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바크/ 류시화 옮김/ 현문미디어

 

리드드 바크는 전직 비행조정사였다. 그가 갈매기 조나단 시걸을 주인공으로 비행을 이야기하였다. 

 

갈매기 조나단 시걸은 먹는 것을 얻으려고 아우성 치는 갈매기와는 다른 존재이다. 그는 날고 싶어한다. 수단으로써의 비행이 아니라 비행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더 빨리 나는 법, 더 높이 나는 법, 더 우아하게 나는 법등 비행술에 푹 빠진다. 결국 갈매기 사회에서 추방되고, 후에 그와 같은 갈매기들의 무리와 함께 하며 최고의 비행술을 배운다. 생각만으로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공간 이동의 기술까지 터득하게 된다. 그의 스승 치앙은 최고의 기술을 배운 이후에 또 다른 배움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가장 어렵고 가장 강력하고, 무엇보다도 기쁜 것이다. "그대는 높이 날아 올라 사랑과 자비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준다.

 

조나단은 새로 만난 무리를 떠나 그가 추방된 사회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그들 가운데 예전의 그 처럼 나는 것을 갈망하는 갈매기들을 도와 주기 위해서 거기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조나단은 지난 날 그를 닮은 플레쳐 시걸을 만난다. 플레쳐는 조나단으로부터 수많은 비행술을 배운다. 그리고 조나단과 플레쳐 무리는 그들을 추방한 갈매기의 무리에게도 돌아온다. 아름답고 우아한 비행을 관찰한 갈매기 무리들중에서도 나는 것에 대한 순수한 관심을 나타내는 갈매기들이 나타나게 된다.

 

비행술을 가르치는 플레쳐가 그의 비행 전방에 갑자기 나타난 작은 새끼 갈매기를 급히 피하려다 강한 화강암 바위에 머리가 부딪혀 죽게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하지만 조나단은 그가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플레쳐는 눈을 뜨게 된다. 이제껏 뛰어난 비행술로 추앙받던 조나단은 악마로 불리며 공격을 받는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플레쳐와 조나단은 갈매기들 무리에게서 빠져 나온다. 플레쳐도 공간이동을 배운 것이다.

 

조나단은 플레쳐에게 갈매기들을 인도할 책임을 맡기고 돌아왔던 세상으로 떠난다. 그 순간 플레쳐는 모든 것을 깨닫는다. 조나단은 다른 갈매기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조나단이 플레쳐 자신보다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다른 갈매기들을 진정한 그 모습 그대로 보게 되었으며, 자신이 보는 것 그대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한계가 없다고 했조. 조나단?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배움을 향한 그의 여행은 이미 시작되었다."

 

리처드 바크가 갈매기 조나단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첫째, 그는 배움을 말하고 있다. 배움이 없으면 어제나 오늘이 똑 같으며, 또한 내일도 똑 같을 것다. 당장의 배고픔을 없애줄 음식 부스러기를 얻으려 아웅다웅하는 것 때문에 배움을 놓치는 것은 진정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배움은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준다. 당장에는 그 배움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배움의 기쁨도 말하고 있다.

 

둘째, 그는 자유를 말하고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유. 인습이나 관습등 사회적 굴레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한 굴레는 배움을 막으며, 심지어는 본연의 자유를 옭아매기때문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을 추구하는 자유. 가치 있는 것을 찾아 굴레를 박차고 나가는 자유를 이야기한다. "나는 것은 갈매기의 권리라는 것, 자유는 모든 존재의 진정한 본질이라는 것, 그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이 종교적 의식이든 미신이든 어떤 형태의 제약이든 깨부수어야 한다는 것을." "단 하나의 진정한 법은 자유로 인도하는 법이다. 그 외에 다른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째, 그는 각 개체의 소중함과 무한한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우리들 각자가 사실은 하나의 '위대한 갈매기'의 관념이며 자유의 무한한 관념이다." 각자 속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은 자신의 소중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 그는 다른 갈매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플레쳐를 보라! 로웰을!찰스 롤랜드를! 그리고 주디 리를! 이들 역시 특별하고, 재능을 타고 났고, 성스런 존재들이낙? 그대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고, 나와도 다르지 않다. 한 가지 차이, 오직 단 하나의 차이는 그들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이해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네째, 그는 사랑과 자비를 말한다. 각자의 소중함을 고려할 때 모두는 사랑과 존경으로 대함을 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모습을 그대로 보게 될 때 자연히 사랑과 자비, 존경을 갖게 될 것이다.  "그대는 높이 날아 올라 사랑과 자비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라는 가르침은 조나단의 스승인 치앙이 마지막으로 조나단에게 들려준 교훈이다 

 

리처드 바크가 이야기한 배움, 자유, 자신에 대한 믿음, 사랑등은 가치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모든 굴레를 탈피한 자유에 대한 열망이 바람직한 것인가 생각해 본다. 절대적 자유란 가능한 것인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의 자유는 없다. 절대적 자유는 타자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두의 절대적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한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절대적 자유에는 무한한 책임이 뒤따른다. 현대 사회는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렸던 시대은 없었던 듯 하다. 하지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전 시대의 사람들보다 더 행복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선택의 자유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도 함께 나누어야만 한다. 자유의 절대적 가치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

 

또 하나는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아마 이러한 요소로 인해 성직자들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오만의 죄로 가득한 작품'이란 비난을 들은 듯 하다. 인간은 그 한계가 있다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리처드 바크는 갈매기 조나단을 통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에 대한 믿음을 주려하고 있다. 인간 존재가 신의 존재에 다름이 아니라는 느낌까지도 실려있다. 아니면 신의 존재를 인간의 존재로 격하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은 훌륭한 결실을 맺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절대적인 가능성은 허상이 아닐런지. 이렇게 보면 리처드 바크는 새로운 종교, 새로운 신앙, 새로운 믿음을 보여주는 듯 하다. 동학의 인내천사상이 이와 같을런가? 인간의 소중한 존재라는 것, 사랑과 존경을 받아야 하는 존재하는 것에는 틀림없으나, 그렇다고 절대자의 수준으로 올리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는 생각이 아니던가?

 

리처드 바크의 생에 대하는 태도등을 조금 걸러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인생을 살아감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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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원작/ 이은재 엮음/ 박현자 그림 / 지경사

 

초등학교 3학년 딸애는 매달 수학도둑 만화책 1권을 자기 돈으로 산다. 그리고 나는 딸애가 직접 고른 책이나 내가 권해 준 책 한 권을 사준다. 이 번 달에는 우리 딸애가 동물 농장을 골랐다. 동물을 좋아해서 자기의 블로그의 이름도 동물 농장이라 부르는 딸애는 아마 제목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자투리 시간에 짬짬이 읽어 보노라니, 어느새 결말이 어떻게 될런지 궁금해 하며 폭 빠져버렸다. 

 

읽는 내내 이 풍자적인 이야기는 러시아의 공산화를 빗대어 말한 것이라 느껴졌다. 돼지 스노볼은 공산주의의 참 이론에 충실한 혁명가를 가리키는데, 아마 레닌 정도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스노볼을 쫓아내고 권력을 잡은 돼지 나폴레옹은 철의 장막을 친 스탈린을 가리키는 것이라 추정해 본다. 하지만 권력을 잡기 위해 무력에 의존하며, 또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무력과 속임수등을 동원하여 인민의 눈과 귀, 입을 막아버리는 추악한 모습의 나폴레옹은 단지 스탈린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수많은 약한 사람들을 압제하고 탈취하는 더러운 권력자들이 바로 돼지 나폴레옹과 같은 사람들이리라.

 

물론 쫓겨난 메이너농장 주인 존스는 볼세비키 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러시아 황제를 가리키며, 존스의 애완 동물이었던 까마귀 모지즈는 항상 저 구름 너머에 있는 케이크와 각설탕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 울타리가 있는 슈가캔디산에 대한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지껄이는데, 이는 종교지도자들을 상징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슈가캔디산은 천당이나 극락세계로 묘사된 사후의 세계를 말하는 것일테고. 종교권력은 현실 넘어의 환상을 끊임없이 심어주면서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에 체념하도록 하여 권력자들의 권력을 유지하게 해 주는 권력의 시녀가 되어 버렸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복서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성실한 마음과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무지하기에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권력자들의 입에 발린 소리에 속아 불행한 삶을 살다 끝내 불행히 삶을 끝내고 마는 대중들이 아닐까? 제일 악질적인 캐릭터는 스퀼러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 놈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왜 동물들이 그 악질의 거짓말을 간파해 내지 못하는 것일까 답답했었다. 진실은 쉽게 알려지는 것이 아닌가 보다. 현실과 그 고통에 직면할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일까?

 

어쨌든 돼지들은 동물 농장의 약하고 무지한 동물들을 착취하면서 그들의 탐욕의 몸뚱이는 디룩디룩 살이 쪄가고, 결국은 그들의 원래 행동강령까지 몰래 바꾸어가며 점점 그들이 쫓아냈던 인간의 모습을 닮아간다. 결국 마지막에는 누가 돼지인지 누가 인간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상황으로 이야기가 끝나고 만다.

 

조지 오웰은 영국의 식민지 인도 태생으로 식민지 출신의 열등감에 시달린다. 버마에서 대영제국의 경찰로 근무하면서 식민지 정책을 부조리를 수없이 확인하면서 그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괴로워한다. 그리고 파리와 런던 등지에서 밑바닥 생활을 하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조지 오웰에게 가장 큰 성공을 가져다 준 동물농장은 2차대전이 끝나던 무렵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소설이란 평가를 받으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는 사회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면서 비판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여러 작품들을 남겼다.

마이클 샌델 지음/ 김선욱 감수 / 안기순 옮김/ 와이즈베리

 

마이클 샌델 교수는 <정의> 관심이 많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라는 이 책도 일종의 정의에 대한 이야기라 볼 수 있다. 그는 시장지상주의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다루면서 우리가 돈으로부터 지켜야할 도덕, 정의등이 있는가하는 물음에 답을 하고 있다. 시장지상주의를 주창하는 경제학자들과 그 편에 선 자들의 논리와 그렇지 않은 자들의 논리가 서로 반박해 나가는 과정도 샌델 교수의 강의을 보는 듯 흥미롭다.

 

마이클 샌델 교수가 우려하는 것은 시장경제가 아니라 시장사회이다. 시장경졔에 있어 시장은 경제의 도구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시장사회에서는 시장이라는 것이 사회에 침투하여 사회의 주요 덕목이 되어 버린 사회를 말한다. 시장사회에서는 전통적인 도덕 규범들이 시장규범에 의해 밀려나고 있으며 이는 공정성의 문제와 부패의 문제를 야기시킨다. 시장은 도덕적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는 이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한다.   

 

모든 것을 사고 팔 수 있는 사회는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그리고 모든 것에 가격을 매김으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의 가치가 변질되거나 저평가된다. 즉 일종의 오염 또는 부패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돈을 주어 책을 읽게 하는 행위는 독서의 근본적 내재적 가치를 변질시키게 된다.  경제학자들은 시장은 교환되는 재화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나 시장은 흔적은 남긴다. 때로는 시장가치는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비시장 가치를 밀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그와 관련된 샌델의 우려는 이미 다양한 방법으로 실현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을 몇가지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새치기 권리를 파는 행위는 정당한 것인가? 돈을 내고 카풀차로로 달릴 수 있는 권리를 구매한다는 것은 정당한가? 줄서기는 위대한 평등의 상징이었다. 그러한 민주주의의 가치가 돈에 의해 훼손되는 것은 온당한 일인가? 돈을 받는 대리 줄서기 행위는 어떠한가? 무료 공연의 입장권을 받기 위해 돈으로 사람을 사서 대신 줄을 서게 하여 입장권을 획득하는 것은 도덕적인가? 공연을 보고자 간절히 원하는 것은 더 많은 돈의 지불에 의해 증명되는가 아니면 오랜 시간 줄을 서서 기다리고자 하는 기꺼운 마음으로 증명되는가? 재화를 분배하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최고의 돈을 지불하는 사람에게 재화를 분배하는 것은 시장의 논리이다. 하지만 줄서기와 같은 선착순 방식으로 재화를 분배해야 하는 상황도 있을 것이고, 추첨에 의해 재화를 분배하는 경우, 그리고 성적에 의해 재화를 분배하는(대학입학) 때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시장의 논리로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곡된 인센티브 정책도 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댓가로 돈을  지불하는 것은 과연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돈을 지불받을 경우에는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경향이 생긴다면 이것의 개인의 책무에 대한 위반이 아닌가? 실제로 돈의 지불이 정지되었을 때 많은 사람은 다시 흡연을 시작한다고 한다. 스위스의 원자핵페기장 건설과 관련된 주민투표의 흥미로운 결과가 있다. 정부에서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판단된 한 마을의 주민들은 그들의 시민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핵페기장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데 동의하였다. 하지만 그 댓가로 돈을 지불할 것이라는 조건을 덧붙이자 오히려 반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이것은 돈보다는 책임, 미덕등 가치에 대한 인식이 사람의 마음을 더 많이 움직인다는 점을 보여줌으로 시장만능주의에 타격을 가하는 연구 결과가 된다.

 

청소부 보험이나 말기환금등 보험상품등이 미국에서 합법화되어 있다. 많은 기업은 직원들의 동의 없이 생명보험에 들어 보험료를 납부하고 그 직원이 사망하였을 때 기업에서 보험금을 받아 가는 보험상품이 있다. 바로 청소부보험이다. 고위 경영진이 불시에 사망하면 그를 대체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기때문이라는 이 보험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도덕적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불치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생명보험증권을 구입하고 이후 그 사람이 사망했을 때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사는 것은 어떤가? 불치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미리 돈을 받아 치료에 쓰거나 여생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되고, 그것을 구입한 사람은 후에 보험금을 받을 수 있어 좋고, 누이좋고 매부좋은 제도라 생각되지만 과연 그럴까? 그 증권을 산 사람은 자신의 투자금액을 회수하기 위해 간절히 상대방이 죽기를 바라는 그런 상황이 연출되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공공장소를 기업광고로 사용할 수 있도록 그 권리를 사고 파는 행위는 어떠한가? 이미 여러 공사설 경기장들의 명명권이 거래되고 있다.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의 수익활동으로 공공장소가 광고로 도배되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일이 허용되어야 하는걸까?

 

센델 사상의 철학적 배경

샌델의 사상은 정의 중심의 정치철학과 행복 중심의 정치철학 양자를 종합한 것이다. 행복중심의 정치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승서 시작하여 헤겔로 이어지며 이는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와 찰스 테링러의 사상을 통해 샌델에게 이어진다. 정의중심의 철학은 칸트철학에서 체계화되는데 이를 첨단의 정치이론으로 만들어낸 것이 롤스다. 샌델은 롤스를 비판하는 만큼 롤스와 연결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구조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작요하는 개념이 '좋음(the good)' 이라는 개념이다. 무엇이 좋은 것인가, 개인과 공동체에 좋은 것은 무엇인가가 마땅히 행해야 할 바의 내용을 가름하는 잣대가 된다. 하지만 좋은 것이란 개념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모호한 개념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구체적인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서로가 인정할 수 있는 보편성이 어떻게 가능한지 줄기차게 연구해온 학자들이 헤겔,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찰스 테일러이다.

 

한편 정의에 대한 고민은 좋음의 문제가 아니라 옳음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좋지만 옳지 않을 수도 있기때문이다. 칸트에 따르면 옳음의 근거는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앎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며, 이성을 근거로 옳다고 승인될 수 잇는 원리를 발견함으로써 확인된다. 그 원리는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데 기반을 두고 있다. 각 행위의 옳은지의 여부는, 이 행위를 모든 사람이 따르는 법칙으로 만들어 보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화의 결과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옳은 행위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샌델의 입장은 '옳음에 대한 좋음의 우선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옳음의 이념을 완성하려면 좋음의 관점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를 추구할 때 행복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도 품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말로 옮겨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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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성의 칼날/ 찰스 길리피스 지음

 

뉴턴은 흥미롭게도 갈릴레오가 사망한 1642년에 태어났다. 그는 1665-1666년에 미적분을 발견해내며 광학 색채이론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 해에 달 궤도에까지 미치는 중력에 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이작 뉴턴 경(1642~1727)은 어떻게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는가?

그는 "언제나 그에 대해 사색함으로써" 그러한 발견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베이컨적인 실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데카르트적인 명석함에 의지하여 그 발견을 이루었다. 그가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은 단순한 형이상학적인 명제가 아니라 수학적 공식으로 표현된다. 뉴턴의 물리학의 특징은 수학적 구조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론 물리학이나 수리 물리학은 갈릴레오와 뉴턴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뉴턴은 실험물리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밝혀진 사실들을 통합하고 그 이면을 들여야 보는 능력과 그것을 수학적으로 분석하고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사실 뉴턴은 갈릴레오, 케플러, 데카르트, 호이겐스(1625~1695)등의 연구에서 필요한 요소들을 선택 통합하는 과정을 통해 그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갈릴레오로부터는 단순히 운동 그 자체가 아니라 운동의 변화가 수학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케플러의 제3법칙 즉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은 그 궤도 중심에서의 평균거리의 세 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으로 부터 행성에 작용하는 힘은 그 궤도 중심에서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계산해내는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또한 뉴턴은 데카르트로의 관성과 곡선 운동에 대한 아이디어에 관심을 가졌다. 뉴턴보다 조금 앞서 호이겐스(1625~1695)는 원운동은 중심방향으로 가속된 관성 운동이라는 분석을 내 놓았다. 뉴턴도 호이겐스와는 별도로 이와 같은 생각을 가졌었다. 하지만 뉴턴이 호이겐스와 결정적으로 달랐던 것은, 뉴턴은 호이겐스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즉 달이 그 궤도를 도는 것과 사과가 떨어지는 것이 같은 현상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만약 달과 사과가 같은 힘에 의하여 움직인다면 천체의 움직임은 만유인력의 법칙하에 있는 관성 운동의 웅대한 예가 된다는 것을 알아 차렸던 것이다. 모든 천체 운동은 관성 운동이며, 그 관성 운동은 만유인력에 의해 가속되어 원운동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개념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것은 서로 달라 보이는 것을 하나로 결합하는 뉴턴의 창의적 사색과 명석함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엄밀한 증명은 1685년에 이루어진다. 그는 케플러의 법칙과 호이겐스의 원심력을 결합한 엄밀한 기하학적 연역으로 그는 중력의 법칙을 천체의 규모로 증명한다. "나는 행성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원심력에 의하여 타원위를 회전한다는 명제를 발견했다." 당시 후크는 분명히 인력은 천체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며,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거장들 중 한 사람인 크리스토퍼 렌(1632~1723)과 젊은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1656~1742)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힘의 법칙으로 부터 천체의 운동을 연역해 낼 수학적 능력이 없었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저술한다. 이 때 핼리 혜성으로 널리 알려진 천문학자 핼리가 이 책을 발행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후 그는 조폐국 장관으로 취임하며, 왕립 학회 회장이 된다. 기사 작위도 수여받고 1727년에 사망한다.   

 

 

뉴턴의 광학이론

1665년 뉴턴은 일차 프리즘을 통과한 각 색깔의 광선을 다시 이차 프리즘에 통과시키는 실험을 통해서 각 색채의 광선은 특유의 굴절량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굴절량은 보라색으로 갈수록 커지고 빨간색으로 갈수록 작아진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이에 뉴턴이 내린 결론은 백색광은 여러 종류의 색채를 가진 혼합광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빛과 색채에 관한 발견을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하지만 빛에 대한 이러한 발견은, 빛은 단일하며 기본적인 것인 것으로 나뉠 수 없다는 뿌리깊은 직관에 반하는 것이었기에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뉴턴은 그의 색채이론에 반대하는 로버트 후크(1635~1703)와 그 외 많은 사람들과의 논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1675년 뉴턴은 빛과 색채에 관한 두번째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그는 에테르 가설을 내세웠다. 이것은 에테르가 존재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이론을 쉽게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도입한 것이었다. 그는 에테르 가설을 물리학의 구조상의 필요에서가 아니라 물리학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한 조건으로 도입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뉴턴의 빛 이론은 기본은 빛의 입자설을 주장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뉴턴 빛 이론의 핵심은 그 입자적 구조보다는 오히려 빛의 복합적 본성에 있다. 뉴턴의 빛은 단일 색으로 이루어진 각각의 광선의 혼합광이다. 뉴턴의 빛은 입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일한 광선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었다. 뉴턴의 광학적 원자론은 오해받고 있는 것이다. 물질의 구성 성분이 원자로 이루어진 것 처럼 빛의 구성 성분이 광선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의 광학적 원자론은 철학적 원자론과의 구조적 일치를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빛의 입자설을 뉴턴이 주장했다고 하는 것은 오해인 것이다. 뉴턴은 경우에 따라서 빛을 입자로 보는 것이 더 유용할 때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파동으로 보는 것이 더 유용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뉴턴은 빛 파동을 횡진동이 아니라 종진동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적인 저술 <프린키피아>

뉴턴의 이 책은 과학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전자기학, 열, 광학 등 다른 물리학 분야는 뉴턴적 원리의 새로운 영역으로의 확장이라 할 만큼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 많이 읽히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 책은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기하학을 사용하여 그의 이론을 전개해 나가고 증명하였기때문이다. 만일 그가 발명한 미적분등을 이용하여 17세기의 새로운 해석학으로 표현하였다면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프린키피아>는 세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은 저항 없는 매질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에 대한 것이다. 2권은 저항이 있는 매질 속에서 운동하는 물체에 관한 것이다. 그 대부분이 유체역학과 관계된 것이다. 그는 유클리드처럼 몇 가지 기본 정의와 세개의 공리로부터 수학적 연역을 사용하여 결론들을 유도해 낸다. 제3권은 주로 천문학과 관련된 물리적 지식과 관련이 된다. 뉴턴은 보편적 우주관을 형이상학적인 추론에 의하지 않고, 기하학적 증명에 의해서만 설명하려 했다. 그는 운동의 법칙을 태양계에 적용시켜서, 케플러의 타원 궤도가 천체의 필연적 결과임을 증명했다. 또한 우주의 모든 물체는 질량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만유인력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밝힌다. 그리고 달의 운동과 조수도 이러한 기본적인 힘의 영향아래 발생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는 중력의 법칙으로 무한한 우주에 놓여 있는 지상과 천체의 과학으 통일시킨다. 이로써 이전의 지상의 물리학과 천체의 물리학이 다르다는 통념을 집어 던져버렸다. 

 

뉴턴의 신학

뉴턴은 아주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경건한 종교인이 사람됨이나 태도를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신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성경 연구에 열심을 보였다. 개인적인 성경연구의 결과 그는 후년의 많은 합리주의자들처럼 삼위일체설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신이 세계를 자유롭게 창조했다는 것과 그것이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뉴턴은 태양계에 있어서 누적되고 있다고 생각한 어떤 불규칙성을 신이 조정해 준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에게 있어 신은 가설도 과학의 대상도 아니며 신은 확실성이었다. "신은 영원히 존속하며 어디든지 존재한다. ...신의 본질에 관한 관념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단지 자연현상이라는 신의 가장 현명하고 뛰어난 취향과 궁극 원인에 의하여 신을 알 뿐이다."

 

하지만 라이프니쯔는 뉴턴의 과학이 자연신학을 파괴하는 자기충족적 유물론으로 인도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난했다. 많은 사상가들은 라이프니츠에 동조하여 영혼이 없고 결정론적인 세계-기계상을 수립한 책임이 뉴턴이론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 호이겐스나 퐁트넬 같은 분별있는 사람들은 뉴턴이론이 너무 추상적이고 기계론적으로 불충분하여 오히려 자연신학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뉴턴 이론의 반형이상학적 특징

뉴턴의 이론은 성공적이었지만 모두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당시 형이상학적 체계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사람들은 "어떻게"와 "왜"를 동시에 설명해 주는 체계를 원했었다. 하지만 뉴턴은 천체의 운동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설명할 수 있었지만, 왜 중력이 존재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중력이 확실히 존재하고 우리가 설명한 법칙에 따라 작용하며, 천체와 해양의 모든 운동을 설명하는 데 풍부한 도움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충분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에도 만족하지 않는 데카르트주의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까지 나는 현상 가운데에서 중력의 여러 성질들의 원인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 현상으로부터 연역되지 않는 것은 모두 가설이라고 불러야 하기때문이다. 가설은 형이상학적인 것이든 물리학적인 것이든, 신비적인 것이든 기계적인 것이든 실험 철학에서는 어떤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뉴턴의 그러한 입장에 비해 볼 때 '모든 물체에 내재해 있는 어떤 미묘한 영"에 대한 그의 입장이나, 에테르가설등은 또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는 과학성과 더불어 종교성도 아울러 함께 지니고 있는 묘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뉴턴과 뉴턴의 과학

뉴턴에게서 처음으로 이론과 실험이 대등하고 가장 직접적인 수준에서 만난다. 실천에서나 원리에서나 뉴턴은 계량 과학으로서의 물리학과 수량의 언어로서의 수학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수립했다. 뉴턴은 물리학과 천문학을 운동하는 물질에 관한 단일 과학으로 종합했다. 그리고 중력을 진공으로 돌입시킴으로써 그는 공간의 연속성과 물질의 비연속성을 조화시켰다. 힘과 운동으로는 연속이고, 물질로는 불연속이다

 

과학은 과학자에 의해 창조되지만, 그것은 자연에 관한 것이지 그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일단 그것이 창조되면 그것은 예술작품처럼 독립성을 갖는다. 인간 뉴턴은 꼴 사나운 오만에 빠진 적이 있었으며, 경쟁자에 대한 불관용을 나타내면서 추악하기까지 한 모습을 보였다. 로버트 후크와의 광학논쟁이라든가 미적분을 둘러싼 라이프니쯔와의 진흙탕 싸움에서 그런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뉴턴의 과학은 겸허하다. 데카르트는 세계는 이래야 한다고 단독적으로 규정했다. 뉴턴은 단지 그것이 어떻한 상태로 있으며 어떻게 작용하는가만을 말했을 뿐이다.

 

뉴턴의 이론이 이후의 세계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해 볼 때, 뉴턴적 세계에서 자라나는 것은 의식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하는 생각도 갖게 된다.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 그것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것은 문화의 한 요소이며, 뉴턴이 없는 문화 속에 존재하는 것은, 교양있고 깨어있으며 그만큼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학자의 연구 대상이 되는 길이다. 찰스 길리피스의 서구의 과학문명에 대한 오만한 자신감?

 

뉴턴의 세개의 얼굴

뉴턴은 세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논쟁자 뉴턴, 신학자 뉴턴,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자 뉴턴. 각각의 얼굴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는 대개 과학자 뉴턴만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뉴턴은 이 세개의 모습이 어울러져 있는 것이다.   

벽초 홍명희

 

9권 화적편 3

피리

봉산 평산의 선비들이 과거보러 갔다 돌아 오는 길에 꺽정이네 패에 사로 잡혀 청석골로 와서 심문을 받게 된다.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던 선비들은 죽고 선비로서의 기개를 보여준 선비들만 살아 나간다.

 

그로부터 몇일 뒤 종실 단천령이 탑고개에서 잡힌다. 단천령은 태종의 별자(서자) 익령군의 증손으로 그 형인 억재는 거문고를 잘 타고 자신 억순이는 피리를 잘 불었다. 단천령은 영변 기생 초향이 가야금을 잘 탄다는 소문을 듣고 묘향산 구경 갈 겸 겸사겸사 길을 떠난다. 서로의 음악성을 알게 된 그 둘은 정이 들게 되고 나중 서울로 부르겠다는 말을 남기고 단천령은 서울을 향하다 청석골패에 사로 잡힌 것이다. 임꺽정이 외 다른 두령들은 잔치를 배설하고 단천령의 피리를 들은 후 그를 보내준다. 

 

평산쌈

금교역말의 어물전 젊은 주인이 죽었을 때, 김산이가 황천왕동이 대신 그 장사지내는 것을 도와 주다 마전리라는 동네에서 대장장이로 있는 이춘동이를 만나 입당시킨다. 이춘동이는 박연중이 운달산에서 도적패의 대장으로 있을 때 그 밑에서 한 때 두령을 하던 이로 꺽정이를 만나보고서 입당한다. 춘동이의 모친의 환갑때 꺽정이는 박연중이를 만나고 서로 사돈을 맺기로 약조한다. 한편 신계현령으로 있던 이흠례가 윤지임이 있던 봉산군수로 간다는 소리를 듣고 이흠례를 처치할 작정을 한다. 이흠례가 해주감영에 연명갈 때 중간에서 습격하여 처치하자는 의견이 나와 춘동이네 환갑잔치에 참여한 후 그 거사를 행하기로 한다. 이 때 서림이의 동생이 서울서 잡혀있다는 기별을 듣고 줄을 대어 그를 빼내려고 서림이 서울로 갔다가 포청에 잡히게 된다. 그리고 서림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꺽정이가 지방관원을 해치기 위해 지금 마전리에 있다고 고하고, 이에 조정에서는 선전관 정수익 급파한다. 오위부장중 용맹하고 무예가 뛰어난 연천령과 이의식을 부장으로 삼아 황해도에 도착한 그들은 봉산, 평산에서 군사를 500여명 조발하여 마전리를 들이친다. 하지만 7명의 두령들은 수백명의 관군과 접전하여 물리친 후 산으로 도망한다. 도중에 연천령은 꺽정이의 칼에 맞아 죽고 만다. 꺽정이패는 자모산성에서 몸을 숨겼다가 관군이 회군한 후에 청석골로 들어온다.

 

10권(화적편4)

자모산성 상

조정에서는 꺽정이패를 토벌하기 위해 황해도에 이사증과 강원도에 김세한을 순경사로 파견한다. 좌변포도대장 김순고는 임꺽정을 잡을 계책을 서림이로 부터 듣고 그를 황해도 순경사와 같이 가게 하나, 이사증이 거절한다. 서림이가 배반하여 자기를 잡을 계책까지 꾸몄다는 말을 듣고 청석골에서는 어떻게 관군을 대항할 것인지 서림이의 계책을 파할 것인지 논의한다. 두령들의 식구들은 이춘동이 배행하여 박연중이 사는 곳으로 보내고 다른 두목들과 졸개들의 식구들은 맹산등지의 함경도에 준비된 소굴로 보낸다. 그리고 청석골에서 접전을 준비하던 중, 순경사 이사증이 기생 초운이와 눈이 맞아 재령에 머물면서 관자를 각처로 보냈다는 정보를 듣고서는 그 재령근천 박연중이의 마을에 옮겨간 식구들을 공격하는 걸로 판단하여 오두령(개도치)과 졸개 80여명을 제외한 나머지 두령들과 졸개들은 식구들을 보호하기 위해 박연중이에게로 떠난다. 조그만한 마을에 수십명의 사람들이 기거하기 어려워지자 꺽정이는 자모산성으로 자리를 옮길 것을 작정하고 미리 선진을 보내 준비하게 한다. 딸을 낳은 꺽정이의 아내와 그를 돌보는 애기엄마, 그리고 애기와 백손이는 박연중이네 마을에 남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모산성으로 다시 자리를 옮긴다.

 

자모산성 하

청석골에 남아 있던 오두령은 죽은 마누라 생각에 눈물을 짓다 잠이 들었다가 하인으로 부리는 졸개가 부르는 소리에 잠이 깬다. 두령들이 다 피난가는 통에 불안해진 졸개들이 도망질한다는 소리를 듣고 "가만 내버려두지 않으면 네가 쫓아가서 붙잡아올라느냐"고 하며 평소에 흔히 하는 실업는 말투로 대답한다. -이하 미완-

 

.......

이후에 임꺽정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명종16년 황해도 순경사 이사증이 적괴 임꺽정을 체포했다고 보고한다. 하지만 서림과 대질 심문에서 가도치로 밝혀진다. 청석골에 혼자 남은 오두령이 관군에 붙잡힌 것이다. 이후 남치근을 토포사로 임명하여 재령군에 진을 친다. 임꺽정은 자모산성을 버리고 구월산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최후를 맞게 된다.

 

서림이의 배반...

오두령의 청석골에 대한 집착...

모주가 없는 청석골패의 우왕좌왕...

 

짧은 기간동안 전 10권을 읽느라 힘들었다. 특히 모르는 단어는 왜 그리 많은지, 조선시대의 관직과 풍습등도 어찌나 낯선 지...어떤 부분은 사전없이 읽으려니 영어보다도 더 독해가 안되었다. 홍명희가 1888년 태어났으며 그의 증조할어버지는 판서를 지내고 할아버지는 참판을 지냈으며 그의 아버지 범식은 금산군수로 있다 1910년 한일합방때 자결해 주었다는 것등을 미루어 볼 때, 그의 소설에 나오는 민중들의 삶이 조선시대의 그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의 소설속에 나오는 토착적인 냄새는 허구만은 아니겠거니하고 생각된다. 잊혀져간 그 시대의 문화나 서민의 애환등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 남아 있다는 것은 큰 보물로 하나의 문화의 원형을 보존한 작품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송악산

송악산에 큰 굿이 있어 경향각처에서 많은 사람이 구경을 가는데, 청석골에서도 백손어미, 황천왕동이 아내, 배돌석이의 아내, 서림이 아내, 곽능통이 아내를 비롯하여 황천동이, 배돌석이, 길막봉이, 서림이가 함께 송악산으로 구경을 간다. 송도도사의 아들이 황천왕동이의 아내를 보고 흑심을 품고 납치를 하여 겁탈하려하다 황천왕동이의 칼에 죽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송도도사는 복수를 한다고 군사를 풀어 대왕당을 둘러싼다. 서림이의 묘책으로 상궁을 인질로 하여 대치하던 중 임꺽정이를 비롯한 청석골패가 들이닥쳐 안 사람들을 구출하여 청석골로 돌아간다.    

 

소굴

서림이가 토포사가 뜨면 그를 흐지부지하게 할 계책을 내 놓는다. 전국 여기 저기에 소굴을 만들어 놓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 토포사가 어찌할 수 없을 거란 계책이었다. 박유복이와 배돌석이가 새로운 소굴을 세우는 중임을 맡아서 평안도로 떠난다. 가는 길에 봉산에서 배돌석이는 정체가 탄로나 간신히 도망친다. 이에 봉산군수 박웅천이를 골탕먹이기 위해 서림이가 금부도사차림으로 나섰으나 봉산군수가 속지않아 도리어 서림이가 청석골로 달아난다. 이에 서울에 줄을 놓아 봉산군수를 떨어뜨리니, 그 후임으로 호반 윤지숙이 오게 된다. 윤지심이가 호언장담하여 꺽정이 욕을 하며 잡을 수 있다고 하는 소리에 마음이 상한 꺽정이는 윤지임을 혼내주려고 해주감사의 사촌 유도사로 행세하여 윤지임의 거나한 대접을 받고 그의 아끼는 말을 빌려타고 청석골로 돌아온 후 윤지임은 속은 줄 알고 펄쩍뛴다. 꺽정이는 서울에 있는 세 아내를 각 소굴에 안주인으로 한 사람씩 보낼 작정으로 데려오려 서울로 간다. 꺽정이의 괄세로 화가 난 노밤이의 발설로 꺽정이는 좌포청의 추격을 받게 된다. 무사히 소흥이를 데리고 서울을 벗어나지만, 남성밑골 박씨, 동소문안 원씨와 김씨는 좌포처에 잡히게 된다. 노밤이의 고변으로 꺽정이 한패로 몰린 한온이도 짐을 싸 들고 청석골로 들어 온다. 꺽정이는 전옥을 파옥하여 잡힌 아내들을 구하려 서림, 봉학, 돌석, 막봉을 데리고 서울로 향하지만 아들 백산이가 이천에서 관군에게 잡혔단 소리를 듣고 급히 돌아와 구출한 뒤 청석골오 돌아온다. 서울에서 원씨는 혀 깨물고 죽고, 박씨와 김씨는 관비로 가게 된다. 이에 파옥할 생각을 파의한다. 평안도지역에 산채를 지으러 간 유복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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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삶에서 대화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젊은이들은 SNS니 트위트니하여 기기에 의존하여 생각을 주고 받는다. 심지어 함께 만나 차를 마시더래도 앞에 있는 친구와 말을 하기보다는 서로 스마트폰을 가지고 멀리있는 친구와 문자를 주고 받는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오히려 멀게 느껴지는 세상이다. 또한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소식이나 이야기를 접하기에 사람간에 이야기를 주고 받는 일들이 드물어지고 있다. 또한 재미있는 영화등 오락매체가 많은 까닭에 사람과 사람사이의 즐겁고 흥겨운 이야기, 새로운 이야기들이 말로 전달되는 것이 줄어들고 있다. 

 

옛 사람들 사이에 오고 가는 정이 두터운 것은 서로간의 입과 귀를 통한 소통이 아니던가? 재미있는 오락거리가 따로 많지 않아,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그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것이 영화를 한 편 보는 듯한 느낌을 가졌을 터, 그리고 서로 각자 하루 동안 들었던 일, 보았던 일들을 이야기함으로 새로운 사실들을 듣고 알게 될 수 밖에 없었으니, 대화하는 문화가 자연스럽지 아니했을까?  술상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이 그들의 낙이요 풍류였을터이다.

 

무당 굿하는 것도 종교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의미와 아울러 오락의 역할을 함께 하는 것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따로 놀이 동산이 있는 것도 아니요, 백성을 위한 축제가 있는 것도 아닐찐대, 이러한 큰 행사는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눈요기감과 즐거움을 주는 축제기분을 돋우워 주는 것이었을 것이다. 백산어미가 송악산 굿에서 그네를 타려는 것은 꺽정이와의 의초를 회복하고, 서울에 사는 첩들을 경계하기 위함이었으니, 여자들의 질투심이나 행복한 가정에 대한 열망이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음을 확인한다.

 

꺽정이 서울의 세 아내를 파옥하여 데리러 오고자 하는 마음은 여인네에 대한 애정과 의무감이 함께 뒤섞여 있는 것이리라. 위험한 게획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강행하려 하는 것은, 자신의 가족만 중히 여기고 수하들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닐런지, 더구나 혜음령 도적 정상갑이와 최판돌이는 위험한 작전에 부하들과 참여할 수 없다고 뻣대다가 꺽정이의 주먹에 목숨을 잃어 버리니, 부하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에 불과하다.  더 큰 도적은 궁궐에 있는 고관대작들이란 꺽정이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건만, 꺽정이의 권력과 힘도 약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니, 한낱 도적에 불과할 뿐...

 

인간들에게 권력과 힘이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일 뿐인가?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신의 힘과 권력과 부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을 돕는데 사용하니, 어찌 세상이 나아질 수 있을텐가? 꺽정이가 꿈꾸는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란 요원할 뿐이다. 더 나은 세상이란 어떤 세상인가? 어떻게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하루 이틀, 일년 이년에 아니 십년 이십년에 해결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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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연:얽히어 맺어지는 인연

궁가:궁방2(宮房)(조선 시대에, 왕실의 일부인 궁실(宮室)과 왕실에서 분가하여 독립한 대원군ㆍ왕자군ㆍ공주ㆍ옹주가 살던 집을 통틀어 이르던 말).

유수부:조선시대의 지방행정구역. [본문] 원래 유수부라는 행정구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府) 가운데 유수(留守)를 장관으로 하는 것을 유수부라고 한다.

유수:고려·조선 시대의 지방관. [본문] 고려시대는 서경·동경·남경 등 3경에 3품 이상 관직으로 정원은 각각 1명씩 두었다

예이제: 옛날과 지금

관례:예전에, 남자성년이르면 어른된다는 의미상투틀고 쓰게 하던 의례(儀禮). 유교에서는 원래 스무 살에 관례하고 혼례하였으나 조혼성행하자 관례혼례겸하여 하였다.

나인: 고려조선 시대에, 궁궐 에서 왕비가까이 모시는 내명부통틀어 이르던 . 엄한 규칙있어 환관(宦官) 이외남자절대로 접촉하지 못하며, 평생수절하여야만 하였다. [비슷한 말] 궁녀(宮女)ㆍ궁빈(宮嬪)ㆍ궁아2(宮娥)ㆍ궁인2(宮人)ㆍ궁첩(宮妾)ㆍ시녀(侍女)ㆍ여관1(女官)ㆍ여시3(女侍)ㆍ홍수3(紅袖).

봉심: 임금의 명으로 능이나 묘를 보살핌

무수리: 고려ㆍ조선 시대에, 궁중에서 청소 따위의 잔심부름을 담당하던 계집종.

상궁:조선 시대에, 내명부의 하나인 여관의 정오품 벼슬.

오복전같이 조르듯: 오복조르듯, 몹시 조르는 모양

내권: 아내

작반: 동행자나 동무를 삼음

채수염: 숱은 그리 많지 않으나 퍽 길게 드리운 수염.

청좌하다:혼인 때에 신부 집에서 신랑에게 사람을 보내어 초례청에 나오기를 청하다.<역사>조선 시대에, 이속(吏屬)을 보내서 으뜸 벼슬아치의 출석을 청하다.

무예별감: 조선시대 왕의 호위를 맡은 무관의 관청

다담:손님 대접을 위해 내 놓은 다과

갱지미: 놋쇠로 만든 반찬 그릇의 하나

술방구리: 술을 넣어두는 , 동이보다 조금 작은 질그릇

전물상: 무당이 굿할 때 차리는 음식상

내행보교:여자가 탄 가마

엄적하다: 잘못된 형적을 덮다.

 물고:죄를 지은 사람을 죽임

의수하다: 거짓으로 꾸민 것이 그럴 듯하다

장채: 비상시에 관아에서 동원하여 파견하던 장정

체차: 관리의 임기가 끝나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일

남진계집: 내외을 갖춘 남의 집 하인

삼문:대궐이나 관청앞에 세운 세 문, 정문,동협문,서협문을 말한다.

홍단지:홍패, 문과 회시에 급제한 사람에게 주던 증서

남행: 음관,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덕으로 하는 벼슬

치가하다: 따로 살림을 차리다

내행:부녀자가 여행길에 오름

배행:윗사람을 모시고 따라감

포서:일이 풀려날 실마리

상식:상가에서 아침저녁으로 궤연앞에 올리는 음식

요부하다:살림이 넉넉하다

도거리:따로 따로 나누지 않고 한데 합쳐서 몰아치는 일

동자: 밥짓는 일

한데우물: 울타리 바깥에 있는 우물

황해도는 도적의 소굴이라, 각색공물이나 진상물품이 너무 많아 민력으로 감당하지 못할 뿐더러, 평안도 변경에 수자리 살러 가는 것이 괴로운 일이라 많은 백성이 도적으로 전락하게 된 때문이다. 이 도적패 중에 청석골패가 이름이 더 높았는데, 그 괴수인 오가는 꺽정이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공론에 따라 서림이를 종사관으로 정한다. 그리고 의형제 맺은 각 두령들 밑에 두목들로 조직을 정비하게 된다. 

 

이 청석골패를 소탕하러 관군이 쳐들어 온다는 기별을 받고 어떻게 해야 할 지 설왕설래하는 중 서림이가 꺽정이에게 큰 그림을 그려준다. 먼저 황해도를 차지할 힘을 기른 후에 황해도와 평안도를 평정하고 이를 근본으로 팔도를 다투자는 원대한 계획을 들은 꺽정이는 서림이의 의견을 쫓아 관군과 접전하지 않고 피할 계책을 세운다. 힘을 기르기 전까지는 관군을 피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이러한 큰 그림을 알지 못하는 곽오주는 평소 서림이와 사이도 좋지 않은데, 도망하자는 서림이가 아니꼬와 서림이를 두들기고 이를 안 꺽정이는 군율로 오주를 참수하도록 명한다. 오두령과 다른 의형제들의 만류로 참은 면하였으나 청석골을 버리는 데 대한 불평불만은 쏙 들어가게 된다. 관상쟁이와 억석이를 풀어 거짓 정보를 관군에 흘린 후 이를 틈타 모두들 가까운 이천 광복산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천 광복산의 일리 정돈되자 꺽정이는 서울 남소문안패 도적패의 우두머리 한첨지 집에 연신하여 서울의 동정을 살피게 된다. 가짜 임꺽정이가 도처에서 나타나 꺽정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 일이 잦다는 소문에 뿔이 난 꺽정이는 몇 놈을 잡아다 본보기로 족칠 요량으로 길을 떠난다. 그러다 꺽정이를 사칭하는 애꾸눈 도적놈을 만나 혼구멍을 내준다. 이 노밤이란 자는 혼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능청스럽게 꺽정이에게 달라 붙어 이를 밉지 않게 본 꺽정이와 함께 서울로 올라간다.

 

서울서 한첨지의 아들 한온이를 알게 된 꺽정이는 한온이의 난봉에 물들게 된다. 기생집에 갔다가 소홍이라 기생을 만나고, 산림골 가난한 양반집 딸 박씨에게 장가들고, 보쌈당해 죽은 아이 원수를 갚느라고 재상 원판서의 딸을 업어와버리고, 정문받은 열녀 김씨와 붙어사는 등, 본기집이라고 주장하는 세 계집을 데리고 살며 기생집 출입도 하며 영웅호색질을 하고 다닌다.

 

광복산에서는 관군이 물러간 후 청석골로 돌아갈 것인지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인지를 두고 설왕설래하던 중 대장이 빨리 와서 이 문제를 결정지어주기를 바라며, 꺽정이를 다시 광복산으로 불러들이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서울의 호색질을 알게 된 백손어미와 백손이는 꺽정이와 담판을 지으러 서울로 올라가고, 봉학이와 유복이도 함께 와서 꺽정이를 데리고 가려한다. 서울서 꺽정이 부부간에 큰 싸움이 나고, 결국 꺽정이는 서울의 계집들을 다 버리고 광복산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서림의 의견대로 청석골로 다시 들어간다. 완전히 불타버린 청석골을 다시 세운 뒤, 배두령의 장인되는 억석이를 찾는 문제로 황천왕동이와 배두령이 서로 다투게 되어 둘은 꺽정이에게 크게 야단받는다. 그리고 천왕동이게게는 억석이를 찾아 오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억석이를 찾다 천왕동이는 김산이를 만난다. 김산이는 꺽정의 무술선생의 조카인데 부정한 아내를 살인하고 청석골로 들어가려 작정한다. 억석이를 찾은 천왕동이와 함께 청석골로 온 김산이는 나중에 꺽정이의 배려로 두령이 되고 억석이는 천왕동이의 주선으로 꽃뫼마을에서 무당서방노릇을 하며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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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백성들은 섬김을 받는 하늘이 아니라 지배계층의 착취를 받는 불쌍한 입장이었던 것이 오늘날도 비슷하지 않은가?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즈음에 그 옛날의 탈취당하던 백성들이 오버랩되는 것은 변하지 않은 인간생활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까? 엇박자를 내며 굴러가는 시스템, 그 와중에 싹트는 부정부패, 그 중심지에 인간의 탐욕이 숨어 있으니, 더러운 인간성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다 일반인 것인가?

 

그러한 불합리속에 살아가며 그것에 불평하며 엎으려고 하는 자들 역시 같은 인간성을 가진 자일 뿐이니, 꺽정이 양반들을 싫어하고 가진 자들의 횡포에 분노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도적으로 굽신거리지 않는 자에게 폭력과 살인등을 저지르며, 가까운 아내에게도 손찌검을 마다하지 않으니, 더구나 계집질등 자신의 허물을 들추기는 싫어하고, 이런 자가 혁명을 일으킨들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꺽정이 수하의 두령들도 마찬가지이다. 오주와 서림이의 충돌, 배두령과 황두령의 마찰 등은 교육받지 못한 자연산의 그들이 자신들의 문제들조차 처리할 수 없는 인간들인데, 권력을 잡게 되면 과연 어떤 일들이 발생할 지 두렵기만하다.

 

정문을 받은 열녀로 알려진 김씨와 꺽정이의 염문은 여자의 욕망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사람이란 누구나 다소의 차이는 있을 망정, 또는 숨겨져 있거나 드러나 있는 것의 차이를 뺀다면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김씨가 시아버지에게 큰소리로 악다구리를 한다거나, 그 여종에게 심하게 대하는 모든 것들이 그 자신의 숨겨진 욕망을 충족치 못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닌가? 꺽정이에게 몸을 허락한 후에는 사람이 달라졌다니, 노처녀의 히스테리란 것이 그런 것이 아닐런지...

 

조선시대라고 하면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여 근엄한 도덕률이 퍼뜩 떠오른다. 하지만 그 시대도 평민, 상민등의 계급에 있어서 남녀간의 통정문제등을 비켜갈 수는 없었을 터이다. 노밤이란 자의 호색, 한온이와 꺽정이의 오입질, 김산의 젊은 아내와 옆집 총각의 통정으로 난 살인, 그 외에 배돌석이를 비롯한 많은 이야기들에서 숨기고 싶었던 욕정등이 드러난다.

 

역사는 인간의 치부를 드러낸다...

 

 

동자아치-밥짓는 여자 하인

능행: 임금이 능에 거동함

개호주: 호랑이 새끼

위요: 혼인때 가족중에서 신랑이나 신부를 데리고 가는 사람

등장: 여러 사람이 이름을 잇대어 써서 관청에 하소연함

해를 지우다: 하루를 다 보내다.  

신칙: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함

율기: 안색을 바로 잡아 엄정히 함

눈결: 눈에 슬쩍 뜨이는 잠깐 동안

사폐:사정, 개인의 사사로운 정

제독을 주다: 기운을 꺽어서 감히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하다.

이남박:안쪽에 여러 줄로 고랑이 지게 돌려 파서 만든 함지박. 쌀 따위를 씻어 일 때에 돌과 모래를 가라앉게 한다.

시량: 땔 나무와 먹을 양식

영거:함께 데리고 가거나 가지고 감

승석: 승려가 저녁먹을 때라는 뜻으로 이른 저녁을 말함

상노: 밥상을 나르거나 잔심부름하는 아이

폭배: 술잔을 돌리지 않고 한사람에게만 거듭 따라 줌

조방꾸니:오입판에서 남녀 사이의 일을 주선하고 잔심부름 하는 사람

영결: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영원히 헤어짐

파루:조선 시대에, 서울에서 통행금지를 해제하기 위하여 종각의 종을 서른 세 번 치던 일. 오경 삼 점(五更三點)에 쳤다.

해동갑하다: 해가 질 때가 되다.

두 동이 싸다: 이럴까 저럴까 망설여, 결심히 확고히 서지 못하다.

연골: 나이가 아직 어려 뼈가 굳지 아니한 체질

해거:괴상하고 얄궃은 짓

두발부리:머리털을 잡고 싸움

지다위: 자기의 허물을 남에게 덮어 씌움, 남에게 등을 대고 의지하거나 떼를 씀

의초: 동기간의 우애, 부부사이의 정

거목초립: 역졸이 쓰던 검은 빛의 초립, 역졸을 말함.

구기본: 어떤 사실에 대하여 그 근본을 캐어봄

중뿔나게: 주제넘게

동소임: 동밈, 동네일을 맡아 보는 사람

찰방: 조선 시대에, 역참 맡아보던 종육품 외직(外職) 문관벼슬. 중종 30년(1535)에 역승고친 것으로 공문서전달하거나 공무여행하는 사람편리도모하였다. [비슷한 말] 마관1(馬官).

바장이다: 짧은 거리를 왔다갔다하다. 머뭇거리다.

난데: 다른 지방이나 고장

처네: 아이 없을 때 쓰는 포대기

노량: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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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성의 칼날 /찰스 길리스피 지음/

 

제3장 새로운 철학

 

17세기의 철학은 자연을 탐구하여 그 신비를 밝히려는 목적을 가진 과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에 기반을 둔 자연과학철학은 철학이라는 허울을 벗고 진정한 과학, 객관성을 갖춘 과학으로 발전해 갔다. 새로운 철학은 과학 방법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고대 과학의 특징

르네상스 이전의 과학은 근대과학과는 다른 두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플라톤적인 형이상학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는 분류 그리고 현상의 설명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바탕을 두었다. 하지만 근대과학은 이러한 특징을 탈피하면서 새로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근대과학의 두가지 흐름

갈릴레오는 과학과 수학을 결합함으로 과학에 객관성을 부여하였다. 이와 함께 베이컨의 경험주의 철학에 의해 고무된 실험과학 역시 고대과학의 낡은 프레임을 걷어버렸다. 또한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철학은 경험주의와는 대척점에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한 줄기 흐름을 담당하였다. 근대과학은 베이컨의 경험주의에 근거한 실험물리학과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이론물리학의 두가지 흐름을 갖게 되었다.     

 

3장의 주요 내용

제3장 새로운 철학에서는 갈릴레오 이후 그리고 뉴턴 이전의 과학사조와 그에 따른 과학의 발전사를 다루고 있다. 르네 데카르트가 과학에 미친 영향, 그리고 뒤이어 베이컨에 바탕을 둔 실험물리학의 성과, 마지막으로 베이컨이 주장한 과학의 대중화 내지는 사회화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느니 살펴본다. 

 

르네 데카르트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17세기 과학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과학은 공허한 철학으로 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베이컨과 의견을 같이하나, 과학의 방법론에 있어 베이컨은 유용성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데카르트는 명석함에 의거하여 과학의 재건을 꾀했다. 다시 말해 베이컨은 실험과 귀납을 신뢰한 경험주의라면, 데카르트는 이성과 연역을 신뢰한 합리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관성의 발견

데카르트의 관성에 대한 이해는 순수한 이성의 놀랄만한 업적이다. 그 이해는 경험적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관성에는 무한까지의 불변의 운동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운동은 실제로는 결코 일어 경험하거나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관성의 개념은 고도로 추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물리적 현상보다는 자신의 사고를 더 크게 확신할 수 있는 사람만이 관성의 법칙을 정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과학은 경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이성의 명석함'에 의지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극도의 추상적인 성질인 관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데카르트와 수학

데카르트가 과학에 끼친 또 하나의 큰 유산이 있다. 그것은 수학이다. 그는 "나는 수학을 특히 좋아했는데, 이것으 그 추리의 확실함과 명증성때문이었다"라고 말하였다. 그의 한 발판은 '이성의 명석함'이었고 또 다른 발판은 수학이었다. 그의 명증성은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기 쉬운 대상"에서 시작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그의 직각좌표의 발견과 도입은 이러한 그의 방법론과 맞닿아 있다. 그에게는 직선보다 더 단순한 것은 없었으며, 모든 존재들 사이의 관계나 비례를 두개의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평면에 놓고 연구하는 것이 그에게는 아주 명확한 것으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좌표계의 도입으로 데카르트는 해석기하학을 창시하게 되었다. 공간적 연속의 수학인 기하학과 불연속적인 양의 수학인 대수학을 결합시켰던 것이다. 이를 이어 받은 뉴턴은 추상적이고 연속적인 공간개념과 구체적이며 불연속적인 원자론적인 물질개념을 통합하게 된다.

 

데카르트의 기계론

이러한 이성과 수학을 무기로 데카르트는 '세계는 하나의 기계'라는 기계론을 주장한다. 데카르트는 세계는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통해 정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할 수 없는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정신이 존재한다면 그 정신 밖에 있는 또 다른 것의 존재 즉 물질을 가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러한 논리하에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이원론적인 생각이 나왔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비어있는 공간개념보다는 물질로 가득차 있는 공간개념으로 이끌었다. 결국 공간은 물질이며, 세계는 물질을 구성성분으로 가진 기계라는 사상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우주의 모습은 올바르지 않다. 그렇다면 그가 자연에 대한 궁극적 이해에서 실패한 것은 무엇때문인가? 

 

데카르트의 한계

데카르트는 자연이 아니라 이성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사상은 지나치게 수학적이다. 과학의 주제는 자연이며, 수학은 도구, 수단, 또는 과학의 언어이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이 언어와 주제를 혼동하고 있다. 또한 그는 단일한 일반화를 가지고 행위와 원인을 일거에 설명하려 한다. 그 단일한 일반화는 기계론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단지 하나의 명석하고 단순한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데카르트도 자신이 비판한 철학의 공허함이라는 오류에 빠지고 만 것이었다.    

 

과학사에서의 데카르트의 위치

하지만 데카르트는 철학과 과학사에 있어 위대한 공헌을 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르네상스 과학은 주로 문화와 철학에서 유래하였다. 하지만 17세기 이후에는 문화와 철학은 주로 과학에서 유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역전의 교차점에 데카르트가 서 있다. 그로부터 자연에 관한 지식은 철학에서 과학으로 옮아갔다. 과학은 법칙의 균일성만을 가정할 뿐 진리의 통일, 우주 인격 같은 것은 상정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으로부터 직접 과학에 총괄적인 공헌을 한 최후의 위대한 체계적 철학자였다.

 

원자론

고대 원자론

데카르트의 기여가 이론 물리학에 있다면 베이컨은 실험물리학에 그 기여가 있다. 이 실험물리학은 원자론에서 그 최초의 모습을 드러낸다. 즉 진공에 대한 실험들이 바로 그것이다. 고대 원자론 학파에서는 레우키포스,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가 있었다. 루크레티우스는 "자연은 물체와 진공으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고대 원자론들은 이와 같이 무한한 진공속에 입자(물체)를 넣었고, 그리고 그 공간내에서의 물체의 움직임 즉 운동이 가능하다는 기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연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원자들의 배열이며, 변화와 진행은 입자의 물리적 재배열일뿐이다고 보았다. 심지어 영혼과 지성도 단순한 미립자의 배열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감지하고 판단하는 물질의 제 2성질 - 색, 냄새, 맛, 형, 감촉 - 은 우리 속에 있는 지각의 양식에 불과하며 이러한 지각은 자연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운동이란 자연의 본질 즉 원자와 관련된 것이지만 물제의 제2속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중세시대와 원자론

이러한 원자론을 철학에 받아들인 것이 에피쿠로스학파이다. 원자론이 지니고 있던 객관성은 목적론을 배제했기때문에 자연에 대한 신의 역할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에피쿠로스의 신들은 세계를 창조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루크레티우스는 "자연은 자유다. 그리고 거만한 사람들의 통치도 받지 않고 신들의 도움없이 우주를 운행시킨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의 자연관은 신학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도덕적 권위의 환영을 받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고대 원자론은 신을 중심으로 하는 중세시대에서는 찬밥신세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상황이 점차 변하기 시작하였다.  

   

진공의 발견

17세기에 들어 피에르 가상디(1592~1655)에 의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이 과학사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17세기에 손으로 즉 실험을 통해 과학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원자론이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원자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증명할 길은 없었으나, 원자가 놓여있다고 가정되는 진공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실험물리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자연은 진공을 혐오한다"는 오래된 목적론적인 원리를 반박할 수 있는 단서를 실험을 통해 찾았다.  

 

갈릴레오의 탁월한 제자인 토리첼리(1608~1647)은 수은 기압계를 발명했다. 토리첼리는 수은이 담신 수직관의 열린 쪽을 수은 용액 속으로 거꾸로 뒤집어 넣고, 그 수직관 속의 액체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수직관 속의 수은이 그 수직관을 타고 내려옴에 따라 형성되는 빈 공간의 의미에 흥미를 가졌다. 그 공간이 진공공간이었다. 그는 진공을 만들 때 받는 저항은 진공 혐오의 원리때문이 아니라 공기의 무게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우리는 공기의 대양의 밑바닥에 살고 있으며, 이 공기는 무게가 있다는 것이 실험에 의해서 밝혀졌다."고 말했다. 실험으로 진공을 만들어냈던 것이었다. 이 진공은 원자가 자유롭게 움직이는 공간이 아니던가? 원자론이 이러한 실험에 의해서 힘을 받기 시작했다.

 

파스칼은 1648년 높은 곳에서는 기압이 내려간다고 하는 유명한 실험을 실증하여 온 유럽의 주의를 이끌었다. 그는 "자연은 진공을 싫어하지 않고 그것을 피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 혐오라고 되어 있는 현상은 모두 공기의 무게와 압력에 기인한 것이다....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참된 원인을 간파하지 못할 때, 그들은 교묘하게 가상적 원인을 만들고 여기에다 특수한 이름을 붙여서 이성이 아니라 그 귀를 만족시킨다."

고 이야기함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목적론의 무지함을 비판하며 과학의 객관성을 드러내 보였다. 

 

보일의 입자철학

실험 물리학은 로버트 보일(1621~1691)과 함께 본 궤도에 진입했다. 그는 진공에 존재에 관한 토리첼리와 파스칼의 의견을 확인했다. 그리고 진공이 되면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연기가 흩어지는 것, 새 털이 총알처럼 낙하하는 것, 그 속에 쥐를 넣어 두면 죽는 것등을 증명했다. 일반적으로 보일은 화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그 자신이 희망했던 바인 원자물리학자라고 간주해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진공보다는 그 속에서 운동하는 원자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진공보다는 펌프의 작용과 공기의 반응 즉 "탄성"에 더 흥미가 있었다. 보일은 그의 실험들을 "입자 철학"의 자료로 삼을 생각으로 계획했다. 그의 '입자철학'이란 '입자과학'과는 다르다. 즉 보일은 공기가 원자로 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원자 모형은 그 현상을 "알기 쉽게"한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입자론은 과학이라기 보다는 철학에 가까웠던 것이다. 보일은 입자 철학을 수립하는 수단으로서, 화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최초의 중요한 물리학자였다.

 

보일은 실험물리학을 발전시킨 큰 공로가 있지만 그의 과학은 완벽한 의미에서 객관성을 지니고 있지는 못했다. 그의 과학이 '입자과학'이 아니라 '입자철학'으로 불려야 했다. 왜 그런가? 보일의 과학은 상식의 과학이었다. 보일의 입자설은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물질에 관한 하나의 생각, 즉 데카르트의 경우처럼 하나의 방법론이었을 따름이다. 그는 화학을 양적인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보일은 공기의 물리적 특성을 발견했지만, 기체의 화학적 특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백년이 더 지나서 돌턴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입자철학"은 수로 표현된 적극적 의미로서의 객관성을 갖게 된다. 하지만 베이컨의 실험주의는 보일과 영국의 왕립학회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베이컨의 영감이 보일에게 작용하여 원자 물리학을 진공으로부터 탄생시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데카르트와 베이컨의 공존

과학이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수학은 오만하다. 그것은 자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신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학만으로는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이 어렵다. 모든 이론이 객관성을 확립하려면 실험적 방법을 통해 심판받아야 한다. 즉 데카르트와 같이 순수하게 이성과 추상적인 수학에 기대는 사람들은, 사실을 진지하고 겸허하게 탐구하는 실험가들에 의하여 재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과 수학에 실험이 더해진다면, 또한 거꾸로 뒤집어 실험에 이성과 수학을 덧붙인다면 어떤 결과가 산출될까?

 

역사는 이와 관련하여 어떻게 흘러갔을까? 실험물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베이컨은 다소 천박한 반지성주의적 입장이었다. 하지만 실험과학자들은 거기에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편협한 태도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들은 사실의 축적과 분류로써 얻은 질서를 추상과 수학 공식에 의하여 얻어진 질서와 대립시키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들은 베이컨식의 방법과 데카르트식의 방법의 장점을 다 함께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물리학은 실험물리학과 이론물리학이라는 두개의 멜로디가 잘 어우러진 음악이 되었다.  

 

과학의 사회성

베이컨의 예언대로 과학은 협동, 커뮤니케이션, 후원등의 필요로부터 사회적 성격을 발전시켰다. 역사적으로 두개의 탁월한 과학단체가 있었다. 런던 왕립학회(1662)과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1666)가 그것이었다.

 

17세기 전반에 파리의 지식인들은 장소를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살롱을 형성했는데, 여기에서 프랑스적 양심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지방의 동료와는 서신에 의존했다. 이 그룹의 중심인 메르센느(1588-1648)신부는 과학의 가십을 전하는 사람으로 "학계의 우편함"으로 유명했다.

 

프랑스 왕립 과학 아카데미

프랑스의 왕립 과학 아카데미는 베이컨의 새 과학상으로 제시된 협동, 커뮤니케이션, 후원등의 요소들이 있었으나 자발적인 성격보다는 국가 통제적 전통에서 구상된 것었다. 그것은 프랑스 공업의 기술적 감독과 개량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리고 회원들은 왕으로부터 연금을 받아 영예를 누렸다. 이렇듯 프랑스에서는 영국보다 과학이 좀 더 전문적으로 제도화되었다. 하지만 루이14세 치하의 프랑스에서 성숙한 과학자들은 데카르트나 파스칼 세대에 비하면 훨씬 빈약했고, 뉴턴 시대에 왕립학회에 모여들었던 영국의 천재들보다 덜 생산적이었다. 18세기 계몽사조나 나올 때에야 비로소 그 우위가 드러나 보였다.

 

영국의 왕립학회

이에 비해 영국의 왕립학회는 또 다른 성격을 지닌다. 프랑스의 왕립아카데미는 국가의 관리하에 전문화의 길을 걸었다면 왕립학회는 정직한 아마추어 기질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17세기 과학 대중의 요구에 대한 자연발생적 응답으로 성립되었다. 왕립학회는 성실한 사람들이 위대한 발견을 이해하려하고, 경건, 학문, 인간성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발전시키려고 토론을 거듭했던 데서 유래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대단하여 과학의 방법과 양식에 있어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 그룹의 한 사람인 윌킨스는 놀랄만한 통찰력으로 갈릴레오의 과학의 수학화와 베이컨의 과학의 사회화 사이에 조정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는 것을 예언했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윌킨스가 과학의 성과중의 하나로서 의견교환이 아니라 사물을 표시하는 기호에 의한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일종의 "학술언어"의 고안인데, 이것은 베이컨의 시장의 우상을 추방하려는 것이었다.

 

 이 그룹은 항구적인 조직을 세우고자 국왕의 은혜를 구했다. 1662년 예비헌장이 발표되었고 그 이듬해 "자연의 지식을 향상시키기 위한 런던 왕립학회"라는 재가를 받았다. "왕립"이라는 칭호는 국왕의 관용을 표시할 뿐, 지원은 없었다. 실제적인 지원은 공공심 있는 후견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자기의 실험실이나 재정상태가 지극히 좋지 않은 학회의 실험실에서 "자연에 관한 지식의 향상"에 실제로 종사하던 보일, 로버트 후크, 에드먼드 핼리등이 이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리하여 왕립학회는 협동적인 문화 운동을 체현하였다. 왕립학회는 영국식의 자발적인 단체로, 대륙에서라면 공영 기관이 되엇을 것에 민영 사업이 손을 뻗힌 것이었다.

 

과학의 대중화 및 사회화

과학 대중이 없었더라면 사회적 활력으로 되기에는 너무 세련된 수준에서,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의 후계자 및 그들과 필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고상한 개념이 교환되는 형태가 계속되었을 것이다. 즉 과학의 사회화를 통한 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반인의 눈에는 과학자들은 고립된 존재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의 진정한 사회적 성격으로 부터 이렇게 동떨어진 견해는 없다. 어는 인문학자는 '그의 과학자 동료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집단을 이루고 샘이 날 정도의 연구비에 힘입어서, 온 세계를 여행하며 언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지만 훌륭한 결과를 맺는, 토론을 하기에는 하등의 방해도 안 될 것 같은 집회에 참석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모두 과학의 언어로 말하기 때문이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과학과 공통의 이해>에서 과학 안에서 살고 과학 안에서 존재하는 참된 공동체를 감동깊게 고찰한다. 이것이 왕립학회가 발족했을 때부터 성취한 것이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

이 당시의 과학과 종교는 서로 반목하는 입장에 있지는 않았다. 청교도의 헌신과 열의등의 종교적 열정은 과학에의 열정으로 옮겨갔다. 보일은 성실한 과학자이자 지극히 종교적인 사람이었으며, 그의 자연신학은 신의 업적은 그 놀라운 자연에 나타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전통에의 적의, 공리주의, 타산적 자기 부정, 세상 일에 대한 소명, 합리성, 경험의 개인적 해석등은 서구 문화사의 일반적 특색으로 칼빈주의자의 행동 양식이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프로테스탄트적 종교적 양식은 재능있는 자나 야심 있는 자를 격려하여 과학을 높여왔다. 또한 시민계급의 환경도 이러한 움직임에 합세하였다. 반면에 가톨릭과 귀족적 환경은 과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프로테스탄트 성향이 강한 스코틀랜드인과 네덜란드인은 과학의 역사에서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카톨릭적 성향의 아일랜드인과 스페인인 가운데서는 두드러진 과학자 무리를 거의 찾아 볼수가 없다. 

 

하지만 이후에 등장하는 계몽사조시대를 거쳐 점차 목적론적인 철학과 객관성이 심화되는 과학사이의 괴리가 점점 벌어지면서 과학과 기독교는 서로 엇박자를 내기 시작한다.  

찰스 길리스피

 

제3장 새로운 철학

 

르네 데카르트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17세기 과학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과학은 공허한 철학으로 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베이컨과 의견을 같이하나, 과학의 방법론에 있어 베이컨은 유용성에 기대고 있고, 데카르트는 명석함에 의거하여 과학의 재건을 꾀한다. 다시 말해 베이컨은 실험과 귀납을 신뢰한 경험주의라면, 데카르트는 이성과 연역을 신뢰한 합리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관성의 이해에 있어 데카르트는 갈릴레오를 초월한다. 갈릴레오는 영속적인 원운동이야 말로 완전한 것이라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원에서 벗어나 무한으로 그 운동의 방향을 돌렸다. 즉 완전한 관성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1) 어떤 물체도 가능한 한 동일 상태를 유지하려 하며, 그 상태는 다른 물체와의 충돌에 의해서만 바뀐다. 2) 어떤 물체도 그 운동을 곡선이 아니라 직선으로 계속하려고 한다. 이러한 직선관성의 원리는 무한의 우주상을 끌어들인다. 코이레는 우주의 무한성이야말로 다른 어떤 과학의 발전보다도 깊게 철학의 방위를 바꾼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뉴턴은 관성의 원리에서 운동의 법칙을 만들어 낸다.

 

이 관성의 개념은 고도로 추상적인 것이다. 그래서 물리적 현상보다는 자기의 사고를 더 크게 확신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것을 정식화할 수 있다. 그런면에서 데카르트는 적절한 사람이었다. 데카르트에게는 오직 명석함, 어떤 결과가 나와도 무관심한 일종의 놀랄 만한 일관성만이 있었을 뿐이다. "눈뜨고 있든지 잠들어 있든지, 우리는 이성의 명증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이성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지, 상상력이나 감각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관성의 발견은 실제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 즉 무한까지의 불변의 운동이라는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한 후에 얻게 된 것이다.

 

데카르트가 물리학에 끼친 유산은, 수학적 무기인 해석기하학, 합리적 광학의 출발점이 되었던 굴절 법칙이 있으며, 물리학을 유클리드적 공간 개념 속에 자리잡게 한 것도 포함된다. 또한 유기체적 목적성을 기계의 비인격성으로 대체하여 전 자연을 포괄하는 질서의 모델로 삼은 것도 그렇다. 하지만 그는 명석함과 단순함이라는 미덕으로 아이러니하게도 형이상학으로 아주 잘못된 물리학을 만들어 내기까지 하였다.

 

방법서설에 나타난 그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은 말에 나타나 있다. "철학은 모든 사물에 대하여 그럴 듯하게 이야기하며, 학식이 자기만 못한 사람들의 찬탄을 사게 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그리고 수학에 대한 그의 찬탄은 "나는 수학을 특히 좋아했는데, 이것은 그 추리의 확실함과 명증성때문이었다."라는 말에 잘 드러나 있다.  

 

데카르트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기 쉬운 대상"에서부터 학문의 개조에 착수했는데, 그는 직선보다 더 단순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존재들 사이의 관계나 비례등을 두개의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평면에 놓고 연구하는 직각좌표의 개념을 생각해냈다. 이렇게 그는 데카르트 기하학의 창시자가 된다. 이것은 좌표와 대수학을 결합시킨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그래프와 방정식, 함수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 이전의 대수학은 불연속적인 양의 수학이었고, 기하학은 공간적 연속의 수학이었다. 자연의 구성성분을 수량화하려는 경향의 대수학과 자연의 통일을 꾀하는 기하학 사이의 괴리는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데카르트가 이 간격을 없애버렸지만 그 가능성을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뉴턴은 이 두가지 수학상을 종합하였다. 추상적이고 연속적인 공간 개념과 구체적이고 원자론적인 물질개념을 통합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세계가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즉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비어있는 공간 개념이 아니라 물질로 가득차 있는 공간 개념을 가지게 된다. 공간은 곧 물질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그는 세계는 하나의 기계이다라는 사상까지 오게된다. 데카르트가 세계에 대한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은 무엇때문일까? 데카르트는 자연이 아니라 이성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사상은 지나치게 수학적이다. 수학은 도구이며 양을 표현하는 수단이고, 과학의 언어이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이 언어와 주제를 혼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단일한 일반화를 가지고 행위와 원인을 일거에 설명하려 한다. 모든 것을 그리고 그 원인과 함께 단일한 일반화로 설명하기 위해 그는 기계론에 의지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느  하나의 명석하고 단순한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르네상스 과학은 주로 문화와 철학에서 유래하였다. 하지만 17세기 이후에는 문화와 철학은 주로 과학에서 유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역전의 교차점에 데카르트가 서 있다. 그로부터 자연에 관한 지식은 철학에서 과학으로 옮아갔다. 과학은 법칙의 균일성만을 가정할 뿐 진리의 통일, 우주 인격 같은 것은 상정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으로부터 직접 과학에 총괄적인 공헌을 한 최후의 위대한 체계적 철학자였다.

 

우주란 기하학적 물리학에서 묘사된 단일한 연속체인가? 그렇지 않으면 불연속체-맥스웰의 정의에 따르면 "두 개로 나눠질 수 없는"물체인 원자-의 덩어리인가? 버트란트 러셀이 말한 것처럼 세계는 당밀이 든 양동이인가, 모래가 든 통인가?

 

아인쉬타인이나 데카르트와 같이 수학적인 인물이라면, 자연의 통일성을 가하학의 언어로 나타낼 것이다. 공간-물질은 연장에서나 분할에서나 모두 무한하다. 그러나 물리적 직관을 가진 탐구자라면, 측정의 명확한 조건, 즉 사실은 그렇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그곳으로 과학이 내려와야할 계량 가능한 것을 찾을 것이다. 따라서 과학의 경험 전체는 기묘한 패러독스를 확증한다. 연장에 있어서는 무한을 요청하면서도, 분활에 있어서는 무한을 배제한다는 것이 물리학이 거듭헤서 보였던 뛰어난 지혜였다. 사물의 논리에는 이에 대한 근거가 아무 것도 없다.

 

원자론

고대 원자론 학파에서는 레우키포스,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가 있다. 이 고대 원자론자드릉ㄴ 무한한 연장을 가진 진공 속에다 입자를 넣었고, 그럼으로써 물질이 보존되는 우주에서 운동이 가능하도록 했다. 루크레티우스는 "자연은 물체와 진공으로 구성되어 있다"과 말한다. 변화와 진행은 객관적 존재를 갖는 특정 크기와 형태를 지닌 입자의 물리적 재배열 그것이다.

 

이러한 원자론을 철학에 받아들인 것이 에피쿠로스학파이다. 원자론은 목적론을 배제하는 객관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결코 도덕적 권위의 환영을 받을 수 없었다. 에피쿠로스의 신들은 세계를 창조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루크레티우스는 "자연은 자유다. 그리고 거만한 사람들의 통치도 받지않고 신들의 도움없이 우주를 운행시킨다"라고 말한다. 그리스 과학의 다양한 유파중에서 원자론자들만이 인간의 사고와 목적으로 부터 법칙을 분리했다. 그들의 자연관은 신학과는 완전히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주의는 훈련된 안정된 취미이고 세상을 마음 내키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관의 창을 통하여 실제 있는 그대로 살펴보는 용기에 찬 체념이다. 감각을 통해서 에피쿠로스적 진리에 접촉한다. 자연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원자들의 배열로, 원자들의 우연한 집합이다. 우리가 감지하고 판단하는 물질의 제 2성질- 색, 냄새, 맛, 형, 감촉-은 우리속에 있는 지각의 양식에 불과하다. 이러한 지각은 원자연의 모습, 자연의 영광과 미를 인식하지 못한다. 인식의 범주들은 자연 속에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혼과 지성도 단순한 미립자의 배열에 불과하다.

 

17세기에 들어 피에르 가상디(1592~1655)에 의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이 과학사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17세기 두뇌만이 아니라 손으로도 과학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원자론이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원자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증명할 길은 없었으나, 원자가 놓여있다고 가정되는 진공의 존재는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실험물리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자연은 진공을 혐오한다"는 원리를 논박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진공의 발견

갈릴레오의 탁월한 제자인 토리첼리(1608~1647)은 수은 기압계를 발명한다. 토리첼리는 수은을 사용하여 위끝이 막힌 수직관 속의 액체의 움직임을 관찰하고는 수은이 그것을 담은 그릇으로 떨어져서 보통 30인치가 되었을 때 관 위쪽에 남는 빈 공간의 의미에 흥미를 가졌다. 그 공간이 진공공간이다. 그는 진공을 만들 때 받는 저항은 진공혐오의 원리가 아니라 공기의 무게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공기의 대양의 밑바닥에 살고 있으며, 이 공기는 무게가 있다는 것이 실험에 의해서 밝혀졌다."

 

파스칼은 1648년 높은 곳에서는 기압이 내려간다고 하는 유명한 실험을 실증하여 온 유럽의 주의를 이끌었다. 그는 "자연은 진공을 싫어하지 않고 그것을 피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 혐오라고 되어 있는 현상은 모두 공기의 무게와 압력에 기인한 것이다....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참된 원인을 간파하지 못할 때, 그들은 교묘하게 가상적 원인을 만들고 여기에다 특수한 이름을 붙여서 이성이 아니라 그 귀를 만족시킨다."

 

실험 물리학은 로버트 보일(1621~1691)과 함께 본 궤도에 진입했다. 그는 진공에 존재에 관한 토리첼리와 파스칼의 의견을 확인했다. 그리고 진공이 되면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연기가 흩어지는 것, 새 털이 총알처럼 낙하하는 것, 그 속에 20일동안 쥐를 넣어 두면 죽는 것등을 증명했다. 보일은 화학자라기보다는 그 자신이 희망했던 바인 원자물리학자라고 간주애햐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진공을 뛰어넘어 또는 진공 속으로 들어가서 원자로 나아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진공보다는 펌프의 작용과 공기의 반응 즉 "탄성"에 흥미가 있었다. 보일은 그의 실험들을 "입자 철학"의 자료로 삼을 생각으로 계획했다. 보일은 공기가 원자로 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원자 모형은 그 현상을 "알기 쉽게"한다고 말한다. 보일은 입자 철학을 수립하는 수단으로서, 화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최초의 중요한 물리학자였다.

 

기계론 철학자는 모든 변화를 "두 개의 가장 종합적인 원리-물질과 운동"으로 돌린다. 말하자면 변화는 객관적 세계의 여러 부분들의 재배치다. 만약 과학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은 혼돈으로 화하고, 세계는 (나중에 괴테가 원했듯이) 측정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공감에 의해서 통찰해야 할 것이 된다. 파우스트는 지식과 권력에의 지름길을 과학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술을 통해서 얻으려 한다.  

보일의 과학은 상식의 과학이었다. 보일의 입자설은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물질에 관한 하나의 생각, 즉 데카르트의 경우처럼 하나의 방법론이었을 따름이다. 그는 화학을 양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 보일은 공기의 물리적 특성을 발견했지만, 기체의 화학적 특성을 발견하지 못했기때문이다. 백년이 더 지나서 돌턴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입자철학"은 수로 표현된 적극적 의미를 갖게 된다.

 

실험에의 열의

베이컨의 실험주의는 보일과 영국의 왕립학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베이컨의 영감이 보일에게 작용하여 원자 물리학을 진공으로부터 탄생시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또한 "베이컨의 문장만큼 <왕립학회의 역사>의 서문으로 어울리는 것은 없을 것이다"라고 스프랫주교는 말했다. 베이컨은 개념을 가지고 질서를 수립하려는 추상적인 사상에 비하면 실험은 쉬운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에게 천하게 보인 것은 실제로 실험하여 얻은 몇 조각을 가지고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발견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겸양이었을 것이다.

 

실험가들은 과학의 장인이었다. 수학은 오만하다. 그것은 자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신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모든 이론은 실험적 방법을 통해 심판받아야 한다. 즉 데카르트와 같은 사람들은 사실을 진지하고 겸허하게 탐구하는 실험가들에 의햐여 재표현되어야 한다.

베이컨은 다소 천박한 반지성주의적 입장이었다. 하지만 실험과학자들은 거기에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사실의 축적과 분류로써 얻은 질서를 추상과 수학 공식에 의하여 얻어진 질서와 대립시키지 않았기때문이다.

 

과학의 사회성

베이컨의 예언대로 과학은 협동, 커뮤니케이션, 후원등의 필요로부터 사회적 성격을 발전시킨다. 역사적으로 두개의 탁월한 과학단체가 있다. 런던 왕립학회(1662)과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1666)이다. 최초로 과학적 목적을 가진 것은 1603년 로마에서 탄생한 린체이 아카데미였다.1657년 창설된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델 치멘토는 계획연구의 산실이었다. 여기에서는 대기압, 온도측정, 압력측정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실험 기구의 고안이 아마 그들의 가장 뛰어난 공헌일 것이다. 그들은 결빙현상이 일정한 온도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7세기 전반에 파리의 지식인들은 장소를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살롱을 형성했는데, 여기에서 프랑스적 양심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을 벌였다. 지방의 동료와는 서신에 의존했다. 이 그룹의 중심인 메르센느(1588-1648)신부는 과학의 가십을 전하는 사람으로 "학계의 우편함"으로 유명했다.

 

영국의 왕립학회와 프랑스의 왕립과학아카데미의 성격의 차이

프랑스의 왕립 과학 아카데미는 베이컨의 새 아틀란티스의 상보다는 프랑스풍의 국가 통제적 전통에서 구상된 것었다. 그것은 왕립학회와는 달리 프랑스 공업의기술적 감독과 개량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재촉받는 일은 거의 없었고, 회원들은 와으로부터 연금을 받아 영예를 누렸다. 왕립학회의 정직한 아무추어 기질과는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왕립학회는 흥미있는 개인적 기획을 넘어서 특별히 자격을 까다롭게 심사하는 일은 없었다. 과학 아카데미의 자리는 제한되어 있었다.

 

영국보다 프랑스에서 과학이 좀 더 전문적으로 제도화되었다. 하지만 루이14세 치하의 프랑스에서 성숙한 과학자들은 데카르트나 파스칼 세대에 비하면 훨씬 빈약했고, 뉴턴 시대에 왕립학회에 모여들었던 영국의 천재들보다 덜 생산적이었다. 18세기 계몽사조나 나올 때에야 비로소 그 우위가 드러나 보인다.

 

17세기 과학 대중의 요구에 대한 자연발생적 응답으로 성립되어 과학의 경향과 양식을 창조한 것은 왕립학회였다. 과학 대중이 없었더라면 사회적 활력으로 되기에는 너무 세련된 수준에서,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의 후계자 및 그들과 필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고상한 개념이 교환되는 형태가 계속되었을 것이다. 왕립학회는 성실한 사람들이 위대한 발견을 이해하려하고, 경건, 학문, 인간성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발전시키려고 토론을 거듭했던 데서 유래했다. 보일은 크롬웰 통치하의 그들의 모임을 "보이지 않는 컬리지"라고 불렀다. 보일은 19세때 왕립학회의 거장들과 교제를 맺게 되었다.

 

이 그룹의 한 사람인 윌킨스는 1648년 새로운 역학과 우주론을 다룬 저작을 출판한다. 그는 놀랄만한 통찰력으로 갈릴레오의 과학의 수학화와 베이컨의 과학의 사회화 사이에 조정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는 것을 예언했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윌킨스가 과학의 성과중의 하나로서 의견교환이 아니라 사물을 표시하는 기호에 의한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일종의 "학술언어"의 고안인데, 이것은 베이컨의 시장의 우상을 추방하려는 것이었다.

 

이 그룹은 항구적인 조직을 세우고자 국왕의 은혜를 구했다. 1662년 예비헌장이 발표되었고 그 이듬해 "자연의 지식을 향상시키기 위한 런던 왕립학회"라는 재가를 받았다. 학회의 <철학회보>가 1665년 창간되어 이후 끊임없이 계속되는 학술지가 되었다. "왕립"이라는 칭호는 국왕의 관용을 표시할 뿐, 지원은 없었다. 왕립학회는 영국시의 자발적인 단체로, 대륙에서라면 공영 기관이 되엇을 것에 민영 사업이 손을 뻗힌 것이다. 거기에는 공공심 있는 후견인과 보일, 로버트 후크, 에드먼드 핼리 등 자기 실험실이나 재정 상태가 지극히 좋지 않은 학회의 실험실에서 "자연에 관한 지식의 향상"에 실제로 종사한 사람들이 제휴했다. 이리하여 왕립학회는 왕정복고 하의 협동적인 문화 운동을 체현하였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 -계몽사조의 기독교에 대한 적의와는 달랐다.

청교도의 헌신과 열의가 종교의 에토스로부터 과학의 에토스로 이행되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생애는 청교도 윤리가 과학과 정치라는 세속적 활동으로 돌려진 예로서, 미국인을 고무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보일에 있어서 이 윤리는 세속화될 것까지도 없었다. 그의 지극히 영국적인 자연신학은 고도의 성실성에 따르는 그 모든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신의 없으로서의 자연이라고 하는 증거 위에 안주해 있었다.

 

칼빈주의자의 행동 양식인 전통에의 적의, 공리주의, 타산적 자기 부정, 세상일에 대한 소명, 합리성, 경험의 개인적 해석등은 서구 문화사의 일반적 특색이다. 프로테스탄트와 시민 계급의 환경은 재능있는 자나 야심 있는 자를 격려하여 과학을 높여왔다. 반면에 가톨릭과 귀족적 환경은 과학자의 발전을 저해했다. 스코틀랜드인과 네덜란드인은 과학의 역사에서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아일랜드인과 스페인인은 거의 찾아 볼수가 없다. 그러나 이 영향들은 사회적인 것이지 교의적인 것이 아니다. 최근 미국 과학자의 출신에 관한 조사에 의하면 대부분 중서부의 특정 종파와 관계있는 소규모 대학 출신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귀족주의의 망령이 남아 있는 남부나 졸업생들이 보통 법률, 외교, 정치 분야로 진출하는 아이비리그 출신이 아니라, 옥수수지대 출신인 것이다.

 

일반인의 눈에는 과학자들은 고립된 존재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의 진정한 사회적 성격으로 부터 이렇게 동떨어진 견해는 없다. 어는 인문학자는 '그의 과학자 동료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집단을 이루고 샘이 날 정도의 연구비에 힘입어서, 온 세계를 여행하며 언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지만 훌륭한 결과를 맺는 토론을 하기에는 하등의 방해도 안 될 것 같은 집회에 참석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모두 과학의 언어로 말하기 때문이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과학과 공통의 이해>에서 과학 안에서 살고 과학 안에서 존재하는 참된 공동체를 감동깊게 고찰한다. 이것이 왕립학회가 발족했을 때부터 성취한 것이다.  

홍명희

 

서림

어린 나이에 왕이 된 명종은 그 어미 문정대비의 수렴청정을 받는다. 그리고 문정대비의 오라비 윤원형은 권세가 날로 커진다. 명종이 나이가 들자 이량을 등용하여 윤원형을 견제하려한다. 이에 이량을 붙좇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김명윤이가 있었다. 그는 현량과에 참예했던 인물이나 을사년에 경기감사로 있을 때 계림군과 봉림군을 모함하고 사림에 해독을 입힌 사람이다. 김명윤이 평안도 관찰사로 제수받고 갈 때 서림이란 사람을 천거받는다. 서림이가 수단이 좋을 것을 알고 그를 신임하여 진상할 물건을 맡긴다. 진상할 물건들 중에 빼돌리다 발각된 서림이는 도망치다 탑고개에서 청석골 도적들을 만나 물건들을 빼앗기나, 손가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청석골 두령들에게 큰 재물을 얻을 방법을 알려준다고 하여 청석골 도둑떼에 참여하게된다.

 

한편 평양감영에서는 김명윤이 예방비장을 시켜 힘이 장사인 진서위 여맹 김양달과 장교 5명과 함께 봉물짐을 서울로 나르다 화적떼에게 뺏기고 만다. 이에 김여맹은 자진해 죽은데, 이 화적패는 청석골패요, 전휘 꾀를 낸 사람은 서림이다. 탑고개에서 봉물을 탈취하면 후환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다른 곳에서 진상품을 탈취한 것이다. 화적패를 잡는다고 운달산 박연중이패를 들이치나 미리 알고 도망치는 바람에 헛걸음을 하고, 서림이의 계략에 빠진 채 청석골패가 봉물을 탈취한 것을 모르고 그리하였다. 이후에 청석골도 치려고 10여명의 군사들이 왔으나 청석골을 찾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 버린다. 청석골 화적들이 10여명의 군사만 아니라 200여명의 관군도 능히 격퇴할 수 있거니와, 접전은 더 큰 화를 불러 올 수 있다고 조언하여 청석골패는 군사들을 피했던 것이다. 강탈한 봉물짐을 다 나누고, 일부는 임꺽정이에게 보내고, 또 일부는 이봉학이에게 보내나, 봉학은 받지않고 돌려보낸다.  

 

결의

황천왕동이가 귀양갔던 제주에서 풀려나온다. 꺽정이와 천왕동이가 봉산에 갈 적에, 꺽정이의 이웃집 최서방이 꺽정이를 화적떼와 내통한 것으로 관가에 고자질하여 꺽정이의 식구들이 모두 잡혀들어가고, 청석골패에게서 받은 물품들도 모두 압수되어 간다. 꺽정이의 아버지는 볼기를 맞고 집에 와서 죽고, 꺽정이의 이복동생 팔삭동이도 죽고만다. 이러한 사태를 알게 된 꺽정이는 양주집으로 돌아와서 파옥하여 가족을 모두 거닐고 청석골로 들어간다. 그 도중에 임진나루터에서 임진별장 이봉학이의 도움을 받아 밤배를 내어 도주하였는데, 이것의 탄로나 봉학이도 서울로 압송되어 간다. 황천동이와 길막봉이는 압송중인 봉학이를 구출하여 청석골로 데려온다. 이렇게 하여 청석골에는 꺽정이를 비롯한 두령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총 여덟명의 두령이 자리를 함께 한다. 오가, 박유복이, 곽오주, 배돌석이, 길막봉이, 꺽정이, 황천왕동이, 이봉학이....그리고 청석골의 장자방 서림까지...

모두들 가족을 데리고 들어와 사는데 아직 홀로 사는 배돌석이와 막봉이는 어째 옆구리가 허전해 진다. 이에 배돌석이가 처자를 하나 구하여 장가들려하자 막봉이도 두고 온 아내가 생각난다. 그리고 두령들의 공론이 정해지지 않았는데도, 위험을 무릎쓰고 아내를 데리러 나갔다가 사로잡혀 옥에 갇히고 만다. 작은 손가로 부터 이러한 소식을 들은 청석골에서는 꺽정이를 비롯하여 열명이 길막봉이를 구하기위해 나선다. 서림이가 꾀를 내어 먼저 가사리에 있는 막봉이를 관가에 고변하여 잡히게 한 박선달(막봉이 아내의 큰아버지)네 집을 들이쳐서 막봉이의 원수를 갚고, 가사리에 불을 놓아 관군을 유인한 후 안성에 있는 관아의 옥을 파하고 막봉이를 구해낸다. 그리고는 칠장사를 찾아가서 병해대사의 사후 만든 불상앞에서 의형제를 맺는다. 임꺽정, 이봉학, 박유복,배돌석,황천왕동이,곽오주,길막봉 이렇게 여덟명이며, 서림이는 오주의 반대로 의형제를 맺지 않는다. 때로 서림의 묘책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이 있고, 이 결의형제에도 빠진 것이 어째 복선인듯...아마 서림이의 배반으로 청석골이 위태해 질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어쨌든 살아서 생불이라 불리던 백정부처의 영험함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꺽정이와 길막봉을 제외한 다른 두령들은 다 뿔뿔이 청석골로 귀환하고, 꺽정이는 길막봉이와 능통이 함께 남아 삼엄해진 포도기찰을 피한다. 보름동안 능통이의 사촌인 진천이방의 집에서 숨어지내다 기찰이 뜸해진 틈을 타서 청석골로 돌아온다.

 

팔삭동이의 자랑질 한 마디에 꺽정이네 집에 난리가 난다.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에게 그걸 건드리는 것은 어떤 일로 되돌아 올 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이야기도 사람을 보아가며 해야 할 듯... 꺽정이네와 기껍지 못한 옆집 최서방앞에서 자랑질을 했으니...쯧쯧

 

꺽정이가 진천 이방의 집에서 그 첩과 상관했던 일이나, 그 집을 떠날 때 그것을 주인에게 발설하는 것은 어찌 보아야 할까? 숨어있는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그 첩의 바램대로 해야만 했을까? 은인의 첩인데...또한 떠날 때 꼭 그것을 말해야 했던가? 그로 인해 진천이방이 분을 품게 되고 살인옥사에 그 이방의 집이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진천이방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꺽정이의 입장도 그러하지만은 진천이방의 입장이 더 불쌍하다. 

 

포흠:관청의 물건을 사사로이 쓰다. 예전에 조세를 내지아니함을 이르는 말

소도바: 불사리를 안치하는 탑

노구메:산천의 신령에게 제사지내기 위하여 놋쇠나 구리로 만든 작은 솥에 지은 메밥

사미: 십계를 받고 구족계를 받기 위해 수행하는 어린 중

십계: 사미중이 지켜야할 열가지 계율

구족계: 비구나 비구니가 지켜야할 계율, 비구에게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가 있다.

다비: 불에 태운다는 말. 시체를 화장하는 것을 이르는 말, 육신을 원래 이루어진 곳으로 돌려보낸다는 뜻.

숙랭: 숭늉, 제사때 올리는 찬물

취군: 군사나 인부를 불러모음

좌기:관아의 으뜸벼슬되는 이가 출근하여 일을 시작함

취품: 윗 어른에게 여쭈어서 그 의견을 기다림

먼장질: 먼 발치로 활이나 총을 쏘는 일

초간하다: 한참 걸어가야 할 정도로 거리가 조금 멀다.

 

 

길청: 군아에서 구실아치가 일을 보던 곳

고샅: 시골마을의 좁은 골목길

색책: 책임을 면하기 위하여 겉으로만 둘러대며 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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