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즈 지음/ 최세희 옮김 /다산 책방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우문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우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깊은 사유로 이어지는 질문이었다. 그 사유는 역사를 보는 눈을 단번에 바꾸어 버렸다. E.H. 카아는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희했지만, 여전히 역사를 둘러싼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과거를 완전히 재구성할 수 있는 역사는 없다는 것이다. 줄리언 반즈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통해 역사의 한계를 통렬히 지적하고 있다.

 

고등학교 역사시간, 역사교사 조헌트 영감은 질문한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 토니가 대답했다. 

조 헌트 영감은 이렇게 반문한다. 역사는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 기만이기도 하다는 것 기억하고 있나?"

"역사는 생 양파 샌드위치입니다. 죽자고 반복하니까." 또 다른 학생이 대답한다

에이드리언은 라그랑주의 말을 인용하여 말한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줄리언 반즈는 이렇게 역사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그의 소설은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인 셈이다.  

 

토니는 대학에 진학하여 베로니카라는 여학생을 사귄다. 하지만 그 둘은 헤어지게 되고. 베로니카는 토니의 절친인 에이드리언과 사귀게 된다. 에이드리언은 토니에게 편지를 보내 묻는다. 베로니카와 사귀어도 되냐고. 토니는 이에 대한 그 둘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회신을 보낸다. 그러나 얼마 후 토니는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에이드리언이 자살한 사건을 토니의 인생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으로 생각해 본다면, 이 역사적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그는 왜 자살을 했을까? 그는 이런 유서를 남긴다. "삶은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가 있다. 만일 내가 바란적이 없는 그 선물을 포기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결정대로 행동을 취할 윤리적, 인간적 의무가 있다."  에이드리언은 왜 삶이라는 선물을 포기하기로 결정했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그들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의 한계로 인해 그의 자살의 이유는 미궁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뭔가 드러나지 않는 진실이 있을텐데. "그 자실이란게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나 혹은 우리에 대한 함축적 비판이 담긴 건지 모르겠다는 거야."라는 말에서 풍기는 미묘한 뉘앙스는 분명히 뭔가가 있다는 예감이 들게 한다. 그게 무엇일까?

에이드리언이 역사시간에 했던 말이 생각난다. "하나의 사유 방식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모든 역사적 사건 - 예를 들어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까지도 - 에 대해 우리가 진실하게 할 수 있는 말은 '뭔가 일어났다'는 것 뿐입니다." 그렇다. 진실하게 할 수 있는 말은 에이드리언이 자살을 했다는 것 뿐이다. 그 자살의 진실은 어둠에 파묻혀 있다. 그이 자살은 "바로 우리 코 앞에 벌어지고 있는 역사, 가장 분명해야 함에도 그와 동시에 가장 가변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토니는 인생의 말년에 뜻하지 않게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 보게 되면서 그의 젊은 날의 역사를 재구성하게 된다. 베로니카의 엄마가 사망하면서 토니 앞으로 유산을 남긴 것이다. 그 유산 목록에는 놀랍게도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동안 미스테리로 남아있던 에이드리언의 죽음의 비밀이 밝혀질 것인가? 역사의 진실이 수면에 떠 오를 것이란 기대는 토니만의 기대가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베로니카는 한사코 그 일기장을 내어주지 않으려한다. 베로니카는 단지 그 때 토니가 에이드리언에게 보냈던 편지의 사본과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의 한 페이지를 복사한 사본을 보내온다. 그리고 토니는 실제 일어난 일과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일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 같지는 않은 법이다,"

 

소설의 결말은 충격적이다. 나는 이것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어리둥절해 하며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 번, 세 번을 읽고 나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한 동안 정신이 얼떨떨해졌다. 그리고 일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다시 첫 페이지부터 정신없이 읽기 시작했다. 토니의 충격은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토니는 중얼거린다.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 좋게 단언한 것과는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 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아니고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가깝다는 것을." 그러난 줄리언 반즈가 역사에 대해 정작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학창시절 역사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조 허트 영감은 학생들에게 1차세계대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아나키즘적인 몇몇은 '모든게 우연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 세계는 끊임없는 카오스 상태로 존재하며 오로지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모종의 원초적 본능 즉 의심의 여지없이 종교로 부터 기인한 숙취에 다름 없는 그것이, 일어날 법 했거나 그러히 않은 사건에 의미를 부여한 데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한 대수롭지 않는 덜 떨어진 한 동급생은 "혼란이 있습니다. 거대한 혼란이 있습니다."라고 중얼거린다. 에이드리언은 이렇게 대답한다. "사실 책임을 전가한다는 것은 완전한 회피가 아닐까요. 우린 한 개인을 탓하고 싶어하죠. 그래야 모두가 사면을 받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개인을 사면하기 위해 역사의 전개를 탓하거나, 그도 아니면 죄다 무정부적인 카오스 상태 탓이라 해도 결과는 똑 같습니다. 제 생각엔 지금이나 그 때나 개인의 책임이라는 연쇄 사슬이 이어져 잇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책임의 고리 하나 하나는 모두 불가피한 것이었겠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모두를 비난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사슬이 긴 것은 아니죠. 하지만 책임 소재를 묻고자 하는 저의 바람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공정한 분석이라기 보다는 제 사고 방식의 반영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중점적인 문제 아닌가요. 주관적 의문 대 객관적 해석의 대치, 우리 앞에 제시된 역사의 한 단면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가가 해석한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줄리언 반즈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 모든 대답을 온통 뭉뚱거린 혼란스러운 대답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한 줄, "거기에 축척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역사는 연쇄 사슬이다. 이 연쇄 사슬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각 사람의 행동은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의 흐름 속에 축적이 되고, 연쇄 사슬로 이어진 개인들의 축적된 책임이 한계치에 도달할 때 역사적 사건은 필연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책임을 묻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 너머에 우리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혼란이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혼란이.

 

 

 

 

그 외 밑줄 그은 말------------------------------------------

 

*사건이 변모해 가면서 확신으로 굳어진 덕분에 꽤 사실에 근접했다고 할 수 있게 된 몇 몇 기억들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

* 탄생, 성교, 그리고 죽음. 이것이 엘리엇이 말한 인생의 총체이지.

* 에이드리언은 원칙이 행동을 이끌어야한다는 관념에 근거해 우리에게 사유를 인생에 적용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도록 촉구했다.

* 상상력의 첫번째 의무는 위반하는 것이다.

* 진정한 문학은 주인공의 행동과 사유를 통해 심리적이고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진실을 드러내야 했다.

* 그러나 동시에 역사가들은 사건에 대한 본인의 설명에 어느 정도 회의적으로 접근해야 해.

* 가장 멀리 내다보는 관점이 가장 의문스러워 보일 때가 종종 있지. 그리고 정신 상태가 행위로부터 추론 될 수도 있고.

* 우리는 충동적으로 결정한 다음 그 결정을 정당화할 논거의 하부 구조를 세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를 상식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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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놀트 하우저/ 백낙청 박성완 옮김/ 창비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2

 

생존만이 지상 과제였던 시대가 있었다. 또한 지금도 생존만을 당면 과제로 여기는 계층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예술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이들에게도 아름다움을 느끼고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원초적인 본능이 없을리야 없겠지만, 어차피 예술이란 풍요와 더 깊은 관련이 있을 듯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술의 발전은 풍요로 말미암은 바가 크다. 예술가들은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예술 소비자들의 구미에 맞추어 작품을 만들어 왔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권력을 정당화하고 공고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예술을 사용해 왔다. 그 때는 예술이 권력에 봉사하던 시대였다. 시민사회가 등장하고 권력자에 버금가는 부를 쌓은 시민들이 나타남에 따라 이들도 예술의 소비자가 된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시민들의 요구에 예술도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게 된다. 역사의 변화에 예술은 큰 영향을 받지만, 반대로 예술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그렇게 크지 않은 듯 보인다.

 

시간의 흐름을 역행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도 없다는 면에서 예술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고 형식화하는 시대가 있었고, 권력의 시녀였던 때도 있었다. 예술이 소비자의 요구에 맞추어 예술품을 생산하는 때가 있었다면, 오늘날 자의식이 강한 예술가들이 표방하는 '자기를 표현하는 예술'은 고객의 요구와는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자기 성취가 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미를 바라보는 시각이 극적으로 변해 왔음을 보여준다. 객관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에서 주관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예술, 뭔가 근본적인 것을 형상화 하려는 시도, 더 나아가 '자기 표현' 자체를 미라고 생기에 이르렀다. 예술의 본래 목적이 미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자신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을까? 예술의 미래는 어떠할까? 미에 대한 관념은 어떻게 바뀔까? 순환의 고리 속에서 돌고 도는 것일까? 아니면 무한의 시공간을 직전하는 것처럼 계속 새로운 미적 개념이 등장하게 될까?  

 

하우저가 제시하는 르네쌍스의 개념이 학교에서 배웠던 것과 사뭇 다르다. 르네쌍스는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획기적인 역사적 시대라고 배웠던 것 같은데, 신 중심의 중세세계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로의 전환, 고대 인간본위의 세계로의 복귀를 뜻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하우저는 르네쌍스도 시대의 흐름의 일부분일뿐 칼로 무 자르듯이 자를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아마 하우저의 말이 맞을 것이다. 역사란 원래 시대 구분을 허용하지 않는 연속체이다. 시대의 구분이란 역사가들의 인위적인 재단일 뿐이다. 역사란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 질 수 밖에 없다. 역사는 입체적이다. 앞에서 보는 모습 다르고, 뒤에서 보는 모습이 다를 것이며, 위에서 보는 모습이 다르고 옆에서 보는 모습이 다를 것이다. 아래에서 보는 모습은 더 다를 것이다. 보는 시각이 다양한 만큼 역사 해석도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다양한 역사 해석 심지어는 서로 상반되는 역사 해석은 역사를 올바로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일까? 긍정적으로 보자면 다양한 해석의 종합은 객관적 실체에 다가가는 길이 될 수도 있겠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읽으면서, 왜 책을 읽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고 한다. 책을 많이 읽고 교만하게 되는 일을 경계하는 말이다. 진정한 책읽기는 지식을 쌓는 것에 있지 않고, 그 지식을 통해 세계와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는데 있는 것이리라. 세계와 인간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바탕으로 인생을 살아가며 세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사람이 책을 잘 읽은 사람이리라. 신영복씨의 <담론>에 '한 발로 뛰기'라는 표현이 있다. 책을 읽기만 하는 것은 한 발로 뛰는 것과 같이 부자연스러운 것이란 말이다. '두발로 뛰기'위해서는 책을 읽는 행위와 자기 변화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예술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예술이 역사와 분리될 수 없듯이, 우리의 살아가는 삶도 역사와 분리될 수 없다. 결국 우리의 삶은 예술과도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책의 예술 이야기로 부터 삶을 읽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끊임없는 상호작용, 관계속에 지속되는 삶은 어떤 원리,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예술을 변화시키는 것이 역사라면, 역사는 무엇을 동력으로 흘러가는 것일까? 불가해한 시공간을 부유하는 역사는 인간 본성을 추진력으로 삼는다. 그 본성 중에서도 역사에 유달리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 돈과 명예와 권력을 향한 지독스러운 집착이다. 인간사의 가장 비참한 역사적 사건들이 바로 그 집착 때문에 발생하였다. 비참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 본성의 그 추악함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이게 쉬운 일은 아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 집착에서 벗어나는 과정이어야 한다. 

 

 

제1장 르네쌍스

 

1. 르네쌍스의 개념

자유주의적 르네쌍스관/ 관능주의적 르네쌍스관/ 국민적 민족적 특징들/ 형식원리로서의 통일성/ 중세와 르네쌍스의 연속성/ 르네쌍스의 합리주의

 

2. 꾸아뜨로첸또의 시민적 예술과 궁정적 예술의 감상자층

중세말기의 이탈리아의 계급투쟁/ 길드를 둘러싼 투쟁/ 메디치가의 지배/ 자본주의의 발전/ 지오또와 뜨레첸또/ 르네쌍스의 궁정예술/

꾸아뜨로첸또의 시민적 자연주의와 양식의 혼합/ 자연주의의 변모/ 꾸아뜨로첸또 후기의 미술/ 길드의 예술활동/ 헌납자에서 수집가로/

메디치가의 예술보호/ 르네쌍스의 궁정문화/ 예술감상자와 여러 계층/ 르네쌍스 문화의 엘리뜨층

 

3. 르네쌍스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

르네쌍스의 아틀리에 활동/ 예술 시장/ 길드로부터의 예술가의 해방/ 예술가와 인문주의자/ 새로운 미술이론/ 예술가의 전설/ 르네쌍스의 천재 개념과 독창성에의 의지/

스케치에 대한 평가/ 예술의 자율성/ 예술의 과학화/ 전문화와 다면성/ 인문주의의 사회적 가원/ 인문주의자들의 소외

 

4. 친꾸에첸또의 고전주의

예술중심지로서의 로마/ 고전주의와 자연주의/ 르네쌍스의 형식주의와 규범성/ 깔로까가티아

 

제2장 매너리즘

1. 매너리즘의 개념

매너리즘과 고전주의/ 매너리즘의 발견/ 자연주의와 정신주의/ 매너리즘과 바로끄/ 매너리즘과 고딕

 

2. 정치적 현실주의의 시대

외세지배하의 이딸리아/ 근대 자본주의의 시작/ 종교개혁/ 카톨릭의 개혁운동/ 미껠란젤로 / 현실주의 정치의 이념/ 마끼아벨리/ 뜨렌또 종교회의와 예술/

종교개혁과 예술/ 반종교개혁운동과 예술/ 매너리즘의 예술이론/미술아카데미 이념의 전개/ 아마추어 비평의 문제/ 피렌쩨에서의 매너리즘/ 매너리즘의 공간묘사/

띤또레또/ 그레꼬/ 브뢰겔

 

3. 기사도의 두번째 패배

세르반떼스/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 세익스피어의 정치적 세계관/ 셰익스피어와 기사계급/ 작가와 패트런/ 셰익스피어의 관객층/ 엘리자베스 시대의 민중극장/

셰익스피어적 형식의 전제조건/ 셰익스피어와 인문주의 희곡/ 셰익스피어의 자연주의. 셰익스피어의 매너리즘

 

제3장 바로끄

1. 바로끄이 개념

인상주의를 통한 바로끄의 재평가/ 뵐플린의 근본개념들/ 통일성의 원리/ 예술사의 논리/ 우주적인 세계감정

 

2. 궁정적 카톨릭적 바로끄

근대적 교회예술의 성립/ 바로끄 시대의 로마/ 절대군주제/ 프랑스의 귀족/ 프랑스의 궁정예술/ 고전주의/ 아카데미/ 왕실의 매뉴펙쳐

아카데미즘/ 공인 예술과 비공인 예술/ 시민계급과 고전주의/ 근대적 심리학의 시초/ 쌀롱

 

3. 시님적 개신교적 바로끄

플랑드르와 홀란드/ 홀란드의 시민적 문화/ 시민적 자연주의/ 시믽거 예술감상자층/ 홀란드이 미술품 매매/ 홀란드 화가의 경제상태/ 루벤스와 렘브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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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까치출판사  

 

좀 어렵네...

이 책을 집어들면서 '과연 역사란 무엇일까?'라고 생각과 함께, 어떻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 많은 지면에 풀어놓을까 궁금증이 들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고전으로 선정될 만한 자격이 있다하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카는 인간 이성의 힘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차 있으며, 인간의 역사는 이 이성의 힘에 의해 계속 진보해 나갈 것이라고 낙관주의적 견해를 취하고 있다. 비록 그와 반대편에 서 있는 역사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지성인들은 미래의 암울함에 비관주의 내지는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 책은 구성은 이러하다.

1. 역사가와 그의 사실

2. 사회와 개인

3. 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

4.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5. 진보로서의 역사

6. 지평서의 확대

 

이 책을 읽고 나의 머리에 정리되는 부분은 이렇다.

 

첫째 역사와 과거,

역사란 '과거에 발생했던 사실들의 모음이다' 이러한 생각이 역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모든 과거의 사실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historian)가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선택한 사실들이 역사가 되는 것이다. 역사사는 자신의 역사를 바라보는 눈에 근거하여 역사적 사실을 선택하고 이를 구성하여 역사를 기술한다.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상호작용 즉 역사적 사실과 역사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한다.

 

둘째 역사와 현재,

역사를 기술하는 역사가(historian) 개인은 사회의 산물이다. 역사가는 역사또는 사회에서 분리된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볼 수는 없다. 역사를 기술하는 역사가(historain) 자신은 현재의 상황이나, 현재의 사회, 이념등에 의해 제약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가장 객관적인 역사가가 되기 위해서는 역사가(historain) 자신이 바로 이러한 제한된 입장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전제된다.

 

세째 역사와 미래 

카는 역사를 서술하는 역사가들의 이성의 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역사를 움직이는 힘- 그 힘이 무엇이든간에- 에 긍정적이다. 역사는 순환한다는 토인비등의 주장 또는 역사란 목적지 없이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배와 같다 주장, 나아가서는 역사는 종말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주장과 같은 미래에 대한 부정적이며 비관적인 견해가 아니라, 역사는 계속 진보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진보하고 발전할 것이라는 굳은 낙관주의적 희망을 버리지 않고 견지하고 있다. 

 

흥미있는 또 다른 점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역사도 과학의 영역에 포함시켜야한다는 논의가 눈에 띄인다. 그는 역사학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역사학이 과학이 수준에까지 이르렀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또한 역사에서의 우연의 역할에 대한 당황스러움이 배여나온다. 그는 기본적으로 역사적 사건들의 인과관계는 역사가의 이성에 의해 판단될 수 있는 것이란 인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때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또는 납득하기 어려운 우연의 요소들이 역사에 미치는 역할에 대해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이러한 우연의 요소는 인과관계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기때문이다. 

 

그는 공산화된 소련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듯...그래서 '소련사'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는데... 당연히 마르크스와 레닌에 대한 언급이 많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예언자적 역할에 심정적 동조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사망할 당시까지도 서방세계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자본주의가 영향을 미치지 않던 지역 또는 자본주의가 영향을 미치기 막 시작했던 지역에서 그러한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의 예상과는 판이하다. 그리고 그의 사망 후 구 소련의 몰락등은 사회주의나 혁명에 의한 진보의 개념이 현실과는 맞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생각의 저변을 넓혀준다는 면에서 이 책을 추천할 만하다. 서울대에서는 이 책을 필독서로 지정하였었는데,  균형을 잡기위해서라도 카와는 의견을 달리하는 역사철학서도 함께 필독서로 지정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 진보진영에서는 한국 근대화는 한 인물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 시대의 부름이었으며, 그 시대의 소산물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시대를 바꾸는 것은 민중의 힘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러한 힘을 집결시키고 분출시키는 역할을 하는 지렛대와 같은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다는 면에서, 한 개인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카의 인과론에 근거한 역사관은 우연의 요소나 한 개인의 영웅적 역할에 대해서는 다소 중요성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 근거해 볼 때, 진보진영의 그와 같은 논리는 카의 역사의식과 닿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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