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프리초프 카프라 지음/ 김용정, 이성범 옮김/ 범양사


 

노자의 도덕경의 첫 문구는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다. 이 말에는 <도>란 것은 언어로 정의할 수 없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비트켄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 마지막 말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지어다"라고 한다. 언어는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건이나 사실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도구이다. 언어외에 다른 방법으로 생각이나 경험, 또는 사건들과 사실들을 표현하는 매체도 있기는 있다. 몸짓이나 음악, 또는 미술, 심지어 수학등도 그러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언어가 가장 나은 수단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언어조차도 그 한계성으로 인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그러고 보면 문학가들, 특히 시인들은 그 한계를 돌파하려는 지난한 과제를 향해 겁없이 돌진하는 최전선의 투사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물며 일상의 것이 아닌 사실이나 사건, 또는 경험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것은 어려운 일이기에 앞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도"의 실체는 일상의 경험을 뛰어넘은 것이기에 말이나 글과 같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리라. 또한 비트겐슈타인도 말과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진리'가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게다.


그러면 일상의 것이 아닌 사실이나 사건, 또는 경험이라 도대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이것은 서로 다른 두 방향에서 경험되어진다. 그 하나는 동양의 신비주의적인 사상에서, 그리고 또 하나는 현대물리학에서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동양의 신비적인 사상이란 동양의 종교들에서 발견되는 사상을 뜻한다. 즉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실체에 대한 사상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런 종교의 현자들이 수련이나 명상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궁극적인 실체는 일상의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면에서 신비주의적이다. 현대 물리학자들이 우주의 거시적 사물들을 관찰하고 연구할 때, 또는 사물의 미시적 세계 즉 양자 세계를 관찰하고 연구할 때에도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관찰이나 체험을 하게 된다. 그것 역시 일상의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카프라는 현대물리학의 최전선에서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의 두 날개를 퍼득이며 거시적인 세계와 미시적인 세계를 아우르며 비상하다 문득 건널 수 없는 공고한 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 공고한 벽이란 모순처럼 보이는 현상들이다. 일상의 경험에 근거한 논리나 언어는 이러한 모순을 극복할 수가 없다. 그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한다. 시간과 공간, 질량과 에너지, 입자와 파동 등은 고전물리학에서는 별개의 실체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하이젠베르크등에 의해 시작된 양자론은 이러한 객관적 실체들이 사실은 한 실체의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밝혀주었다. 시간과 공간은 하나의 실체로 시공간을 형성하고, 질량은 에너지로 에너지는 질량으로 환원가능하며, 미시세계는 때로는 입자로 때로는 파동으로 나타나는 실체들로 넘쳐난다.


현대물리학은 일상의 경험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현상에 직면해 있다. 진공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가 아니다. 입자와 공간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소립자들은 '대상에 힘을 미칠 수 있는 공간의 상태' 즉 장(field)로 정의된다. 전기적인 척력은 광자의 교환으로 설명되고, 강한핵력은 강입자의 교환으로 설명된다. 물질의 최소단위를 찾아 궁극까지 파헤치려는 시도는 난관에 봉착한다. 파고 들수록 더 이상 물질은 없고, 현상, 과정, 구조등만이 남는다. 일상의 경험으로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도록 언어로 설명할 수도 없다.


현대물리학이 찾아내고 있는 이러한 세계의 본질은 이미 오래전에 동양의 종교들에서 누누히 이야기해 오던 것들이다. 불교의 空, 유교의 氣, 도교의 道 등은 현대물리학이 발견한 실체와 닮아있다. 이제 카프라는 동양의 세계관으로 돌아갈 것을 희망한다. 이제껏 현대 과학세계를 지탱해 왔던 이원론적인 세계관, 논리에 바탕을 둔 세계관은 인류를 절멸의 상태에까지 밀어부쳤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하다. 그것은 통일의 세계관이다. 나와 당신이 별개의 개체가 아닌 하나의 통일된 우주의 모습이라는 것, 나와 우주가 별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고대 동양의 세계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물리학의 일각에서도 이러한 흐름이 감지되고 있으며 카프라는 이러한 흐름에 앞장서고 있다.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이 고전물리학의 패러다임을 대신했다면 이제는 '부트스트랩'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계관에 근거한 과학 혁명이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카프라는 현대물리학과 동양의 사상 둘 모두에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 그가 지향하는 세계관이 세계를 크게 바꿀 수 있는 세계관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공고한 틀에 사로잡혀 있는 세계가 그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을런지는 두고 볼 일이다. 현대물리학의 미래가 궁금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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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최순우의 한국미 산책/ 최순우/ 학고재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 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271쪽 


책장을 넘길 때마다 선생의 한국미를 사랑하는 마음이 쪽빛 바다에 일렁이는 물결처럼 밀려든다. 우리 문화재에 흠결이 없을리야 없겠지만 선생의 눈은 찍고자 하는 대상만을 잡아채는 카메라의 눈처럼 한 치도 아름다움에서 비켜나지 않는다. 


선생은 회화, 전통건축과 공예, 불상과 탑, 토기와 도자기 등 모든 분야에 폭넓은 관심을 갖고 한국 문화재 전반을 통해 흐르는 한국의 미와 얼을 내내 찾고 있다. 그 한국의 미와 얼이란 한민족의 핏줄에 면면히 이어져 오는 간결미, 소박미, 절제미, 실용미 등이다. 중국과 일본의 것과는 다른 한국 고유의 멋과 미를 일러주는 것이 마치 선생의 사명인 양 선생은 아름다운 우리말로 정성을 다해 한국의 미를 노래한다.

 

한국의 미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선생의 글도 그 못지 않게 아름답다. 우리 말이 이렇게도 아름다웠던가? 아니 이렇게 아름답게 글을 쓰는 선생의 마음 바탕이 아름다운 것은 아닐까? 


수많은 작품들을 해설하는 선생의 글과 사진을 비교하면서 이 책을 읽고 나니 어느새 아름다움을 보는 내 안목이 훌쩍 커 버린 느낌도 든다. 실로 남이 보지 못하는 아주 사소한 것도 세심히 살피고 그 아름다움을 느끼는 전문가의 향기가 내 몸을 스치면서 그 흔적을 남기기라도 한 듯 내 마음은 한결 뿌듯해 진다. 얼른 박물관에 들러 작품들을 하나 하나 꼼꼼히 살펴보고 한국의 미를 찾아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싶은 충동이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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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군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는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그 바람 속에는, 신선한 햇볕과 아직 사람들의 땀에 밴 살갗을 스쳐 보지 않았다는 천진스러운 저온, 그리고 지금 버스가 달리고 있는 길을 에워싸며 버스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산줄기의 저편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소금기, 그런 것들이 이상스레 한데 어울리면서 녹아 있었다. 햇볕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가지만 합성해서 수면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약방의 진열장안에 있는 어떠한 약보다도 가장 상쾌한 약이 될 것이고...


무엇이 주이고 무엇이 부인가? 김승옥의 섬세한 감성과 표현에 무게를 둘 것인가, 아니면 김승옥이 그리고자하는 인물에 무게를 둘 것인가?

위대한 개츠비의 파괴적 영향력이 지나치게 크다. 의미없는 표현이 없다.

김승옥식 표현은 단절 단절, 이성적인 노력으로 연결되지 않는 토막 토막 난 글들,

하인숙, 세무서장인 조씨가 따 먹으려던 여자, 꽁생원같은 선량한 박선생이 좋아하던 여자, 서울로 데려가 달라던 여자, 그 여자는 바닷가 서울 남자가 하숙하였던 집에서 조바심을, 칼을 빼앗지 않으면 절망에 사로잡혀 찌를 사람처럼, 조바심을 느끼던 여자에게서 조바심을 빼앗아 버렸다. 그 조바심이 정체가 무엇이었을까? 조바심을 빼앗긴 여자는 서울로 가지 않겠다고 하고, 서울 남자는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끝내 그 여자를 서울로 데려가겠다고 하는데,

그 빼앗긴 조바심이란, 모든 것을 달라지게 만드는 것인가? 여자가 먼저 남자를 유혹했고, 남자는 유혹을 당했고, 그런데 왜 여자는 남자를 유혹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서울 남자라는 이유로,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그런데 조바심을 빼앗기고 나서는 또 서울로 가지 않겠다고...


무진 기행의 키워드는 안개, 모든 것이 안개 속에 뿌옇게 사라져 버린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되어 버리고 없다.

수치도, 책임도 무책임도 모든 것이 유배되어 버리고 없는 세상, 그 세상이 무진이다. 이 무진은 당시의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서울은 희망의 장소, 믿음의 장소였을까?


돈 많은 과부를 어떻게 만났을까? 급상경요 회의참석요. 이 전갈은 전무가 될 것임을 알리는 것, 이 전보로 모든 안개가 걷히고...


자살한 여자, 술집작부, 독해서 죽을 것 같지 않았던 여자, 이 여자의 죽음을 지켜 주고 있었던 불면의 밤....

서울 남자는 옛 자신을 현재의 자신으로 끌어내기 위해 애를 쓴다.

옛 모습은 골방에 숨어 의용병도 국군도 ...징집을 피하기 위해 선배와 친구들이 전방에서 싸우는 동안 골방에 숨어 있었다. 어머니의 성화로...하지만 점점 무거워 지는 마음 전장을 달려가는 마음,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

1년동안 폐병을 고치기 위해 바닷가의 집에서 하숙을 한다. 쓸쓸한 느낌을 엽서에 써서 사방으로 보냈던 옛 모습

나오는 인물, 주인공, 어머니, 어머니의 산소에 들러 이슬비 내리는 산소 앞에서 절을 한다. 긴 풀을 뽑는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의 표시런가. 골방에 자신을 숨겨준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가 죽고 난 후 폐병이 들었다는 것은 그 만큼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이 컸다는 그런 의미일까? 어쨌든 어머니.

하인숙, 박선생, 조씨, 자살한 술집 작부, 서울 남자의 부인, 장인....


개구리 울음 소리가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로 화하는 청각이 시각으로 변하는 이상한 현상....

개구리 울음이라고 답하며 하늘의 별들을 쳐다 본다. 그리고는 또렷이 깨닫는다. 나와 별 사이의 거리를, 그리고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사람과 사람사이의 거리감을 이야기하려는 건가?


끝없는 의문이 잇달아 올라오면서, 과연 김승옥님은 이런 표현을 함에 어떤 의미를 두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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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영문화예술회에서 회원들과 수영구민들의 글을 엮어 만든 '수영문예'를 읽었다. 참 소박하면서도 정겨운 소재의 수필들, 내 고장 작가의 수필들에 한 동안 젖어 있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글감으로 쓴 수필들과 시들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부산 수영의 숨겨진 이야기들이며 사람사는 이야기들이 지면에 펼쳐져 있었다. '멀리서 빛나는 별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발 밑에도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것들이 많다.'(Daum 브런치의 '푸른냥 이야기'에서)


유태연님의 수필 '매표구'/ '매표구'의 역발상이 흥미롭다. 매표구(買票口)냐, 매표구(賣票口)냐. 표를 사는 창구이나 표를 파는 창구이냐? 하나의 대상이지만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사실, 그리고 언어의 변화는 사람들의 의식의 변화를 쫓아간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정인호님의 작품 '구청장님 전상서'/  수영구 망미동에 '정과정' 정자가 있다. 고려시대 '과정 정서'라는 인물이 수영강변에 유배 생활을 하면서 임금님에 대한 충절을 노래한 '정과정곡'이라는 고려가요를 남겼다. 이 지역 도로명에 '과정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이 이름이 이렇게 역사적인 사실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에 은근히 놀랐다. 아직 가보지 못한 '정과정'정자는 어떤 모습일까? 그곳에 서면 그 옛날의 향기를 더듬어 맡을 수 있을까? '정과정'정자에 들리기 전에 '정과정곡'을 읽어봐야되지 않을까?


정인호님의 수필 '등록상표'/ 흥미롭다. 1원을 투자하여 자신만의 홍보전략을 세웠다니. 정인호님은 송금할 때는 반드시 1원을 더 보태어 보내준다고 한다.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표인 것이다. 상대방의 통장에 찍힌 1,000,001원. 1,000,000원보다 1원에 더 큰 신선한 충격을 받지 않을까? 나도 정인호님의 등록상표를 도용할까 보다.


박경인님의 시 '단팥죽과 팥빙수'/ 부산 용호동 이기대 입구에 있는 '할매 팥빙수'는 전국적으로 유명한가 보다. 하지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혼자 알고 싶은 좋은 곳도 있을 것이다. 박경인님의 시에는 자신이 즐겨가는 팥빙수집 '남천동 보성녹차'집이 나온다. 이 시를 읽고서 아마도 보성이라는 곳이 머리속에 박혔는지도, 그래서 전라도 여행 때 불쑥 보성을 방문했는지도 모른다. 벌써 입하도 지나고 소만이라고 한다. 여름이 느닷없이 눈 앞에 나선 듯 하다. 박경인님이 자주 들리는 보성녹차 팥빙수집에 가면 혹 박경인님을 우연히 만날 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사진속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시는 운율과 리듬이 있는 음악의 문학이다. 하지만 시는 감성의 문학이며 지성의 문학이기도 하다. 글자가 형상화하는 이미지, 소리가 만들어내는 리듬을 즐길 수 있다면 이미 시를 즐기는 사람이다. 또한 시인의 생각과 그것을 풀어내는 감성을 쫓아갈 수 있다면 시가 더 좋아질 것이다. 시인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시인이 사용한 표현의 깊은 속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곱씹어 보는 것도 시를 감상하는 한 방법이다. 그러한 즐거움을 독자에게 주려면 시를 쓰는 사람은 시 속에 최소한의 단서를 남겨 놓아야 한다. 그 단서를 잡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그런 단서 말이다. 이러한 단서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시는 어렵다 너무 어렵다.


초등학생에서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영구민들의 작품을 보면서 어떤 글이 좋은 글인가 생각해 본다. 좋은 글이란 깊은 생각, 그리고 수려한 문체등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사실 자신의 생각을 읽기 쉽게 풀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 나도. 좋은 글.


요즈음 들어 '무진기행'의 '김승옥'님이 눈에 밟힌다. 김훈님의 '라면을 끓이며'에서도 만나고, 순천만습지와 순천만국가정원을 방문했을 때도 만나고, 순천출신이란다. 비록 순천문학관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Daum의 '스토리펀딩'에서도 김승옥님을 만났다. 아주 오래전에 '무진기행'을 읽었더랬는데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어 미안할 지경이다. 이 번 토요일에는 도서관에 꼭 들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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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브레히트/ 백정승 옮김/ 동서문화사

☞ 뉴욕 타임즈 선정 100권


브레히트의 희곡이다. 희곡이란 장르는 익숙한 소설과는 달라 낯설다. 묘사나 서술등으로 작가의 생각을 표현해 낼 수 있는 소설과는 달리, 희곡은 대화를 통해서만 작가의 생각을 잡아내어야 한다. 실제로 연극을 보면 또 달라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익숙하지 않음이 희곡을 읽는데 어느 정도 장애로 작용한다.


주요인물: 억척어멈, 억척어멈의 벙어리 딸 카트린, 억척어멈의 큰 아들 아일립, 작은 아들 슈바이처카스


이 희곡은 '30년전쟁'(1618~1648년)이 배경이다. 안나 피얼링은 전쟁의 와중에서 질긴 삶을 이어가기 위해 군대를 따라다니며 병사들에게 물건을 팔면서 억척같이 돈을 번다. 전쟁터를 전전하는 동안 억척어멈은 아이들을 하나 하나 잃게 된다. 혼자 남은 억척어멈은 혼자 수레를 끌면서 퇴각하는 군대를 뒤따라 간다.  


전쟁이란 극한 상황에서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억척어멈은 전쟁으로 먹고사는 인생이다. 전쟁이 끝나려 하자 오히려 걱정을 한다. 생계의 끈이 떨어질까 염려하는 것이다. 전쟁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억척어멈의 모습에서 두가지 상반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전쟁이라는 악에 굴복하는 비루한 인생이 그 하나라면,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는 탐욕적인 인생이 또 다른 하나이다. 현대에 죽음의 상인이라 일컬어지는 무기상은 분명 전자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득을 위해 전쟁을 조장하기까지 한다고들 말을 하지 않는가? 


파스칼의 팡세에는 전쟁의 비논리성을 지적한 바 있다. 강 이편에 있는 사람을 죽이면 살인죄가 되지만, 강 저편에 있는 사람을 죽이면 오히려 용맹하다고 상을 받게 된다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억척어멈의 큰 아들 아일립이 그렇다. 전쟁중에 살해행위는 용맹한 행동으로 칭찬을 받게 되지만, 전쟁이 끝난 후의 살해행위는 범죄가 되는 것이다. 아일립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아일립을 그런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작은 아들 슈바이처카스는 어떤가? 적에게 군사자금을 넘겨주지 않으려다 목숨을 잃게 되는 슈바이처카스는. 한 쪽에서는 영웅으로 받들어질 행위가 다른 쪽에서는 죽을 죄가 되는 것이다. 어느 한 쪽을 편드는 순간 이미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전쟁의 희생자가 될 상황에 처하게 된다. 명분은 어느 쪽이나 갖고 있다. 더구나 종교 전쟁이 아닌가? 종교가 평화의 사도가 아니라 전쟁의 사도가 되어버리는 이 기괴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카트린의 죽음. 조용히 잠든 도시가 죽음의 문턱에 놓여있다.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다. 무지막지한 공격으로 곧 죽게 될 것도 모른채 잠들어 있다. 카트린은 임박한 무자비한 공격을 시민들에게 알린다. 하지만 카트린은 목숨을 잃는다. 카트린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전쟁을 막았다. 잔혹한 전쟁의 참상속에서도 빛나는 희생이 있다. 오래 기억에 남을 희생이지만, 오히려 모두의 눈에 숨겨진, 잊혀진 그런 희생이 있을 것이다. 밝은 인간성의 승리는 잊혀진다.



옮긴이의 브레히트의 작품 해설에 기대어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의미를 되 짚어 본다. 


브레히트는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이란 작품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이 작품이 1941년 초연되었을 때, 처참한 전쟁터에서 어떻게든 자식들과 함께 살아가려고 몸부림쳤지만 끝내 자식들을 하나하나 잃고 마는 한 어머니의 불행한 운명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브레히트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반대되는 이러한 연출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1949년 직접 연출을 지휘했을 때, 억척어멈을 연기한 바이겔의 연기는 내면에 격렬한 분노를 품은 듯 하였다. 이 분노는 억척어멈의 분노가 아니라 오히려 억척 어멈을 향한 분노이었다. 바이겔은 스스로 억척어멈에게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멀찍이 거리를 두면서 그녀에게 분노하고, 관객에게도 그 분노를 느끼게끔 했던 것이다.'


"세 아이를 키우기 위해 전쟁터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장사를 하지만, 그 때문에 아이들을 모두 잃고 마은 것이다. 이보다 더한 모순이 있을까? 이러한 모순은 인간의 힘으로는 피할 수 없는 비극적이며 운명적이고 필연적인 모순은 아니라고 브레히트는 강조한다... 브레히트는 그러한 모순을 개인적이 아닌 사회적인 것으로 보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런 모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물건을 사고팔며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성공할 수는 없다. 수많은 사람의 파멸과 몰락, 불행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배우 자신이 극중인물에 감정이입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연기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무대 위의 인물들을 바라보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브레히트는 '서사적 태도'라고 일컬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대사나 줄거리가 아닌, 배우들의 연기나 작품구성방식 또는 연출 지문등를 통해 무대 위에서 실현된다. 이것을 '생소화 효과'라 한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각 장면들은 전통적인 극적 방식이 아닌 단순한 나열의 몽타주 기법으로 연결된다. 각 장면이 시작할 때 영사기로 제목을 무대 위 커튼 앞에 내보내고, 뒤에 이어질 장면도 간략하게 소개한다. 그리하여 관객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그에 대해 기대감을 품는 게 아니라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브레히트의 극 사이사이에는 노래가 끼어든다. 이것 또한 무대 위헤서 벌어지는 사건을 낯설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줄거리의 진행을 방해하고 관객을 환상에서 깨어나게 한다. 서사극 관객들은 극중 등장인물에 너무 빠져들어서는 안된다. 냉정한 눈으로 등장인물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무조건적인 이해가 아니라 잘못된 점을 찾아내 그 까닭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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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케루악 / 이만식 옮김 / 민음사

뉴욕타임즈 선정 100권 ☞http://blog.daum.net/ccsj77/48


3개월만에 써 낸 소설, <길 위에서>. 타자지를 갈아끼는 것이 귀찮아 타자지를 이어붙인 36미터 길이의 종이위에 단숨에 써 내려간 소설이 <길 위에서>이다. 이 책은 출간되자 마자 당시의 젊은이들을 매료시킨다. 이른바 '히피문화'라는 것이 생겨나게 된 단초가 된 것도 이 책이란다. 리바이스 청바지와 컨버터블 자동차, 커피솝의 대유행도 이 책 <길 위에서>에 영향력 때문이라고도 한다.   





<길 위에서>는 샐 파라다이스와 딘 모리아티의 미친 여행 이야기이다. 4차에 걸쳐 미대륙을 동서로, 남북으로 여행한 여정의 기록이다. 1부는 동쪽 끝 뉴욕에서 콜로라도주의 덴버를 거쳐 서쪽 끝 샌프란시스코까지의 길 위에 선 샐 파라다이스의 이야기이다. 2부는 뉴욕에 있는 샐이 그를 찾아온 딘 일행(메릴루, 에드던컬)과 함께 남부의 뉴올리언즈를 경유하여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길 이야기이다. 3부는 샐과 딘이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까지 가는 여정이며, 4부에는 뉴욕을 출발한 샐이 덴버에서 딘과 스탠과 합류한 후 멕시코시티까지 가는 여정이 그려지고 있다. 마지막 5부는 거의 미치광이가 된 딘과 샐의 마지막 해후와 슬픈 이별의 기록이다.  





딘 모리아티. 그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미친듯이 확인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딘의 깊은 곳에서 끓어 오르는 삶의 충동은 그 무엇도 막을 수가 없다. 그 충동은 마구잡이로 분출된다. 딘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거의 미치광이처럼 보인다. 다만 샐과 몇몇 친구들만이 딘의 이러한 충동을 이해할 뿐이다. 관습과 형식에 매여있는 것은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충동은 이러한 관습과 형식을 거부한다. 딘은 자유롭게, 미친듯이 연주하는 재즈에 열광한다. 딘의 눈에는 모든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보인다. 딘과 그의 친구들은 벤제드린이나 마리화나에 탐닉하기도 한다. 딘은 광적인 폭주(사실 그는 최고의 드라이버이기도 하다)로 동승한 사람들이 벌벌 떨게 만든다. 이 모두는 아마도 틀에 박힌 형식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삶의 충동적인 에너지의 발작일 것이다. 


딘은 천재적 기억력으로 끊임없이 자신이 경험했던 일들을 이야기한다. 또한 삶의 에너지가 각각 어떻게 분출되는지 끊임없이 사람들을 관찰하고, 새로운 삶에 진저리칠 정도로 흥분해 하여 사방으로 펄쩍 펄쩍 뛴다. 그에 비하면 샐은 미대륙을 횡단하면서 만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대자연과 대면에서도 삶의 충만한 에너지를 느낀다. 거대한 대륙, 빛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대평원의 칠흑같은 밤의 어둠, 달빛에 젖은 옥수수밭. 사람이 없는 곳에서도 여전히 침묵의 공간은 존재하고 있다. 


뉴욕에서 덴버를 거쳐 멕시코시티를 향한 여정은 샐과 딘에게 전혀 새로운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눈은 휘둥그레진다. 멕시코에서의 삶이란 미국민의 삶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소위 문명을 누리고 있다는 미국인들은 행복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


정말 고민하고 싶어 안달이 난 놈들이야. 뭐가 급한 것인지 데대로 된 판단도 못하고 순진하리만큼 불안과 불만으로 가득해. 저들의 영혼 말이야. 만인이 인정하는 고민거리를 발견할 때까지 절대 편안해지지 못해.


그러나 멕시코인들의 삶은 얼마나 다르냐?  그들이 가난하다고 멸시해서는 안된다. 그들에게는 문명이 가지지 못한 순수함과 위엄이 있다. 하지만 문명에는 특유의 독성이 있다. 하지만 이런 자각과 흥분과 방황에서 딘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딘의 미친듯한 삶에 대한 충동은 결국 슬프게 막을 내린다. 

 



샐과 딘이 삶의 원초적 충동을 통제하지 않고 순수하게 그 충동에 따라 미친듯이 살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케루악은 필연적으로 삶의 의미와 신의 존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길 위에서>는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케루악의 눈에는 현대 문명은 건설보다는 파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 문명이 모든 것 즉 삶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몰랐다. 이 모든 일이 어디로 흘러갈 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꽃은 미친 듯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우리 중 누구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혹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정해주신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신을 몰아낸 현대문명은 갈 길을 잃었다. 어떠한 삶의 길을 가야할 지 방향을 잃었다. 그러나 살아 있다면 어떻게 하든 그 삶의 길을 가야만 한다. 삶은 길이기 때문이다. 어떤 길을 가야만 할까? 목적도 의미도 이미 무너져 버린 사회에서는 각 개인의 삶의 길은 열려져 있을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가장 단순 명쾌한 방식으로 도에 다다르려 했다. 이봐, 너의 길은 뭐야? 성인의 길, 광인의 길, 무지개의 길, 어떤 길이라도 될 수 있어. 어떤 짓을 하든 누구에게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길이 있지. 그럼 어디서 어떻게 할래?

아무런 꿈이 없었기에 내 앞으로 세계가 활짝 열려 있었다.


하지만 샐이나 딘, 그리고 딘과 같이 젊음의 충동을 마구 쏟아내면서 미친듯이 아무렇게나 살아가던 그의 친구들 모두 어렴풋이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런 생활 방식은 젊음의 치기처럼 느껴지면, 그런 생활 방식은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생도 역시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른다. 모든 사물은 가장 안정된 상태를 향해 간다. 인생도 그렇다.


이런 미친 짓과 쉼없는 여행을 계속할 수는 없어. 우린 어딘가로 가서 뭔가를 찾아내야만 해.

이런 사진을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신기한 듯 바라보면서, 부모들이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사진 안에 들어 갈 만한 인생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 인생의 보도를 걸어갔다고 생각하게 될까? 우리의 인생이, 진짜 밤이, 그 지옥이, 무의미한 악몽이 길이 거친 광기와 방탕으로 가득했단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잭 케루악이 이 책을 3개월만에 단숨에 썼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는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멕시코로 여행하는 도중 딘은 스탠에게 자기 이야기를 좀 하라고 한다. 스탠이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할 지 당황스러워하자, 딘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껏 즐겨.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전부 말해봐. 그렇다해도 다 얘기할 순 없을테니까 느긋하게 해. 느긋하게.


아마 케루악이 글을 써 내려갈 때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약에 취해 몽환의 상태로 생각나는 대로, 아무리 사소한 것일찌라도 마음 속에 떠 오르는 것을 거침없이 전부 써 내려갔는지도 모른다. 그런 정황이 분명히 드러나는 부분들이 <길 위에서>의 중간 중간에 나타난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도 그렇다. 어떻게 제정신으로 이런 책을 3개월만에 써내려 갈 수가 있단 말인가?


잭 케루악은 젊은이들에게 이런 '길 위에서'의 생활을 미화하기 위해서 쓴 글은 아닐 것이다. 아마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무한한 자유에의 열망은 독성이 있음을 경고하려는 것인지도.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딘의 모습에서 자기들이 추구하는 자유의 원시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딘과 같이 길위에 섰다. 하긴 좁은 울타리내에서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범인들에겐, 케루악의 <길 위에서>는 어디론가 용감하게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책이기는 하다. 누군들 딘보다 사정이 나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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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속/ 엘리아데/ 이은봉 옮기/ 한길사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꼭 읽어야 할 100권 ▶http://blog.daum.net/ccsj77/48

 

여러 번 <성과 속> 앞에서 멈칫거렸다.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100권 중 한 권이지만 흥미가 당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을 펴서 이리저리 뒤 적어 본 적도 있었지만, 마음이 가지 않았다. 제목도 생경하다. <성과 속>이라니. 하지만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책들 중 나를 실망시킨 책은 아직까지는 없었다. 마음 단단히 먹고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손 끝으로 가만히 책장을 넘긴다. 기대감 때문일까? 마음이 잔잔하게 울렁인다. 이 책은 무얼 줄까?

 

책은 깨끗했다. 장담은 할 수 없으나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책인 듯 했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김에 따라 왜 이 책이 이토록 깨끗한지 이유를 알겠다. 처음에 느꼈던 긴장감과 기대감은 점점 실망감과 지루함으로 변해갔다. 얼기설기 엮인 허술한 바구니처럼, 무언가 진귀한 것을 담은 그런 책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은 끝까지 읽었다.

 

자 이제 다시 한번 더 읽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한번 읽은 것으로 만족하고 덮어버릴 것인가? 나는 다시 한번 읽는 것을 선택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아마 내가 감지하지 못한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이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읽는 <성과 속>은 처음과는 사뭇 달랐다. 다시 읽기를 잘했다. 이 책을 다시 읽고 난 후 이 책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달라졌다.

 

엘리아데는 원시문화 단계에 있는 다양한 종족들의 종교적 의례 및 그들의 신화를 연구하면서, 그 다양성보다는 공통점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 한다. 이 연구를 통해 엘리아데는 종교와 관련된 여러 의문들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신이나 영과 같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생각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사후의 세계와 같은 초월적 세계에 대한 생각들은 또한 어디서 연유한 것인가? 그러한 사상들은 어떻게 철학의 세계로 편입되었는가? 종교적 의례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종교적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은 어떠한가?  왜 그들은 그런 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가? 근대에 이르러 나타난 비종교적 인간이 가지는 실존과 존재에 대한 불안은 무엇 때문인가? 그 해결책이 있는가?

 

인간이 살아가는 '속俗'의 공간은 균질하다. '속'의 공간이 균질하다는 것은 방향성이 없다는 말이다. 중심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聖스러운 공간이 이 '속'의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공간은 더 이상 균질하지 않게 된다. '성'의 공간과 '속'의 공간 사이에 단절면이 생기고 결과적으로 공간은 비균질해진다. 이제는 성스러운 공간을 중심으로 방향성이 설정된다. '성'의 공간은 왜 성스러운 것일까? 그 공간은 신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속된 세계를 벗어나 초월적인 세계와의 통로가 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고대의 종교적 인간들은 이렇게 '성'과 '속'의 구분함으로 그들의 불안감을 잠재웠다. 그들은 세계의 중심인 이 '성'의 공간 가까이에 살기를 원했다. 그들은 이 '성'의 공간을 중심으로 생활공간을 확장해 왔다. 종교가 시작된 것이다.

 

고대의 종교적 인간들은 어떻게 초월적 존재(신 또는 영)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을까? 고대 사회의 종교적 인간들은 세계를 메시지로 가득 찬 존재로 보았다. 그들에게 우주, 자연은 그 자체로 신의 계시였다. 그들은 "신성성은 세계의 구조안에서 계시된다."는 생각을 가졌다. 즉 신들은 마치 자기의 존재를 세계 전체가 반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창조한 신이 존재한다는 명백한 계시였던 것이다.

 

창공은 단지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것만으로 벌써 종교적인 체험을 불러 일으킨다. 하늘은 그 자신을 무한한 것, 초월적인 것으로 보여준다. 그 초월성은 인간이 그 무한한 높이를 단순히 인식함으로써 계시된다. 지고자의 개념이 저절로 신성의 속성이 된다.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높은 지역, 별이 빛나는 영역은 초월자, 절대적인 실재, 영원성의 중대성을 획득한다. 122쪽

 

고대의 종교적 인간들은 우주의 다앙한 존재 양식 즉 우주적 리듬을 생의 신비를 밝혀주는 암호라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어 달의 변화 양상은 생의 신비를 계시해 주는 것이었다.  종교적 인간들은 달이 기울어지고 이지러진 후에 다시 차 오르는 것과 같이 생도 그렇다고 생각하였다. 즉 죽음이 생의 마지막 종료가 아니다. 죽음은 단지 인간 생존의 또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생의 비밀은 달의 존재 양식, 달의 차고 기우는 리듬에 계시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원시 사회의 인간들은 죽음을 극복하려고 애써 왔다. 그들은 죽음을 통과 의례로 변형시킴으로 그렇게 했다. 원시인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본질적인 것이 아닌 어떤 것을 버리는 존재, 즉 세속적인 생명을 버리는 존재에 지나는 않는다. 그래서 죽음은 최고의 가입식, 즉 새로운 영적 존재의 시작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죽는 것은 죽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의 변화라고 생각함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근대 과학의 영향으로 세계가 탈신성화의 길을 걸으면서, 종교적 인간과는 대비되는 비종교적 인간이 나타난다. 비종교적 인간은 초월성을 거절한다. 그들은 '실재'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실재'의 상대성만을 인정할 뿐이다. 심지어 그들은 존재의 의미를 의심하는 데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또한 근대의 비종교적 인간은 새로운 실존적 상황을 상정한다. 즉 역사의 주체 및 동인은 오로지 자기 자신일 뿐,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초월적인 것을 거부한다. 성스러운 것, 즉 초월적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그가 자유를 획득하는 데 최대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비종교적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그는 최후의 신이 살해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183면

 

비종교적 인간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스스로 신의 속박아래 자신을 묶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비종교적 인간은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대적 자유의 추구는 결국 긴장과 불안으로 이어진다. 끊임없이 스스로 삶의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 긴장감과 그 방향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불안이 절대적 자유에는 필연적으로 내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계가 없는 자유는 독이 든 성배와도 같다.

 

현대 사회의 모든 실존적 위기는 세계의 실재성과 세계 내에서의 인간의 현존을 다시 한 번 문제 삼는 것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실존적 위기도 결국 '종교적'이다. 왜냐하면 종교란 결국 하나의 존재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란 모든 실존적 위기의 모범적 해결책이다. 이것은 위기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생존을 더 이상 우연이나 특수한 것에 맡기지 않는, 따라서 개인적 상황을 초월하게 만드는 가치를 향하여 마음을 '열게'만든다.

 

종교적 인간에게 우주의 존재 양상은 모범적인 삶을 모습의 계시이기도 하였다. 종교적 인간에게 성스러운 공간이 속된 공간에 방향성을 설정하듯 신의 계시는 인간의 삶에 참다운 방향과 의미를 부여해 준다. 탈신 성화된 비종교적 인간들이 겪는 긴장과 불안은 아마도 방향성의 상실 때문이 아닐까? 방향을 상실한 비종교적 인간들도 내심 그 깊은 속에서는 방향성을 설정해 줄 고정점, 즉 중심을 희망하지 않을까?  

 

상대성과 방향 상실에서 야기된 긴장과 불안에 종지부를 찍고 하나의 절대적인 지점을 산출시키는 징표를 사람들은 희망한다. 60쪽

 

엘리아데의 <성과 속>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탈신성화된 비종교적 인간들의 상황을 이와 같이 말하면서, 이들도 다시 옛 기억을 되찾아 종교적으로 실존에 대한 불안과 방향 상실로 야기된 긴장에 종지부를 찍을 가능성이 언제나 상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근대 사회의 비종교적 인간은 종교성을 상실하였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와 신화는 그들의 무의식의 어둠 속에 '은폐'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즉 비종교적 인간은 종교를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을 상실하였지만 그의 가장 깊은 존재 밑바닥에는 아직도 그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초의 타락 이후 종교적 감각은 분열된 의식의 차원으로까지 내려와 버렸다. 두 번째 타락 이후 그것은 더욱 내려와, 무의식의 심연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 그것은 '망각되고' 말았다.

 

      

 

<성과 속> 목차

001. 성과 속은 무엇인가· M. 엘리아데의『성과 속』
002. 서론
003. 성스러운 공간과 세계의 정화
004. 성스러운 시간과 신화
005. 자연의 신성과 우주적 종교
006. 인간의 실존과 성화된 생명
007. 연대기적 고찰
008. 엘리아데 연보
009. 참고문헌
010.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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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속>


성스러운 공간의 계시는 인간에게 고정점을 부여하고, 그리하여 혼돈된 균질성 가운데서 방향성을 획득하며 '세계를 발견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삶을 획득하게 된다. 이에 반하여 속된 경험은 공간의 균질성과 상대성에 머문다. 이 경우에는, 고정점이 더 이상 유일한 존재론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참된 방향성도 불가능하다. 즉 그것은 그날 그날의 요구에 따라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정확히 말한다면, 거기에는 어떤 세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흩어진 우주의 단편들, 무한히 많은 다소 중성적인 장소의 무형태적인 집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속에서 인간은 산업 사회에 편입된 존재로서의 의무에 의해 움직이고 지배당하고 조종받는다. 57쪽


상대성과 방향 상실에서 야기된 긴장과 불안에 종지부를 찍고 하나의 절대적인 지점을 산출시키는 징표를 사람들은 희망한다. 60


전통 사회의 하나의 특징은 그들이 사는 영역과 그 영역을 둘러싼 미지의 불확정적인 공간 사이의 대립을 상정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사는 영역은 세계이자 코스모스(우주)이다. 그 이외에는 코스모스가 아니라 일종의 '다른 세계'이며, 유령과 악마와 '외인들'(이들은 악마와 죽은 자의 영들과 동일시되고 있음)이 살고 있는 이질적인 혼돈의 공간이다. 일견 이 공간의 단절은 사람이 거주하는 질서있고 우주화된 영역과 그 영역을 벗어난 미지의 공간의 대립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한편에는 코스모스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카오스가 있다. ...성스러운 것은 경계를 정하고 세계의 질서를 세운다는 의미에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하나의 영역은 그것을 새롭게 창조함으로써, 따라서 정화함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된다. 61~63 


오늘날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실재를 창조할 때 신들은 또한 동시에 성스러운 시간도 창조한 것이다. 90


그리스도 이전의 특히 고대의 여러 종교에서 주기적으로 재현된 성스러운 시간은 신화적 시간, 즉 역사적 과거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원초적인 시간이다. 그것은 또한 신화에서 이야기되는 실재의 출현 이전에는 어떠한 시간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앞에 선행하는 다른 시간이란 없으며, 갑자기 출현했다는 의미에서 최초의 시간일 것이다. 91


우주 창조 가운데는 시간의 창조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고대 문화의 종교적 인간에게 모든 창조, 모든 존재는 시간 안에서 시작한다. 즉 어떤 것이 존재하기 전에는 그것에 고유한 시간도 존재할 수 없다. 우주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우주적 시간도 없었다. 어떤 특수한 식물종이 창조되기 전에는 지금 그것을 성장시키고, 열매를 맺게 하고, 그리고 죽게하는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든 창조를 시간의 시초에, 태초에 생겨났다고 상상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시간은 새로운 종류의 존재자가 최초로 출현함과 동시에 발생한다. 94~95


우리는 도시, 사원, 집의 우주론적 상징 구조가 세계의 중심이란 관념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배웠다. 이 중심의 상징에 내포되어 있는 종교적 상징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인간은 위로 열려 있는 장소, 즉 신들의 세계와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지려고 한다. 세계의 중심에 가까이 살려고 하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가능한 한 신들과 가까이 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종교적 축제의 의미를 분석해 보면 우리는 신들에게 가까이 접근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발견할 수 있다. 성스러운 기원의 시간을 회복하는 것은 신들과 동시대인이 되는 것, 따라서 신들의 현존 앞에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스러운 공간과 성스러운 시간 체험에서 읽을 수 있는 지향성은 원초적인 상황, 즉 신들과 신화적 선조가 현존하여 세계를 창조하거나 조직하거나 혹은 인간에게 문명의 기초를 계시할 때로의 회귀를 열망하고 있다. 105


기원에 대한 향수는 종교적 향수에 해당한다. ...그 때로의 주기적 회귀는 주로 태초의 완전성에 대한 향수로 설명할 수 있다. 낙원에 대한 향수 105



인간은 종교적이 되면 될 수록 그들의 태도와 행동을 인도할 모범적 모델을 더욱 많이 가지게 된다. 말을 바꾸면, 인간은 종교적으로 되면 될 수록 실재에 더 많이 들어가게 되고, 비모범적이고 '주관적'이어서 결국 그릇된 행동 속에서 길을 잃어버릴 위험이 훨씬 줄어들게 된다. 108


신화의 최고 기능은 모든 의례 및 인간의 본적적 활동(식사, 성생활, 노동, 교육)에 대한 모범적인 모델을 확립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 존재로서 충분히 책임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은 신들의 모범적 행동을 모방하고 그들의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109



종교적 인간을 초인간적, 초월적 모델을 가진 인간 존재로 여기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종교적 인간은 신들이나 문화영웅, 신화적 선조를 모방하는 한에서만 자신을 진정한 인간으로 인정한다. 이것은 종교적 인간이, 속된 체험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 인간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신적인 모델에 접근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만든다. 111


종교적 인간이란 광기, 파렴치, 범죄의 영역과 접하는 행동에 열중하는 경우에도 신들을 모방하려 하고 또 모방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진다. 114 


우주의 종교성이 상실될 때...종교적 내용을 잃어버린 반복은 필연적으로 비관적인 이냉관으로 이끌려간다.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시간이 더 이상 태초의 상황, 신비로 가득찬 신들의 현존으로 회복하는 길이 되지 못할 때, 즉 탈신성화 될 때 순환하는 시간은 두려운 모습을 하게 된다. 즉 그것은 영원히 반복하여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원환 주기가 된다. ...무한히 자신을 반복하는 순환적 시간에 직면하여 절망을 느낀 것은 주로 종교적, 철학적 엘이트들이었다. 이 영원회귀는 인도사상에서 보편적 인과율의 법칙인 업의 힘에 의한 실존으로의 영구적인 귀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은 우주적 미망(maya)에 상응하게 되고 실존으로의 영원한 회귀는 고통과 속박의 무한한 계속을 의미하였다. 종교적, 철학적 엘리트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실존으로의 비회귀, 업의 단절이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우주의 초월을 포함한 궁극적 해방이었다. 116~117


고대 및 동방의 여러 종교와 인도 및 그리스에서 형성된 영원회구의 신화적, 철학적 개념에 대하여 근본적인 혁신을 가져온 것은 유대교이다. 유대교에서 시간은 처음과 끝을 가지고 있다. 순환하는 시간이란 개념은 폐기되었다. 야훼도 이제 우주적 시간 안에서 현현하지 않고 불가역적인 역사적 시간 가운데서 현현한다. ...예루살렘의 몰락은...역사에 대한 사적인 간섭이고 ...그렇게 하여 역사적 사건은 새로운 차원을 획득한다. 그것은 신현이 된다. 118~119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시간의 평가에서 이보다 더 전진한다. 신이 육화되어, 즉 역사적으로 제약된 인간 실존을 받아들인 이래 역사는 성화될 가능성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복음서가 환기시킨 그 때는 특정한 역사적 시간, 즉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이 된 시대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성화되었다. 현대의 그리스도교도가 의례적 시간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가 살았고, 수난받고, 부활한 그 때로 되돌아 간다. 그러나 그것은 신화적 시간이 아니고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를 다스렸을 때의 시간이다. ...역사는 마치 신화적 관점이나 원시 및 고대 종교의 여러 관점에서 그런 것과 같이 다시 한 번 성스러운 역사가 된다. 119


헤겔은 유대-그리스도교적 이념을 이어받아 그것을 총체로서의 우주적 역사에 적용하고 있다. 즉 세계 정신은 부단히 역사적 사건 가운데서 현현하고 오로지 역사적 사건에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역사는 그 전체가 신현이 된다. 역사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세계정신이 그렇게 하기를 욕구하기 때문에 그것이 행한 그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여 20세기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역사 철학에의 길을 열어 놓았다.


역사주의는 그리스도교의 해체에 의한 산물이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에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그것은 그리스도교에 기원을 가진 관념이다) 거기서 구원론적, 초역사적인 의미를 계시해 주는 모든 가능성을 거부함으로써 역사적 사건 그 자체만을 인정하게 된다.


어떤 역사주의 철학과 실존주의 철학이 주장하는 시간 개념에 관해서는 다음의 관찰이 흥미를 끈다. 즉 시간을 더 이상 원환으로 생각되지는 않지만 현대 철학에서의 시간은 다시 인도 및 그리스의 영원회구의 철학에서와 같은 두려운 면을 지니고 있다. 철저하게 탈신성화된 시간은 돌이킬 수 없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불안하고 덧없는 지속으로 나타난다. 120


제3장 자연의 신성과 우주의 종교

이 장에서 우리는 종교적 인간에게 세계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좀더 정밀하게 표현하자면, 신성성은 세계의 구조 안에서 어떻게 계시되는가를 이해하고자 힘쓸 것이다. 122


창공은 단지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것만으로 벌써 종교적인 체험을 불러 일으킨다. 하늘은 그 자신을 무한한 것, 초월적인 것으로 보여준다. ...그 초월성은 인간이 그 무한한 높이를 단순히 인식함으로써 계시된다. 지고자의 개념이 저절로 신성의 속성이 된다.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높은 지역, 별이 빛나는 영역은 초월자, 절대적인 실재, 영원성의 중대성을 획득한다. 122


천공 구조를 갖는 최고 존재자는 그 신앙 숭배로부터 점차 사라져가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인간으로부터 벗어나 하늘로 올라가서 멀리 있는 감추어진 신이 된다. ...차차 그의 지위는 신화적 선조, 모신, 풍요신 등과 같은 다른 신격들로 대체되었다. 125


신의 격절성은...[인간이] 좀더 구체적인(더욱 육체적인, 특히 열광적인) 종교 체험에 따라 움직이게 되면, 원시인은 초월적인 천신에게서 멀어져 간다. ..삶과 훨씬 밀접하게 관련된 체험이 나타나면, 위대한 모신과 강력한 힘이 있는 신 혹은 풍요의 정령들이 창조신보다도 분명히 더 동적익 인간에게 더 가까운 신이 된다.

...[그러나] 공동체의 존속 자체가 문제가 되는 위급 존망의 상황에서는 평상시 삶을 보증해 주고 고양시켜 주는 신들을 버리고, 인간은 최고신에게로 돌아[간다]. 128~129


신들은 마치 자기의 존재를 세계 전체가 반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세계를 창조하였다....하늘의 신성성은 본래의 종교 생활에서 몸을 감춘 후에도 상징을 통해 계속 그 역할을 유지하고 있다. 130


물른 가능성의 우주적인 총체를 상징한다. 그것은 일체의 존재 가능성의 원청니아 저장고이다. 즉 물은 모든 형태에 선행하며 모든 창조를 떠받치고 있다...다른 한편, 물 속에 가라앉는 것은 무형태로의 회귀, 존재 이전의 미분화된 상태로 되돌아감을 상징한다. 부상은 우주 창조의 형성 행위를 재현하고, 수몰은 형태의 해체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물의 상징은 죽음과 재생을 포함한다. ...물은 분해하고 형태를 파괴하고 '죄를 씻어냄'과 동시에 정화하고 재생한다. 131-132

 

역사는 고대적 상징의 구조를 근본부터 바꿀 수는 없었다. 역사는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덧붙이지만 이 새로운 의미가 상징의 구조를 파괴하지는 않는다....우주적 신성성의 계시는 어떤 점에서 원초적인 계시이다. 즉 그것은 인류에게 종교적으로 먼 과거에 일어난 것이고, 그 후에 역사에 의해 도입된 변혁들도 그것을 폐기시킬 만한 힘을 갖지 못하였다. 136 -> 예를 들어 세례에 있어서의 물의 역할, 우주의 리듬-계절, 낮, 밤-과 부활


여성의 출산력에는 우주적 원형이 있다. 그것은 만물을 낳는 어머니인 대지의 출산력이다....여러 종교에서 우주 창조 혹은 적어도 그 완성은 천신과 지모의 성혼의 결과로 이루어진다....그 때문에 인간의 결혼식은 우주적 성혼의 모방으로 간주된다...곡물의 풍요를 위한 의례적 오르기도 다산력의 남신과 지모와의 성혼이라는 성스러운 모델을 가지고 있다....어떤 관점에서 보면 오르기는 창조 이전의 미분화된 상태에 상응한다. ...사회적 혼란, 성적인 방종, 진탕 마시고 노는 잔치는 세계 창조보다 앞선 무형태의 상태로 돌아감을 상징한다...신년 의례에서 우리들이 시간의 갱신과 세계의 재생으로서 발견한 갱신의 관념은 오르기적 농경 제의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여기서도 오르기는 생명의 완전한 갱신, 따라서 대지의 출산력 및 수확의 풍요를 보증하기 위하여 우주적 밤으로, 형태 이전으로,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142-144

* 오르기: 망아적 도취의 축제, 방자한 술자리, 유흥, 방종


고대 사회의 종교적 인간들은 세계를 메시지로 가득 찬 존재로 보았다...가금 그 메시지는 암호로 되어 있으나 인간에게 그 암호의 해독을 도와주는 신화가 있다. ...인간 경험의 전체는 우주적 삶과 동일시 될 수 있고 따라서 성화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우주는 최상의 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143


우주적 출산력의 여러 측면들이 계시하는 것은 결국 생산의 신비, 즉 생명 창조의 신비를 밝혀 주고 있[다]...종교적 인간에게 죽음은 생의 마지막 종료가 아니다. 죽음은 단지 인간 생존의 또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이 모든 것은 우주적 리듬 가운데 암호로 기록되어 있다. 그 때문에 인간은 우주가 그 다양한 존재 양식 속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단지 해독할 뿐이고, 그렇게 해야 생명의 신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44


우주는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것, 그래서 자신을 주기적으로 갱신한다는 것이다. 끝없는 생명 출현의 신비는 우주의 주기적인 갱신과 결합하고 있다. 144


종교적 인간에게는 식물의 리듬 속에서 생명과 창조의 신비 그리고 갱생, 청춘 및 불사의 신비가 계시된다. 146


철저하게 탈신성화된 자연의 경험이라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고, 그것도 근대 사회으 소수, 특히 과학자들만 접근할 수 있는 경험이다. 147


신성한 우주의 경험이 ...엷어지고 변화해서 결국엔 완전한 인간적 감정-예컨대 예술을 위한 예술의 감정-이 되기에 이르렀[다] 149


제 4장 인간의 실존과 성화된 생명

세계를 향해 열린 실존

고대 사회의 종교적 인간의 관점에다 우리 자신을 위치시키자마자 곧 발견하게 되는 것은, 세계는 신들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현존한다는 사실이다. 즉 세계의 현존이 이미 무엇인가를 '의미하고' 무엇인가를 '말하고자한다'는 것이다. 세계는 말이 없는 것이 아니고 불투명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목적도 의미도 없는,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인간에게 우주는 '살아있고' '말을 하는' 무엇이다. ...이 때문에 인간은 어떤 문화 단계 이후부터 자신을 하나의 소우주로 보기 시작하였다....우리는 이 모든 상동성을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체득된경험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이해하도록 해보자. 명백히 그의 삶은 하나의 차원을 더 소유하고 있다. 즉 그는 인간적인 것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주적이다. 왜냐하면 그의 삶은 초인갅거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적 존재 양식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열린 실존이라고 부를 수 있다. 종교적 인간, 특히 원시인의 실존은 세계를 향하여 열려 있다. 즉 종교적 인간은 삶 가운데서 결코 고독하지 않으며 세계의 일부가 그의 안에 살아 있다....세계로의 개방성은 종교적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종교적인 것이요 존재와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귀중한 것이다. 155-156


삶의 성화

신체 기관이나 그 기능들은 다양한 우주적 영역 및 현상과의 동일시를 통하여 종교적 가치를 부여받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인간-우주적 상동 관계에 흥미를 가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여러 실존 상황의 징표들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인간들이 열린 세계 가운데 살고 있으며, 그의 실존은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고 말하[는 것은] 종교적 인간이 우주적이라고 일컬음직한 무한한 경험 체계에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157-58


여러 신체 기관과 생리적 생활의 신성화는 이미 모든 고대 문화 단계에서 풍부히 확인된다. 160


신체-집-우주

현대의 비종교적인 인간에게 우주는 불투명하고 둔하고 말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우주는 어떤 메시지도 전해 주지 않으며, 어떤 암호도 갖고 있지 않다....산업 사회의 그리스도교, 특히 지식인의 그리스도교는 중세시대까지 지녔던 우주적 가치를 오래 전에 상실해 버렸다...도시인의 종교적 감수성이 뚜렷하게 빈곤해졌다...그들의 종교적 체험은 더 이상 우주를 향해 열려 있지 않다.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적 체험이 되어버렸으니, 즉 구원은 인간과 그의 신에 관한 문제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 심지어 진정한 그리스도교라도 더 이상 세계를 신의 창조물이라고 느끼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164-165


좁은 문의 통과

우주의 모든 형태들-우주, 사원, 집, 신체-이 모두 위를 향한 출구를 가지고 있다....그 출구는 하나의 존재 양식에서 다른 존재 양식으로, 하나의 실존적 상황에서 또 다른 실존적 상황으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한다...인간 존재는 일련의 '통과 의례', 간단히 말하면 연속적인 가입식을 통하여 완성에 도달한다[는 관념을 표현하고 있다]


위를 향한 출구는 하늘과의 교류, 초월을 향한 욕구를 나타내고 있다. 문지방은 안과 밖의 경계선을 구체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의 지대에서 다른 지대로(세속적인 것에서 성스러운 것으로)의 이행의 가능성을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다리와 좁은 문의 형상은 위험한 통과의 관념을 나타내며, 이 때문에 가입 및 장례 의례와 신화에 자주 등장한다. 가입식, 죽음, 신비적인 엑스터시, 절대적 인식, 유대-그리스도교에서의 신앙,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존재 양식에서 다른 존재 양식으로의 이행에 해당하며, 참된 존재론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 역설적인 이행(그것은 항상 단절과 초월을 가져오기 때문에)을 표현하기 위하여 다양한 종교적 전승에서 위험한 다리와 좁은 문의 상징이 아주 풍부하게 사용되고 있다. 166-167


이상과 같은 가입식과 장례식의 몇몇 실례들이나 다리와 문의 형이상학적 상징은 일상 생활과 그에 속한 '작은 세계'-가구가 있는 집, 일상적 행위와 동작의 매일 같은 반복등-가 종교적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어떤 방식으로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종교적 인간은 어디서나 징표를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가장 습관적인 동작까지도 영적인 행위를 의미할 수 있다. 길과 보행도 종교적 가치로 변형될 수 있다. 모든 길은 생명의 길을 상징할 수 있고, 모든 보행은 순례, 세계의 중심으로의 여행을 상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의 소유가 세계에서 안정된 상황의 선택을 의미한다면, 집을 버리는 순례자와 고행자는 그들의 보행에 의하여, 그들의 끊임없는 이동에 의하여 이 세계를 떠나, 어떤 세속적인 조건도 거부하려는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168


탐색, 중심으로의 길을 선택한 사람은 가족과 사회 안에서의 그의 위치, 즉 둥지를 포기하고 최고의 진리를 향한 보행에 전적으로 몸을 바쳐야 한다. 고도로 발달된 종교에서 그 진리는 숨은 신과 일치한다. 168



통과 의례

비종교적 인간에게는 탄생, 결혼, 죽음은 오로지 개인과 그 가족에게만 관련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비종교적인 삶의 관점에서 모든 통과는 그 의례적 성격을 상실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기된 종교적 실천이 희미한 기억, 혹은 심지어 그에 대한 동경 가운데서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입식 의례는 종교적 인간이 '자연적' 단계에서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과 신화가 그에게 계시하는 이상적인 이미지에 따라 자신을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노력은 후대의 진보된 사회 윤리의 씨앗 가운데 이미 포함되어있다. 171


가입식의 현상학

신가입자가 유아적이고 세속적이며 부활 없는 생에서는 사멸하고 새롭게 성화된 실존으로 재생한다면, 그는 또한 인식과 지를 가능케 하는 어떤 존재 양식으로 재생한다는 것이다. 신가입자는 오로지 새로 태어난 자 혹은 부활한 자일 뿐만 아니라 알고 있는 자, 신비를 알고 형이상학적 계시를 받아들이는 자이기도 하다. 그는 숲속에서 단련을 받는 동안 성스러운 비밀, 신들과 세계의 기원에 관한 신화, 신들의 진짜 이름, 가입식에 사용되는 의례용 두구들의 역할과 유래를 배운다. 가입식은 정신적인 성숙을 의미한다. 신가입자 즉 신비를 체험한 인간은 지자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172



모든 고대 사회에서 영성에 대한 접근은 죽음과 새로운 탄생의 상징 속에서 그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174


남성 결사와 여성 결사


죽음과 가입식

우리는 원시 사회의 인간들이 죽음을 통과 의례로 변형시킴으로써 죽음을 극복하려고 애써왔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달리 말하면, 원시인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본질적인 것이 아닌 어떤 것을 버리는 존재, 즉 세속적인 생명을 버리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줄여 말하면, 죽음은 최고의 가입식, 즉 새로운 영적 존재의 시작으로 간주되기에 이른다. 178


제2의 탄생과 영적 생성

영적인 삶으로 들어가려는 자는 항상 세속적인 조건에서는 죽고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181


근대 세계에서의 성과 속

원시 사회와 고대 문명의 종교적 인간이 지녔던 상황의 대부분은 역사가 진행되면서 오래 전부터 시대에 뒤떨어지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오늘날의 우리로 형성하는 데 기여해 왔으며 그럼으로써 결국 우리 자신의 역사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

종교적 인간은 그가 처해 있는 역사적 맥락이 어떠하든지 간에 항상 이 세계를 초월하면서도 이 세계 안에서 자신을 현현하는, 그럼으로써 이 세계를 성화하고 또 그것을 실재적인 것으로 만드는 성스러운 것, 절대적 실재가 있다고 항상 믿는다. ...


비종교적 인간은 초월성을 거절하며 '실재'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심지어 존재의 의미를 의심하는 데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근대의 비종교적 인간은 새로운 실존적 상황을 상정한다. 즉 그는 그 자신을 오로지 역사의 주체 및 동인으로만 간주하며 초월적인 것을 모두 거부한다....성스러운 것은 그가 자유를 획득하는 데 최대의 장애물이다. 그는 완전히 신비성을 잃어버릴 때에만 그 자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최후의 신이 살해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근대의 비종교적 인간이 비극적 실존을 받아들이고 있다. 182-183


모든 실존적 위기는 세계의 실재성과 세계 내에서의 인간의 현존을 다시 한 번 문제 삼는 것이다. 실존적 위기는 결국 '종교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문화 단계에서 존재와 성스러운 것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세계를 창건한 것은 성스러운 것의 체험이며, 가장 원초적인 종교까지도 결국 하나의 존재론이다. ...종교란 모든 실존적 위기의 모범적 해결이다. ...종교적 해결은 위기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생존을 더 이상 우연이나 특수한 것에 맡기지 않는, 따라서 개인적 상황을 초월하게 만드는 가치를 향하여 마음을 '열게'만든다. 187-188


근대 사회의 비종교적 인간은 아직도 그의 무의식의 활동으로부터 영양분과 원조를 받고 있지만 세계에 대한 본래의 종교적 체험과 비전을 보여주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무으식은 그에게 그 자신의 삶의 어려움에 대한 해결을 제공하며, 이런 방식으로 종교의 역할을 수행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비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근대인들에게 있어 종교와 신화는 그들의 무의식의 어둠 속에 '은폐'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이러한 인간이 내면을 깊이 안에 생의 종교적 비전을 회복할 가능성을 감추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종교적 인간은 의식된 종교체험, 따라서 종교를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을 상실하였지만 그이 가장 깊은 존재 밑바닥에는 아직도 그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최초의 타락 이후에 그의 선조인 원초적 인간이 세계안에서 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인식력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과도 같다. 최초의 타락 이후 종교적 감각은 분열된 의식의 차원으로까지 내려와 버렸다. 두번째 타락 이후 그것은 더욱 내려와, 무의식의 심연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 그것은 '망각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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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게이치로/ 김효순 옮김/문학동네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때론 궁금했다. 많은 책을 읽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는 것이 좋은가?

김병완씨는 <48분 기적의 독서법>에서 3년 1000권 프로젝트를 권한다.  ☞ http://blog.daum.net/ccsj77/38

그는 1년에 1000권의 책을 읽고 '의식의 혁명'을 경험했다고 주장한다. 아마 김병완씨의 주장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많은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한 권을 읽더라도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은 바로 그러한 생각을 대변한다.  


제1부 양에서 질로의 전환 (슬로 리딩의 기초편)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이란, 한 권의 책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읽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책을 감상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을 아까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시간과 노력에서 독서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책읽기 방법이다.


왜 슬로 리딩을 해야할까?

"쓰는 사람은 누구나 읽는 이들이 자신의 책을 슬로 리딩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글을 쓰"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품 속에 다양한 장치를 숨겨두고 있다. 소설 속의 다양한 묘사와 세세한 설정은 무의미한 것으로, 그리고 플롯을 파묻히게 만드는 것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이러한 세세한 점들이 소설을 소설답게 만든다. 이러한 장치나 세부 설정에 유의함면 더 즐거운 독서가 가능해진다.


"<법의 정신>은 몽테스키외의 붉은 보르도이다." 스위스의 고명한 비평가 장 스타로뱅스키의 말이다.

최상의 깊은 맛을 내는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정성이 필요할까?

일류 지성의 소유자인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을 저술하는데 이십년을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책을 단숨에 들이키면 그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을까?

천천히 읽으면서 이해하고자 노력을 기울일 때 책은 자신의 비밀을 조금씩 밝혀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비밀을 알아낸 지성만이 시간과 노력이 빚어낸 포도주와 같은 성숙을 경험할 수 있다.



제2부 매력적인 '오독'의 권장 (슬로 리딩의 테크닉편)


조사, 조동사에 주의하라

'나는 사과를 좋아한다.'는 말과 '나는 사과를 좋아하기는 한다.'라는 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조사나 조동사의 사용에 따라 주는 인상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사전 찾는 습관'을 기른다.

지식을 심화하려면 귀찮아하지 말고 사전을 찾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자. 잘 모르는 말이 나오면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말고 잠시 멈추어 반드시 사전을 찾아보는 것, 그것은 책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작자의 의도는 반드시 있다.

작자의 입장에서 보면 소설이든 에세이든 논문이든, 기본적으로 작품의 한 단어 한 구절에서부터 작품 전체에 이르기까지 '읽는 사람이 이렇게 읽어주었으면 좋겠다'라는 '작자의 의도'가 반드시 있다. 이 의도를 찾아내려고 주의를 기울이라.


창조적 오독

한편,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작자가 독자의 자유로운 해석을 미리 상정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독자의 창조적 독서행위를 적극 권장하기도 한다. 일종의 '오독'이지만 이러한 '창조적인 오독'은 풍요로운 독서경험으로 이끈다. 

슬로 리딩을 통해 심사숙고한 끝에 '작자의 의도' 이상으로 흥미 깊은 내용을 찾아내는 것은 '풍요로운 오독', '매력적인 오독'이라 하겠다.

책을 읽는 또 하나의 기쁨은 타자와의 만남이다. 자신과 다른 의견에 귀를 기울여 자신의 생각을 보다 유연하게 만드는 것, 이를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오독'을 즐기고 다른 판편으로는 '작자의 의도'를 생각하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이는 슬로 리딩의 비법이라 할 수 있다.


'왜'라는 의문을 갖자

왜 이런 내용을 썼을까? 왜 굳이 이렇게 썼을까? 왜 이런 말을 썼을까? 내가 작가라면 어떻게 썼을까? 스스로 이런 자문자답을 하면서 읽자.

의문이 생기면 대충 넘어가지 말고, 혹은 일방적으로 책의 결함이라고 단정짓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그 구절에 귀를 기울여 보자.

좋은 책에는 어느 것에나 수수께끼가 존재한다. 그것을 푸는 기술은, 독자 개개인이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앞 페이지로 돌아가서 확인하자

모르는 것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책을 계속 읽어나가더라도 이해도는 반감된다. 기억이 나지 않는 부분은 무슨 내용이었는지 확실하게 확인하고 나서 다시 읽어나가는 게 좋다. 앞 페이지로 돌아가서 다시 뒤적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라.


보다 '앞으로'가 아니라 보다 '깊게'로

한 작가가 쓴 작품의 배후에는 엄청나게 광대한 말의 세계가 있다. 하나의 작품은 여태까지의 문학이나 철학, 종교, 역사들의 방대한 지식의 축적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을 서둘러 '앞으로'만 읽어나갈 것이 아니라, 보다 '깊게' 읽어야 한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한 작품에서 나오는 다른 작가나 작품을 읽어보고, 또 그 작품에 나오는 다른 작가나 작품을 읽어보는 연쇄 고리 여행을 하는 것은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소리내어 읽지 않는다.


베껴쓰기는 비효율적이다.


남에게 설명할 것을 전제로 읽는다.

블로그에 독서 감상을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밑줄과 표시

중요사항이나 기억할만한 구절등에 표시한다. 자신의 느낌이나 감상을 여백에 적어놓는다. 어려운 철학서나 평론을 읽을 때, 대명사가 가리키는 것을 표시한다. 접속사에 표시를 하며 읽는다. 특히 역접의 접속사에 유의한다.


'내 처지'로 바꾸어 본다.

진정한 독서의 깊은 맛을 느끼게 해 주며, 주체적으로 참가하는 독서의 방법이기도 하다.


'재독'이야말로 가치가 있다.

"독서에는 시기가 있다. 책과의 절묘한 만남을 위해서는 대를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오에 겐자부로의 <나라는 소설가의 창작법>에서

1년, 5년, 아니 10년 후에 읽으면 또 다른 느낌과 감동으로 다가오는 책들이 많이 있다.


제3부 슬로리딩 실천편은 목차를 그대로 옮겨놓는다.


제3부 동서고금의 텍스트를 읽다(슬로리딩 실천편>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회화속의 '의문문'에 주의한다.

'위화감'에 주의한다.

'시대배경'과 '5W1H'를 생각한다.

다시 전체로


모리 오가이의 <다카세부네>

'부자연스러움'은 장면전환의 표시

'생각하는 틀'을 명확히 한다.

독자를 '잠깐 감정 고르기'로 유도한다.

'감정의 효과'를 놓치지 말자

조건을 바꾸어 다시 읽는다


카프카의 <다리>

'첫 문장'에 의미가 있다

'형용사와 부사'에 착목한다

'장면전개의 의미'를 생각한다

대담하게 해석하는 용기를 가질 것!

'오독력'을 즐긴다

느낌은 몇 번이고 바뀔 수 있는 것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

왜 이런 신(scene)이 들어 있을까?

'사상의 대결'로서의 대화

'세세한 기술의 효과'를 감지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즈의 무희>

'주어의 생략'에 주의한다

'일인칭 소설'은 경계해야 한다


가네하라 히토미의 <뱀에게 피어싱>

테마를 설정하여 '다른 작품과 비교'해 본다

문장 표현을 '체감한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장송>

'이미지의 중층성"을 놓치지 말자

'작자에 대한 반감'이 머리를 작동시킨다

싫증이 나면 쉰다


푸코의 <성의 역사1-앎의 의지>

어려운 평론은 '보조선을 긋는다'

'상식에 대한 도전'을 시각화한다

문장을 쓸 때 참고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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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타인 백/ 김승욱 / 민음출판사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꼭 읽어야 할 100권  ☞http://blog.daum.net/ccsj77/48


인간의 탐욕은 어느정도까지일까? 가진 자의 탐욕을 언제까지 참아내야 하는 것일까? 인간성안에는 탐욕을 상쇄시키는 그 무언가 고귀한 것이 있는 것일까?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는 가진 자들의 탐욕에 대한 분노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터지지 않는 분노가 가슴 한 켠에 자리잡는다. 언젠가는 터질 시한 폭탄처럼...


1930년대 어느 때인가 톰 조드는 막 출소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 톰의 가족은 서부 캘리포니아로 이주할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오랫동안의 가뭄으로 농민들은 땅을 모두 잃게 되었고, 땅에서 쫓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톰과 그의 가족은 캘리포니아로 가면 좋은 일자리를 얻어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긴 여행을 떠난다. 서쪽으로 가는 66번 도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 나선 이들로 가득하다. 이 여행은 만만하지가 않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고생스러운 여행중 숨을 거두게 된다. 드디어 캘리포니아에 도착한다. 산위에서 바라본 캘리포니아 계곡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곳에서 일자리를 얻기는 하늘에 별따기보다 어려웠다. 수많은 이주민들이 몰려든 탓에 노동력 공급 과잉으로 인해 품삯은 터무니 없을 정도이다. 이 품삯으로는 가족들이 먹고 살기에도 어려울 지경이다. 더구나 이주민들에 대한 편견과 멸시는 참을 수 없는 지경이다. 이주민들은 공권력의 보호도 받지 못한다. 불공정한 처사에 반대하여 파업을 하던 케이시는 몽둥이에 맞아 죽게되고 톰은 또 다시 사람을 죽이게 된다. 쫓기게 된 톰, 그리고 위기에 처한 톰이 가족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면서 일자리는 더 이상 찾기 어렵고, 몇일동안 계속된 비로 주거지는 물에 잠기게 된다. 톰의 여동생은 우중에 사산을 한다. 비를 피해 자리를 옮기던 톰의 가족은 헛간을 발견한다. 그 헛간에는 어린 아이와 굶어 죽어가는 아버지가 누워있다.     


산 너머 산이라더니, 톰의 가족이 그 꼴이다. 상황은 악화되어갈 뿐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노동력을 착취하는 대농장주들, 그들이 심장에도 따뜻한 피가 돌까? 가진 자들은 가진 것을 나누어 주려고 하지않는다. 오히려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총을 사고, 독가스를 사고, 감시원들과 경비원을 고용한다. 가진 자들은 품삯을 낮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동자를 불러모은다. 이주민들은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불공정한 조건에 기꺼이 합의한다. 악순환이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이주민들은 말보다 못한 존재이다. 일일 품꾼인 이주민들은 일하지 않는 계절에도 먹을 것이 주어지는 말들보다 못한 존재이다. 인간이 인간을 이렇게 대우해도 되는 것일까? 권리를 찾기 위해 뭉친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며 린치를 가하는 사람들은,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무한한 탐욕을 그 근간으로 삼는 산업자본주의의 폐해는 인간 생명 경시에 분명히 드러난다. 인간 생명보다는 이익이 우선시 된다. 여기서 분노가 시작된다. 배고픈 자들의 분노.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오렌지를 불태운다. 굶주인 사람들 앞에서. 수확한 감자를 강물에 버린다. 굶주린 사람들이 감자 한 알이라도 건지려고 하지만, 감시원들이 그들을 막아선다. 공급 과잉은 가격 하락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굶주린 사람들의 눈에는 불꽃이 튄다.


'분노의 포도'를 읽으면서 톰의 가족의 상황이 나아지겠지, 조금만 더 기다리면 조금 좋아지겠지 하는 허망한 기대를 수없이 가졌다. 하지만 끝까지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도리어 상황은 폭주 기관차처럼 절벽을 향해 돌진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끈을 놓지 않는 톰의 어머니. 어떻게 보아야 할까? 살아 있는 동안에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 그냥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는 생명력 특유의 끈질김이랄까? 그것이 생명력의 본질일까?


우리 시대와는 다르다. 하지만 그렇게 다르지는 않다. 영리를 최고의 신성한 목적으로 하는 기업들은 인간 생명을 이윤 추구를 위한 도구로 생각한다. 사유 재산이 신성하는다는 사상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터무니 없는 꼼수이다. 사유 재산을 신성한 수준까지 높인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이다. 이 것은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고 보호하려는 꼼수이다. 돈이나 재산, 이윤보다 더 귀중한 가치를 찾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꿈에 불과한 것일까?


'분노의 포도'를 읽고 아직 우리 사회는 불완전하며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직시하면서,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다. 사회을 바꾸려는 마음까지는 갖지 않더라도, 자신만은 그런 더러운 자들처럼 살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은 아름다운 꽃을 피울 한 알의 씨앗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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