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cination-Nat King Cole

 

 

 

『닥터 지바고』중 <라라의 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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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길목에

왕벚나무 가지에 꽃으로 피어날 멍울들이

하나씩 돋아 난다.

 

 

 

 

가지 가지 마다

여기 저기

우후죽순처럼 돋아나는 멍울들

 

 

 

멍울들은 날이 갈 수록

두툼해 지고

부풀어 오른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마음에는 아랑곳없이

멍울들이 부풀어 가더니

기어이 분홍색 꽃잎들이 머리를 내민다.

 

 

 

 

 

하나의 멍울에서

서너개의 분홍빛 꽃 받침이 쑥쑥 자라고

 

 

 

 

 

굳게 다물고 있던 꽃 받침은 

꽃샘바람에 이리 저리 치이면서 흩트러져

살짝 입을 벌리고

그 사이로 하얀 벚꽃잎이 머리를 내민다

 

 

 

드디어 벚꽃 한 송이가 활짝 피었다.

다른 놈들도 피어날 작정이다.

 

 

 

 

하얀색 왕벚나무 꽃잎에

꽃 받침 그림자가

비쳐  

분홍의 느낌을 발산하고 있다.

 

 

 

 

 

2015년 3월 30일

왕벚나무는 활짝 꽃을 피우고

풍성한 꽃 잔치가 열린다.

 

하루 밤 새에

너도 나도 활짝 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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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우의 『월든』에는

봄이 오는 월든 호수가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꽝꽝 얼어 붙은 얼음이 녹을 즈음에

호수에서는 "쩡~!"하는 굉음이 숲을 뒤 흔든다. 

단단한 얼음에 금이 가는 소리다. 

 

소로우는 매일 호수의 얼음의 상태를 살펴가며 

봄의 위치를 가늠한다.

 

부산 광안리의 벚꽃 거리도

봄 모습이 하루 하루 미묘하게 달라져가며

벚꽃 축제를 준비한다.  

 

2015년 3월22일의 벚꽃 풍경...

이제 벚꽃은 멍울을 벗어나기 위해

마지막 안간힘을 쓴다.

 

 

 

 

 

 

 

목련꽃은 어느새

피어있다.

 

 

 

유달리 따뜻한 주말

광안리 해변에서는

벌써 수상 레포츠를 즐긴다.

 

 

따뜻한 오후의 햇살을 즐기며

바닷가에 가만히 앉아 눈을 감으니

길가에선

문명의 소리들이 들려오고

바다쪽에서는

가볍게 철석이는 원시의 파도소리가

한적하게 들려 온다. 

 

 

 

대통령의 부산 별장이었던 시청관사 벽에

개나리가 피었다.

평일 오전 9시에서 오후 5시까지

시민들에게 산책길로 개방된다고 하니

아내와 함께 한 번 봄 맞이 산책을 가보리라.

 

 

 

산수유는 개나리와 동색

충돌실험에서 소립자와 광자들이

튀어나오는 듯한 모양의 꽃이 새롭다.

 

 

 

부산 수영도서관 정문에서 바라다 보이는 숲

동백나무와 매화나무가 잘 어우러져 있다.

 

 

 

매화

 

 

 

 

조팝나무

 

 

 

동백꽃

 

 

 

그리고 천리향.

천리향 가까이 가니 달콤한 향기가

사방에 가득하다.

 

 

 

이건 무슨 꽃?

 

 

 

이건 또?

막 피어나려는 꽃의 탄생 순간?

 

 

 

어린 잎들도 막 피어난다.

 

 

 

봄은 꽃을 끌어내고

꽃은 사람의 마음을 당긴다.

봄은 꽃 때문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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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의 스펙트럼을 갖는다.

부정의 극단에는 심한 욕설의 의미가 자리 잡고 있고

긍정의 극단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의 견딜 수 없는 애정의 느낌이 잔뜩 묻어 있다.

 

모든 새끼들은 귀엽다고 말하면

이것은 오류일까?

하지만 생명이 돋아 나는 봄 새끼들은 어쩔 수 없는 느낌을 자아낸다.

 

모든 깨달음은 문득 찰라의 순간에 오는 것처럼

오늘 따뜻한 공기속에 돋아 나는 새끼들을 보며 문득 어릴 때 내가 좋아하던

그 색깔을 떠 올린다.

 

아무 것도 모를 나이에 

매료되었던 그 연한 새로 돋아나는 잎의 색깔은

여전히 말로 표현하기에는 신비로운 이미지로 남아 있다.

 

 

 

 

 

 

 

 

주초 일기 예보에 

이 번 주부터 벚꽃이 개화한다고 해서,

매일 벚나무 아래를 걸을 때 마다 쳐다 본다.

가지 끝마다 조그맣던 멍울들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있다. 

기다리는 마음도 함께 부풀어 오른다.

 

 

 

 

꽃잎이 나오기 전에 꽃 받침이 먼저 나온다.  

꽃 잎은 속에서 꽃 받침을 밀어 내고

꽃 받침은 점점 부풀어 오르며

벚꽃 가지 사이에

연한 몽환적인 푸른빛 안개를 드리운다.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생명은 피어난다.

버려진 땅에도 들꽃은 피고...

 

 

 

 

 

 

광안리 바닷가 화단에도 민들레인가?

 

 

 

바닷가 백사장에도 봄 기운이

완연하다

 

 

 

 

조그만 찻집 앞에도

예쁜 꽃들이...

 

 

 

 

찻길 옆 보도에서도 ...

질기게 생명은 피어난다.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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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법칙에 위배되는 사건을 일컬어 기적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어디 그것만을 기적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를 경탄하게 하는 기적과 같은 일은 우리 주위 어디에나 있다. 어디에나 기적은 지천으로 깔려 있다. 기적은 베일에 감싸 있을 뿐, 아니 우리의 눈이 베일에 가려져 있을 뿐, 숨겨져 있지 않다. 눈에서 베일이 하나 하나 걷혀지면서 온 사방의 기적들이 하나씩 눈에 띈다. 해마다 돌아오는 봄도 그렇다.

 

해마다 겪는 봄이지만, 여태까지 봄이 시시각각 성장하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도대체 나에게 봄이란 어떤 의미일까? 눈으로 봄은 마음으로 봄에 결코 앞서지 않는다는 명제는 성립할까?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눈에는 기적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고 말해야 더 정확할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의 생각에만 골몰해 마음을 나누어 줄 수 없는 사람의 눈에 비치는 풍경은 찰칵하는 한 순간 찍어내는 사진과 같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물의 풍경은 화가가 마음을 담아서 그려내는 그림과 같다. 사진을 찍는 행위에는 기억을 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는 기억이 매개체로서 역할을 해야한다. 화가는 대상의 이미지를 머리속으로 에 전사시킨다. 그리고 다시 머리속에서 화폭으로 그 이미지를 전사시킴으로 그림을 완성시킨다. 나무의 사진을 찍을 때는 잔가지 하나 하나를 다 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림으로 그릴 때는 잔가지 하나 하나를 일일이 화폭으로 옮겨야만 한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봄의 경이로운 모습을 본다는 것은 사진을 찍는 것 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닮았다고 할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 작년의 봄은 그 어느 봄과도 다른 봄이었다. 작년 봄 나는 봄을 노래하는 시를 통해서 시인들의 눈을 통해 봄을 보았다. 봄은 새로운 모습으로 나게게 다가왔다. 하지만 올해의 봄은 나 스스로 느끼는 봄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이 예감이 틀리지 않기를...

 

입춘이 지난 후의 바람이란 매서운 칼바람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이 바람은 더는 살기등등한 서슬 푸른 검기에 목을 움추리게 하는 겨울 바람이 아니다. 칼의 고수가 칼을 든 손에 사정을 두어 목숨을 거두지 않고 다만 칼등으로 치는 듯한 인정이 느껴지는 바람? 입춘 지난 바람이란 그런 바람이라고 생각해 본다.

 

입춘 지나 봄비가 내리던 날. 부드러운 비는 겨울내내 말랐던 왕벚나무 가지위에 떨어지면서 물방울을 튕겨낸다. 가볍게 나무 가지와 새순을 두드린 봄비는 마른 가지속으로 젖어들어,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속살은 생기를 회복한다. 겨울 내내 나무 가지에 쌓여던 겨울 먼지는 씻겨지고, 투명한 대기 속에 짙은 갈색빛이 망막을 찌른다. 여기 저기 잔 가지들은 마른 가지와는 다른 색감으로 새로이 뻗어 나오고, 그 가지 마다 꽃으로 피어날 새순들이 붉은 색조를 띠며 올록볼록 밀려나온다. 멀리서 보니 왕벚나무 가로수 숲의 메마른 가지들 위에 옅은 분홍빛 기운이 피어 올라 머물러 있다.  

 

보일 듯 말 듯한 신비한 분홍빛 향기... 왕벚나무는 분홍안개를 이고 있다. 분홍빛이 점점 짙어지고 분홍 꽃잎이 눈처럼 흩날라는 풍경을 기억속에서 꺼집어 내어본다.

은행나무 가로수 길로 들어서자 어느 듯 분홍빛 안개는 사라지고 연두빛 안개가 안구를 적신다. 앙상한 나무로 황량해 보이던 저 먼 산 중턱 숲에는 어린 연두빛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고 있다. 동양화의 안개 낀 산수 풍경의 아련한 모습으로 봄은 서서히 다가 오고 있다. 

 

왕벚나무 숲에는 분홍빛 정기가 떠돈다. 모든 게 착시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봄을 기다리는 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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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집을 나섰다. 드문 일이다. 밖에는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순간 봄을 생각한다. 이 비는 필시 봄비?

그 날 저녁 뉴스를 통해 입춘이라는 것을 알았다.

 

 

 

가덕도 앞 바다 매립지, 아직 입주가 덜 된 아파드 단지 하나만 덩그러니 매립지 사이에 놓여 있다.

주위는 황량한 불모지처럼 보이는 빈터에 누렇게 바랜 키 큰 잡풀만이 바람에 흔들거린다. 

무료하게 기다리며 보도를 천천히 걸으면서 봄 볕을 만끽하던 중 가로수에,

멀리서 보면 마치 새빨간 꽃처럼 보이는, 콩만한 빨간 열매가 포도처럼 나뭇잎 사이로 머리를 내밀고 있다. 

 

<먼나무>

 

<파라칸사스>

 

먼나무일까? 파라칸사스일까?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문득 왜 이제사 이것을 보게 되었을까? 여기서 한 참을 왔다 갔다 했는데?

이 길을 지나는 사람 중 몇이나 이 빨간 열매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을까?

도로 건너편 상가의 사람들은 이 예쁜 빨간 열매의 존재를 알고나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사물이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존재도 때로는 보이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인가 보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보다.

이 순간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가 된 듯 하다. 

조르바는 항상 만물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본다. 매일 보는 사물들이 그에게는 새롭게 보이는 것이다. 

어제의 것이 오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르바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범인의 눈으로 보면 조르바는 바보처럼 보인다. 오늘 이 순간 보는 것이 어제 본 것과 같은 것인데, 그 새 어제 본 것을 잊어버렸단 말인가? 바보...

그러나 정작 바보는 조르바가 아니라 매일을  똑 같은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바보일뿐이다.

난 오늘 새삼 조르바의 눈을 가지고 봄을 느끼고 바라보고 있다.

난 봄의 도래를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내 앞에 있는 불모의 매립지에는 봄이 어떤 모습으로 오고 있을까? 급관심이 생겼다. 

다 시들어 죽어버리고 그 뼈대만 남아 군데 군데 흔들거리는 잡풀들이 무성한 땅으로 발을 내 딛뎠다. 

그 땅에서 나는 생명을 이어나가려는 고단한 몸짓을 발견했다. 

도둑놈 가시가 생명을 퍼뜨려 줄 매개체를 기다리며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지난 가을 이후로 계속 발톱을 세우고 기다렸던 것일테지.

그러다 희생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말라 비틀어져 바로 아래 땅 바닥으로 떨어져 싹을 틔울 테지.

 

<도둑놈 가시>

 

허리를 낮추고 무릎을 굽혀 가만히 앉았다. 낮은 곳에 마른 강아지 풀이 보였다. 

땅에서 20cm 자란 조그만 새끼 강아지 풀이 바람에 파르르 떨린다.

가는 줄기는 약한 바람에 조차 견디지 못하여 휘어지려하나, 물기를 잃고 말라 붙은지라 부드럽게 허리를 휘지 못하고 다만 파르르 떨릴 뿐이었다. 

갓 태어난 새끼 강아지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가늘게 떠는 듯 하다.

 

<강아지 풀>

 

강아지 풀 아래 습기를 머금고 있는 땅 위에 진한 초록색 이끼들이 땅을 뒤덮고 있다.

살아 있는 생생한 초록빛이 햇빛에 반짝인다. 생명은 질기게도 그 목숨을 이어가고 있구나. 

그 생명의 경탄스러운 탄생의 때가 무르 익고 있다. 

 

<이끼>

 

도서관.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찾았다.

책들 사이로 언듯 고개 숙인 아가씨의 붉은 입술이 보인다.

봄이라서 그럴까?  

서가 앞에 서서 고개 숙여 책을 읽는 모습이 아름답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이...

 

<러브레터>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뽑아 들고 책상에 앉았다.

춤추는 듯 현란한 문장 속에 작가의 생각이 난해하게 펼쳐져 있다.

김훈의 매력적인 글에 경탄을 발하면서 한편으로는 행간을 읽어 내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편히 앉아는 있지만 머리속으로는 작가의 심중을 읽어내려고 고전분투하고 있다.

붉은 입술의 긴 생머리 아가씨가 왼쪽 옆 자리에 앉는다.  

나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비스듬히 책상에 기대어 책을 읽어 나가다 나른함에 조용히 눈을 감는다. 봄 기운때문일까? 

아! 편안하다. 나른한 행복감이 몸에 흐른다.   

 

<러브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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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춥지만 오히려 겨울 바다의 매서운 바람이 그리워 바닷가로 나섰다. 활처럼 등을 굽은 광안리 백사장의 저 쪽 끝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저 끝까지 1,5 킬로미터쯤 될까? 오늘은 저 끝까지 한 번 걸어보리라 마음 먹었다. 한참을 걷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아직 까마득하여 그냥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오래전 중학교 다닐 때 매일 하교길에 대하던 길이 생각났다. 집에 다다르기 직전에 400~500미터 쭉 뻗어 있던 길, 학교 갔다 돌아오는 배고픈 길, 뙤약볕에 그 길은 끝이 없는 길처럼 길게 느껴지던 그 길. 까마득하게 보이는 그 길을 터벅터벅 걷다 보면 어느새 그 끝에 도착했고, 한 발 한 발 걷는 걸음이 모여 결국 다 다랐구나. 참 신기하기도 하다고 생각 했었다. 인생의 길도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걷가 보면 어느 새 그 목표지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먼 길이라 할지라도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한 발걸음에 당해 낼 재간이 없을테지.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얼마나 멀 지 알 수는 없어도 중단하지 않고 가다보면 어느새 그 곳에 도달해 있겠지.

 

돌아오는 길은 백사장, 마른 모래위에서 걷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발이 푹푹 빠진다. 하지만 물기를 머금은 모래사장은 마른 모래보다 단단하기에, 파도가 오락가락하는 백사장 발치를 걸었다. 문득 파도가 간지르듯이 올라 왔다 도망치는 젖은 백사장은 길게 드리워진 드레스 자락,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는 드레스 자락에 달려 있는 레이스처럼 보였다. 파도는 밤 낮 가리지 않고 밀려온다. 넘지 못한 한계가 있음이 분명한데도 여전히 또 밀려와 넘실거리고, 물러갔다 또 다시 밀려온다. 언제부터 파도는 밀려옴의 반복을 되풀이 해 왔을까? 셀 수도 없이 장구한 세월동안, 보는 이가 없을 때에도 한결같이 밀려왔다 밀려갔겠지. 저 태고의 바다가 존재하던 그 때부터, 잠도 자지 않고, 쉼없이. 잠잠히 너울거리다가, 때로는 분노한 악마처럼 날뛰며 모래사장을 단숨에 넘어 삼키기도 했겠지. 더 이상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을 호시탐탐 엿보듯이 끊임없이 두들기는 두들김은 누구의 의지련가. 그건 바다의 의지, 물은 낮은데로 임하지만, 때로는 높은 곳을 선망하기도 하는가보다.

 

바닷가 해변에 한 무더기의 조개 껍질. 시간과 파도에 마모되어 부드럽게 매끄럽게 다듬어진 조개껍질과 조그만 차돌. 조개껍질은 예전 생명의 흔적, 이제는 생명이 떠나 버린 화석, 해체되고 분해되는 것을 막을 힘이 없는 모래의 예고편. 모래는 자연과의 합일로 가는 길목이다. 살아서도 자연이더니, 생명의 힘이 사라져 버려서도 자연이구나. 인생도 마찬가지. 자연으로 태어났다 자연으로 돌아간다. 대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에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다. 바람이 불어 모래가 날려도 백사장은 여전하듯 대자연은 언제나 그 본질로 그 자리에 있다. 인생이 오던 가던, 무심하게. 인생은 억겁의 시간속 찰라의 순간에 불과하고, 무한한 공간속에 한 점에도 미치지 못하건만, 이 보잘 것 없는 인생이 대자연을 생각한다. 답은 있는 걸까? 답으로 가는 길은 존재하는 걸까?

 

파도가 만들어 내는 규칙적인 문양을 보라. 인격이 없는 자연은 한 모퉁이에 질서와 규칙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자연의 힘에 따라 정렬돤 질서는 자연을 만들어낸 인격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일까? 질서속에 무질서, 규칙속에 규칙 위반, 이러한 특이성으로 지성의 존재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면, 소수는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될까? 수의 질서에서 소수만이 비켜 서 있는 듯한데, 소수에 규칙성을 부여한 리만의 가설이 사실일찌라도, 더 큰 규모의 질서의 하위 층계에서는 여전히 불규칙성이 도사리고 있는 것인데, 무질서는 단지 표면적으로만 드러난 모양새, 더 깊은 차원에서는 무질서를 가능하게 한 질서가 존재한다면, 그 질서의 근본이 신의 존재가 될까?

 

저기 맞은 편에서 한 여인이 홀로 걸어오고, 난 여기서 홀로 걸어가고, 서로의 발길이 교차하는 순간, 눈길도 마주치지 않았지만, 그 어떤 운명적인 느낌도 없었지만, 절대자의 입장에서 보면 엇갈린 운명의 교차는 아닐까? 세상은 단 6명만 거치면 다 서로 아는 지인이라는데, 서로의 이야기를 풀어내다 보면 서로 알만한 사람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없이, 서로의 이야기를 꽁꽁 마음에 묻어둔 채 서로 지나쳐 멀어져 간다. 저 평범한 여인도 마음 한 켠에 어떤 사연을 묻어 놓고 있겠지. 사람마다 각자의 사연을 다 편지위에 적는다면, 세상은 사연으로 넘쳐 날텐데, 에메랄드빛 하늘이 내다 보이는 창문으로 저마다의 사연을 들고서 우체국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저 절뚝거리며 걷는 노인네도, 굳이 저 연인 사이로 걸어가려고 애쓰는 노인도, 오직 예수를 외치며 큰 소리치는 저 남자도, 혼자서 셀카봉으로 자신의 모습을 찍는 저 여자도, 다른 사람의 눈은 의식도 하지 않은 채 여자를 안고 밀려 오는 파도에 던질 듯 말 듯 놀리는 저 연인도.

 

백사장을 벗어나 벚꽃 나무 가로수 길로 들어서자 바다와 모래사장의 푸른 빛과 황금 빛에 익숙한 망막은 문득 벚나무 몸통의 짙고 어두운 빛을 느낀다. 해변의 파도의 조용한 아우성에 무감각해져 있던 귀는, 벚나무를 이리 저리 날며 지저귀는 새소리에, 문득 파도 소리의 부재를 느낀다. 인간이 만든 세상으로 다시 돌아왔음을 환기시키는 차가 왔다 갔다하는 소리를 들으며, 한 참 동안 걸었던 다리의 묵직한 피곤함을 느끼며 집으로 들어선다.

 

 

나무를 심는 사람/장 지오노




한 인간이 참으로 보기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발견해내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의 행동이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한 잊을 수 없는 인격과 마주하는 셈이 된다.


 

약 40여 년 전이었다.
나는 여행자들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는 않은 고원지대를 오래오래 걸어서 올라다니곤 했다.


 

그 고지는 프로방스 지방으로 뻗은 알프스 산맥 위의 아주 오랜 고장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지역은 동남쪽과 남쪽으로는 뒤랑스 강의 중류를 경계로 하고,
북쪽으로는 드롬 강의 원천으로부터 디에까지 이르는 강의 상류를 끝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꽁따 브네쌩 평원과 방뚜산의 지맥이 그 끝이었다.
그곳은 바스(낮은) 알프스 지방의 북부 전부와 드롬 강의 남쪽 및 보끌뤼즈 지방의
일부 작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고도 1200∼1300미터의 인적없고 단조로운 곳에서 긴 산책에 나섰는데,
이곳은 야생 라벤더외에 자라고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였다.
나는 폭이 가장 넓은 곳으로 이 지역을 가로질러 걸었다.
사흘을 걸은 뒤 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황폐한 지역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뼈대만 남은 버려진 마을 옆에서 야영했다.
전날 마실 물이 바닥났기 때문에 나는 물을 찾아야만 했다.
폐허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낡은 말벌통처럼 촘촘하게 붙어 있는 집들을 보니
옛날엔 이곳에 샘이나 우물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지붕이 없어져버리고 비바람에 사그러진 대여섯 채의 집들,
종탑이 무너져버린 작은 교회는 마치 사람들이 사는 마을 속의 집이나 교회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그날은 햇빛이 눈부시게 내리쬐는 유월의 어느 아름다운 날이었다.
그러나 하늘 높이 솟아있는 이 고지 위에 따가운 햇살을 피할 곳 없는
땅 위에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난폭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뼈대만 남은 집들 속으로 불어닥치는 바람 소리는
마치 식사를 방해받은 야수가 부르짖는 소리 같았다.
나는 캠프를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부터 다섯 시간이나 더 걸어 보았어도 여전히 물을 찾을 수 없었고,
또 물을 찾으리라는 희망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방이 똑같이 모두 메말라 있었고 거친 풀들만 자라고 있었다.

 

 

[만남]

그런데 저멀리에서 검은 작은 그림자가 서 있는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실루엣을 홀로 서 있는 나무의 둥치로 착각했다.
어쨌든 나는 그것을 향해 걸어갔다.
그것은 한 양치기 목자였다.
그의 곁에, 불타는 듯한 뜨거운 땅 위에는 30여 마리의 양들이 누워 쉬고 있었다.

그는 물병을 꺼내 내게 물을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고원의 우묵한 곳에 있는 양의 우리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는 간단한 도르래를 설치해 놓고 깊은 천연의 우물에서 아주 좋은 물을 긷고 있었다.
그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고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감 있고 확신 속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모든 것을 빼앗겨버린 이런 곳에 그런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그는 오두막이 아니라 돌로 만든 제대로 된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 집은 그가 이곳에 왔을 때 발견한 폐가를 어떻게 혼자 힘으로 수리해 놓았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었다.
지붕은 튼튼했고 물새는 곳도 없었다.
바람이 지붕을 두드려 기와 위에서 내는 소리가 마치 바닷가의 파도소리 같았다.

살림살이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릇은 깨끗하게 씻겨 있었고 마루는 잘 닦여 있었으며, 총은 반질반질했다.
불 위에는 수프가 끓고 있었다.
그 때 나는 그 역시 산뜻하게 면도한 얼굴을 하고 있고, 옷에 단추가 단단히 달려 있으며,
기운 것이 눈에 보이지 않게 옷이 세심하게 수선돼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수프를 나누어 주었다.
식사 후 담배쌈지를 권하자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개 또한 주인처럼 조용했으며 거칠지 않고 상냥했다.

내가 여기서 그날 밤을 묵어야 한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도 하루 하고 반 이상을 더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지역에는 마을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곳 고지대의 기슭에는 서로 멀리 떨어진 너댓 개의 촌락이 흩어져 있을 뿐이었는데,
그 마을들은 차가 다니는 길의 맨 끝에, 떡갈나무 숲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엔 숯을 만드는 나무꾼들이 살고 있었다.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곳이었다.
여름에도 겨울만큼이나 날씨가 혹독한 곳에 촘촘하게 모여 살면서
모든 가정들은 닫힌 세계 속에서의 이기심만을 키워 가고 있었다.
분별없는 야심은 이곳을 벗어나려는
끊임없는 욕망 속에서 정상을 벗어난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남자들은 트럭으로 시내에 숯을 운반하러 갔다가 돌아오곤 했다.
아무리 굳센 품성을 지닌 사람일지라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실망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리곤 했다.
여인들은 또한 가지가지 원한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놓고 경쟁했다.
숯을 파는 것을 놓고, 교회의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미덕들을 놓고, 악덕을 놓고, 그리고 선과 악이 뒤엉클어진 것들을 놓고 끊임없이 경쟁했다.
게다가 바람 또한 쉬지 않고 신경을 자극했다.
그래서 자살이, 그리고 거의 언제나 죽음으로 몰고가는 정신병들이 전염병처럼 번졌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그 목자는 조그만 자루를 찾아 들고 와서
도토리 한 무더기를 테이블 위에 쏟아 놓았다.
그는 그 도토리 하나하나를 아주 주의깊게 조사하기 시작하더니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따로 구별했다.
나는 파이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도와주겠다고 했으나 그는 자기가 해야할 일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가 이 일에 기울이는 정성을 보고 나는 더 고집할 수 없었다.
우리의 대화는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아주 굵은 도토리 한 무더기를 모으더니 그것들을 열 개씩 세어 묶음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작은 것이거나 조금이라도 금이 간 것들을 제쳐놓았다.
더 자세히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서 완벽한 상태의 도토리가 백 개 모아졌을 때 그는 일을 멈추었고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평화가 있었다.
다음날 나는 그의 집에서 하루종일 쉴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는 그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그를 방해할 수 없다는 인상을 나는 받았다.
그 휴식이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호기심을 느꼈고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그는 양떼를 꺼내어 풀밭으로 데리고 갔다.
떠나기 전에 그는 세심하게 골라 개수를 세어 모은 도토리 자루를 물양동이에 담갔다.

나는 그가 지팡이 대신 대략 길이가 1.5미터 정도 되고
엄지 손가락만큼 굵은 쇠막대기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산책하며 쉬며 그가 간 길을 나란히 따라갔다.
양들의 목장은 작은 골짜기 아래에 있었다.
그는 작은 양떼를 개가 돌보도록 맡기고는 내가 서 있는 곳을 향해 올라왔다.
나의 무례함을 꾸짖으러 오는 것 같아 두려웠으나 전혀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가는 길이었다.
그는 내게 달리 할 일이 없으면 자기를 따라오라고 청했다.
그는 거기서 산등성이를 향해 200미터를 더 올라갔다.

그가 가려고 한 곳에 이르자 그는 땅에 쇠막대기를 박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구멍을 만들어 그 안에 도토리를 넣고 다시 구멍을 덮었다.
그는 떡갈나무를 심고 있었다. 그곳이 그의 땅인지 나는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그 땅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저 그곳이 공유지이거나 아니면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겠느냐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아주 정성스럽게 백 개의 도토리를 심었다.

그리고 점심식사 후 그는 다시 도토리 고르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주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여러 가지를 끈질기게 물어보았다고 생각한다.
3년 전부터 그는 이런 식으로 고독하게 나무를 심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십만 그루의 도토리를 심었다.
십만 개의 씨에서 2만 그루의 싹이 나왔다.
그러나 산짐승들이 나무를 갉아먹거나 예측할 수 없는 신의 섭리에 속한 일들이 일어날 경우,
이 2만 그루 가운데 또 절반 가량이 죽어버릴 것이라고 그는 예상했다.
그렇게 되면 예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이 땅에
1만 그루의 떡갈나무가 살아남아 자라게 될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그의 나이가 궁금했다.
그는 분명히 50세가 넘어 보였다.
55세라고 했다.
이름은 엘제아르 부피에였다.
지난 날 그는 평지에 농장 하나를 갖고 있었고 그곳에서 인생을 가꾸며 살았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고 뒤이어 아내를 잃었다.
그후 그는 고독 속에 물러앉아 양들과 개와 더불어 한가롭게 살아가는 것을 기쁨으로 알게 되었다.
그는 나무가 없기 때문에 이 곳의 땅이 죽어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달리 중요한 일거리도 없었으므로 이런 상태를 개선해 보기로 결심했다고 덧붙였다.

그 때는 나 역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고독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다른 고독한 사람들의 영혼에 섬세하게 접근할 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정확히 말해서 내 젊은 나이는 나 자신과 관련지어서만,
그리고 어떤 행복의 추구만을 염두에 두고 미래를 상상케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삼십년 후면 1만 그루의 떡갈나무가 아주 멋진 것이 될 것이라는
말을 하고 만 것이다.
그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만일 삼십년 후에도 하느님이 그에게 생명을 주신다면 그 동안에도
나무를 아주 많이 심을 것이기 때문에 이 1만 그루는 바다 속의 물방울 같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벌써부터 너도밤나무를 번식시키는 것을 연구해오고 있으며
그의 집 근처에 이 나무의 열매에서 길러낸 묘목원을 갖고 있었다.
울타리를 세워 양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잘 보호해 놓은 묘목들,
즉 그의 연구 재료들은 아주 아름다웠다.
그는 또한 지면에서 몇 미터 지하에 어느 정도 습기가 고여 있을 것 같은 땅에는
자작나무를 심으리라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다음날 우리는 헤어졌다.



[해후]


다음해 1914년에 전쟁(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나는 5년 동안 이 전쟁에 참가했다.
나는 한낱 보병 병사의 몸이었으므로 나무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할 수 없었다.
진실을 말한다면 그런 일 자체는 나에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하나의 화제거리라든가 우표수집 같은 것으로 여겼고 잊어버리고 있었다.
전쟁에서 벗아났을 때 나는 아주 적은 액수의 제대 보너스를 받았으며,
신선한 공기를 조금이라도 마시고 싶은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았다.
인적없는 그 황무지로 가는 길을 다시 찾아들었을 때
나에게는 그런 바람 이외에는 다른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곳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폐허가 된 마을 너머 멀리에서 무슨 회색빛 안개 같은 것이
카페트처럼 산등성이를 덮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실 난 여기 오기 전날부터 나무를 심던 그 목자를 다시 생각하기 생각했다.
"1만 그루의 떡갈나무라면 꽤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거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지난 5년 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엘제아르 부피에 역시 죽었으리라고 쉽게 생각했다.
게다가 20대의 나이에는 50대의 인간들이란 죽는 것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는 늙은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어서 더욱 그러했다.
그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아주 활력이 넘쳐 보였다.
그는 생업도 바꾸었다.
양들을 네 마리만 남기고 대신 100여 개의 벌통을 갖고 있었다.
그는 어린 나무들을 위협하는 양들을 치워버린 것이다.
그동안 그는 전혀 전쟁 때문에 불안을 느끼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확인했다.
그는 태연하게 여느때와 다름없이 나무를 계속 심었던 것이다.

1910년에 심은 떡갈나무들은 그때 10살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무들은 나보다, 그리고 엘제아르 부피에보다 더 높이 자라 있었다.
그것은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나는 문자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엘제아르 부피에도 말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침묵 속에서
그가 키워 놓은 숲을 산책하며 하루를 보냈다.
숲은 세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가장 폭이 큰 것은 11킬로미터나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오로지 아무런 기술적인 장비도 지니지 못한
한 인간의 손과 영혼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할 때마다
나는 인간이란 파괴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는 하느님처럼 유능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그는 자기 생각을 꾸준히 실천해 가고 있었다.
내 어깨 높이에 와닿는 너도밤나무들이 눈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광경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떡갈나무는 빽빽이 자라 있었고, 들짐승에게 갉아먹혀 피해를 입는 나이를 넘어서 있었다.
신 자신이 이 피조물을 파괴하려는 섭리를 갖고 있다면
앞으로는 태풍에게나 도움을 청해야 할 것이다.

그는 또 감탄할 만큼 잘 가꾸어진 자작나무 숲을 보여 주었다.
5년 전, 그러니까 1915년 내가 베르덩 전투에서 싸우던 시기에 심은 나무들이었다.
밑에 습기가 있으리라고 정확하게 짐작했던 모든 땅에 그는 자작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자작나무들은 젊은이같이 부드러웠고 아주 단호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창조란 연달아서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 같다.
하지만 엘제아르 부피에는 그런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주 단순하게 자신의 일을 고집스럽게 추구할 뿐이었다.
마을로 다시 내려왔을 때 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늘 말라붙어 있던 시내에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주 오랜 옛날 어느 때는 이 말라 붙었던 시내에 물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 소개했던 쓸쓸한 마을들 가운데 몇몇은
옛 갈로 로망의 터전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아직도 그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한때 고고학자들이 와서 이 곳을 파헤쳤고, 그들은 여기에서 낚시바늘을 찾아내곤 했다.
그러나 20세기에는 약간의 물을 얻기 위해서도 저수통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바람도 몇가지 씨앗들을 흩어 놓았다.
그래서 물이 다시 나타나자 그와 함께 버드나무가, 골풀이, 풀밭이, 정원이, 꽃들이,
그리고 삶의 이유 같은 것들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 모든 변화는 아주 천천히 일어났기 때문에
습관처럼 익숙해져서 아무런 놀라움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산토끼나 멧돼지들을 잡으려고 외롭게 산을 타는 사냥꾼들은
작은 나무들이 많이 번식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확인했으나
그것은 그저 땅이 자연스럽게 부리는 변덕 탓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아무도 이 사람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에게 의심을 두었다면 그들은 그에게 반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는 의심을 느끼게 할 만한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훌륭하고 고결한 그의 인격 속에 이처럼 끈질긴 고집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과 관리들 가운데 누가 상상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1920년 이래 나는 1년에 한 번씩은 엘제아를 부피에를 방문했다.
그동안 그가 좌절하거나 회의에 빠지는 것을 나는 전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 자신은 그를 그런 어려움 속으로 종종 밀어 넣었던 것을 아실 것이다.
나는 그가 겪었을 곤란에 대해서는 헤아려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역경과 싸워 이겨내야 했을 것이고,
그러한 열정이 확고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절망과 싸워야 했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는 1년 동안에 1만 그루가 넘는 단풍나무를 심었는데, 모두 죽어버린 일도 있었다.
그래서 그 다음 해가 되자 그는 단풍나무를 포기하고 너도밤나무를 다시 심었으며,
그리하여 떡갈나무들보다 더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런 보기드문 인격을 가진 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가 철저한 고독 속에서 일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는 너무나도 완전한 고독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생의 마지만 시기에는 말하는 습관을 잃어버리기까지 했다.
아니, 어쩌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1933년 엘제아르 부피에는 깜짝 놀란 산림관리인의 방문을 받았다.
이 관리는 '천연' 숲의 성장을 위태롭게 할까 두려우니
집밖에서 불을 피우지 말라는 명령을 이 목자에게 통고했다.
그 관리는 순진하게도 숲이 스스로 혼자 커가는 것은 생전 처음 본다고 말했다.

그 시기에 엘제아르 부피에는 집에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너도밤나무를 심으러 가곤했다.
그때 그는 이미 75세였기 때문에 매일 오고가는 수고를 덜기 위해
나무심는 바로 그 장소에 오두막 돌집을 하나 지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 해에 그 집을 지었다.


1935년에는 정부의 진짜 대표단이 '천연의 숲'을 시찰하러 왔다.
산림수자원청의 고위관리와 국회의원, 전문가들도 함께 왔다.
그들은 쓸데없는 말들을 많이 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하기로 결정했는데,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단 한 가지 유익한 일을 제외하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즉 숲을 국가의 관리 아래 두고 사람들이 숯을 만들러오는 일을 금지한 것이다.
그들 역시 건강이 넘치는 젊은 나무들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아름다운 숲은 국회의원에게까지도 유혹의 힘을 발휘한 것이다.

대표단의 산림관리관들 가운데 내 친구가 한 사람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 숲의 비밀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 어느 날 우리 두 사람은 엘제아르 부피에를 찾아갔다.
우리는 대표단이 시찰한 지점에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한참 일하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 산림관리관은 쓸모없는 친구가 아니었다.
그는 가치있는 것을 알아볼 줄 알았고 침묵할 줄도 알았다.
나는 선물로 가져간 달걀 몇 개를 내놓았다.
우리 셋은 함께 점심 식사를 했고 말없이 경치를 바라보면서 몇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지나온 언덕길은 6∼7미터 높이의 나무들로 뒤덮혀 있었다.
1913년에 보았던 이곳의 모습이 생각났다. 황무지가 떠올랐다.

평화롭고 규칙적인 일, 고산지대의 살아있는 공기, 소박한 음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혼의 평화가 이 노인에게 거의 장엄하리만큼 훌륭한 건강을 주었다.
그는 하느님의 운동선수였다.
나는 그가 아직도 얼마나 많은 땅을 나무로 덮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떠나기 전에 내 친구는 이곳의 토양에 알맞을 것 같은 몇몇 나무 종류에 관해
간단하고 짧게 제안했다.
그러나 그것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내 친구는 나중에 "그는 그런 것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고 나에게 말했다.
한 시간쯤 걸은 뒤에 생각이 떠오른 듯 친구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나무에 대해 그 어느 누구보다 훨씬 많이 알아.
그는 행복할 수 있는 멋진 방법을 발견한 사람이야."라고.
이 산림관리관 덕분에 숲만이 아니라 엘제아르 부피에의 행복도 보호받을 수 있었다.
내 친구는 숲을 보호하기 위해 세 명의 산림관리관을 임명했고
이들에게 몹시 겁을 주어서 나무꾼들이 아무리 뇌물을 가져다 준다 하더라도
흔들림 없이 일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엘제아르 부피에의 작품이 심각한 위험을 맞았던 것은 1939년에 일어난 2차 세계대전 때였다.
그 당시에는 적지 않은 자동차들이 목탄가스로 움직였기 때문에
가스연료를 만들어내기 위해 나무들이 항상 모자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1910년에 심은 떡갈나무부터 베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지역들은 모든 도로망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계획은 재정적으로 비경제적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그 목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는 그 곳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평화롭게 자기 일만을 묵묵히 하고 있었다.
그는 1914년의 전쟁을 몰랐던 것처럼 1939년의 전쟁 역시 모르고 있었다.




[추억]

내가 마지막으로 엘제아르 부피에를 본 것은 1945년 6월이었다.
당시 그는 87세였다.
나는 황무지로 가는 길을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전쟁이 이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제는 뒤랑스강의 계곡과 산 사이를 오고 가는 버스가 있었다.
나는 여기서 처음 산책했던 장소가 어디인지 더 이상 알아 볼 수 없었는데,
그것은 비교적 빠르게 움직이는 교통수단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 버스가 가는 길은 나를 처음 보는 곳으로 데려가는 것만 같았다.
내가 옛날의 그 황량했던 폐허의 땅에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마을 이름을 떠올려야만 했다. 나는 베르공 마을에서 버스를 내렸다.

1913년에는 열 채 내지 열두 채의 집으로 이루어진 이 마을에서 단 세 사람만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야만스러웠고 서로 미워했으며 덫으로 동물을 잡아서 먹고 살았다.
거의 선사시대 원시인의 육체적, 정신적 상태에 가까운 삶이었다.
쐐기풀이 버려진 집들의 주위를 덮고 있었다.
그들의 생활조건은 전혀 희망이 없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하물며 덕을 추구하며 살아갈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공기까지도. 옛날에 나를 맞아주었던 건조하고 난폭한 바람 대신에
향긋한 냄새를 실은 부드러운 미풍이 불고 있었다.
물 흐르는 소리 같은 것이 저 높은 언덕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람 소리였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못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는 진짜 물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나는 샘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물은 풍부하게 넘쳐흘렀다.
그리고 나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그 샘 곁에
이미 네 살의 나이를 먹었음직한 보리수 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이었다.
이 나무는 벌써 무성하게 자라 있어 의문의 여지없이 부활의 한 상징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더욱이 베르공 마을에는 사람들이 노동을 한 흔적이 뚜렷했다.
사람은 희망을 가져야만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희망이 이곳에 다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허물어진 집들을 치우는 한편,
무너진 벽들을 모두 부수고 다섯 채의 집을 다시 지었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의 수는 28명이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네 쌍의 젊은 부부도 있었다.
산뜻하게 벽을 바른 새 집들 주위를 채소밭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 채소밭에는 이것저것 섞여 있었지만 가지런히 심은
야채, 꽃, 배추, 장미꽃나무, 부추, 금어초, 샐러리, 아네모네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곳은 사람들이 살고 싶은 마을이 되어 있었다.

그 곳에서부터 나는 길을 걸어서 갔다.
우리들이 이제 막 빠져 나온 전쟁은 아직 삶의 완전한 개화(開花)를 허락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미 변화는 일어나 있었다.
낮으막한 산기슭에는 보리와 호밀이 자라고 있었고
좁은 계곡 바닥에는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이 지역 전체가 건강과 번영으로 다시 빛나기 위해서는
그로부터 8년의 세월이 흐르는 것만으로 족했다.
내가 1913년에 보았던 폐허의 자리에 지금은 잘 단장된 아담하고 깨끗한 농장들이 들어서 있어서 행복하고 안락한 삶을 말해주고 있었다.
옛날의 그 샘들은 숲이 머금고 있었던 비와 눈에서 물을 받아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샘물로 물길을 만들었다.
단풍나무 숲 속에 있는 농장마다 샘물이 흘러들어 융단같은 박하잎 위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마을은 조금씩 재건되었다.
땅값이 비싼 평야지대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
젊음과 활력과 모험정신을 가져다 주었다.
건강한 남자와 여자들, 그리고 소리내어 웃을 줄 알며
시골에서 벌어지는 축제의 맛을 즐길 줄 아는 소년 소녀들을 길에서 만날 수 있었다.
기쁨 속에서 살아가게 된 뒤로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모습이 변한 옛 주민들,
그리고 새로 이주해 온 사람들의 수가 1만 명이 넘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누리는 행복의 빚을 엘제아르 부피에에게 지고 있었다.

단순히 육체적 정신적 힘만을 갖춘 한 사람이
홀로 황무지에서 이런 풍요한 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면
나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조건이란 참으로 경탄할 만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곤 한다. 그리고 그런 결과를 얻기 위해 가져야만 했던 위대한 영혼 속의 끈질김과
고결한 인격 속의 열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신에게나 어울릴 이런 일을 훌륭하게 이루어낼 줄 알았던 그 소박한 늙은 농부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품게 된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1947년 바농 요양원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장 지오노
: 1895년 남프랑스 프로방스의 소도시 마노스끄에서 태어난 지오노는
1929년 소설 『언덕』을 발표한 이래
자연상태의 생활 속에서 대지와 인간의 합일을 꿈꾸는 소설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그는 1970년 75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목신의 3부작'외에
『세계의 노래』,『지붕 위의 기병』,『광적인 행복』『앙젤로』등
30여 작품을 남겼다.





 

[출처]009.06.08 08:38 | 수필 | 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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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 숲 길
글쓴이 : 소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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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지 않은 밤 ㅡ 이문열 

 
 
 
이것은 오래 전 내가 서울서 겪은 영락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 무렵 나는 이것저것 모든 것으 로부터 쫓겨 
작은 가방 하나 만을 들고 아스팔트 위를 헤매던 
방랑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날, 
날 이 저물어 올 때쯤에는 나는 드디어 아무 데도 
갈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원래 그 거리에는 친구 들도 있고 인척도 더러 있었지만 
그 때는 이미 그들이 모두 머리를 흔들 만큼 
신세를 진 후였던 것입니다. 
나는 별수없이 그 때만 해도 그 거리 어디에나 흔하던 
무허가 여인숙을 찾아 들었습니다. 
독방 이 300원, 합숙이 200원. 그런데도 제 주머니에 남은 것은 
고작 500원뿐이었습니다. 
내가 가방 속 에 든 일거리를 그 밤 안으로 끝낸다 하더라도, 
그것을 돈과 바꾸기 위해서는 
최대한 가진 돈을 아껴야 하는 것이 
그 때의 내 사정이었습니다. 
합숙은 그래서 내가 선택한 그 밤의 잠자리가 되었습니다. 
아직 초저녁이어서 나와 합숙할 사 람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나는 우선은 혼자 차지하게 된 방 안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외국 수사물을 번역하는 것으로서, 
당시의 어떤 대중 잡지에 근무하던 선배가 
원고지 한 장에 50원 씩 사 주어서 
나는 종종 위기를 넘기곤 했습니다. 
그렇게 두 시간쯤 일했을까요. 바깥이 약간 소란스럽더니 
드디어 나와 합숙할 사람이 결정되는 것 같았습니다. 
누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기에 번역을 멈추고 쳐다보니 
한심하게도 이제 나이 열 두셋이 될까말까 한 소년이었습니다. 
이미 초가을인데도 반소매 셔츠와 짧은 바지 차림에, 
밖으로 드러난 사지는 때와 먼지로 불결했습니다. 
그가 방구석에 내려놓은 신문 뭉치는 
아마도 못다 판 석간인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따로 떨어져 자는 것이지만, 
그런 녀석과 한 방에서 하룻밤을 지새 야 한다는 것은 
우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그런 내 눈길을 개의치 않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손발이라도 씻을 작정인 것 같 았습니다. 
소년이 방문을 나서자 나는 지금까지 품었던 것과 전혀 다른 생각
 - 전해 들은 도회지 불량 청소년들의 소행에 대한 
불안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비록 더할 나위 없이 가난한 상태였지 만, 
그래도 녀석보다는 더 많이 가졌으리라는 기분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가진 것 중에 무슨 값나가는 것이 없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시계며 겨울 외투 등은 이미 두어 달 전에 
전당포로 간 후였고, 
입고 있는 옷가지도 상품이 되기에는 너무 낡 아 있었습니다. 
기껏해야 하숙비를 치르고 남은 300원과 
어려움 속에서도 힘겹게 지켜 온 몇 권의 책이 
전부였 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들마저 불안했습니다. 
나는 남은 300원을 꼬깃꼬깃 접어 속셔츠 주머 니 속에 감추고, 
책 몇 권은 타월을 말아 베개 대신 베었습니다. 
내가 그쯤 준비를 끝냈을 때, 세수를 마친 소년이 
되돌아왔습니다. 
씻고 나니까 조금 전보다는 훨씬 귀염성 있고 
깨꿋한 얼굴이었습니다. 
녀석은 다시 일을 시작한 나에게 미안한 듯 
조용한 동 작으로 들어서더니 곧장 이불을 펴고 
옷을 벗었습니다. 
일을 하면서도 나는 줄곧 소년의 동태에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녀석은 옷을 벗은 후 곧장 이불 속으로 들어가질 않고 
주머니에 서 동전이랑 백 원짜리를 
모두 요 위에 쏟아 놓았습니다. 
곁눈으로 보아도 천 원은 넘을 돈이었 습니다. 
아마도 그 날 신문을 판 돈을 셈하는 모양이었습니다. 
나는 건성으로 일을 하면서도 이제 녀석이 그 돈을 
어떻게 간수할까를 흥미있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달리 셈을 마친 녀석은 
돈을 웃옷 주머니에 넣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 고는 그 옷을 차곡차곡 개어 머리맡에 놓고는 
이불 속으로 기어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녀석의 미련스러움이 한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원인 모를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도대 체 자기의 전 재산임에 분명한 돈을 
저렇게 함부로 간수하는 녀석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결국 나 는 참지 못하고 눈을 감고 있는 녀석을 
불렀습니다. 
“이봐, 이봐” 
소년은 대답 대신 의아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그 돈, 그렇게 간수해도 될까?” 
나는 연장자답게, 
그러나 약간은 나무라는 투로 녀석의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그러나 녀석은 오히려 이상하다는 눈치였습니다. 
“그럼 엇다둬요?”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습니다. 
나는 녀석의 순진함이 측은하기까지 했습니다. 
“누가 가져가면 어떡할래?” 
“이 방에 나와 아저씨 외에 누가 있기에요?” 
나는 다시 말문이 막혔습니다. 
나는 원래 이런 여인숙은 주인도 믿을 것이 못된다, 
동숙자라 해도 한 번 내빼면 찾을 길이 없 다, 
따위 얘기들을 해 줄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녀석의 반문을 듣고 나니 더욱 궁금한 게 있었 습니다. 
“이런 생활한 지 얼마나 되니?” 
“삼 년요. 고아원에서 나온 후 줄곧이에요” 
삼 년이라! 나는 다시 말문이 막힐 뿐만 아니라 
숨까지 가빠 오는 것 같았습니다. 
생각해 보십 시오. 
삼 년의 거친 세파가 한 어리고 순진한 영혼을 
얼마나 비뚤어지게 영악하게 만들 수 있는 지를... 
나는 더 이상 녀석에게 뭐라 할 말을 잊고 말았습니다.
나는 약간 머쓱한 기분으로 다시 내 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 일이 손에 잡히 지를 않았습니다. 
다 아는 단어가 막히기도 하고 
평범한 문장이 전혀 해석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할 수 없이 일을 멈추고, 
무엇 때문에 그런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내 부끄러움 때문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나는 이미 소년이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녀석을 흔들어 깨웠습니 다. 
“얘, 얘, 나는 말이다...” 
내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게 떨리는 탓이었던지, 
선잠에서 깨어난 소년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네가 의심스러워서 이 얼마 안 되는 돈을 감추고, 
책은 이렇게 베개를 삼았단다...” 
나는 감추었던 돈을 내보이고, 
타월에 싼 책을 풀어 헤쳤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참회하는 기 분이 돼서 물었습니다. 
“나를 용서해 주겠니?” 
녀석은 이내 내 말뜻을 알아들은 것 같았습니다. 
곧 녀석의 얼굴에 지금까지 내가 본 꽃 중에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다운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아저씨가 저를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러나 제가 아저씨를 의심하는 것은 잘못이에요 ” 
아아, 이 어린 놈. 
나는 나도 모르게 녀석의 자그마한 몸을 쓸어 안았습니다. 
그 밤 나는 늦도록 잠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몇 줄기 뜨거운 눈물을 쏟았던 걸 기억합니다. 
그 어떤 육신의 영락보다는 내 정신의 처참한 영락을 
슬퍼하는 눈물이었습니다. 
 



 
 
 

 

 

 

 

 
출처 : 오 솔 길
글쓴이 : 소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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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2014.10.20. 09:12 http://cafe.daum.net/kcdance/LpJu/2683 

 

아름다운 종이 양산

 

 

노란 종이우산 / 남미영

 

한지에 콩기름을 먹여 만든 노란 종이우산이었다. 아버지는 손잡이 부분을 빙글빙글 돌려 우산을 활짝 펴주시며 말씀하셨다.

“학교에 가다가 키 큰 어른이 같이 쓰자고 하면 안 된다고 하거라. 키가 너 만한 아이는 같이 써도 좋지만.”

 

우산을 쓰고 골목길에 나오니, 가겟집 추녀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남자 어른이 껑충 뛰어나오며 말했다

“아가, 나하고 좀 같이 쓰자.”

“어른하고는 안 돼요. 키가 나만한 아이는 괜찮지만요.”

나는 얼른 대답했다.

“허, 고거 참.”

어른이 혀를 차며 도로 추녀 밑으로 들어가더니 금방 다시 나오며 말했다.

“아가, 그럼 내 키를 이렇게 줄이면 되잖아? 이렇게 하면 너하고 똑같으닝께…”

어른이 다리를 반쯤 접고 엉덩이를 뒤로 쑥 뺀 채 어기죽어기죽 걷기 시작했다. 꼭 오리 같았다.

“아가, 우산이 무겁지? 자, 내가 들어줄게. 이리 다오.”

뒤뚱뒤뚱 몇 발자국을 걷던 그가 멈추어 서서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입술 위에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세요.”

나는 우산대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몇 발짝을 같이 걸어갔을 때, 우산이 조금 높아지고 치마에 빗줄기가 들이쳤다. 그리고 또 몇 발짝을 걸어가자 빗줄기가 얼굴을 때렸다. 깜짝 놀라 옆을 보니 어른이 어느새 접었던 다리를 쭉 펴고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키 큰 어른하고 우산을 같이 쓰지 말라고 하셨는지를.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어른은 우산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가고 나는 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뛰어야 했다.

등에 짊어진 책가방 속에서 양철필통에 부딪히는 연필 소리가 딸각딸각 들렸다. 새로 산 연필이 곯는 소리가. 물에 젖은 인조견 치마가 종아리에 찰싹 달라붙어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잎으로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두 손으로 연신 치마를 떼어내며 뛰어갈 때, 속눈썹에 매달린 빗방울 사이로 세상이 보얗게 보였다.

 

밤에 감기에 걸려 몸이 펄펄 끓었다.

"낮에 누구하고 우산을 썼지?”

퇴근하신 아버지가 뜨거운 내 이마에 손을 얹고 물으셨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줄줄 흘렸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 아기 커서 그런 어른 되지 말라고 선녀님이 보내신 사람이란다.”

아버지는 어떻게 아셨는지, 그렇게 말씀하시며 나를 달래셨다.

 

그해 여름에 6.25가 터지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내가 어른하고 우산 쓴 걸 그때 아버지는 어떻게 아셨을까? 그 사람은 정말 선녀님이 보내셨을까? 나는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며 혼자 궁금해하기도 하고, 혼자 미소 짓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 세월이 20년쯤 흘러가고 내가 엄마가 되었을 때, 나는 알게 되었다. 부모란 아기의 얼굴만 보아도 낮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알 수 있으며, 그 어른을 선녀가 보냈다고 하신 말씀은 내 어린 가슴속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게 될까 봐 그러셨던 것을.

 

그리고 세월이 한 10년쯤 흐른 후에 알게 되었다. 나도 그동안 세상을 살아오면서 옛날의 그 우산대를 쥔 어른의 행세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무학(無學)이신 어머니가 신문을 읽다가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시면 무식하다는 말을 예사로 했고, 가난한 친지의 사정 얘기에 가슴 아파하기보다는 귀찮아했으며, 삼류 잡지를 보는 친구를 보면 한심하다고 핀잔을 주면서 마구 잘난 체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를 무식하지 않게 공부시켜준 분은 바로 그 무학이신 어머니였으며, 신문이나 잡지에서 나를 보았노라고 진정 반가워하며 전화를 걸어주어 어린 시절 옛정을 뭉클 느끼게 해주는 이들이 바로 그 친구들이었으며, 지금도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제일 먼저 찾아와 소매를 걷어붙이고 궂은일을 도맡아 해주는 이가 그 가난한 친척들이라는 사실은 깜박 잊고서.

 

옛날 그 비 오던 날, 우산을 같이 썼던 그 사람은 정말로 아버지 말씀처럼 선녀가 보내신 게 틀림없나 보다.

 

 

 

 

 

출처 : 오 솔 길
글쓴이 : 소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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