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데이빗 소로우 지음/ 김성 옮김

 

두 번째다. 몇 년전 월든을 처음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지난 번에는 월든 호수 주위의 자연을 묘사한 장면에 마음이 기울었다. 월든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광경은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번에는 소로우의 생각들이 보인다. 삶에 대한 그의 생각들. 삼십이 조금 넘은 나이에 쓴 이 글 속에 인생을 달관한 듯한 태도로 쓴 글, 그것도 동양의 사상에 꽤 기울어져 있는 그의 생각들, 서양식 사고가 채 가시지 않은, 그리고 완전히 동양의 정적인 세계에 스며들지 못한 채 표현된 자연 사상들, 어렴풋이 풋내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로우의 자연사상은 생각할 여지를 많이 던져 준다.

 

편견을 버리기에 너무 늦은 경우란 없다.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나 행동 방식이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 해도 증거없이 믿어서는 안된다.

 

 

소로우는 자연과 함께 하는 무소유의 삶에 대한 편견을 버리기를 요청하고 있다. 경험해 보지도 않고 그저 오래동안 내려오던 생각에 기대어 그러한 삶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소로우는 그 자신이 스스로 그러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실증해 보이기를 원했다. 그것이 월든 호수가에서는 삶을 시작한 이유였다.

 

문명은 가옥을 개량해 왔다. 하나 거기에 사는 인간까지 똑같이 개량하는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는...망원경이나 현미경을 통해 세상을 관찰하는 것은 배울지 모르지만 육안으로 보는 법은 결코 배울 수 없다.

 

 

소로우는 현대 문명에 의문을 표시한다. 아니 더 나아가 회의를 품는다. 과연 현대 문명 속에 사는 인간들은 행복한가? 참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자선과 박애에 관해서...그의 선의는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중에 끝없이 솟아 오르는 맑은 샘물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소로우의 동양 친화적인 사상의 단면이 드러나 있다. 실제로 월든에서는 <논어>에서 여러 번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공자보다는 노자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자신이 선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면에서, 도덕경에 "천지불인天地不仁, 성인불인聖人不仁" 이라는 표현이 생각난다. 無爲무위로서의 선이 아니라 의식적인 선행에 대해서 그는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다. "무의식 중에 끝없이 솟아 오르는 맑은 샘룩과 같은" 선의는 무위적 선을 뜻하는 것일 것이다.

 

사람들은 전쟁으로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밤나무 그릇 하나만으로 족한 그 때면.

 

 

무소유의 사상이 세상에 가득하면 탐욕으로 인해 벌어지는 수많은 갈등과 전쟁이 사라질 것이라는 그의 염원을 표현한 말이다.

 

자신의 내부에서 날마다 동물성이 사멸하고 그 자리에 서서히 신성함이 자리 잡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는 인간은 행복하다. - 월든의 '더 높은 법칙' 가운데

삶이 아무리 초라하더라도 거기에서 얼굴을 돌리지 말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 가난해도 삶을 사랑하길. 구빈원에 들어가 있어도 즐겁고 가슴 뛰는 시간은 있을 것이다. 저녁 노을은 부자의 저택뿐만 아니라 양로원의 유리창도 불게 물들인다. 봄이 오면 위 집 문 앞이건 쌓인 눈이 녹아내리긴 마찬가지다. 평온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한 곳에 살아도 궁전에 있는 것과 다름없는 만족감을 누릴 것이요, 자신을 분기시키는 사상을 품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하지만 소박한 삶에 대한 동경이 그의 글에 진하게 남아 있다. 물론 그것이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일 경우에 말이다. 자연은 물질적 부가 가져다 주지 못하는 것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자연과 함께 하면서 정신적인 삶을 사는 것의 가치를 소로우는 크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소로우의 <자연사상>은 당시에는 환영받지 못했지만, 아니 누구도 거의 관심조차 갖지 않는 삶의 태도였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큰 조명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소로우는 예언자적 삶과 사상을 설파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에 더하여 자연을 아름답고 치밀하게 묘사하는 그의 글은 산문보다는 시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때가 되면 다시 한 번 더 월든을 읽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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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 지음/ 브레히트 학회/ 연극과 인간


묘한 우연이다. 마르크스의 <자본>1권을 읽고 나서 잡은 책이 '브레히트'라니. 브레히트의 사회주의적인 성향과 자본주의에 대한 경멸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도축장의 성 요한나>는 아주 직설적이다.


자본의 끊임없는 탐욕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결국 그 스스로가 탐욕의 희생자가 되는 모순. 거기에 더해 빈민 노동자들은 착취를 당하다가, 쓸모없다 싶으면 그냥 길거리에 내동댕이쳐진다. 당장 먹을 것이 없는 노동자들의 절망, 분노. 폭동을 일으키는 노동자를 사정없이 진압하는 경찰.

빈민 노동자들의 마지막 동아줄이 되려고 하는 종교의 노력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교단을 유지하기 위해 돈이 필요한 종교는 돈을 가진 자들과 타협하려 한다.

구세군  소위 요한나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자본가들은 요한나를 이용하여 사욕을 추구한다. 노동자들은 요한나에 등을 돌리고 폭력적인 방법에 호소한다.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요한나는 아무런 업적도 남기지 못한 채 죽어간다. '성 요한나'로 추앙을 받으면서.


작품의 배경이 '도축장'이란 것은 작가의 복심인 듯하다. 도축장이란 소나 돼지를 잡는 곳이지만, 상징적으로 자본이 난무하여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현장은 마치 빈민 노동자들을 도축하여 이익을 남기려는 곳과 같다는 의미인 듯하다.


다섯마리의 황소의 아이러니한 대사는 노동자들이 할 말을 대신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인간들에게 쓸모 있지 않으면 먹을 것을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청하노라. 소고기를 먹어달라고." 노동자들은 도축장의 짐승과 같은 신세인 것이다. 노동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살아 보려고 하지. 그런데 당신들에게 쓸모 있지 않아서 당신들은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아. 그래서 우리 같은 사내와 여자와 아이는 부탁하는 거요. 우리를 사가라고!"


요안나는 죽어가 면서 이렇게 말한다. "항상 그렇듯이 선함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더 이상 명예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은 그런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거죠. 그래서 천직을 받은 것처럼 나는 억압받은 사람들에게 왔어요. 그러나 결실 없는 선행을 베풀었던 거죠. 감지될 수 없는 신념만을 주었던 겁니다. 난 아무 것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요안나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폭력에 의존하지 않았던 자신의 순진성을 후회하는 말처럼 보인다. 종교적인 신념은 세상을 바꾸기기엔 역부족이다. 요안나가 그토록 기피했던 폭력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동력일지도 모른다고 요안나는 후회하는 것 같다. 이것은 아마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고무하는 말처럼 들린다.


지인이 이야기했다. 마르크스의 인간애, 휴머니즘만은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며, 우리가 들고가야할 유산이라고. 하지만 마르크스의 이론은 공산주의가 붕괴하고 자본주의가 승승장구함으로 결딴이 나 버렸다. 하지만 자본주의 역시 바늘 끝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위태하다. 세상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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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길 출판사




 

멘붕이다. 자본1-1,2를 어렵게 읽었다. 매일 조금씩 읽어서 4주만에 다 읽었다. 결말이 조금 미지근하다 생각했는데, 출판사를 검색하느라 알아보니 2권, 3-1권, 3-2권이 남아 있다. 잠깐 고민에 빠진다. 자본의 맛을 보긴 보았는데, 그럼 나머지 세 권을 어떻게 하지?


고민은 잠시 접어두고 읽은 것을 돌아보자.

1818년 독일에서 태어난 마르크스는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대학에서 교수가 되고 싶었지만 반정부 활동으로 인해 교수로 임용되지 못하고 결국 프랑스로 추방된다. 독일 대학에서는 헤겔을 배웠다면 프랑스에서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와 엥겔스를 만난다. 나중에 프랑스에서도 추방된 마르크스는 경제학의 본거지 영국에서 <자본>을 위한 기초를 놓는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완결하지 못하고 죽자,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남긴 자료를 가지고 나머지 <자본>을 완성한다.


마르크스의 저서 <자본>은 경제학을 다룬다. 영국에서 시작된 경제학은 '어떻게 하면 부를 창출할 수 있는가?' 쉽게 말하자면 '돈 버는 방법'에 관한 학문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경제학 저서 <자본>은 접근해 들어가는 방향이 다르다. 가치는 노동에서 산출된다는 고전경제학의 시각에서 보면 노동자는 부의 창출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죽도록 일을 하는' 노동자는 '지독한 가난'에 허덕이는 이상한 현상이 발견된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의 불만이 극에 달하고 이를 뒤엎으려는 혁명이 유럽을 휩쓸지만 이 모든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르크스는 혁명의 실패 요인을 분석하면서 어떻게 노동자 혁명을 완수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고 이를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가운데 '죽도록 일하는 노동자들이 왜 그토록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는지 근본부터 파고 들면서 혁명의 당위성이나 방법론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물이 그의 저서 <자본>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과학적 방법에 기대고 있다. 등가교환, 사용가치, 교환가치등의 개념에 근거하여 어떻게 잉여가치가 생성되는지 논리적으로 파고든다. 등가교환의 원리에 의하면 교환에 의해서는 잉여가치(이윤, 이익)가 생길 수 없다. 그것은 등가교환 즉 같은 가치를 가진 것들의 교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본으로 전환되는 잉여가치는 어디서 생기는가? 그것은 생산과정에서 생긴다. 자본자는 노동자에게서 노동력을 구입한다. 노동자는 돈을 받고 자신의 노동력을 판다. 자본자가 노동력을 구입할 때는 노동자가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만한 가치를 지불한다. 하루에 6시간을 일하여 자신과 가족의 생활비를 벌 수 있다면 그 6시간의 가치에 해당하는 임금을 지불하고 노동력을 구매한다. 하지만 노동력을 구매한 후 자본가가 6시간을 노동만을 요구한다면 자본가에게는 남는 것이 없다.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6시간 이상을 노동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6시간을 초과한 만큼의 노동은 잉여가치가 되어 자본가에게 돌아가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자본가들에 의한 노동자의 노동 착취라고 부른다. 결국 잉여가치는 착취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 발전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은 그 착취가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예시를 들어가며 보여준다. 노동빈민들에 대한 연민, 탐욕적인 자본가들에 대한 분노가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상황들이 연이어 서술된다. 정치적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그런 가운데서도 노동제한 연령 및 노동 시간의 제한등 여러가지 조치가 취해지고, 공장법이라는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한 시도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권력을 잡고 법을 만들고 재판을 하는 당사자들이 이미 자본가들인 이상 이런 문제가 제대로 해결될 리가 없다. 


또한 <자본>에서는 자본주의가 시작된 역사적 경위도 파고 든다. 자본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자행되었던 대규모의 사기, 강탈, 폭력적인 상황등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주의는 결국 내부의 모순으로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다. 경고가 아니라 이것은 하나의 자연 법칙처럼 어김없이 발생할 일이라고 예언을 한다. 민중에 대한 자본의 수탈이 자본주의의 성격이라면 민중에 의한 자본의 수탈은 자본주의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언.


마르크스의 예언은 과학적 기초위에 놓인 예측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예측은 지금 현재의 상황에 근거해 볼 때 실패한 것 같다. 자본주의의 붕괴보다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혁명으로 세워진 공산주의의 붕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예언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닌 듯하다. 자본의 붕괴가 미래에 발생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기다려 봐야한다. 아마도 현재 진행중인 자본의 축적이 어느 한계에 이르면 어떤 형태로든지 자본의 붕괴가 일어날 것 같기는 하다. 그 방법은 알 수 없지만 자체적인 모순이 있는한 그 모순이 극에 달할 때는 뭔가 일이 벌어지게 마련이니까.


아직 고민이다. 자본 2, 3권을 읽어야 할까? 말까?  


내가 이 책을 읽는다고 하자 한 지인은 이런 말을 하였다.

"이십대에 이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가 되겠지만, 오십대에 이 책을 읽겠다고 하는 것도 문제다."


 

 

 

 

 

 

 

ㆍ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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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더스의 개

위다 지음/ 김양미 옮김/ 김지혁 그림/ 인디고


 

 

가난한 자의 슬픔이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그려진 수작.


나이가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 예한 다스는 딸이 죽으면서 남긴 손자 넬로와 함께 산다.

또한 잔혹한 주인 밑에서 일하다 쓰러진 후 주인에게 버림을 받은 파트라슈는 할아버지의 극진한 돌봄으로 회복되어 행복한 가족의 일원이 된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 거동을 못하는 할아버지 대신 넬로는 파트라슈와 함께 우유통을 실은 초록색 수레를 끌며 우유를 배달한다. 

넬로가 간절히 소망하는 바가 있다. "안트베르펜 성당(성모 대성당)에 걸려 있는 루벤스의 그림을 보고 싶다."

돈 많은 사람만이 볼 수 있도록 천으로 항상 가려져 있는 <십자가에 올려지는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그 작품을 보고 싶다.


넬로는 아무도 모르게 자기만의 꿈- 루벤스와 같은 위대한 화가가 되는 꿈을 키워나간다. .

아무도 모른다. 다만 파트라슈만이 알 뿐,


어느날 넬로와 친하게 지내는 여자 아이 알루아의 모습을 그리다가 알루아의 아버지 코제씨에게 들킨다.

코제씨는 넬로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만 그림쟁이가 되려고 하는 넬로와 알루아가 사귀는 것을 반대한다.

그 이후 코제씨는 알루아와 넬로 사이를 억지로 떼어 놓는다. 


넬로는 아무도 모르게 헛간에서 여러 날을 공들여 목탄화를 그린다.

미술대회에서 상을 타게 되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도 벗어나고, 알루아와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온 정성을 다 쏟아 붓는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넬로는 코제씨 헛간에 불을 질렀다는 모함을 받고 마을 사람들의 차가운 냉대에 부딪히게 된다.

게다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할아버지는 숨을 거둔다. 

설상가상으로 할아버지 장례식에 몇 푼 안되는 돈을 다 써버린 넬로에게 오두막집 주인은 집세를 내지 못하면 나가라고 윽박지른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미술 대회 발표일이다.

기대를 걸었던 미술 대회에서 상을 받지 못하게 된 넬로에게는 희망이 사라졌다. 


눈이 펑펑 내리는 밤, 차가운 바람이 휭휭 부는 밤, 허기진 넬로와 파트라슈는 갈 곳이 없다.

추위보다는 내일을 가늠할 수 없는,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이 더 무섭다, 


눈길을 방황하던 중 파트라슈가 눈 속에서 거액의 돈이 들어있는 지갑을 발견한다.

코제씨의 지갑이다. 넬로는 코제씨 집을 찾아가 지갑을 돌려준다. 

그 돈이 없으면 코제씨는 파산이다. 코제씨는 눈보라치는 밤에 다시 지갑을 찾으러 나섰다는 것이다.

넬로는 늙고 힘없고 가여운 파트라슈를 알로아 집에 부탁하고는 알루아와 그녀의 엄마가 잡을 새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지갑을 찾지 못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돌아온 코제씨는 넬로가 지갑을 돌려주고 갔다는 말에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런 착한 아이를 따돌리고 모함을 했으니... 코제씨는 다음 날 넬로를 찾아 사과하고 넬로를 잘 돌봐 줄 것이라고 마음 속으로 다짐한다.


한편 알루아 집에서 몰래 빠져 나온 파트라슈는 넬로의 냄새를 더듬어 그를 찾아 성모대성당에 온다.

넬로는 차가운 성당 바닥에 쓰러져 있다. 배고픔과 추위와 낙담에 만신창이가 되어 죽어가고 있는 넬로의 눈 앞에 성당 벽에 걸린 천이 거두어지고,

달빛에 환하게 빛나고 있는 루벤스의 작품이 나타난다. 

넬로가 그토록 소망하던 하나의 꿈.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은 루벤스의 걸작 <십자가에 올려지는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가 올려다 보이는 대성당 바닥에

차갑게 숨을 거둔 넬로와 파트라슈를 발견한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냉정함에 울음을 삼켰고, 코제씨는 찢어지는 아픔을 견딜 수가 없다. 

뒤 늦게 넬로의 미술적 재능을 알게 된 유명한 화가가 넬로를 찾아 온다. 그러나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렸다.

  

이 이야기의 아름다운 슬픔 속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숨겨져 있다.  

썩어빠진 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그것이다.

"동물에게 지옥의 고통을 안겨 주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는 한 방법이었다."

이 말은 신교와 구교의 심한 대립과 갈등으로 기독교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 냉소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안트베르펜 성당의 루벤스의 그림을 가리고 있던 천은 돈의 힘으로만 걷어질 수 있다는 사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묘사한 그림 앞에서 죽어가는 넬로와 파트라슈의 모습.

그리스도가 태어났다고 믿어지는 크리스마스날 발견된 시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생각이 응결되어 있는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가난하지만 선량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온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사랑은 다 어디로 갔는가?

그리스도는 다시 죽었는가, 소년과 함께?

오늘날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잔인하게도 아름다운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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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여러 국민의 부의 성질과 원인에 대한 연구)

국부론 / 애덤 스미스/ 유인호 옮김/ 동서문화사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하면 가장 먼저 떠 오르는 어구가 있다. "보이지 않는 손". 그런데 1004페이지에 달하는 이 두꺼운 책에서는 단 한 번 그 표현이 나온다.

그는 다른 많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의 의도 속에는 전혀 없었던 목적을 추진하게 되는 셈이다. (p456)

국부론의 저변에 흐르는 사상이 바로 "보이지 않는 손"이다. 자유주의에 입각한 경제론의 핵심이 바로 "보이지 않는 손"이다.

각자가 스스로의 이익을 자유롭게 추구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경제가 발전하고 부가 축적된다는 이야기이다. 각자는 그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뿐이지만, 이로 인해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이 달성된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밀림속의 생태계의 균형과 같은 것이랄 수도 있겠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눈에 들어온 이 책을 읽으면서, 괜히 이 책을 빌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에 크게 관심도 없었거니와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라서 읽기에 난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재미있는 책도 아니다. 하지만 고전파 경제학의 시조인 스미스의 저작을 읽는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면서 가볍게 읽었다. 결과 이 책에 대한 이해도는 채 60%가 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그래 왔듯이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이 책의 구상>부분을 다시 들여다 보면서 내가 읽었던 내용이 어떤 것이었나 다시 확인하는 정도에서 그치기로 한다.


1편: 수렵민과 어로민으로 이루어진 미개한 민족에 있어서는 일할 수 있는 개인은 많든 적든 유용한 노동에 종사한다. 그러나 그러한 민족의 가난의 참상이란 비참할 정도이다. 이와 반대로 문명이 개화하여 번영하고 있는 여러 민족들은 전혀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일하는 사람에 비해 10배, 때로는 100배나 되는 노동 생산물을 소비하고 있다. 그래도 그 사회의 전체 노동 생산물이 매우 많으므로  모든 사람든 그것을 충분하게 공급받는다. 이렇게 노동 생산력이 커지게 된 원인과 노동 생산물이 그 사회의 다양한 계층과 다양한 상태의 사람들에게 자연히 분배되는 순서가 1편에서 다루어진다.


2편: 노동의 연간 공급이 충분하가 부족한가하는 것은 유용한 노동에 해마다 종사하는 사람 수와 종사하지 않는 사람 수의 비율에 좌우된다. 그리고 유용하고 생산적인 노동자의 수는 어디서나 그들을 일할 수 있게 하는 자본의 양과 그것이 사용되는 특정한 방법에 비례한다. 그러므로 제 2편은 자본의 성질과 그것이 차츰 축적되어 가는 방법,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의 차이에 따라 그것이 가동시키는 노동의 양의 차이를 다룬다.


3편: 노동의 일반적인 지도 또는 관리에 있어서 매우 다양한 정책들이 있어 왓다. 농촌의 산업을 비정상적으로 장려하는 정책도 있고, 도시의 산업을 장려하는 정책도 있었다. 모든 종류의 산업을 평등하고 공평하게 다루어 온 국민은 거의 드물이다. 이러한 정책을 도입하고 확립한 것으로 생각되는 여러 사정이 3편의 주요내용이다.


4편: 여러가지 계획들과 정책들은 사회의 전반적인 복지에 대한 영향에 대해 전혀 예견하거나 고려하지 않고 도입된 것이었다. 그래도 그런 계획은 경제학의 매우 다양한 이론을 성립시켰으며, 그 가운데 어떤 것은 도시에서 영위되는 산업의 중요성을 지니치게 크게 생각하고, 또 어떤 것은 농촌에서 영위되는 산업의 중요성을 지니체게 크게 생각했다. 그러한 이론들은 학식있는 사람들의 의견뿐만 아니라, 군주나 주구건 국가의 정치 방침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4편에서는 이런 여러가지 이론과, 그 이론들이 여러 시대와 국민들에게 미친 중요한 영향을 설명한다.


5편: 주권자 또는 공동사회가 필요로 하는 비용은 무엇인가, 또 그런 비용가운 데 어떤 것이 사회 전체의 일반적인 갹출에 의해 지불되어야 하고, 또 어떤 것이 그 사회의 특정한 구성원들의 갹출에 의해 지불되어야 하는가? 사회 전체가 부담해야 하는 비용을 사회 전체에 부담시키게 하는 데는 어떤 방법들이 있으며, 그런 방법들이 각각 가진 주요 장점과 단점은 어떤 것인가? 근대의 거의 모든 정부가 이 수입의 어떤 부분을 담보로 넣어 채무 계약을 맺게 된 이유와 원인은 무엇이며, 또 그 채무가 진정한 부, 즉 사회의 토지와 노동의 연간 생산물에 대해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점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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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즈 선정 100권 중 <서부전선 이상없다>

레마르크 지음/ 열린책들



일차세계대전, 독일과 프랑스가 대치한 최전선, 서부전선. 포격전으로 포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전장에서 학도병으로 참전한 독일 병사 파울보히머. 나이는 19세.

집에는 암으로 죽어가는 어머니, 가족은 배급품으로 근근히 목숨을 이어가고 있고, 전장에서도 병사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싸운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포탄으로 참호는 짓이겨져 평평해지고 곳곳에서 찢겨나가는 살점과 몸통들, 튀어오르는 파편들, 허뿌옇게 일어나는 포연과 먼지속에 누가 누군지도 구별할 수도 없고, 벙커에 숨을 죽이고 있는 병사들. 어떤 병사는 미쳐 날뛰고, 동료들은 그를 때려 눕힌다. 어떤 이는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으로 달려나간다. 전장에 서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그 아우성이며, 아수라장이며, 그 핏빛이며, 그 미쳐 날뛰는 포탄이며. 전쟁을 기획하는 정치가들은 모른다. 안전한 후방에서 애국심이 어떠니 저떠니 떠드는 사람은 모른다. 다만 전장에서 전우를 잃고 자신도 죽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온 몸이 얼어 붙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전쟁이란 말인가? 저 넘어 프랑스 군인들은 그들의 조국 프랑스를 위해 싸우고 있고, 이쪽 독일 군인들은 조국 독일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들도 똑 같은 사람일 뿐인데, 왜 이렇게 싸워야 하는가? 파울 보이머는 알 수가 없다. 그런 가운데 함께 했던 전우들은 하나 둘 죽어간다. 가장 절친한 전우였던 카친스키마저 죽는다. 곧 전쟁이 끝날 것이란 말이 들리는데, 그 새를 못 참아서 죽다니 허망하다. 파울 보이머도 죽는다. 그가 죽는 날, 서부전선에서 사령부로 다음과 같은 전신이 날라간다. "서부전선 이상없다."


<수용소군도>를 읽은 후 읽게 된 <서부전선 이상없다>. 기분이 더럽다. 화가 난다. 슬프다. 인간세계는 조금씩 변하고 있는듯 하나 그 뿌리에서는 변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 누구를 위해 싸우는 것인가? 누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일까? 난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일까? 더 이상 다수가 하는대로 따라하기는 싫다. 더 이상 의심없이 위에서 시키는대로 하고 싶지가 않다. 더 이상 오랫동안 전통이나 관습이란 명목으로 <해야한다>는 당위성에 기대어 요구하는 바대로 하고 싶지 않다. 나의 양심과 나의 마음이 하라고 하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 저항하고 싶다. 온 세상의 잘못된 기득권에, 온 세상의 약한 자를 억압하는 힘센 자들에게 저항하고 깨부수고 싶다. 나는 파울보히머처럼 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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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지 선정 100권중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



좋은 책이란 어떤 책일까?  마음 속에 화학적 변화가 일으키는 책, 더 나은 인간다운 삶을 향해 나아가도록 밀어붙이는 책. '책은 도끼다'라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그런데 동양고전과 서양고전은 사뭇 다르다. 마음 속에서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같다. 하지만 폭발력이 향하는 방향은 다르다.

동양고전의 힘은 자기 자신의 내부를 향한다. 서양고전의 힘은 외부 세계를 겨냥한다. 


동양고전을 읽고나면 행복은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로 인해 스스로 수양하려는 마음을 갖게 한다. 하지만 서양고전을 읽고 나면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문제가 많은 세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물안의 개구리는 우물이 세계의 전부인 줄 알지만, 그리고 우물 밖의 광대한 세계가 있음을 모르는 것처럼

서양고전을 읽기 전의 나는 바로 그러한 개구리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서양 고전을 읽고 나면 다른 세계를 꿈꾸는 사람이 된다. 적어도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100권의 책은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다. 수용소 군도도 그렇다.


스탈린이 소련의 권력을 잡은 후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인권 유린. 불시의 체포, 왜 기관원들은 항상 밤에 체포하는 것일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야 누군가가 체포되어 갔다는 것을 알 뿐이다. 체포되어 가는 사람은 저항없이 체포된다. 왜 내가 체포되는 것인지 알지도 못하고, 아마도 심문이나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무죄가 밝혀질 것이라고 믿으면서 순순히 체포되어 간다. 그러나 무죄로 풀려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도 스탈린 자신도 체포되면 그 법망을 빠져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체포되어 가는 사람의 부류는 다양하다. 하층민으로 부터 상층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솔제니친 자신도 촉망받던 포병대위가 아니었던가? 엄청난 사람들이 체포되고 심문받고 10년형을 선고 받고 수용된다. 끊임없는 유배의 흐름이 계속된다. 이런 일은 단순히 기관의 존속을 위해 자행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도 든다.  


솔제니친은 가장 정당한 혁명으로 세워진 정부가 가장 부당한 방법으로 국민을 괴롭히고 있다는 참혹한 사실 앞에서 그 진실이 진실로 느껴지지 않는다. 솔제니친은 차라리 풍자를 통해 권력의 검은 마수를 표현한다.


심문은 고문으로 이어지고, 고문은 사람을 다치게 한다. 그래서 심문관 옆에서 반드시 의사가 함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지 않은 피의자가 참혹하게 두들겨 맞아 정신을 잃는다. 옆에 있던 의사는 재빨리 피의자의 상태를 확인한다. 눈을 뒤집어 보고 맥박을 잡아 보기도 한다. 다행이 기절한 피의자의 맥박은 정상이다. 의사가 말한다. "정상입니다. 더 때려도 됩니다."


조국 소련을 위해 싸웠던 병사들이 불쌍하다. 싸우다 포로로 잡힌 소련의 병사들은 조국으로부터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힌다. 그들은 조국을 배반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조국에 의해 배신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배신자들로 불리고 그런 대우를 받는다. 포로 수용소를 탈출하여 조국으로 돌아와 귀대 신고를 한 병사가 심문을 받는다. 어떻게 삼엄한 경비를 뚫고 탈출할 수 있었는지, 탈출한 병사들이 거의 없는데 어떻게 당신만이 탈출할 수 있었을까? 그는 독일과 내통한 스파이다. 더러운 배신자 같으니라고.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끝난 후, 스탈린의 잔혹한 숙청에 동원되었고, 참여했던 이런 바 부역자들을 색출하고 벌을 주는 일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떵떵거리고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들 중 제대로 벌을 받은 사람은 없다. 이른바 적폐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 전범재판에서는 수많은 나치 전범들이 재판에 넘겨진다. 그러나 스탈린의 공포정치에 편승한 그 누구도 제대로 재판에 넘겨져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생각이 든다. 잘못한 자들을 색출하여 벌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후대에도 이런 것들이 전례가 되어 지나간 잘못을 벌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뿌리를 내리게 되면, 과연 정의로운 나라가 유지되기나 할까? 똑 같은 잘못들이 계속 반복되지나 않을까?


잘못된 권력이 무섭다. 그리고 잘못된 권력에 대해 소리치지 못하는, 항거하지 않는 것도 무섭다. 아마도 잘못된 권력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항거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잘못된 권력이 계속 권력을 가지도록 묵인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항거하지 않음으로 오게되는 온갖 고통은 항거하지 못한, 아니 항거하지 아니한 자들의 몫이다.


<수용소 군도>를 읽고 기분이 나빠졌다. 화가 났다. 세상은 변해야 하는데, 변할 구석은 많은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나는 무엇을 해야하나? 무언가를 하고 싶다. 나의 화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마음 속에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조그만 폭발을 일게 했다는 점에서 <수용소군도>는 제 역할을 다 했다고 느껴진다. 그러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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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봄.

지난 봄 활짝 핀 벚꽃 위에 아른거리는 봄 볕을 보며 조그맣게 읖조렸다. 또 봄.

해마다 찾아 오는 봄이지만 해마다 마음속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감상은 봄 날의 따스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무렴, 어느 계절에도 볼 수 없는, 폭발적으로 피어나는 꽃 장관은 우리의 마음을 가만 두지 않는 것이다.  


사람마다 꽃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꽃의 빛깔에 이끌리고, 또는 꽃의 모양새에 끌리기도 할 것이다. 어떤 이는 꽃의 관능의 몸짓에 매혹당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꽃의 향기에 취하기도 할 것이다. 괴테의 '꽃은 사랑에 미친 잎이다.'이란 말과, 이브파칼레의 '꽃은 식물의 성기이다'란 말은 둘 다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는 말처럼 느껴진다. 단지 하나는 시적으로 표현되었고, 다른 하나는 과학적으로 표현되었다고나 할까? 아뭏든 꽃은 빛깔 모양새, 몸짓과 향기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인간보다 짧은 삶을 사는 풀과 꽃이 있는가 하면,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세월을 사는 나무도 있다. 그러나 모든 식물도 역시 태어나면 언젠가는 수명이 다하게 된다. 그리고 후손을 퍼뜨리기 위해서는 꽃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도 후손을 남기기 위해 사랑이 필요한 것처럼. 후손을 남겨야 할 필요성은 역시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것에 기인하는 것이다. 식물이 꽃을 피우는 것도 스스로 영원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명을 남겨줄 후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스트레스 개화론'에 의하면 식물은 스트레스를 받아 자신이 절체 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음을 알아야만 꽃을 피운다고 주장한다.


실제 난을 꽃 피우려면 여름까지 잘 보살피다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홀대하면 된다. 그러면 가을엔 그윽한 난향을 즐길 수 있다. 식물은 철철이 아름다운 꽃을 피워 자태를 뽐내는 듯 하지만, 기실은 죽을 지 모른다는 절박함으로 꽃을 피우는 것이다. 봄 꽃은 차가운 겨울 바람이라는 스트레스를 견디어야만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고난을 견디고 이겨낸 사람만이 영광을 차지할 수 있다면 사람도 꽃일지도 모른다.


숲은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공동체를 형성하여 함께 살아간다는 점에서 숲 속의 나무, 풀과 같다. 건강한 숲은 다양한 계층의 식물들이 층위를 이루며 살아가는 숲이다. 층위가 5~6층으로 형성된 숲이 건강하다고 한다. 가장 아래 쪽을 살아가는 풀, 그 위에는 관목들, 그 위에 상록 교목들, 그 위엔 낙엽 굠목들 등 다양한 나무와 풀이 함께 살아가는 숲이 건강하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인간 공동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다. 인간 사회에서도 대기업이 있으면 중소기업도 있어야 하고, 큰 마트가 있으면 동네 구멍가게도 있어야 한다. 자본을 앞세운 대기업의 독점이나 횡포등으로 작은 기업이나 사업들이 없어지면 그 사회는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옛적의 문명의 흥망은 숲과 긴밀한 관련이 있었다. 커다란 강이 있는 곳에는 그 물을 수원삼아 살아가는 숲이 있고, 이러한 강과 숲의 힘을 입어 문명이 발생하고 성장한다. 문명이 성장함에 따라 숲의 나무들은 문명을 일구는 귀중한 자원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자원을 남용하게 되면 숲은 사라지면서 홍수 방지 기능도 함께 없어진다. 그러면 해마다 강가의 문명은 홍수의 위험에 노출되고, 비옥한 토양은 홍수로 유실되어 농업의 생산량도 급감하게 되고, 이로서 문명은 점점 쇠퇴해져 가게 된다.


오늘날에도 숲이 사라지고 있다. 대기에 수분을 공급해 주는 숲이 사라지면서 비가 적게 오고, 한 때 비옥한 토지는 메말라간다. 악순환이 계속되면 메마른 토지는 사막이 된다. 사막은 점점 위세를 떨치면 확장되어 가는데, 이를 막지 못하면 인류의 미래란 없다. 사막 녹지 사업은 인류의 장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지구온난화와 중앙아시아의 사막화를 막지 못하면 시베리아 영구동토층이 녹아내리고, 그 아래 묻혀있는 메탄이 폭발적으로 유출될 경우 지구에 닥칠 재난은 대재앙이 될 것이다. 늦기 전에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져야 한다.


<식물의 인문학>은 식물의 생태로부터 도출된 인간의 삶을 위한 지혜를 일깨워준다. 물론 식물의 생태에 대해 이러저러한 것을 많이 배우게 된다. 최근 식물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나면서 이런 분야의 책에도 관심이 가게 된다. 이런 책을 읽으니 나 자신이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결국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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