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즈 선정 100권 중 <서부전선 이상없다>

레마르크 지음/ 열린책들



일차세계대전, 독일과 프랑스가 대치한 최전선, 서부전선. 포격전으로 포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전장에서 학도병으로 참전한 독일 병사 파울보히머. 나이는 19세.

집에는 암으로 죽어가는 어머니, 가족은 배급품으로 근근히 목숨을 이어가고 있고, 전장에서도 병사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싸운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포탄으로 참호는 짓이겨져 평평해지고 곳곳에서 찢겨나가는 살점과 몸통들, 튀어오르는 파편들, 허뿌옇게 일어나는 포연과 먼지속에 누가 누군지도 구별할 수도 없고, 벙커에 숨을 죽이고 있는 병사들. 어떤 병사는 미쳐 날뛰고, 동료들은 그를 때려 눕힌다. 어떤 이는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으로 달려나간다. 전장에 서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그 아우성이며, 아수라장이며, 그 핏빛이며, 그 미쳐 날뛰는 포탄이며. 전쟁을 기획하는 정치가들은 모른다. 안전한 후방에서 애국심이 어떠니 저떠니 떠드는 사람은 모른다. 다만 전장에서 전우를 잃고 자신도 죽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온 몸이 얼어 붙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전쟁이란 말인가? 저 넘어 프랑스 군인들은 그들의 조국 프랑스를 위해 싸우고 있고, 이쪽 독일 군인들은 조국 독일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들도 똑 같은 사람일 뿐인데, 왜 이렇게 싸워야 하는가? 파울 보이머는 알 수가 없다. 그런 가운데 함께 했던 전우들은 하나 둘 죽어간다. 가장 절친한 전우였던 카친스키마저 죽는다. 곧 전쟁이 끝날 것이란 말이 들리는데, 그 새를 못 참아서 죽다니 허망하다. 파울 보이머도 죽는다. 그가 죽는 날, 서부전선에서 사령부로 다음과 같은 전신이 날라간다. "서부전선 이상없다."


<수용소군도>를 읽은 후 읽게 된 <서부전선 이상없다>. 기분이 더럽다. 화가 난다. 슬프다. 인간세계는 조금씩 변하고 있는듯 하나 그 뿌리에서는 변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 누구를 위해 싸우는 것인가? 누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일까? 난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일까? 더 이상 다수가 하는대로 따라하기는 싫다. 더 이상 의심없이 위에서 시키는대로 하고 싶지가 않다. 더 이상 오랫동안 전통이나 관습이란 명목으로 <해야한다>는 당위성에 기대어 요구하는 바대로 하고 싶지 않다. 나의 양심과 나의 마음이 하라고 하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 저항하고 싶다. 온 세상의 잘못된 기득권에, 온 세상의 약한 자를 억압하는 힘센 자들에게 저항하고 깨부수고 싶다. 나는 파울보히머처럼 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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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지 선정 100권중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



좋은 책이란 어떤 책일까?  마음 속에 화학적 변화가 일으키는 책, 더 나은 인간다운 삶을 향해 나아가도록 밀어붙이는 책. '책은 도끼다'라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그런데 동양고전과 서양고전은 사뭇 다르다. 마음 속에서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같다. 하지만 폭발력이 향하는 방향은 다르다.

동양고전의 힘은 자기 자신의 내부를 향한다. 서양고전의 힘은 외부 세계를 겨냥한다. 


동양고전을 읽고나면 행복은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로 인해 스스로 수양하려는 마음을 갖게 한다. 하지만 서양고전을 읽고 나면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문제가 많은 세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물안의 개구리는 우물이 세계의 전부인 줄 알지만, 그리고 우물 밖의 광대한 세계가 있음을 모르는 것처럼

서양고전을 읽기 전의 나는 바로 그러한 개구리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서양 고전을 읽고 나면 다른 세계를 꿈꾸는 사람이 된다. 적어도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100권의 책은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다. 수용소 군도도 그렇다.


스탈린이 소련의 권력을 잡은 후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인권 유린. 불시의 체포, 왜 기관원들은 항상 밤에 체포하는 것일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야 누군가가 체포되어 갔다는 것을 알 뿐이다. 체포되어 가는 사람은 저항없이 체포된다. 왜 내가 체포되는 것인지 알지도 못하고, 아마도 심문이나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무죄가 밝혀질 것이라고 믿으면서 순순히 체포되어 간다. 그러나 무죄로 풀려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도 스탈린 자신도 체포되면 그 법망을 빠져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체포되어 가는 사람의 부류는 다양하다. 하층민으로 부터 상층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솔제니친 자신도 촉망받던 포병대위가 아니었던가? 엄청난 사람들이 체포되고 심문받고 10년형을 선고 받고 수용된다. 끊임없는 유배의 흐름이 계속된다. 이런 일은 단순히 기관의 존속을 위해 자행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도 든다.  


솔제니친은 가장 정당한 혁명으로 세워진 정부가 가장 부당한 방법으로 국민을 괴롭히고 있다는 참혹한 사실 앞에서 그 진실이 진실로 느껴지지 않는다. 솔제니친은 차라리 풍자를 통해 권력의 검은 마수를 표현한다.


심문은 고문으로 이어지고, 고문은 사람을 다치게 한다. 그래서 심문관 옆에서 반드시 의사가 함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지 않은 피의자가 참혹하게 두들겨 맞아 정신을 잃는다. 옆에 있던 의사는 재빨리 피의자의 상태를 확인한다. 눈을 뒤집어 보고 맥박을 잡아 보기도 한다. 다행이 기절한 피의자의 맥박은 정상이다. 의사가 말한다. "정상입니다. 더 때려도 됩니다."


조국 소련을 위해 싸웠던 병사들이 불쌍하다. 싸우다 포로로 잡힌 소련의 병사들은 조국으로부터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힌다. 그들은 조국을 배반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조국에 의해 배신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배신자들로 불리고 그런 대우를 받는다. 포로 수용소를 탈출하여 조국으로 돌아와 귀대 신고를 한 병사가 심문을 받는다. 어떻게 삼엄한 경비를 뚫고 탈출할 수 있었는지, 탈출한 병사들이 거의 없는데 어떻게 당신만이 탈출할 수 있었을까? 그는 독일과 내통한 스파이다. 더러운 배신자 같으니라고.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끝난 후, 스탈린의 잔혹한 숙청에 동원되었고, 참여했던 이런 바 부역자들을 색출하고 벌을 주는 일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떵떵거리고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들 중 제대로 벌을 받은 사람은 없다. 이른바 적폐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 전범재판에서는 수많은 나치 전범들이 재판에 넘겨진다. 그러나 스탈린의 공포정치에 편승한 그 누구도 제대로 재판에 넘겨져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생각이 든다. 잘못한 자들을 색출하여 벌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후대에도 이런 것들이 전례가 되어 지나간 잘못을 벌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뿌리를 내리게 되면, 과연 정의로운 나라가 유지되기나 할까? 똑 같은 잘못들이 계속 반복되지나 않을까?


잘못된 권력이 무섭다. 그리고 잘못된 권력에 대해 소리치지 못하는, 항거하지 않는 것도 무섭다. 아마도 잘못된 권력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항거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잘못된 권력이 계속 권력을 가지도록 묵인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항거하지 않음으로 오게되는 온갖 고통은 항거하지 못한, 아니 항거하지 아니한 자들의 몫이다.


<수용소 군도>를 읽고 기분이 나빠졌다. 화가 났다. 세상은 변해야 하는데, 변할 구석은 많은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나는 무엇을 해야하나? 무언가를 하고 싶다. 나의 화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마음 속에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조그만 폭발을 일게 했다는 점에서 <수용소군도>는 제 역할을 다 했다고 느껴진다. 그러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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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타인벡 지음/ 정희성 옮김/


 

아담은 카인과 아벨을 낳았다. 

카인은 하느님께 농산물을 제물로 바쳤고, 아벨은 양을 제물로 바쳤다.

하느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이고, 카인의 제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카인은 분노한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말했다.  


"너는 왜 그렇게 화가 났고 낙심하였느냐?

네가 돌이켜 선을 행하면 호의를 얻지 않겠느냐?

그러나 네가 돌이켜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죄가 문에서 도사리고 있으니 죄의 욕망이 너를 지배할 것이다.

네가 그것을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4:6,7)


"네가 그것을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이 문구를 이루는 원래의 히브리어 단어 '팀벨'은 조금씩 뉘앙스가 다른 몇가지 표현으로 번역된다.

 

미국 표준역에서는 '너는 죄를 다스려라.'로 번역한다. 이 말는 '명령'의 느낌이 담겨져 있다. 

다시 말해 신은 인간에게 죄를 저지르고 싶은 충동을 극복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다.

신과 인간사이의 관계는 명령과 복종의 관계로 설정이 된다.


흠정역 성경은 '너는 죄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번역을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예정을 시사한다. 

인간이 죄를 극복할 것을 예정해 놓으셨고,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뉘앙스가 전해진다. 


하지만 스타인벡은 '네가 그것을 다스릴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번역을 제안한다. 

이것은 "네가 그것을 다스리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존중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카인이 '죄를 다스릴 것인지 아닌지'는 카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스타인벡이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것이다.

자유 의지를 지닌 인간은 비록 유한하기는 하지만 무한한 신에 비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자유 의지이다. 

인간은 약하지만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은 위대하다.


스타인벡의 소설 <에덴의 동쪽>으로 돌아가 보자.

아담은 두 아이를 낳는다. 큰 아들 아론과 작은 아들 칼렙, 이들은 스타인벡표 카인과 아벨이다.   

하지만 원래 성서의 이야기와는 달리 큰 아들 아론은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엄마를 닮아 사악한 면이 있는 작은 아들 칼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두 아이의 엄마인 케이시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사악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아담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간다.

못 나가도록 길을 막아서는 아담에게 총을 쏘고 중상을 입힌 후 도시로 도망쳐 창녀가 된다. 


케이시의 본질에 눈이 먼 아담은 페인이 되다시피한다.  

케이시가 도시에서 창녀로 살아간다는 것을 아무도 그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이웃에 사는 노인 사무엘씨는 정든 고향을 떠나면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음을 직감한다.

그는 아담을 찾아가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할 일을 다한다.

사무엘씨가 창세기 4:7의 자유 의지의 위대성을 깨닫지 못했더라면 전혀 할 수 없었던 일을 한다.


"내가 자네에게 줄 약이 하나 있네. 그것은 자네를 죽일 수도 있고, 자네를 살릴 수도 있네. 자네는 이 약을 먹을텐가?"

그리고는 사무엘은 아담에게 케이시의 실체를 폭로한다. 

적어도 아담은 선택할 기회를 가져야만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아담의 몫이었다.


그것은 아담에게는 약이 되었다.


이후 칼은 자신의 어머니가 창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칼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려는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홧김에 형 아론을 데려다가 창녀인 어머니를 만나도록 주선한다.

불 같은 충격을 받은 아론은 자원 입대하게 되고 유럽의 전쟁터에서 죽고 만다. 

전사 소식이 전해지자, 아버지 아담은 쓰러지고,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된다.

예상치 못한 비극적 상황에서 칼은 괴로워한다.


임종을 지켜보는 칼에게 아담은 "팀벨"이라 한 마디 말을 남기도 세상을 떠나고 만다. 

"너는 너의 죄를 극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타인벡이 <에덴의 동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누구에게나 스스로를 극복해야 할 고귀한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케이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사악함을 극복하지 못했다. 

케이시를 닮은 칼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악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에덴의 동쪽은 아벨을 죽인 카인이 쫓겨나 살아야 했던 곳이었다.

하느님의 "너는 죄를 극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란 말을 들은 카인이 자신의 자유 의지를 드러내야 했던 영역이었다.

<에덴의 동쪽>은 소설 속에서는 칼이 자신의 자유 의지를 드러내냐 했던 남겨진 시간이었다.

칼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것은 백지이다. 칼은 이 백지 위에 자신의 삶을 그려나가야 했다.

정해진 것은 없다. 단 그의 자유 의지만이 그의 삶의 연필을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아담이 칼에게 남겼던 말, 팀벨은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화두라고 생각해 보자.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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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뇌는 풀지 못한 수수께끼,

하지만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지고 있는 중

무한한 공간과 시간에 비할 때, 인간의 살아가는 공간과 시간은 먼지와 같은데...

인간은 우주에 비하면 먼지와 같은 존재인데,

이러한 인간이 우주를 이해하려고 시도하고, 어는 정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놀라움일 수 밖에.

이것은 모두 1.4킬로그램의 뇌 때문이다.


아직 갈 길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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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뇌과학자 '마시미니'와 '토노니'의

의식은 언제 탄생하는가?

- 뇌의 신비를 밝혀가는 정보통합 이론


마르첼로 마시미니, 줄리오 토노니 지음/ 박인용 옮김/ 펴낸이 한언


 

우리 은하에는 1000억개가량의 별이 있다. 그리고 우주에는 이런 은하가 1000억개가 있다. 상상할 수도 없이 거대한 우주에 엄청난 수의 별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의 작은 몸 안에 이 우주보다 복잡한 물질이 있다. 그 신비로운 물질은 우리의 주먹만한 두뇌이다. 두뇌에는 1000억개의 신경세포가 있다. 이 신경세포들의 결합체인 두뇌는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는 유일한 물질 그것이 바로 인간 두뇌이다.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의식한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다. 사람에게는 이 신비한 의식이 존재한다. 이 의식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의식은 인체내의 장기에서 기인한 것일까? 아니면 육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영혼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이러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같은 문제들은 두뇌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현시대에 들어와서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의식이란 두뇌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아직까지 의식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신비에 싸여 있다. 이탈리아의 뇌과학자 두명은 <의식은 어디에서 탄생하는가?>를 통해 의식을 정보통합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이론을 전개해 나간다.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에게도 의식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심지어 무생물에게도 의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견해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인공지능이 특정한 분야에서 인간을 능가하는 현재, 이러한 인공지능이 과연 의식이 있는지, 인공지능이 더 발전하게 되면 그도 역시 의식을 가지게 될 그런 날이 오게 될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대상이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장자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하루는 장자와 혜자가 연못을 거닐다가 물속에 즐겁게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를 보았다.

장자가 말하기를 "물고기가 연못속을 유유히 헤엄치고 있군. 물고기는 즐거울 거야."

혜자가 힐난했다. "자네는 물고기도 아닌데 어떻게 저 물고기가 즐거운지를 아나?"

장자가 대답했다. "자네도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것을 아나?"

혜자가 말하기를, "나는 자네가 아니니 자네의 마음을 알 수가 없네. 자네 역시 물고기가 아니니 물고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네."

.....


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나 스스로는 의식이 있음을 알지만 다른 사람에게 나와 같은 종류의 의식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우린 다만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서 그들 나름의 의식이 있음을 추정할 뿐이다. 그러나 말 못하는 짐승이나 무생물에 이르면 그것들이 의식이 있는지 어떤지 알 도리가 없다. 슈퍼 컴퓨터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말을 할 수 없는 어떤 대상이 의식을 지니고 있는지 아는 것은 도전이 된다. 의사들은 이런 상황에서 환자의 의식 유무를 판별하는 몇가지 기준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즉 환자에게 간단한 지시를 내리고 그 지시대로 따르는지 보는 것이다. 오른쪽 손가락을 움직여 보세요라든가, 눈을 깜박여 보세요 등과 같은 지시를 사용하는 것이다.


의사의 지시대로 따르지 않는 사람은 의식이 없는 상태로 규정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분명 의식이 있기는 하지만 의사의 지시를 알아 듣지 못하는 경우는 오판하게 된다. 또 한 경우는 의사의 지시를 알아듣기는 하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경우 역시 오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혼수 상태 또는 식물인간 상태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의식이 있는 경우도 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그 환자의 의식의 유무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 책의 저자는 의식을 정보통합이론으로 접근해 간다. 의식이 탄생하려면 두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는 방대한 정보량이다. 둘째는 정보의 통합이다.


첫째, 방대한 정보량, 여기서 정보라는 것은, 'A는 A이다'라고 말할 때 'oo은 A가 아니다'라는 경우의 총량을 정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방이 밝다'라고 말할 때, 이 말에 대한 상대 개념은 "방이 어둡다."라는 한가지 선택지만 있다면 정보는 1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더 많은 선택지가 있다. "방이 붉다' "방이 파랗다' '방에 의자가 있다'... 등등 무수히 많은 선택지가 있다. 경험이 더 많고 더 세부적인 차이점들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면 이 정보라는 것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배제되는 사항들이 많을 수록 정보량이 많다고 한다.


둘째는 방대한 정보들이 통합되어 있어야 것이다. 예를 들어 정보 A, B, C, D 가 있다고 가정할 때, 각각의 정보가 분리된 상태로 독립적으로 놓여 있다면 이는 통합된 상태가 아니다. A는 B, C,D와 연결되어 있고, B는 A, C, D와 연결되어 있고,... 이런 식으로 정보가 통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보의 양이 많고 통합의 정도가 높을 수록 의식의 수준도 높아진다. 신경세포가 800억개나 있는 소뇌에 의식이 없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소뇌의 신경세포들은 수많은 모듈로 나누어져 있어 각 모듈마다 고유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리고 각 모듈 사이에는 연결점이 없다. 정보가 통합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200억개의 신경세포로 구성된 시상, 대뇌 피질은 각 신경세포들이 다른 신경세포들과 다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망의 복잡성은 경이로운 것이며, 두뇌가 우주에서 가장 복합한 물질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 연결망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통합되어 있는 정보들에서 의식이 탄생한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 두뇌를 구성하는 대뇌, 소뇌 등 모든 부분이 통합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두뇌에 있는 1000억개가량의 신경세포 중 800억개가 소뇌에 있으며 대뇌에는 200억개가 있다. 그런데 소뇌는 의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소뇌를 절제하여 버리더라도, 의식은 없어지지 않는다. 소뇌는 의식과는 관계 없는 기관인 것이다. 

또한 대뇌는 우뇌와 좌뇌 둘로 구분되어 있고 둘 사이에는 뇌량이라는 신경섬유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이 뇌량을 잘라버리면 두개의 뇌는 각각의 의식을 가지게 된다. 두개의 의식이 한 사람 속에 자리잡게 된다는 것이다. 우뇌와 좌뇌의 통합이 깨져버리면서 개별의 의식을 가지게 된다. 우뇌의 신경세포에 가해진 자극은 좌뇌로 전파되지 않는다. 좌뇌에 가해진 자극은 우뇌로 전파되지 않는다. 그 자극은 각각의 뇌의 고유의 기억으로 개별적인 의식을 형성하는데 기여하게 된다.

 

이제 저자는 이러한 정보통합 이론에 근거하여 의식의 수준에도 높낮이가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사람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일부 동물들에게도 의식이 있을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증명되려면 이 이론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측정이 뒤 따라야 할 것이다. 현대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측정의 문제를 조만간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중심부에서 점점 변두리로 쫓겨나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인해 인간은 우주의 중심부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다윈의 진화론으로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의 연장선에 놓아두었다. 두뇌를 포함한 의식에 대한 연구는 인간 존재를 다시 격상시키는 결과를 주고 있다. 인간의 의식을 가능하게 한 두뇌의 엄청난 정보량과 그것을 통합시키는 능력은 그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기적이다. 우주보다도 더 복잡하고 위대한 존재가 두뇌이다. 두뇌는 바다보다 넓고 바다보다 깊다. 두뇌는 우주보다 넓고 우주보다 깊다. 이것은 다시 한 번 인간을 모든 자연물보다 높은 위치로 우뚝 세워주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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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석 지음/ 페퍼민트


"수학, 철학에 미치다"는 수학의 역사 이야기이다. 수학과 철학이 어떻게 깊은 관련을 맺으면서 발전해 왔는지의 역사가 있다.

수학의 발전과 변처사 배후에 있는 사유등을 알게 되어 수학을 보는 눈이 업그레이드 된 느낌을 준다. 


Part 1 철학, 수학으로 사유하다 (탈레스에서 아르키메데스까지)


최초의 철학자로 알려진 탈레스는 "만물의 원질은 물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탈레스는 현상 이면의 질서를 탐구하는 철학적 사유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 이후 그 전통은 피타고라스와 파르메니데스를 거치면서 한층 심화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하나의 형이상학으로 체계화되었다.


"만물의 본질은 수이다" 피타고라스의 말이다.

파격적인 말이다. 형체가 없는 것이 형체의 본질이 된다는 생각은 파격에 파격이다.

형체가 없는 '수' 또는 변하지 않는 '수의 질서'가 현상의 이면에서 현상을 움직인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조금 이해가 될 듯도 하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다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든지 존재하지 않다가 존재하든지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며 사실상의 변화를 부정하는 논증을 폈다. 다시 말하면 변하지 않는 것만을 진정한 존재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파르메니데스의 논리를 따른다면 우리의 경험세계는 허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의 제자 제논의 역설도 움직임 즉 변화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이야기인 것이다.


플라톤은 이런 논리를 심화시켜 나간다. 변화하는 현상계가 허상이라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 즉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플라톤은 수, 도형, 정의(justice)등 변하지 않는 모든 대상이 존재하는 장소를 이데아의 세계라고 불렀다. 이데아의 세계야말로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라고 주장했다. 현실세계는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복잡한 현상을 규정하는 불변의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 즉 현상과 구분되는 '이론' 차원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유는 과학을 가능하게 한 사유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찾은 이데아의 세계가 현실과 유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 속에 존재한다고 하여 현상을 살리려고 하였다. 형상과 질료 이론이다. 책상이라는 형상과 나무라는 질료가 합쳐져야 책상의 존재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현실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인 것이다. 그에 의하면 형상은 존재하는 현상세계가 참된 세계이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의 창시자이다.

그의 논리학 체계는 크게 삼단논법과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로 이루어진 세 가지 논리법칙으로 요약된다.


동일률: A는 A이다. (A=A), 

모순률: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A ∩ A^c = ∲)

배중률: A이든지 A가 아니든지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성립한다. ( A ∪ A^c = U )


동일률이 성립하는 세계는 변화가 없는 세계이어야 한다. 변화하는 현실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끊임없이 바뀌어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피타고라스로부터 파르메니데스를 거쳐 플라톤까지 이어져온, 불변하는 세계에 완변하게 적용되는 사유의 원리이자 존재의 원리를 '논리'라는 이름으로 정식화한 것이다. 이로써 철학과 수학 그리고 논리가 하나로 결합된 그리스 사유의 거대한 구조물이 완성되었다.


삼단논법은 대전제가 참이라면 결론도 참이라는 구조이다. 결론의 성립여부는 대전제에 달려 있기 때문에 포인트는 대전제가 참인 것을 어떻게 보장하느냐이다.

그는 대전제를 제1원리들이라고 불렀는데, 이 대전제는 추론에 의해서 논증할 수가 없다. 다만 그것은 이성에 의한 직관의 차원에서 진리임이 자명한 것이다. 논리적 추론 없이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대전제가 없으면 모든 논증의 구조는 허물어져 버린다.


그의 논리학은 불변의 실체를 추구하는 존재론적 사유의 원리를 정식화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수학의 세계에 완벽하게 적용되는 틀이었다.


유클리드는 당시의 수학을 집대성하여 <원론>을 완성한다. 원론은 다섯 개의 공리와 다섯 개의 공준으로부터 출발한다.


▶ 5개의 공리(공리: 모든 논리의 대전제로 사용될 수 있는 자명하다고 여겨지는 진리)

1) 동일한 것과 같은 것들은 모두 서로 같다.

2) 같은 것에 어떤 것을 같이 더하면 그 전체는 같다.

3) 같은 것에 어떤 것을 같이 빼면 그 전체는 같다.

4) 서로 일치하는 것들은 서로 같다.

5)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


▶ 5개의 공준(공준: 특정한 학문분야의 대전제로 사용될 수 있는 자명하다고 여겨지는 진리)

1)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 하나의 직선을 그을 수 있다.

2) 유한한 직선을 얼마든지 연장할 수 있다.

3) 모든 점에서 모든 거리를 반지름으로 하는 원을 그릴 수 있다.

4) 모든 직각은 같다.

5) 한 직선상에 있지 않는 한 점을 지나면서 그 직선에 평행한 직선은 한 개만 존재한다.


이 열 개의 전제와 아리스토텔레스가 확립한 논리법칙들 이용하여 유클리드는 464개의 명제들을 증명하여 정리화하였다.

그러면 공준 또리 공리가 옳은 근거는 무엇일까?

유클리드에 의하면 그것은 옳기 때문에 옳다. 증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명백하고 자명하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수학을 구체적인 물리 문제에 적용하기 시작한다.

탈레스로부터 시작된, 현상을 규율하는 본체의 세계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존재론적 세계관으로 확립되었다. 그리고 그 대표는 수학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불변의 사유, 존재의 사유로부터 출발하였다. 하지만 고대 중국인들은 이와는 다른 사유, 즉 변화의 사유, 생성의 사유를 하였다.


Part 2  철학은 곧 관계다 (노자와 장자 그리고 음양오행의 사유법)


자연의 질서를 탐구함에서부터 철학적 사유를 출발시켰던 그리스 철학자들과는 달리 중국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부터 철학적 사유를 시작하였다. 즉 객관세계를 탐구하는 그리스 철학이 '존재'를 중시하는 방향에서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면 삶의 문제를 탐구하는 중국 철학이 '관계'를 중시하는 방향에서부터 시작 한 것 또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노자,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A는 A가 아니다.' 어떤 대상을 A라 규정하면 그것은 더 이상 A가 아니다. 동일률에 정면으로 부딪힌다.

일본 불교 철학자 스즈키 아이세쓰는 '卽非의 논리'라고 하여 "A 卽非 A, 是名 A"로 구조화했다.

이는 이 세계가 단순하지 않고 매우 복잡한 연관관계로 얽혀 있기 때문에 어떠한 사태를 그 사태만으로 보아서는 안되고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이다. 즉비는 논리는 "모든 것은 한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으며 끊임없이 주변과 교감하며 변화한다" 즉 변화하지 않는 존재는 없으며 '변화야말로 존재의 본질'이라는 전제에서 성립하였다. 모든 존재가 관계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러한 즉비의 논리를 궁극까지 밀고 들어가면 "모든 것은 하나이다"로 귀결된다. 즉 진리는 변화무쌍한 구체적 현실, 바로 거기에 있으며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만큼 모든 곳에 동일하게 있는 것이다.


변화, 서로 다름의 극한이 음양, 음양은 현상적으로는 둘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이다. 태극도는 음과 양의 존재론적 일원성과 현상론적 이원성을 동시에 표현한 그림이다.

음양론의 궁극적 결론은 대립되는 성질들 사이의 감응에 의한 끊임없는 변화와 균형을 통한 생명력의 유지이다. 이것은 사태를 실체론적 관점이 아닌 관계론적으로 즉 전체적으로 조망해야 함을 의미한다.


오행론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안정성을 보았다. 자연은 머물지 않으려는 본성이 있으며 또한 그것은 순환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연 순환의 원리를 크게 다섯걸음(오행)으로 구조화 한 것이 바로 오행론이다. 왜 다섯? 이론적 근거는 상생상극의 개념이다.


     

     


순환구조는 생장과정과 소멸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해 상생(서로 키워줌)의 방향과 상극(서로 억누름)의 방향을 생각할 수 있다.




구체적인 자연현상 속에서 서로 살려주고 서로 제어하는 관계로 고대 중국인이 찾은 다섯 가지 경향성은 목, 화, 토, 금, 수이다. 이것은 다섯 가지 사물이 아니라 그것들로 상징되는 성질이나 경향성을 말하는 것이다.





Part 3 잠자던 수학을 깨우다 (불변에서 변화의 수학으로)

피타고라스로부터 플라톤을 거쳐 아리스토텔레스와 유클리드에 와서 결말을 맺은 수학적 세계관은 군더더기가 없고 모든 것이 투명하게 볍칙적으로 성립하는 세계관이라는 부분에서 이성적, 합리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불변하는 세계를 별개로 설정'했다는 부분에서 신비적, 종교적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즉 과학적 측면과 종교적 측면이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르네쌍스를 지나면서 사고의 규칙이 달라지기 시작햇다. 선험주의, 본질주의 등 일체의 형이상학적 원리를 배제하고 현상에 근거하여 설명하고 이끌어가는 과학, 진리를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진리를 끌어내는 새로운 과학이 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갈릴레오의 놀라운 과학적 발견 또한 이러한 사상적 바탕하에서 나올 수 있었다.


갈릴레오는 의심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주어진 상식을 그냥 수용하지 않고 의심할 줄 아는 자세야말로 사유하는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다. 갈릴레오는 관찰과 실험, 그리고 논리적 추론의 절묘한 결합으로 근대과학의 시발점으로 평가되는 낙하법칙을 발견해 내었다. 고대의 수학과 과학이 정적인 세계, 고요한 세계를 그 대상으로 했다면 근대의 수학과 과학은 움직이는 세계, 변화하는 세계로 관심의 촛점을 옮긴다.


종교적 믿음이 진리의 기준이 된 시기에 데카르트는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뒷받침하고 또 앞으로 더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철학의 원리, 누구도 부정하거나 의심하지 못할 확실한 원리를 발견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말은 나의 사고에 의존해서만, 다시 말해서 내가 이해되는 한에서만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상당히 과격하면서도 주체적이고도 능동적인 이 선언은 더 이상 애매하고 불확실한 본질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객관적 자연현상을 어떠한 형이상학적인 신념을 섞지 않고 나의 이성에 의하여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 근대과학의 철학적 근거를 마련해 주는 작업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데카르트는 좌표를 도입함으로 그리스의 기하학과 대수학을 하나로 결합하는 쾌거를 이루어 수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뉴턴은 갈릴레오의 지상의 낙하법칙과 케플러의 하늘의 행성의 운동 법칙을 종합하여 하나의 법칙으로 묶어낸다. 만유인력의 법칙이다.

또한 뉴턴과 라이프니쯔는 미적분을 발명함으로 순간순간 변화하는 대상물을 파악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변화하는 현상세계의 변화를 계산하고 예측하는 것이 가능해 진 것이다.


Part 4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수학(실체에서 관계의 수학으로)


수량화 혁명에 바탕한 새로운 합리주의는 점차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엄밀한 진리로서의 과학과 그러한 과학적 진리의 구현물인 자연이 정해진 질서에 따라 법칙적으로 움직여간다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만들어 내었다. 근대적 기계론은 세계의 근원으로서의 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는 인격신이 아닌 수학적 이성이라는 이름의 무색투명한 신이었다. 이성과 논리를 강조하며 자연을 수학 법칙을 다르는 창백한 대상물로 만들어버리는 이러한 기계론은 현상세계를 이데아의 그림자로 보는 플라톤 철학과 그 구조가 유사하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근대적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자아 즉 개인을 주장하며 말했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구별된다.


플라톤의 하늘에 떠 있는 이데아를 땅으로 끌어내리려 노력한 후계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듯이 데카르트의 기계론을 바판하며 현실에 생기를 불어놓으려고 한 이성론자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가 그들이다.

스피노자는 신과 자연을 이원화시키지 않고 과감하게 신=자연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가 생각한 신은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 가능한 합리적 신이다. 이러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신관을 범신론이라고 부른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 바로 그 속에 신(이성)의 숨결이 담겨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이성주의를 유지하면서도 데카르트의 기계론을 지양하려고 했다.


데카르트가 17세기의 플라톤이라면 라이프니츠는 17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현상 사물을 이데아의 그림자로 보는 기계론을 지양하고 자연'자체'에 원리를 내재시키고자하는 기획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논리학의 법칙을 세운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진리는 필연적 진리와 우연적 진리의 두가지 형태가 있다. 논리적 추론으로 증명되는 것이 필연적 진리이고, 경험함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우연적 진리이다. 필연적 진리는 추론의 진리이며 우연적 진리는 사실의 진리이다. 그는 필연적 진리를 지배하는 원리로서 모순율을 제시했고 우연적 진리를 지배하는 원리로서 충족이유율을 제시한다.


필연적 진리는 '유한 회'의 논리적 추론을 거쳐 알 수 있는 진리이고 우연적 진리는 '무한 회'의 논리적 추론을 거쳐 알 수 잇는 진리이다. 라이프니쯔에게는 우연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그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실의 진리가 우연한 것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인간의 분석 능력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만약 무한 회 추론한다면 모든 것은 정확히 설명되고 예측될 수 있으므로 지금 우리게엑 불합리하고 이해가 안되는 것들도 모두 합당하고 이성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무한회 추론이라는 개념은 연속성이라는 개념과 관련된다. 그리고 자연의 연속성을 기반으로 한 무한 회 추론의 아이디어는 미분법 발견의 기초가 된다.

라이프니츠느 함수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했으며 미적분학의 창시자로 변화하는 대상들 사이의 관계를 찾는 도구를 만들어 내었다. 라이프니츠는 변화 속에서 변화하지 않는 '존재자'를 상정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현상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 낼 수 있는 일관된 패턴, 바로 관계의 불변성을 추구한 것이다. 관계의 불변성이란 관계의 일관성을 말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출발한 "불변"의 철학적 의미가 '무변화'에서 '변화의 일관성'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로부터 라이프니츠까지 벌전되어 온 근대 이성주의 철학의 결과물인 수학과 과학의 많은 성과들을 맏아들이면서 모든 것을 이성이라는 이름의 신의 범주 속에 두지 않고 이성에 한계선을 그음으로써 인간과 신, 그리고 자연을 모두 살리려고 한 철학자가 바로 칸트이다.

칸트 명제구분

분석명제: 주어속에 술어가 포함된 명제. 예를 들어 "백조는 희다'

종합명제: 그 반대.


선험적 판단과 경험적 판단

위 네가지를 종합하면 4종류의 명제가 도출된다. 선험적 분석명제, 선험적 종합명제, 경험적 분석명제, 경험적 종합명제.

이중 선험적 분석명제와 경험적 분석명제는 명제로 큰 의미가 없다. 동의반복이기 때문이다. 경험적 종합명제는 경험에 의한 것이므로 굳이 증명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이 중 선험적 종합명제만이 철학자들의 고려 대상이 된다. 


인간은 경험자료와 이를 바탕으로 한 논리적 추론으로 올바른 지식을 구성해 나간다. 진리는 인간이 경험과 이성을 조합하면서 계속해서 확장, 구성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신의 관조가 아닌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드러난다.


플라톤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이성주의는 객관주의적 성격을 가진다. 즉 수학적 진리는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하며 절대적으로 참이다. 이러한 객관적 진리관은 기독교의 초월적 신관과 결합되어 중세 철학을 구성하였다. 근대에 들어와서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자아를 외치며 신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다. 하지만 그의 이성주의는 기계론으로 연결되면서 이신론, 즉 이성적 신관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이러한 이신론의 극적인 형태를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 보았는데 이성을 매개로 하여 인간과 신을 연결하려 한 이와 같은 이성 절대주의는 결국 플라톤주의의 근대적 발전으로 볼 수 있다. 하나로 뭉쳐진 합리주의와 신비주의, 그리고 철학과 종교는 강고한 역사적 관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합리주의를 신비주의로부터 구해내고 철학을 종교로부터 구해내며 근대적 수학과 과학의 성과를 흡수하면서도 그것과 신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인간이 구성한 인간의 진리로 재자리매김을 한 철학자가 바로 칸트이다. 


이것은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자아가 칸트에 와서야 비로소 신의 도움 없이 스스로 진리를 구성해 나갈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결국 칸트의 위대함은 절대적 진리라는 질곡에서 벗어나 인간이 '구성해 나가는' 새로운 진리관을 제시했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칸트에 의하면 수학의 진리 또한 인간의 진리일 뿐이다.


이것은 서구 수학의 역사에 처음 등장한 매우 비전통적인 수학관이었다. 그래서 칸트는 자신의 사상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이성에 눌려 지내던 인간의 의지, 느낌 등이 철학의 주제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철학자이기도 하다.


수학의 발전

좌표의 도입으로 기하학과 대수학이 결합되었고, 함수는 수학과 과학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가 되었다.

기하학에서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등장하였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은 평면에서의 기하학이었다. 하지만 구부려진 곡면에서의 기하학이 등장하였다. 이를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라 한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삼각형 세각의 합이 180도 이지만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곡률에 따라 180도 이상이 될 수도 있고 이하가 될 수도 있다.

대수학에서도 단지 방정식을 푸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 방정식을 풀 수 있으며 어떤 조건에서 방정식을 풀 수 없는지, 그 방정식이 놓여 있는 장을 분석의 대상으로 놓아 그러한 장들의 대수적 구조를 탐구하는 추상대수학이 19세기 초부터 발전하기 시작한다. 군, 환, 체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수의 성질과 그 구조를 탐구하던 수학자들은 19세기 말에 드디어 수의 성질에 기초하여 전체 수학의 체계와 그 구조를 확립한다. 유클리드가 공리로부터 정리로 나아가는 수학의 체계를 처음 세운 이후로 두번째의 체계화였다.


칸토어는 집합, 원소 그리고 대응이라는 단순한 개념들을 가지고 무한까지도 셀 수 있고 비교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칸토어에 의하여 발전된 무한에 관한 이론을 집합론이라 한다. 집합론은 17세기 이후의 수학의 역사에서 추상적 논리의 정점에 위치한 이론이다.


집합론을 흔드는 러셀의 역설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 R은 논리를 생명으로 하는 수학에서 있을 수 없는 모순이 발생하였다. 러셀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수학원리>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수리논리학의 기원이다. 하지만 <수학원리>는 역설의 근본 이유를 찾아서 해소한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조건을 넣어서 역설을 피해간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브로우베르는 러셀과는 달리 집합론에서 역설이 발생한 원인을 찾아낸다.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 모르는 대상, 즉 인간의 인식 대상이 될 수 없는 대상에게는 논리를 적용하면 않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령은 충치가 있어가 없거나 둘중에 하나다' 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배중률에 의하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명제는 둘 다 성립하지가 않는다. 왜냐하면 유령이란 인간의 인식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수학적으로 존재가 보장되는 대상만 논리적 분석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무한은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넘기 때문에 수학적 대상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는 칸토어의 무한 집합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식의 대상이 수 없는 공허한 개념을 인식의 대상인 것처럼 실체화하여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브로우베르의 사유의 핵심은 수학적 존재와 그것의 참거짓 문제를 '인간의 인식 행위'와 결부하여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는 수학을 인간과 무관한 진리로 보지 않았다. 인간의 진리라는 말을 한 칸트의 철학이 그 배후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직관을 벗어난 공허한 논리를 배척한다는 것이 직관주의의 기본 정신이다. 


집합론에서 발생한 역설의 처리 문제에서 생긴, 20세기 초의 객관적 실재론과 주관적 구성주의의 학문적 대립은 무한을 존재자로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대립, 즉 무한과 유한의 대립이었다. 유한이건 무한이건 수학적 개념은 그 자체로 객관적 존재물이라는 플라톤주의와 인간이 유한 번에 걸쳐 구성해 낼 수 있는 개념만이 수학적 존재물이라는 칸트주의의 대립을 조화시키고 두 이론을 하나로 통일하려고 한 사람이 힐베르트였다.


힐베르트는 수학자들이 다루는 것은 논리적 형식, 즉 구조이며 개별 기호 각각의 의미(내용)가 아니므로 명제의 구조인 형식만 남기고 이를 수학의 탐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논리를 세웟다. 형식주의의 등장이다.  형식주의는 '수학은 전제로부터 결론을 유도해내는 '과정의 논리적 정당성(형식)'만을 탐구한다'는 수학관이다. "수학은 규칙을 정해놓고 하는 게임이다"


하지만 전제을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다는 말이 '임의로' 구성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규칙이 성립되려면 어떤 규칙이라도 그 속에 모순을 함의하고 있으면 안된다. 즉 전제가 되기 위한 기본 조건으로 첫째 무모순성, 둘째, 가능하다면 모든 명제에 대하여 참과 거짓을 판별해 주어야 할 것. 즉 완전성이다. 


정리하면 힐베르트가 제안한 이상적인 전제는

1. 모순을 품고 있어서는 안된다. (무모순성)

2. (유한 번의 단계를 거쳐서) 모든 명제의 참 거짓을 가려줄 수 있어야 한다. (완전성)


힐베르트가 제시한 공리는 플라톤적 의미에서의 자명한 진리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그저 무모순성만 만족하면 되고 완전성을 만족하면 더 좋은 그런 인간이 정한 규칙일 뿐이다.


플라톤주의에서는 객관세계가 수학의 진리성을 보장해 주며 직관주의에서는 인간 직관의 존재가 수학의 진리성르 보장해준다. 형식주의에서는 규칙(전제)이 의존하는 선험적 원리나 대상이 없으므로 그 규칙의 정당성은 규칙 자신이 보장해야 한다. 무한 집합론 공리 체계의 무모순성과 완전성은 '공릭체계 자신'이 스스로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1931년 25세의 청년 수학자 괴델은 자연수론을 포함하는 그 어떤 공리체계도 완전하게 구성할 수 없고 도한 모순이 없게 구성할 수 조차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버린다. 이것이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이다.


이렇게 해서 수학의 역사는 철학의 역사와 맞물려 굴러 왔다. 현대의 수학은 이제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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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는 동양의 사상에 조예가 깊다.

가족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동양적 삶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처음에는 인도의 사상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인도 여행은 오히려 인도 사상에 대한 실망을 불러일으킨다.

오히려 인도 여행에서 만난 중국인들에게서 큰 감명을 받고 중국 사상에 관심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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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의 심리학을 알기 쉽게 풀어낸 책


인간관계를 수직적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은 칭찬을 받기 위해 자신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원하는 삶을 살게된다.

그리고 칭찬을 받지 못하면 열등감에 사로잡혀 불행하게 된다.


해결책은 인간관계를 수평적으로 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 할 이유가 없다. 또한 다른 사람을 조종하거나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압박을 가할 필요도 없다.

각자의 일이 있는 법이고 각자의 일은 각자가 해야할 일이다.

나는 단지 공동체에 공헌하려는 마음과 그 일을 실행함으로 공헌감을 가지게 되면

자유로운 나만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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