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에 오르는 길은 수도 없이 많이 있지만, 정상으로의 최단코스는 재송동 장산 동국 아파트에서 출발하는 코스이다.  재송동이라는 마을 자체가 이미 산 중턱까지 올라 앉아있어서 정상까지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장산 동국 아파트 뒷길로 해서 정상으로 15분쯤 올라가자면 장산 너덜길과 만난다. 단숨에 정상으로 가는 길은 시간을 단축시키기는 하지만 그만큼 힘든 길이기도 하다. 

 

정상이 원래 목적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정상으로 향하는 길을 비껴서서, 장산 둘레길로 조성된 너덜길을 따라 폭포사 방향으로 향한다. 재송동에서 해운대 대천공원까지 3시간을 걷는다. 바쁠 것도 없고 서두를 없는 길, 천천히 무리하지 않고 편안하게 걷는다. 잔뜩 찌푸린 구름은 을씨년스럽고, 가랑비 마저 뿌린다. 바짝 마른 낙엽위에 바스락 거리는 소리는 가랑비 떨어지는 소리이다. 가랑비는 소리없이 너덜 바위위에 존재의 흔적을 남긴다. 계속 내릴 비일까? 오다 말 비일까? 하늘을 쳐다 본다. 비가 온다는 예보는 없었다. 큰 비만 아니라면 맞아도 괜찮다.


재송동 위 너덜길은 부산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길이다. 이 길을 걸으면 산의 풍경은 볼 품이 없고 그 보다는 탁 트인 도시의 모습이 시원스레 눈에 들어온다. 이 길을 걸으면 한 쪽에서는 웅웅거리는 도시의 낮은 소음이, 또 다른 쪽으로는 겨울 산의 적막함이 느껴진다. 마치 도시의 소음과 산의 고요한 적막함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경계선에 서 있는 듯 하다. 도시의 소리, 아마도 자동차 소리인듯한 소음은 길 따라 늘어선 건물에 이리저리 부딪히며 먼지처럼 공중으로 떠 올라 넓게 펼쳐진 공간으로 퍼져나간다. 장산의 적막한 공간으로도 어김없이 침입해 들어온다. 인류가 종말을 고하고 기계만 남은 세계를 묘사하는 '나인'이라는 애니메이션에서 보고 들었던 잔인한 기계소리. 웅웅거리는 낮은 소리에 산은 다만 삭막한 겨울의 침묵으로 답한다. 떨어진 낙엽을 적시는 가랑비 소리오 이따금 들리는 새들 소리는 적막의 소리인양 소음으로 ㄴ껴지질 않는다. 생명의 자취를 찾아 보기 힘든 겨울 산의 삭막한 정경. 이것이 장산의 모습일까?  

 

 

 광안앞바다와 광안대교 너머로 이기대도 보인다.

 


 

표지판에 성불사 위 길이라고 씌여있는 곳 약수터에서 목을 축인다. 조금만 목을 축인다. 저 쪽에 중봉 전망대가 보인다. 전망대를 지나온 산행인 한 명이 두산 위브 아파트로 내려가는 길을 묻는다. 지난 번에 가 본 길이라 자신있게 대답한다. 성불사 내려가는 길 따라 가면 그리고 갈 수 있다고. 하하하...이 산을 잘 아는 사람처럼 정확한 대답을 해 주고 나서 산사람이나 된 듯 으쓱하는 기분이 든다. 아마 이 너덜길 따라 대천공원까지 걷고 나면, 이 쪽 산 길은 어느 정도 파악이 될 것 같기도 하다.

 

중봉 전망대 올라 가는 길은 데크길로 잘 만들어져 있다. 데크길 아래에는 옛길이 허름하게 무너져 가고 있다.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은 길, 하얀 빛이 섞인 회색으로 퇴색해가는 통나무들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지가 꽤 되었음을 보여준다. 얼마나 더 지나야 완전히 그 길의 모습을 잃게 될까? 중봉 전망대를 올라가는 계단 이쪽과 저쪽의 장산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면 앙상한 가지만을 남긴 나무들로 황량해 보이는 우중충한 산은 문득 해송의 푸른 빛이 아직도 겨울을 견디고 있는 살아있는 산으로 앉아 있다. 이 쪽으로는 도시의 회색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아래로 보이는 것은 숲. 넓게 펼쳐진 숲과 능선, 조금씩 내리는 가랑비가 소나기로 내리게 되면 온 공간이 푸른 빛을 바탕으로 희뿌연 비안개로 뒤덮여 장관을 이룰 것만 같은 그런 풍경이다. 중봉 전망대에 산불감시 초소에 근무하는 분은 하루 종일 이야기할 사람도 없이 혼자서 어떻게 지낼까? 카톡카톡소리에 희색을 띠며 스마트 폰을 살펴본다. 그리고는 처음 보는 사람인 나에게 말을 건넨다. "안부쪽에서 올라왔습니까?" "아뇨, 재송동쪽으로 올라왔습니다. 이리로 계속 가면 억새밭으로 갈 수 있는가요?" "한 15분쯤 가면 억새밭이 나올 겁니다."

 

 

중봉전망대 올라가는 데크길

 

중봉전망대에서

 

 

정상의 억새밭을 향해 올라가는 길, 산불 감시원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해가 지기전에 빨리 내려가셔야 할 겁니다." 억새밭을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초행길에 날이 어두워지면 낭패인데. 그래 억새밭은 다음 기회에 미루자. 찌푸린 날씨라 더 빨리 어두워질 거야. 산속에서는 금방 해가 지고, 해가 지면 순식간에 어두워진다는 말이 문득 생각이 난다. 늦기전에 내려가자. 되돌아 가는 것이 낫겠다. 그래서 억새밭을 뒤로 하고, 다시 너덜길로 내려온다. 이제는 하산하는 길이다. 조금 내려서자니 도시의 풍경은 완전히 가려진다. 오른쪽은 윽녀봉과 안부로 이어지는 능선에 가리었고, 뒤쪽은 중봉 능선에 가려진다. 능선사이에 갇혔다. 도시의 소음은 더 이상 들리지 않고, 소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한층 도드라진 고요가 자리잡는다.  깊은 산 속이란 느낌이 와락 달려든다.

 

오락가락하는 비도 제법 내렸나 보다. 내려가는 길이 축축하다. 물기있는 길은 미끄럽다. 나무 뿌리를 밟으면 미끄러질 수 있다. 조심 조심. 10여분이 지나 넓은 체육공원에 이른다. 대천공원에 인접한 체육공원이다. 여기서부터는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잘 닦여진 넓은 길을 따라 내려간다. 길 옆 계곡에는 물 흐르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린다. 그러고 보면 장산 북면에는 이런 물많은 계곡이 없었던 듯, 그래서 더 적막 강산이었는지도. 

 

 

대천공원 양운폭포

 

 

대천천

 

폭포사의 지붕

 

 

장산 북면은 버려진 땅이라면 이 쪽은 축복받은 땅이다. 계곡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엄청나다. 이 대천천을 따라 대천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많은 시민들이 이 길로 장산의 억새밭과 정상으로 올라간다. 어린이들을 위한 생태숲도 조성되어 있어 꽃과 나무를 배울 수 있는 좋은 학습장 역할도 하는 것 같다. 

 

다음 산행이 가능하다면 그 코스는 대천공원에서 시작하여 장산마을을 지나 억새밭까지 가는 길일테다.

 

 


 

살만 루시디 장편소설/ 김진준 옮김/ 문학세계사 (뉴욕타임즈 선정 100선 ▶http://blog.daum.net/ccsj77/48)

  

 

무엇을 말해야 할 지 정리하지도 못한 채 사람들 앞에 설 때의 당혹감.

지금 그 느낌이다. 머리 속을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파편들, 사방에 아우성치는 총탄과 폭탄소리, 울부짖는 괴성, 포연속에 번득거리는 불빛. 이런 피 튀기는 전쟁에 비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느낌이 그렇지 않을까? 나의 눈은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물이 눈에 비친다. 사물의 나의 인식에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 자체로 인식되는 느낌이라니. 잠정적 몽환상태이다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는 현실과 환상이 마구 뒤섞여 혼란스럽기 그지 없다. 지브릴 파리슈타는 자신이 대천사 지브릴이라는 환상에 빠진다. 정신분열증이다. 전혀 종교적이지 않았던 파리슈타가 대천사가 되는 상황이라니. 모순. 그럴 것 같지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3만5천피트 상공에서 폭발한 비행기에서 떨어졌으나 살아남는다는 것은 현실일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소설 속에서는 현실로 나타난다. 파리슈타의 머리 뒤에 생겨난 후광도 현실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파리슈타가 대천사가 된다는 상황은 현실인가 환상인가? 이야기 속에 이것은 환상, 아니 망상임이 드러난다. 뿔 달린 악마의 모습으로 점점 변해가는 살라딘 참차의 모습은 현실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건 현실이 될 수 없는 일이다. 환상이요, 망상이다. 하지만 이야기속에는 엄연한 현실로 묘사된다. 이렇듯 현실과 환상이 뒤범벅되어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알 수가 없다. . 이 아우성속에 정작 살만 루시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내가 강렬하게 받은 인상은 무엇인가?   

 

마치 어둡고 음침한 시궁창 같다고 하면 인종차별적, 종교차별적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겠지만, 그만큼 루시디는 불편한 뭔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음침한 느낌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일까? 나는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가 얼마나 적나라한 것인지 조차 분간할 수 없다. 그것은 전혀 낯선 세계이고, 그러므로 무엇을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은 낯설수 밖에 없는 것일테니까. 설사 그 속에 우리 모두의 공통 분모인 삶, 사랑, 종교 등이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나에겐 인도란 먼 미지의 세계로 영적인 분위기가 충만한 세계라는 풍문만 접한 나에게는 공통분모보다는 낯섬에 신경이 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낯섬이나 혼란스러움이 당사자들에게는 익숙함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 또한 혼란스럽다.  

 

하나, 삶! 인도의 현실상황 - 종교갈등으로 인한 유혈충돌, 시위- 과 런던에 거주하는 인도 이민자들의 삶. 영국인으로서의 완전한 삶을 꿈꾸는 이들, 영국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끝없이 인종차별의 벽에 부딪혀 살아가는 사람들. 뿌리는 인도이지만 삶의 터전은 런던인 인도인들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뿌리채 뽑아 다른 토양에 이식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아니 적어도 바람직한 일일까? 이식된 뿌리는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을 수 있을 것인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 내는 것처럼 이민자들이 영국 사회를 바꾸는 일이 가능할까? 아니 그렇게 바꿀 힘을 소유할 수 있을까?   

 

살만 루시디는 이슬람의 신을 모욕했다는 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오랫동안 영국 정부의 보호를 받았다는데, 사실 그는 영국을 우호적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영국의 어두운 면을 까발리고 있다. 런던의 어둡고 음습한 뒤골목을 헤매고 다니는 여행자가 볼 수 있는 풍경을 보여준다. 터질듯 말듯 삐어져 나오는 인종차별의 무거운 먹구름이 그렇고, 살라드 참차를 체포해가는 런던 경찰의 괴괴한 모습도 신사의 나라라는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낯섬 그 자체이다. 우리는 너무 익숙함에 익숙해져 있어 낯섬을 공포로 인식해 버린다. 같은 문화에서도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그런 낯선 세계의 민낯을 보게될라치면 진저리를 친다. 

 

둘, 종교! 종교는 환상인가? 속임수인가? 악을 심판하는 힘인가?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하는 힘인가? <악마의 시>는 종교적 색채가 진하게 배여있다. 이슬람적 색채가 전반에 걸쳐 스며 있다. 그 색채는 다소 어두운 색채가 아닐까? 이슬람을 일으킨 마훈드의 이야기. 아마도 이슬람세계에서 지탄을 받는 이유가 이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다신교와 우상숭배에 빠진 도시에서 유일신을 주창하며 일어선 마훈드. 어려움 끝에 도시를 정복하고 자비를 베풀고 모두를 개종시키지만, 표면적인 개종이 온전한 개종이 아님은 분명하다. 위협에 의한 개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신의 사자라는 마훈드의 여색에의 탐닉- 부인이 12명이었다나. 알라신 외에 신이 없다는 말은 진실일까? 이 마훈드의 이야기 결말에는 알라가 아닌 다른 여신이 환상중에 나타난다.

 

나비떼에 둘러싸인 신비의 여인 아예사. 신의 계시를 전한다. 신이 함께 한다는 표징이 아예사를 감싸고 마을 사람들은 아예사를 따라 메카 순례여행을 떠난다. 이 비장하면서도 장엄한 순례행진을 본 일부 사람들도 자진적으로 이 행렬에 가담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믿음이 강해지면서 신의 권위로 감싸인 아예사는 점점 절대자로 변해간다.그러나 그 절대성은 위협을 받는다. 아예사가 악마의 자식으로 선고한 갓난 아이를 대중들이 돌로 쳐 죽일 때, 아예사를 따르든 순례자들의 마음 속에 이래도 되는가하는 회의가 자리잡은다. 하지만 바다를 목전에 둔 순례자들은 바다가 갈라질 것이라는 계시를 목도할 때까지 불신을 보류한다. 

 

셋, 영적 체험! 아예사를 따라 단체 순례길에 오른 마을 사람들의 믿음. 믿음의 세계는 현실세계와의 괴리감이 있는 신비함으로 가득찬 세계이다.  이것은 환상의 세계와는 다르다. 바다에 도착하면 바다가 갈라질 것이라는 신의 계시. 그리고 신의 사자 아예사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 끝까지 합리성에 호소하며 불신의 세계로 사람들을 돌려 세우려는 미르자 사이드. 그 불신의 예언자는 몇 몇 개종자들을 얻게 된다. 신비한 일을 봄으로 영적 눈을 뜨게 되고 아예사를 따르던 사람들이 이러 저러한 이유로 아예사를 버리고 떠난다.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에 영향을 받은 사람, 권위적인 남편을 보고 나서 믿음을 버린 사람, 저마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불신에 빠져드는데... 이 이야기는 사실적이라기 보다는 허구 내지는 우화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진한 여운을 남긴다. 아예사를 따라 바닷물 속으로 사라진 사람들. 그들은 바닷물이 열린 것을 보고 그 속으로 행진해 가지만, 정말 바닷물이 갈린 것일까? 믿음이 있는 사람의 눈에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의 눈에는 완전히 닫혀진 그런 세상이 있는 것일까?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믿을 수는 있는 걸까? 

 

넷, 하나!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독자로서 권리를 근거로 말할라치면, 이건 '하나'임을 보여주려는 시도가 아닐까? 현실과 환상은 다른 것이 아니며, 선과 악도 다른 것이 아니다. 신과 악마도 다른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하나인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헤르만 헤세의 <싯달타>의 마지막 장면이 오버랩된다. 고빈다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 모든 것이 일체임을 깨닫는 순간....음, 그 순간을 향해 살만 루시디는 좌충우돌 달려온 것은 아닐까? 다만 접근하는 방향이 다른 길일 뿐. 종교라는 것에 우호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

 

그렇다면 종교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불안한 의문만 잔뜩 던져주는 <악마의 시>이다. 하지만 살만 루시디가 종교에 우호적이지 않음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반대의 결론이 도출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살만 루시디는 아주 영리하다. 종교를 건드리는 것 같으나, 그것이 적대적인지 우호적인지 구별을 모호하게 만들어 놓았다. 일반 독자들은 특히 이슬람에 문외한들은 아리송한 몽환상태에서 텍스트를 읽게 되어 버린다.

 

의문, <악마의 시>란 무엇일까?

이슬람의 코란을 악마의 시라고 ...

책에서는 <악마의 시>로 언급된 것이 세가지가 있는데....

  

발췌문

살아 있다는 사실, 그것은 사람이 살아 오면서 겪었던 모든 고통을 상쇄시킨다.

 

당신에게는 언제나 삶이 투쟁일거야. 삶에 대한 욕심이 너무 크기 때문이지.

 

알리는 얼음에 뒤덮여 높은 절벽을 기어오르는 힘든 육체운동을 통하여 초월성이랄까 영혼의 기적 같은 것을 경험한 것이었다.

 

생물의 유한한 인식능력으로는 신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으나 내 감각들은 천지만물속에서 조물주를 발견했노라.

 

어떤 것이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다 해서 그것이 진실이 됩니까? 그가 대답했다. 시인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나니, 상상력의 시대에는 굳은 신념의 힘으로 산을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자들이 즐비하도다.

 

밖으로 드러난 상처나 구멍의 크기만으로 내면의 상처를 판단할 수는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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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초편지 / 황대권 글 그림 / 도솔

 

황대권씨는 서울농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제3세계 정치학을 공부하다 학원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후에 이 사건은 국가기관에 의한 조작임이 밝혀지고 그의 나이 마흔 살 되는 해인 1998년에 황대권씨는 13년 2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석방되었다. 이듬해 1999년 그는 영국 임페리얼대학에서 생태농업을 공부한다. 그리고 유럽에서 변화하는 세계의 모습과 유럽의 대안 공동체를 살펴보고 귀국한 후 생태공동체의 실현을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잡초란 무엇일까? 잡초는 나쁜 것일까? 농사 짓는 일은 잡초와의 싸움이다. 농부에게 잡초란 뽑아 없애야만 할 존재다. 그러나 황대권씨는 의견을 달리한다. 그에게 잡초는 뽑아 버려야만 할 나쁜 것이 아니다, 잡초는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잡초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야초 또는 야생초라고 부른다. 그는 옥중생활 동안 교도소 운동장의 한쪽에서 야초를 키우면서 야초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깨닫게 된다. 다양한 야초의 잎들을 뜯어 먹기도 하고, 심지어 차로 끓어 마시기도 한다. 그는 야초를 키우면서 관찰한 사실들, 야생초의 무궁한 가능성, 그리고 그 가운데 깨닫게 된 삶의 평범한 진리등을 편지로 써서 동생에게 보낸다. 그 가운데 몇 몇 편지를 뽑아서 책으로 엮은 것이 <야생초편지>이다.

 

 

다음은 황대권씨가 기르던 야생초를 직접 보고 그린 그림들이다.    

 

며느리 밑씻개

 

 

스타펠리아

 

 

달개비(닭의 장풀)

 

 

제비꽃

 

 

강아지풀

 

 

닭의 덩굴

 

 

딱지꽃

 

 

녹두

 

 

주름잎/고추풀/선담배풀

 

 

방가지똥

 

 

여뀌

 

 

땅빈대

 

 

루드베키아

 

 

황금

 

 

까마중/먹달

 

 

매듭풀

 

 

수까치깨

 

 

돌콩

 

 

 

 

괭이밥

 

 

쇠비름

 

 

중대가리풀

 

 

비름

 

명아주

 

 

산국

 

박주가리

 

 

수크럽

 

 

왕고들빼기

 

밑줄

무릇 정성과 열심은 무언가 부족한데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만일 내가 온갖 풀이 무성한 수풀 가운데 살고 있는데도 이런 정성과 열심을 낼 수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주어진 자연의 혜택을 느긋하게 즐기는데 시간을 더 쏟았을 것이다. 열악한 생활 환경에서도 마음 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풍요로운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다.

 

그림을 그리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한번으로는 대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상을 아무리 수십 수백번 들여다 보아도 직접 그려보지 않고는 제대로 파악한 것이 아니다. 한 번 그려봐서는 부족하다. 두 번 세 번 그려 보면 처음 그린 것이 얼마나 허술하고도 엉성한 것인지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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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1.14

 

구미에 갈 일이 생겼다. 2~3시간 여유가 있어 부근의 명승지를 찾아 본다. 영주 부석사, 문경 새재 과거길, 영동, 속리산등이 구미에서 1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다. 나도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멀어져 가는 산등성이를 바라보고 싶다. 또한 옛 과거길 모습과 자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문경 새재 과거길도 한 번 걸어 보고 싶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속의 속리산도 다시 가고픈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시간의 제약 때문에 더 가까운 곳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금오산 도립공원이다. 금오산 자락에 있는 금오산 저수지 둘레길.

   

구미로 달리는 고속도로.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는 아직 비를 품은 구름에 휩싸여 있다. 금오산 도립 공원에 도착하여 차를 내릴 때까지 비구름은 여전히 산을 덮고 있다. 977m로 천미터에 육박하는 금오산은 아랫도리만 드러낸 채 구름 속에 숨어 있다. 비록 구름에 가려 정상은 보이지 않지만 높이가 천미터에 육박하는 산이라 압도하는 힘이 있어 보인다. 구름 사이로 언듯 언듯 드러나 보이는 산세도 험란해 보인다. 낮은 구릉성 산지에 익숙해져 있는 눈에는 사뭇 힘차게 다가온다.     

 

 

 

금오산으로 올라가는 도로가로 쭉쭉 뻗어 있는 단풍든 전나무는 어느 북쪽 나라의 풍경처럼 이국적이다. 전나무 단풍길이 뻗어 가다 굽어지며 숲을 향해 있는 길을 보는 순간 나의 마음은 홀린 듯 그 길을 따라 붉은 숲 속으로 걸어 가고 있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아쉬워 뒤를 연신 돌아다 보며 금오산 저수지를 향한다. 

 

 

 

금오저수지 둘레길은 오르막 내리막이 거의 하나도 없는 그대로의 평지이다. 남녀노소 모두가 산책을 즐길만 하다. 오늘도 어린이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모두 함께 둘레길을 걷는다. 저수지를 끼고 도는 도로는 금오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넘어 산 속의 사찰로 이어진다. 이 도로 아래 저수지 바로 옆으로 나무 데크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다. 이 길은 도로와 나란히 걷다가 다시 한 번 물이 흘러드는 곳에서 도로 곁에서 갈라져 다리를 건넌 후 두 길로 나누어진다. 숲 속으로 난 흙길은 저수지를 내려다 보고 있는 전망대를 향해 있고, 나무 데크길은 이제 저수지의 수면 위로 뻗어있다. 그러다 채미정을 바라보면서 수면에 떠 있는 부교로 바뀐다. 채미정을 지나 둑 위에서 호수 건너편에서 바라보니 금오산 기슭의 단풍 속에 하얀 다리와 정자가 액자속의 그림처럼 예쁘다. 금오산은 여전히 구름속에 그 존재를 숨기고 있다.   

 

 

약 30분간의 산책으로 금오산의 매력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 하지만 구름 속 베일에 싸인 금오산의 매력은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듯하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큰 소리를 가질 때도 있으니 말이다.

 

한국브레히트학회편/ 연극과 인간

 

바알

남자는 남자다

서푼짜리 오페라

마하고니 시의 번영과 몰락

린드버그들의 비행

동의에 관한 바덴의 학습극

예라고 하는 사람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

조처

 

 

희곡은 낯설다. 연극을 본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 본다. 아니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도 같다. 기억이 희미하다. 희곡을 읽은 일은 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그리고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이렇게 두 편을 읽었다. 그 외에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사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처음 읽을 때 황당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건 뭐지??? 다 읽고 나서 <고도>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밤으로의 긴 여로>의 불행한 가족 이야기는 인상적이긴 했다. 

 

브레히트의 희곡을 읽자니,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을 때의 난감함에 다시 마주친다. 그래서 읽다 말다, 읽다 말다 하는 통에 세세한 그림들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권을 다 읽은 시점에서 생각하면, 브레히트가 이러한 희곡을 통해 말하려고 했던 무언가가 있구나하는 것을 느낀다.

 

<바알>에서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시인의 방탕한 생활을 묘사한다. 천부적인 재능을 악용하여 여자를 농락하는 인간의 이야기이다.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당한다.

 

<남자는 남자다>는 꼬드김에 빠진 한 남자가 전쟁터에서 용맹을 보이게 된다는 이야기.

 

<서푼짜리 오페라> ???

 

<마하고니 시의 번영과 몰락> 아마도 미국의 라스베가스를 은유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글쎄 뭔가 자본주의를 풍자하는 내용인 듯...

 

<린드버그들의 비행> 비행기를 타고 처음 대서양을 가로 질렀던 린드버그의 이야기인데, 자연과의 사투에서 승리한 인간의 모습.

 

<동의에 관한 바덴의 학습극> 추락한 비행사들을 도와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토의하는 내용이다. 서로 돕는다는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평가하고 있다. 서로 도울 필요가 없는 세상을 꿈꾼다. 세상의 폭력으로 말미암아 도와야 할 필요가 생기고, 돕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폭력이라고... 사실 모르는 사람을 돕는 것은 위험성이 상존한다. 만일 어떤 사람을 도왔는데 이 사람이 살인마가 되어 다른 사람을 해친다면, 이 도움은 옳은 것인가? 내가 그 사람을 돕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다른 사람이 희생되는 일은 없었을텐데...

 

<예라고 하는 사람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 동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참신하다.  병든 동네 사람들을 위해 함께 먼 곳에 있는 의사를 찾아 가는 일행의 이야기이다. 일행중 한 사람이 아프게 된다. 이 사람을 데리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시 마을로 돌아가기도 어렵다. 관습에 따르면 이 사람을 내버려두고 가야한다. 그리고 아픈 사람은 이러한 조처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가지 길이 있다.

 

첫째,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황이 변하지는 않겠지만, 당사자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 자체가 필요하다. 또한 당사자는 동의하기 싫더라도 일반적인 관습에 의해 동의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면 어쩔 수 없이 동의하게 된다. 예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픈 사람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내 놓아야 한다.

 

둘째,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에서는 그와는 다른 상황이다. 동의를 구하는 절차는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당사자는 어쩔 수 없이 동의해야만 한다는 전통이나 관습에 반기를 든다.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관습에 의해 행동하지 않고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한다. 즉 아니오라고 말함으로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극 중에서 아픈 사람은 자신이 죽도록 버려지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른 일행들은 이 사람의 부동의에 동의하여 아픈 사람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간다. 새로운 행동 양식이 시작된 것이다.

 

어느 것이 옳은가? 어느 것이 바람직한가?

 

<조처>중국의 공산화를 위해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선동가들과 동행하는 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인간적인 감정에 휘둘려 인정을 베푸는 바람에 공산화 작업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된다. 그가 죽어야만 공산화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죽음에 동의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죽음에 동의한다.

 

이러한 동의에 의한 죽음은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겠다. 비인간적이다. 하지만 조직과 사회 즉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만 한다면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과연 무엇이 대이고 무엇이 소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대'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것도 어떤 인식의 테두리내의 일이라면, 다른 인식의 틀을 기준으로 보면 어떻게 될까? 아니면 그 인식의 틀을 거두어내버리면, 그래도 그것이 '대'일까?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것을 찾기란 쉽지 않다. 다 상대적일 뿐이다. 이 희곡에서 처럼 공산화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한, 그 틀에서 결정된 것이 절대적인 선 또는 '대'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절대적인 것일까? 그 무엇이 있기는 있을텐데...

 

브레히트의 희곡을 읽고 생각하게 된 점들이 있다고 해도, 희곡의 낯섬은 가시지 않는다. 단 상연할 연극의 시나리오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어 묘사에 있어 소설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 한계내에서 그 한계를 초월하는 무엇인가를 표현하려는 시도,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도 같은 노력이 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음에 놀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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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2

 

가을이 갑니다

기어이 가을이 떠나갑니다

 

제 새끼 버려두고

제 새끼 나뒹구는 꼴을 내버려두고

가을은 떠나가고 있습니다.

 

미워서 미워서

머리 끄댕이를 잡아 당기고 싶지만

가는 마음도 편치만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가야만 하는 길인 것을

 

 

가는 가을 끝자락이라도 붙잡아 보려고 장산에 올랐다. 부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산의 동쪽 하늘 아래 누워있는 장산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북풍으로부터 해운대를 지켜주고 있는 장산은 해발고도 634m로 부산에서 세번째로 높은 산이다. 장산에서 서쪽으로 쳐다보면 부산에서 가장 높은 금정산(802m)의 줄기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남쪽으로 바라보면 광안대교를 마주하고 있는 금련산이 광안리 바다쪽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다.

 

장산 기슭에서 200~250m에 이르는 고도에 이르기까지 장산 자락을 타고 올라 앉은 재송동의 아파트 단지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조성된 아파트라 한다. 재송동 상단에 자리잡은 글로리 아파트 부근에 차를 세워놓고, 거기서 산을 오르기 시작하면 장산 정상에 이르는 가장 짧은 등산로를 타는 것이다. 그 길이 좀 가파르기는 하다. 우리는 가파른 길보다는 허리로 둘러가는 길을 선택하여 걷는다.

 

장산은 돌이 많은 산이다. 등산로 초입부터 돌로 만들어진 길이 놓여있다. 

 

 

많은 돌들이 깔려 있는 산비탈을 너덜겅 또는 너덜이라고 하는데, 장산에는 이런 돌무더기들이 흘러내리듯이 형성된 너덜지대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긴 것은 300m정도의 흘러내린 것도 있으며, 너비는 30~40m에 달하는 것도 있다. 이런 너덜지대를 처음 보면 꽤 인상적이다. 이번에 통과한 너덜지대는 비교적 작은 너덜겅인 듯 한데, 아마도 너비는 20m, 길이는 100m쯤 될 듯하다.

 

너덜겅을 가로 지르니 옛생각이 난다. 대학교를 휴학하고 있을 때.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 가운데'를 손에 쥐고 뒷산이었던 장산을 올랐던 때. 그 때 처음 장산을 올랐었다. 멀리서만 보았던 너덜지대. 그 가운데 내가 있었다. 그 때의 강렬한 인상. 당시의 일기를 들추어보니, 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할 지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고민 끝에 선택된 표현이 '돌의 나라', 사방에 거대한 돌들이 경사지를 흘러내리는 듯한 광경에 꽤 놀랐던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난 니나를 사랑한 의사 슈타인이었다. 슈타인이 생의 한 가운데 서 있었던 것처럼 난 너덜겅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너덜겅을 따라 올라가는 등산로도 있는 것 같았지만, 아내와 딸을 위해 편한 길을 간다. 장산의 숲에도 가을은 깊어가고 있었다. 아니 떠나가고 있었다.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니, 널찍한 임도에 이르게 된다. 재송동 옥천사에서 우동 성불사까지 시원스레 연결된 임도. 우리는 우동 성불사쪽으로 내려간다. 이제 우리는 산 등성이를 지나 장산의 동쪽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아마도 장산의 남동쪽 끝자락 부근을 둘러가는 둘레길로 접어든 것이다. 성불사를 지나 우동 We've 아파트 쪽으로 내려와서 삼환 아파트를 가로 질러 홈플러스까지 내려오니 산행시간은 1시간여정도. 아주 심플한(?) 산행이었다.

 

홈플러스 부근에서 딸아이와 함께 마카롱을 먹고 집사람과 커피를 마신 후 교보문고에서 책을 보며 기다리라고 한다. 나는 마을 버스를 타고 재송동 종점으로 가서 차를 회수해 온다. 원점으로 귀환하는 산길이라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오늘 산행의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아쉬운 느낌이 든다. 혼자 걸으면 나 가고 싶은 길을 마음대로 갈 수 있었을텐데. 정상쪽으로 올라가지 못해 아쉽다. 하지만 가족이 함께 걸었다는 데 의미를 두어 본다. 

 

대교약졸(노자): 최고의 기교는 졸렬한 듯하다.

 


최고의 기교로서의 졸렬함은 유치함과는 다르다. 그 졸렬함에는 단순 소박함에서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와 아름다움이 있다. 수학자들이 가장 아름다운 수식으로 꼽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그러하고, 아인쉬타인의 그 유명한 공식이 그러하다. E= mc²

최고의 경지는 꾸밀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뿐, 꾸미려 하지 않는다. 최고의 경지는 강요하지도 않는다. 자연은 꾸미려 하지 않고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줄 뿐... 꽃이 필 때가 되면 꽃이 피고, 때가 되면 그냥 진다.

자연은 무심하고, 감동을 주려는 일말의 의도도 없건만, 지는 저녁놀을 바라보면, 피어 있는 꽃을 보면, 온 산 가득한 단풍을 보면, 까만 밤하늘 수놓은 별들을 보면 절로 입이 벌어지며 탄성을 발하게 된다.'이야기도 없고 말도 없고 그 목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그 감동은 깊고 그 여운은 길다. 그렇게 조물주는 최고의 기교로 자연을 만들었다.

시편 19: 1-4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알리고 창공은 그분의 손으로 하신 일을 선포합니다. 날이면 날마다 말을 쏟아내고 밤이면 밤마다 지식을 알려 줍니다. 이야기도 없고 말도 없고 그 목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는 온 땅에 퍼져 나가고 그 소식은 사람이 거주하는 땅의 끝까지 퍼져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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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미셸 투르니에/ 김화영 옮김/ 민음사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에서 추천받은 책이다.

☞ 이윤기의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http://blog.daum.net/ccsj77/353

 

책을 읽다 보면 무슨 책을 읽을까하는 고민이 절로 해결되는 때가 있다.

책 속에 추천된 책, 그리고 책 속에 언급된 책들이 있기 때문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책의 행렬을 따라 가다 보면 어디로 가게 될까?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뱀처럼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될까?

그 끝이 나올 때까지 모든 책을 읽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지만, 그 걸음의 방향은 아마도 인류의 이성이 빚어낸 고전들로 향하지 않을까?

시간의 파괴성을 견디어 낸 책들, 인간들의 지성의 향연이라할 그런 책들 말이다.

그러면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는 어떤 책, 그리고 누구와 선이 닿아 있을까?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대니엘 데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복사판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로빈슨, 난파한 버어지니아호에서 혼자 살아남은 그는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다. 

무인도를 개척해 나가는 삶, 그리고 동반자의 등장. 딱 여기까지이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과 <로빈슨 크루소>가 닮은 것은.

 

대니엘 데포의 '로빈슨'은 동반자 '프라이데이'를 만난다.

'로빈슨'은 야생의 세계인 무인도를 개척하고, 프라이데이를 문명인으로 교화시킨다.

데포의 <로빈슨 크로소>은 야생을 이긴 문명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미셸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다르다. 그는 야만인 '방드르디'를 만나 교화받는다.

'방드르디'를 만나기 전까지 쌓아놓았던 문명은 파괴되고, 그는 야생으로 돌아가게 된다.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문명에 대한 야생의 승리의 증인이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에 맞닿아 있기도 하다.

미셸 투르니에는 레비스트로스의 강의와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유명한 인류학자로 <야생의 사고>,<슬픈 열대>와 같은 저서를 남긴, 구조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문명의 우월성을 자랑하는 서구의 지성들에게 야생 즉 반문명의 원시문화가 더 우월할 수도 있다고 일갈했다. 

 ☞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http://blog.daum.net/ccsj77/174

 

아마도 미셸 투르니에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 이러한 야생의 우월성을 담고 싶었을 것이다.

문명이 야생보다 우월한 것이 무엇일까?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문화는 야생을 갉아먹고 산다. 후손 대대로 살아야 할 자연을 파괴하고 자원을 고갈시킨다.

에른스트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을 통해 거대경제의 위험성을 지적한 바 있다.

 ☞ 에른스트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http://blog.daum.net/ccsj77/287

 

로빈슨도 끊임없이 스페란차의 생산력을 고갈시켜가면서 곡물을 생산해 낸다.

혼자서 사는 삶임에도 불구하고 창고에 가득 생산물을 쌓아 놓고도 또 더 많은 생산을 위한 계획과 실행으로 바쁜 삶을 보낸다.

만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먹고 살 만큼만 생산하고 거기에 만족한다면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까?

하나 더 가지려면, 하나 더 만들든지, 아니면 하나를 더 뺏어야한다.

그러나 하나 더 만든다는 것은 장차 올 미래세대, 우리의 아들 딸에게 속한 것을 빼앗는 것과도 같다.

 

필요한 하나의 것만 가지고, 잉여의 것을 탐하지 않는 것이 야생의 사고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자신들이 먹을 만큼만 사냥한다고 한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더 많은 사냥을 하는 것은 자연의 균형을 깨뜨리게 되고,

결국에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들의 삶도 파괴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명의 붕괴를 막고 지속적인 문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야생의 사고일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인류의 문명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미셸 투르니에는 철학자로서 철학과 소설의 융합을 지향했다고 한다.

무인도에서 타자없이 살아가는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에게 타자란 어떤 의미일까?

이러한 철학적 질문에 대한 철학적 생각거리도 던져주는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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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숲은 마지막 기력을 다 쥐어 짜내듯 처절하게 피를 토한다. 풍성했던 가지는 앙상하게 메말라간다. 차가운 길가에 널부러진 잎들은 서서히 바스라지고 있다. 지난 봄에 속살처험 연하게 돋아난 잎이 집 떠나 길 잃은 청춘처럼 이리 저리 쏠리고 있다. 떠나는 가을의 뒷모습을 잡으려는 손짓은 하릴없다.   

 

저물어가는 가을 날에 영화 <봄 날은 간다>를 보았다. 헤어지자는 여자의 말에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하고 묻는 남자의 말은 이 영화의 유명한 대사이다. 이 작품을 만든 허진호 감독의 심중은 어떨까? 아마도 '사랑은 봄 날과 같다. 봄 날이 가는 것처럼 사랑도 가버린다. 그리고 다른 봄 날이 오는 것처럼 또 다른 사랑이 찾아 온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사랑은 왔다가 가고, 또 다른 사랑이 온다는 감독의 의도를 보여주는 세가지 코드를 찾았다. 첫째, 제목 <봄 날은 간다>! 사랑은 봄 날과 같다. 겨우내 가지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싹들이 새 봄을 맞으러 설레는 마음으로 머리를 내미는 것처럼 사랑도 그렇게 두근거리며 시작된다. 그러나 꽃이 피고 지고, 잎의 색깔이 짙어가면 설레임은 익숙함에 자리를 내어준다. 봄 날은 이렇게 지나가고 만다. 사랑도 그저 봄 날처럼 그렇게 지나가 버린다.    

 

두번째, 소리채집. 사랑은 기억속의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지는 소리와 같다. 함께 소리 채집 여행을 하면서 남자와 여자사이의 사랑이 싹튼다. 남자와 여자는 대나무 숲에 부는 바람 소리를 채집하고 있다. 대나무 숲과 바람의 만남은 처연한 소리의 아우성이다. 대나무 숲 사이로 빠져나가지 못한 바람은 대나무 숲 위를 불어댄다. 대나무는 끝에 걸린 바람을 놓치지 않으려한다. 그러나 바람은 머물지 않는 것을, 그냥 스쳐지나가야만 하는 운명인 것을. 바람을 놓친 대나무 숲은 바다 물결처럼 출렁거린다. 바람이 대나무 숲을 스치며 내는 소리가 대나무 숲에 가득하다. 남자와 여자는 대나무 숲에 말없이 앉아 흔들리는 대나무 끝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는 동안 대 숲의 바람소리는 음향기기에 담긴다. 

 

산사의 한 밤에 눈이 내린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여자. 남자는 여자를 깨우지 않으려고 혼자서 조용히 마루에 걸터앉아 한 밤중 산사의 눈 내리는 소리를 담고 있다.  여자도 가만히 마루에 앉는다. 그리고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인 양 흩날리는 눈을 바라본다. 눈은 먼 곳의 여인의 옷벗는 소리처럼 내리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 고요함 속에 잔잔한 설레임이 느껴진다. 시간의 흐름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는 소리를 담으려는 몸짓은 안타까운 아름다움이다. 봄 처럼 가버리는 사랑을 잡으려는 남자의 몸짓도 그렇다. 개울가의 물소리를 채집하던 남자는 여자가 흥얼거리며 소리를 듣고 음향기기에 담는다. 여자의 노래소리는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세번째, 이별이다. 여자는 이미 사랑을 믿지 않는다. 아픈 상처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여자는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또 다시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남자는 아직 사랑을 모른다. 사랑은 덧없이 지나간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봄 날이 가면 그도 아마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은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사랑은 지나가 버린다는 것을. 그리고 다시 또 다른 새로운 사랑이 찾아 온다는 것을.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이 흐려진다. 여자를 떠나 보내는 남자의 눈에는 물기에 젖어든다. 

 

헤어진 남자와 여자. 사랑은 지나가고 추억은 남는다. 여자는 종이에 베인 손가락을 머리위로 쳐들고 흔들다가 문득 그 남자를 추억한다. 남자는 바람부는 갈대밭에 혼자 서서 온 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갈잎의 소리를 듣고 있다. 감은 눈 망막은 아마도 추억을 더듬고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랑이 찾아 올 때까지는 이 추억으로 버텨야 한다.   

 

영화 곳곳에 허진호감독의 섬세함이 배여있다. 한 번 더 보고 싶다. 여자의 아름다운 모습을, 아니 무엇보다도 감독의 섬세한 감성을 더 많이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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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스콧 피츠제럴드/ 김욱동 옮김

 

읽지 말 걸 그랬나?

<위대한 개츠비>에 취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 단편선에 수록된 소설들은 모두 제2, 제3의 <위대한 개츠비>로 보인다.

문체는 여전히 차갑게 빛나고, 소설 속의 분위기에는 아름다운 슬픔이 배여있다.

그의 소설에는 여전히 데이지처럼 아름다운 소녀, 숙녀들이 등장하고, 

개츠비처럼 그녀를 사랑하고 동경하는 남자들이 나온다,

반짝 빛나던 사랑과 헤어짐, 시간이 흐른 후 해후. 시간은 모든 것을 색 바랜 추억으로 만드는 마술사이다.  

지나간 아름다웠던 젊은 한 때의 추억은 잃어버린 시간 속에 다시 갈 수 없는 슬픔으로 남는다.

"아무리 영원히 찾아 헤매더라도 잃어버린 4월의 시간은 절대로 되찾을 수 없다."

지나버린 청춘, 4월처럼 빛나던 그 시절은 돌이킬 수 없는 추억이다.

언제나 그대가 아름답게 남아있기를 바라지만, 시간을 바람처럼 갈대를 흔들고 어디론가 가 버린다.

 

이 단편선에는 아홉개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하나 하나 되짚어 되돌아 보면 제각각 다른 이야기임에도,

얼핏 생각할 때 다 비슷한 이야기로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내용이 뒤섞여 버린 그런 느낌이다.

그것은 모든 이야기들이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과 피츠제럴드 특유의 문체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아뭏든 수록된 작품은 다음과 같다  

다시 찾아온 바빌론/ 겨울 꿈/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 광란의 일요일/ 기나긴 외출/ 컷글라스 그릇/ 분별 있는 일/ 부잣집 아이/ 오월제

'다시 찾아온 바빌론'은 대공황으로 온 재산을 날린 주인공이 다시 회복해서 처형집에 맡겨둔 딸을 찾으러 온 남자 이야기

'겨울 꿈'은 골프장 캐디를 하며, 부잣집 딸을 사모하던 소년이 자수성가하여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는 이야기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시간'은 어릴 때 좋아하던 여자를 찾아가 엇갈린 사랑을 맛보는 이야기

'광란의 일요일'은 전도양양한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영화계의 인사들의 파티에 참석하여 벌어지는 이야기 

'기나긴 외출'은 정신병동에 있는 부인이 매일 남편을 기다리는 이야기.

'컷글라스 그릇'은 결혼 선물로 받은 컷글라스 그릇이 그 가정에 가져다준 파국에 대한 이야기,

'부잣집 아이'는 명문가에서 태어난 서민들과는 다른 종족으로 자란 남자 이야기,

'오월제'는 오월제의 축제가 한창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 절망에 빠진 남자의 파국,

 

'문학의 주제는 모두 동일하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했는가만이 다를 뿐이다.'라고 말한 김연수의 말이 떠 오른다.

모든 문학의 주제가 동일하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대동소이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듯 하다.

대부분의 문학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하지만 한 작품이 표현해 내는 사랑은 다른 작품에 표현된 사랑과는 다르다.

각각의 사랑법이 다른 것이다. 사실 사랑의 모양은 사랑하는 사람의 수 만큼이나 많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작품이란 독자들이 경험하지 못한 사랑의 모습을 그려내면서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닐런지? 

 

피츠제럴드의 사랑법은 투명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것은 전후 미국 재즈시대 상류계층의 정서를 반영하는 사랑일 것이다.

만일 그 사랑법은 우리네 사랑법은 아닐 것이라고 말하면 내가 사랑을 모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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