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속/ 엘리아데/ 이은봉 옮기/ 한길사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꼭 읽어야 할 100권 ▶http://blog.daum.net/ccsj77/48

 

여러 번 <성과 속> 앞에서 멈칫거렸다.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100권 중 한 권이지만 흥미가 당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을 펴서 이리저리 뒤 적어 본 적도 있었지만, 마음이 가지 않았다. 제목도 생경하다. <성과 속>이라니. 하지만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책들 중 나를 실망시킨 책은 아직까지는 없었다. 마음 단단히 먹고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손 끝으로 가만히 책장을 넘긴다. 기대감 때문일까? 마음이 잔잔하게 울렁인다. 이 책은 무얼 줄까?

 

책은 깨끗했다. 장담은 할 수 없으나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책인 듯 했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김에 따라 왜 이 책이 이토록 깨끗한지 이유를 알겠다. 처음에 느꼈던 긴장감과 기대감은 점점 실망감과 지루함으로 변해갔다. 얼기설기 엮인 허술한 바구니처럼, 무언가 진귀한 것을 담은 그런 책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은 끝까지 읽었다.

 

자 이제 다시 한번 더 읽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한번 읽은 것으로 만족하고 덮어버릴 것인가? 나는 다시 한번 읽는 것을 선택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아마 내가 감지하지 못한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이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읽는 <성과 속>은 처음과는 사뭇 달랐다. 다시 읽기를 잘했다. 이 책을 다시 읽고 난 후 이 책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달라졌다.

 

엘리아데는 원시문화 단계에 있는 다양한 종족들의 종교적 의례 및 그들의 신화를 연구하면서, 그 다양성보다는 공통점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 한다. 이 연구를 통해 엘리아데는 종교와 관련된 여러 의문들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신이나 영과 같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생각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사후의 세계와 같은 초월적 세계에 대한 생각들은 또한 어디서 연유한 것인가? 그러한 사상들은 어떻게 철학의 세계로 편입되었는가? 종교적 의례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종교적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은 어떠한가?  왜 그들은 그런 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가? 근대에 이르러 나타난 비종교적 인간이 가지는 실존과 존재에 대한 불안은 무엇 때문인가? 그 해결책이 있는가?

 

인간이 살아가는 '속俗'의 공간은 균질하다. '속'의 공간이 균질하다는 것은 방향성이 없다는 말이다. 중심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聖스러운 공간이 이 '속'의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공간은 더 이상 균질하지 않게 된다. '성'의 공간과 '속'의 공간 사이에 단절면이 생기고 결과적으로 공간은 비균질해진다. 이제는 성스러운 공간을 중심으로 방향성이 설정된다. '성'의 공간은 왜 성스러운 것일까? 그 공간은 신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속된 세계를 벗어나 초월적인 세계와의 통로가 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고대의 종교적 인간들은 이렇게 '성'과 '속'의 구분함으로 그들의 불안감을 잠재웠다. 그들은 세계의 중심인 이 '성'의 공간 가까이에 살기를 원했다. 그들은 이 '성'의 공간을 중심으로 생활공간을 확장해 왔다. 종교가 시작된 것이다.

 

고대의 종교적 인간들은 어떻게 초월적 존재(신 또는 영)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을까? 고대 사회의 종교적 인간들은 세계를 메시지로 가득 찬 존재로 보았다. 그들에게 우주, 자연은 그 자체로 신의 계시였다. 그들은 "신성성은 세계의 구조안에서 계시된다."는 생각을 가졌다. 즉 신들은 마치 자기의 존재를 세계 전체가 반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창조한 신이 존재한다는 명백한 계시였던 것이다.

 

창공은 단지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것만으로 벌써 종교적인 체험을 불러 일으킨다. 하늘은 그 자신을 무한한 것, 초월적인 것으로 보여준다. 그 초월성은 인간이 그 무한한 높이를 단순히 인식함으로써 계시된다. 지고자의 개념이 저절로 신성의 속성이 된다.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높은 지역, 별이 빛나는 영역은 초월자, 절대적인 실재, 영원성의 중대성을 획득한다. 122쪽

 

고대의 종교적 인간들은 우주의 다앙한 존재 양식 즉 우주적 리듬을 생의 신비를 밝혀주는 암호라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어 달의 변화 양상은 생의 신비를 계시해 주는 것이었다.  종교적 인간들은 달이 기울어지고 이지러진 후에 다시 차 오르는 것과 같이 생도 그렇다고 생각하였다. 즉 죽음이 생의 마지막 종료가 아니다. 죽음은 단지 인간 생존의 또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생의 비밀은 달의 존재 양식, 달의 차고 기우는 리듬에 계시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원시 사회의 인간들은 죽음을 극복하려고 애써 왔다. 그들은 죽음을 통과 의례로 변형시킴으로 그렇게 했다. 원시인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본질적인 것이 아닌 어떤 것을 버리는 존재, 즉 세속적인 생명을 버리는 존재에 지나는 않는다. 그래서 죽음은 최고의 가입식, 즉 새로운 영적 존재의 시작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죽는 것은 죽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의 변화라고 생각함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근대 과학의 영향으로 세계가 탈신성화의 길을 걸으면서, 종교적 인간과는 대비되는 비종교적 인간이 나타난다. 비종교적 인간은 초월성을 거절한다. 그들은 '실재'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실재'의 상대성만을 인정할 뿐이다. 심지어 그들은 존재의 의미를 의심하는 데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또한 근대의 비종교적 인간은 새로운 실존적 상황을 상정한다. 즉 역사의 주체 및 동인은 오로지 자기 자신일 뿐,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초월적인 것을 거부한다. 성스러운 것, 즉 초월적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그가 자유를 획득하는 데 최대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비종교적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그는 최후의 신이 살해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183면

 

비종교적 인간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스스로 신의 속박아래 자신을 묶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비종교적 인간은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대적 자유의 추구는 결국 긴장과 불안으로 이어진다. 끊임없이 스스로 삶의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 긴장감과 그 방향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불안이 절대적 자유에는 필연적으로 내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계가 없는 자유는 독이 든 성배와도 같다.

 

현대 사회의 모든 실존적 위기는 세계의 실재성과 세계 내에서의 인간의 현존을 다시 한 번 문제 삼는 것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실존적 위기도 결국 '종교적'이다. 왜냐하면 종교란 결국 하나의 존재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란 모든 실존적 위기의 모범적 해결책이다. 이것은 위기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생존을 더 이상 우연이나 특수한 것에 맡기지 않는, 따라서 개인적 상황을 초월하게 만드는 가치를 향하여 마음을 '열게'만든다.

 

종교적 인간에게 우주의 존재 양상은 모범적인 삶을 모습의 계시이기도 하였다. 종교적 인간에게 성스러운 공간이 속된 공간에 방향성을 설정하듯 신의 계시는 인간의 삶에 참다운 방향과 의미를 부여해 준다. 탈신 성화된 비종교적 인간들이 겪는 긴장과 불안은 아마도 방향성의 상실 때문이 아닐까? 방향을 상실한 비종교적 인간들도 내심 그 깊은 속에서는 방향성을 설정해 줄 고정점, 즉 중심을 희망하지 않을까?  

 

상대성과 방향 상실에서 야기된 긴장과 불안에 종지부를 찍고 하나의 절대적인 지점을 산출시키는 징표를 사람들은 희망한다. 60쪽

 

엘리아데의 <성과 속>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탈신성화된 비종교적 인간들의 상황을 이와 같이 말하면서, 이들도 다시 옛 기억을 되찾아 종교적으로 실존에 대한 불안과 방향 상실로 야기된 긴장에 종지부를 찍을 가능성이 언제나 상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근대 사회의 비종교적 인간은 종교성을 상실하였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와 신화는 그들의 무의식의 어둠 속에 '은폐'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즉 비종교적 인간은 종교를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을 상실하였지만 그의 가장 깊은 존재 밑바닥에는 아직도 그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초의 타락 이후 종교적 감각은 분열된 의식의 차원으로까지 내려와 버렸다. 두 번째 타락 이후 그것은 더욱 내려와, 무의식의 심연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 그것은 '망각되고' 말았다.

 

      

 

<성과 속> 목차

001. 성과 속은 무엇인가· M. 엘리아데의『성과 속』
002. 서론
003. 성스러운 공간과 세계의 정화
004. 성스러운 시간과 신화
005. 자연의 신성과 우주적 종교
006. 인간의 실존과 성화된 생명
007. 연대기적 고찰
008. 엘리아데 연보
009. 참고문헌
010.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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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 이윤기 / 열린 책들

 

서점에 꽂혀 있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고 설레는 마음, <월든>을 보았을 때도 이 같은 약간의 흥분을 느꼈던 기억이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읽는 데 여러날이 걸렸다. 아껴서 읽는 탓은 아니다. 읽기가 힘들었다고나 할까? 무의식중에 카잔차키스의 표현에서 은유를 찾아내려한다. 표현 하나 하나에서 주인공의 심정이나 작가의 은밀한 생각을 읽어내려는 의식이 책을 읽어 나가기 힘들게 한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 탓이려니 생각한다. 아무 생각없이 읽고 싶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두목과 조르바의 우정이야기, 서로 다르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두목은 물주이고, 조르바는 고용인이다. 두목은 30대, 조르바 60대? 아마 그럴 것이다. 두목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책으로 향한다. 동양의 종교에 심취해 있는 듯, 매일 불경을 읽으며 뭔가를 찾는다. 조르바는 삶에서 무엇을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 다만 삶속에서 삶을 즐긴다. 관습도, 도덕도, 종교도 그를 막아 설 수가 없으리만큼 그는 자유롭게 살아간다. 그에게는 원시의 처녀림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냄새가 난다. 두목은 조르바가 마음에 든다. 조르바는 두목이 가지고 있지 않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 자유로운 영혼을... 조르바는 책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진짜 생생한 삶을 살고 있는 삶의 화신인 것이다. 조르바의 삶, 조르바의 자유는 그저 모순 덩어리이다. 삶은 욕망이며, 자유는 욕망의 충족이며, 욕망의 상호 충족의 원칙만이 조르바를 구속할 뿐이다. 갈탄을 캐내려는 시도가 완전히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모든 것을 날려버렸을 때에도, 조르바는 춤을 춘다. 해변 모래사장에서, 두목도 함께 춤을 춘다.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건 없다. 실패도, 가난도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자유란 그런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반 종교적인 색채가 진하게 풍긴다. 신을 부정하는 듯한 느낌들, 불신. 부패하고 타락해져 가는 종교를 향한 혐오감일까? 절대적 자유를 찾기위해종교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일까? 신에 대한 완전한 부정일까? 아니면 신에게 던지는 질문일까?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관습, 도덕, 종교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삶의 모습을 허물어뜨리고, 자유로운 삶을 보여주려한다. 그는 두려워한다. 자유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지, 그는 확신할 수 없다.

 

<그 사람들이 눈을 떴을 때, 당신이 지금의 암흑 세계보다 더 나은 세계를 보여 줄 수 있다면.... 보여 줄 수 있어요?"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꿈이 짜낸 빛의 천이다. 보랏빛 바람에 둘러 싸인 구름... 이땅의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도, 이제는 암호 이상의 예언을 들려 줄 수 없다. 암호가 모호할수록 선지자는 위대한 것이다.> 92쪽

 

자유란 달콤한 꿀처럼 유혹적인 마력을 가지고 있지만, 자유가 진정한 삶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두목은 유보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목은자유를 갈망한다. 그래서 그는 자유의 삶을 사는 조르바를 좋아하는 지도 모른다.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선택할 자유와 능력이 있다면 자유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틀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비록 외면적으로는 자유롭지 않아 보이겠지만, 여전히 그는 자유인이다. 그러면 물고기가 물 속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스스로가 처한 틀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자유롭다고 느깐다면, 자유로운 걸까? 그것은 선택에 의해 자유를 획득한 것이 아닐텐데. 그것은 주어진 자유일텐데...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못하고 물에서 자유로운 것과, 물이라는 구속을 의식하면서도 그 가운데 자유로운 것중 어느 것이 더 큰 자유일까? 물고기가 물 밖 세상을 동경하여 물을 뛰쳐 나와 장렬히 죽음을 맞는다면, 그것은 그의 선택이므로 자유로웠던 것일까?

 

자유란 절대 선이 아니다. 자유란 상대적 선일지도 모른다. 자유란 상대적인 악일 수도 있다. 상대적이란 것은 필시 잣대가 요구되는데, 그러면 상대적 세계에서의 잣대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 생각난다. 자유를 한계지으려는 시도, 어차피 자유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일 뿐....

 

이 길을 내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Hollywood Science 

30편의 문제적 영화로 본 현대 과학 기술의 명암 할리우드 사이언스

김명진 지음/ 사이언스 북스


종교가 진리 근원으로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 역할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종교는 과거의 영화를 잃어버리고 있으며, 과학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사실은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과학적 사고방식은 가장 믿을만한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과학은 인류가 처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과학 만능주의의 생각도 만연해 있습니다. 

 

 

일반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에 대한 이러한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은 사실에 근거를 둔 절대적 진리라고 받아들이고 있던 나에게 과학의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은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였습니다. 게르하르트 뵈르너의 <창조자 없는 창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과학적 사실은 절대적 진리가 아닙니다. 과학은 진리를 찾아  나아가는 여정일 뿐입니다. 과학적 패러다임은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해 갈 것입니다. 진리에 더 근접하기 위한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면서 말입니다.

 

☞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고 http://blog.daum.net/ccsj77/45

☞ 과학혁명의 구조소개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72915546

과학혁명의 구조

 

 

레비 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는 과학적 사고와는 다른 사고 체계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 야생의 사고체계 역시 정교하며 깊은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과학적 사고만이 가장 우월한 사고체계라는 서구인들의 편견을 무참하게 깨어버립니다. 분명한 것은 과학이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와 과학의 만남! 그것은 동반자적인 만남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긋난 만남이 되기도 합니다. 과학은 장미빛 미래를 약속합니다만, 영화는 예언자적 역할로 과학에 대해 경고의 소리를 발합니다. 과학의 한계을 지적하며 과학의 오만함을 경계합니다. 미래 사회가 직면할 과학적 디스토피아적인 상황에 대한 각성을 촉구합니다. 과학에 대한 맹신을 경고합니다. 

 

 

<할리우드 사이언스>은 과학을 소재로 한 영화를 소개하면서, 과학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합니다. 어떤 영화들은 과학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과학이 가져올 끔찍한 미래의 가능성, 즉 핵전쟁으로 인한 파멸, 방사선으로 인한 돌연변이가 가져올 위험, 온난화로 인한 대재앙 등을 경고합니다. 또 다른 영화들은 과학이 직면한 윤리적인 문제를 부각시킵니다. 인간복제로 야기되는 윤리적 문제, 최첨단 감시 체계의 등장으로 인한 인권의 침해, 권력이나 금권에 휘둘리는 과학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 다양한 과학자들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 책 <헐리우드 사이언스>는 과학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폭주하는 과학기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합니다.  

 


소개된 영화와 그로 부터 이끌어낸 담론들입니다. 

 

1부 책, 우주, 컴퓨터 - 20세기 거대 확학 기술의 명암

1. 뎀! - 핵실험과 핵전쟁의 그늘에 숨은 죄의식과 공포

2. 아이언 자이언트 - '정치'와 '기술'에 대한 엇갈린 태도

3. 핵전략사령부 - 핵무기, 인류 절멸에 대한 강력한 경고

4. 차이나 신드롬 - 핵발전소 사고 속의 무기력한 과학 기술자

5. 왕립우주군-우네아미스의 날개 -  "What-If"의 세계, 순진한 우주 비행의 열망

6. 필사의 도전 - 냉전, 마초주의, 유인 우주 비행의 미혹

7. 콘택트 - 과학과 종교, 과학과 비과학의 흐릿한 경계

8. 명왕성 파일 - 과학의 역사성이 지닌 무게

9. 누가 전기 자동차를 죽였나 - '순결'한 기술과 '오염'된 사회

10. 시리아나 - 석유: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11. 극비계획로지 - 여성과학 기술자가 역사에서 지워지는 방식

12. 에이아이 - 60년대적인, 너무나 60년대적인

13. 컨버세이션 - 감시 기술 속에 갇힌 과학기술자의 자화상

14. 인사이더 - 비밀주의 과학 속, 공익 제보자의 고단한 삶

15. 매트릭스 3부작 - 참신한 발상과 확장된 전개, 그리고 안이한 결말


2부 환경과 생명

21세기 과학 기술의 과제

16. 프레데릭 백의 선물 - 생태주의 담론이 주는 감동과 한계

17. 미래소년 코난 - 거대한 독재적 기술 vs  소규모의 민주적 기술

18. 정글 속의 고릴라 - 과학을 하는 '여성적 방식'은 과연 존재하는가?

19. 시빌액션 - 독성 폐기물 유출 피해에 맞서는 지역 주민의 활동

20. 투모로우 - 유용한 '교육적 도구'인가, 현실 도피적 왜곡인가?

21. 리애니메이터 - "미치고, 나쁘고, 위험한" 과학자의 전형

22. 뇌엽절제술사 - 사회 문제에 대한 '기술적 해결책'의 한계

23. 천성적으로 집착이 강한 - 과학(자)은 어떤 일을 하는가?

24. 브라질에서 온 소년 - 대중적 상상력 속의 인간 복제

25. 아일랜드 - '세속화'된 과학, 시니감이 거세된 복제 인간

26. 블루프린트 - '현실적'인간 복제의 근 미래상

27. 가타카 - 다가올(온) 미래, 다가오지 않을 미래

28. 플라이 - 과학자, 괴물, 유전 공학

29. 미믹 - 통제를 벗어나 진화하는 괴물

30. 카우보이 비밥 극장판 - 새로운 프랑켄슈타인, 나노 기술


과학은 기본적으로 윤리, 비윤리를 따지지 않습니다. 윤리적이지 못한 연구, 비윤리적인 방식의 연구, 또는 과학 기술의 비윤리적 사용등은 현재에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그 자체의 힘으로 폭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이를 통제할 수단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윤리, 도덕, 의무등을 배제하고 무한정한 자유를 과학에 부여할 수는 없기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과학을 길들여야 할까요? 종교와 철학의 역할이 여기에 있습니다. 과학에 있어 무엇이 윤리적이며 무엇이 비윤리적인지를 판단하는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적 동의를 그 근거로 하든지, 아니면 종교의 도덕을 바탕으로 판단한다든지, 어쨌든 폭주하는 과학 기술을 길들이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죠. 

 

 

영화는 재미있는 소일거리이기는 하지만, 또한 알게 모르게 예언자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즐기면서도 이러한 성찰의 지혜를 갖게 된다면 이석이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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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제임스 조이스/ 이창희 그림/ 박성문 글/ 채우리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06

 

제임스 조이스(1882-1941)는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 <율리시스>는 현대소설의 지평을 연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율리시스>는 두번째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난해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왜 조이스의 대표작 <율리시스>는 이런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을까요?

 

조이스 이전의 소설들은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러나 조이스는 그와는 달리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초점을 맞추어, 내면 세계의 묘사에 집중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완전히 새로운 소설을 시작한 것입니다.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의식의 흐름'은 한 개인의 총체적인 삶에서 흘러나오기마련입니다. 그를 이해하려면 주인공의 내면을 형성한 배경등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조이스는 설명을 하려들지 않습니다. 단지 의식의 흐름을 서술할 뿐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의식이란 때때로 불연속적이며, 불합리하고, 불가해하기때문에 이해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율리시스>가 난해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율리시스>는 1904년 6월16일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을 배경으로 하여 주인공 레오폴드 블룸씨와 스티븐 디덜러스를 중심축으로 소설이 전개되어 나갑니다. 그러므로 <율리시스>의 배경이 되는 '더블린', 그리고 주인공인 스티븐 디덜러스에 대해 더 많이 알게되면 <율리시스>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이스의 더블린 3부작인 <더블린 사람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율리시스>중  <더블린 사람들>과 스티븐 디덜러스가 주인공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먼저 읽는다면 <율리시스>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조이스 자신의 자서전적인 소설입니다.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의 이야기는 조이스 자신의 이야기인 셈이죠.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스티븐의 어린 시절에서 시작하여 대학을 졸업한 후 종교와 가족, 국가와 민족을 뒤로 하고 예술가의 삶을 찾아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때까지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꽤나 이해하기 어렵다던 이 작품을 만화로 만나게 되어 재미있게, 쉽게 접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만화로 된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는 중간 중간에 보조 자료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조이스의 문학, 그의 조국 아일랜드의 역사와 종교 등의 자료들은 조이스와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는 자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성장과 함게 했던 종교와 가족, 민족과 국가등은 예술가를 위한 자유의 길을 막는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뛰어 넘어 자유의 길을 나아갑니다.

 

 

스티븐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이달로스처럼 자유를 향해 날아오르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이름 디덜러스는 그리스어로 다이달로스입니다. 다이달로스는 갇혀있는 탑에서 탈출하기 위해 밀랍과 깃털을 이용하여 날개를 만듭니다. 그리고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목숨을 걸고 자유를 향해 탈출합니다. 이카루스는 너무 높이 날아 올라 태양의 열로 날개밀랍이 녹는 바람에 떨어져 죽게됩니다. 자유를 향한 열망에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필경 함께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븐의 자유혼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가족도, 종교도, 국가와 민족도 스티븐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스티븐은 영국의 국교회에 예속되어 세속화된 종교에 분노합니다. 그리고 스티븐은 조국 아일랜드에도 심한 환멸감을 느낍니다. 자기네 언어를 버리고 다른 나라 언어를 택한 나라, 아일랜드의 애국자 파넬의 파멸을 기뻐하던 나라... 그는 '아일랜드는 제 새끼를 잡아먹는 늙은 암퇘지'라고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이렇게 그는 종교와 조국에 등을 돌리고, 가족을 뒤에 두고 아일랜드를 떠납니다. .  

 

 

 

어디에도,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스스로의 결정을 통해 예술가의 길을 걷기 위해 자유의 길을 떠납니다. 이렇듯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자유를 향한 스티븐의 몸짓을 보여줍니다. 

 

 

윌리엄 제임스 지음/ 김재영 옮김 / 민음사

 

 윌리엄 제임스는 의학을 전공했으며, 심리철학자로 활동하였다. 그가 쓴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은 종교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책이다. 유명한 과학자 칼 세이건은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읽고 감명을 받아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이란 책을 썼다고 한다.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에 대한 통찰과 그의 글의 문학적 향기가 잘 어울러져 아름다운 작품이 되었다. 

 

제임스는 종교를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종교적 경험에 대한 그의 견해는 어떠한가? 종교의 유용성에 대해서는?

인간의 종교성은 인간본성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등 여러가지 문제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제임스는 인간의 본성을 알기위해서는 제도화된 종교보다는 각 개인의 종교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모든 선험적, 관념적 체계나 철학적 방식을 배제하고 각 개인들의 실제적 종교적 경험에 근거한 연구를 진행함으로 인간의 종교성과 인간본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그래서 책 전반에 걸처 종교적 경험들의 사례들이 많이 언급되어 있다. 특히 한 종교나 종파의 창시자들의 특별한 종교적 경험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종교적 경험들은 회심, 환상, 환시, 종교적 황홀감, 또는 자동증이라고 불리는 비정상적 육체적 반응등을 통해 나타난다.

 

제임스는 인간들을 두 종류의 유형으로 나눈다. 낙관주의적 성품(optimistic mind)를 가진 사람들과 고뇌하는 영혼(sick soul)을 가진 사람들.

낙관주의적 성품을 가진 사람들은 세계를 낙관적으로 바라본다. 세계에 편만해 있는 모순, 악등의 존재를 무시해 버리고 오로지 선하고 밝은 면만을 편파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고뇌하는 영혼은 인생에 대해, 세계의 모순과 악에 대해 괴로워하고 고뇌한다. 이러한 고뇌하는 영혼은 분리된 자아 의식을 가진다. 여기서 그의 고뇌와 불행이 시작된다. 하지만 분리된 자아를 통합을 경험함으로 삶에 대한 의미를 되찾고 살아갈 원동력을 얻게된다. 분리된 자아의 통합이 종교적 경험의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제임스는 고뇌하는 영혼이야말로 진정한 종교성을 나타날 수 있는 부류의 사람으로 평가한다.

 

종교적 경험은 개개인들로 하여금 성인다운 삶을 살도록 촉구한다. 이러한 성인다움이 지나치게 되면 병폐가 나타나기도 한다. 신비주의에서 이러한 병폐가 관찰되기도 한다. 이러한 지나침은 종교성의 과대에 비해 지성의 편협함이 그 원인이 된다. 하지만 종교적 경험으로 인한 이러한 삶의 결과는 종교적 경험이 없이 나타나는 삶이 만들어 내는 세계에 비해 우월하다는 면에서 종교의 유용성이 있다.

 

제임스는 인간의 종교적 경험의 심리적 접근을 시도한다. 인간에게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잠재의식의 영역이 있다. 인간의 종교적 경험은 바로 이 잠재의식의 영역이 의식의 세계로 침입함으로 이루어진다. 잠재의식의 영역에서 에너지가 의식세계로 분출됨으로 다양한 종교적 경험이 산출된다. 종교적 경험의 원천은 잠재의식의 영역내에 있다. 그렇다면 종교적 경험의 제일원인으로 파악하고 있는 신적존재는 어떠한가?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이다. 종교적 경험이 순전히 심리학적 경험일 수도 있지만 만일 신적 존재가 있다면 아마 그는 바로 이 잠재의식의 영역에 작용하여 종교적 경험을 유발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그러한 문제와 관련한 그의 객관적 입장을 나타내는 표현이 있다. 그는 경험적 판단의 약점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우리는 인간을 동물적 부분과 이성적 부분으로 뚜렷하게 나눌 수 없다. 우리는 자연적 작용과 초자연적 작용을 구별할 수 없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작용사이에서 어떤 것이 신의 호의이고 어떤 것이 악마의 작용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험적 체계에 의해 판단하는 것의 폐기 후에 우리는 결코 선명하고 학구적인 결과들을 기대할 수는 없다. "

 

제임스는 신학철학은 결코 인간의 종교성을 올바로 나타낼 수 없다고 말한다. 종교적 경험이 우선이며 철학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산물일 따름이다. 또한 신학철학은 곁코 인간의 종교적 삶에 그 가치를 부여해 주지 못한다. 실용적 관점에서 볼 때 신학철학이 논하는 문제는 인간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으며, 단지 심미적인 역할만을 담당하고 있다.

 

그는 일반적 종교철학 대신에 종교학이라는 분야를 제안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신조들, 그리고 일반적 사실들을 사적인 종교적 경험으로부터 추출하려는 노력은 범종교적인 종교학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그리고 이 모든 지적 작업은 구조적이든 비교적이든 비판적이든 간에 직접적 경험을 통해 이루어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험적, 관념적인 것들을 모두 배제하고 직접적인 경험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이 그의 기본 연구 방침인 것이다. 

 

제임스는 그의 결론을 맺는다. 즉 때때로 과학적 자연주의등은 종교를 비판하고, 종교의 무용성을 주장하며, 종교가 곧 없어질 존재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의 경험세계는 객관적 부분과 주관적 부분이 있다. 객관적 부분은 보다 엄청나게 포괄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관적 부분도 결코 생략되거나 억제될 수 없다. 즉 종교적 부분은 여전히 그 나름대로의 영역을 지키게 될 것이다.

 

또한 종교는 궁극적으로 신이 아니라 삶, 즉 더욱 풍요롭고 거대하며 만족스러운 삶을 목적으로 한다. 모든 그리고 단계마다의 발전에서 삶에 대한 사랑은 종교의 추진력이다. 그러므로 순수하게 주관적인 이 평가에서 종교는 어떤 식으로든 그 비평가들로 부터 변호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단순한 시대착오와 잔존신앙일 수 없고, 지성적 내용이 있든 없든, 그리고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어떤 영원한 기능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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