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테르와 빛의 속도에 대하여

빛의 속도가 매질의 밀도에 따라 달라진다면, 진공속에서의 빛의 속도보다 빨라 질 수 있는 매질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진공은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꽉 차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양전자의 개념을 발생시킨 것이라면, 그렇다면 양전자로 가득찬 공간을 빛이 이동할 때의 속도는 과연 어떠할 것인가? 음전자로 가득찬 진공과 양전자로 가득찬 공간은 어떻게 다를까?

 

여기에서 에테르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싶어진다. 에테르는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빛이 매질없이 전진한다는 것은 다소 믿기가 힘들다. 물론 빛이 입자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하지만 다시 한번 에테르를 꺼내 들고 논의하는 것은 어떤가? 진공이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공간이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으로 차 있다는 말인데,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음전자이든 양전자이든, 아니면 힉스장이나 그와 같은 것이든 간에 그 무엇을 에테르라고 가정하는 것은 어떤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종류의 에테르가 없는 공간을 지나는 빛의 속도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엔트로피와 우주 팽창에 관하여

시간의 흐름은 엔트로피의 증가를 가져 온다. 그 이유는 우주가 팽창하고 있기때문이다. 더 넓어지는 공간에서 입자들은 더 많은 배열을 가질 가능성이 증가하기때문이다. 이는 무질서의 도가 증가하는 것 즉 엔트로피의 증가를 가져온다.

 

하지만 우주가 수축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입자들이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 좁아지고 이는 결국 배열의 경우의 수가 줄어드는 현상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즉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다.

 

고도의 질서를 향해 가는 흐름은 엔트로피의 감소와 관련이 있으며, 이는 활동공간의 협소화와 관련이 될 듯하다. 국지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한 부분의 협소화는 외부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도의 질서를 향해 가는 내부의 엔트로피의 감소는 그 외부의 엔트로피 증가와 완전한 등가를 이루는가? 그렇다면 전체적으로 볼 때 내부공간의 협소화로 인한 전체 엔트로피의 증가는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겠지. 다만 외부 공간의 밖으로의 팽창으로 인한 엔트로피의 증가만 있을 뿐.

 

정상상태의 우주라면 엔트로피는 항상 같은 값을 유지해야 하겠고, 팽창우주의 경우에는 엔트로피의 증가, 수축우주의 경우는 엔트로피의 감소가 시간의 흐름과 관련하여 있게 될 것이다. 단 진동우주의 경우에는 ...엔트로피의 증가와 반복도 진동하겠지.

 

우리가 사는 우주가 신의 섭리에 따른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진동하는 우주여야 할 것이다. 최초의 대폭발이후 아직 수축을 경험하진 못했지만 결국은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인플레이션 현상이 무엇에 비롯된 것인지 모르지만 그를 발생시킨 그와 유사한 종류의 힘에 의해 어느 순간 우주는 수축의 단계로 접어들지 않을까? 그리고 어는 정도 수축했을 때 다시 팽창하는 반복적인 움직임은 생성된 우주가 그 속에 생명체를 지니고 영원히 지속될 수 있게 할 것이다.

 

본질과 현상

자연은 우리에게 본질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단지 현상에 대해서만 반응한다. 그 속에서 본질을 찾으려는 노력없이는 다만 현상만을 관찰할 뿐이다. "자연을 노하게 하면, 자연은 자신의 본성을 보여준다"라는 말은 자연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자연상태가 아닌 실험적 상황에서의 연구가 필요함을 일깨워 준다. 하지만 인위적 상황에서의 관찰역시 우리의 인식감각과 관련이 있지 않은가? 어느정도 깊이 들어가야만 현상이 아닌 본질에 도달하는 것일까? 우리의 감각기관으로는 결코 본질에 도달할 수 없으며 단지 이성에 의해서만 본질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감각은 현상을 인식하고, 이성은 본질을 인식한다? 우리의 이성이 감각적인 경험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면 이성도 결코 그 본질을 꿰뚫는 도구가 될 수 없는 것이련지...

 

물질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 중 가장 최근의 견해이며 가장 신비주의적인 견해는 물질의 본질은 비물질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물질과 구조로 형성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물질은 사라지고 남은 구조만이 물질의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과학자도 있다. 구조를 이루는 수학, 법칙이 물질의 본성이라고 하니. 신피타고라스파라 할만도 하다. 더 나아가 물질의 본성은 정보라고 보는 물리학자도 있다고 한다. 현대물리학은 과학을 넘어 고대 그리스의 철학으로 다시 회귀하고 있는 것 같다. 이성적이며 합리적이라 간주될 만한 추론등을 물리적 현실로 본는 것이 그렇다. 경험주의 실험주의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인 논의로 현대 물리학은 점점 깊숙이 빠져들고 있다. 과학은 더 이상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는 논리적 믿음체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없다. 불가지론, 회의주의가 판을 칠 멍석이 깔려지고 있다.  

 

 

<그래비티>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우주에서 조난당한 우주인이 우여곡절을 거쳐 지구로 귀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D기술로 볼만한 영상을 만들어 낸다. 날카로운 파편이 내 눈앞으로 휙 날라올 때,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며 피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3D 영화를 처음보는 촌놈이라 그런가? 슬쩍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볼 뻔 했다. 

 

 

그리고 스필버그식 긴장감도 한 몫을 했다. 우주정거장에 부딪쳐 튕겨나갈 때, 무엇이라도 잡지 않으면 그냥 암흑 우주속으로 빠져버릴 상황이다. 손을 뻗혀보지만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뒤로는 시커먼 하늘에 점점히 박혀있는 별빛들만 냉정하게 비치고, 그 무서운 무저갱속으로 빨려들 것만 같은 느낌, 놓치고, 또 놓치고 아! 놓치면 끝장인데 하는 순간 간신히 손에 걸린다. 제발...꽉 쥐어라 하는 똥줄타는 느낌...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래비티>를 보면서 <쇼생크탈출>이 생각난 것은 왜일까? 소유즈호에 타고서 휴스턴과 교신을 시도하는 라이언(산드라 블럭). 하지만 휴스턴에서 응답이 없고, 누군가와 교신이 되었지만, 혼선이 된 듯하다. 알지 못할 말로 지껄이는 소리,개가 짖는 소리, 아이 우는 소리, 바로 지구에서 들려오는 일상적인 소리를 듣고 있는 라이언, 그녀는 지난 시간동안 일상의 행복을 놓치고 있었음을 알아챈다. 딸애가 불의의 사고로 죽은 후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삶의 행복을 잃었던 것이다. 이제 이 고립무원의 절망속에서, 그리움이 아이의 울음속에 전해지고 있다. 이제는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것인가? 이별인가?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한채 편안히 눈을 감는데, 주파수가 맞지 않은 일상 소음들이 배경음악처럼 흐른다. 이 장면, 뭔가 퍼뜩 떠 오른다. 쇼생크탈출의 한 장면이! 교도소 방송실에 들어간 주인공(팀 로빈스)이 문을 잠근 채 피가로의 결혼을 전축위에 올려놓고, 몸을 뒤로 쭉 젓히고 두 손은 뒷머리를 편히 받히고 두 발은 책상위에 올려 놓은 채, 편하게 의자에 기대 앉아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다. 교도소 운동장엔 스피커로 '저녁바람 부드럽게'가 아름답게 울려퍼진다. 

 

 

 

 

 

라이언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아름다움, 저 아래 땅에서의 일상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다시 가질 수 없는 그것이 그리운 것이다. 그녀는 비몽 사몽간에 다시 돌아갈 방법를 알게된다. 그녀에게 지상으로 탈출할 길이 열렸던 것이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중국의 우주정거장으로 돌진한다. 지구 대기권으로 떨어지는 우주정거장에 가까스레 탑승한 그녀는 모든 것을 도킹 해제하고 지구로 떨어진다. 불타는 불덩어리, 우주정거장의 파편은 대기속에 불꽃으로 사라지고, 그녀가 탄 귀환선속의 기계들도 곧 폭발할듯이 몸부림친다.

 

 

그녀는 깊은 호수속에 잠긴다. 찰랑거리는 빛이 눈부시게 비쳐들어오는 수면을 향해 올라가는 그녀. 수면으로 솟구쳐 오르면서 깊은 숨을 쉰다. 그녀는 생존하여 돌아온 것이다. 해변 모래에 온 몸으로 기댄채 엎드려 갈색 모래를 주먹에 쥐면서 그녀는 무엇을 느꼈을까? 쇼생크 탈출의 탐 로빈슨은 온통 비를 맞으며 하늘을 향한 채,얻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자유를 벅차게 느낀다. 그녀는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방식으로 대기를, 그리고 빛을, 그리고 자연을, 그리고 생명을 느낀다. 벅찬 마음으로...

 

 

 

 

'기타등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우리 아이 스마트폰과 떼어놓기..새 학기 교실은 전쟁 중  (0) 2014.04.03
물리적 단상  (0) 2014.03.07
영원 회귀 사상에 대해서   (0) 2014.02.05
역사란?   (0) 2013.09.27
초록3  (0) 2013.04.24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영원 회귀 사상으로 시작한다. 모든 존재는 영원이라는 무한한 시간속에 무한히 반복하여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역사는 무한의 시간속에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원자론에 의하면 존재는 입자들의 특정한 배열이며, 모든 변화는 입자들의 재배열이다. 우리의 우주에 있는 입자의 수는 10^118개로 유한하다. 그러므로 그 입자 배열의 경우의 수는 2^10^118개로 엄청나게 크지만 여전히 유한일 뿐이다. 그러므로 영원의 시간속에 언젠가는 동일한 배열이 다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즉 동일한 존재가 다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물리학을 배경으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과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현대 물리학에서는 다중우주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는 니이체의 영원 회귀 사상과 닮아있다. 니이체의 그것이 시간의 흐름속에서의 무한 반복을 논하고 있다면 다중우주는 무한 공간속에 펼쳐진 무한 반복을 논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절대적인가? 어떻게 보면 논리적 결론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논리에는 그 전제가 있다. 그리고 그 전제의 옳고 그름은 그 논리 전체의 옳고 그름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영원회귀나 다중우주의 논리는 무엇을 전제로 하고 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원자론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즉 최소의 입자, 더 이상 분리할 수 없는 입자 즉 원자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러한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현대 물리학은 원자가 최소 입자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원자는 양자와 전자로 나누어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양자는 그 보다 작은 소립자(쿼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수많은 소립자들이 발견되었다. 더 나아가 어떤 종류의 소립자들은 순식간에 생성되었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소립자들의 구조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러한 소립자들은 끈의 형태로 되어 있을 것이라는 끈이론이 있으며, 심지어는 물질이 아닌. 정보 또는 수학적 구조들이 물질의 본질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무한대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한히 커지는 수는 무한대의 개념을 쉽게 연상시킨다. 또한 그와는 반대되는 무한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무한히 작아지는 개념, 제논의 역설 즉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이을 따라 잡지 못한다는 것은 무한소 개념을 이용한 것이다. 일정한 거리를 반으로 나누고, 그 반을 다시 반으로 나누고, 또 나누어진 반을 다시 반으로 나누는 과정은 수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무한히 반복할 수 있다. 그와 같이 물질을 쪼개고 쪼개는 과정이 어느 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한소처럼 한없이 쪼갤 수 있는 것이라면, 사실 이러한 생각을 반박할 수 있는 과학적 증거는 없다. 만일 그렇다면 즉 원자론이라는 가설이 잘못된, 오류가 있는 전제라면 그것에 근거하여 무한 회귀를 주장하는 것은 올바른 것일 수 없다. 입자를 무한히 쪼갤 수 있다면, 그 배열 역시 무한할 수 밖에 없으며, 동일한 존재가 무한 반복되어 나타날 것이라는 이론은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기타등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물리적 단상  (0) 2014.03.07
<그래비티>와 <쇼생크탈출>에 나타난 자유와 삶에 대한 그리움  (0) 2014.03.05
역사란?   (0) 2013.09.27
초록3  (0) 2013.04.24
초록2  (0) 2013.04.13

역사!

역사가 있는 사회와 역사가 없는 사회

그 차이란 무엇일까? 문자가 있는 사회는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사회가 되고, 그렇지 못한 사회는 역사를 소유하지 못한 사회가 되는 것일까? 그렇기는 하다. 하지만 문자가 있고 없고를 떠나 그 사회 구조가 어떠한가가 문제시 된다. 즉 차별이 있는 사회인가? 아니면 차별없는 사회인가? 우리는 차별이 없는 사회를 꿈꾸지만 그 사회의 결국은 어떠할 것인가? 차별이 있는 사회는 절대 악인가?

 

문자의 존재는 정보의 존재로 이어진다. 정보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정보를 가지고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차별을 유발시킨다. 정보를 가진자는 권력자가 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지배를 받게 되는 계층이 된다. 그러므로 문자의 존재는 차별있는 사회를 만들어 내는 원동력일 듯하다. 그러면 문자가 없다고 해서 정보가 없는 것인가?

 

세종대왕때 한글 창제를 반대한 사대부들은 왜 그랬을까? 서민들은 어려운 한문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문을 배울 수 있었던 사대부계층만이 그를 통한 정보를 소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정보는 그들의 권력이었다. 쉬운 한글을 만들어 서민들도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된다면 그들의 권력기반이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글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면 한글이 널리 사용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의 권력의 향방은 어떠한가? 권력층과 비 권력층 사이의 간격이 많이 좁아졌다. 즉 사회계층사이의 간격이 좁아진 만큼 계층의 이동이 용이해지고, 그러므로 그 열망도 더 커지게 되었다. 이는 계층간의 투쟁, 그리고 뺏고 뺏기는 싸움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발전 또는 진보가 존재하게 된다.

 

그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차별이란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차별은 극복가능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 차이가 너무 커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 열의 이동이 일어나지 않고 차가운 사회로 탈바꿈하게 된다. 아니면 그 엄청난 차이를 극복할 영웅이 나타나야만 역사는 이루어지게 된다.

 

차별이 있는 사회에서 그 차별이란 것은 항상 그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차별에 대한 분노가 특히 그러하다. 차별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신분에 만족하는 자에게는 그 차별을 뛰어넘으려는 에너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차별을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자는 분출하는 에너지에 의해 크고 작은 혁명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들이 역사를 구성하는 사실들을 형성하게 된다.

 

역사는 도전하는 자와 응전하는 자 사이의 투쟁에서 생겨난다. 도전하는 자는 새로운 권력을 쟁취하려하고, 응전하는 자는 그것을 지키려한다. 그 다툼은 역사에 남을 만한 충돌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이른바 발전이라는 것이 결과로 나타난다. 투쟁이 없는 곳에 과연 발전이 있을 수 있을까?

 

세계 곳곳에 남아있는 원시사회는 오랜 세월동안 발전이 없이 원래의 원형질의 삶의 모습을 간직해 왔다. 수천년, 수만년전의 수렵과 채집의 생활이 그대로 배여 있다. 왜 그 사회는 발전하지 못했는가? 그들 사회는 기본적으로 차별이란 존재하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차별을 뛰어넘어려는 시도도 없을 뿐더러 차별에서 비롯되는 투쟁도 없을 것이다. 이러하여 그 사회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특별한 사건들을 소유하지 못한 사회가 되어 역사는 형성될 수 없는 입장에 있게 된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는 우리 모두 지향하는 세상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 사회는 역사없는 사회가 될 것이며, 발전이란 없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한 사회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비록 세계 곳곳에 그러한 사회들이 부분적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개인의 발전도 마찬가지이다. 차별받는 것에 대한 분노, 상위 계층으로의 열망등은 행동하려는 강한 동력으로 작용한다. 만족보다는 불만족이 그러한 열을 발생시키는 정도가 더 컬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개인을 진보하고 발전하게 만든다.

 

발전은 있지만 불평등한 세상, 평등하지만 발전이 없는 세계...어떤 것이 더 좋은가?

'기타등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래비티>와 <쇼생크탈출>에 나타난 자유와 삶에 대한 그리움  (0) 2014.03.05
영원 회귀 사상에 대해서   (0) 2014.02.05
초록3  (0) 2013.04.24
초록2  (0) 2013.04.13
초록 봄빛  (0) 2013.04.12

초록3

 

점묘화같은

숲의 얼굴

안개속을 흐르는

동양화의 여백처럼

 

빗줄기는 안개처럼 

초록에 신비로움을 더한다

서늘한 눈의 느낌

물방울을 튕겨내며

춤춘다

'기타등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원 회귀 사상에 대해서   (0) 2014.02.05
역사란?   (0) 2013.09.27
초록2  (0) 2013.04.13
초록 봄빛  (0) 2013.04.12
열국지를 읽고  (0) 2012.12.16

초록2

 

분홍 꽃잎

하늘을 날고

꽃향기 꺽어지면 

새끼 잎들

머리를 내밀고

밝은 햇살에

눈이 부셔

 

투명한 빛 

부딪혀 부서지며

초록 빛

대기에 흩뿌린다

 

 

 

 

 

 

'기타등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란?   (0) 2013.09.27
초록3  (0) 2013.04.24
초록 봄빛  (0) 2013.04.12
열국지를 읽고  (0) 2012.12.16
고정관념깨기  (0) 2012.12.06

푸른 빛 하늘

흩뿌려지는 빛들

바람에 흔드는 나뭇가지와 잎사귀들

한 낮의 태양빛은 대기를 뚫고

어린 잎들을 부딪힌다.

 

연초록 투명한 빛조각들이

눈 앞에 흩뿌린다

망막으로 모이는 물빛 연두빛들

체액속에 모인다

강물이 대지를 적시듯 온 몸에 퍼진다.

 

계곡의 물처럼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맑음으로

초록빛은 투명으로 빛난다

온통 초록빛으로

가득한 공간들

어린 초록빛

초록빛

 

.. 

'기타등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록3  (0) 2013.04.24
초록2  (0) 2013.04.13
열국지를 읽고  (0) 2012.12.16
고정관념깨기  (0) 2012.12.06
중국사를 읽게 된 이유  (0) 2012.11.04

 

열국지를 읽게 만든 책은 중국사이다.

 

그런데 왜 내가 중국사를 손에 쥐게 되었을까? 그 단초가 된 것이 <사기열전>이다. 동양의 고전중의 하나로 추천되어 왔던 <사기열전>을 읽으려다 문득 '전체를 알고 부분을 살펴보자'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중국사를 읽게되었는데, 특히 춘추전국시대에 관심이 모아지게 되었다. 그 당시 제자백가라 해서 수많은 사상가들이 나타났고, 그 중에 유명한, 공자, 맹자만이 아니라 그 외에 널리 알려진 강태공이나 관중과 포숙아, 그리고 안영, 오자서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인물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과연 이 모든 사람들은 어떤 시대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지, 그들의 사상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당시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궁금해 지기 시작했다.

 

그 때 눈에 띄인 것이 초한지였다. 이 역사소설을 읽다보니, 이는 춘추전국시대 이후의 통일제국 진나라로 부터 항우와 유방의 천하를 다투는 초한시대의 이야기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초한지 이전의 시대인 춘추전국시대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열국지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초한지를 읽는 것을 잠시 멈추고 1~10권에 이르는 열국지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깨달은 것은 중국의 유명한 소설들의 배경이 되는 시대가 있는데, 역사의 흐름에 맞게 이러한 소설들을 읽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열국지, 다음에 초한지를 읽는 것이 흐름에 맞는 읽기임을 느끼게 되었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삼국지는 한참 후대의 이야기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초한지까지 읽고 난 후에 <사기열전> 또는 <사기본기>등을 읽으면 되겠다는 나름대로의 순서감이 잡히게 되었다.

 

열국지는 주왕실에 의해 책봉된 제후들과 그들을 보좌하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각 제후들이 통치하던 나라들간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올바른 통치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통치행위란 어떤 것인가? 열국지에서 보여지는 통치행위의 목적은 부국강병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기본은 제후들의 덕과 어질고 현명한 인물의 등용이란 점이다.군주의 기본 자질은 어진 정사를 베풀며, 인물을 알아보고 그들을 중용하는 것에 달려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제후보다 출중한 재상들에 의해 국가가 발전해 나가는 양상을 보인다. 주무왕은 강태공이라 걸출한 인물이 함께 했었다. 그리고 중국 춘추시대의 제후가운데  패업(業)을 이 다섯 사람을 오패라 부르는데, 그들은 제(齊)나라환공(桓公), (晉)나라문공(文公), (秦)나라목공(穆公), (宋)나라양공(襄公), (楚)나라장왕(莊王) 을 이르는데, 목공양공 대신(吳)나라부차(夫差)와 (越)나라구천(句踐)을 이르기도 다. 이 제후들은 한결같이 뛰어난 재상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린다. 제나라의 환공과 관중, 진나라의 문공은 그 자신이 제후가 되기 전 공자 중이로 높은 덕을 칭송받았지만 그 역시 오랜 방랑생활에 따라다니던 호언(狐偃), 조쇠(赵衰), 가타(賈橓), 선진(先軫) 등의 현사(賢士)들을 중용하여 8년간의 짧은 치세에 공을 많이 세웠다. 진목공은 백리해와 건숙이라는 현신과 함께 했으며, 송양공과 목이, 초장왕은 오거(오자서의 부)와 소종, 오나라의 부차왕은 오자서, 월나라의 구천은 범려와 함께...혼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없으니, 인재를 알아보고 중용하는 안목이야 말로 통치자의 중요한 덕목이라 하겠다.

  

과연 충이란 무엇인가? 제 한 몸을 초개처럼 여기고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 그 당시의 시대적, 문화적 상황이나 인물상이 때론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의란 무엇이란 말인가? 군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 그 군주가 불의하던 그렇지 않던 자신이 섬길 군주를 배신하지 않는 것이 의일까? 아니면 군주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백성들이 편안한 삶을 살도록 무도한 왕을 충간을 올리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이 의일까?  과연 절대적인 의의 기준은 없는 것일진데, 올바르지 않은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의로운 일이라 할 수 없고, 선왕의 유지에 따른 약속의 이행이라는 관점에서 보아도 그것이 절대적 의라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을 것 같다. 절대 다수를 이루며 착취를 당하고 있던 백성들을 위하는 것이 의라면, 절대다수의 행복이 최고선이라 하던 어떤 서양철학자의 생각이 이와 같지 아니한가?  갑자기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샌델 교수가 생각이 난다. 인간의 관점에서 본 절대적 의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미세한 모래가루와 같다. 동양의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공자의 도도 결국은 제후들을 도와 백성을 인과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사상이지만, 결국은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입신양명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과 연결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반하여 노자와 장자는 자신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 모든 일이 참으로 헛된 일임을 지적하려는 것이리라.

 

기다림은 열국지에 나타난 또 다른 모습이다. 수많은 인물들이 입신양명이 기회를 얻기 위해 천하를 주유했지만, 아주 탁워했던 사람들마저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 오랜 세월을 기다리며, 방황하고 방랑해야 했으니, 그 기다림이 또한 열국지에 나타난 또 하나의 갈래가 아닐까한다. 심지어 공자는 결국 당시에는 그 기다림의 결과를 보지 못하고 사후 여러세기후에야 그의 사상이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니, 제자백가중에 기다림의 최고봉을 이루는 인물이 아닐까한다.

 

무상함은 열국지에 숨어있는 또 다른 키워드이다.  열국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 그 가운데 아주 뛰어난 인물들, 그들의 학식, 그들의 통찰력, 그들의 기지와 재치, 그들의 인과 덕, 열국지에서 망라하는 수백년의 세월에 그 누가 버틸 수 있겠는가? 한결같이 모두 세월에 스러져 버리고 이름자만 남기고 가버렸으니, 인생무상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 강대한 제후들도, 그 대단한 인재들도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갔으니, 인생은 정말 무상한 것이로구나. 우리네 인생도 이와 같이 흘러가 버리고 후대에 역사로 남겠지. 아닌 역사도 아니라 그냥 잊혀져 버리겠지....인생무상!

 

'기타등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록2  (0) 2013.04.13
초록 봄빛  (0) 2013.04.12
고정관념깨기  (0) 2012.12.06
중국사를 읽게 된 이유  (0) 2012.11.04
앤 랜더즈의 아버지  (0) 2012.11.04

어느 부유한 상인이 임종이 가까워 오자 유산 상속을 위해 두 아들을 불러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너희가 평소에 다툼이 심해서 유산을 나눠줘도 또 싸움이 일어나 이 애비가 저승에서 마음이 편치 않을까 염려 된다. 그래서 너희가 시합으로 이기고 짐을 분명히 해서 그런 다툼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 저기 쌍둥이 말이 매여 있다. 두 놈 다 튼튼하고 빠르기가 번개 같다. 각자 한 마리씩 타고 이웃 마을까지 경주를 하거라. 둘 중 더 늦게 도착한 말이 이기는 것으로 하겠다. 시합은 해질녘까지 하는 것으로 하고 만약 아무도 해질녘까지 이웃 마을에 도착하지 못하면 전 재산을 마을 교회에 기부하겠다."

 

말이 끝나자 두 아들은 각자 말을 타고 더 늦게 달리는 시합을 시작했다. 최대한 늦게 가려고 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어떻게든 해지기 전까진 시합을 끝내야 하는데 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 가다간 도저히 해지기 전까지 도착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지기 시작하는데 도착지검까지 아직 반도 못간 상태였다. 그 때 백발이 한 노인이 지나가다가 이상한 시합을 하고 있는 두 아들의 사연을 듣고 껄껄 웃으며 한마디 했다. 그 말을 들은 두 아들은 말을 타고 달려 순식간에 경기를 끝내버리고 말았다.

 

그 노인은 어떤 말을 해 주었을까? 

 

(영어 낭독 훈련에 답이 있다에서 발췌)

'기타등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록 봄빛  (0) 2013.04.12
열국지를 읽고  (0) 2012.12.16
중국사를 읽게 된 이유  (0) 2012.11.04
앤 랜더즈의 아버지  (0) 2012.11.04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에 대한 짧은 생각  (0) 2012.09.19

역사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겠다

몇 년전 중국 청도를 방문하는 여행은 참으로 실망스러웠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사전준비의 부족이었다. 그리고 한가지 배운 것은 여행을 즐기긴 위해선 먼저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중국말 한마디도 못하지, 청도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지, 그냥 안내하는 지인의 뒤꼭지만 바라보고 걷느라... 혹 길을 잃어버리면 어떻하지하는 두려움에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배웠는지...

 

15년전에 사이판에 갔을 땐, 이렇지는 않았는데... 그 지역은 영어를 쓰는 지역이라 일단 자신감이 있었고, 둘째로는 그곳에서 들은 이야기가 인상적이었기때문이다.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각각의 나라와 문화에 따라 이렇게도 달라질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배워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렇구나 하고 체험하여 알게 되었기때문이다. 그래서 여행할 때에는 단지 아름다운 풍광만 즐길 뿐 아니라 그 나라의 역사, 문화, 풍습, 그 나라의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등의 여행 기억등을 가지고 돌아오야 한다.

 

이에 여행할 때는 기본적으로 그 나라 말을 몇가지라도 익히고 가는 것이 필수.

여행하는 지역에 가볼 만한 어떤 명소가 있으며, 거기와 관련된 역사적 문화적 기초지식을 갖는 것이 추가적인 사항.

그 나라나 그 지역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문화나 사고 방식을 엿보는 것이 또 하나.

뭐 이런 것이 여행에 선행되어야 할 점들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미 여행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바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차후 중국을 다시 여행할 경우를 대비하여 기초적으로 그 나라의 역사를 알아야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중국사에 손이 가게 되었다. 물론 현재 나의 독서 전쟁에 포함될 중국의 고전을 읽기 위한 전초작업이기도 하다. 먼저 사마천의 사기, 공자의 논어 등...몇가지 중국 고전을 접하고 싶은데 사실 겁이 덜컥난다. 아무 기초도 없이 읽게 되면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냥 시간만 낭비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아마 그런 것이겠지. 그래서 중국사를 손에 들게 되었는데,

'기타등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국지를 읽고  (0) 2012.12.16
고정관념깨기  (0) 2012.12.06
앤 랜더즈의 아버지  (0) 2012.11.04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에 대한 짧은 생각  (0) 2012.09.19
지금까지 읽은 책  (0) 2012.09.1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