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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도나휴 지음/ 고상숙 옮김/ 김영사


<천국의 소년>이란 소설을 추천받았다. 소설의 곳곳에 수학이 나온다고 하며, 추천받은 책이었다. 

북한에 살고 있던 자폐증을 앓지만 수학에는 천재적인 소질은 지닌 한 소년의 이야기였다. 이 소년은 탈북하여 이곳 저곳을 떠돌다 나중에는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밀입국하게 된다. 이 때 사막을 건너 미국으로 밀입국하게 되는데, 이 소년은 전에 읽었던 <사막을 건너는 방법>중 첫번째를 이용한다. 지도를 보지말고 나침반을 보아라.


이 때 알게 된 책이었는데, F1963의 yes24 중고서점을 어슬렁거리다 딱 그 책이 눈에 띄였다. 다른 두권의 책과 함께 아주 저렴하게 사와서 보았는데, 그리 인상적이지는 않다. 스티브 도나휴란 사람이 친구들과 어울려 사하라 북쪽에서 사하라를 지나 사하라 남쪽에 이르기까지의 자동차 여행을 모티브로 하여 거기서 얻었던 여행의 포인트를 인생의 사막에 비유하면서 사막과 같은 삶을 만날 때 어떻게 해야할 지를 조언해 주는 형식의 글이다.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과는 다른 사막 횡단법. 산을 오를 때는 정상 즉 목표가 눈에 보이지만, 사막에서는 길도 없고 그 목표가 보이질 않는다. 삶을 살아갈 때에도 아마 이러한 사막과 같은 상황에 처할 때가 있을 것이다. 


첫째, 지도를 보지 말고 나침반을 보아라

둘째, 오아시스가 있을 때마다 쉬어가라

세째, 차가 모래에 빠지며 타이어에 바람을 빼라

네째, 따로, 함께 가기

다섯째, 캠프에서 멀어지기

여섯째, 국경선에서 멈추지 않기


조금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첫째, 사막에서는 수시로 지형이 변하기 때문에 지도를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 정확한 방향을 제시해 주는 나침반을 보아야 한다. 인생에 사막에서도 자신의 속에 있는 나침반의 소리를 들어야한다. 

둘째. 사막을 건너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오아시스를 만나면 언제든지 쉬어가며 에너지를 충전해야 한다. 인생의 사막에서도 마찬가지 쉬어가며 나아가자.

세째, 차가 부드러운 모래에 빠져 나올 수가 없을 때는 타이어에 바람을 빼면 된다. 그러면 흙과 접촉하는 표면적이 커져서 모래속을 빠져 나올 수가 있다. 인생의 사막에서 혹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자존심일랑 버리고 도움을 청하거나 도움의 손길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네째, 따로, 함께 가기. 두 대의 차량이 함께 사막을 건너다 보면 차가 고장나서 수리해야 할 상황이 생긴다. 그럴 때 나머지 한 차도 함께 머물면서 차를 고칠 때 까지 기다린다면 언제 목적지에 도착할 지 모른다. 그럴 때 수리할 차는 수리하고 나머지 차는 목적지를 향해 간다. 그리고 앞서 가던 차가 고장이 나면 그 자리서 수리하고 뒤 따라 오던 차는 또 추월해 간다. 결국 두 대의 차량은 비슷하게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다섯째, 캠프에서 모닥불 앞에 앉아 있으면 사막의 진면목을 볼 수가 없다. 사막 원주민의 초대에 응했더니, 두려움을 극복하고서 초대에 응했더니 또 다른 만남이 이어졌고 즐거운 식사와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 때로는 낯선 상황으로 과감하게 발을 내밀어야 할 때도 있는 법, 그러면 또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음이여.

여섯째, 국경에서 멈추지 않기. 인생의 사막을 건널 때 때로는 어떤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려 할 때가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 한계에서 망설이지 말고 그것을 건너야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가 있다. 


다소 억지로 사막의 경험을 삶에 적용시킨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한 번은 일독할 만한 책이 아닐까?

다른 사람들은 나와는 다른 삶의 영감을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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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변신>이라는 작품을 쓴 작가가 누구지? 카뮈 말고 누구더라, 몇일 전만 해도 카뮈는 생각이 나지 않고 이 소설가 이름만이 생각 났었는데, 

두 사람 자꾸 헷갈린다. 그래 '카프카'다. <변신이야기>를 집어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카프카의 <변신>이 생각났었다.

자고 일어나니 자신이 벌레가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변신이야기>는 오비디우스가 그 때까지 전해져 내려오던 '로마신화'를 정리한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단편적인 이야기만을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그런 이야기들도 서로 이리 저리 얽혀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거의 같은 그리스 신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따로 로마 신화가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지중해의 강자가 된 로마인들은 그들 민족의 기원이 단지 인간이 아니라 신에게까지 이어진다고 주장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신의 후손이기 때문에 이 세계를 다스릴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로마 신화를 다룬 책 제목이 <변신이야기>일까?

로마 신화의 많은 부분들은 신들이 인간으로 변신한 이야기, 또는 인간들이 신의 벌을 받아 동물들로 변신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신의 변신과 인간의 변신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신들은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변신을 시도한다. 

하지만 인간들은 신에 도전한 벌로, 또는 신을 화나게 한 벌로 변신당한다. 


통제되지 않은 인간의 욕망, 오만과 질투가 가져오는 파멸등, 로마 신화에서 교훈을 이끌어내고자 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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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지음/ 박성수 옮김/ 문예출판사


저자 서문

Ⅰ. 문제
1. 종파와 계층
2. 자본주의「정신」
3. 루터의 직업개념ㆍ탐구의 과제

Ⅱ.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윤리
1. 현세적 금욕주의의 종교적 토대
2. 금욕과 자본주의 정신


해설 - 앤터니 기든스
옮긴이의 말



현대 자본주의가 왜 하필이면 서양에서 시작되었을까?

자본주의에 비견할 말한 것들이 동양, 즉 중국이나 인도 또는 이슬람 국가들에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현대 자본주의는 서구 고유의 것으로 인정된다. 왜일까?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은 서구 유럽의 종교적 배경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종교 개혁으로 등장한 프로테스탄스 사상등이 자본주의 정신의 원류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 등장하는 프로테스탄트 종파들은 루터주의, 칼뱅주의, 경건주의, 메소디스트, 청교도, 침례파, 퀘이크교 등이 있다.

칼뱅주의의 예정론과 의인론, 그리고 카톨릭의 비세속적 금욕주의에 대립하는 세속적 금욕주의, 소명으로서의 직업의식등이

어떻게 자본주의 정신으로 연결되는지, 아주 복잡한 논의가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어떻게 예정론과 의인론이 자본주의 정신과 관련이 있을까?

비세속적 금욕주의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합리적 자본주의 정신으로 연결이 될까?


현세적인 프로테스탄스의 금욕은 전력을 다해 재산 낭비적 향락에 반대해 왔고 소비, 특히 사치재 소비를 봉쇄해 버렸다.

반면에 이 금욕은 재화 획득을 전통주의적인 윤리의 장애에서 해방시키는 심리적 결과를 낳았으며, 이익 추구를 합법화시켰을 뿐 아니라 직접 신의 뜻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이익 추구에 대한 질곡을 뚫고 나왔다. 금욕주의는 목적으로서의 부의 추구는 비난받아야할 최악의 것이라 보면서도 직업노동의 열매인 부의 획득은 신의 축복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단하고 지속적이며 체계적인 세속적 직업노동을 최고의 금욕적 수단이자 동시에 거듭난 자와 그 신앙의 진실성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증명이라고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정신이라 부르는 생활관의 확장을 위한 가장 강력한 지렛대이다.

소비의 봉쇄와 영리추구의 해방은 금욕주의적 절약 강박을 통한 자본 형성을 용이하게 한다.

도저히 연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 사이의 관계를 파헤치는 베버의 사고는 꽤 복잡했을 것이다.

아마도 자본주의 정신이 출현하게 된 데는 단순히 종교적 사상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막스 베버는 다른 요인들은 일단 배제한 채 프로테스탄스 정신과 자본주의 정신과의 연결선을 집중적으로 파고 든다.


흥미로운 것은 현대 자본주의에는 그 원류가 되었던 프로테스탄스 정신 즉 종교적인 면이 완전히 빠져 있다는 것이다.


종교 지도자 존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부가 증대될 때마다 종교의 내용이 그만큼 감소되었던 것을 염려한다. 종교는 필연적으로 근면과 절약을 낳을 수 밖에 없는데, 이는 바로 부를 수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가 증대하면 자만과 열정과 세속적 애착이 그 모든 형태로 증가한다. 종교의 형식은 그대로이나 정신은 점차 사라져 간다.

베버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국 순수한 종교적 열광의 정점이 이미 지나간 뒤 신의 왕국에 대한 추구의 투쟁이 점차 냉정한 직업적 덕으로 해소되기 시작하여 종교적 뿌리가 서서히 말라 죽고 공리주의적 현세주의가 나타났다.

막스 베버는 당시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미국에서의 자본주의의 변질에 대해 말한다.


현재 영리 추구가 가장 자유로운 미국에서는 종교적, 윤리적 의미가 박탈당한 영리 추구는 스포츠의 특성인 순수한 경쟁적 열정과 결합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에 근거하여 그는 미래의 자본주의에 대해 예언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래에 이 재화라는 겉껍질 안에서 살 자가 누구인지, 이 엄청난 발전의 마지막에 전혀 새로운 예언자나 혹은 옛 정신과 이상의 강력한 부활이 있을지, 아니면 일종의 발적적인 오만으로 장식된 기계회된 화석화가 있을 지는 누구도 모른다.  만일 후자가 옳다면 이 문화 발전의 최후의 인간은 정신 없는 전문가, 가슴 없는 향락가가 있을 것이다. 이 공허한 인간들은 인류가 전례없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렵게 어렵게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도, 그것도 두 번이나 읽은 후에도 막스 베버의 생각이 정리되지 않던 차에, 마지막 결론부에서 베버는 친절하게도 자신의 논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 주고 있어 다행이었다. 그리고 앤터니 기번스의 해설 부분은 베버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제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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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데이빗 소로우 지음/ 김성 옮김

 

두 번째다. 몇 년전 월든을 처음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지난 번에는 월든 호수 주위의 자연을 묘사한 장면에 마음이 기울었다. 월든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광경은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번에는 소로우의 생각들이 보인다. 삶에 대한 그의 생각들. 삼십이 조금 넘은 나이에 쓴 이 글 속에 인생을 달관한 듯한 태도로 쓴 글, 그것도 동양의 사상에 꽤 기울어져 있는 그의 생각들, 서양식 사고가 채 가시지 않은, 그리고 완전히 동양의 정적인 세계에 스며들지 못한 채 표현된 자연 사상들, 어렴풋이 풋내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로우의 자연사상은 생각할 여지를 많이 던져 준다.

 

편견을 버리기에 너무 늦은 경우란 없다.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나 행동 방식이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 해도 증거없이 믿어서는 안된다.

 

 

소로우는 자연과 함께 하는 무소유의 삶에 대한 편견을 버리기를 요청하고 있다. 경험해 보지도 않고 그저 오래동안 내려오던 생각에 기대어 그러한 삶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소로우는 그 자신이 스스로 그러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실증해 보이기를 원했다. 그것이 월든 호수가에서는 삶을 시작한 이유였다.

 

문명은 가옥을 개량해 왔다. 하나 거기에 사는 인간까지 똑같이 개량하는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는...망원경이나 현미경을 통해 세상을 관찰하는 것은 배울지 모르지만 육안으로 보는 법은 결코 배울 수 없다.

 

 

소로우는 현대 문명에 의문을 표시한다. 아니 더 나아가 회의를 품는다. 과연 현대 문명 속에 사는 인간들은 행복한가? 참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자선과 박애에 관해서...그의 선의는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중에 끝없이 솟아 오르는 맑은 샘물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소로우의 동양 친화적인 사상의 단면이 드러나 있다. 실제로 월든에서는 <논어>에서 여러 번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공자보다는 노자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자신이 선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면에서, 도덕경에 "천지불인天地不仁, 성인불인聖人不仁" 이라는 표현이 생각난다. 無爲무위로서의 선이 아니라 의식적인 선행에 대해서 그는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다. "무의식 중에 끝없이 솟아 오르는 맑은 샘룩과 같은" 선의는 무위적 선을 뜻하는 것일 것이다.

 

사람들은 전쟁으로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밤나무 그릇 하나만으로 족한 그 때면.

 

 

무소유의 사상이 세상에 가득하면 탐욕으로 인해 벌어지는 수많은 갈등과 전쟁이 사라질 것이라는 그의 염원을 표현한 말이다.

 

자신의 내부에서 날마다 동물성이 사멸하고 그 자리에 서서히 신성함이 자리 잡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는 인간은 행복하다. - 월든의 '더 높은 법칙' 가운데

삶이 아무리 초라하더라도 거기에서 얼굴을 돌리지 말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 가난해도 삶을 사랑하길. 구빈원에 들어가 있어도 즐겁고 가슴 뛰는 시간은 있을 것이다. 저녁 노을은 부자의 저택뿐만 아니라 양로원의 유리창도 불게 물들인다. 봄이 오면 위 집 문 앞이건 쌓인 눈이 녹아내리긴 마찬가지다. 평온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한 곳에 살아도 궁전에 있는 것과 다름없는 만족감을 누릴 것이요, 자신을 분기시키는 사상을 품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하지만 소박한 삶에 대한 동경이 그의 글에 진하게 남아 있다. 물론 그것이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일 경우에 말이다. 자연은 물질적 부가 가져다 주지 못하는 것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자연과 함께 하면서 정신적인 삶을 사는 것의 가치를 소로우는 크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소로우의 <자연사상>은 당시에는 환영받지 못했지만, 아니 누구도 거의 관심조차 갖지 않는 삶의 태도였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큰 조명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소로우는 예언자적 삶과 사상을 설파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에 더하여 자연을 아름답고 치밀하게 묘사하는 그의 글은 산문보다는 시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때가 되면 다시 한 번 더 월든을 읽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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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 지음/ 브레히트 학회/ 연극과 인간


묘한 우연이다. 마르크스의 <자본>1권을 읽고 나서 잡은 책이 '브레히트'라니. 브레히트의 사회주의적인 성향과 자본주의에 대한 경멸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도축장의 성 요한나>는 아주 직설적이다.


자본의 끊임없는 탐욕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결국 그 스스로가 탐욕의 희생자가 되는 모순. 거기에 더해 빈민 노동자들은 착취를 당하다가, 쓸모없다 싶으면 그냥 길거리에 내동댕이쳐진다. 당장 먹을 것이 없는 노동자들의 절망, 분노. 폭동을 일으키는 노동자를 사정없이 진압하는 경찰.

빈민 노동자들의 마지막 동아줄이 되려고 하는 종교의 노력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교단을 유지하기 위해 돈이 필요한 종교는 돈을 가진 자들과 타협하려 한다.

구세군  소위 요한나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자본가들은 요한나를 이용하여 사욕을 추구한다. 노동자들은 요한나에 등을 돌리고 폭력적인 방법에 호소한다.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요한나는 아무런 업적도 남기지 못한 채 죽어간다. '성 요한나'로 추앙을 받으면서.


작품의 배경이 '도축장'이란 것은 작가의 복심인 듯하다. 도축장이란 소나 돼지를 잡는 곳이지만, 상징적으로 자본이 난무하여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현장은 마치 빈민 노동자들을 도축하여 이익을 남기려는 곳과 같다는 의미인 듯하다.


다섯마리의 황소의 아이러니한 대사는 노동자들이 할 말을 대신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인간들에게 쓸모 있지 않으면 먹을 것을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청하노라. 소고기를 먹어달라고." 노동자들은 도축장의 짐승과 같은 신세인 것이다. 노동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살아 보려고 하지. 그런데 당신들에게 쓸모 있지 않아서 당신들은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아. 그래서 우리 같은 사내와 여자와 아이는 부탁하는 거요. 우리를 사가라고!"


요안나는 죽어가 면서 이렇게 말한다. "항상 그렇듯이 선함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더 이상 명예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은 그런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거죠. 그래서 천직을 받은 것처럼 나는 억압받은 사람들에게 왔어요. 그러나 결실 없는 선행을 베풀었던 거죠. 감지될 수 없는 신념만을 주었던 겁니다. 난 아무 것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요안나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폭력에 의존하지 않았던 자신의 순진성을 후회하는 말처럼 보인다. 종교적인 신념은 세상을 바꾸기기엔 역부족이다. 요안나가 그토록 기피했던 폭력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동력일지도 모른다고 요안나는 후회하는 것 같다. 이것은 아마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고무하는 말처럼 들린다.


지인이 이야기했다. 마르크스의 인간애, 휴머니즘만은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며, 우리가 들고가야할 유산이라고. 하지만 마르크스의 이론은 공산주의가 붕괴하고 자본주의가 승승장구함으로 결딴이 나 버렸다. 하지만 자본주의 역시 바늘 끝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위태하다. 세상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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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길 출판사




 

멘붕이다. 자본1-1,2를 어렵게 읽었다. 매일 조금씩 읽어서 4주만에 다 읽었다. 결말이 조금 미지근하다 생각했는데, 출판사를 검색하느라 알아보니 2권, 3-1권, 3-2권이 남아 있다. 잠깐 고민에 빠진다. 자본의 맛을 보긴 보았는데, 그럼 나머지 세 권을 어떻게 하지?


고민은 잠시 접어두고 읽은 것을 돌아보자.

1818년 독일에서 태어난 마르크스는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대학에서 교수가 되고 싶었지만 반정부 활동으로 인해 교수로 임용되지 못하고 결국 프랑스로 추방된다. 독일 대학에서는 헤겔을 배웠다면 프랑스에서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와 엥겔스를 만난다. 나중에 프랑스에서도 추방된 마르크스는 경제학의 본거지 영국에서 <자본>을 위한 기초를 놓는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완결하지 못하고 죽자,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남긴 자료를 가지고 나머지 <자본>을 완성한다.


마르크스의 저서 <자본>은 경제학을 다룬다. 영국에서 시작된 경제학은 '어떻게 하면 부를 창출할 수 있는가?' 쉽게 말하자면 '돈 버는 방법'에 관한 학문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경제학 저서 <자본>은 접근해 들어가는 방향이 다르다. 가치는 노동에서 산출된다는 고전경제학의 시각에서 보면 노동자는 부의 창출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죽도록 일을 하는' 노동자는 '지독한 가난'에 허덕이는 이상한 현상이 발견된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의 불만이 극에 달하고 이를 뒤엎으려는 혁명이 유럽을 휩쓸지만 이 모든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르크스는 혁명의 실패 요인을 분석하면서 어떻게 노동자 혁명을 완수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고 이를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가운데 '죽도록 일하는 노동자들이 왜 그토록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는지 근본부터 파고 들면서 혁명의 당위성이나 방법론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물이 그의 저서 <자본>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과학적 방법에 기대고 있다. 등가교환, 사용가치, 교환가치등의 개념에 근거하여 어떻게 잉여가치가 생성되는지 논리적으로 파고든다. 등가교환의 원리에 의하면 교환에 의해서는 잉여가치(이윤, 이익)가 생길 수 없다. 그것은 등가교환 즉 같은 가치를 가진 것들의 교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본으로 전환되는 잉여가치는 어디서 생기는가? 그것은 생산과정에서 생긴다. 자본자는 노동자에게서 노동력을 구입한다. 노동자는 돈을 받고 자신의 노동력을 판다. 자본자가 노동력을 구입할 때는 노동자가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만한 가치를 지불한다. 하루에 6시간을 일하여 자신과 가족의 생활비를 벌 수 있다면 그 6시간의 가치에 해당하는 임금을 지불하고 노동력을 구매한다. 하지만 노동력을 구매한 후 자본가가 6시간을 노동만을 요구한다면 자본가에게는 남는 것이 없다.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6시간 이상을 노동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6시간을 초과한 만큼의 노동은 잉여가치가 되어 자본가에게 돌아가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자본가들에 의한 노동자의 노동 착취라고 부른다. 결국 잉여가치는 착취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 발전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은 그 착취가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예시를 들어가며 보여준다. 노동빈민들에 대한 연민, 탐욕적인 자본가들에 대한 분노가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상황들이 연이어 서술된다. 정치적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그런 가운데서도 노동제한 연령 및 노동 시간의 제한등 여러가지 조치가 취해지고, 공장법이라는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한 시도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권력을 잡고 법을 만들고 재판을 하는 당사자들이 이미 자본가들인 이상 이런 문제가 제대로 해결될 리가 없다. 


또한 <자본>에서는 자본주의가 시작된 역사적 경위도 파고 든다. 자본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자행되었던 대규모의 사기, 강탈, 폭력적인 상황등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주의는 결국 내부의 모순으로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다. 경고가 아니라 이것은 하나의 자연 법칙처럼 어김없이 발생할 일이라고 예언을 한다. 민중에 대한 자본의 수탈이 자본주의의 성격이라면 민중에 의한 자본의 수탈은 자본주의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언.


마르크스의 예언은 과학적 기초위에 놓인 예측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예측은 지금 현재의 상황에 근거해 볼 때 실패한 것 같다. 자본주의의 붕괴보다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혁명으로 세워진 공산주의의 붕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예언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닌 듯하다. 자본의 붕괴가 미래에 발생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기다려 봐야한다. 아마도 현재 진행중인 자본의 축적이 어느 한계에 이르면 어떤 형태로든지 자본의 붕괴가 일어날 것 같기는 하다. 그 방법은 알 수 없지만 자체적인 모순이 있는한 그 모순이 극에 달할 때는 뭔가 일이 벌어지게 마련이니까.


아직 고민이다. 자본 2, 3권을 읽어야 할까? 말까?  


내가 이 책을 읽는다고 하자 한 지인은 이런 말을 하였다.

"이십대에 이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가 되겠지만, 오십대에 이 책을 읽겠다고 하는 것도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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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더스의 개

위다 지음/ 김양미 옮김/ 김지혁 그림/ 인디고


 

 

가난한 자의 슬픔이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그려진 수작.


나이가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 예한 다스는 딸이 죽으면서 남긴 손자 넬로와 함께 산다.

또한 잔혹한 주인 밑에서 일하다 쓰러진 후 주인에게 버림을 받은 파트라슈는 할아버지의 극진한 돌봄으로 회복되어 행복한 가족의 일원이 된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 거동을 못하는 할아버지 대신 넬로는 파트라슈와 함께 우유통을 실은 초록색 수레를 끌며 우유를 배달한다. 

넬로가 간절히 소망하는 바가 있다. "안트베르펜 성당(성모 대성당)에 걸려 있는 루벤스의 그림을 보고 싶다."

돈 많은 사람만이 볼 수 있도록 천으로 항상 가려져 있는 <십자가에 올려지는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그 작품을 보고 싶다.


넬로는 아무도 모르게 자기만의 꿈- 루벤스와 같은 위대한 화가가 되는 꿈을 키워나간다. .

아무도 모른다. 다만 파트라슈만이 알 뿐,


어느날 넬로와 친하게 지내는 여자 아이 알루아의 모습을 그리다가 알루아의 아버지 코제씨에게 들킨다.

코제씨는 넬로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만 그림쟁이가 되려고 하는 넬로와 알루아가 사귀는 것을 반대한다.

그 이후 코제씨는 알루아와 넬로 사이를 억지로 떼어 놓는다. 


넬로는 아무도 모르게 헛간에서 여러 날을 공들여 목탄화를 그린다.

미술대회에서 상을 타게 되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도 벗어나고, 알루아와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온 정성을 다 쏟아 붓는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넬로는 코제씨 헛간에 불을 질렀다는 모함을 받고 마을 사람들의 차가운 냉대에 부딪히게 된다.

게다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할아버지는 숨을 거둔다. 

설상가상으로 할아버지 장례식에 몇 푼 안되는 돈을 다 써버린 넬로에게 오두막집 주인은 집세를 내지 못하면 나가라고 윽박지른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미술 대회 발표일이다.

기대를 걸었던 미술 대회에서 상을 받지 못하게 된 넬로에게는 희망이 사라졌다. 


눈이 펑펑 내리는 밤, 차가운 바람이 휭휭 부는 밤, 허기진 넬로와 파트라슈는 갈 곳이 없다.

추위보다는 내일을 가늠할 수 없는,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이 더 무섭다, 


눈길을 방황하던 중 파트라슈가 눈 속에서 거액의 돈이 들어있는 지갑을 발견한다.

코제씨의 지갑이다. 넬로는 코제씨 집을 찾아가 지갑을 돌려준다. 

그 돈이 없으면 코제씨는 파산이다. 코제씨는 눈보라치는 밤에 다시 지갑을 찾으러 나섰다는 것이다.

넬로는 늙고 힘없고 가여운 파트라슈를 알로아 집에 부탁하고는 알루아와 그녀의 엄마가 잡을 새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지갑을 찾지 못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돌아온 코제씨는 넬로가 지갑을 돌려주고 갔다는 말에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런 착한 아이를 따돌리고 모함을 했으니... 코제씨는 다음 날 넬로를 찾아 사과하고 넬로를 잘 돌봐 줄 것이라고 마음 속으로 다짐한다.


한편 알루아 집에서 몰래 빠져 나온 파트라슈는 넬로의 냄새를 더듬어 그를 찾아 성모대성당에 온다.

넬로는 차가운 성당 바닥에 쓰러져 있다. 배고픔과 추위와 낙담에 만신창이가 되어 죽어가고 있는 넬로의 눈 앞에 성당 벽에 걸린 천이 거두어지고,

달빛에 환하게 빛나고 있는 루벤스의 작품이 나타난다. 

넬로가 그토록 소망하던 하나의 꿈.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은 루벤스의 걸작 <십자가에 올려지는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가 올려다 보이는 대성당 바닥에

차갑게 숨을 거둔 넬로와 파트라슈를 발견한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냉정함에 울음을 삼켰고, 코제씨는 찢어지는 아픔을 견딜 수가 없다. 

뒤 늦게 넬로의 미술적 재능을 알게 된 유명한 화가가 넬로를 찾아 온다. 그러나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렸다.

  

이 이야기의 아름다운 슬픔 속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숨겨져 있다.  

썩어빠진 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그것이다.

"동물에게 지옥의 고통을 안겨 주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는 한 방법이었다."

이 말은 신교와 구교의 심한 대립과 갈등으로 기독교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 냉소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안트베르펜 성당의 루벤스의 그림을 가리고 있던 천은 돈의 힘으로만 걷어질 수 있다는 사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묘사한 그림 앞에서 죽어가는 넬로와 파트라슈의 모습.

그리스도가 태어났다고 믿어지는 크리스마스날 발견된 시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생각이 응결되어 있는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가난하지만 선량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온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사랑은 다 어디로 갔는가?

그리스도는 다시 죽었는가, 소년과 함께?

오늘날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잔인하게도 아름다운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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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여러 국민의 부의 성질과 원인에 대한 연구)

국부론 / 애덤 스미스/ 유인호 옮김/ 동서문화사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하면 가장 먼저 떠 오르는 어구가 있다. "보이지 않는 손". 그런데 1004페이지에 달하는 이 두꺼운 책에서는 단 한 번 그 표현이 나온다.

그는 다른 많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의 의도 속에는 전혀 없었던 목적을 추진하게 되는 셈이다. (p456)

국부론의 저변에 흐르는 사상이 바로 "보이지 않는 손"이다. 자유주의에 입각한 경제론의 핵심이 바로 "보이지 않는 손"이다.

각자가 스스로의 이익을 자유롭게 추구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경제가 발전하고 부가 축적된다는 이야기이다. 각자는 그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뿐이지만, 이로 인해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이 달성된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밀림속의 생태계의 균형과 같은 것이랄 수도 있겠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눈에 들어온 이 책을 읽으면서, 괜히 이 책을 빌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에 크게 관심도 없었거니와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라서 읽기에 난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재미있는 책도 아니다. 하지만 고전파 경제학의 시조인 스미스의 저작을 읽는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면서 가볍게 읽었다. 결과 이 책에 대한 이해도는 채 60%가 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그래 왔듯이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이 책의 구상>부분을 다시 들여다 보면서 내가 읽었던 내용이 어떤 것이었나 다시 확인하는 정도에서 그치기로 한다.


1편: 수렵민과 어로민으로 이루어진 미개한 민족에 있어서는 일할 수 있는 개인은 많든 적든 유용한 노동에 종사한다. 그러나 그러한 민족의 가난의 참상이란 비참할 정도이다. 이와 반대로 문명이 개화하여 번영하고 있는 여러 민족들은 전혀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일하는 사람에 비해 10배, 때로는 100배나 되는 노동 생산물을 소비하고 있다. 그래도 그 사회의 전체 노동 생산물이 매우 많으므로  모든 사람든 그것을 충분하게 공급받는다. 이렇게 노동 생산력이 커지게 된 원인과 노동 생산물이 그 사회의 다양한 계층과 다양한 상태의 사람들에게 자연히 분배되는 순서가 1편에서 다루어진다.


2편: 노동의 연간 공급이 충분하가 부족한가하는 것은 유용한 노동에 해마다 종사하는 사람 수와 종사하지 않는 사람 수의 비율에 좌우된다. 그리고 유용하고 생산적인 노동자의 수는 어디서나 그들을 일할 수 있게 하는 자본의 양과 그것이 사용되는 특정한 방법에 비례한다. 그러므로 제 2편은 자본의 성질과 그것이 차츰 축적되어 가는 방법,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의 차이에 따라 그것이 가동시키는 노동의 양의 차이를 다룬다.


3편: 노동의 일반적인 지도 또는 관리에 있어서 매우 다양한 정책들이 있어 왓다. 농촌의 산업을 비정상적으로 장려하는 정책도 있고, 도시의 산업을 장려하는 정책도 있었다. 모든 종류의 산업을 평등하고 공평하게 다루어 온 국민은 거의 드물이다. 이러한 정책을 도입하고 확립한 것으로 생각되는 여러 사정이 3편의 주요내용이다.


4편: 여러가지 계획들과 정책들은 사회의 전반적인 복지에 대한 영향에 대해 전혀 예견하거나 고려하지 않고 도입된 것이었다. 그래도 그런 계획은 경제학의 매우 다양한 이론을 성립시켰으며, 그 가운데 어떤 것은 도시에서 영위되는 산업의 중요성을 지니치게 크게 생각하고, 또 어떤 것은 농촌에서 영위되는 산업의 중요성을 지니체게 크게 생각했다. 그러한 이론들은 학식있는 사람들의 의견뿐만 아니라, 군주나 주구건 국가의 정치 방침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4편에서는 이런 여러가지 이론과, 그 이론들이 여러 시대와 국민들에게 미친 중요한 영향을 설명한다.


5편: 주권자 또는 공동사회가 필요로 하는 비용은 무엇인가, 또 그런 비용가운 데 어떤 것이 사회 전체의 일반적인 갹출에 의해 지불되어야 하고, 또 어떤 것이 그 사회의 특정한 구성원들의 갹출에 의해 지불되어야 하는가? 사회 전체가 부담해야 하는 비용을 사회 전체에 부담시키게 하는 데는 어떤 방법들이 있으며, 그런 방법들이 각각 가진 주요 장점과 단점은 어떤 것인가? 근대의 거의 모든 정부가 이 수입의 어떤 부분을 담보로 넣어 채무 계약을 맺게 된 이유와 원인은 무엇이며, 또 그 채무가 진정한 부, 즉 사회의 토지와 노동의 연간 생산물에 대해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점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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