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화자는 다른 사람들의 속내를 듣는 것에 싫증이 나 있지만, 개츠비에게만은 뭔가 자신을 끄는 특별한 것이 있음을 알아챕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은 개츠비를 파국으로 밀어넣는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마지막 부분은 그 의미를 잡을 수가 없어, 나름대로 멋대로 번역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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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after boasting this way of my tolerance, I come to the admission that it has a limit.

 

나의 관용을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결국 나도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Conduct may be founded on the hard rock or the wet marshes, but after a certain point I don't care what it's founded on.

 

바위처럼 튼튼한 도덕감각을 가지고 올바르게 행동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 때로는 아무런 도덕적 의식 없이 옳은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무슨 동기로 옳은 행동을 하는지 따지지 않기로 했다.  

 

When I came back from the East last autumn I felt that I wanted the world to be in uniform and at a sort of moral attention forever; I wanted no more riotous excursions with privileged glimpses into the human heart.

 

지난 가을 동부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나는 도덕적인 세상이, 군복을 입은 군인이 부동자세로 서 있는 것 처럼,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오직 나에게만 특혜로 주어진, 사람의 속을 들여다 보는 골치아픈 마음 여행을 더 이상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Only Gatsby, the man who gives his name to this book, was exempt from my reaction - Gatsby, who represented everything for which I have an unaffected scorn.

 

그런데 이 책의 주인공인 개츠비, 내가 진심으로 경멸했던 모든 것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던 개츠비, 이 사람만은 예외였다.    

 

 

If personality is an unbroken series of successful gestures, then there was something gorgeous about him, some heightened sensitivity to the promises of life, as if he were related to one of those intricate machines that register earthquakes ten thousand miles away.

 

얼마나 끊임없이 무언가를 성공적으로 추구해왔는가에 따라 한 사람을 평가한다면, 그에게는 단연 으뜸이라 밖에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마치 일만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지진이라도 감지할 수 있는 예민한 지진계처럼, 개츠비는 인생에서의 약속이 어떠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예민하게 받아 들이는 대단한 민감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This responsiveness had nothing to do with that flabby impressionability which is dignified under the name of the "creative temperament" - it was an extraordinary gift for hope, a romantic readiness such as I have never found in any other person and which it is not likely I shall ever find again.

 

그의 이러한 민감한 반응성은 "창의적인 기질"이라고 여겨지는 감수성- 고귀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런 감수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것은 희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아주 특별한 재능이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었던, 그리고 다른 그 누구에게서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무엇이라도 기꺼이 희생하려는 비현실적이라 할 만큼 대단한 자발성이었다. 

 

No-Gatsby turned out all right at the end; it is what preyed on Gatsby, what foul dust floated in the wake of his dreams that temporarily closed out my interest in the abortive sorrows and short-winded elations of men.

 

개츠비에게 모든 것이 잘 되었으면 좋으련만, 결국 그것이 개츠비를 삼켜버렸다.

그의 꿈은 비극으로 끝나버린 불행이었으며, 인간에 대한 자랑스러움은 짧은 순간 끝나고 말았다. 그 꿈으로 향한 발걸음 뒤에는 더러운 흔적만이 남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꿈에 대한 나의 관심을 잠시 묻어두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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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하는 것이 재미도 있지만, 난해한 부분은 정말 머리에 쥐가 납니다. 마지막부분은 완전히 오락가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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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예전에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서 궁금하게 생각하고 나 혼자 결론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왜 개츠비를 위대하다고 부르는 것일까요?

 

사실 개츠비는 아마 밀주사업일 것으로 추정되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부를 쌓은 인물입니다. 그리고 이전 연인이었던 데이지에 대한 사랑은 맹목적이다 싶을 정도여서, 이미 데이지가 결혼한 유부녀이며, 아이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데이지의 가정을 깨뜨릴 위험성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전에 번역본으로 한 번 읽어 봤고, 그 이후 원문으로 한 번 읽어 봤는데 그 땐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가 왜 "위대한 개츠비"라고 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당시의 비틀어진 세태를 비꼬기 위한 장치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첫 페이지를 번역하면서, 글에 나타난 스콧 피츠제럴드의 의도를 신중하게 살펴보면서 단어 하나 하나에 주의를 기울여 보니, 야...이것 참 대단한 글인데...하고 놀라게 됩니다. 아주 미묘한 뉘앙스가 가득찬 글이란 느낌을 받습니다. 단어와 문장 하나 하나에 함축된 작가의 의도가 신비스럽게 드러나는 듯, 마치 언어의 비경을 구경하는 듯합니다. 

 

이렇게 실제로 한 번 번역을 시도해 보니, 번역이 예술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 됩니다. 번역가는 연주자와 같습니다. 작곡가가 일차 창작자라면, 연주자는 그 창작품에 새로운 해석과 연주로 2차 창작을 하는 셈입니다. 이와 같이 번역가들도 1차작품으로 부터 2차 창작을 이끌어 내는 예술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작업을 공개하는 것이 망설여지지만 배우는 입장에서 용기를 내어 이렇게 올려봅니다. 번역에 문제가 있는 부분은 가차없이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개인적 발전에 밑거름이 되도록 하려 합니다.

 

Chapter 1

In my younger and more vulnerable years my father gave me some advice that I've been turning over in my mind ever since.

 

내가 지금보다 젊고 감수성이 풍부한 시기에 아버지는 내게 잊지 못할 충고를 해 주셨다.

 

"Whenever you feel like criticizing any one," he told me, "just remember that all the people in this world haven't had the advantages that you've had."

 

"네가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기억하기 바란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네가 누려왔던 좋은 것들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것을." 라고 말하였다.

 

He didn't say any more, but we've always been unusually communicative in a reserved way, and I understood that he meant a great deal more than that.

 

아버지는 더 이상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만, 나는 거기에 그 이상의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이해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나는 항상 뭔가 여운을 남겨놓는, 예사롭지  않은 방식으로 소통해 왔기때문이었다.

 

In consequnce, I'm inclined to reserve all judgments, a habit that has opened up many curious natures to me and also made me the victim of not a few veteran bores.

 

결과적으로 나는 사람에 대해 쉽사리 판단하지 않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괴팍한 사람들과도 연을 맺게 되었으며, 때로는 퇴역군인의 지루한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는 입장이 되기도 했다.

 

The abnormal mind is quick to detect and attach itself to this quality when it appears in a normal person, and so it came about that in college I was unjustly accused of being a politician, because I was privy to the secret griefs of wild, unknown men.  

 

평범한 사람에게서 이러한 성향이 나타나면, 괴팍한 사람들은 재빨리 이를 간파하고서는 그에게 달라붙게 마련이다. 길들여지지 않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숨겨진 슬픔을 나눈다는 것때문에, 대학에 다닐 때는 부당하게도 정치가로 오해받기도 했다. 

 

Most of the confidences were unsought-frequently I have feigned sleep, preoccupation, or a hostile levity when I realized by some unmistakable sign that an intimate revelation was quivering on the horizon; for the intimate revelations of young men, or at least the terms in which they express them, are usually plagiaristic and marred by obvious suppressions.    

 

내가 기꺼이 아픔을 함께 나눌 것이라는 그들의 확신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내심을 토로하려는 기미가 수면위에 조심스럽게 드러나려는 징후가 보일 때면 - 사실 젊은 사람들이 속마음을 내비치려 할 때는 언제나 비슷한 상투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때문에, 그리고 숨기려는 감정이 그 표현에 어떻게든 분명히 드러나기때문에, 그 순간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럴 때면 언제나 난 잠자는 체 하거나,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체하거나, 냉담한 경솔함을 가장하곤 했다. 

 

Reserving judgments is a matter of infinite hope. I'm still afraid of missing something if I forget that, as my father snobbishly suggested, and I snobbishly repeat, a sense of the fundamental decencies is parcelled out unequally at birth.  

 

판단을 유보하는 것은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너그러운 태도로   다른 사람들보다 뭔가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젠체하는 듯이 말씀하셨고, 나도 그런 느낌으로 거듭 판단을 유보한 것은, 상황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게 행동하는 감각이 사람마다 애초 태어날 때부터 다르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판단을 유보하지 않고 섣불리 판단한다면 그렇지 않을 경우에 가질 수 있는 무언가를 놓치는 것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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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첫 페이지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화자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고정관념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화자는 어릴 때 아버지의 교훈을 마음에 명심하면서 자라왔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쉽사리 판단하려 들지 않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어떤 한 사람의 일면만을 보고 지레 그 사람에 대한 편견을 갖게 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해 주죠. 

 

그렇다면 화자는 개츠비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나타낼까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그는 과감하게 개츠비에 대해 판단을 내립니다. 어떤 판단을 내리는 지는 다음 페이지에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개츠비에 대한 이야기는 그러한 판단을 내리게 된 경위를 하나 하나 추적해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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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즈 선정 100권 중 <객관성의 칼날> 제 9장 에너지학 / 찰스길리피스

 

열역학 제1법칙(에너지 보존법칙) - 줄과 마이어

 

산업혁명의 도화선이 된 증기기관의 발명은 과학에 빚진 것이 거의 없다. 증기기관은 수준높은 과학 지식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어떻게 보면 단순한 기술이었다. 오히려 증기기관은 과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카르노로 부터 시작된 열역학은 증기기관의 연구에서 비롯되었기때문이다.

 

열역학에는 몇가지 법칙이 있다. 먼저 열역학 제1법칙 즉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있고,  열역학 제2법칙 즉 엔트로피의 법칙이 있다. 그런데 열역학 제1법칙인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증명되지 않은 것이라 하면 조금 놀랍다. 왜냐하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전우주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원리로 받아들여지기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열역학 제1법칙이 성립되었으며, 에너지 보존의 법칙으로 부터 어떤 과학적 사실들이 도출되었을까?

 

수학은 철학과는 달리 기본적인 방법론으로 증명을 내세운다. 증명되지 않은 사실은 수학적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증명된 사실만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이 위에 또 새로운 진리를 세워나감으로 수학이라는 거대한 구조물이 논리적 체계를 가지고 형성된다. 그런데 이러한 엄밀함의 학문인 수학조차 증명되지 않은 전제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은 놀랍다면 놀랍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수학보다 엄밀함이 떨어지는 물리학에서야 오죽하겠는가? 그 전제로 증명되지 않은 사실을 사용한다고 나무랄 순 없을 것이다. 오랫동안 과학자들은 자연의 궁극적인 힘들이 서로 교환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해 왔었다. 화학적 반응에 있어, 반응전의 계의 질량과 반응후의 계의 질량이 동일할 것이라는 증명되지 않은 질량보존의 법칙을 바탕으로 화학이 발전해 왔던 것과 똑 같이, 열역학 제1법칙 즉 에너지 보존법칙은 증명되지 않은 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여져 왔던 물리학의 전제였다. 이런 전제가 옳음을 보여주는 여러 간접적인 증거들에 의해 이 전제에 대한 믿음은 점점 더 굳건해졌다.   

 

벤저민 톰슨(1753~1824)은 마찰에 의해 운동이 열로 변환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최초의 실험을 수행하였다. 그는 대포의 포신을 깍을 때 발생하는 열로 물이 심하게 끓는다는 것을 통해 열은 운동에 존재함을 주장했다. (1798) 그러나 그는 운동으로부터 열로의 변환을 수량화하지 못했다. 

 

40년뒤 제임스 프레스코트 줄(1818~1889)은 운동과 열사이의 수량화에 성공했다. 그의 초기실험은 기계적 동력의 소모와 열의 발생 사이에 일정한 비율이 성립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연의 위대한 힘은 창조주의 엄명에 의해 영원불멸임에 대하여 만족한다. 기계력이 소모되면 언제나 정확히 그에 상응하는 만큼의 열이 얻어지는 것이다."리고 줄은 말했다.(1843)

 

줄은 카르노의 연구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실린더에서 증기가 팽창할 때, 실린더 속의 온도가 감소한다. 그리고 감소한 온도에 비례하여 피스톤에 전달되는 기계적 힘이 증가한다. 즉 열의 감소는 힘의 증가와 정확히 상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활력은 소멸되지 않으며 단지 다른 형태의 힘으로 변환될 뿐이다.> 

 

이러한 일과 열과의 변환에 대한 사실이 과학적 객관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수량화에 성공해야 한다. 즉 어느 정도의 열이 어느 정도의 힘으로 변환되었는가하는 것이 수량적으로 보여져야 한다. 줄은 바로 이러한 수량화에 성공한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러한 과정을 수량화했을까?

 

줄은 특별한 장치를 고안하였다. 물통속에서 회전하는 물갈퀴를 만들고, 추가 내려가면 물갈퀴가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추가 하강하면서 물갈퀴가 움직이고, 물갈퀴가 움직이면서 물과의 마찰로 인해 물의 온도가 상승한다. 이 과정에서 추가 한 일과 온도의 상승 사이의 관계를 통해 일과 열사이의 수량화에 성공한 것이다. 1파운드의 물을 화씨 1도 높이는데 772파운드의 무게가 1피트 낙하하는 기계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줄은 이 실험을 통해 열과 일의 등가성을 보여주었다. 즉 열과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변환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것은 좁은 의미로 에너지가 보존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줄은 실험을 통해 그의 업적을 이루었지만, 마이어(1814~1878)는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방법으로 줄과 똑같은 결과를 얻었다. 줄이 실험물리학자였다면 마이어는 이론물리학자였던 셈이다. 실험과 이론이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면, 이는 증명하지 않고 사용한 전제조건이 받아들일 만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뉴욕타임즈가 선정 100권중 <간디 자서전> 함석현 옮김 / 한길사

 

간디(1869~1948)은 1922년 인도의 시성 타고르에 의해 '마하트마'라는 칭호를 얻은 이후 마하트마 간디라고 불린다. 마하트마라는 말은 '위대한 영혼'이란 뜻이다.

 

간디는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후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로 활동한다. 남아프리카에서의 인도인의 열악한 환경과 차별등을 보고 경험한 후에 인도인의 인권과 공민권을 개선하기 위해 자신을 바친다.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의 신망을 얻은 이후 인도 본토에서도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 법적 투쟁을 벌이면서 점차 영향력있는 지도자로 인정받게 된다.

 

간디는 1차세계대전이전에는 영국 정부의 여러 방침에 협조적이었고, 영국과 인도의 신뢰와 우의로 인도정부의 자치권을 획득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의 배신으로 반영독립에 힘을 쏟는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파키스탄과 인도의 분리 독립에 반대하여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화해를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 한 힌두교 광신자에 의해 암살당한다.

 

왜 간디는 '마하트마'(위대한 영혼)이라고 불릴까? 간디가 '위대한 영혼'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진실로 그러했기때문이다. 그에게는 다른 정치지도자들에게서 보기 힘든 숭고함과 순수함이 있다. 정치세계에서는 권력을 잡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책략을 사용하거나, 기만하고, 심지어 신의를 져버리는 등의 일을 서슴지 않는다. 속일 수만 있다면 비합법적이며 불법적인 행동도 불사한다. 그들에게 원칙과 진리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불신을 갖고 무관심과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다 그 이유가 있다.

 

그러나 간디에게는 그의 인생 전체를 관통해 흐르는 원칙이 있었다. 간디의 근본사상은 '사티아그라하'이다. '사티아'라는 말은 '진리'를, '그라하'는 '파악, 주의'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티아그라하'는 진리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행동해 나간다는 진리주의라 할 수 있다. 간디의 모든 행동 이면에는 이 진리에 대한 추구와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 간디는 자신의 인생을 진리를 파악하기 위한 실험의 장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그는 평생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 명령에 따라 행동한다. 진리는 그의 종교이며 그의 하나님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이러한 정신은 탁한 물 속의 연꽃처럼 그 숭고함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간디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이었다.

 

 

간디의 '사타아그라하'정신은 '브라마차리아'와 '아힘사'와 맥을 같이 한다. 간디의 브라마차리아는 자기정화, 금욕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간디는 어린 시절 힌두교 교의를 어기고 육식을 한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늘 지니고 있었다. 이후 그는 엄격한 채식주의를 늘 고수한다. 그리고 채식주의와 아울러 1906년 이후 일체의 성생활을 멀리하는 금욕주의 생활을 유지한다. 또한 모든 개인 재산을 포기하는 맹세를 하고, 공공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희생적인 생활과 소박한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간디는 금욕적인 생활을 통해 자기자신을 먼저 깨끗이 한 이후에 자신을 진리의 대의에 바치는 희생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것이 브라마차리아의 정신이었다.

 

간디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아힘사'이다. 아힘사는 '불살생'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로서 간디의 비폭력정신도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간디는 기독교에 비해 힌두교가 우월한 점을 '아힘사'에서 찾았다. 모든 생물에 대한 불살생, 비폭력, 동정, 자비등을 포괄하는 아힘사는 간디의 채식주의와도 맥이 닿아있다. 뿐만 아니라 간디의 '비폭력저항'정신의 근본원리이기도 하다. 간디의 반영투쟁의 근본원리는 비폭력저항이다. 이는 수동적 저항의 일종으로, 영국 정부에 대한 비협조, 시민적 불복종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간디는 영국정부에 대한 투쟁에서나, 압제적인 지주나 권위에 대한 투쟁에서나 항상 진실, 진리를 추구했다. 민중들의 불만이나 불평을 직접 조사하여 확인하지 않고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또한 잘못된 관행이나 압제등이 시정되기를 바라고 비폭력 법적 투쟁에 나섰지만 결국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았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처럼 사람에 대한 미움은 갖지 않았다. 투쟁하기 이전에 먼저 그들과 만나 상황을 진실되게 전달하고, 그들의 합리적 조치를 요구하고 양해를 구한 후에 행동을 취했다.

 

간디는 '위대한 영혼'이었다. 간디는 불완전한 인간이 갖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숭고하고 순수한 영혼을 지닌 인물이었다.     

 

 

 

<간디자서전>에서 발췌한 세문장

 

" 힘은 정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씨알이 그들 스스로 내세우는 진리를 위해 고통받을 각오를 할 때 그 자체가 곧 힘이란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불법이 있다고 느껴져 반항할 때 그 정부는 질서 있고 점잖은 이런 불복종에 대해 관용의 자세를 갖기때문입니다. ...제가 쓰고 있는 혼의 힘, 바꾸어 말해서 사랑의 힘을 널리 일반화하여 쓸 수 있다면 저는 전세계의 악에라도 능히 대항하는 인도를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때를 가리지 않고 제 생활에서 고통을 달게 받는다는 이 영원한 법칙을 나타내려고 제자신을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 인도 총독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진리에 대한 열의보다 강했다. 그래서 진리의 헌신자가 사티아그라하 투쟁의 열의 때문에 자기의 거룩한 이상을 한 번 양보해 버렸다. 이 행동의 기억은 지금도 가슴에 맺혀 있어서 내 마음을 후회로 가득채우고, 나는 늘 산양유를 언제나 그만 두나 그 생각만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유혹중에서도 가장 기묘한 열의, 즉 봉사하자는 열의 때문에 지금도 그것을 놓지 못하고 있다." - 우유를 먹지 않겠다고 맹세한 맹세를 깨뜨리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한 말. 간디의 채식주의는 우유나 달걀등도 먹지 않겠다는 아주 타이트한 것이었다.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 의사의 권유와 회유로 산양유를 섭취하게 된다. 원래 우유를 먹지않겠다고 맹세한 것은 이윤을 위해 암소로 부터 우유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기 위한 비인간적인 행위에 대해 들은 이후부터이다. 산양유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의사의 회유에 간디는 굴복하였다. 그가 살고 싶었던 이유가 인상적이다. "봉사하자는 열의"가 가장 큰 유혹이었다고...  

 

"나는 언제나 사람은 자기 잘못은 돋보기로 보고, 남의 잘못은 그와 반대로 보아야 둘을 정당하게 비교하여 평가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다고 여기기때문이다."  

 

 

경상북도 영해...포항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1시간여 달리면 영덕지나 영해를 만날 수 있다. 영해읍에 있는 괴시전통마을을 찾았다. 전통마을의 모습을 간직한  그 곳은 바람도 잠든, 시간마저 멈춘듯한 조용한 마을이었다. 목은 이색선생이 태어난 마을이기도 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오른쪽 골목을 따라 올라 간다. 대부분의 고택은 굳게 문이 닫혀있고 심지어는 잠겨있는데, 지금 가는 괴시리 영감댁은 아예 대문이 없다.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시는데, 마당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 괴시리 영감댁으로 가는 길이 한적하다.

 

 

기와지붕 끝자락이 아름다운 고택들의 지붕을 보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랄까, 예스러운 느낌이 든다. 그것은 현대세계의 시간에 쫓기는 모습이 아니라 정적이며 시간이 정지한 느낌이다. 느끼기 어려울 만치 아주 완만하게 이어져 있는 고택 기와지붕의 선들과 숲의 조화는 계속 바라보고 싶은 아름다움이다.  

 

 

기와를 이고 있는 흙 담벼락도 구수하고, 낮은 담벼락 너머로 집 안쪽이 다 들여다 보인다. 나즈막한 담벼락은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의 개방적인 일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아마 골목을 오고가는 이웃들은 집 안에 있는 사람들과 담너머로 눈 인사를 나누었을 듯하다.  

 

 

정말 오래된 담인 것 같다. 담위에 올라탄 기와 조각들에 핀 저승꽃은 이끼와 같이 보이기도 하는데, 이 기와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담 너머에 있는 나무조차 기와보다는 어려보인다.   

 

 

흙과 돌로 만든 담에 붙어 있는 방 창. 이게 들창인가? 그 옛날 이 방에 있던 처녀에 연정을 품은 사내들의 가슴은 이 창을 바라보며 얼마나 설레었을까? 설마 골목을 향한 방에 귀한 딸을 두었을리가, 아마도 하인들이나 하녀들의 방이었겠지...

 

 

괴시리 영감댁이다.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렇게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집은 정부에서 유지보수해 준다고 한다. 흙담이 떨어지거나 기와가 파손되는 등 집에 문제가 생기면 문화재청에서 보수해 준단다. 대신에 집 주인은 마음대로 집을 팔 수가 없다고 한다. 

 

 

괴시리영감댁에 들어서서 마당에서 집 정면을 바라본 모습이다. 마루에 면해 있는 사랑방에 고댁체험을 할 수도 있다고 한다. 뒤쪽에 따로 할머니 한 분이 살림을 하는 방이 있다.

 

 

양지바른 마루 앞에 텃밭을 가꾸어 놓은 넓은 마당이 있다. 그리고 마당 맞은 편 나즈막한 담 너머로 정겨운 앞집이 보인다. 보고 또 보아도 자연과 어우러진 기와지붕은 그 자체로 자연인듯 하다. 

 

 

마루에 새겨진 나뭇결이 거칠게 남아 있는 까닭은 그다지 사람의 손길에 닿지 않았기때문이리라. 옛날 그 시절에 들고 나는 사람들의 손길과 발길에 닳아 반질반질해졌을 마루가 사람의 왕래가 뜸한 지금은 자연의 비바람에 거친 모습이다. 

 

 

마루아래에는 삽살개가 낯선 사람을 경계하여 숨어있고 누구 것인지 모를 오래된, 아마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신 한켤레가 무심히 놓여져 있다.

 

 

마루에서 위로 치어다 보니 처마를 받치고 있는 나무들이 정답다. 

 

 

마루에 접한 사랑방에 들어가 문턱에 팔꿈치를 걸치고 앉아 방문밖을 내어다 보니, 흡사 내가 그 옛날의 선비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든다. 한가로운 오후의 햇살이 밝고 따뜻하지만 방안은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군청에서는 고택체험 민박을 권한단다. 전원생활을 즐기면서 여유로 민박을 운영하며 고택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손이 있으면 좋으련만, 할머니 혼자서는 벅차다.

 

 

한참을 괴시영감댁에서 조용한 적막과 햇살을 즐기다가 일어섰다. 그리고 고려말 충신 목은 이색선생의 박물관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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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타임즈 선정 100권 : <혁명의 시대>  에릭 홉스봄 지음/ 정도영, 차명수 옮김 / 한길 출판사

 

 

이 책 <혁명의 시대>는 일찍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계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이정표적인 업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우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념은 자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등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이념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이념들이 모두 한 시대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에릭 홉스봄이 이야기하는 '혁명의 시대'가 그것이다.

 

 

이 혁명의 시대는 1789년에서 1848년까지의 60년간의 시기이다. 이 혁명의 시대의 출발의 총성을 울린 것은 프랑스 대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이다. 그리고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는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1848년에 끝난다. 물론 혁명의 시대는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로 이어진다. 에릭 홉스봄의 3부작 시리즈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는 연속적인 근현대사를 분석하고 있다.   

 

 

에릭 홉스봄에 의하면 프랑스 대혁명과 영국 산업혁명은 근대 세계를 형성한 혁명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홉스봄은 이러한 이중혁명으로 중세세계가 종말을 고하고 근대세계가 등장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 당시 세계가 겪은 혁명적인 변화들에 대한 앎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크게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자유주의, 민주주의 세계에서 태어나, 그것을 기초로 한 교육을 받고, 그 혜택을 누리며 살아왔다. 물 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대다수는 우리가 자란 토양을 의식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체계내에서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우물안의 개구리와 같다. 하지만 우리 시대를 뛰어넘어서, 우리의 체계를 뛰어 넘어, 그 밖에서 바라볼 때 우리의 사회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근본적인 한계는 무엇인지 알게될 수 있다. 그러한 시각은 체계의 한계를 뛰어 넘기위한 기본적인 전제조건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는 우리에게 자각과 자성의 시간을 갖게 할 것이다.

 

우리는 1789년~1848년의 시기가 혁명의 시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제반 이유들을 <혁명의 시대>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의 봉건 사회를 무너뜨리고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 그리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어떻게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 밖에 없었는가?  이중혁명으로 인해 사회는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종교와 사상, 예술, 과학등은 이러한 변화에 어떤 기여를 했으며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프로테스탄티즘은 자본주의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이러한 흥미로운 고찰이 <혁명의 시대>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다.

 

뉴욕타임즈 선정작중 최근에 읽은 것들은 조지오웰의<1984>, 카프카의 <심판>, E.F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들인데, 이 책들은 공통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문제점이나 한계등을 생각해 보게 만든다. 최근에 읽은 이러한 책들은 나를 다소 우울하게 만들었다. 행복을 바라면서 책을 읽었는데, 오히려 불행한 느낌이 든 것은 아이러니하다.

 

어떻게 보면 책읽기는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불행의 원인들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게 함으로 풍성한 결실을 맺도록 하는 것은 아닐런지... 

 

명문 시카고대학은 설립초기에는 삼류대학에 불과했지만 허친슨총장의 '고전100권읽기운동'이후 85명의 노벨수상자와 44명의 로즈장학생 배출했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도대체 고전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준 것일까? 고전은 삶의 이면에 감추어진 원리나 실체를 깨닫게 하며, 현재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하며, 그 해결을 위해 도전하는 삶을 살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닐까? 그 도전을 짊어진 사람들은 그 무게때문에 때로는 불행하다고 느끼겠지만 그것은 모두의 행복을 위하는 길이라는 믿음으로 위대한 업적들을 이루어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풍성한 자연속에 조용히 눈을 감고 행복하게 잠들고 싶다. 소로우의 <월든>을 읽어 보고 싶다.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100권중  <작은 것이 아름답다>  E.F.슈마허 지음/ 이상호 옮김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가 슈마허란 것을 알았을 때, 먼저 생각난 사람은 카레이서 미하엘 슈마허였다. 그러나 이 책은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1911~1977)라는 경제학자가 쓴 것이다.  

에른스트 슈마허 및 전체 내용 소개   ☞  http://blog.daum.net/ccsj77/284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1911~1977)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슈마허는 근대 경제학에 비판의 칼날을 들이 대며 이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경제학을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 중심의 경제'이다.   

 

존 케인즈(1883~1946)은 모든 사람이 풍족해질 수 있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은 "다시금 수단보다 목적을 높이 평가하고 유용성보다는 선을 선호할 것이다. ...그러나 조심하라. 그러한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적어도 앞으로도 백년 동안은, 나쁜 일은 유용하지만 옳은 일은 그렇지 않기때문에, 옳은 일은 나쁘고 나쁜 것이 옳다는 점을 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상당 기간동안 탐욕과 고리대금, 그리고 경계심을 신으로 받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는 경제걱 궁핍이라는 터널에서 벗어나 밝은 햇살 속으로 나아갈 수 있다."

 

존 케인즈 (1883-1946)

 

 

즉 근대 경제학의 바탕은 탐욕과 이기심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무한한 영리 추구를 기초로 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은 필연적으로 풍요를 가져올 것이며, 그 풍요는 평화를 가져 올 것이란 믿음이 근대 경제학의 토대인 것이다. 탐욕과 이기심이 평화의 기초가 될 것이란 믿음은 이율배반적이지만 바로 그것이 근대경제학의 모토인 것이다.

 

슈마허는 근대 경제학의 맹점을 가차없이 폭로한다. 영속적인 성장과 번영, 그리고 그로 인한 평화는 환상일 뿐이다. 성장에 요구되는 자원의 소모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성장에 따른 자연의 생태계파괴나 환경문제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번영을 가능하게 한 이기심과 탐욕이 초래한 인간성의 파괴는 어떤가? 경제적 사고방식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면 비경제적 가치를 지닌 소중한 것들, 즉 아름다움, 건강, 깨끗함등의 전통적 가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한국 독자에게 널리 알려진 마이클 샌델 교수도 슈마허와 같은 관점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샌델 교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라는 책에서 경제적 사고방식이 사회에 침투하여  시장사회가 형성되면 발생할 문제점을 고발하고 있다. 

■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http://blog.daum.net/ccsj77/212

 

 

 

슈마허는 근대 경제학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대안 경제학을 제시한다. 그것은 영속성을 위한 경제학이다. 그것은 지속가능한 생활방식을 영위하게 해 주는 경제학이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건전하고 토지를 비옥하게 하고, 건강과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생산방법을 가진 경제학이다. 이 경제학에서는 임금(wage)만을 위해 일하는 노동은 없다. 그리고 여가시간에만 즐거움을 기대하는 노동도 없다. 그것은 즐기면서 일하는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경제학이다. 그것은 인간중심의 경제학이다.  

 

간디는 "대지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만, 모든 사람의 탐욕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고 말했다. 탐욕은 끝이 없다. 탐욕을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탐욕을 충족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줄이고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에 무게중심을 둘 때 행복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의 성장은 만족의 감소일 뿐이다. 이것은 우리가 인간 동료들만이 아니라 자연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연을 만들고 우리 인간을 만든 높은 존재와 평화롭게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함을 의미한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는 필연적으로 파국에 이를 수 밖에 없다. 인류는 지구의 약탈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지구는 우리의 거주지로서 보호하고 가꾸어 나가야할 대상이지 약탈의 대상은 아니다. 

 

대한민국은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어왔으며 그로 인해 물질적으로 한층 풍요롭게 되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어야 보면 슈마허가 지적한 것처럼 환경오염, 전통적 가치관의 파괴, 인간성 파괴 및 소외, 빈부의 격차등의 문제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로 인해 풍요의 토양에 불행의 꽃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다. 슈마허의 모든 예견들이 꼭 그대로 들어 맞는 건 아니지만, 그는 우리 사회를 위한 예언자적 목소리를 발하고 있다. 

 

이 시대의 아픔을 해결할 능력도 갖고 있지 않은 소시민들은 그저 예언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떨굴 뿐이다. 다만 "내려 올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그 꽃" 이라는 시구처럼 오른편, 왼편도 둘러보고, 뒤도 돌아보고, 위로 하늘도 쳐다보면서, 앞만 보고 달려 오느라 보지 못했던 것에 눈길과 마음을 둘 수는 있을 것이다. 작은 마음들이라 할찌라도 합쳐져서 점점 커지면 그 때에는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가족을 잃어 슬픔에 잠긴 분들께 함께 아픈 마음을 전합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에른스트 슈마허 지음/ 이상호 옮김/ 문예출판사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  (1911~1977)

슈마허는 독일에서 태어나 1930년 로드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영국 옥스퍼드 뉴탈리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스물두 살 때부터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을 강의했다.

 

실제 경험이 없는 이론화에 불만을 느낀 그는 여러 분야에 진출하여 기업가, 언론인, 경제학자로 알려졌으며, 전쟁중에는 옥스퍼드에서 잠시 학업을 재개했다. 그는 독일의 영국 점령지역 통제위원회 경제 자문관, 영국 석탄공사 경제 자문관, 영국 토양협회 의장, 스코트바더 사의 이사를 역임했다. 그리고 개발도상국을 위해 종간 기술 개념을 창안했고 중간 기술개발집단을 설립하여 의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농촌 개발에 대한 그의 권고안은 수많은 개발도상국 정부로부터 주목을 받았으며 1974년에 대영제국 지도자 훈장을 받았다.

 

현대 환경 운동사에서 최초의 전체주의적 사상가로 평가되는 슈마허는 매우 다양한 관심사를 하나의 참조 틀 속에 버무릴 줄 아는 위대한 경제학자였다. 주요 저서에 <혼돈으로부터의 도피> <좋은 작업> <경제 성장의 근원>등이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본래 몇 해 동안 걸쳐 썼던 수필과 강연문을 조금씩 수정해서 묶어 놓은 책이다. 그래서 다양한 부면에 대한 그의 관심을 잘 보여준다.

 

 

1부 <근대 세계>

근대 경제학의 문제점을 제시하면서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탐욕과 이기심에 토대를 둔 경제성장은 영속적인 생활방식을 보장하지 못한다. 대체불가능한 자원이 소진되면 더 이상의 성장은 불가능해 진다. 대안은 인간중심의 경제이다. 

 

2부 <자원>

가장 중요한 자원은 교육과 토지이다. 진정한 교육의 핵심은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근본적인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토지는 단순한 자원이 아니다. 인간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러므로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농업은 산업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기때문에 특별히 취급해야 한다.  

 

원자력을 자원으로 사용하는 것은 환경과 생태계에 영향을 미쳐 인류의 존속에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대량생산기술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자원을 낭비하며 인간을 기계의 노예로 만들며 인간에게서 기쁨을 주는 노동을 최소화함으로 인성을 망쳐놓는다. 그러므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이 필요하다. 인간에게 노동의 기쁨과 창조적 활동의 기회를 제공하는 기술, 인간에게 유용하도록 고안된 기술이 필요하다. 기술이 인간을 파괴하는 대신에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3부 <제3세계>

개발도상국의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대도시 위주의 개발 보다는 지역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즉 2백만촌락에 거주하는 20억 농민을 도와야 한다. 그들을 돕기 위해서는 중간기술의 개발이 필요하다. 

 

선진국의 기술, 인간노동이 필요없는 자동화 기술과 같은 첨단 기술은 제3세계의 빈곤문제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첨단기술과 전통기술 사이에 있는 중간기술은 일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줄 수 있으며, 이것이 제3세계의 빈곤문제를 해결할 기술이 된다.

 

4부 <조직과 소유권>

모든 조직은 질서의 정연함과 창조적 자유의 무질서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대규모 조직은 이러한 추구를 어렵게 만든다. 그러므로 조직을 소규모로 유지하는 것이 더 좋다.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사회주의적 관점을 도입해야 한다.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 소유와 노동의 관계가 희박해진다. 일하지 않는 소유자가 높은 이윤을 독점하는 것은 불공정하다. 이윤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조직구성원들에게 분배되어야 하고, 재투자되는 부는 원소유자의 개인의 부로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소유되는 자본으로 귀속되어야 한다.

 

현재 대기업의 소유구조에 따르면 대기업의 이윤은 공공의 복지에 기여하기보다는 개인 소유자에게 귀속된다. 그러므로 공공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기업의 소유구조를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대기업은 세금을 내지 않고 그 대신 주식의 1/2을 공공기관의 주식지분으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대기업의 소유권의 절반을 공공화하는 대기업소유 구조를 제안한다. 

 

 

 

뉴욕타임즈 선정 100권에 선정된 프란츠 카프카의 심판

프란츠 카프카 지음/ 김현성 옮김/ 문예출판사

 

 

아침에 곤히 자고 있는데, 생면부지의 사람이 갑자기 들이닥친다. 그리고 당신이 체포되었다고 말한다. 영문을 모르는 당신은 체포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나 그 질문은 묵살되고 만다. 체포한 사람들도 윗선의 지시에 따라 행동한 것일 뿐 체포 사유를 알지 못한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당신은 일상적인 자유를 다시 얻게 된다. 예심판사를 만나 심리를 받고 소송이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당신에게는 체포된 이유가 밝혀지지 않는다. 무슨 죄로 체포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무죄임을 입증해야 한다면...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심판>의 주인공인 요제프 K가 이러한 처지에 놓여 있다. 그는 유망한 은행원이다. 그는 자신의 일상 업무를 처리하면서 동시에 소송을 준비해야 한다. 처음 체포될 때의 당황스러움은 점차 사라지고, K는 자신의 업무처리 능력을 바탕으로 소송을 잘 진척시킬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K는 변호사나 기타 여러 사람으로부터 재판 사무소 관련 사항에 대해 하나씩 알게 되면서 그는 어쩔 수 없는 무력감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K는 자신이 완전히 무죄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소가 경솔하게 제기되지는 않으며, 일단 고소를 하면 재판소에서는 피고의 죄에 대해 굳게 확신하고, 그러한 확신을 버리게 하기는 어렵다고한다. 아니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탈리아 고객에게 성당을 보여주려고 방문한 대성당에서 K는 한 신부를 만난다. 신부는 "판결은 단번에 내려지는 게 아니고, 소송절차가 진행되며 점차적으로 판결로 이어지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신부는 법률입문서에 쓰여 있는 것을 하나 이야기해 주는데, 아마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카프카가 <심판>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나타난 부분이라 생각된다.  

 

법 앞에 문지기가 서 있다. 한 시골 사람이 이 문지기에게 법 안으로 들여 보내달라고 간청한다. 문지기는 지금은 들여보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 나중에는 들어 갈 수 있느냐고 묻자, 문지기는 '그럴 수는 있지만 지금은 안 돼.'라고 대답한다. 법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항상 열려 있고 문지기는 옆으로 물러서 있기때문에 시골 사람은 몸을 구부리고 그 안을 들여다보려 한다. '그렇게 들어가고 싶거든 내가 금지하는 것을 어기고라도 들어가 보게나. 그러나 내겐 권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둬. 그리고 나는 가장 낮은 문지기에 지나지 않아. 문마다 문지기가 서 있으며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권력이 강하지. 세번째 문지기를 보면 나도 겁이 나.' 라고 문지기가 껄껄 웃으며 말한다. 

 

시골 사람은 이런 난관을 예상하지 못했었고, 누구나 언제라도 법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문지기가 입장을 허락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심한다. 문지기는 의자를 내주며 문 옆에 앉게 한다. 여러날 여러해 동안 그는 거기 앉아 있다. 시골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려고 갖은 애를 쓰고 간청을 해서 문지기는 지쳐버린다.

 

문지기는 때때로 시골 사람에게 간단한 심문을 하며, 그의 고향이나 그 밖의 여러가지를 묻는다. 그러나 그것은 높은 사람들이 괜히 해보는 것과 같은 뜻 없는 질문이고, 결국은 언제나 아직 들여보낼 수 없다고 말했다. 여행을 위해 잔뜩 준비를 해갖고 온 시골사람은 대단히 가치 있는 것까지도 모두 문지기를 매수하기 위해 써버린다. 문지기는 무엇이든 다 받기는 하되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해보지 않았다고 후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받는 것뿐일세.'

 

여러해 동안 시골 사람은 끊임없이 문지기를 지켜보았다. 다른 문지기들이 있다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시골 사람은 이 첫번째 문지기만을 법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유일한 장애물로 여긴다. 처음 몇 해 동안 시골 사람은 이 불행한 재난을 큰 소리로 저주하지만 늙어서는 그냥 혼자 투덜거린다. 그는 어린아이같이 되었고, 여러 해 동안 문지기를 관찰한 끝에 문지기의 털외투 깃에 벼룩이 있는 것을 알아채고는 문지기가 마음을 돌리도록 도와달라고 벼룩에게 애원한다.

 

마침내 그는 시력이 약해져서 주위가 정말로 어두워진 것인지 자신의 눈이 흐려진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제 암측 속에서 법의 문들을 꿰뚫고 영원불멸의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인지한다. 이제 그는 오래 살지 못한다. 죽음을 앞둔 그의 머리 속에서 지난 세월 동안의 모든 경험이 한 가지 질문으로 집약된다. 그것은 이제까지 문지기에게 물어 본 적이 없는 질문이다. 굳어진 몸을 일으킬 기력도 없어 시골 사람은 문지기에게 눈짓을 한다. 서로 키다 다르기때문에 문지기는 허리를 깊숙이 구부리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이제 또 무엇을 알고 싶은 거지? 당신은 지치지도 않는군.' 문지기가 묻는다. '모든 사람은 법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오랜 세월동안 나밖에는 아무도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원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이죠?' 시골사람이 묻는다. 문지기는 이미 시골사람의 최후가 가까워진 것을 깨닫고 멀어가는 그의 귀에 들릴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외친다. '이 문은 당신만을 위한 것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들어갈 수 없었어. 이젠 가서 문을 닫아야지.'

 

이 문지기와 시골사람에 대해 신부와 K는 이야기를 나눈다. 마침내 신부는 '모든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고, 단지 필연적이라고 생각해야만 합니다.'라고 말한다. K는 '비참한 의견이군요. 거짓이 세계의 질서가 되는군요.'라고 말한다. 

 

 

묘한 소설이다.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한 것이 틀림없다. 아무 잘못한 일도 없는데 어느 날 아침 그는 체포되었기때문이다.' <심판>의 첫 문장이다. 첫 말 '누군가'는 독자의 시선을 확 잡는다. 읽는 내내 누가 K를 고발했을까? 무슨 죄로 K는 체포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그러나 꾸며낸 것 같지 않은 사실. 기묘한 느낌을 준다. 소설 <심판>은 거대한 메타포인 듯 한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심판>에 나오는 사법제도와 같은 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자신이 죽을 때까지 그 죄목을 알지 못한다는 설정이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인가? 분명 카프카는 이 소설을 통해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텐데... 그것이 무엇일까? 

 

온통 들여다 볼 수 없는 음모, 비밀, 숨기는 것, 속이는 것, 보여줄 수 없는 것, 보여지지 않는 것들로 가득찬 인간 존재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권위와 절차, 기밀, 또는 숨겨야 하는 것들로 가득찬 정치, 경제, 종교등 사회 시스템에 대한 것인지... 짙게 풍겨지는 또 하나의 뉘앙스는 아마 종교나 그 종교에서 대변하는 신의 처사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아닐런지... 인간은 애초에 태어나면서부터 심판의 대상이 되었고 살아가면서 행한 죄악에 따라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기독교적 사상에 신랄한 비판을 칼날을 들이대는 것은 아닌가? 대성당에서의 문지기와 시골사람의 이야기속에 카프카가 하고 싶었던 핵심이 있는듯 한데, 그게 무엇일까? 

 

그러고 보면 카프가는 <심판>이라는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인생, 존재, 종교, 제도등의 문제에 있어 끊임없는 질문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그리고 읽고 나서도 계속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질문들이었기때문이다. 아마 오랫동안 ?가 내 머리속을 방황할 듯 하다.     

 

서양 미술사  김영숙 / 휴머니스트

 

20세기 최고의 미술가 피카소, 아흔 살이 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2천점 가까운 그림을 그렸고, 도자기 3천점 이상, 조각 1200여점, 스케치는 약 7000점을 남겼다. 잡지나 책자에 그린 삽화는 무려 3만잠을 넘는다. 그의 작품들은 늘 새로웠고 현실에 대한 고뇌와 비판의식이 담겨있었다.

 

파블로 피카소는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 눈에도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나머지 부분을 그림 속으로 다 끌어오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물들을 다 분해한 뒤 다시 붙이는 것처럼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의 <다니엘-앙리 칸바일러의 초상화>는 자잘한 면들을 잔뜩 붙어있어 수많은 정육면체들이 붙어 있는 듯하다. 이러한 그림으로부터 큐비즘 즉 입체주의라는 말이 나왔다. 

 

파블로 피카소 <다니엘-앙리 칸바일러의 초상화>, 1910년, 피카소는 친한 화상 칸바일러의 모습을 여러 면으로 분해한 다음 다시 그려 넣었다. 배경 역시 분해되어 인물과 뒤섞여 있다.  

 

파블로 피카소 <황소머리>, 1942년, 버려진 자전거 안장과 핸들을 사용하여 황소머리를 만들었다. 피카소는 이전의 화가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재료들을 사용하였다. 길거리에 널브러진 쓰레기도 좋은 작품감이었다.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추상화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바실리 칸딘스키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모스크바대학에서 법과 경제를 공부하고 교수가 되었지만 모네의 그림을 보고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독일 뮌헨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그리고 청기사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의 작품 <청기사>에 등장하는 푸른 옷을 입고 말을 달리는 기사를 보면 선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칸딘스키는 자연스러운 색과 완벽한 형태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추상적 화풍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바실리 칸딘스키 <청기사>, 1903년 

 

추상화란 말이 나오면 칸딘스키와 더불어 이야기되는 화가가 피에트 몬드리안이다. 그는 세잔의 생각을 더욱 발전시켰다. 모든 사물이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공통적인 것만 남기면 기하학적인 모양만 남는다고 생각했다. 색깔도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색만 남기면 빨강, 노랑, 파랑만 남게 된다. 몬드리안에게 추상화란 어떤 것의 가장 기본, 즉 본질이 되는 것만 남겨두고 다른 것은 다 생략해서 단순화해 그리는 것을 의미했다.

 

몬드리안이 산책을 나갔다 돌아와서 작업실의 문을 열었을 때 아주 특이한, 강렬하고 아름다운 그림 하나를 보게 되었다. 한참을 쳐다보던 그는 그것이 자신의 그림인 것을 알아채게 되었다. 그림을 거꾸로 세워놓은 탓에 알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칸딘스키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무엇을 그렸는지 모르니까 자연히 눈이 그림 속의 색깔과 선에 집중되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몬드리안의 그림을 볼 때는 무엇을 그렸는가보다는 색깔 그 자체 그리고 모양 그 자체를 보고 감상하는 것이 몬드리안을 보는 방법이다. 아래의 나무 시리즈를 보면 몬드리안의 단순화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피에트 몬드리안 <붉은나무> 1908년     <회색나무> 1911년

 

 

<꽃피는 사과 나무> 1912년                 <구성 10번>, 1912년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은 같은 추상화라도 성격이 다르다. 다음 그림을 보면 칸딘스키를 '뜨거운 추상화'라 하고, 몬드리안을 '차가운 추상화'라 하는 이유를 이해할 것이다.

 

         

(좌) 바실리 칸딘스키 <즉흥 7>, 1910년, 칸딘스키의 즉층시리즈는 즉흥적으로 손이 가는 대로, 자유자재로 그렸다. 복잡하지만 뭔가 따뜻한 느낌이 든다.

(우) 피에트 몬드리안 <구성 8> 1939~1942년, 몬드리안의 그림은 색들 간의 관계, 선과 면의 관계에 집중한다. 하얀색 사이에 있는 빨강의 느낌과 노란색 사이의 빨강의 느낌이 달라 보이고, 까만색과 닿아 있으면 다른 느낌이 드는 색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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