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성의 칼날 - 찰스 길리피스 지음/ 이필렬 옮김

 

20세기 물리학의 제2혁명을 초래한 19세기 물리학의 한계

 

19세기 물리학은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전물리학은 절정에 달했다. 당시의 대물리학자들은 뉴턴 물리학이 자연의 구조를 구석구석까지 아우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광입자의 복사와 운동, 원자와 분자들 사이의 화학 결합, 전기, 자기, 열현상에서의 에너지 흐름과 교환등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이 역시 고전물리학으로 그 원리가 밝혀질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다. 

 

단지 소수의 철학자들만이 그 기초의 문제에 대해 번민했을 뿐이었다. 20세기에 물리학에서 혁명이 일어나리라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고전 물리학이 사물의 형상과 완전히 부합하지 못한 점이 있었기에 필연적이었다. 19세기 물리학은 두가지 결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뉴턴의 공간 개념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입자론적 기계론에 관련된 것이었다.

 

공간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의 운동은 물체에 내재해 있는 본질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무거운 물체가 떨어지는 것은 아래로 향하는 본질때문이며, 가벼운 물체가 위로 뜨는 것은 그러한 본질이 그 속에 있기때문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 플라

그림)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학당의 일부- 플라톤(왼쪽)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천상에 있는 이데아세계를 설파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오른쪽)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지상 현실세계에 관심을 가져야 함을 논증하고 있다.

 

갈릴레오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철학적 설명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운동은 다른 물체와의 관계의 변화라고 보았다. 이러한 운동론은 상대 운동과 절대 운동이라는 개념으로 인도하였다. 즉 어떤 물체가 움직일 때 무엇에 대해 움직이는가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뉴턴은 공간을 모든 운동의 기준틀로 잡았고, 그것이 절대적인 좌표계라고 보았다. 뉴턴은 그 좌표계안에서 모든 운동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

그림) 갈릴레오(왼쪽) 피사의 사탑에서 실험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른쪽)

 

반면에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절대 공간에 반대하였다. 공간은 실체가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들간의 관계라고 보았다. 진공은 아무 것도 없는 무 자체였다. 예를 들어 라이프니츠의 공간에 어떤 물체가 하나 있다면, 그 물체의 운동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냥 정지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비교할만한 대상이 없기때문이다. 이렇듯 공간상의 물체의 운동은 다른 물체와의 상대적 관계하에서만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공간 개념이었다.  

 

표준모형_세상의 기초         DNA 정보 저장 왜 3진

그림) 뉴턴(좌)         ,                                        라이프니츠(우) 

두사람은 누가 먼저 미적분을 발견했는가의 문제로 격렬한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뉴턴의 절대 공간 개념은 사물의 형상을 올바로 반영한 것이 아니었다. 아인쉬타인은 상대성이론을 통해 공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공간은 시간과 결합하여 시공간을 형성하며, 수축되기도 하며, 늘어나기도 하고, 심지어는 구부러지거나 휘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20세기의 물리학은 19세기 물리학의 결함을 보완하게 되었다.

 

광전효과의 발견 - 알      키즈 사이언스 - 우주 

왼쪽 사진)아인쉬타인의 젊은 모습 - 광전효과의 발견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특수상대성원리와 일반상대성원리로는 노벨상을 타지 못했다.  

오른쪽 그림) 일반상대성원리: 중력에 의해 휘어진 공간의 모습을 그래픽으로 볼 수 있다. 중력이 무한대로 강해지면 블랙홀이 된다. 중력에 의한 공간의 휘어짐은 1919년 아서 에딩턴경의 관측에 의해 증명되었다.

 

기계론

19세기 물리학은 많은 물리학적 현상들을 입자의 운동과 충돌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간상에서 중력이 전달되는 현상이나, 전자기론에서 다루던 장의 현상 - 빛의 파동적 특성과 전자기 유도현상등은 그러한 역학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간에서 이러한 힘을 전달하는 매체를 가정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19세기 물리학은 에테르라는 실체가 공간을 채우고 있어, 공간상의 현상의 전파를 위한 매질의 역할을 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20세기 상대성이론은 에테르의 필요성을 제거해 버림으로, 에테르는 상대성 이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물리학은 또한 자연의 통일성, 즉 물질과 에너지의 상호관계를 이해해야만 했다. 19세기 물리학은 힘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그 힘을 전달하는 유체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유체는 실체로서, 연장(공간상의 일정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보존법칙을 따른다는 점에서 수학적으로 취급할 수 있었다. 이 유체는 열을 전달하는 열소로서 칼로릭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이 칼로릭의 문제를 연구하는데서 열역학이 출발하게 되었다. 이 열역학은 에너지학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열역학 제1법칙(에너지보존의 법칙)과 제2법칙(엔트로피의 법칙)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칼로릭 개념은 에너지와 엔트로피라는 개념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제 2 열역학 법칙....

그림) 에너지보존의 법칙 - 우주에 있는 전체 에너지는 언제나 동일하다. 늘어나지도 줄지도 않는다.

엔트로피의 법칙 -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체 우주의 무질서도는 높아져 간다.

 

기계론으로 자연과 그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던 에테르나 칼로릭은 상대성 이론과 에너지학이라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졌다. 이들은 20세기 물리학의 혁명을 초래한 19세기 물리학의 결함이었던 것이다.  

 

과학이 지닌 객관성의 칼날은 여지없이 비객관적인 요소들을 잘라버렸다고나 할까? 그러나 형이상학은 언제나 과학의 곁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으며, 어떨 때는 과학에 영감을 주기도 한다. 객관성의 칼날이 얼마나 예리하든지 간에 형이상학적 특성을 완전히 도려내지는 못할 듯 하다.

에테르와 빛의 속도에 대하여

빛의 속도가 매질의 밀도에 따라 달라진다면, 진공속에서의 빛의 속도보다 빨라 질 수 있는 매질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진공은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꽉 차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양전자의 개념을 발생시킨 것이라면, 그렇다면 양전자로 가득찬 공간을 빛이 이동할 때의 속도는 과연 어떠할 것인가? 음전자로 가득찬 진공과 양전자로 가득찬 공간은 어떻게 다를까?

 

여기에서 에테르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싶어진다. 에테르는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빛이 매질없이 전진한다는 것은 다소 믿기가 힘들다. 물론 빛이 입자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하지만 다시 한번 에테르를 꺼내 들고 논의하는 것은 어떤가? 진공이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공간이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으로 차 있다는 말인데,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음전자이든 양전자이든, 아니면 힉스장이나 그와 같은 것이든 간에 그 무엇을 에테르라고 가정하는 것은 어떤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종류의 에테르가 없는 공간을 지나는 빛의 속도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엔트로피와 우주 팽창에 관하여

시간의 흐름은 엔트로피의 증가를 가져 온다. 그 이유는 우주가 팽창하고 있기때문이다. 더 넓어지는 공간에서 입자들은 더 많은 배열을 가질 가능성이 증가하기때문이다. 이는 무질서의 도가 증가하는 것 즉 엔트로피의 증가를 가져온다.

 

하지만 우주가 수축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입자들이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 좁아지고 이는 결국 배열의 경우의 수가 줄어드는 현상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즉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다.

 

고도의 질서를 향해 가는 흐름은 엔트로피의 감소와 관련이 있으며, 이는 활동공간의 협소화와 관련이 될 듯하다. 국지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한 부분의 협소화는 외부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도의 질서를 향해 가는 내부의 엔트로피의 감소는 그 외부의 엔트로피 증가와 완전한 등가를 이루는가? 그렇다면 전체적으로 볼 때 내부공간의 협소화로 인한 전체 엔트로피의 증가는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겠지. 다만 외부 공간의 밖으로의 팽창으로 인한 엔트로피의 증가만 있을 뿐.

 

정상상태의 우주라면 엔트로피는 항상 같은 값을 유지해야 하겠고, 팽창우주의 경우에는 엔트로피의 증가, 수축우주의 경우는 엔트로피의 감소가 시간의 흐름과 관련하여 있게 될 것이다. 단 진동우주의 경우에는 ...엔트로피의 증가와 반복도 진동하겠지.

 

우리가 사는 우주가 신의 섭리에 따른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진동하는 우주여야 할 것이다. 최초의 대폭발이후 아직 수축을 경험하진 못했지만 결국은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인플레이션 현상이 무엇에 비롯된 것인지 모르지만 그를 발생시킨 그와 유사한 종류의 힘에 의해 어느 순간 우주는 수축의 단계로 접어들지 않을까? 그리고 어는 정도 수축했을 때 다시 팽창하는 반복적인 움직임은 생성된 우주가 그 속에 생명체를 지니고 영원히 지속될 수 있게 할 것이다.

 

본질과 현상

자연은 우리에게 본질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단지 현상에 대해서만 반응한다. 그 속에서 본질을 찾으려는 노력없이는 다만 현상만을 관찰할 뿐이다. "자연을 노하게 하면, 자연은 자신의 본성을 보여준다"라는 말은 자연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자연상태가 아닌 실험적 상황에서의 연구가 필요함을 일깨워 준다. 하지만 인위적 상황에서의 관찰역시 우리의 인식감각과 관련이 있지 않은가? 어느정도 깊이 들어가야만 현상이 아닌 본질에 도달하는 것일까? 우리의 감각기관으로는 결코 본질에 도달할 수 없으며 단지 이성에 의해서만 본질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감각은 현상을 인식하고, 이성은 본질을 인식한다? 우리의 이성이 감각적인 경험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면 이성도 결코 그 본질을 꿰뚫는 도구가 될 수 없는 것이련지...

 

물질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 중 가장 최근의 견해이며 가장 신비주의적인 견해는 물질의 본질은 비물질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물질과 구조로 형성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물질은 사라지고 남은 구조만이 물질의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과학자도 있다. 구조를 이루는 수학, 법칙이 물질의 본성이라고 하니. 신피타고라스파라 할만도 하다. 더 나아가 물질의 본성은 정보라고 보는 물리학자도 있다고 한다. 현대물리학은 과학을 넘어 고대 그리스의 철학으로 다시 회귀하고 있는 것 같다. 이성적이며 합리적이라 간주될 만한 추론등을 물리적 현실로 본는 것이 그렇다. 경험주의 실험주의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인 논의로 현대 물리학은 점점 깊숙이 빠져들고 있다. 과학은 더 이상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는 논리적 믿음체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없다. 불가지론, 회의주의가 판을 칠 멍석이 깔려지고 있다.  

 

 

<그래비티>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우주에서 조난당한 우주인이 우여곡절을 거쳐 지구로 귀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D기술로 볼만한 영상을 만들어 낸다. 날카로운 파편이 내 눈앞으로 휙 날라올 때,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며 피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3D 영화를 처음보는 촌놈이라 그런가? 슬쩍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볼 뻔 했다. 

 

 

그리고 스필버그식 긴장감도 한 몫을 했다. 우주정거장에 부딪쳐 튕겨나갈 때, 무엇이라도 잡지 않으면 그냥 암흑 우주속으로 빠져버릴 상황이다. 손을 뻗혀보지만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뒤로는 시커먼 하늘에 점점히 박혀있는 별빛들만 냉정하게 비치고, 그 무서운 무저갱속으로 빨려들 것만 같은 느낌, 놓치고, 또 놓치고 아! 놓치면 끝장인데 하는 순간 간신히 손에 걸린다. 제발...꽉 쥐어라 하는 똥줄타는 느낌...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래비티>를 보면서 <쇼생크탈출>이 생각난 것은 왜일까? 소유즈호에 타고서 휴스턴과 교신을 시도하는 라이언(산드라 블럭). 하지만 휴스턴에서 응답이 없고, 누군가와 교신이 되었지만, 혼선이 된 듯하다. 알지 못할 말로 지껄이는 소리,개가 짖는 소리, 아이 우는 소리, 바로 지구에서 들려오는 일상적인 소리를 듣고 있는 라이언, 그녀는 지난 시간동안 일상의 행복을 놓치고 있었음을 알아챈다. 딸애가 불의의 사고로 죽은 후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삶의 행복을 잃었던 것이다. 이제 이 고립무원의 절망속에서, 그리움이 아이의 울음속에 전해지고 있다. 이제는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것인가? 이별인가?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한채 편안히 눈을 감는데, 주파수가 맞지 않은 일상 소음들이 배경음악처럼 흐른다. 이 장면, 뭔가 퍼뜩 떠 오른다. 쇼생크탈출의 한 장면이! 교도소 방송실에 들어간 주인공(팀 로빈스)이 문을 잠근 채 피가로의 결혼을 전축위에 올려놓고, 몸을 뒤로 쭉 젓히고 두 손은 뒷머리를 편히 받히고 두 발은 책상위에 올려 놓은 채, 편하게 의자에 기대 앉아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다. 교도소 운동장엔 스피커로 '저녁바람 부드럽게'가 아름답게 울려퍼진다. 

 

 

 

 

 

라이언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아름다움, 저 아래 땅에서의 일상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다시 가질 수 없는 그것이 그리운 것이다. 그녀는 비몽 사몽간에 다시 돌아갈 방법를 알게된다. 그녀에게 지상으로 탈출할 길이 열렸던 것이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중국의 우주정거장으로 돌진한다. 지구 대기권으로 떨어지는 우주정거장에 가까스레 탑승한 그녀는 모든 것을 도킹 해제하고 지구로 떨어진다. 불타는 불덩어리, 우주정거장의 파편은 대기속에 불꽃으로 사라지고, 그녀가 탄 귀환선속의 기계들도 곧 폭발할듯이 몸부림친다.

 

 

그녀는 깊은 호수속에 잠긴다. 찰랑거리는 빛이 눈부시게 비쳐들어오는 수면을 향해 올라가는 그녀. 수면으로 솟구쳐 오르면서 깊은 숨을 쉰다. 그녀는 생존하여 돌아온 것이다. 해변 모래에 온 몸으로 기댄채 엎드려 갈색 모래를 주먹에 쥐면서 그녀는 무엇을 느꼈을까? 쇼생크 탈출의 탐 로빈슨은 온통 비를 맞으며 하늘을 향한 채,얻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자유를 벅차게 느낀다. 그녀는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방식으로 대기를, 그리고 빛을, 그리고 자연을, 그리고 생명을 느낀다. 벅찬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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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성의 칼날: 찰스 길리피스 지음/ 이필렬 옮김/ 새물결 출판사

 

 

스필버그가 제작한 영화 <쥐라기공원>에서는 호박속에 화석으로 남은 모기의 피로부터 공룡의 DNA를 채취하여 공룡을 복원시킨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쥐라기'라는 말은 지질학에 나오는 표현이다. 지구의 장구한 역사를 구분할 때 지질시대로 구분한다. 지질 시대는 선캄브리아기,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로 나누는데, 공룡들이 지구상에 활보했던 시기는 중생대이다. 이 중생대는 트라이아스기, 쥐라기, 백악기로 나뉜다. 공룡은 트라이아스기에 출현하여 쥐라기에 번성하였고, 백악기에 멸종된었다.

 

 

19세기에 시작된 지질학은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 지질시대를 일컫는 명칭, 캄브리아기 그리고 석탄기, 데본기, 쥐라기, 백악기등의 명칭은 어떻게 지어졌는가? 지질학은 생물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독일의 광산학교의 광물학 교수였던 아브라함 고틀로프 베르너(1749~1817)는 어떻게 다양한 암석들이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을 내놓았다. 모든 암석들은 지구 전체를 덮고 있던 원시 해양의 침전물로부터 생성되었다. 이를 베르너설 또는 수성론이라고 부른다. .

 

 

제임스 허튼(1726~1797)은 화성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저술 <지구의 이론>에 의하면, 과거의 사건은 현재도 작용하고 있는 과정으로부터의 귀납적 유추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으며, 암석이 나타내는 증거에 의해서만 기술될 수 있었다. 지각은 화성 작용에 의한 것과 수성작용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수성작용에 의해 침전된 퇴적층은 지구 중심의 고압 고열의 작용에 의해 단단한 암석으로 변화되었으며 그 팽창력은 해저에서 대륙을 융기시켰다.

 

이후 다양한 지층이 발견되면서, 이 지층들 사이에 체계를 세우는데 고생물학의 화석이 열쇠를 제공하였다. 영국의 무명 측량기사 윌리엄 스미스(1769~1839)는 1791년 특정 종의 화석은 특정 그룹의 지층들에만 존재하고, 다른 지층에는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 사실을 이용하여 주요한 암석계를 확정하는 방법을 고안했으며, 1815년 <잉글랜드 및 웨일즈의 지층의 개요>에서 고생물학적 지표를 이용하여 지층을 분석하였다.  

 

 

지층의 이름을 짓는데는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방법 즉 석탄이 발견된 지층을 석탄기, 백악이 발견된 지층을 백악기로 부르는 경우와, 데본기, 쥐라기, 페름기처럼 그 지층이 처음 발견된 지방의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 1820년대에 로드릭 머치슨(1792~18710)이 실루리아기를 발견하였고, 에덤 세지위크(1785~1873)이 조수로 데리고 간 그의 학생 찰스 다윈과 함께 캄브리아기 지층을 발견했다.

 

 

1830년경에 찰스 라이엘(1797~1875)의 <지질학 원리>가 출판되면서 지질학은 이전의 아마추어적인 면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지질학 원리>는 지질학이 참된 과학으로 발달하는 것을 방해했던 장애물을 제거하였다. 즉 현존하는 질서와는 다른 질서에 의하여 지구가 형성되었다고 하는 비학문적 전제를 제거했던 것이었다. <지질학 원리>에  의하면 시간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현재 작용하고 있는 힘에다가도 충분한 시간만 주게 되면, 인간의 거처인 지구에 관찰 가능한 변화가 초래된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변화가 균일하며 시간 속에서 주기적으로 진행된다고 주장했다. 

 

 

지질학자들은 고생물학적 지표와 화석 형태의 연속을 가지고 지구의 연대를 수립하였다. 반면에 생물학자들은 지질학적 시대 구분을 십분 활용할 수 있었다. 라이엘이 종의 변이에 대해 단호한 반대를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증거를 확인하지도 않고 종의 변화를 인정하는 것은 균일설의 이론에 반하는 것이었기때문이다) <지질학 원리>를 면밀하게 연구했던 다윈은 이 책의 영감을 받아 획기적 과학적 관점을 갖게 되었다. 

 

객관성의 칼날 : 찰스 길리피스 지음/ 이필렬 옮김 / 새물결 출판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고생물들은 어떤 원리로 복원이 되었을까? 퀴비에가 그 대답을 해 준다.

 

조르주 퀴비에(1769~1832)는 라마르크(1744~1829)와 동시대를 살았던 박물학자이자 프랑스의 과학 행정가이었다. 퀴비에와 라마르크의 주요 업적은 박물관의 멋진 수집품을 배열하는 방법을 수립하고 출판한 것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천동설의 프톨레마이오스와 지동설의 코페르니쿠스가 달랐던 것처럼 라마르크와 퀴비에도 서로 달랐다. 라마르크는 과학적이라기 보다는 철학적이었으며, 그의 생물철학은 자연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각 생물종은 영화의 한 순간 장면과 같은 것으로 다른 장면들 즉 다른 생물종과의 연속적인 흐름 상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퀴비에는 라마르크와 반대편에 서 있었다. 그는 라마르크와는 달리 철학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퀴비에는 생물종 사이에는 뛰어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하며,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즉 각 생물종은 불연속군을 이룬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오늘날 자연사 박물관에 가보면 거대한 공룡의 골격을 볼 수 있다. 고생물의 화석을 발견할 때는 대부분 불완전한 모습으로 발견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완전한 형태의 공룡들을 다시 조립할 수 있는가? 어떨 땐 아주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수백개의 뼈들이 흐트러진 채 발견되었는데, 그 뼈들이 20종에 달하는 동물들의 뼈라면 어떨까? 하나 하나의 뼈에 대해 그것이 어떤 동물의 것이었는지를 정해야만 하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여기에서 퀴비에의 분류학적 방법이 빛난다. 고대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의 겉모습을 보고 분류하였지만, 퀴비에는 더 나아가 비교해부학이라는 방법으로 접근했다. 퀴비에는 커다란 업적이 바로 이 비교해부학에 있는 것이다. 부분들의 상호관계성 원리와 비교해부학의 결합은 불가능하게 보였던 그러한 조립을 가능하게 하였다.

 

동물의 한 부분으로부터 그 동물 전체를 추정한다. 다시 말하면 유기체 내부의 형태들은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각 생물은 종합체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독특한 폐쇄체계이고 어느 부분이나 서로 대응하며, 상호 작용을 통하여 공동으로 일정한 활동을 한다. 만약 어떤 동물의 내장이 신선한 고기만을 소화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면 그 동물의 턱은 포획물을 잡아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하고, 그 발톱은 움켜쥐고 잡아 찢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그 동물의 전 체계는 추적하고 포획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하에 고생물학이 수립되었다. 사멸된 종, 화석만이 남아 있는 그 생물들을 다시 복원하여 박물관에 멋있게 전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번역의 탄생 / 이희재 지음/ 교양인 출판사

 

뉴욕타임지 선정 100권의 고전을 몇 권 읽고서 이 책들은 참 어렵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다루고 있는 주제 자체가 어려운 까닭도 있었지만, 때로는 번역이 난해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번역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의 탄생>은 20여년간 전문 번역가로 활동한 이희재씨가 실제 경험을 토대로 현장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담아낸 역작이다. 예전에 읽어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고전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 도와주었다. 이 책은 <번역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신선한 답을 던져 줄 것이다. 왜 '번역은 또 하나의 창작'이라고 그럴까? 훌륭한 번역이란 어떤 것일까?   

 

번역의 탄생

 

번역이란 단지 외국어와 한국어의 일대일의 대응이 되어서는 안된다. 원문에 얽매인 번역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원어와 한국어 사이에는 커다란 틈이 있기때문이다. 이러한 틈을 메워주는 역할이 번역자에게 달려 있다. 번역자는 독자가 원문의 의도를 쉽게 느끼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번역의 탄생>은 번역 기술을 다루고 있다. 수동태는 능동태로 바꾸어 준다든지, 불필요한 주어는 과감하게 없애준다든지 하는 등의 기법 말이다. 하지만 좋은 번역은 단순히 기법의 문제가 아니다. 더 중요한 점은 우리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말에는 외국어와는 다른 특별한 개성이 있다. 한국어는 프랑스어나 영어에 비해 훨씬 동적이며 구체성이 강하다. 영어는 명사와 형용사를 중시하지만 한국어에는 동사나 부사가 잘 발달해 있다. 그래서 이러한 한국어만의 특징을 살려 표현할 때 독자들에게 더욱 쉽게 다가갈 수 있다. 

 

<번역의 탄생>을 읽으면서 얻게된 또 하나의 소득은 글을 잘 쓰는 방법에 생각할 점을 많이 던져준다는 것이다. 간결한 문장을 쓰는 비결- '군살을 뺄 수록 아름답다'. 아름답고도 정겨운 표현 - '느낌이 사는 토박이 말'. 이제껏 내가 썼던 글은 번역체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자연스럽게, 쉽게, 간명하게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할 지 이제까지와는 다른 차원에서 생각하게 되었다. 번역에 관심이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글을 잘 쓰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말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또한 이 책은 장차 이루어야 할 중대한 과제를 던져준다. 우리말을 사랑하고 발전시킬 책임과 특권은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번역자들은 이 일을 위해 일선에 서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전은 한 언어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어디에 내 놓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사전, 아름다운 우리말을 지키는 사전, 우리의 삶이고스라히 담긴 사전이 아직 없다는 것이 슬프다. 이런 사전을 만드는 것은 시대의 과제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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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성의 칼날: 찰스길리피스 지음/ 이필렬 옮김

 

라마르크의 진화사상과 그 의의

 

숲 속에서는 어디를 보나 다양한 생물들이 우글거린다. 땅 속에, 풀 밑에도, 심지어 시냇물 속에도 생명은 다양한 모습으로 꿈틀거린다. 생명의 세계의 이 풍부한 다양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라마르크 이전에는 생물들이 신의 무한한 배려로 그 환경과 목적에 맞도록 설계되고 창조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다른 설명이 가능할 것인가?  만일 생물이 어떤 목적에 맞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면 적응이란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자연신학적 설명을 대신할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사람이 장 밥티스트 드 라마르크(1744~1829)였다.  

 

 

 

라마르크는 다윈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진화론 사상을 주장하였다. 그의 진화원리는 다윈과는 아주 다른 것으로 객관적 과학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생물 철학이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에 근거해 있는 반면에 라마르크는 용불용설과 획득 형질의 유전을 주장하였다. 그는 어떤 생각으로 이런 주장을 하게 되었을까? 

 

라마르크는 한 종류의 광물이 환경의 작용에 의해 다른 종류의 광물로 변한다는 사실로 부터, 광물에는 항구적인 종이 없는다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생물계에 적용시켜 생물종도 환경의 영향아래 다른 종으로 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물종이란 고정된 것이라는 당시의 견해와는 다르게 라마르크에 있어 종이란 생명의 흐름 속에 나타나는 하나의 형태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인해 생물이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는가? 라마르크의 철학에 의하면 생물에 영향을 미치는 두가지 요인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생물에 내재해 있는 힘이며, 둘째는 물리적 환경의 영향이다. 그리고 생물과 무생물(환경)의 투쟁의 결과로 다양한 종이 발생한다. 생명의 힘은 생물이 끊임없이 복잡한 형태로 변하도록 작용을 한다. 그리고 물리적 환경의 영향은 이 자연스러운 연속적 변화를 깨뜨리고 불연속을 초래한다. 이 불연속으로 인해 종사이의 간극이 나타난다.

 

환경의 변화는 요구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요구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를 낳는다. 행동의 변화는 새로운 습관이 되고 특수한 기관을 변화시켜 마침내 생물체 일반을 바뀌놓게 된다. 그는 두가지 법칙을 끌어낸다. 즉 기관은 사용 여부에 따라 발달하거나 퇴화한다는 것, 그리고 환경에 대한 반응으로 획득한 형질은 유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획득 형질의 유전은 옳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마르크는 생물학의 연구 방향에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 당시에는 현재 보이는 자연의 모습만을 연구하고 있었던 반면에 라마르크는 보다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자연의 추이, 즉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의 변화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던 것이다. 즉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떻게 생물이 변화되어 왔는가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를 개척하였던 것이다. 라마르크의 생물학은 객관적 과학으로 편입되지는 못했지만 생물학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함으로 다윈을 위한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위 내용은 객관성의 칼날의 일부분을 요약한 것으로 본인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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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종건 옮김/ 생각의 나무

 

율리시스

 

뉴욕타임지 선정 100권중의 하나. 율리시스는 20세기 문학의 이정표인 동시에, 현대 세계 소설사의 한 분수령이며,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와 함께 가장 혁신적이며 창의적인 노력을 대표하는 수작이다. 오늘날 이 작품은 20세기 최대의 문제작인 동시에 최고의 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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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1904년 6월 16일 하루동안 레오폴드 블룸과 스티븐 데덜러스에게 일어난 일들을 중심으로 사건들이 전개된다. 스티븐은 초등학교에서 시와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의 일을 그만두고 예술가의 삶을 꿈꾸는 젊은이이다. 그리고 레오폴드 불룸은 신문사의 광고 영업원이다. 블룸은 아침에 친구 디그넘의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나가면서 우연히 아내 몰리가 그 날 오후 다른 남자와의 밀회 약속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블룸은 스티븐과 여러번 이리 저리 엇갈리면서 더블린 시를 방랑하다가 그날 저녁 늦게 홍등가에서 낭패에 처한 스티븐을 도와준다. 그리고 밤 늦게 스티븐을 데리고 집으로 귀환한다. 다음날 새벽까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스티븐은, 자고 가라는 제의를 거절하고 떠나가고 블룸은 밀회의 흔적이 있는 아내의 발치 침대에 거꾸로 누워 잠이든다. 언뜻 잠이 깬 몰리는 젊은 시절의 추억들로부터 현재에까지 이르는 장황한 회상에 잠긴다. 

 

<율리시스>의 배경이 되는 그 날 1904년 6월16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블룸즈데이(Bloomsday)'로 알려져 있다. '율리시스'는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라틴식 이름이다. 오디세우스는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리스 장군이다. 그는 아내 페넬로페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귀환하는 도중 수많은 난관들을 극복해야만 하였다. 블룸도 하루종일 더블린 시를 방황하여 결국 아내 몰리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이 작품에서 오디세우스는 블룸에, 몰리는 페넬로페에, 그리고 스티븐은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에 상응하는 구도로 나타난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어 보인다. 

이 책을 이해하면서 읽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읽기는 하나 무엇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한마디로 난해하다. 이 책이 미국에서 외설 시비에 휘말렸을 때 이를 변호하던 변호사는 이 책의 불가해성을 그의 논지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텍스트의 불가해성은 몇가지 요인들에 기인한다.

첫째,  '의식의 흐름'을 표현한 그의 기법은 창의적이며 혁신적이다. 그리고 한 개인의 머리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연속적인 또는 비연속적인 생각들의 파편들은 그 생각의 주인공의 내면을 밝혀주는 귀중한 정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를 모두 논리적,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냥 그대로 읽어 나가는 것이 이 책을 즐기는 방법이 될 것이다.

 

둘째,  블룸은 알고 있지만 독자들은 알지 못하는 더블린 시의 수많은 소시민들이 사전 정보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그들의 목소리들과 의식의 흐름이 함께 섞여서 복합적으로 서술되면서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불확정성 상황이 전개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한 보조 설명을 먼저 읽고 익숙해진 후에 이 작품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아울러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을 먼저 읽고나서 <율리우스>에 도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율리우스>에 나오는 스티븐은 '젊은 에술가'인 조이스 자신의 모습이기때문이다.

 

세째, <율리우스>는 예술적 표절이 난무하는 뒤범벅 잡탕같은 느낌이 든다. 수많은 텍스트들에서 인용된 표현들, 은유들이 정신을 사납게 한다. 주석이 달린 책을 읽을 때 그런 느낌이 들 것이다. 주석이 없으면 그것이 인용인지 조이스의 표현인지를 가늠하기조차 힘들 수 있다. 가장 많이 인용 및 인유된 것은 <성서>이며, 그 밖에 그 당시 아일랜드의 문학, 가사등에서 수많은 표현들이 '표절'되었다. 어떤 비평가는 말하기를 '율리시스는 읽는 독자에게는 그 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탐구하는 독자들에게만 그 진모습을 드러낸다'라고 하였다. 

 

<율리시스>를 읽으면서 조이스의 탁월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몇가지 점들도 있다. 먼저 다방면에 대한 그의 엄청난 지식들 - 신학, 역사, 언어, 과학, 예술, 의학 - 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풍부한 상상력, 도덕적 검열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거침없는 표현력도 대단하다. 마음대로 써 내려간 듯하나, 사실은 치밀하게 계획된 상황들, 스티븐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는 이야기의 배경이 어느듯 블룸의 이야기의 전경이 되고,  이렇듯 배경과 전경이 날실과 씨실이 되어 교차하는 소설적 기법은 입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도 같은 상황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며 서술하는 방식들이 발견되는데 , 이러한 서술의 원형이 바로 <율리시스>인가?

 

결론은? 이 소설은 일반인을 위한 것은 아닌듯하다. 하지만 소설지망가들은 이 소설의 형식이나 표현등을 탐구함으로 글을 쓰는데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연구자들은 이 텍스트에서 엄청난 연구의 보고를 발견할 수 있을 듯하다. 우리 평범한 독자들은 이 대작을 한 번 읽어 봤다는 만족감에 만족해야 할 듯하다. 나 역시 이해불가한 이 책, 1300여페이지에 달하는 이 작품을 읽고, 다 읽었다는 뿌듯함을 가지고 나의 사투에 자찬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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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까치출판사  

 

좀 어렵네...

이 책을 집어들면서 '과연 역사란 무엇일까?'라고 생각과 함께, 어떻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 많은 지면에 풀어놓을까 궁금증이 들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고전으로 선정될 만한 자격이 있다하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카는 인간 이성의 힘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차 있으며, 인간의 역사는 이 이성의 힘에 의해 계속 진보해 나갈 것이라고 낙관주의적 견해를 취하고 있다. 비록 그와 반대편에 서 있는 역사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지성인들은 미래의 암울함에 비관주의 내지는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 책은 구성은 이러하다.

1. 역사가와 그의 사실

2. 사회와 개인

3. 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

4.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5. 진보로서의 역사

6. 지평서의 확대

 

이 책을 읽고 나의 머리에 정리되는 부분은 이렇다.

 

첫째 역사와 과거,

역사란 '과거에 발생했던 사실들의 모음이다' 이러한 생각이 역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모든 과거의 사실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historian)가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선택한 사실들이 역사가 되는 것이다. 역사사는 자신의 역사를 바라보는 눈에 근거하여 역사적 사실을 선택하고 이를 구성하여 역사를 기술한다.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상호작용 즉 역사적 사실과 역사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한다.

 

둘째 역사와 현재,

역사를 기술하는 역사가(historian) 개인은 사회의 산물이다. 역사가는 역사또는 사회에서 분리된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볼 수는 없다. 역사를 기술하는 역사가(historain) 자신은 현재의 상황이나, 현재의 사회, 이념등에 의해 제약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가장 객관적인 역사가가 되기 위해서는 역사가(historain) 자신이 바로 이러한 제한된 입장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전제된다.

 

세째 역사와 미래 

카는 역사를 서술하는 역사가들의 이성의 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역사를 움직이는 힘- 그 힘이 무엇이든간에- 에 긍정적이다. 역사는 순환한다는 토인비등의 주장 또는 역사란 목적지 없이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배와 같다 주장, 나아가서는 역사는 종말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주장과 같은 미래에 대한 부정적이며 비관적인 견해가 아니라, 역사는 계속 진보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진보하고 발전할 것이라는 굳은 낙관주의적 희망을 버리지 않고 견지하고 있다. 

 

흥미있는 또 다른 점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역사도 과학의 영역에 포함시켜야한다는 논의가 눈에 띄인다. 그는 역사학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역사학이 과학이 수준에까지 이르렀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또한 역사에서의 우연의 역할에 대한 당황스러움이 배여나온다. 그는 기본적으로 역사적 사건들의 인과관계는 역사가의 이성에 의해 판단될 수 있는 것이란 인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때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또는 납득하기 어려운 우연의 요소들이 역사에 미치는 역할에 대해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이러한 우연의 요소는 인과관계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기때문이다. 

 

그는 공산화된 소련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듯...그래서 '소련사'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는데... 당연히 마르크스와 레닌에 대한 언급이 많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예언자적 역할에 심정적 동조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사망할 당시까지도 서방세계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자본주의가 영향을 미치지 않던 지역 또는 자본주의가 영향을 미치기 막 시작했던 지역에서 그러한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의 예상과는 판이하다. 그리고 그의 사망 후 구 소련의 몰락등은 사회주의나 혁명에 의한 진보의 개념이 현실과는 맞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생각의 저변을 넓혀준다는 면에서 이 책을 추천할 만하다. 서울대에서는 이 책을 필독서로 지정하였었는데,  균형을 잡기위해서라도 카와는 의견을 달리하는 역사철학서도 함께 필독서로 지정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 진보진영에서는 한국 근대화는 한 인물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 시대의 부름이었으며, 그 시대의 소산물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시대를 바꾸는 것은 민중의 힘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러한 힘을 집결시키고 분출시키는 역할을 하는 지렛대와 같은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다는 면에서, 한 개인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카의 인과론에 근거한 역사관은 우연의 요소나 한 개인의 영웅적 역할에 대해서는 다소 중요성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 근거해 볼 때, 진보진영의 그와 같은 논리는 카의 역사의식과 닿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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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을유 출판사

 

뉴욕 타임지 선정 100권중 하나인 토마스 만의 <마의 산>.

 

한스 카스토르프는 사촌 요아힘을 방문한다. 요아힘은 스위스 알프스산에 있는 국제요양원 베르크호프에 있다. 해발 3000미터의 고산지대의 신선한 공기와 풍광은 결핵 치료에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3주간의 방문은 예상치도 못한 일때문에 길어진다. 근 7년간을 한스는 베르크호프에 머물게 된다. 한스도 결핵에 걸린 것으로 판명이 난 때문이다. 이 7년간 국제 요양원에서 겪었던 다사다난했던 일들의 기록이 <마의 산>의 내용이다.

 

한스는 20대 초중반을 베르크호프에서 보내면서 정신적을 성숙해진다. 요양원 특유의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분위기가 그로 하여금 죽음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쇼샤부인과의 만남과 사랑. 문필가이자 인문주의자인 세템브리니의 영향- 세템브리니는 한스에게 애정을 가지고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려고 무던히 노력한다. 세템브리니는 민주주의, 인간의 자유, 존엄성에 대한 가치를 크게 평가한다. 그리고 인류의 진보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한편 이후에 알게 된 예수회 수도사 출신인 나프타는 세템브리니와는 상반된 사상을 가지고 있다. 한스를 사이에 두고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의 논쟁은 극을 향해 치닿는다. 한스는 이 두 스승으로부터 각각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던 중 한스는 폭설이 내리던 날 명상을 위한 홀로만의 자리를 대자연의 침묵가운데서 발견하기 위해 나섰다가 길을 잃고 헤맨다. 잠깐 창고 오두막의 나무 벽에 기대어 정신을 잃은 한스는 꿈결같은 아름다운 환영에 빠진다. 깨어난 그는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의 사상과는 다른 자기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한스와의 사랑의 하룻밤을 보내고 요양원을 떠났던 클리브디아 쇼샤부인이 다시 요양원에 들어온다. 그녀는 페퍼코른이라는 네덜란드인과 함께 온다. 그는 인도네시아에서 커피왕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인물이다. 그는 말이 어눌하지만 그의 풍모에서는 왕의 카리스마가 보인다. 그리고 그의 말과 행동은 힘이 있어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만든다. 한스는 이 인물에게서 강함을 느낀다. 세템브리니나 나프타처럼 이론과 말을 앞세우는 사람과는 달리, 그는 현실적이며 행동으로 무언가를 나타내는 인물로 느껴진다. 한스는 페퍼코른을 그의 또 다른 스승으로 받아들인다.

      

세템브리니와의 격렬한 논쟁중에 모욕을 느낀 나프타는 결투를 신청하게 되고, 그 결투중에 나프타는 자신의 관자놀리에 총을 쏘아 자살을 하고 만다. 또한 쇼샤와 한스와의 관계를 알게된 페퍼코른 역시 독극물로 생을 스스로 끝내고 만다. 쇼샤와 한스와의 사랑때문에 그랬는지, 아니면 병으로 인한 초라한 죽음 대신 위엄있는 죽음을 택하려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의 왕의 카리스마로 볼 땐 후자에 가깝지 않겠는가 추측해 본다.

 

이러한 와중에 유럽은 1차세계대전의 수렁으로 빠져든다. 한스는 시대의 물결에 휩쓸려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소년병들과 함께 죽음의 전쟁터에 투입된다. 빗 속의 진흙탕속에 포탄이 터지고 주위에서 아우성과 비명소리, 피튀기는 전장에서 그는 유령처럼 넋이 나간 사람처럼, 초점잃은 눈으로 슈베르트트의 <보리수>노래를 부르며 죽음을 향해 앞으로 나아간다.

  

- 총 7장의 <마의 산>의 전반부 1~5장은 다소 평이하여 고전의 반열에 오르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나 하고 느꼈었다. 그러나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토마스 만의 해박함이 드러나며 그의 문장들은 빛나기 시작한다. 특히 6장에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와의 설전은, 내가 이해하지 못할 철학적 논쟁들로 이어진다.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느끼는 바는 있어 한 사람의 사상의 전제 즉 기초가 어떠한가에 따라 세계에 대한 인식 자체가 얼마나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정말 놓쳐서는 안될 두 장면이 있다.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영상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마력적인 묘사...이 소설 <마의 산>의 백미가 되는 눈 장면. 알프스의 깊은 산 속에 자연은 위대한 침묵을 들려준다. 대자연 앞에 경건함. 폭설이 쏟아지고, 말 그대로 주위는 온통 하얗다.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밝음 속에 압도되는 하잘 것 없는 존재. 폭설속에 정신을 잃고 꾼 아름다운 해변의 모습, 행복한 청년들과 아가씨들. 그의 몽환적인 꿈은 나의 꿈인 듯 느껴진다. 그가 그 꿈들로 깨달았던 깨달음을 망각했듯이 나도 그것을 망각한다.

 

이 소설의 결말부, 한스는 피비린내 나는 전장터에 투입된다. 한스의 모습은 유령처럼 보인다. 한스의 모습은 그 당시 세계의 모습이었으리라. 목적도 없고, 목표도 없이 허공을 떠도는 유령처럼 한스는 진흙탕을 철벅거리며, 쓰러진 소년병의 몸을 밟으며 빗속을 나아간다. 그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듯, 그의 눈은 허공을 향해 부유하고 있다. 눈의 묘사에 뒤지지 표현. 알 수 없는 깨달음, 아니 깨달음을 얻었을 것 같은. 비참함과 아우성 속의 명상, 무, 허탈, 허무. 한스의 운명에 대한 애달픔,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아스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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