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언어학사에 대한 일별

언어학의 진정한 연구 대상이 무엇인지 인식하기 전에 언어학이 거쳤던 세가지 단계

문법

문헌학

비교문헌학,비교문법


언어들이 서로 비교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부터 비교문헌학, 비교문법이 시작되었다.

전적으로 비교적이기만 한 이 방법은 언어를 제4의 자연계로 여기며 유기체로 취급함으로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였다.

이후 모든 비교의 결과를 역사적 관점에 위치시킴으로써, 여러 사실을 그 본연의 질서 속으로 연결시킨 학자들 덕분에 언어는 독자적으로 발달하는 하나의 유기체로 생각되지 않고, 언어 단체의 집단적 정신의 산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2장 언어학의 테마와 과제: 여러 관련 과학과의 관계

언어학의 과제

1. 접할 수 있는 모든 언어를 기술하고 그 역사를 쓰는 것이다. 이는 결국 어족들의 역사를 쓰는 것이고, 가능한 한 각 어족의 선조가 되는 언어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2. 모든 언어에서 항구적이고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힘을 찾아보고, 역사의 모든 독특한 현상을 포괄할 수 있는 일반 법칙을 추출해 내는 것이다.

3. 언어학 자체의 범위를 정하고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 언어의 본질은 언어기호의 음성적 특성과는 관계가 없다.

* 분명한 것은 일반 교양에 언어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에 있어 언어활동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요소이다


3장 언어학의 대상

1절 언어의 정의

고찰하는 방식에 따라 완전히 다른 여러 현상들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불어 단어 nu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음으로서,

개념의 표현으로서,

라틴어 nudum의 해당어로서 듣등

대상이 관점을 선행하기는 커녕, 관점이 대상을 만들어내는 것 같은 인상이다. 더구나 문제의 현상을 고찰하는 이 여러가지 방식중, 어느 것이 나머지에 비해 선행하거나 우월하다고 예견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없다.


언어는 여러 측면을 공유하고 있다. 음성과 청각, 음과 개념, 개인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 기존체계와 진화.

하나의 측면에만 전념하면 언어의 이중성을 보지 못할 위험성이 있고, 동시에 여러면을 연구하면 언어학의 대상은 서로 전혀 연관이 없는 잡다한 사항들의 혼린한 더미로 보이게 된다.


우리로서는 이 모든 어려움에 대해 단 한 가지 해결책만 있을 뿐이다. 우선 무엇보다 언어(langue)란 영역에 위치해서, 언어가 언어활동(langage)의 다른 모든 현상에 대한 규범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언어란 언어활동의 특정한 일부분일 뿐이다. 물론 본질적인 부분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은 언어활동 능력의 사회적 산물인 동시에, 개개인이 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사회집단이 채택한 필요한 약정의 총체이다. 전체적으로 고려해 보면 언어활동은 다양하고 잡다하다. 여러 영역에 걸쳐 있고, 동시에 물리적, 생리적, 정신적인가 하면, 또한 개인적 분야와 사회적 분야에 속한다. 그것은 인간적 현상의 어떤 범주 안에도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떻게 그 단위를 밝혀내야 할 지 막연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반대로 그 자체가 하나의 전체이며 분류 원칙이다. 우리가 언어활동 현상 중 언어에 첫째 지위를 부여하는 순간, 우리는 다른 어떤 식으로도 분류되지 않는 총체 속에 자연적 질서를 도입하는 것이 된다.


기호를 제어하는 능력이 존재한다. 이것이야말로 언어 능력 바로 그것이리라.


***인간의 언어가 음성으로 표현되는 것임에는 분명하나, 음성이 언어의 본질은 아니다. 더욱 본질적인 것은 개념을 기호체계로 구성하는 능력이다.

***한 사람의 뇌에 있는 개념(생각)이 다른 사람의 뇌로 전달되는 과정, 이것이 교감이다. 신비로운 현상임에 틀림없다.


만약 모든 개인 속에 축적된 낱말 영상의 총합을 포괄해서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언어를 구성하는 사회적 유대관계에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는 화언 실행을 통해 동일한 공동체에 속하는 화자들 속에 저장된 보물이며, 각 뇌리 속에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모든 개인의 뇌 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문법 체계이다. 왜냐하면 언어란 그 어느 개인 속에서도 완전할 수가 없고, 집단 속에서만 완전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어와 화언을 분리하면, 1)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2)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 혹은 다소 우연적인 것

언어란 화자의 기능이 아니라, 개인이 수동적으로 습득하는 산물이다.

화언은 반대로 의지적이고 지적인 개인 행위인데,


3절 인간적 현상 안에서 언어의 위치, 기호학

언어는 관념을 나타내는 기호 체계이며, 따라서 문자체계, 수화법, 상징적 의식, 예법, 군용신호등에 비견할 만하다. 언어란 단지 이들 체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회 생활속에 있는 기호의 삶을 연구하는 과학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 심리학의 일부분을 이룰 것이며, 따라서 일반심리학의 일부분을 형성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기호학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기호학은 우리에게 기호가 무엇이며 어떤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지를 가르쳐 줄 것이다. 기호학은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어떠한 것이 될지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할 권리가 있고 그 위치는 미리 정해져 있다. 언어학은 이러한 일반 과학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기호학이 발견하게 될 법칙들은 언어학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4장 언어의 언어학과 화언의 언어학

발성과 언어의 구별

언어활동 연구에는 두 부분이 있다. 하나는 본질적인 것으로 언어를 그 대상으로 하는데, 언어는 본질상 사회적이며 개인과는 무관하다. 이 연구는 전적으로 정신적인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부차적인 것으로 언어활동의 개인적인 면, 즉 발성을 포함한 화언을 그 대상으로 한다. 이것은 정신적이고 물리적이다.

물론 이 두 대상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서로를 전제하고 있다. 화언이 이해되고 모든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필요하다. 반면 언어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화언이 필요하다.  언어를 진화시키는 것은 화언이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 받는 인상이 바로 우리의 언어 습관을 바꾸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와 화언 간에는 상호 의존 관계가 존재한다. 언어는 화언의 도구이자 동시에 산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언어와 화언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언어는 각 개인의 뇌 속에 축적된 인상의 총제적 형태로 사회에 존재한다. 화언은 ㅅ하람들이 말하는 것의 총합이다. 화언 현상은 개인적이며 순간적이다.

5장 언어의 내적 요소와 외적요소

내적 언어학: 언어의 조직, 체계

외적 언어학: 언어의 조직, 체계와 무관한 모든 것

한 언어의 역사와 한 종족 또는 한 문화의 역사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관계, 예를 들면 한 국민의 풍습은 그 언어에 반영되고 언어는 국민을 만드는 데 큰 몫을 한다.

(언어학과 민속학)

로마 정복과 같은 굵직한 역사적 사실은 수많은 언어 현상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식민지화는 하나의 고유 언어를 다른 지역에 전파하는데, 이로 인해 이 고유 언어는 변화하게 된다. (언어와 정치사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

교회나 학교등 모든 종류의 제도와 언어 사이의 관계, 이들 제도는 한 언어의 문학적 발달과 민접하게 연결된다. 문어와 지방 방언 사이의 분쟁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책에 쓰인 언어와 통용어의 상호관계 또한 조사할 수 있다. 문화의 소산으로서 모든 문어는 자신의 존재 영역을 자연적인 영역, 즉 구어의 영역에서 분리하고야 말기 때문이다.

언어의 지리적 확장과 방언의 세분에 관계되는 모든 것은 외적 언어학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체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모두 내적이다.  


6장 문자체계에 의한 언어의 표기

언어와 문자체계는 두 개의 구별되는 기호체계이다. 후자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전자를 표기하는 것이다.

문자체계가 없다면 언어의 보존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언어는 문자체계와는 독립된, 훨씬 확고한 구두 전승을 갖는다.

문자체계에 부당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안된다.


서기법과 발음 사이의 불일치의 원인

언어는 끊임없이 진화하는 데 반해 문자체계는 부동적인 경향이 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으로부터 알파벳을 차용하는 경우, 그 서기 체계 능력이 흔히 새로운 기능에 적합하지 않을 수가 있다. 예를 들면 한 음을 나타내는데 두 개의 문자를 사용하는 경우. 폐음과 개음을 구별하기 위해 ee, ea라는 철자를 고안해 냈었다.


7장 음운론


1부 일반원리

1장 언어기호의 성격

1절 기호, 기의, 기표

언어 기호가 결합시키는 것은 한 사물과 한 명칭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과 하나의 청각영상이다.

전체를 지칭하는 데 기호signe라는 낱말을 사용하고, 개념과 청각영상에는 각각 기의signifie와 기표signifiant를 사용한다.


2절 제1원칙: 기호의 자의성

기표를 기의에 결합시키는 관계는 자의적이다. 언어기호는 자의적이다.

기표가 무연적이라는 점, 즉 기의에 대해 자의적이며, 기의와는 현실 속에서 아무런 자연적 관계도 없다는 점이다.


3절 제2원칙: 기표의 선적인 특성

기표는 그 청각적인 본질 때문에 단지 시간 속에서 전개되며 또한 시간의 속성에서 비롯되는 특징들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기표는 a)시간의 길이를 반영하고, b) 이 길이는 단일 차원에서 측정 가능한 바, 이는 선을 말한다.

여러 차원에 걸친 동시적 복합성을 제공할 수 있는 시가적 지표(해상표지)에 반해, 청각적 기표들은 단지 시간이라는 선만 이용한다.따라서 이들 청각 기표 요소는 하나 하나 차례로 나타나며, 하나의 사슬을 형성한다. 이들 요소를 문자체계로 나타내거나 시간 소의 연속을 철자 기호들의 공간적인 선으로 대체해 보면, 그러한 특성은 금방 나타난다.


2장 기호의 불변성과 가변성

1절 불변성

기표는 그 표현 대상인 개념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자유스럽게 선택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언어 집단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이다. 사회집단의 의견은 고려되지 않으며, 언어가 선택한 기표는 다른 기표로 대체될 수 없을 것이다.

한 개인이 설령 원한다 할지라도, 이미 행해진 선택을 변경할 수는 도저히 없을 뿐더러, 심지어는 대중도 한 단어에 대해서조차 절대권을 행사할 수 없다. 대중은 있는 그대로의 언어에 매여있다.


2절 가변성

시간은 언어의 계속성을 보장하는 것 외에 또 다른 효과를 지니는데, 그것은 첫 번째 효과에 모순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다른 효과란, 그 속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언어기호들을 변질시키는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기호의 불변성과 가변성을 동시에 거론할 수 있게 한다.


기호가 시간 속에서 갖는 지속성은 시간 속에서의 변질과 결부되어  일반 기호학의 한 원칙이 된다.


3장 정태언어학과 진화언어학

1절 가치를 다루는 모든 과학의 내적 이중성

동시성의 축: 공존하는 사항간의 관계를 말하며, 여기서는 시간의 어떠한 개입도 배제된다.

연속성의 축: AB축의 모든 사항이 그 변화 요소와 함께 위치하고 있다.

가치체계가 복잡하고 정밀하게 구성되면 될 수록, 이 복잡서응로 말미암아 이 체계를 두 축에 따라 차례로 연구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 진다. 기호의 다수성때문에 시간 속에서의 관계와 체계 속에서의 관계를 동시에 연구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두가지 언어학을 구별하는 것이다.

하나는 진화언어학, 이와 대립적으로 언어 상츼애 과학 또는 정태언어학

공시언어학, 통시언어학, 공시태, 통시태


2절 내적 이중성과 언어학사

3절 실례를 통해 본 내적 이중성

두 관점 즉 공시적 권점과 통시적 관점의 대립은 절대적이며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다.

언어는 하나의 체계로서 이 체계의 모든 부분은 공시적인 유대 속에서 고찰될 수 있고 또한 고찰되어야 한다.

변질은 결코 체계 전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체계의 요소 중 어느 하나에서 일어나므로 체계 밖에서만 연구될 수 있다. 물론 모든 변질은 체게에 여향을 미친다. 그러나 시초적 현상은 단지 한 점에만 작용한다. 따라서 이 시초적 혀ㄴ상은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결과와는 아무런 내적 관계도 갖지 않는다. 연속사항과 공존 사항 사이에, 부분적 현상과 ㅊ계에 관련된 현상 사이에 놓이 이러한 성질상의 차이로 인해 양 쪽 모두를 단일 과학의 소재로 삼을 수는 없다.


4절 비교를 통해 본 두 차원의 차이

물체와 투사의 차이는 통시적과 공시적의 차이를 보여준다.

수직단면과 수평단면의 차이

체스의 비유

놀이의 어떤 상태는 언어의 어떤 상태에 잘 부합된다. 말들의 지니는 각각의 가치는 체스판 위에서 이들이 갖는 위치에 의존하며, 마찬가지로 언어에 있어서 각 사항은 다른 모든 사항들과의 대립에 의해 그 가치를 지니게 된다.

체계는 언제나 순간적일 뿐이다. 즉 체계는 말의 위치가 바뀜에 따라 변화한다. 가치들이 또한 불변의 규약에 의존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불변의 규약은 놀이의 규칙으로, 놀이가 시작되기 전에 존재했으며, 매 수를 놓은 다음에도 역시 존속한다.

한 균형상태에서 다른 균형 상태로 또는 한 공시태에서 다른 공시태로 옮겨 가기 위해서는, 말 하나의 이동으로 충분하다.


5절 방법과 원칙에 있어 대립되는 두 언어학



2부 공시언어학

1장 개요

일반 공시언어학의 목적은 모든 특정 공시론적 체계의 근본 원칙, 즉 모든 언어 상태의 구성 요인을 정립하는 데 있다.


2장 언어의 구체적 본체

1절 본체와 단위의 정의

언어를 구성하는 기호들은 추상물이 아니라 실제적 사물이다. 언어학이 연구하는 것은 이 기호들과 이들 사이의 관계이다. 이를 언어학의 구체적 본체라 할 수 있다.

문제를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두 개의 원칙

1) 언어 본체는 기표와 기의의 연합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2) 언어 본체는 음적 연쇄애서 그를 둘러싸는 모든 것으로부터 구분, 분리해야만 완전히 한정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구분된 본체들, 즉 단위들이 언어 메커니즘 속에서 대립되고 있는 것이다.

...음적연쇄는 하나의 선적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어떠한 구분도 충분히 , 분명히 감지해 낼 수 없다.이를 위해서는 의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미지의 언어를 들을 때 우리는 소리의 연속이 어떤 식으로 분석되는지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언어 현상의 음적 측면만 고려한다면 이러한 분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쇄의 각 부분에 어떤 의미와 어떤 역할을 부여해야 하는가를 알게 되면, 이들 각 부분이 서로 분리되고, 형태 없는 띠가 여러 단편으로 끊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화언 연쇄 상에서 그 전후 요소와 상관없이 어떤 개념의 기표가 되는 한 음색의 단편이다.


2절 구분의 방법

화언을 언어자료로 보고 여기에 입각하여 이 화언을 평행한 두 개의 연쇄, 즉 개념 연쇄와 청각영상 연쇄로 나타내는 것이다. 올바른 구분을 하려면 청각 연쇄에서 세운 분리를 개념 연쇄의 분리에 일치시켜야 한다.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3절 구분에 있어 실행상의 어려움

동일한 낱말이라도 상이한 두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구체적 단위라고 할 수 없다. 의미는 동일하지만 음색 단편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 단위와 낱말을 동일시하면 즉각적으로 딜레마에 볼착하게 된다. 많은 낱말이 복합 단위라서 쉽게 그 하위 단위(접미사, 접두사, 어간)을 구별할 수 잇다. 반대로 낱말보다 더 큰 단위들도 있다. 합성어, 숙어, 굴절형태등이다. 이러한 단위도 구분하는데 있어 엄밀한 의미에서 낱말과 동일한 어려움을 제기한다. 한 주장에 따르면 유일한 구체적 단위는 문장이라고 한다.

...어쨌든 어떤 단위로 구분되는지에 대한 연구는 ..오리무중?


4절 결론

언어는 체계라는 특성이 있어며, 이 체계는 완전히 그 구체적 단위들의 대립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들 단위를 몰라서는 도저히 안되며, 이들에 의지하지 않고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단위의 구분이 너무나 미묘한 것이어서 이들이 정말로 주어진 것인가를 자문하게 될 정도이다. 따라서 언어는 첫눈에 볼 수 있는 본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기이하고도 놀라운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본체가 존재하며 이들의 작용이 바로 언어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는 없다. 아마도 바로 여기에 언어와 기타 기호학적 제도를 구별해 주는 특징이 있을 것이다.


3장 동일성, 실재, 가치

공시적 동일성이란 무엇인가?

"여러분"이라는 표현이 반복될 때 매 번 동일한 표현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어조의 변화와 억양 때문에 이 표현은 연설의 여러 구절에서 현저한 음적 차이를, 여러 낱말을 구별시키는 음적 차이만큼 현저한 음적 차이를 띠고 나타날 수 있다. 더구나 의미적 관점에서도 각 "여러분" 사이에 절대적인 동일성이 없음에도, 이 느낌은 지속된다.

이는 한 낱말이 상당히 다른 여러 개념을 표현하면서도 그 동일성이 심각하게 타격받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과 나무 꽃"과 "귀족의 꽃(정수)"에서 처럼


언어 메커니즘은 전적으로 동일성과 상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바 후자는 전자의 대칭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동일성 문제는 어디서나 제기된다. 이 문제는 본체 문제 및 단위 문제와 부분적으로 일치하는 것으로 이들 문제의 복잡화된 현상일 뿐인데, 이 복잡화 현상은 오히려 연구 가능성이 풍부하다.

물리적으로는 동일하지 않지만, 상황적으로 동일한 것에 대해 동일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상황적으로 다른 것과의 구별에 의해 동일성이 규정된다. 옷의 동일성과 급행열차의 동일성중 언어의 동일성은 후자와 같다. 여러분이란 말을 쓸 때마다 나는 재료를 바꾼다. 배번 새로운 발음 행위와 새로운 심리적 행위를 한느 것이다. 동일 낱말이 두 번 쓰인 경우, 양자 사이의 연결 관계는 물질적 동일성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고, 의미의 정확한 유사성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다. 그 근거가 되는 요소는 연구를 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으로, 언어 단위의 진정한 본질에 도달하게 해 줄 것이다.

 

공시적 실재란 무엇인가?


가치

언어와 같은 기호 체계에서는 특정 규칙에 따라 요소들이 상호 연관되어 균형을 이루므로, 동일성의 개념은 가치의 개념이고 가치의 개념은 곧 동일성의 개념임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체스에서 한 말이 분실되었을 때에는 다른 것으로 이를 대체할 수 있다. 동일한 가치만 부여한다면 전혀 형상이 달라도 동일하다고 간주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치의 개념은 단위, 구체적 본체, 실재의 개념을 모두 포괄한다.


4장

2절 개념적 면에서 본 언어 가치

의미와 가치는 동일한 것인가?

의미란 청각영상의 대칭물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기호 즉 의미와 청각영상의 연합체도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언어의 다른 기호들에 대한 대칭물이다. 언어는 하나의 체계로로 이 체계의 모든 사항이 연대적이고, 한 사항의 가치는 다른 모든 사항의 존재에서 비롯된다며, 이렇게 규정된 가치가 의미 즉 청각영상의 대칭물과 혼동되는 것은 왜일까?

...의미란 한 기호내에서의 개념부분 즉 시니피에이다. 가치는 상호 연관되어 있는 기호들 사이에서 비롯되는 역할에서 오는 특성이다.

불어의 mouton은 양, 양고기 모두를 의미한다.

영어의 sheep은 양, mutton은 양고기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mouton과 sheep은 의미는 같으나 가치는 같지 않다.

가치가 같지 않은 것은 sheep 이라는 용어가 mutton이라는 용어와 공존하기 때문이다.

동일 언어 내부에서 유사한 개념을 표현해 주는 모든 낱말은 서로를 한정하고 있다. 어떠한 사항의 가치도 그를 둘러싼 주의에 의해 결정된다.



3절 물질적 면으로 본 언어 가치

낱말에서 중요한 것은 소리 그 자체가 아니라, 이 낱말을 그 외의 모든 낱말과 구별시켜 주는 음적 차이이다. 왜냐하면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로 이 차이이기 때문이다.

소리들이 서로 구별되는 한, 언어 행위 주체가 어느 정도 발음을 마음대로 한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언어는 단지 차이를 필요로 할 뿐이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소리가 불변의 특질을 지닐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영어로 pine과 fine은 서로 다르다. 한국말로 babo와 vabo는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한국에는 v, f라는 음소가 없기 때문에 b나 p 대신 v,f 를 써도 구별하는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구별하고 있다.


4절 전체적으로 본 기호

결국 언어에는 차이만이 존재한다. 언어가 내포하는 것은 언어 체계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개념이나 소리가 아니라, 단지 언어 체계에서 나온 개념적 차이와 음적 차이일 뿐이다. 하나의 기호가 갖는 개념이나 음적 재료보다는 그 기호의 주위에 있는 것, 즉 다른 기호들 속에 있는 개념이나 음적 재료가 더 중요하다. 그 증거로, 한 사항의 의미와 소리를 손대지 않았는데도, 단지 인접한 다른 사항이 변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가치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언어체계는 일련의 소리차이와 일련의 개념 차이가 결합된 것이다.


기호들끼리 비교하면 차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 각기 하나의 기의와 하나의 기표를 지닌 두 기호는 상이한 것이 아니고 단지 구별되는 것이다. 이들 사이에는 대립만이 있을 뿐이다. 나중에 문제될 언어 활동 메커니즘 전체는, 이런 종류의 대립과 이들이 내포하는 음적 차이와 개념적 차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언어는 상호 규정되는 사항들의 복합적인 균형이다. 달리 말하면 언어는 형태이지 실체가 아니다. 이 사실은 아무리 명심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쓰는 학술 용어의 모든 오류와 언어현살을 지칭할 때 우리가 보이는 모든 그릇된 방식은 언어 현상 속에 어떤 실체가 잇으리라는 무의식적 가정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5장 연사 관계와 연합관계


1절 정의

언어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관계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연사관계와 연합관계


2절 연사관계

낱말들은 연쇄에 의해 서로 관계를 맺는데, 이 관계는 언어의 선적 특성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언어의 선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동시에 두개의 요소를 발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들 요소는 화언 연쇄상에서 하나씩 차례로 배열된다. 이러한 결합이 어느 정도의 공간적 길이를 그 바탕으로 할 때, 이를 연사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연사체는 둘 또는 그 이상의 연속 단위로 구성된다. 연사 관게는 현존하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사항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들 사항은 실제로 구성되어 있는 계열 속에 모두 나타난다.


3절 연합관계

담화 밖에서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 낱말들이 기억 속에서 연합하여 매우 다양한 관계들이 지배하는 그룹들이 형성된다. 가령 가르침이라는 낱말은 무의식적으로 정신 속에 많은 다른 낱말을 떠오르게 할 것이다. 가르치다, 가르치니, 가르쳐서, 때림, 배움, 달림, 교육, 훈육등...이들 모두가 어떤 면으로든 공통점을 서로 지니고 있다. 이 배열은 공간적 길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두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각 개인의 언어를 구성하는 내적 보고의 일부이다.


연합은 단지 기의의 유추에 바탕르 두거나, 반대로 청각 영상의 단순한 공통성에 바탕을 둘 수도 있다. 때로는 형태와 의미의 이중 공통성이 있고, 때로는 형태만의 공통성이나 의미만의 공통성이 있는 것이다.


6장 언어의 메커니즘

1절 연사적 연대

desireux는 두개의 하위 단위로 구분된다. desir-eux

이것은 독립된 두 부분이 서로 붙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연대적인 두 요소가 만든 산물, 즉 결합으로 이 두요소는 상위 단위 속에서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만 그 가치가 있다. 접미사란 혼자 떼오놓고 보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접미사가 언어 속에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chaleur-eux, chanc-eux 와 같은 관용적 사항의 계열 때문이다. 어간은 어간대로 자율적이 아니다. 접미사와의 결합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roul-is에서 roul-요소는 접미사가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전체는 부분 때문에 그 가치가 있고, 부분 역시 전체 속에서의 그 위치 때문에 가치가 잇다. 그렇기 때문에 부분과 전체 사이의 연사 관계는 각 부분 사이의 관계와 똑 같이 중요하다.


2절 두 가지 형태의 구룹에 있어서의 동시 기능

공간 안에서의 등위 배열은 연합적 등위 배열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이 연합적 등위 배열이 이번에는 연사체의 각 부분을 분석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 된다.


3절 절대적 자의성과 상대적 자의성

각 언어에서 근본적으로 자의적인 것 즉 무연적인 것과 상대적으로만 자의적인 것이 구별된다. 기호들 중 일부만 절대적으로 자의적이다. 기타의 기호들은 하나의 현상이 개입하는데, 이 현상에 근거하여 자의성을 완전히 부인하지 않고 자의성의 정도를 인정할 수 있다. 즉 기호는 상대적으로 유연적일 수 있다.

'십'은 무연적이지만, '십오'는 동일한 정도로 무연적이 아니다. 십오는 십육, 십구, 백오, 천오등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유연적 인 기호의 구성 요소는 그 자체가 자의적일 뿐 아니라 사앟 전체의 가치는 결코 부분들 가치의 합계와 같지 않다.

유연성의 개념은 1) 주어진 사항의 분석 즉 연사관계 2)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다른 사항에 대한 상기, 즉 연합관계.

여태까지 단위는 가치로서, 즉 체계의 요소로서 우리에게 나타났고, 우리는 그것을 특히 대립이라는 면에서 고찰했다. 이제 우리는 이들을 연결하는 연대성을 인식하고 있다. 이 연대성은 연합적이며 연사적인데, 그것이 바로 자의성을 제한해 주고 있는 것이다.

무연성이 극도에 이르는 언어는 더 어휘적이고, 최소한으로 떨어지는 언어는 더 문법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3부 통시언어학

유추, 교착


4부 지리언어학

언어의 다양성



5부 회고언어학의 문제

통시언어학의 두 관점

시간의 흐름에 따르는 전망적 관점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회고적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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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집 <꽃이 되어 새가 되어> / 문학사상사 

 

시집을 통독한다. 한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시는 한 편, 한 편을 음미해 가며 읽어야 하는 것이거늘,

시집의 첫 시부터 마지막 시까지 줄줄 읽어간다는 것은 시를 모르는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주옥같은 시라도 단 한 편으로는 전하지 못하는, 아니 전할 수 없는 것을

시집에 실려 있는 여러 수의 시들이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집에 실려 있는 시들이 하나 하나 모여서 모자이크로 된 그림을 그려낸다는 것을 알겠다. 

시인의 삶과 생각의 풍경 말이다. 

그것은 한 편의 시를 통해서는 감지할 수 없는 것이다. 

 

예전에 꼭 한 번 시집을 통독한 적이 있었다. 고은 시인의 시집이었다.

고은 시인의 투쟁하는 삶이 고스란히 느껴지면서,

고은 시인이 사용한 시어들이

그가 살아온 삶을 관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아마도 고은 시인은 일생의 목표를 향해 올라가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고초도 마다하지 않으며 앞뒤 좌우를 살필 겨를도 없이 오직 위만 바라보고 걸었을 것이다.

길가에 난 작은 꽃을 볼 만한 여유가 어디 있었을까?

하지만 나이가 들어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그 때에야 시인의 눈에는 길가에 핀 꽃을 보였다. 

아니 시인이 그 꽃을 보았다.

 

올라가는 삶에만 의미가 있을까? 

내려가는 삶에도 의미가 있다. 올라가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의미가.

세월의 무게를 진 나이듦의 통찰이 빚어낸 울림이, 나이듦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얼마만한 울림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나태주의 시집 <꽃이 되어 새가 되어>

 

여동생부부가 놀러왔었다. 막 이 시집을 읽고 느낌이 있은지라 한 번 읽어 보라고 건네주었다.

몇 편의 시를 읽은 동생이 하는 말, "시가 이렇다면, 나도 시를 쓰겠네."

하하하...대단한 자신감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다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렇게 진솔하게 마음을 토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잔잔하게 압도해 들어오는 묵직한 울림.

 

 

 

이 시집 속에는 시인의 삶과 감정이 진솔하게 드러나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시인은 - 다행이 시인은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 지나간 날들을 회고하며 추억을 더듬는다.  

과하지는 않게, 다만 희미한 바람에 들꽃이 부끄럽게 흔들리듯, 그러한 잔잔함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운 나라

누구나 한 번쯤은 살았던 그 나라

우리는 추억이라 부르네

사랑이라고 부른다네."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운 나라> 일부

 

 

<눈 오는 옛날>

 

이른 아침부터 오던 눈 점심때가 되어도 그치지 않고

저녁때가 되어도 그치지 않는다

새하얀 눈의 절벽에 갇힌 날 전화 한 통화 오는 일 없고

갈곳도 없고 할 일 또한 마땅찮다

어제저녁 잠까지 늘어지게 잤으니 낮잠 잘 일 또한 없다

 

옛날 같았으면 이런 날 고구마를 쪄먹었을 것이고

그것도 아니면 무밥을 해먹었을 것이고

배추진잎밥도 해먹을 것이다

아이들은 배추꼬랑이를 깍아먹었을 것이고

일 없는 어른들은 눈 덮인 산에서 생솔가지 척척 쪄다가

사랑채 부엌 쇠죽 끓이는 솥에 매운 연기 모락모락 나게

군불을 지펴 물을 데워 식구들 밀린 목욕물도 푼더분하게 마련했을 것이다

 

한쪽에는 어이 뜨거 어이 뜨거 물을 끼얹으며

호들갑스럽게 목욕을 했을 것이고

또 한 쪽에서는 배불리 밥을 먹고 목욕도 하고 방바닥까지 뜨시겠다

사랑방 바닥에 등을 지지며 낮잠을 자기도 했을 것이다

 

더러는 마실 와서 하루 종일 자기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눌러 지내는 이웃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눈치를 보이거나 가라는 말은 더군다나 하지 않았다

끼니때가 되면 한 상에 끼어 밥을 나누어 먹었고

밥이 모자라면 남은 밥 솥에 물을 붓고 흥덩흥덩 다시 삶아서

한 대접씩 퍼서 후루룩후루룩 소리를 내면서 먹기도 했었다

 

그러다 보면 그칠 것 같지 않던 눈발도 멈추고 밤도 돌아오고 불도 켜지고

이웃은 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한마디 인사말도 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도 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시인은 어린 시절만이 아니라 젊은 시절 독불 장군 같았던 시절을 돌이켜 본다.

자기 혼자만을 위해 살았던 삶. 그 때문에 고통받았을 가족.

나이가 들면 눈은 침침해지고 인쇄된 글자도 아른아른하고 투명하게 맑은 대기속에 비친 산의 풍경도 흐릿하건만

 나이가 들면 보이는 것이 있는가 보다.나이가 들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관객을 위하여>

 

나는 늘 주인공이었다

아니, 주인공이고 싶었다

주인공이 아닐 때도 구경꾼이기를 거부하고

주인공이려고 노력했다

관객은 언제나 넘쳐났다

결혼을 한 뒤에는 우선 아내가 관객이었고

아이들이 관객이었다

한 번도 주인공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관객의 외로움이나 고달픔 같은 건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건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 아이들 자라고 결혼도 하고

43년이나 타고 온 기나긴 교직열차에서도 하차하려고 하니

네기 결코 끝까지 주인공일 수는 없는 일이구나

그 동안 나 하나만의 일인극을 줄기차게 바라보아준 사람들

그 누구보다도 아내의 외로움이

얼마나 컸을까, 짐작된다

관객의 외로움, 그것이 이제는 내 몫으로 떨어지다니....

어 염치없음이여! 어이없음이여!

두려움이여!

 

 

 

시인은 가족에 대한 애정을 담담히 풀어낸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말을 시인은 이렇게 하나 보다.

 

 <잡은 손>

 

손을 잡는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의 손을 잡는다

 

나이 들어 쭈글쭈글해진 손

핏기 없는 손

 

그동안 애 많이 쓰시었소

조금만 더 우리 손을 놓지 맙시다

 

유리창 밖 산들도 눈을 맞고 있다

나무들도 옷을 벗은 지 오래다.

 

 

아들에 대한 무심한 애정이 돋보이는 시도 있다.

 

 

사귀던 여자아이와 헤어지고 난 아들아이가

처음으로 집에 돌아온 날 밤에 많은 눈이 내렸다

...

밤사이 내린 눈도 많은데 눈은 계속해서 내린다

아들아이와 이마를 맞대고 아무 말 없이 아침밥을 먹을 때에도

아들아이 등 뒤로 눈은 내리고 또 내리고

...

나도 저 아이만 한 때 서울 여자한테 버림받고 돌아와 운 일이 있는데

나 그만 나이 든 사람이 되어 저 아이  마음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

 

<눈은 또 내린다> 중에서

 

 

그리고 미안함과 고마움, 부끄러움

 

<카네이션>

 

나 같은 것도 어버이라고

꽃을 받는다

병원 침대에 누워

어질어질한 정신으로

어버이날 꽃을 받는다

하얀 꽃 카네이션이 아니라

붉은 꽃 카네이션

고맙고 눈물 겹지만

실은 많이 부끄럽다

 

딸을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 

파리 에펠탑 앞에서 찍은 자신의 사진을 보며 문득 자신이 닮은 키가 작은 아버지가 생각난다.

오래전에 가 버린 아버지가.

아! 어머니...

 

 

<꽃이 되어 새가 되어>

 

지고 가기 힘겨운 슬픔 있거든

꽃들에게 맡기고

 

부리기도 버거운 아픔 있거든

새들에게 맡긴다

 

날마다 하루해는 사람들을 비껴서

강물 되어 저만큼 멀어지지만

 

들판 가득 꽃들은 피어서 붉고

하늘가로 스치는 새들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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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장편소설/ 새움출판사

 

김진명은 이 소설 <글자전쟁>을 통해 역사학계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던진다. 한자는 어느 민족이 만들었는가? 당연히 중국의 한족이 한자를 만들었다고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당연히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실을 부정한다면 이는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인가? <글자전쟁>은 한자가 한족이 동이족이라고 부르는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면 이런 엄청난 주장을 하려면 그에 걸맞는 근거가 있어야 할 것인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 <글자전쟁>은 직격탄을 날린다.  

 

중국의 고대 역사는 삼황오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이 중 은나라의 유적인 은허는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갑골문자가 발견된 것으로 유명한다. 한자의 기원이 된 갑골문자는 은나라에서 시작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은나라는 중국의 한족이 세운 나라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동이족이 세운 나라이다. 은허에서 발굴된 여러 유골과 유물들은 그 나라를 세운 사람들이 동이족임을 보여준다. 한자의 기원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점을 근거로 하여 한자가 동이족이 만든 문자라고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한자의 주인이 중국의 한족인 것으로 왜곡이 되었을까? 여기에는 공자의 역사왜곡이 관련되어 있다. 공자와 역사왜곡이라? 믿어지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김진명씨가 다음의 스토리펀딩에 올린 '대한민국의 7대불가사의 5화'를 참조해 보라.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음을 느끼게 된다.

☞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3475 

 

<글자전쟁>은 한자의 주인이라는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 즉 중국의 한족과 동이족과의 싸움, 아니 싸움이라기 보다는 일방적인 한족의 한자 찬탈 행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고구려 영토내에 한 마을이 풍지박산이 난다. 모든 마을 주민이 처참하게 살해당한 것이다.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된 행정관은 이 문제가 동이족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사건은 '글자전쟁'의 일환이었음을 밝히게 된다. 한족이 만든 자만을 남겨두고, 동이족이 사용하던 弔자를 없애버리고 치졸한 한족의 의도였음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전쟁이었다. 글자를 둘러싼 전쟁!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을 조사해 보면 이미 은나라시대에 5000여자의 한자가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한자를 받아들인 한족이 그 이후 수많은 한자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모든 한자가 한족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이다. 실제 논답畓, 집가家와 같은 글자는 한족은 모르는 글자이다. 한족이 만든 글자가 아닌 것이다. 한족은 한자의 주인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전쟁을 치루어 왔을 것인지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한자의 주인이 한족이 아닌 한민족이라는 김진명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도대체 한국의 역사학계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역사학자들은 받아쓰기만 한 것이었던가? 만일 그런 부끄러움이 있다면, 이제는 그러한 관행을 중지하고 새로운 숙제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김진명씨는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 심각한 숙제를 던져 준 셈이다. 비전문가의 주장이라고 일축하기 전에 깊이 연구하여 진상을 밝힐 무거운 책임이 역사학계에 주어진 것이다. 회피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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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문화마을.

느지막히 나선 걸음이라 감천마을에 도착해서도 제대로 마을을 구경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그런데 이게 웬 걸, 감천마을 올라가는 까치고개에 차들이 밀린다.

감천 마을 찾아가는 차량들...

이렇게 밀려서야, 오늘 구경은 다 물 건너 갔다.

 

고개에 들어 설 때, 차창밖으로 까치 고개를 걸어서 올라가는 관광객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올라 가는데, 결국은 걷는 사람이 먼저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가지 각색의 목어들이 모여 커다란 물고기 모양을 하고 있다.

이 목어들이 마을 곳곳으로 헤엄쳐 돌아 다니나 보다.

마을 군데 군데 목어들이 벽에 붙어 있다.

 

 

 

마을에 도착헤서 주차하느라 시간을 보내고,

어영부영, 길을 찾느라 오락가락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다.

애초에 마을 입구에서 마을 지도를 보며 움직였어야 하는데,

마냥 움직이다 보니 어디가 어딘지...

 

해가 떨어지면서 마을의 골목길을 밝히는 조명등이 하나 둘 켜진다.

 

 

 

감천항을 내려다 보는 감천마을

해가 저물면서 저녁놀이 서쪽에 머문다.

 

 

 

마을 곳곳에는 포토존이 잘 만들어져 있다.

예쁜 그림도 있고,

이처럼 마을 전경을 보면서 앉아 있는 어린 왕자도 있다.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줄이 길다.

어린 왕자는 장미꽃을 키우는 자기의 소행성에서

먼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있을게고,

그 옆에 앉은 관광객은 마을을 밝히는 조명별을 쳐다 보겠지.

밤이 깊어 맑은 밤하늘에는 초롱초롱한 별들이

땅에서는 마을을 밝히는 별들이 어울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려나?

 

 

 

감천마을은 나이 든 세대에게는 새로울 것이 하나 없는 그런 마을이다.

가난했던 옛 시절, 어렵게 살았던 그 시절의 모습이 남아 있는 달동네, 산동네...

가파른 경사에 좁고 골목길, 미로처럼 이리 저리 얽혀 있는 비탈길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

이런 집들이 모여 마을이 되었다. 

 

감천마을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이든 사람들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마을, 그 추억이 떠오를테지.

하지만 아파트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에게는, 이런 세상도 있었나 하는 느낌을 줄 것임에 틀림없다.

 

아파트 계단과 달동네의 골목길은 아래위로 통해 있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지마는

그 성격이 아주 다르다.

아파트의 계단은 비상통로의 개념이라면,

달동네의 좁은 미로처럼 얽힌 가파른 골목길은

통행길이다.

아이들의 놀이 공간이다.

소통의 공간이다.

이웃 사촌끼리 오고 가는 정이 이 골목길을 따라 흘렀던 화합의 장이었다.

이웃간의 정이 사라진 지금

감천마을의 골목길은 아이들에게 옛 것의 가치를 전해 줄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으리라.

아이와 함께 이 마을을 방문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가치를 이야기해 줄 수 있으리라.

 

 

 

 

밤이 깊어가면서 초롱초롱 별이라도 보이면 좋으련만...

부산에서 그런 별을 보기란 힘든 일이다.

산기슭에 빛나는 조명으로 만족할 일이다.

 

낮에 본 감천마을과

밤에 볼 수 있는 감천마을은 사뭇 다르다.

내게는 낮보다는 밤이 더 낫다.

 

감천마을을 구경하려거든

오후 3~4시에 들러서, 낮시간에 문을 여는 전시실이나 기타 볼거리를 보며

골목길을 쏘다니며 밤을 기다렸다가

감천마을의 밤 모습을 보고 가기를...

 

 

 

감천마을을 감싸고 있는 큰 도로가에는 불을 밝힌 예쁜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맛난 것도 먹고, 불빛 아래 사진도 찍고, 하늘에 떠 있는 별은 아니지만,

깜깜한 밤을 밝히며 빛나는 조명도 보고...

 

 

 

감천은 낮보다는 밤이다.

그냥 내 생각.

수영구도서관 > 금련산 청소년수련원 > 황탑 > 편백나무숲 > 바람고개 > 남구도서관

 

장산이 해운대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다면, 황령산은 광안리 바다를 마주하고 있다. 황령산 동쪽에는 광안 대교가 가로지르는 광안 바다, 북쪽으로는 망미동과 연산동, 서쪽으로는 서면과 문현동, 남쪽으로는 대연동. 이렇게 사방으로 시내로 둘러싸인 황령산과 금련산은 도심의 바다에 떠 있는 섬이다.

 

남천동 신협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나서, 이른바 인문학 거리의 입구로 이어지는 KBS홀 울타리를 따라 올라 간다. 예전에는 대통령별장이었던 부산시관사의 담장을 따라 올라가 산길로 접어든다. 구불 구불한 2차선 도로를 따라 차를 타고 황령산 정상인 봉수대 바로 아래까지 올라갈 수 있다. 이 도로 오른쪽으로는 금련산이요, 왼쪽으로는 황령산이다. 매번 차를 타고 왔던 이 길을 오늘은 걸어서 올라간다. 흙길은 도로와 만났다 헤어졌다 하며 위로 위로 향한다.

 

뒤 돌아 보니 저기 멀리 두개의 나지막한 산봉우리. 이기대 백련사가 자리잡은 동산이다. 작은 산봉우리 아래쪽이 이기대 입구인 동산말, 또는 동생말이라 불리는 곳이다. 두개의 봉우리 오른쪽에는 이기대의 장자산. 그리고 그 너머에는 부산의 상징인 오륙도가 있다.

 

 

금련산 청소년수련원 앞에서 황령산쪽으로 향해 있는 작은 오솔길, 지난 여름 저물녘, 햇살이 비스듬히 파고 들던 숲, 그 숲속으로 향한 작은 길, 매혹적인 여인이 손짓하듯 유혹하던 길. 나는 그 숲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싶었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저녁 무렵의 신비함이 나를 잡아 당겼다. 그런 기억에 사로 잡혀 또 다시 나는 이 길을 향한다. 이 작은 길은 어디로 향하는 걸까?  내가 가고자하는 바람 고개까지 이어져 있는 길일까? 허...참! 허망하게도 이 길은 산림관리 차량만이 허용된 임도로 연결되어 있었고, 나는 그 길을 따라 다시 청소년 수련원 앞으로 나오고 말았다.

 

청소년 수련원 입구에서 다시 출발이다. 큰 길가로 나 있는 흙길을 밟으며 위로 올라가다 보니, 숲으로 향한 또 다른 길이 열려져 잇다. 그래 이 길이 바로 바람 고개로 향해 있는 그 길, 황령산 등산지도에서 보았던 그 길이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황령산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와 있는 골짜기를 돌아서, 이제 나는 청소년 수련원을 업고 있는 능선이 보이는 건너편에 섰다. 저쪽 산등성이에 스노우캐슬이 보이고, 그 너머로 이기대의 동생말이 보인다. 그리고 용호동의 메트로 시티 아파트도.

 

 

겨울산은 황량한 느낌이 든다. 잎을 다 떨군 휑한 가지 사이로 차가운 겨울 햇살이 거침없이 차가운 대지를 데우는 숲은 무채색 숲이다. 삭막한 숲이다. 그러나 때로는 푸른 소나무 숲도 지나치게 된다. 햇빛이 잘 드는 양지 쪽, 산등성이쪽은 낙엽수 숲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하지만 두 산등성이 사이에 끼여 골짜기처럼 급하게 내려 앉아 있는 산 비탈쪽은 소나무군락이 자리잡고 잇다. 양쪽 산 등성이에 가려져 빛을 많이 받지 못하는 숲에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허술한 가지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는 숲은 밝지만 삭막하고, 햇살이 파고들 틈이 없는 소나무 숲은 어두워 보이지만 상쾌한 풍성함이 있다.   

 

 

 

저기 위 능선에 안테나 탑이 있는 곳이 황령산 정상이다. 황령산 정상에서 보면 부산항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어라...이건 또 뭘까? 마치 석기시대의 흔적처럼 보이는 이 곳의 정체는 무엇일까? 가운데 평편한 큰 바위, 그 둘레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작은 바위들. 마치 식탁처럼 놓여져 있는 돌들, 이런 모양이 한 두개가 아니다. 열 개는 넘을 듯한데... 한 쪽에 보니 황령쉼터라고 쓰여져 있다. 이 쉼터 옆에는 또한 돌을 쌓아 만든 높이 6미터 이상되는 돌탑이 있는데...

 

 

 

 

태양을 등지고 선 돌 탑,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무슨 종교 기념탑인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주위에는 아무런 정보가 없다. 알고보니 이 탑의 이름은 황탑이라고 한다. 이 곳은 황령산의 봉수대 아래에 있는 암석지역인데, 무속인들에 의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황탑산우회의 초대회장 김광세님이 직접 주변을 정리하고 돌탑을 조성하고 등산객을 위한 쉼터를 만들었다고 한다. 근 일년 가까이, 아니 일년이 넘게 걸렸는지도 모른다. 혼자 힘으로 이런 곳을 조성했다니 대단한 정성이다.

 

 

 

 

저기 사자바위.

 

 

 

바람고개 다가가면서 아주 인상적인 숲을 지난다. 인공조림된 편백나무 숲. 멀리서 보니 편백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시원하게 쭉쭉 뻗어 있다. 어두컴컴한 숲 속. 울창한 숲속에 햇빛이 비쳐들 틈이 없다.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음기가 가득한 숲처럼 느껴진다. 차가운 겨울에 햇빛도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숲. 몸이 으슬 으슬 떨린다. 여름이면 정말 시원한 숲일텐데...

 

 

 

편백나무 숲을 지나자 곧 바람고개이다. 바람고개 등산 안내 지도 앞에 한참동안 서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어떤 길이며, 황령산에는 어떻게 길이 나 있는지 살펴본다.

금련산 청소년수련원 옆을 지나가는 초록색길이 정상으로 나 있는 도로이고, 노란색 길이 차량통행이 제한된 임도인 듯하다. 내가 걸은 숲 길은 이 두 길 사이에 있는 분홍색 길이다. 

 

길과 방향을 파악한 후 갈미산 쪽으로 하여 남구 도서관쪽으로 내려온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랴? 도서관에 들린다. 신협도서관에 책을 반납한 후 산행, 그리고 산을 내려 와서 다시 도서관에서 책을 빌린다. 아주 보람있는 산행이다.

 

 

A. J.  크로닌 지음

 

오래 전이었다. 아마도 내가 십대였을 때,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를 읽었다. 그 책은 나의 마음에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내가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성채>를 뽑아 든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크로닌은 의사출신의 소설가이다. <성채>의 주인공 앤드루 맨슨은 의과대학을 막 졸업하고 대진의사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오지 탄광촌에서. 정의감과 열의에 넘치는 신출내기 의사로 패기롭게 일을 시작하지만 이내 벽에 부딪힌다. 대학교에서 배웠던 수많은 의학 지식은 그 효과 여부가 검증되지도 않은 채 전수되었을 뿐임을 알게된다. 많은 의사들은 새롭게 발전하고 있는 의학 지식에 무지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의료 행위는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돈을 버는 수단으로 전락해 있다는 것도 알게된다.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의료계 및 의학 산업들. 의료제도 또한 제대로 된 진료를 가로 막고 있다. 진정한 의사의 길을 가려는 맨슨의 앞길에 놓여있는 난관들은 요지부동, 난공불락의 성채처럼 떡하니 서있다. 앤드루 맨슨은 이 난관들을 하나 하나 깨 가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런던에서 개업의로 성공을 추구하게 되면서 그도 타락의 길을 걷게된다. 맨슨도 결국 그렇게 되고 말 것인가? 

 

<성채>, 술술 잘 읽힌다. 맨슨이 일구어내는 성공 스토리는 독자의 마음을 뛰게 만든다. 맨슨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는 심장이 두근 두근해지고, 손에 땀을 쥐게 된다. 맨슨의 승리에는 커다란 환호성을 지른다. 사람의 마음을 쥐었다 폈다 하는 크로닌의 박진감있는 스토리 전개는 독자의 마음을 꽉 붙잡는다. 크로닌은 이러한 흥미진진한 스토리 속에 당시 영국의 의료계 및 의료제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리고 과학적인 방법론에 기초한 의학의 발전에 대한 신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은 미래를 꿈꾸는 청춘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지, 올바른 의사의 길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청춘에게, 특히 의학도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다.

 

 

   

 

 

2015. 12. 25

순천만자연생태공원

 

부산에서 3시간이나 걸렸나? 순천만에 도착하니 거의 정오가 다 되어 간다.

생태체험선을 타고 순천만으로 흘러드는 S자 곡선을 따라 항해한다.  

겨울 바닷 바람이 차갑다. 달리는 배 위에서 맞는 바람이란 여간 차가운 게 아니다.

 

썰물 때라 갯벌이 많이 드러나 보인다.

막 드러난 갯벌에는 이른 오후의 겨울 햇살이 비스듬히 비쳐들고, 반사된 햇빛이 차가운 바람만큼이나 푸르게 눈동자를 찔러대는 통에 

저 멀리 보이는 푸른 곳이 갯벌인지 깊은 물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만큼 깊은 푸른 빛이 강렬하다.

 

드러난 갯벌에는 철새들이 먹이를 찾고 있다.

청둥오리, 저어새, 왜가리, 흰뺨검정오리.

저어새는 뭉퉁한 부리를 좌우로 저어 물을 헤치며 먹이 사냥을 하고 있다. 부리를 좌우로 젖는다고 저어새라고 한다나...

긴 목을 가진 왜가리는 꼼짝도 않고 가만히 서서 먹이가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정말 꿈쩍하지도 않는다. "먹이야! 네가 이리로 와야지, 내가 너에게로 왜 가리" 하면서 먹이를 기다린다고 해서 이름이 왜가리란다.

 

 

 

 

만조가 되면 물 가까이 자라는 갈대의 무릎께까지 물이 찬다.

갈대는 육지에서 묻어온 오염물질을 제거하여 물을 깨끗이 정화한다. 갈대는 바다의 최전선에서 바다를 지키는 지킴이인 셈인가?

 

 

 

가을지나 겨울의 찬 바람에도 갈대는 바짝 마른 줄기를 굽히지 않고 꿋꿋히 서 있다.

찬 바람에 갈대는 웅웅거리며 울음을 운다.

흡사 대밭의 바람소리와 같은 소리로.

 

 

 

 

함께 간 여동생이 묻는다. "오빠! 갈대밭에 대한 인문학적 감상이 뭐야?"

대답이 궁하다. 그래도 한 마디는 해야지. "이런 갈대 밭을 보고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니? 입 다물고 조용히 할 밖에."

 

 

 

갈대밭을 가로 질러 순천만전경을 볼 수 있는 용산 전망대로 향한다.

높이는 100여미터. 승천하려 준비하던 용이 아름다운 순천만을 보고서는 승천을 포기하고 자리를 잡았다는 용산.

순천만 지킴이를 자처하고 수호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고.

 

보다시피 물인지 뻘인지 구별이 쉽지 않다.

 

 

 

갈대 하나가 습지에 뿌리를 내리게 되면

점점 번식하여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데, 그 확장해 가는 영역은 수학적으로 동심원을 형성한다.

두개의 영역이 접하게 되면 하나의 큰 영역이 형성된다.

 

 

 

때를 잘 맞추어 오게 되면

왼쪽 바다와 접해 있는 부분에는 칠면초 군락이 온통 분홍색으로 물들고

갈대숲과 검은 갯벌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색의 향연을 이룬다고 한다.

칠면초는 1년에 일곱번이나 색을 바꾼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란다.

 

 

 

용산 전망대에 갔다 온 후 가까운 식당에서 짱뚱어탕을 먹는다.

점심도 아니고 저녁도 아닌 어중간한 짱뚱어탕이 고소하다.  

짱뚱어는 남해안에 있는 푹푹 빠지는 갯벌에 서식하는 어종이다.

서해안의 갯벌과 남해안의 갯벌은 성격이 상당히 다르다고, 그래서 남해안 갯벌에서만 짱뚱어가 잡힌다.

 

식사후 일몰을 보러 와온 해변으로 향한다.

순천만 일몰의 명소는 용산 전망대와 와온해변이다.

해는 기울어 떨어지는데, 행여나 일몰을 보지 못할까 싶어 날세게 차를 달려 와온해변으로...

간신히 해가 넘어가지 전에 도착한다.

아...순천만 너머로 지는 태양, 그리고 노을.

 

 

 

어부가 갯벌에 내어놓은 좁은 물길이 저녁 노을의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주황 노을이 물로 흘러간다.

 

 

 

 

해는 완전히 넘어갔지만

노을빛은 여전히 남아 점점 그 기세를 떨쳐간다.

주황 노을은 점점 짙어간다.

서쪽 하늘은 해가 떨어진 뒤 10여분을 이렇게 불타오른다.  

 

 

 

 

순천에는 볼 거리가 많다.

순천국가정원에서 찍은 사진은 정말 그림같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순천 낙안성읍은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는데,

늦 봄 송광사 마루에 누워 잠깐 붙였던 꿀잠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매제의 이야기도 귀전에 쟁쟁거리고,

송광사와 선암사를 잇는 흙길은 참 아름다운 길이라고 하더라.

 

가까운 곳에 있는 여수는 또 어떠하고.

봄이 오는 돌산도의 해변 동백꽃길을 자전거로 달렸다는 김훈님의 이야기.

돌산도 끝에 있다는 수직적 고양감과 수평적 무한감이 교차하는 향일암도 있고...

여수 밤바다는 어떠한지 궁금하기도 하고...

 

순천에 또 와야할 이유가 참 많다.

줄리언 반즈 지음/ 최세희 옮김 /다산 책방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우문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우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깊은 사유로 이어지는 질문이었다. 그 사유는 역사를 보는 눈을 단번에 바꾸어 버렸다. E.H. 카아는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희했지만, 여전히 역사를 둘러싼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과거를 완전히 재구성할 수 있는 역사는 없다는 것이다. 줄리언 반즈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통해 역사의 한계를 통렬히 지적하고 있다.

 

고등학교 역사시간, 역사교사 조헌트 영감은 질문한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 토니가 대답했다. 

조 헌트 영감은 이렇게 반문한다. 역사는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 기만이기도 하다는 것 기억하고 있나?"

"역사는 생 양파 샌드위치입니다. 죽자고 반복하니까." 또 다른 학생이 대답한다

에이드리언은 라그랑주의 말을 인용하여 말한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줄리언 반즈는 이렇게 역사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그의 소설은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인 셈이다.  

 

토니는 대학에 진학하여 베로니카라는 여학생을 사귄다. 하지만 그 둘은 헤어지게 되고. 베로니카는 토니의 절친인 에이드리언과 사귀게 된다. 에이드리언은 토니에게 편지를 보내 묻는다. 베로니카와 사귀어도 되냐고. 토니는 이에 대한 그 둘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회신을 보낸다. 그러나 얼마 후 토니는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에이드리언이 자살한 사건을 토니의 인생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으로 생각해 본다면, 이 역사적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그는 왜 자살을 했을까? 그는 이런 유서를 남긴다. "삶은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가 있다. 만일 내가 바란적이 없는 그 선물을 포기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결정대로 행동을 취할 윤리적, 인간적 의무가 있다."  에이드리언은 왜 삶이라는 선물을 포기하기로 결정했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그들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의 한계로 인해 그의 자살의 이유는 미궁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뭔가 드러나지 않는 진실이 있을텐데. "그 자실이란게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나 혹은 우리에 대한 함축적 비판이 담긴 건지 모르겠다는 거야."라는 말에서 풍기는 미묘한 뉘앙스는 분명히 뭔가가 있다는 예감이 들게 한다. 그게 무엇일까?

에이드리언이 역사시간에 했던 말이 생각난다. "하나의 사유 방식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모든 역사적 사건 - 예를 들어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까지도 - 에 대해 우리가 진실하게 할 수 있는 말은 '뭔가 일어났다'는 것 뿐입니다." 그렇다. 진실하게 할 수 있는 말은 에이드리언이 자살을 했다는 것 뿐이다. 그 자살의 진실은 어둠에 파묻혀 있다. 그이 자살은 "바로 우리 코 앞에 벌어지고 있는 역사, 가장 분명해야 함에도 그와 동시에 가장 가변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토니는 인생의 말년에 뜻하지 않게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 보게 되면서 그의 젊은 날의 역사를 재구성하게 된다. 베로니카의 엄마가 사망하면서 토니 앞으로 유산을 남긴 것이다. 그 유산 목록에는 놀랍게도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동안 미스테리로 남아있던 에이드리언의 죽음의 비밀이 밝혀질 것인가? 역사의 진실이 수면에 떠 오를 것이란 기대는 토니만의 기대가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베로니카는 한사코 그 일기장을 내어주지 않으려한다. 베로니카는 단지 그 때 토니가 에이드리언에게 보냈던 편지의 사본과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의 한 페이지를 복사한 사본을 보내온다. 그리고 토니는 실제 일어난 일과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일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 같지는 않은 법이다,"

 

소설의 결말은 충격적이다. 나는 이것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어리둥절해 하며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 번, 세 번을 읽고 나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한 동안 정신이 얼떨떨해졌다. 그리고 일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다시 첫 페이지부터 정신없이 읽기 시작했다. 토니의 충격은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토니는 중얼거린다.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 좋게 단언한 것과는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 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아니고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가깝다는 것을." 그러난 줄리언 반즈가 역사에 대해 정작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학창시절 역사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조 허트 영감은 학생들에게 1차세계대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아나키즘적인 몇몇은 '모든게 우연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 세계는 끊임없는 카오스 상태로 존재하며 오로지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모종의 원초적 본능 즉 의심의 여지없이 종교로 부터 기인한 숙취에 다름 없는 그것이, 일어날 법 했거나 그러히 않은 사건에 의미를 부여한 데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한 대수롭지 않는 덜 떨어진 한 동급생은 "혼란이 있습니다. 거대한 혼란이 있습니다."라고 중얼거린다. 에이드리언은 이렇게 대답한다. "사실 책임을 전가한다는 것은 완전한 회피가 아닐까요. 우린 한 개인을 탓하고 싶어하죠. 그래야 모두가 사면을 받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개인을 사면하기 위해 역사의 전개를 탓하거나, 그도 아니면 죄다 무정부적인 카오스 상태 탓이라 해도 결과는 똑 같습니다. 제 생각엔 지금이나 그 때나 개인의 책임이라는 연쇄 사슬이 이어져 잇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책임의 고리 하나 하나는 모두 불가피한 것이었겠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모두를 비난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사슬이 긴 것은 아니죠. 하지만 책임 소재를 묻고자 하는 저의 바람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공정한 분석이라기 보다는 제 사고 방식의 반영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중점적인 문제 아닌가요. 주관적 의문 대 객관적 해석의 대치, 우리 앞에 제시된 역사의 한 단면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가가 해석한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줄리언 반즈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 모든 대답을 온통 뭉뚱거린 혼란스러운 대답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한 줄, "거기에 축척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역사는 연쇄 사슬이다. 이 연쇄 사슬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각 사람의 행동은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의 흐름 속에 축적이 되고, 연쇄 사슬로 이어진 개인들의 축적된 책임이 한계치에 도달할 때 역사적 사건은 필연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책임을 묻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 너머에 우리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혼란이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혼란이.

 

 

 

 

그 외 밑줄 그은 말------------------------------------------

 

*사건이 변모해 가면서 확신으로 굳어진 덕분에 꽤 사실에 근접했다고 할 수 있게 된 몇 몇 기억들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

* 탄생, 성교, 그리고 죽음. 이것이 엘리엇이 말한 인생의 총체이지.

* 에이드리언은 원칙이 행동을 이끌어야한다는 관념에 근거해 우리에게 사유를 인생에 적용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도록 촉구했다.

* 상상력의 첫번째 의무는 위반하는 것이다.

* 진정한 문학은 주인공의 행동과 사유를 통해 심리적이고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진실을 드러내야 했다.

* 그러나 동시에 역사가들은 사건에 대한 본인의 설명에 어느 정도 회의적으로 접근해야 해.

* 가장 멀리 내다보는 관점이 가장 의문스러워 보일 때가 종종 있지. 그리고 정신 상태가 행위로부터 추론 될 수도 있고.

* 우리는 충동적으로 결정한 다음 그 결정을 정당화할 논거의 하부 구조를 세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를 상식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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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지음

 

<소설가의 일>라는 책으로 김연수를 알게 되었다. 소설가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주저리 주저리 써 놓은 글이다. 아니 소설을 쓰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는 글인가? 아뭏든 이 책을 읽으면 누구라도 소설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소설을 쓰고 있는 순간이면 누구나 소설가가 된다. 그 소설이 출판될 지 그렇지 않을 지는 차후의 문제이고...

 

소설의 작법중 기억나는 한 가지는 '핍진성'이다.

이야기가 그럴 듯 하다는 개연성을 뛰어넘어, 그렇게 돨 수 밖에 없는 필연적 관계를 가진 이야기라야 '핍진성'이 있다고 한다.

 

또 기억나는 한 가지는

설명하려 하지 말고 보여주라

 

마지막 한 가지는

쓰고 또 쓰고, 고치고 또 고치고...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40번이상이나 읽고 고치고 또 고쳤다고.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갓난 아이를 낳은 여고생, 아이는 외국으로 입양되어 가고, 그 여고생은 바다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는다.

입양되어간 아이는 자라서 뿌리를 찾아 고국으로 돌아온다. 출생에 얽힌 비밀들이 하나 둘 밝혀지는데,... 엄마는 죽었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누구일까?

죽은 엄마는 차가운 바다속에서 딸이 돌아와서 자기를 찾아주기를 바란다. 아니 아버지일까? 딸이 찾아 오기를 기다린 사람은...

 

입양되어간 아이 카밀라. 양엄마가 죽고 난 후 다락방에서 발견한 가방, 그 속에는 어릴 때 자신이 쓰던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모두 담겨있다.

그 물건들은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카밀라는 남자 친구의 권유로 글을 쓰게 된다. 가방에서 물건을 하나씩 꺼내고는 지나간 일을 더듬어보면서 추억을 담아낸다. 그러나 담을 이야기가 없었던 사진 한 장, 동백꽃 앞에 갓난 애기를 안고 서 있는 젊은 여자. 카밀라는 이 갓난 아이가 자신이라는 것, 그 젊은 여자가 자신의 엄마라는 것을 알아챈다. 드디어 출생의 비밀을 찾으러 한국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비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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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기억이 가물가물한 오래 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당시의 마음 상태를 되살려 내는 것이 가능할까? 현재 자신의 모습조차도 진실되게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면, 지나간 일을 돌이켜보고 마음속에 일렁이던 섬세한 감정들을 되살린다는 것은 더더구나 어려운 일일것이다. 그것은 다만 현재 자신의 사유 방식에 기대어 당시의 심리 상태를 추론하는 과정이랄 수 있겠다. 그런면에서 지나간 일들에 대한 심적인 고백은 차라리 고백을 기록하는 시점에서의 마음 상태를 더 잘 보여주는 것이리라. 

 

고백록의 전반부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회심하고 개종하기까지의 이야기이다.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과 기도에도 불구하고 이교에 빠져들던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망등이 잘 드러나 있다. 고백록의 후반부는 시간에 대한 철학적 고찰과 창세기 비유적 해석이 실려있다. 러셀은 <서양철학사>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을 언급한다. 시간은 영원한 것인가? 하느님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분인가? 아니면 하느님이 시간을 존재하게 하신 분으로 시간 밖에 존재하는가? 흥미로운 시간에 관한 사색이 펼쳐진다. 현대물리학의 빅뱅이론에 의하면 빅뱅이 있기 전에는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공간과 시간은 시공간으로 하나의 실체를 이룬다. 현대물리학이 시간을 규명하기 전에 이미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존재에 대한 사유로 부터 시간의 속성을 파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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