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에서 삼국시대를 거쳐 송나라까지


삼황오제

하, 은, 주

춘추전국시대

진(진시황)

초한시대(항우와 유방)

한(유방)

후한(유수)

삼국시대(조조, 손권, 유비)

진(사마염)

서진

동진/ 5호16국

남북조

수(양견)

당(이세연)

송(조광윤)





.

'읽은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헤르만 헷세의 인도여행  (0) 2017.02.10
미움받을 용기  (0) 2017.02.10
논어  (0) 2017.02.10
비숲  (0) 2016.12.15
열하일기  (0) 2016.12.15

논어 다시 읽어야겠다.

'읽은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움받을 용기  (0) 2017.02.10
이야기 중국사 2  (0) 2017.02.10
비숲  (0) 2016.12.15
열하일기  (0) 2016.12.15
이문구의 관촌수필  (0) 2016.12.13

김산하 지음


열대우림을 비숲이라 한다. 김산하는 한국 최초의 영장류 박사이다. 그는 긴팔원숭이를 연구하기 위하여 인도네시아 열대우림으로 찾아든다.

말로만 듣던 밀림, 정글은 그야말로 사람이 손길이 미치지 않는 처녀림이다. 이 숲 바로 바깥에 너댓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은 자연과 문명의 완충지대이다.

자연과 문명이 함께 할 수는 없는 것, 인간은 자연에 동화되지 못하고 그저 파괴할 뿐이다. 긴팔원숭이를 비롯한 열대우림의 원주민들은 절대 자연에 동화되어 그 스스로가 자연이다. 하지만 문명화된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이 될 수가 없다. 하늘을 가릴 지붕이 필요하고, 벗은 몸을 가릴 옷이 필요하고, 자연산이 아닌 재배하고 양식한 음식을 먹는 인간은 이미 자연을 떠난 존재이다. 자연에서 나왔으나 더 이상 절대자연 속에서는 불편해지는 인간. 그러나 인간은 원초의 자연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원초의 자연은 문명화된 인간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인간은 원시자연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나아갈 길도 없고, 돌아갈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 원시자연에서 생존하려면 그것을 문명화해야 한다. 절대자연에 손상을 끼쳐야 한다. 하지만 인간이 물러서면 어느듯 세월은 인간의 흔적을 지우고 절대자연으로 돌아간다. 인간이 자연을 대규모적으로 파괴하지 않는한 자연은 스스로 복구한다.


산 짐승도 자기들이 다니는 길이 있다. 자주 다니다 보니 자연 길이 생긴다. 인간도 자연에 길을 낸다. 그도 긴팔원숭이를 연구하기 위해 서식지를 가로 세로로 길을 낸다. 길이 없으면 다닐 수가 없고, 다닐 수 없으면 긴팔 원숭이를 쫓아갈 수 없고, 긴팔 원숭이를 쫓지 않으면 연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최소한의 길을 내고 그 길을 따라 원숭이를 쫓아 다닌다. 처음에는 원숭이들이 인간을 보고 무작정 도망을 간다. 연구팀은 죽어라고 그들을 쫓아간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여러달 이러한 쫓고 쫓기는 관계속에서 익숙함이 자란다. 어느날 긴팔 원숭이들은 돌연 쫓기는 것을 거부한다. 더 이상 도망가지 않는다. 인간을 그들 주위 환경의 일부로 인식하게된다. 이 후로는 마음대로 긴팔원숭이를 관찰할 수 있다. 바로 나무 밑에서 이야기를 해도 긴팔원숭이들은 도망가지 않는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여우와 친해지는 방법이 바로 이러한 익숙함이었다. 익숙함은 그리움을 낳는다. 하지만 익숙함 속에는 독이 있다. 새로움, 신선함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삶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이 익숙함이라면 삶을 살만한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새로움이다. 익숙함속에 새로움을 찾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대박이다.


김산하 박사는 비숲을 그리워할게다. 긴팔원숭이도 그리울게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연구팀이었던, 아리스, 싸리도 보고 싶을게다. 인간은 비숲과는 다른 방식으로 소통한다. 끈끈한 정으로 맺어진 그들과의 인연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만약 김박사가 자연과 소통할 수 있었다면, 말하자면 그냥 자연을 관찰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니 관찰이 아니라 참여, 동화되어 살면서 진정한 소통이 가능했다면 어떤 기록이 나올 수 있었을까? 밀림을 벗어난 최소한의 문명인 밀림 옆 마을의 지붕이 있는 집이 아니라 밀림속에 얽기설기 거처를 마련하여, 긴팔원숭이들과 함께 절대자연에 동화되어 살았더라면...그게 가능한 일일까? 아니면 그정도까지 할 마음이 있기나 했을까?


제인구달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프리카에서 수십년을 침팬지를 연구하면서 생활한 학자인 제인구달은 침팬지를 자연의 대표로 생각하고, 자신을 인간의 대표로 여기며 자연과의 화해를 위해 발벗고 나섰다. 역시 현재 인간은 자연과는 떨어진 문명의 존재이다. 문명과 자연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길을 찾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인간은 문명속에 살지만 자연을 도외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자연은 인간 숨결의 원초적 근원이기 때문이다. 자연없는 삶은 상상할 수 가 없다. 단지 감정적 미학적 차원이 아니라 생존의 차원에서 그러하다. 인간의 생존에 자연이 필수불가결함을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거꾸로 자연은 문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문명은 자연에 빚진바가 크다. 절대 부채를 지고 있다. 하지만 탐욕적인 인간은 자신들이 자연에 대한 권리를 가진 양 마음대로 파헤치고 파괴하려든다. 자연은 어느 선까지는 허허하고 넘어간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치면 자연은 신음 소리를 낸다. 자연이 불편해 하면 인간도 불편하다. 정도가 심해지면 자연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기제를 작동시킨다. 가이아의 보복이다. 파괴로 급변한 자연환경은 인간에게 전혀 보도 듣도 못한 재앙들을 가져다 준다. 현재 인간들이 경험하는 여러가지 자연재해들은 사실 인간들이 자초한 면이 크다.


인간 문명은 인간을 변모시켰다. 자연인에서 문명인으로 그리고 문명인에서 야만인으로. 인간이 만든 문명의 이기들은 인간의 삶을 편하게 만들었다. 또한 인간들이 생존을 위한 고된 노동에서 구출해 주었다. 결과 인간은 시간을 부여받았고, 삶을 돌아보며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이 가능해졌다. 잉여의 시간들은 퇴폐속으로 빠져들었다. 인간속에 내재된 불건전한 온갖 종류의 탐욕을 부추기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문명의 도구들을 사용하여 잉여의 시간을 보내면서 새로운 종류의 인간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전자기기에 빠져 인간성을 상실하고 퇴폐와 쾌락만을 추구하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동물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런 부류의 인간들을 양산해 내었다.


인류의 생존이 계속되려면 인간의 자연성이 회복되어야한다. 문명이 그 나락의 끝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을 힘은 자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박사는 집 부근에 조그만 녹지들에 눈을 돌린다. 아주 작은 모자이크 조각일지는 몰라도 이 작은 녹지를 가꾸는 일을 통해 인간의 마음 속에 최소한의 자연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자연이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해야한다. 아이들의 교육에서 자연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참 아이러니 한 것은 자연을 괴롭히고 부수고 조각내고 분해하여 자연의 본질을 알려고 하는 과학을 자연이라 부른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자연 교육말고 참다운 자연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자연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자연과 문명의 조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우리 자신의 삶이 자연에서 비롯된다는 제반 사실들을 교육할 필요가 있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생존이냐, 아니면 멸망이냐?

'읽은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야기 중국사 2  (0) 2017.02.10
논어  (0) 2017.02.10
열하일기  (0) 2016.12.15
이문구의 관촌수필  (0) 2016.12.13
김승옥의 무진기행  (0) 2016.09.05

박지원 지음/ 고미숙 옮김


연암 박지원, 조선의 글쟁이. 박지원의 글은 당시 지식인 사회에 충격을 던졌다고 한다. 신분사회의 폐단을 드러내다는 점에서 뿐아니라 그의 글은 전통적인 글쓰기와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당시의 글쓰기란 전혀 창의적이지 않았다. 다만 옛글을 본 뜨는 것을 최고로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지원의 독창적인 글은 어떻게 보면 파격적인 것을 넘어 이단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박지원의 글은 당시의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다만 글쓰기만 그러하겠는가, 그의 사상 즉 양반사회를 비판하고 신분사회를 부정하는 그의 사상도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당시의 글쓰기에 대해 전혀 무지한 사람인고로 박지원의 독창성과 파격성을 느낄 수는 없다. 다만 열하일기에 나타난 박지원의 호방함과 재치, 그리고 해학적인 성품은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 열하일기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 보자.


박지원은 조선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나라 연경으로 간다. 청나라 황제는 그 때에 더위를 피하기 위해 열하에 가 있었다. 조선 사신단은 연경에서 700여리 떨어진 열하로 향한다. 청나라 황제의 70세 생일인 만수절에 맞추어 열하에 도착하기 위해 사신단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열하에 도착한다. 황제의 만수절 축하가 끝난 후 그들은 다시 연경으로 되돌아 온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압록강을 건너 연경으로 가는 여정, 그리고 연경에서 열하로의 여정, 마지막으로 열하에서 연경으로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그 여정에서 만나게 된 풍경, 사람들, 문화등이 열하일기에 녹아져 있다.


열하일기를 번역한 고미숙님은 열하일기의 광팬이다. 다시 말해 박지원에 대한 고미숙님의 애정이란 놀라움 그 자체이다. 그저 열하일기를 읽는 독자로서의 느낌과 열하일기의 번역자로서의 감회가 같을 수는 없다. 먼저는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같을 수 없을 것이며, 글에 표현된 작가의 심리를 읽어내는 정도가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 스스로도 열하일기를 첫번째 읽을 때의 감상과 두번째 읽을 때의 감상이 확연히 다름을 느낀다면, 번역자가 느낄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경탄은 독자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경지일 것이다.


그러면 박지원의 유머에 대한 고미숙님의 분석은 어떨까? 고미숙님은 박지원이 유머를 구사한 것은 고도의 글쓰기의 방법의 일환이라고 본다. 당시의 글쓰기 상황을 배제하고 그냥 생각한다면, 박지원의 글에 나타난 유머는 그저 스스로 자신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방법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시의 글쓰기와는 파격적으로 다른 그의 글쓰기의 특징이 유머라면, 고미숙님이 보는 것처럼 혁명적인 그의 사상이 당시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보다 거부감없이 접근하려는 고도의 방책이라 볼 수도 있겠다. 


우스개 소리는 일반적으로 천박하고 얄팍한 사유와 연관되기도 하지만, 박지원의 유머는 상당히 다르다. 그는 유머스러하면서도 그 사유의 깊이가 대단하다. 그는 스스로를 희화화한다. 자신이 독자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감의 발로라 할 수밖에 없다. 박지원은 풍채도 대단했다고 하는데, 성격도 그만큼 호방했던 모양이다.


열하일기에서는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의 논리가 들어있다. 그가 청나라를 여행하면서 보고 알게된 청나라의 문물을 조선의 것과 비교하는 것도 모두 더 인간다운 삶이 있는 사회을 만들기 위한 고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던 그는 말년에 몇몇 관직을 얻게 된다. 경상남도 함양에 있는 안의 현감으로 봉직하면서 박지원은 청나라에서 보았던 물레방아를 실제로 설치하여 사용해 본다. 안의면 용추폭포 올라가는 길에 거대한 물레방아와 함께 박지원을 기리는 유허지가 있다. 함양을 물레방아골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언제가 함양에 갔다가 물레방아를 보고, 왜 박지원의 사적비와 물레방아가 여기에 있을까 하고 궁금해 했던 적이 있었는데...



'읽은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어  (0) 2017.02.10
비숲  (0) 2016.12.15
이문구의 관촌수필  (0) 2016.12.13
김승옥의 무진기행  (0) 2016.09.05
김용택 선생님의 글쓰기 학교 - 뭘써요 뭘 쓰라고요?  (0) 2016.09.05

관촌수필/ 지은이 이문구/ 문학과 지성사


어이가 없다. 관촌수필이라 하여 수필인줄만 알았다. 연작 소설집이었다.


관촌수필에는 총 여덟개의 회고적인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작가의 어린 시절의 추억, 그리고 성인이 된 후에 있었던 몇가지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네글자로 된 한자로 제목이 붙어 있다. 이문구님은 우리 고유의 토속적인 어휘들을 많이 구사하고 있지만 한자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 제목에 각 이야기가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첫번째 이야기인 일락서산日落西山은 할아버지에 얽힌 기억들이다. 할아버지는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 그리움은 지나간 시절, 돌아올 수 없는 시절에 대한 향수이기도 하다. 세월이야 잡을 수 없고, 시간 속에 변하지 않는 것도 없을테지만, 그래도 아름다움은 남아 있어야 하건만, 지난 시절의 가치들은 여전히 우리 시대에도 유효한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작가가 고향 관촌을 찾은 날은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저녁 어름이다. 더 큰 시간의 영역에서 보면 지나간 시절의 전통적인 인간관계나 사회가 저물어가는 그런 때이기도 하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선 작가의 눈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향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를 향한 눈은 미래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찾고 있는 지도 모른다.


둘째 화무십일花無十日은 육이오동란중에 행랑채에 살게 된 윤영감네 이야기이다. 며느리의 가출과 윤영감 아들의 자살로 끝난 비극적 이야기이다. 윤영감네는 피난내려오다 부모를 다 잃게된 여자를 거두어 들인다. 그녀는 윤영감의 며느리가 된다. 국군이 북진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던 윤영감네는 작가의 집에 빌붙어 살게된다. 윤영감은 온갖 잡일과 들일을 다 돌봐 주면서 그 몫을 해내고, 며느리는 읍네로 가서 여관 부엌에서 할 일자리를 찾게된다. 어렵게 살아가던 중 찾아온 아들이 정신을 차리고 일하면서 삶이 좀 나아졌나 싶더니, 며느리가 바람이 나 가정이 풍비박산이 난다. 며느리는 야반도주를 하고 아들은 뒤산에서 목을 매단다.   


세째 행운유수行雲流水는 노래 잘하고 씩씩하고 어린 '나'를 잘 돌봐 주었던 옹점이 이야기이다. 작품 전체에서 옹점이는 자주 등장하지만 이 편에서는 옹점이가 주인공이다. 옹점이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며 언니(누나)처럼 나를 위해 주었다. 옹점이에 대한 그리움은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버금간다. 나이가 들어 시집갈 때가 되자, 옹점이는 눈물을 흘리며 시집을 간다. 잘 사는가 싶었더니, 전쟁나간 남편의 소식이 끊어지자 군식구를 줄이려는 시집 식구들의 등쌀에 못이겨 옹점이 집을 뛰쳐나온다. 옹점이 결국 떠돌이 패와 어울려 노래를 부르며 다닌다는 소문을 듣게 되는데, 결국 나는 시장판에서 노래하는 옹점이를 보고 눈물을 훔치며 되돌아 집으로 달려간다. 행복하게 살기를 바랬던 옹점이의 떠돌이 삶에 나는 슬픔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 글에는 옹점이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과 아쉬움이 철철 넘친다.


네째 녹수청산綠水靑山은 대복이 이야기이다. 행랑살이를 하던 대복이네 가족. 대복이는 친구라기 보다는 언제나 든든한 형처럼 나를 대해 준다. 대복이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대복이는 나쁜 길로 빠져든다. 대복이가 절도죄로 유치소에 있을 때 공산군이 들어오게 되고, 그 길로 풀려난 대복이는 공산당의 앞잡이가 된다. 그러다 상 것인 대복이가 감히 넘어다 볼 수 없는 순심이란 처녀를 겁탈하려다 대복이는 다시 철창 신세를 지게 되고, 국군이 북상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대복인 자유의 몸이 된다. 공산치하에 아이들에게 혁명가등 노래를 가르치며 부역하던 순심이는 수복이 된 후 행적이 오리무중이 되고, 어찌된 일인지 대복이는 순심이네 집의 하인으로 자청하고 나선다. 몸을 사리지 않고 순심이네 가족을 돌봐주는 대복이는 전쟁터로 떠난다. 깊은 지하실에 숨어 있던 순심이는 떠나는 대복이의 뒤 모습이라도 보려고 몰래 나왔다가 사람의 눈에 띄어 경찰서로 잡혀간다.  


다섯째, 공산토월公山吐月은 석공의 이야기이다. 우리 집 맞은 편에 사는 석공은 어릴 때부터 돌을 그렇게나 좋아했었다. 쓰임새가 있을 만한 돌을 모아 마당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가 사람들이 각종 일에 쓰임새가 있을 때는 기꺼이 그 돌들을 내어주곤 했다. 대복이와 석공은 서로 닮은 듯 다른 듯, 나를 위해주는 형과 같다는 점에서는 서로 닮았지만, 석공은 대복과는 달리 시종 성실하고 착실하기만 하다. 석공이 나이가 들어 섬처녀를 색시로 맞아들이던 날, 마을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나'의 아버지가 석공의 마당에서 술을 쭉 들이키고는 한바탕 소리를 뽑고 춤을 덩실덩실 춘다. 마을 사람들만이 아니라, 나도, 아니 나의 어머니도 아버지의 이러한 행동을 처음 본 것이다. 석공이 아버지의 사회주의적인 사상을 받아들이거나 행동대원으로 활동하지도 않았건만, 왜 아버지가 아랫것인 신씨네 집의 혼사에 그런 정을 주는 행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석공과 그의 가족은 이에 우리 가족에 한층 더 깊은 사랑고 존경심을 갖게 된다. 전쟁을 지나면서 우리집 가세가 기울고 어려워질 때에 석공은 한결같이 온갖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는다. 공산치하에서 면사무소의 펜대를 쥐게 된 석공을 보고 석공의 아버지는 평생 원해왔던 일을 구하게 되었다고 좋아한다. 그것이 비록 아무 힘도 없는 말단의 일이었지만서도. 하지만 공산당이 물러간 후 석공은 부역자로 몰려 갖은 고문을 당하게 되고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형기를 마치고 나온 후 성심을 다해 마을을 위해 일하고 성실하게 집안을 일구어 나간다. 그 와중에 몰락한 우리 집은 모든 가산을 팔고 도시로 이사하게 된다. 고향에 사는 모든 사람과의 연락은 끊어졌지만 석공의 가족과는 끈끈한 이어짐이 계속된다. 석공의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가세는 일어서게 되고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살게 되는데, 이게 왠 일? 석공은 알 수 없는 병으로 쓰러진다. 백방이 무효라고, 석공은 도시로 나와 큰 병원에 입원하지만...결국 백혈병에 걸려 죽을 운명임을 알게 된다. 석공이 도시로 나와 병원을 알아보고 치료받는데 여러 편의를 돌봐 주면서 나는 석공에 대한 감사와 따뜻함을 나타내지만, 석공이 죽을 지경이 되도록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석공이 임종을 앞 두고 차를 타고 고향으로 가는 마지막 인사를 할 때, 석공이 창문 너머로 나의 손을 잡을 때, 느닷없이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는 도저히 그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여섯째, 관산추정關山芻丁 일제 징용갔다 돌아온 유천만. 몸이 좋지 않아 집안일을 하지 않는 그 집의 기생충같은 존재였지만, 마을의 대소사에 몸을 아끼지 않던 사람, 닭이나, 돼지를 잡을 때면 언제나 보수도 바라지 않고 발 벗고 달라들든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 복산이...


일곱째, 여요주서與謠註序 어릴 적 친구였던 신용모, 어릴 때 어리석은 용모는 어른이 되어서도 변한 것이 없다. 죄를 뒤집어 쓰고 말을 잘못하는 바람에 더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여덟재, 월곡후야月谷後夜 귀향한 김희찬이라는 친구와 그의 동생 수찬이. 희찬이는 도시에서 짜집기 책을 만들며 펜대를 굴리다 귀향한 나의 친구이다. 시골에서 과수원을 가꾸며 생활을 이어나가는데, 타지에서 이주해 온 결핵에 걸린 한 남자가 자기 초등학교 딸아이의 친구를 범하게 된다. 들통이 나자 어떻게 어떻게 돈을 써서 소녀의 어머니와 합의를 보고 감옥에 가는 것을 용케 피하지만 이 마을의 젊은이들은 이를 묵과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든 그를 응징하고자 하는데....


이문구님의 관촌수필에서는 옛것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배여져 있다. 그리고 옛것이 사라지고 변화해 가는 시대의 흐름이 담겨져 있다. 작가의 심중에는 변화의 모습이 부정적으로 보여진다. 옛 것에 대한 애모가 깊을 수록 변화는 부정적으로 보이기 마련인가보다. 근대를 지나 현대로 변모해가는 모습이 부정적으로 비친 것은 일단은 자연과의 교감이 옅어지는 점이다. 관촌수필 곳곳에 어린 시절 자연과의 교감이 드러나 있다. 더구나 석공의 혼인식날 밤 휘영청 밝은 달빛을 훔쳐가던 기러기 그림자를 묘사하던 밤의 풍경은 읽는 독자로서도 잊을 수 없는 광경이 되었다. 관촌부락과 가까운 갯벌의 추억도 그렇고, 냇가에서 고기를 잡던 추억도 그렇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위해 주던 이웃의 형들과 언니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끈끈한 정이 그리운 것이다. 현대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사라진 이러한 지나간 것들의 가치를 아까워하고 아쉬워함은 현대 문명의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시선은 온전히 동네에서 존경받고 재산께나 있는 문벌좋은 양반네의 손자로서의 대우받고 대접받는 입장에 매몰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천한 것, 상 것들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삶의 팍팍함과 어려움을 읽지 못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문구님이 관촌수필에서 느낀 것 또 한가지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이다. 토속어, 사투리가 가득하여 우리말이지만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은 작품인데, 우리말의 어휘가 이렇게 풍부했나 싶을 정도로 놀랍니다. 이 책은 다시 한 번 사전을 옆에 두고 읽으면서, 찾은 어휘들을 노트해 가면서 읽고 싶은 작품이다. 또한 이문구님의 표현 또한 감탄스럽다. 곳곳에 암초처럼 드러난 아름다운 표현들은 차마 소설이나 수필이라기 보다는 시라고 해야 올음직할 정도이다. 받드시 다시 한 번 읽을 것이다.


  

'읽은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숲  (0) 2016.12.15
열하일기  (0) 2016.12.15
김승옥의 무진기행  (0) 2016.09.05
김용택 선생님의 글쓰기 학교 - 뭘써요 뭘 쓰라고요?  (0) 2016.09.05
한국건축의 모든 것 - 죽서루  (0) 2016.08.02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군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는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그 바람 속에는, 신선한 햇볕과 아직 사람들의 땀에 밴 살갗을 스쳐 보지 않았다는 천진스러운 저온, 그리고 지금 버스가 달리고 있는 길을 에워싸며 버스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산줄기의 저편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소금기, 그런 것들이 이상스레 한데 어울리면서 녹아 있었다. 햇볕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가지만 합성해서 수면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약방의 진열장안에 있는 어떠한 약보다도 가장 상쾌한 약이 될 것이고..."


김승옥식 표현법이 당시 문인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작금의 문학에 비하여도 그 현대적인 감각이 결코 뒤 떨어지지 않는 글 솜씨다. 무진기행을 읽으면서 곳곳에 펼쳐지는 그의 섬세한 감성과 표현에 새삼 놀란다. 하지만 김승옥이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대답할 말문이 막힌다. 


이제 그의 글을 돌이켜 보면서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찾아 본다. 먼저 이 주인공 윤희중, 그의 이름은 단 한 번 나온다. 어쨌든 그는 무진 출신으로는 드물게 서울에서 출세를 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자수성가한 입지적인 사람은 아니다. 사랑하던 여인과 헤어지고 난 후 부자집 과부에게 장가들어 큰 제약회사 간사가 되었다. 아마 돈 많은 과부는 겉치레를 멋드러지게 만들어줄 그런 번드르한 인물이 필요했나 보다. 능력도 결단력도 없지만 서울 남자의 이미지가 필요했겠지. 그의 이력중에 빛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한 때 독서광이었다는 것 정도. 그에게서는 나약함이 배여있다. 625 전쟁 때는 징집되지 않으려고 골방에 숨어 있었다. 덕분에 공산군으로 징발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무진이 국군에 의해 수복된 후 선배들과 친구들이 학도병으로 전선을 향해 갈 때, 그리고 그들의 전사통지서가 고향에 도착할 때에도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비록 그의 어머니가 만류하는 통에 그랬겠지만, 그는 뛰쳐나가 친구들과 함께 조국을 위해 싸우려는 간절한 마음에도 떨쳐 일어서지 못하고 그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그는 서울에서 뭔가 실패할 때면 어김없이 무진으로 찾아들곤 했다. 무진에 와서는 독한 담배냄새 배이도록 골방에만 쳐 박혀 있었다. 뭔가 일을 해결하기 위한 몸짓이나 생각, 결단은 그와는 거리가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여인이 떠날 때도 잡지 못했으리라. 이러함에도 주위의 지원속에 떳떳한 성공인으로서의 이미지를 갖추고, 주위에서도 그렇게 인정해 주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하인숙, 무진중학교의 음악선생, 무진에서 성공한 두 사람중 한 사람인 세무서장인 조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여자, 하지만 조씨는 그냥 그녀를 노리개로만 여긴다. 같은 학교의 선생인 선량한 박선생이 좋아하던 여자, 그 여자는 박선생을 꽁생원같다고 한다. 주인공에게 자기를 서울로 데려가 달라던 여자, 그 부탁의 댓가로 몸을 바친 것일까? 그 여자는 바닷가에 있던 한 때 서울 남자가 젊은 시절 폐병에 들었을 때 하숙하였던 집에서 몸을 허락한다. 그는, 칼을 빼앗지 않으면 절망에 사로잡혀 찌를 사람처럼, 조바심을 느끼던 여자에게서 조바심을 빼앗아 버렸다. 조바심을 빼앗긴 여자는 서울로 가지 않겠다고 하고, 서울 남자는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끝내 그 여자를 서울로 데려가겠다고 하는데, 다 거짓말이다. 당장 그 때는 거짓이 아니었겠지만, 어차피 이런 부류의 사람이란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지는 못하는 법. 그게 바로 그다.

 

급히 상경하라는 아내의 전보에 또 다시 움직이는 그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힘이 없다. 하인숙에게 남기는 편지, 지금 당장은 같이 올라갈 수 없지만, 언제가는 그녀를 서울로 부를 것이라는 편지, 그리고 사랑한다는 편지는 결국 그녀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찢어버렸다. 도대체 그는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진 기행의 키워드는 안개, 모든 것이 안개 속에 뿌옇게 사라져 버린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되어 버리고 없다.

수치도, 책임도 무책임도 모든 것이 유배되어 버리고 없는 세상, 그 세상이 무진이다.



자살한 여자, 술집작부, 독해서 죽을 것 같지 않았던 여자, 이 여자의 죽음을 지켜 주고 있었던 불면의 밤, 이 남자는 자신을 대단한 인물로 생각하는가 보다. 생면부지의 여자가 술집 여자가 자살하던 밤 자신이 잠 못들어 하던 것을 어찌 그 여자를 지켜주기 위해 그랬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 여자가 죽지못하도록 막지도 못한 남자이면서...길거리에서 봉변을 당하고 있던 미친 여자를 구해주지도 못했었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우지도 못하고 숨어 있었지. 1년동안 폐병을 고치기 위해 바닷가의 집에서 하숙을 하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쓸쓸한 느낌을 엽서에 써서 사방으로 보내는 것 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산소에 들러 이슬비 내리는 산소 앞에서 절을 한다. 긴 풀을 뽑는다. 그는 태어날 때 어머니에게 빚졌을 뿐 아니라 전쟁의 위험에서도 그의 어머니 덕에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도대체 뭔가? 어머니가 죽고 난 후 폐병이 든 것은 그가 어머니 없이 무엇이라도 제대로 해 낼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일까? 


개구리 울음 소리가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로 화하는 청각이 시각으로 변하는 이상한 현상. 개구리 울음이라고 답하며 하늘의 별들을 쳐다 본다. 그리고는 또렷이 깨닫는다. 나와 별 사이의 거리를, 그리고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그는 홀로이다.


이런 인간상, 김승옥 자신의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당시를 살아가던 지식인의 나약한 모습이 다 이랬을까?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세상을 버릴 수도 없고, 그냥 세상에 기대어 살아가는 기생충같은 모습의 지식인들의 모습을 슬픈 눈길로 바라보는 그런 이야기?

김용택/ 한솔수북


시 쓰라.

뭘 써요?

시 쓰라고.

뭘 써요?

시 써서 내라고!

네.

제목을 뭘 써요?

니 맘대로 해야지.

뭘 쓰라고요?

니 맘대로 쓰라고.

뭘 쓰라고요?

한 번만 더하면 죽는다.


<초등2 문성민>



글은 이렇게 자신이 겪은 한 순간을 붙잡아 글로 옮겨 보는 것! 글쓰기의 시작이다.


풀꽃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주위에 있는 것들을 보세요. 자기 자신을 보세요. 자세히 들여다 보세요. 오래 들여다 보세요. 자꾸 보면 예쁠 거예요.'

글을 쓰려면 무언가를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무엇가에게 마음을 주어야 한다. 그것이 내 마음 속에 들어온다. 내 것이 된다. 관계가 형성된다. 갈등이 생긴다.

갈등을 이겨낸 조화로운 세상을 생각하고 꿈꾼다. 이런 생각과 꿈과 논리적으로 정리하면 글이 된다. 

이렇게 태어난 글이 다른 사람의 공감을 얻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면 좋은 글이다. 


아이들의 글쓰기를 위해 쓴 글 같으나 쉽지 않다.

아이들은 김용택님의 맥락을 이해할까?

아이들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나 보다. 내가.



'읽은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문구의 관촌수필  (0) 2016.12.13
김승옥의 무진기행  (0) 2016.09.05
한국건축의 모든 것 - 죽서루  (0) 2016.08.02
처음 읽는 한문 - 계몽편/동몽선습  (0) 2016.07.20
도덕경 읽는 즐거움  (0) 2016.07.03

한국건축의 모든 것 - 죽서루 / 이희봉 지음/ 한국학술정보



태백산맥에서 발원한 물길은 오십구비를 돌아 삼척에 이르러 깍아지른 벼랑에 부딪히며 휘돌아 동해로 흘러든다. 이 벼랑가에 바짝 붙어 서 있는 누정 죽서루.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죽장사'라는 옛 절의 서쪽에 있었다고 해서 죽서루라 불린다. 죽장사는 대밭에 둘러 싸인 절이란 뜻인데, 아마 그 절은 없어도 아직도 대밭은 남아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 건축된 죽서루는 조선시대 들어서서 삼척도호부 객사 부설 누정으로 역할을 하였다.


죽서루에서는 관청에서 주관하는 각종 연회가 열렸을 것이다. 아름다운 여인들의 노래와 춤, 그리고 술에 취한 선비들은 다시 한 번 죽서루 주위의 경관에 취했을 것이다. 서쪽의 아찔한 벼랑 아래를 내려다 보면 깊고도 푸른 오십천 물길, 그 맑은 물속엔 물고기들이 노닐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면 개울 건너편에 넓게 펼쳐진 백사장, 그리고 그 너머로 옹기종기 마을이 정겹게 보인다. 북쪽으로 비스듬히 시선을 돌리면 흘러내려오는 오십천 개울물이 한 눈에 들어오고 멀리 두타산 자락이 아련하게 보인다. 절벽 반대편 동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멀리 봉황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은 관동팔경 죽서루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이희봉님은 죽서루를 매개체로 하여 '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현재 건축은 공학으로 분류되어 있다. 하지만 건축은 공학이라는 편협한 테두리를 벗어나 전방위적으로 보아야 한다. 건축물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공간이기에 사람이 살아가는 삶과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건축은 단지 건물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 건축학은 근본부터 인문학과 공학과 예술의 융합체였다. 건축이란 문화이다. 


이희봉님이 죽서루를 바라보는 시각은 머리말에 여실히 드러난다. 


이 책은...죽서루라는 자그마한 건물 하나를 가지고 온 세상을 보는 책이다.... 죽서루를 관광 문화 유산 답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층을 꿰뚫어 깊이 보는 책이다. 기존 보아오던 방식, 즉 문화재 안내판이나 학계의 방식을 뒤집는다. 기존 건축계에서 건물을 나무와 기왓장으로 구성된 구조체로 보는 병이 깊다. 세계 모든 건축은 장식이 구조와 통합되어 하나가 된다. 형태와 공간이 합쳐져 건축이 된다. 죽서루의 문양 장식은 사람의 뜻을 담고 공간을 삶을 담고 있다. 설계의도, 설계정신을 본다. 건축은 철학으로부터 나온다....죽서루는 흔히 하듯 밖에서 사진 찍는 감상용 대상물이 아니라 그 속에 사람을 담고 생활을 담는 공간이다. 자연을 내다보고 시를 읊던 건물이다. 노래와 춤이 있고 술마시고 여흥을 즐기던 공간이다. 과거 선조들의 사회가 있고 제도가 들어 있던 공간이다. 사물로만 보는 건축계의 유물론적 죽서루를 넘어 사람을 중심으로 죽서루를 본다.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를 통하여, 그림을 통하여, 또 관아 생활 속에서의 죽서루를 찾아낸다. 건축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총체적 체험이다."


기존 건축계에서는 죽서루가 원래는 5칸 맞배지붕 누정이었는데, 후대에 증축되어 7칸 팔작지붕 누정이 되었다고 본다. 증축설은 5칸의 건축형식과 양쪽 2칸의 건축양식이 다른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있다. 이에 반해 이희봉님은 죽서루가 처음부터 7칸 팔작지붕으로 지어졌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그 주장의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죽서루의 구조에 대한 면밀한 분석, 그리고 죽서루를 그린 조선시대 그림들을 통해 '지어진 형식이 다른 것은 지어진 시대가 다르다는 의미가 아니라 원래 설계 의도에 따라 다른 형식으로 지어진 것이다'고 반박한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여러 조선시대 연회도를 비교 조사한 후 그 분석의 결과를 죽서루에 적용시켜 이 죽서루의 각각의 공간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보여주면서 죽서루의 현재의 형태는 애초부터 의도된 것이었다는 논증이다. 


여러 연회도를 비교해보면 주빈의 자리, 신분이 높은 사대부의 자리, 신분이 낮은 사대부의 자리, 주빈을 보좌하는 시종들의 공간, 잔치의 흥을 돋우는 기생과 무희들의 공간, 악사들의 공간, 호위 병사들의 공간등 신분과 계급에 따른 철저한 공간배치가 드러난다. 이러한 공간배치를 죽서루에 적용하면 7칸 팔작지붕의 누정은 이러한 시대상을 정확히 반영한다. 단지 육안만으로 건축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를 초래할 수 있다. 역사적인 나이를 갖는 건축물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흘러간 시간속에 감추어져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통찰할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하다. 그저 현재라는 공간과 시간의 테두리안에서 남아 있는 건물과 그 구조만을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건물이 지어질 당시의 관습이나 풍습, 사회상등을 고려해야만 그 건축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건축의 모든 것 - 죽서루'를 읽고 옛 한국건축물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기둥, 대들보, 포작(공포), 포대공, 종보, 대공, 종도리, 중도리, 주심도리, 외목도리, 장여, 서까래, 처마, 겹처마, 부연, 추녀, 주두, 첨자, 살미, 소로, 창방, 외기도리, 눈썹천장, 서까래노출천장(연등천장), 우물천장, 맞배지붕, 팔작지붕(합각지붕), 우진각지붕, 모임지붕, 주심포, 다심포, 익공식등 수많은 건축용어들을 알게 되었다.   


어서 죽서루를 찾아보고 알게 된 사실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아니 죽서루가 아니라도 괜찮다. 기와 지붕이 올려져 있는 건물을 보게되면 언제나 고개를 들어 기둥위에 놓여진 대들보와 도리, 그리고 공포를 살펴보고, 천장의 모양을 살펴볼 것이다. 누정을 만나면 이제부터는 반드시 그 안 공간에서 풍류를 즐기는 한량이 되어 기둥사이로 찍히는 풍경에 취해보고 싶다. 예전 안동 병산서원을 들렀을 때, 만대루 기둥 사이에 펼쳐진 풍경이 떠 오른다. 멀찍히 돌아흐르는 강물과 하얀 모래밭, 그리고 우뚝 서 있는 병산의 우뚝선 벼랑이 마치 병풍의 화첩처럼 펼쳐져 있었더랬다. 누정은 밖에서 보는 눈 맛도 맛이려니와 그 안에서 내다 보는 풍경이 누정의 제일 존재 의미임을 잊지 말기.


   

목차


01 시작하면서

02 죽서루 훑어보기

03 라이트의 낙수장과 우리의 죽서루

04 죽서루 건축물 자세히 보기

05 옛 시와 그림의 죽서루

06 현상학의 체험 죽서루

07 유물론자의 죽서루

08 연회도로 본 옛 생활

09 관아 생활을 담은 죽서루

처음 읽는 한문- 계몽편, 동몽선습/ 이재황 지음/ 안나푸르나

 

언제부터일까? 한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초등 6학년 때 친구 따라 신문 배달을 했다. 가까운 곳을 배달했던 나는 먼 지역을 배달하던 친구가 돌아올 때까지 신문지국에서 기다렸다. 

아마 그 때였을 것이다. 신문을 보기 시작한 것이.

 

그 당시 신문은 한자가 많이 섞여 있었다. 한자를 몰랐지만 어쨌든 신문을 더듬 더듬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기억 나는 건 '駐韓美軍'이라는 글자이다. 아마도 네 글자중 한 두 글자는 어떤 영문인지는 몰라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첫 글자 駐는 도통 음도 뜻도 모르는 글자였다. 사실 지금도 그 글자의 음이 '주'라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그것이 '말이 머무르다'란 뜻이란 건 방금 검색해 보고 나서 알게 된 것이다. 

그래도 그 단어가 '주한미군'이란 것을 짐작으로 알 수 있었다. 아뭏든 이렇게 저렇게 끼워 맞춰가면서 신문을 읽었던 옛 기억이 아련하다.

한자에 관심을 가진 것이 그 때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중학교에서 '한문'과목을 공부하면서 기본적인 글자와 '주술'관계니 뭐니 하는 문장의 구성에 대해 배웠다.

누구는 참 싫어하는 과목이기는 했지만 난 적어도 한문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한자를 멋지게 쓰는 것을 좋아해서

낙서를 할 때도 한자 낙서를 좋아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한시가 있다.

 

春水滿四澤 춘수만사택

夏雲多奇峰 하운다기봉

秋月揚明輝 추월양명휘

冬嶺秀孤松 동령수고송

 

봄에 눈이 녹아 흘러든 물이 사방 못에 가득하고

여름에 봉우리를 덮은 구름이 여러 모양이구나

가을 창공에 뜬 달은 밝은 빛을 내 비취고

찬 바람 부는 겨울 언덕위에는 외로운 소나무만 아름답구나

 

 

아마도 중학교 한문시간에 배웠던 시 같은데, 마지막 연은 확실치 않다. 그래도 시 한 수만큼의 관심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 후 사회생활을 하다가 어느 때엔가 한자를 알면 많은 것을 쉽게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실 때 그 한문을 풀어서 설명해 주셨더라면 더 잘 기억할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사 시간에 불상의 종류를 배울 때 나온 '반가사유상 , 이 이름을 외우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뜻도 모르고 그냥 무작정 외웠던 기억이 난다. 

그 의미가 '반만 책상다리를 하고 생각에 잠겨있는 불상'이라는 것만 알았어도, 그렇게 무작정 외우지는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 

뒤 늦게 이런 것을 알게 된 나는 딸아이에게도 한자를 가르치고 싶었다.

 

그리고 나 자신도 한자를 좀 더 많이 알고, 동양의 고전을 원전으로 읽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무위당님의 블로그 '나물먹고 물마시며'에서 천자문도 끝까지 읽어보고, 노자의 도덕경도 접해보면서 한문을 읽고 그 뜻을 파악하는 데 재미가 들렸다.

처음으로 중국어를 공부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중국어 회화, 중국어 문법을 훓어 보기도 했다. 

 

서점에서 '처음 읽는 한문'이란 책을 발견했다.

소설가 김훈님의 추천의 말씀.  "이제 , 이재황 선생이 펴내는 ... 이 책으로 공부할 때 우리는 서당에 갓 입학한 조선 시대의 어린이가 된다. 이슬비에 땅이 젖고 군불에 아랫목이 따뜻해지듯이, 따라가면 저절로 문리가 트이니, 작은 것을 바탕으로 큰 것을 알게 되고 배우면 스스로 즐겁다는 말이 진실로 옳다." 이 말에 홀랑 빠져서 덜컥 가져다가 읽다가 중단하고, 다시 읽기 시작하여 끝을 내게 되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그냥 소설 읽듯이 읽었다. 한자를 외울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한문과 해석을 비교해가며 읽었다. 죽죽 읽었다. 공부는 하지도 않고.

 

한자, 한문. 어렵다. 쉽게 이해되는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어려운 부분은 역시나 어렵다. 글자도 어렵거니와 문맥을 통해서 내용을 파악해야 하는 것도 어렵다.

한자에는 정해진 품사가 없어서 더 어렵다. 한 문장에서 어떤 글자가 명사로 쓰인 것인지 동사로 쓰인 것인지는 순전히 문맥을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라니 더욱 어렵다.

한자의 음은 알지만 뜻을 모르는 경우가 많기도 많다. 음과 뜻 둘 다 모르는 글자도 꽤 있다. 누군가의 말에 "맹자를 100번을 읽으면 문리를 깨친다"고.

그래도 계몽편과 동몽선습을 읽고 나니 간단한 문장은 눈에 들어온다. 반복적으로 한문을 읽다보면 깨치는 것도 있겠지. 

 

갈 길은 먼데, 방향과 방법이 맞는지 모르겠다. 아니라면 그 때 가서 궤도 수정을 해야겠지. 

도덕경 읽는 즐거움/ 박영규 지음/ 이가서


도덕경은 무위당님의 블로그에서 일독한 적이 있다. ☞http://blog.daum.net/taoshi

도덕경의 핵심 내용에 인상은 깊었지만, 그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부분도 많았다. 


도서관에서 서가를 뒤적이던 중 "도덕경 읽는 즐거움"이란 책을 발견하고 머리말을 보니 '노자와의 즐거운 전투를 기억하며'라는 표제가 눈에 띄었다.

게다가 도덕경을 비판적으로 살피면서 노자의 사상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였다. 또한 도덕경의 원문이 실려 있으며

어려운 한자의 음과 뜻을 알려주어 한문 공부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였다. 


제1부는 도덕경을 즐기기 위한 예비지식으로 도덕경에 대한 개관적인 정보, 노자와 공자의 본질적인 차이, 노자 이전의 도가 사상가들, 노자의 제자들, 열자와 장자의 삶과 사상을 다룬다.

제2부는 지식으로 읽는 도덕경으로 1~20장까지의 내용을 세밀하고 해석하면서, 다른 주석서와 비교하고 있다. 또한 다른 종교와 철학을 노자의 사상과 대립시켜 설명하면서 객관적으로 도덕경을 조명하는데 주력했다.

제3부는 명상으로 읽는 도덕경으로 21~37장까지를 다루면서 필자의 잛은 명상을 덧붙여 놓았다.

제4부는 반론으로 읽는 도덕경이란 제목아래 덕경에 해당하는 38~81장까지를 다루고 있다. 각 장 아래 짧은 반론을 제시하는 형식으로 도덕경 내용의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비판적인 눈으로 도덕경을 보도록 하고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생각나는 구절은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외 몇가지 밖에 없다. 

하지만 도덕경에서 노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도'를 따르는 길이 어떠한가를 보여주고자 함이란 것을 알겠다. 

그리고 노자의 '무위사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무위無爲'란 '하지 않음'으로 번역하는데,

이 '무위'란 것이 실상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손을 놓고 되는대로 되라는 식의 태도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뭔가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위'를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 정의하려면 죽어야 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가치있는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일을 하는데 있어, 그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 '무위'가 아닐까? 즉 일을 함에 있어서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위사앙이 아닐런지.

다만 자연의 순리에 맞게끔 일을 해 나가는 것이 '무위자연'사상일 것이다. 이렇게 일을 순리대로 자연의 도리에 맞게 해 나가는 행위를 '위무위爲無爲'일 것이다.

이런 '무위자연' 또는 '위무위'를 실행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시된 것이 자신을 한껏 낮추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강요받지 않고 스스로 일을 하게끔 하라는 것일테다. 물론 일을 잘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 박영규님의 도덕경 연구는 초반부에 세심히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그의 도덕경 비판은 노자 사상의 올바른 이해의 부족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노자의 생각의 틀과 박영규님의 생각의 틀은 상당히 달르다는 것을 느낀다. 서양철학의 영향 아래 있는 우리 시대의 생각의 틀은 이분법적이며 논리적인 면이 강하다. 하지만 동양사상을 서양사상의 틀에 따라 논하는 것 자체가 어폐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한 예로 '위爲'라는 글자 하나가 문맥에서 갖는 의미가 각각 다르다. 그러나 서양학문의 전제에서 본다면 두 개의 다른 개념에 하나의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논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아마도 도덕경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러함에 있는 것은 아닐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