나무 데크길, 오솔길을 걸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머릿속을 오가던 수많은 생각들은 사라지고, 다만 몸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절로 앞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간다. 길이 험하고 가는 길이 길면 길수록 무념무상의 경지가 가까울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길 위에 떨어진 수많은 생각들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다.


    다음 달 말에는 기장군청에서 죽성, 대변, 시랑대, 해동용궁사, 송정, 달맞이길을 걸을 것이다.


     

    다시 오륜대! 다섯 노인이 지팡이를 꽂아 놓고 놀았다는 오륜대! 오륜을 알던 사람들이 살았다는 오륜대! 

    선동 상현마을은 갈맷길 8코스와 9코스의 시발점이다. 상현마을에서 선동교를 지나 철마천을 따라 걸어가면 철마를 지나 기장으로 이어지는 갈맷길 9코스, 회동수원지를 왼편으로 두고 가는 길이 갈맷길 8코스이다. 오늘은 상현마을에서 오륜대마을과 부엉산을 거쳐 오륜본동까지 걷는다. 초등5학년 딸아이랑...

     

     

     

     

    선동교 위에서 저 쪽 숲을 보니, 숲 속 기와 지붕이 발걸음을 잡는다. 강릉김씨 상현당이다. 강릉김씨의 시조는 신라 혜공왕때 시중을 지냈던 김주원이라 한다. 조선초기 생육신이었던 김시습도 강릉김씨였는데, 생육신 사건 이후 김시습의 종제인 김검은 동래 수내동으로 와서 숨어 지내게 되고 김검의 아들인 김선은 동래 북쪽 선동 상현리에 자리를 잡는다. 단종이 죽은 후 김선은 선동 시냇가에 정자를 지어 북으로 문을 내어 절하며 스스로 호를 북계()라 하고 은둔하여 후학을 가르친다. 그 이후로 그의 후손은 이 곳을 터전으로 하여 대대로 살아왔다고 한다. 상현당은 강릉김씨 제사를 지내는 재실이다.

     

    상현마을 앞에서 시원하게 펼쳐진 수원지를 바라보니 가슴이 탁 트인다. 

     

    상현마을을 떠나 수원지 둘레길을 걷다가 호수 건너편을 보니 방금 출발했던 선동교가 보인다.  

     

    저기 정면에 보이는 산이 부엉산이고, 그 절벽이 오륜대이다. 숲 속길을 걷다 멈추어 귀를 기울이니,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들린다. 마치 수달이 물장난치는 소리같다. 바람에 일렁거리며 기슭에 첨벙거리는 소리가 유리잔이 쟁거렁거리는 소러처럼 싱그럽게 귀전에 부딪혀 온다. 소리죽여 들어보니, 물소리만 아니라 귀뚜라미 소리, 찌르레기 소리등 풀벌레 소리도 들리고, 이따금 산새들 소리도 들리고, 나무 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가을 바람도 시원하지만 숲의 소리도 바람 못지 않게 서늘하다. 사진으로 풍경은 담을 수 있지만 소리까지는 담을 수는 없다. 그냥 흘려버리기에는 아까워 숲의 소리를 담아 보려고 조용히 동영상을 하나 찍어 본다. 쉿~!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에, 주인공 유지태와 김영애가 소리사냥을 다녔던 것 같은데... 누구에게나 잡아 두고 싶은 소리가 있는가 보다.  

     

    상현마을을 출발한지 20~30분쯤 되었을까? 오륜새내마을에 도착했다. 지도에는 오륜대마을로 표시되어 있다. 이 마을에는 오륜대를 즐기며 식사를 할 수 있는 맛집이 있다. 옛사람들도 오륜대 가까이에서 풍류를 즐기지 않았을까?

     

    가까이서 본 오륜대! 언덕이나 절벽을 가리켜 '대'라고 한다. 바다를 접한 부산에는 해안선을 따라 작은 바위언덕이나 절벽이 발달한 곳이 많다. 해운대, 이기대, 신선대, 태종대, 몰운대등이 그러한 곳이다. 오륜대는 바다가 아닌 호수를 끼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대가 많기도 하다. 대부분 바다를 끼고 있지만 오륜대는 호수를 끼고 있다.

     

     

     

    오륜대전망대는 해발 175미터의 부엉산 정상에 있다. 평평한 길을 걷다가 산길을 올라가자니 숨이 차다. 딸 아이는 헉헉거리며 언제 도착하냐며 계속 묻는다. 힘이 드는 모양이다. 산길에 떨어진 도토리를 누가 많이 줍나 시합을 한다. 딸아이는 도토리를 찾아 줍느라 힘든 것을 잊어버린다. 이렇게 부엉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면서 딸아이는 계속 재잘거린다. 숨이 차 힘들어 하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는다. 하하하...

     

    드디어 부엉산 정상에 도착한다. 왔던 곳을 뒤돌아 본다. 호수 저쪽으로 우리가 출발했던 상현마을이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부엉산 초입에 자리잡은 상수도 취수장과 오륜새내마을도 보인다. 오륜새내마을에서 차가 들어오는 길을 따라 나가면 걷기에 아름다운 길을 따라 오륜본동으로 돌아가는 길이 이어진다. 차가 다니는 이 길은 '아름다운 길'이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숲길보다 아름다우랴. 취수장으로 들어서서 부엉산으로 오르면 전망대에 도착하게 된다.  

     

    오륜대아래의 물길이 보인다.

     

     

     

    부엉산 바로 아래에 우리가 갈 오륜본동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인다. 한반도 모양을 한 회동 수원지의 모습도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 전망대 포토존에서 사진을 몇장 찍고 벤치에 앉아 좀 쉬어간다. 딸 아이는 오히려 쉬었더니 다리가 풀렸다고 하면서 휘청거린다. 그리고 아빠 곁에 붙어서 산을 내려간다. 힘을 내라! 거의 다 왔단다. 하하하    

     

    부엉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이 두개다. 하나는 수원지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그 쪽 길이 험해 보여 걷기에 쉬워보이는 길을 택해 간다. 수원지쪽으로 내려가는 길 따라 가면 오륜본동의 황토길이 있는 곳으로 연결되는 것 같다. 부엉산을 내려오는 길에 노랑나비 한마리가 길을 안내하듯이 팔랑팔랑 앞서간다. 한참을 앞서가더니 숲속으로 날아가 버린다. 노랑나비 이야기하느라 또 딸 아이는 힘든 것을 잊어버린다. 딸 아이는 또 재잘재잘 댄다. 아빠! 아빠! 고시랑 고시랑... 딸아이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다.  

     

    오륜본동에 도착해서는 김민정 갤러리에서 시원한 빙수를 먹으면서 피로한 발을 쉬어준다. 갤러리 창가에 놓인 작은 그림 속의 아이가 꼭 숲속길을 걷고 있는 딸아이 같다. 상현마을을 떠난 지 1시간 10분정도 걸렸나 보다. 아주 기분 좋은 길을 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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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의 명소 하면 해운대!  해운대하면 해수욕장! 이것은 일종의 화석처럼 변하지 않는 공식처럼 되어 있다.

    여름에는 땀을 식혀주는 바닷 바람이며, 뜨거운 몸을 식혀주는 차가운 바닷물 때문이라도 해수욕장이 최고로 치이겠지만, 봄이라면 누가 뭐라 해도 달맞이 길이 가장 멋진 명소일 것이다. 한 쪽으로는 해송숲과 바다, 맞은 편엔 멋진 카페들이 즐비하니 어우러진 아름다운 언덕 길이 달맞이 길이다. 해운대 미포를 떠난 길은 해월정, 청사포를 지나 송정 바닷가에 이른다. 

     

    4월의 달맞이 길은 아름답다. 벚꽃 잔치가 벌어지는 때는 물론이거니와 벚꽃이 가지를 떠나는 때라면 더 좋다. 그 때가 되면 소나무 무성한 숲 사이로 언듯 언듯 보이는 푸른 바다는 여느 때와 다름이 없으려니와, 도로 위 하늘을 가릴 정도로 무성한 벚꽃의 하얀 향연은 운치를 한결 더해 준다. 더구나 꽃잎이 가지에 작별을 고하며 영원한 고향을 향해 떠나는 꽃잎들의 영결식은 더욱 찬란하다. 꽃잎은 일직선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공기의 흐름과 저항에 따라 몇번이나 뒤집어지고 엎어지고, 짧은 공간을 횡단하며 떨어지는 꽃잎이 자세를 바꿀 때마다 눈물 어린 미소가 반짝거린다. 그리고 그 슬픔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마냥 행복하게 꽃잎을 머리에 이고 걷는 사람들...     

     

    달맞이 길 정점에 자리한 해월정, 해월정에 달이 뜨면 해운대 앞바다는 보름달이 뿜어내는 마력에 홀린다. 하얀 달은 부드러운 빛을 질펀한 까만 바다에 뿌려대고, 부드러운 은빛가루는 바다 한 복판에 은빛 찰랑이는 길을 놓는다.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의 은빛 달길을 가지고 있다. 모든 길은 달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 앞 정면에서 시작되어 저 멀리 까만 하늘과 닿아 있는 수평선까지 일직선으로 뻗어 나간다. 넓게 시작된 길은 점점 폭을 좁혀가다가 달과 가장 가까운 수평선에서 끊어진다. 은빛 달길위에는 수만 수억의 은빛 비늘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달빛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힘이 있다. 문득 벚꽃이 흐드러진 달 밤에 달맞이 길을 찾으면 어떨까? 갑자기 내년 봄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생긴다. 

     

    달맞이 언덕에는 아름다운 세개의 길이 있다. 첫째는 달맞이 길이요, 둘째는 동해선폐선 철길이요, 세째는 문탠로드이다. 달맞이 길은 차도와 보도가 어우러진 길이요, 철길은 기차가 달리지 않는 해안 폐선이요, 문탠로드는 달맞이길과 해안철길 사이 소나무 숲 속을 관통하는 오솔길이다. 문탠 로드는 달빛이 숲을 비출 때 가장 강한 마력을 뿜어대는 길이다. 달빛이 소나무사이로 달빛을 흘릴 때 이 길은 가장 신비한 생명력을 얻는가 보다. 숲 사이로 보이는 달빛 가득한 바다와 숲 사이로 비치는 달빛에 홀리고 싶은 마음을 한 쪽에 가두어 둔다. 추석 지나 다음 보름달이 뜰 무렵, 이 길을 걸어보자고 마음속으로 약속해 본다.

     

    갈매기와 길을 형상화한 이정표, 길이라고 읽는다. 갈맷길이라고 읽는 사람은 센스쟁이!

     

     

    문탠로드 입구 표지판이다. 달빛 기운 가득한 길!

     

     

     

    햇살이 스며드는 오솔길. 소나무는 아니 해송은 볼 때마다 더 멋져 보인다.

     

     

    세찬 바다 바람이 숲을 휩쓸 때면 소나무 숲은 머리를 흔든다. 쏴쏴 하는 소리가 파도소리인지 바람소리인지...

     

     

    문탠로드 전망대

     

    저 앞 쪽에 보이는 해안은 이기대 해안, 이기대 왼쪽 끝에 점점이 멀어지는 섬들이 오륙도, 오륙도 너머 영도가 보인다. 영도에는 부산의 또 다른 명물 태종대가 있다. 

     

    가까이 당겨본 오륙도. 왼쪽 끝에 뽀족한 등대가 희미하게 보인다. 등대섬이다. 그 오른쪽에 가장 큰 형의 모습을 한 굴섬과 송곳섬, 조금 떨어져 있는 수리섬, 그리고 조금 외롭게 떨어져 있는 우삭도. 우삭도는 왼쪽의 큰 솔섬과 오른쪽에 매미처럼 붙어 있는 방패섬 두개로 이루어져 있다. 밀물이 들면 우삭도는 솔섬과 방패섬 두개로 나누어지고, 썰물이 나가면 두 섬은 하나의 우삭도가 된다. 등대섬과 굴섬, 수리섬은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서로 떨어져 있는 섬이다.

     

    문탠로드는 또 다시 다섯개의 길로 나누나 보다. 이 길은 한 바뀌 순환하는 길이다.

     

    삼포해안길은 해운대 미포, 청사포, 송정의 덕포로 이어진 길. 문탠로드는 삼포길의 일부, 삼포길은 갈맷길의 일부이다.

     

    문탠로드 오솔길에서 청사포의 쌍둥이 등대를 바라본다. 바로 아래에 동해폐선길이 살짝 보인다.

     

    문탠순환길에서 벗어나 동해폐선철길로 들어선다. 숲 사이로 나란히 달리는 철길은 영원히 만나지 못할 평행선이지만 결코 멀어지지 않는 선이기도 하다.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이렇게 영원히 함께 가는 것도 좋을 듯하다.

     

    철길 나무 침목 위로 하얀 꽃을 피운 쑥부쟁이. 구절초와 비숫하다. 쑥부쟁이는 꽃잎이 더 가늘고, 구절초는 꽃잎 끝이 더 둥글다. 봄에 꽃을 피우는 데이지와 가을에 꽃을 피우는 구절초도 많이 닮아 있는 품이 서로 닮은 꼴로 달리는 선로와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철길 옆에 장승들이 무더기로 서 있다.

     

    햇살이 하얗게 내려 앉은 해운대 앞 바다. 해풍에 무심히 흔들리는 풀. 바람이 일면 풀은 눕는다든가.

     

    풀과 나무, 숲과 바다와 함께 걷다가 인간이 만든 도시를 만나는 이 길은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누군가가 이야기하더라. 광안대교의 모습도 희미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동해선 아래 해안에는 분단의 아픔이 가시지 않은 철조망길이 보인다.

     

    동백섬 너머로 해운대 마린 시티가 자연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 온다. 그리고 해운대 백사장... 

     

    가는 길 다르고 오는 길 다르다. 해운대에서 송정으로 걸으면서 보는 풍경과 그 반대로 걸으면서 보는 풍경이 다르다. 산을 오르면서 보는 산과 내려오면서 보는 산의 모습이 다른다. 고은 시인은 '내려 갈 때 보았네, 올라 갈 때 못 본 그 꽃'이라고 노래했지만, 난 '가는 길과 오는 길은 다른 길'이라고 말하고 싶다.  

    도심에서 한 발만 걸으면 풍광이 끝내 주는 계곡이 있다. 서울에. 도심에서 10분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숨은 명소.

    겸재 정선이 그린 산수화 '수성동'에 나오는 수성동 계곡.

    (유홍준교수와 함께하는 서울 답사에서   ☞ http://m.newsfund.media.daum.net/episode/791)

     

     

    부산에서도 한 발만 걸으면 자연이 숨쉬고 있는 곳이 지천이다.부산은 천혜의 바다를 끼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이름에서 보이듯 산이 함께하는 도시다.

    부산,울산,마산처럼

     

    조선태종실록에 보면 부산이라는 지명이 처음 나오는데 그 때는 富山 이라고 표기되어있다.

    성종(1470)때에 이르러 釜山 이라는 표기가 처음 등장하고

    동국여지승람(1481)이 완성된 15세기말엽부터 이 명칭이 일반화 되었다.

     

    釜山 은 원래 산 이름이었다. 산모양이 가마솥을 닮았다고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이 부산은 오늘날 동구 좌천동 뒤에 있는 증산이 그 산이다.

    대한민국 제일 관문 부산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생겼났다. 

    사실 부산에는 도심안에 산이 많아

    그 이름이 딱 잘 어울린다. 

     

    부산의 산을 따라 만들어진 갈맷길중 8코스는

    오륜대를 지난다.

     

    부산시내에는 수원지가 두개가 있다.

    하나는 성지곡 수원지,

    또 하나는 회동수원지(오륜대수원지).

    양산 법기 수원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다시 한번

    가두어져 부산의 상수원지 회동수원지가 되었다. 

     

    가톨릭 대학 앞을 지나 5분을 달리니

    도심내에 이런 정다운 시골이 있을 줄이야...

    오륜동이다.

     

    부자유친()ㆍ군신유의()ㆍ부부유별()ㆍ장유유서()ㆍ붕우유신()

    아버지와 자식,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이, 친구와 친구 사이의 인간관계를 규정한 유교의 기본 도덕 규범.

     

    옛날에 이 마을에는 오륜과 학식을 갖춘 선비들이

    살았다고 하여 오륜동이라 불린다고.

     

    오륜동 가까운 곳에 선동이 있다.

    신선 선仙을 써서 선동인데,

    오륜대와 인접하여 신선이 노닌 곳이라 선동이라 불렸다는 설도 있고, 

    선돌[]의 한글 소리[]만을 취해 선동이 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단다.

    오륜동에 사람이 살게 된 것은 아마도 산과 물이 함께하는 아름다움 경치도 한 몫 거들지 않았을까.

    오륜동의 한 밥집에서 시골 풍경을 내다 본다. 

     

     

     

    식사후 오륜대 황토길을 걷는다.

     

     

     

    황토길에 면해 있는 수원지

     

     

    얼마나 오래된 소나무일까?

    휘어진 모습이 험란한 세월처럼 기괴하다.

    선송이라 이름 지어 본다.

     

     

     

    늪지에는 부들, 붓꽃등이 자란다.

     

     

     

     

     

     

    여유로운 황토길을 걷고 나서 갤러리 카페에 들린다.

     

     

     

     

     

    주인장의 작품인가?

     

     

     

    갤러리 카페 옆에 있는

    식샤를 한 밥집의 기와 지붕이 환히 보인다.

     

     

     

    오륜대와의 짧은 만남의 기억을 마음속에 담고서

    오륜동과 작별을...

     

     

    그러고 보면 숨은 명소가 하나 둘이 아니다.

    길은 갈래 갈래 여러 길이 이어져 있고,

    그 모든 길을 걸을 수는 없어도

    또 다른 길을 걷고 싶다는...

    오륜대, 또 한 번의 기회가 있으면...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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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대엔 흐린 날도 좋다

    오래전 기억이 난다

    밤새 차가워진 대지와

    솔사이로 부딪히는 서늘한 기운

    나무줄기 사이의 이기대의 바다가 떠오른다 

     

     

    오륙도가 내려다 보이는 

    이기대 스카이워크 동산에서

    벼랑아래를 내려다 본다

     

    두 명의 기생이 왜장을 안고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이기대...

    그래서 이기대라 한다는데,

    어디쯤일까?

     

    멀리 해운대를 바라보며

    신선대를 뒤에 두고

    나 여기 이기대에 서 있다

     

    오륙도!

     

    스카이워크

    그리 아슬아슬해 보이지 않은데

    스카이워크 유리판위에 서면

    움찔, 발걸음을 내딛기가 무섭다

    돌틈 사이로 퍼런 바닷물이

    저 아래서 출렁인다

     

    쏴 쏴아 철썩

     

    손에 닿을듯한 오륙도의 첫번째 섬

    방패섬이라든가?

     

    짙은 바다물이

    일렁인다

    어른거리는 물결

     

    섬그림자가

    흔들린다

     

    풍덩! 

    빠져든다

     

    해풍에도 

    생명은 여지없이

    이어진다

     

    들꽃이 피어있다

    소리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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