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델,에셔,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

 

제7장  명제계산

 

이전에 MIU체계, pq-체계, tq-체계등이 논의되었었다. 이번 장에서는 명제계산이라는 형식체계가 등장한다.

호프스태터는 왜 명제체계을 도입하는가? 이 체계로 부터 유추할 수 있는 귀중한 정보가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8장에서 다룰 TNT체계의 중요한 요소이기때문이기도 하다. TNT체계는 호프스태터가 소개하는 마지막 형식체계이다. 그 형식체계를 이야기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길을 걸어왔던 것 같다.

 

그렇다면 명제계산이라는 체계로 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인공지능을 위한 귀중한 요소, 이상한 고리는 무엇인가?

다음의 말에 유의해 보면,  <명제계산에서는 모든 과정이 전적으로 활자로만 이루어진다. 그 누구도 "그 안에서" 그 연쇄체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기계적으로, 아무 사고도 동반하지 않고, 엄격하게, 심지어는 우둔하게 진행된다.>

 

이 언급은 명제계산의 기계적 특성을 잘 묘사한다. 이것은 지능적 특성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 형식체계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몇가지 특징들은 인공지능 문제에 대한 뭔가 중요한 요소들을 생각해 보도록 한다. 그것은 층위개념이다. 지능이란 체계 그 자체를 생각하고 논하는 것이다. 즉 하나의 형식을 그 외부에서 바라보며 그 형식체계를 논할 수 있는 것이 지능의 특성이라 볼 때, 한 형식체계의 상위 층위 개념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호프스태터는 명제계산의 한계 내지는 모순성을 지적함으로 상위체계 즉 메타체계와의 상호작용의 필요성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듯 하다. 다음 호프스태터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 부분에서 그 점을 추리해 볼 수 있겠다. 

 

<이 작은 논쟁은 논리와 추론적 사유가 스스로를 변호하기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어떤 특정한 순간에 우리는 절벽에 도달한다. 즉 "나는 내가 옳다고 봐"라고 큰 소리를 치는 것 외에는 어떤 방어수단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추론적 사고의 패턴을 영원히 변호할 수는 없다. 믿음이 그것을 대신하는 시점이 온다... 우리는 어떤 증거가 한 체계 안에서 옳다는 궁극적으로 절대적인 증거는 결코 댈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증거의 증거 또는 증거의 증거의 증거 등을 댈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맨 바깥의 체계 증거의 타당성은, 믿을 수는 있지만 증명되지 않은 가정에 머무른다.>   

 

....러셀의 역설이 수학을 확고한 반석위에 건축하려는 시도가 무모함을 일깨워 준 이후에도 힐베르트를 비롯한 일단의 수학자들은 수학의 완전화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특히 러셀은 그 자신의 이름을 딴 역설을 극복하려는 여러 노력으로 상위 층위 개념을 생각해 냈지만 이 역시 수학을 확고한 기반위에 세워 놓기에는 역부족임을 깨닫는다. 더 나아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힐베르트를 비롯한 실증주의 수학에 마지막 결정타를 가하고 만다. 결국 완벽한 학문의 위치에 있던 수학 조차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어 버렸던 것이다.

 

<명제계산은 어떤 점에서 추론적 사고와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명제계산의 규칙들을 인간의 사고규칙들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순적인 사고를 야기한 자신의 추론적 사고의 믿음과 방식들을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모순을 야기했으리라고 보이는 자신의 내부의 체계들로부터 가능한 벗어나서 그것을 수리하고자 할 것이다.>

 

<실제로 모순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보와 발전의 주요 원천이며, 수학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전에 수학자들은 모순을 찾았을 때 그 즉시 모순을 야기한 체계들을 확인하여 그것으로 부터 벗어나서 그 체계를 개선하려고 했다. 모순의 발견과 수리는 수학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신앙에서도 이러한 모순의 발견고 그로 인한 체계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할 수 있을까? 신에 대한 신앙을 완전을 바탕으로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완전을 가정한 체계내에서 모순이 발견된다는 것은 당황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논리 자체의 불완전성과 우리 자체 지식의 불완전성으로 볼 때, 모순이 아닌 것이 모순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데카르트는 무한으로 뻗어나가는 관성을 명석한 이성으로 볼 수 있었다. 우리 지구상의 환경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현상, 모순이 되는 현상이 관성인데, 이 한계를 벗어나 이상적인 환경 즉 아무런 힘의 영향도 받지 않는 환경을 가정했을 때 비로소 명확히 드러나는 관성을 정의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형식체계내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것은 불가능한 상황을 가정하는 지능의 한 요소로서 가능하게 된 것은 아닌가? 그야말로 호프스태터의 말처럼 언젠가 믿음이 필요한 때가 닥치게 되는 것이다.

 

<더욱 적절한 (그와 같은 모순)은 바로 이 순간 다루고 있는 모순, 즉 우리가 실제로 생각하는 방식과 명제계산이 우리를 흉내내는 방식 사이의 괴리이다. 이것은 수 많은 논리학자들을 괴롭힌 원인이었기 때문에, 명제계산이 우둔하거나 경직되지 않도록 많은 창조적인 노력이 경주되었다....더욱 극단적인 시도들은 완전성이나 무오류성에 대한 요구를 묵살하며, 그 모든 비정합성을 가지고서 인간의 추론적인 사고를 모방하고자 한다. 그런 연구들은 이제 더 이상 수학에 견고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간단히 말해서오로지 인간의 사고과정을 연구하는 것이 그 목표이다.>

 

...지능의 또 한가지 특징은 논리의 한계를 벗어난 비정합성이라...??? 인간의 사고 과정은 결코 수학적이지 않다. 그 독특한 사고과정을 어떻게 흉내낼 것인지 인공 지능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괴델,에셔,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

 

제6장  의미는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가?

 

이 장은 의미가 코드화된 메시지, 암호해독자 및 수신자 사이에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가를 포괄적으로 논의한다. 그 보기로 DNA 유전자 코드, 판독이 안 된 고대의 비문, 우주공간을 날려보낸 바흐와 케이지의 음악이 담긴 음반을 들고 있다. 지능과 의미사이의 관계를 고찰한다.

 

객관적인 의미가 존재하는가? 지능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모든 수신자에게 발신자의 의도가 동일한 의미로 전달될 수 있는가? 그러한 뜻에서 객관적인 의미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발신자의 의도와는 다른 의미를 창출해 내는 그런 종류의 지능이 있다고 볼 때, 객관적인 의미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수신자의 지능의 수준이나 종류에 따라 주관적인 의미로만 전달되는 상황이 가능할 것인가?

 

정보 저장체와 정보 발현체가 있다. 음반은 정보 저장체, 전축은 정보 발현체에 해당할 것이다. DNA분자는 유전자형(genotype)으로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는 정보 저장체이며, 이 정보를 바탕으로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하나의 유기체로 변환된다. 이 유기체는 정보의 표현형(phenotype)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표현형인 유기체의 물리적인 특징과 와 유전자형인 DNA사이에는 그 어떤 유사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 둘은 이상한 동형관계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음반과 음악작품사이에는 한 구조의 부분이 다른 구조의 부분으로 쉽게 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평범한 동형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유전자형을 표현형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유전자형보다 훨씬 더 복잡한 메커니즘이 작용해야 한다. 유전자형의 다양한 부분들은 이러한 메커니즘을 위한 방아쇠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정보는 유전자 속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메커니즘 속에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도 있겠다.

 

모든 메시지는 세 층위를 가진다. 메시지의 해독을 위해서는 정보의 세 층위가 있는데 그것은 1) 틀메시지, 2) 외부메시지, 3) 내부메시지 이다. 틀메시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해독 메카니즘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 속에 어떤 특정한 내부메시지가 들어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는 모든 구조나 기타 지능의 증거들이 틀메시지에 속할 것이다. 외부메시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내부 메시지에 대한 올바른 해독 메카니즘을 구축한다는 것 또는 구축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을 뜻한다. 내부메시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발신자에 의해서 의도된 의미를 추출했다는 뜻이다.

 

틀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한다. "도대체 메시지가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이를 위해 기본적으로 가정해야 할 것은 우주에 있는 모든 지능적인 존재가 우리와 전반적으로 유사한 인지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매우 규칙적인 기하학적 구조 안에 비주기적 결정이 발견된다면 이는 내적인 메시지를 숨겨놓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소수가 바로 그러한 일종의 규칙적인 구조안에 숨어있는 비규칙적 결정으로 신비한 창조주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메신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우주에 있는 지능적인 존재를 가정할 때, 이 지능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보아야 할 지 곤혹스러울 수 있다. 우리의 지능과 닮은 존재만을 '지능을 가진 존재'라고 부르며, 다른 종류의 대상들은 지능적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하는 것을 지구 쇼비니즘이라고 불러도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분명한 틀메시지에도 불구하고 그 메시지를 무시하는 방법으로 반응하는, 아니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일개의 운석이 우리 지구인의 쇼비니즘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더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가정하는 것은 과연 이치적일까?

 

지능을 가진 우주의 존재가 있다면, 그들이 바흐의 음반과 존케이지의 음반을 통해 그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바흐의 음악은 그야말로 화음의 아름다운 비주기적 결정이며, 반면에 케이지의 곡은 불확정적으로 창출된 요소들의 구성이다. 아마 바흐의 음악을 접하게 된 지능은 그 곡의 패턴, 그리고 구조적인 층위(선율, 화음, 박자)의 복잡성에 따라 바하를 포함한 인간 종의 지능이 어느 수준에 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렇게 파악할 수준을 가진 지능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한 지능적인 추리로 마침내 인간 종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그 음악으로 부터 끄집어 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맥락을 상실한 채 전해진 케이지의 음반은 지성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보다는, 그에 접한 지능은 그 메시지가 단순한 우연성에 의한 것임을 추리하게 될 확률이 높다. 물론 케이지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음악,예술,문화의 흐름과 같은 맥락이 함께 전달된다면 사정은 달라지겠지만...

 

....호프 스태터의 생각의 참신함과 천진스러움은 재미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지능과는 다른 지능이 존재할 가능성을 논한다는 자체가 참으로 천진난만하지 않은가? 예전에 생명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우리 지구상에 사는 생명과는 다른 종류의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에 대해...예를 들면 지구에는 지구의 환경에 알맞는 생명체가 진화되어 살게 되었다면, 다른 행성에는 그 환경에 알맞는 또 다른 생명체가 진화라는 과정을 통해 살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또한 바하의 음반과 존 케이지의 음반에 근거하여 지성을 유추해 낼 것이라는 그의 생각은 상식을 뛰어 넘은 어린애다운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케이지의 음악이 어떤 흐름의 한 구성 요소이며 필연적이라고 말하기까지는 지나치지만 필요조건을 충족하는 장르의 음악임을 파악하는 그의 지성은 그의 지적인 범위가 과학에만 한정된 것이 아닌, 과학과는 정 반대의 끝에 서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예술에 대한 그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 

 

 

결론적으로 의미는 어디에 숨어있는가? 기본적으로 내부 메시지에 보편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내부메시지들 들여다 볼 수 없다하더라도 의미의 존재여부를 판단하게 해주는 틀메시지가 하는 역할도 있다. 그럼 외부메시지는...가장 흥미로운 생각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외부메시지에 따라 내부메시지가 여러가지로 해석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없다. 즉 해독 메카니즘에 따라 달리 해독될 수 있는 텍스트도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예를 들면 텍스트의 어느 부분을 전경과 배경으로 볼 것인지 결정하는 것도 다른 해석을 낳게 할 수 있다. 이런 예는 어떨까? '아버지가방에들어간다.' 이 문장은 1) 아버지가 방에 들어간다. 2) 아버지 가방에 들어간다. 두가지로 해독이 될 수있다. 맥락없이 이 텍스트만 주어졌다면 두가지다 가능한 해독이 될 수 있다. 이것은 해독메카니즘 즉 외부메시지가 의미를 창출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의미는 메시지의 세가지 층위에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러한 메시지의 층위를 관통할 수 있는 지능의 특징을 가지도록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 인공지능의 갈 길은 험란하고 멀기만 한 것 같은데...  

괴델,에셔,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

 

제5장  재귀적인 구조와 재귀순환적 과정

 

1장에서 4장에 이르기까지 다루어진 내용들을 검토해 보면 형식체계와 그 외부의 더 큰 형식체계, 그러한 형식체계들의 상호관계, 나아가서 이러한 형식체계의 위계의 존재에 대해 암시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체계를 넘나드는 사고야 말로 지능의 특징이며, 인공지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본적인 개념등을 구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인공지능을 개발하기 위한 길 위에 도사리고 있는 난점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제 5장에서 다루는 재귀적인 구조 맻 재귀순환적 과정은 형식체계의 위계의 구조와도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이는 컴퓨터에서의 작업과도 비교된다.  더 낮은 단계로의 진입을 위한 '푸시', 그리고 그 낮은 층위에서의 연산을 종결하고 나서, 다시 원래의 단계 즉 푸시 직전의 연산상태로의 귀환(팝), 그리고 연관된 정보 즉 귀환주소나 중단의 지점에서의 연관된 사실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보(변수결합)를 제공하는 임시기억장치등은 컴퓨터 작업의 특성이다. 이러한 푸시, 팝, 임시기억장치등을 이용한 작업은 일종의 재귀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복제나 변형복제등을 통한 자기증식등도 일종의 재귀적인 구조를 가지는 것이며, 특정한 경우에는 이러한 재귀순환적 구조는 카오스 즉 예측불가능성과도 연결된다. 이는 인공지능을 개발하기 위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재귀순환개념과 불규칙성

이러한 재귀순환개념이 음악의 여러 패턴, 언어적 패턴, 기하학적 구조, 수학의 함수, 물리학이론, 컴퓨터 프로그램등의 여러 맥락으로 소개한다. 특히 언어적 패턴에서 나타나는 재귀순환적 구조는 재귀순환추이도(RTN - Recursive Transition Network)를 통해 시각적으로 표상된다. 수학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피보나치 수열이 재귀순환적인 구조를 가진다는 것이다. 피보나치 수는 바로 앞의 선행하는 피보나치 수들에 의해 정의된다. 더욱 경악하게 하는 것은 Q(n)=Q(n-Q(n-1)) + Q(n-Q(n-2)), Q(1)=Q(2)=1, n>2 와 같은 함수이다. 이 재귀순환적인 함수를 통해 생성된 수열은 상식을 벗어난다. 즉 정의에 따라 이 수열은 규칙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계속 수열을 진행시키면 더욱 더 무의미하게 보이는 수열이 형성된다. 이것은 카오스를 질서정연하게 생성하는  매우 특이한 경우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상이성 속에서의 동일성"에 직면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된다.

두 개의 사물은 언제 동일한가?

그 질문은 이 책에서 반복되어 나올 것이며, 우리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그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단순한 질문이 인공지능의 본질과 얼마나 깊이 연관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 문제가 재귀 순환에 대한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재귀순환이란 "상이성 속에서의 동일성"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영역이기때문이다. 재귀순환은 "동일한" 사태가 상이한 층위들에서 한꺼번에 출현하는 데 근거하고 있다. 물론 상이한  층위들에서의 사태들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 오히려 많은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불변의 속성을 찾아낸다.>

 

프로그래밍과 재귀순환: 모듈성, 고리, 처리절차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본질적 기법 중의 하나는 모듈화이다. 즉 두개의 처리절차가 넓은 의미에서 동일해 지는 것을 감지하는 것이다. 일정한 조건이 충족될 때까지 일련의 연산을 계속 수행하도록 하는 하나의 고리를 만들 수 있다. 이 때 조건에 따라 경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매개변수와 조건들로 무장된 RTN을 확대추이도(ATN: Augmented Transition Network)라고 한다.

 

재귀순환과 예측 불가능성 

<재귀순환적인 나열은 기존의 규칙들을 통하여 낡은 것들로 부터 새로운 것들이 창발하는 하나의 처리과정이다. 얼핏 보기에는, 그런 처리과정들에서는 예를 들면 Q-수열의 예측 불가능성과 같은 많은 놀라운 것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런 유형의 재귀정의된 수열에는 일종의 내재적으로 증식하는 복잡성이 전형적이기때문에, 우리가 깊이 들어갈 수록 예측하기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것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적당히 복잡한 재귀순환적인 체계들은 예정된 어떤 표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지능을 정의하는 속성중의 하나가 아닐까? 프로그램들이 재귀순환적으로 스스로를 호출할 수 있는 처리과정들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대신에, 자기 스스로를 변경할 수 있고, 다른 프로그램에 영향을 주는 프로그램들 그리고 그것을 확장하고 개선하며 일반화하고 고정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없을까? 안 될 이유가 없다. 짐작컨대 이런 종류의 "헝클어진 재귀순환"이 지능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괴델,에셔,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

 

제4장  무모순성, 완전성, 그리고 기하학

 

형식체계의 무모순성/ 모순성, 그리고 완전성/불완전성에 대한 문제가 논의된다.

"무정의 용어"라는 대단히 난해한 개념이 설명되고, 무정의 용어가 체계의 무모순성 및 완전성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그리고 지각 및 사고 과정에 대해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이로 인해 기하학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 지 검토한다.

 

괴델의 불완전성

<모든 주어진 형식체계에 있는 진리란 정리적 속성을 초월한다는 그 사실이 바로 그 체계의 "불완전성"이다.>

진리의 집합은 정리의 집합보다 크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되겠다. 다시 말하면 증명할 수 없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호프스태터의 말을 다시 빌리면, <진리와 정리성이라는 개념들 사이의 괴리>가 있다는 말이다.

 

모순성

두가지 부류의 모순성을 지적할 수 있다.

1) 외부세계와의 모순

2) 내부적인 모순

 

형식체계내의 정리들을 해석하였을 때, 그 해석된 명제들에 상당수의 오류명제를 포함한다면 이 체계는 외부세계와의 모순이다.

또한 그 체계가 자기들끼리도 충돌하는 명제들을 포함한다면 이는 내부적인 모순을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체계내의 기호에 대한 의미있는 해석을 발견하여 외부세계와의 모순 및 내부의 모순을 동시에 제거할 수도 있다.

호프스태터는 수정된 pq-체계에 대한 설명으로 이를 이해시키고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출현

유클리드 기하학에는 다섯가지의 공준을 제시한다. 그 중 앞의 네 개의 공준을 토대로 유도될 수 있는 기하학을 절대기하학이라고 부른다.

다섯번째 공준은 문제가 되어 왔다. 유클리드를 포함하여 그의 제자들 그리고 수많은 학자들은 제 5공준을 1~4공준을 이용하여 증명하기 위하여 노력을 기우려 왔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등장하게 된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출현하게 되는 데는 무정의 용어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점, 직선등의 의미를 그것들이 나타나는 정리(또는 명제)의 집합을 통해서 규정되도록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비유클리드 기하학 발견자들의 위대한 인식이었다.>

예를 들어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정의되는 '점'과 타원기하학에서 정의되는 '점'은 같지 않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수많은 직선이 한 점을 지날 수 있으며, 두 점은 한 직선을 결정한다. 하지만 타원기하학에서는 사정이 다른다. 수많은 직선이 구 표면의 두 점을 지날 수 있다. 구의 지름의 양쪽 끝에 존재하는 두 개의 점은 평면기하학의 한 점에 상응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타원기하학에서는 점은 대칭을 이루는 두개의 점들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점'이나 '선'같은 낱말들이 단지 그것들이 출현하는 명제가 부여하는 의미만을 가지는 것으로 취급하게 되면, 그 특수한 낱말들은 더 이상 일상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을 무정의 용어(undefined term)이라고 불린다. <무정의 용어의 완벽한 정의는 오직 공준에서 유지된다. 왜냐하면 공준으로부터 유도되는 명제들은 이미 그 공준에 함축되었기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공준이란 모든 무정의 용어의 정의들, 즉 다른 무정의 용어들에 의해서 정의된 모든 무정의 용어들의 정의들에 대한 함축적 정의일것이다.>

 

특정한 낱말을 무정의 용어로 사용하여 기하학을 추구함으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발견되었다. 낱말들은 확고하고 불변의 의미를 가지는 부류와, 체계가 모순이 없을 때까지 그 의미가 조절되어야 하는 부류(무정의 용어)로 나뉜다. 이런식으로 기하학을 추구하는 것은, 첫번째 부류의 낱말들에 대해서는 그 의미가 이미 기하학 외부의 어딘가에 확정되었다는 것을 요구한다. 이 낱말들은 그 체계에 토대가 되는 구조를 부여하는 견고한 뼈대를 형성한다. 이 뼈대에 다른 재료가 채워지면 그 체계는 변할 수 있다.

 

무모순성과 모순성

무모순성과 모순성을 정의해 보자. 외부세계와의 모순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경우 무모순성은 해석된 모든 정리가 참인 명제가 된다는 것이며, 모순성은 해석된 문장들 중에서 적어도 하나의 오류진술이 있을 경우 말한다.

 

내적인 모순성에 대해서는 어떤 체계가 그 해석이 양립불가능한 둘 이상의 문장을 함유하면 모순일 것이고, 해석된 모든 문장이 양립가능한 경우에는 모순이 아닐 것이다. 즉 내적 무모순성은 모든 정리가 참임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정리들 간의 양립가능성을 요구할 뿐이다.

 

정리하자면, 해석된 모든 정리가 참으로 증명되면 외부세계와 모순이 없다는 것을 말하며, 해석된 모든 정리들이 양립가능한 것으로 증명되면 내적으로 모순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가상의 세계와 무모순성

이러한 두 종류의 무모순성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생긴다. 여러 개의 명제가 서로 양립가능한 지 여부를 확인하려면, 우리는 모든 명제가 동시에 참일 수 있는 그런 세계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내적인 무모순성은 외부세계와의 무모순성에 의지한다. 그 "외부세계"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그 세계 대신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상세계]이다. 가장 관대한 무모순성의 세계는, 논리학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 "논리학적 무모순성"일 것이다. 그 외 '수학적 무모순성, 물리학적 무모순성, 생물학적 무모순성'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면 이 모든 가능한 세계가 공유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공통의 토대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반드시 그 토대에는 논리학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순을 추구하는 선에 대한 믿음의 체계는???)

 

대부분의 현대 수학자와 철학자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논리학과 더불어 우리가 "상상 가능한 세계"라고 이해하는 것에 속하는 핵심 수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페아노-산법이라 불리는 것이다.

 

완전성

무모순성이 기호들이 수동적 의미를 얻는 최소 조건이라면, 그 상보적인 개념, 즉 완전성은 이 수동적 의미를 최대한 확증하는 것이다. "체계에 의해서 생성된 모든 것은 참"이라는 속성이 무모순성이라면, 완전성은 정반대이다. "참인 모든 명제는 체계에 의해서 산출된다" 이것은 이 세계의 모든 참인 진술이 아니라, 우리가 체계 속에 표상하려고 했던 영역에 속하는 것만을 의미한다. 따라서 완전성이란 "체계의 표기법으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참인 진술은 하나의 정리이다'를 의미한다.

 

괴델의 정리가 말하는 바는 "충분히 강력한" 어떤 체계도 바로 자신의 성능 때문에, 이를테면 수론의 명제로서 참이기는 하지만 정리가 아닌 적형적인 연쇄체가 있다는 점에서(체계 내부에서 증명될 수 없는 수론에 속하는 진리들도 있다)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pq-체계와 같은 것은 완전하지만 충분히 강력하지 않기때문에 수론의 모든 진리를 감당할 수 없다.

 

....지난 장에서 전경과 배경을 논할 때 이야기한 점들의 확장이라고 보여진다. 즉 어떤 충분히 강력한 체계라 할지라도 그 불완전성을 제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인공지능으로 가는 꿈의 실현에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괴델,에셔,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

 

제3장  전경과 배경

 

지금 호프스태터가 관심을 갖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세계를 반영하는 형식체계를 만들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지난 장에서는 현실세계의 일부를 pq-체계로 형식화할 수 있음를 보여주었다. 이 pq-체계는 현실의 '더하기'개념을 형식체계화 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소수를 합성수와 구별할 수 있는 형식체계'를 만들 수 있을까? 라는 문제를 살펴보자. 먼저 '곱하기'의 개념을 형식체계화한 tq-체계를 고찰해보고, 이것을 이용하여 합성수를 규정해 본다. 그리고 나서는 이 합성수 생성규칙에 따라 형성된 정리의 보집합 개념을 활용하여 소수를 규정하는 발상과 그 문제점을 알아본다. 이 문제점을 고찰하는 가운데 '전경과 배경'이라는 주제개념이 등장한다.

 

이 개념과 관련있는 용어는 1) 흘림체(cursive)로 그릴 수 있는 전경 2) 재귀순환적(recursive)인 전경이다. 흘림체로 그릴 수 있는 전경은 그 배경이 다만 그림 그리는 과정의 우연한 부산물로 나타나는 전경인 반면에, 재귀순환적인 전경은 그것의 배경 또한 독자적인 전경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에셔는 그런 재귀순환적인 전경을 그린 대가였다. 쉽게 말하자면 전경 자체에만 의미가 있는 경우에는 cursive하다고 이야기 하고, 전경만이 아니라 배경 역시 의미가 있는 경우에는 recursive하다고 보는 것이다. 아래 그림은 에셔가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전경과 배경의 구별이 없다. 흰색의 새모양(?)을 전경으로 보면 검은색 새가 배경이 될 터이고, 검은색 새를 전경으로 보자면 흰색새가 배경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재귀순환적이라 말한다.

에셔

 

결정규칙으로 검출할 수 없는 정리

그렇다면 합성수와 소수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합성수가 전경이라면, 소수는 배경이면서도 독자적으로 전경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다행히 합성수와 소수의 경우는 그러하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그렇지 아니하다. 그것은 다음 두가지 이유때문이다.

1) 모든 비정리의 집합 내부에서 일정한 참이 발견된다.

2) 모든 부정된 정리의 집합 외부에서 일정한 오류성이 발견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결정규칙이 모든 정리를 창출해 내지 못한다. 또한 결정규칙으로 검출할 수 없는 정리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공리로 부터 시작하여 증명할 수 있는 정리(진리)의 집합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으로 도달할 수 없는 진리들이 그 정리의 집합 외부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정리의 부정의 집합을 가정할 때 역시 그 집합의 외부에 정리(진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도달할 수 없는 비진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쿠르트 괴델의 정리가 아닌가? 힐베르트는 완벽한 수학의 세계를 꿈꾸었지만 괴델은 그 꿈을 부서버리고 말았다. 증명할 수 없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버린 것이다. 증명할 수 없는 진리는 전경도 아니요, 배경도 아닌 것이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형식체계가 있을 때, 그것의 무표공간(비정리의 집합:배경)은 어떤 형식체계의 유표공간(정리의 집합:전경)도 아니다.>

<재귀순환적으로 연산될 수 있는, 그러나 재귀순환적이지 않은 집합들이 존재한다.>

'재귀순환적으로 연산될 수 있는'이라는 수학적 표현은 "흘림체로 그릴 수 있는"이라는 개념이며, '재귀순환적'이라는 표현은 "재귀순환적으로 그릴 수 있는"이라는 의미로 받아 들일 수 있다. '재귀순환적인 집합'은 그 배경 또한 하나의 전경이 되는 그런 전경이다. 즉 그 전경만이 재귀순환적으로 연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전경의 상보적 부분인 배경 또한 재귀순환적으로 연산된다.

 

여기에서 이러한 결론이 나온다.

<그것에 대하여 어떤 활자형 결정절차도 없는 그런 형식체계가 존재한다.>

<괴델의 정리, 튜링의 정지문제 같은 제한적 결과라든가 재귀순환적으로 연산될 수 있는 모든 집합이 다 재귀순환적인 것은 아니라는 원리를 토대로 제시된다.>

 

나 개인의 의문..."어떤 활자형 결정절차도 없는 그런 형식체계를 형식체계라 부를 수 있는가? 그 형식체계에 밎는 정리를 어떻게 생성해 낼 것이며, 비정리를 어떻게 구별해 낼 것인가? 바보! 증명할 수 없는 정리들의 집합도 하나의 형식체계로 볼 수 있지. 하지만 그 형식체계내에서는 어떤 것이 정리인지 비정리인지 구별할 결정절차가 없다는 것이지. 결정절차가 없는 형식체계!!! 음~ 인공지능에서 또 다시 멀어지는구만~

괴델,에셔,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

 

제 2장 수학에서의 의미와 형식

 

<언어와 사고는 과연 형식화 규칙을 따르는가 그렇지 않은가?>

언어와 사고는 현실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언어와 사고를 형식화할 수 있다면, 현실의 세계도 형식화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형식화된다는 것은 컴퓨터로 그 문제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컴퓨터로 현실세계를 다룰 수 있다는 말인가? 즉 인공지능이 가능한가? 지금 호프스태터는 그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그의 논증을 펼친다. 즉 형식체계와 수학적 현실을 연결시킴으로, 즉 동형관계를 형성시킴으로 인공지능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pq-체계와 그 동형관계에 대해 알아본다.

 

 

pq-체계

정의: x가 오직 붙임표(-)들로만 이루어질 경우에만, xp-qx-는 하나의 공리이다.

(x가 붙임표들만 이루어진다는 것은,  x가 - 또는 --, 또는 --- 등과 같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x=- 일때 xp-qx- = -p-q--가 된다)

규칙: x, y 그리고 z는 붙임표만을 가지는 특정한 연쇄체들이며, xpyqz가 하나의 정리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xpy-qz-도 하나의 정리이다.

 

예를 들면, x= --, y=---, z=- 라고 할 때

만약 --p---q- 가 정리로 판명되면 --p----q--도 정리이다. (하지만 이 경우 --p---q-은 정리가 아니다. 즉 xp-qx- 이라는 공리에 맞지가 않기때문이다. 당연히 --p----q--도 정리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연쇄체의 형식만을 보자면, 먼저 일련의 붙임표로 시작하는 연쇄체 그리고 그것에 뒤이어 하나의 p, 두번째 붙임표무리 그리고 q가 뒤따르는 연쇄체 그리고 마지막 붙임표로 종료되는 모든 연쇄체들은 적형적인 연쇄체(well-formed strings)이다. 즉 그러한 적형적인 연쇄체들은 모두 공리인 xp-qx-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결정절차

어떤 연쇄체가 정리인가의 여부를 판정하는 기준은 p앞의 붙임표의 갯수와 q 앞의 붙임표의 갯수를 더한 갯수만큼의 붙임표가 q 뒤에 와야 한다는 것이다. 공리를 잘 보라. xp-qx- 에서 'x + - = x-' 의 관계가 있다. x=--라면 공리는 --p-q---의 형태가 될 것이다. 그리고 붙임표를 보면, p 앞의 붙임표 2개, q앞의 붙임표 1개, 총 3개의 붙임표가 있다. 그래서 q뒤에 붙임표가 3개가 붙게 된다. 붙임표들간의 관계는 xpyqz에서 x+y=z의 관계가 된다. 그렇다면 2+2=4 이므로 --p--q---- 은 정리인 반면, --p--q-는 정리가 아니다.

 

자! 그렇다면 pq-체계의 정리들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p---q-----라는 연쇄체는 2+3=5 이므로 정리이다. 그러면  --p---q----- 라는 정리대신에 2+3=5인 명제를 상정하면 어떨까? ...뭐 안 될 것도 없겠군. 사실 p 는 '더하기(plus)', q는 '같다(equal)'을 나타내는 기호이며, 붙임표는 그 갯수에 상응하는 숫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pq- 정리들과 더하기 사이에는 동형관계를 발견하게된다.

 

어라...그러고 보니 pq-체계는 어떤 의미가 없어 보이던 형식체계였는데, 그 동형관계를 발견하게 되니 그 pq- 체계에 의미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렇다. <동형관계가 의미를 유발한다> <"동형관계"라는 낱말은 정보를 함유하는 변형으로 정의된 바 있다.> 예를 들면 크레타 섬의 선형문자와 같은 미지의 언어로 쓰인 암호를 해독하는 것은 일종의 형식체계를 "해독하는"것과 같다. 즉 현대언어와의 동형관계의 발견을 통해 의미를 갖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형식체계를 다루는 수학자들은 그 정리들이 현실의 일정한 부분을 동형형태로 재현해내는 형식체계를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다시말해 현실을 형식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공하게 된다면 우리의 현실을 모두 형식체계내에서 다룰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을 갖게 된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 호프스태터는 그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 같다. 그 자신이 만든 pq-체계는 현실의 일부분을 반영하는 형식체계로 자신이 고안해 낸 것이기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사람이지 않는가?

 

<그 pq-체계는 원래는 의미가 없지만 한 형식체계의 기호들이 적어도 동형관계가 확인되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의미"와 같은 무엇인가를 가정한다는 인식을 강요하는 것 같다.> 하지만 형식체계 내부의 의미와 그와 동형관계에 있는 한 언어 내부의 의미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형식규칙에 맞지 않는 것은, 외부의 언어체계와 동형관계에 있다하더라도 그 형식체계에 포함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형식체계내의 <연쇄체(정리)들은 사물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실이 모조리 형식체계로 변환될 수 있는가?

아주 넓은 의미로 말하자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현실 그 자체는 매우 복잡한 형식체계에 불과하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 형식체계의 기호들은 소립자에 해당한다. "규칙들" 물리법칙이다. 즉 그 "활자규칙"은 주어진 상태에 있는 모든 입자들의 위치와 속도가 일정할 경우, 이것들이 어떻게 변화되어서 "다음 번" 상태에 속하는 새로운 일련의 위치들과 속도로 귀결되는가를 보여주는 물리적 법칙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형식체계의 정리들은 우주 역사의 상이한 시점들에 있는 입자들의 가능한 조합상태들이다. 유일한 공리가 있다면 그것은 "태초 시점"의 모든 입자들의 원래의 조합상태이다.>

 

이 책의 관심사는 <우리가 공식화한 기호 처리 규칙이 (수론에 관한 한) 정말로 우리의 정신적인 추론능력에 상응하는가, 또는 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약간의 형식체계를 이용해서 우리의 사고능력의 차원에 도달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한가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이다. 

괴델,에셔,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     더글라스 호프스태터 지음/ 박여성 옮김

 

제 1장 MU 수수께끼

 

MU의 수수께끼의 비밀은 무엇인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답은 분명하지만 숨어있는 뭔가가 있다. MU는 한자음으로 '없음'을 뜻하는 '무'와 상응한다. 뒤부분에 가면 그 점이 드러난다. MIU체계에서 MU라는 정리는 불가능하다. 그 체계내에 MU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무'이다. 아마 저자는 "MU"라는 연쇄체를 사용할 때 분명히 이 점을 염두에 두었으리라.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무'라는 단어 자체가 이율배반적이라는 것이다. '무'라는 것은 '없음'을 뜻한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자체 단어로 존재하여, 그 의미 또한 존재한다. 진정한 '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냥 비워놓아야 한다. '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누군가는 진리는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해 질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냥 비워 놓는다 해도 여전히 빈 공간이 바로 거기에 있다. 'MU'란 비존재를 나타내기는 하지만, 또한 존재하고 있다는 면에서 이율배반적이다. 0이란 숫자도 마찬가지이다.

 

* 컴퓨터의 프로그램과 인간의 지능의 차이는 무엇인가?

 

컴퓨터는 저자가 제시한 MU의 수수께끼를 풀 수 없다. 하지만 지능을 가진 인간은 그 수수께끼를 풀어낸다. 그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능과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차이이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하는 일정한 사실에 대한 의식이 내재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자기지시 또는 재귀준거적인 양상을 보이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상황으로 인도하기는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자신이 속해 있는 체계 자체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체계를 벗어나' 생각하는 지능의 고유의 특성이다.

 

<물론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많은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체계, 그 이전에는 전혀 체계로 인정받지 못했던 체계를 인식하기 위한 전망을 가지고자 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체계가 존재하고 사람들이 그 체계를 떠나야 한다고 설득시키는 일에 종종 생애를 바친다>

이 부분이 명백한 오역인지, 아니면 저자의 의도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텍스트를 접하는 태도에서도 '형식체계내에서 작업하는 것'과 '형식체계로 부터 벗어나 생각하는 것'과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 문장내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는 태도는 분명히 '형식체계내의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의미가 뭔가 사리에 맞지 않다고 판단하고 그것이 오역인지, 오역이라면 원래의 어떤 의미였을 것인지 생각해 보는 것, 또는 저자의 의도적 표현이라면 그 의도가 형식체계밖에서 생각해 보도록 자극하는 것인지를 깨닫는 것등은 명백히 '형식체계를 벗어나는 것'일 것이다.

 

<형식체계의 연구에서 체계 내부에서의 작업과 체계에 대한 진술 및 관찰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형식체계내에서 작업하는 것과 형식체계밖에서 판단하는 것"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듯 하여 지적 충격을 받는다. 

지능이란 것은 형식체계를 벗어나는 능력이며, 그 밖에서 그 형식체계를 판단하는 등의 능력이다.

 

* 결정절차

 

<정리성 여부에 대한 테스트, 즉 항상 일정한 시간 안에 종료되는 테스트가 있다면, 그 테스트는 주어진 형식체계에 대한 결정절차라고 불린다> 이 책에서 결정절차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것은 때로는 증명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덧붙여 형식체계에 요구할 사항은, 공리들의 집합이 결정절차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즉 공리성 여부에 대한 리트머스-테스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공리에 대한 리트머스-테스트, 하긴 아무 것이나 공리로 삼을 순 없지. 공리성 여부에 대한 리트머스-테스트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정리에 대한 테스트는 증명을 통해 한다지만, 공리란...무엇인가?

 

   

 

 

     

 

더글라스 호프스태터 씀/ 박여성 옮김 / 까치글방

 

Godel, Escher, Bach - an Eternal Golden Braid 

 

제목 Godel, Esher, Bach - an Eternal Golden Braid

1부 GEB, 2부 EGB

처음부터 범상치 않은 호프스태터의 언어 및 지적 유희가 전시되고 있다.

GEB 는 Godel, Escher, Bach 이 세 주요 인물을 향하고 있다. 또한 EGB는 an Eternal Golden Braid 를 잘 상징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GEB와 EGB는 동일한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책에 나와 있는 GEB,EGB 입체는 놓여 있는 방향만이 다를 뿐 순전히 동일한 입체일 뿐이다. 이는 단순한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 책에 나타난 전체적인 개념을 형상화한 것이라 생각된다. 즉 영원한 황금 노끈인 이상한 고리의 개념을 잘 상징하고 있다.

 

* GEB - EGB 의 전체적 구조

 

바하의 음악의 헌정은 두개의 푸가-3성 푸가 하나, 6성푸 가 하나, 열개의 카논, 하나의 트리오 소나타로 이루어져 있다.

좀 억지스러운 데가 없지는 않지만, 음악의 헌정은 이 책의 전체 구조와 동형관계에 있는 듯 하다.

 

아마도 두개의 푸가는  1부 GEB, 2부 EGB의 구성과 대응관계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트리오 소나타는  각 장에 선행하는 아킬레스와 거북의 에피소드들과 상응하는 것 같다. 나머지 10개의 카논은 1장~20장까지의 각 장으로 사상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각장의 내용 전개에는 카논에서 볼 수 있는 모방의 원리들이 적용되어 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동일한 주제가 다양하게 반복되듯이 각 장에서도 동일한 주제가 때로는 명백하게 때로는 은폐된 채로 반복되고 있다. 또한 카논에서 주제가 음고의 변화에 따라 변형되어 나타나듯이 이 책의 내용도 동일한 주제를 다른 층위에서 풀어나간다. 카논이라는 형식내에서 다양한 변화를 볼 수 있지만 이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기본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모든 유형의 모방은 주제가 그 어떤 임의의 모방으로부터도 재구성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원래의 주제 속에 포함된 모든 정보를 유지해야 한다. 이러한 변형을 동형태(동형관계)라한다. >

각 장이 동형관계를 형성하면서도 다양한 방법으로 주제를 표상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서론: 음악-논리학의 헌정

 

* 이 책의 주요 주제는 무엇인가?

 

이 책 전체에 걸쳐 다양한 동형관계를 형성하며 전개되는 기본 주제, 흐름은 무엇인가? 그것은 동형관계와 관련된 이상한 고리이다. 호프스태터는 책 전체의 형식은 물론이거니와 내용에 있어서도 영원한 황금 노끈의 구성을 치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호프스태터가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이상한 고리'란 어떤 개념인가?

바하이 10개의 카논 중 무한히 상승하는 카논- 전조를 통한 카논-은 이상한 고리라는 개념을 보여준다. 이러한 카논에서는 음악적 전개가 첫부분과 절망적으로 멀어졌다고 느끼는 순간 다시 첫부분으로 다시 돌아가는 회귀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상한 고리는 바흐의 작품만이 아니라 에셔의 그림에서도 괴델의 수학적 증명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이율배반적인 에피메니데스의 명제도 그 이상한 고리를 보여준다. 그 유명한 명제 "나는 거짓말장이이다." 또는 두문장으로 형성된 동일한 이율배반적인 명제: "다음 문장은 참이다. 앞의 문장은 거짓이다." 이 두 문장이 합해지면, 참과 거짓을 판별하거나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세계로 빨려들게 된다.

 

<하나의 이상한 고리가 출현하는 그런 체계를 헝클어진 위계질서라고 부른다. - 구하라, 그러면 찾을지니... >

저자는 MU-수수께끼보다 더 큰 규모의 수수께끼를 숨기고 있다. 독자들에게  은폐된 채로 또는 명시적으로 드러난 이상한 고리, 엉클어진 위계질서를 찾아 보라고 유혹하고 있다. 바로 그 고리가 이 책의 주요 주제이다. 호프스태터는 음악, 미술, 수학, 물리학, 생물학, 생태학,그리고 컴퓨터과학등 다양한 학문분야를 넘나들면서 무한을 향한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서는 것처럼 그의 주제를 전개해 나간다. 과연 얼마나 되는 사람이 그의 유혹 - 구하라, 그러면 찾을지니...에 유혹되어 그의 커다란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까?

 

엄밀성을 중요시하는 수학계에서는 이 이상한 고리라는 정체불명의 괴물이 부담스러웠다. 이 괴물을 퇴치하고 엄중한 수학적 체계를 세우기 위해 수학계에서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상한 고리를 제거하려는 그 노력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러셀과 화이트헤드는 [수학원리]를 통해 수학 전체를 모순없이 논리학으로부터 도출해 내려고 하였다. 힐베르트는 [수학원리]에서 정의된 체계가 무모순적이면서도 완전하다고 하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의 증명은 바로 에피메니데스의 이율배반을 [수학원리]의 심장부에 등재해야 했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증명이 이상한 고리의 집요한 공격을 막아내는 방어진지였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보여준다. >

 

이상한 고리는 바흐의 작품, 에셔의 목판화, 그리고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나타난다. 수학에 나타나는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고리를 제거하려는 수학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고리는 수학계의 중심에서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할 핵심 요소이다. 그리고 이 이율배반적인 고리는 인공지능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 인공지능과 이 책의 주요목표

 

<컴퓨터는 그 본질상 가장 경직되고 욕구도 가지지 않으며, 규칙에 가장 충실한 짐승이다. 제아무리 빨리 작동한다고 해도, 컴퓨터는 "의식을 가지지 않음"의 전형이다. 그렇다면 지능적인 행동이 어떻게 프로그래밍될 수 있을까? 그것은 가장 명백한 자체 모순이 아닐까?

이 책의 주요 주제 중의 하나는 이것이 전혀 모순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의 주요 목표 중의 하나는, 언뜻 보기에 모순 같은 것에 독자들을 직접 대변시키고 이리저리 모색케 해서, 그 모순 속에서 독자들 스스로 이리저리 궁리한 결과, 이 책을 읽는 가운데 궁극적으로 형식성과 비형식성, 생명과 비생명, 유연성과 경직성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골을 새롭게 통찰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공지능 연구의 대상이다. 그런데 인공지능 연구의 이상한 매력은 바로 일련의 엄격한 공식으로 된 규칙들의 집합을 통해서 경직된 기계를 유연하게 만드는 방법을 정립하는 데 있다. >

 

* 이 책 구조에 대한 저자의 설명

 

<이 책은 대화와 각 장들로 이루어진 독특한 대위법적 구조를 가진다. 이러한 구조를 통하여 새로운 개념을 두 번 나타낼 수 있다. 거의 모든 새로운 개념은 일단 일련의 구체적이고 시각적인 영상을 제공하는 하나의 대화로 은유적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나서 뒤의 장을 읽는 가운데 이 영상들은 동일한 개념을 더 진지하고 추상적으로 묘사하는 직관적인 배경을 형성한다. 상당수의 대화속에서 표면적으로는 어떤 개념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좀 은폐된 방식으로 다른 개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은 저자의 말에 나타난 은폐적으로 나타나는 개념을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만하다. 그것이 호프스태터를 읽는 방법이며, 그의 거대한 수수께끼를 푸는 지적 유희에 참여하는 방법이기도 하기때문이다. 

 

<나는 이 세 가닥의 실, 즉 괴델, 에셔, 바흐를 가지고 영원한 황금 노끈을 엮어 나가고자했다.>

부분과 전체-원자물리학을 둘러싸고 나눈 대화 / 하이젠베르크 지음 / 김용준 옮김 2012 9 24 완료

 

이 책을 읽는데 근 5일이 걸린 것 같다. 현대물리학의 난해한 부분인 양자역학 및 소립자 분야의 이론들과 그와 관련된 철학적 입장등을 다루고 있어 이해가하기 어려워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또한 좋은 번역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느끼며, 원문으로 읽어 보고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물론 독일어를 이해하지 못하기때문에 이는 전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좋은 책을 쓰는 것 못지 않게 독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좋은 번역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부제에서 보여주듯이 이 책은 하이젠베르크가 이 책을 쓸 때까지의 50년동안 발전해 온 원자물리학에 관한 20가지의 대화 및 토론들로 이루어져 있다. 다음의 목차는 전체적인 대화 및 토론의 주제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1. 원자론과 만남

학창시절 원자에 대한 교과서의 설명에 대한 의문과 물질를 이루는 실체의 본성에 대한 대화. 원자란 존재는 우리가 경험하는 바 물질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추상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토의.

 

2. 물리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하다

수리물리학 교수인 좀머펠트교수와의 만남 그리고 음악을 전공하지 않고 물리학을 선택한 이유에 대한 친구 어머니와의 대화

 

3. 현대물리학에서 '이해'라는 개념

수리이론적 논증에는 동의를 하지만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 고전적인 개념의 언어로 현상이나 실체를 설명할 수가 없다면? 부분적으로는 설명이 가능하나 전체적인 연관성을 파악할 수 없다면 이해가 된 것인가?

 

4. 역사에 관한 교훈

 덴마크의 보어와의 대화. 절제,성실,청렴,의무등을 중심으로 한 프러시아식 태도의 가치와 개인의 자유와 독립성, 권리의 가치를 가진 덴마크 및 영국등의 사고방식의 차이. 개인의 반전쟁적인 성향들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전쟁으로 빠져들게 된 독일의 모순적인 상황

 

5. 아인슈타인과 나눈 대화

양자역학에 관한 하이젠베르크의 새로운 이론에 대한 아인쉬타인과의 대화. 닐스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받아들이고 있었던 양자세계에 대한 이해와 아인쉬타인의 견해의 상반성. 아인쉬타인은 진짜 자연세계에 나타난 불확실성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이로 인해 유명한 보어와의 논쟁이 후일 이어지게 된다.

 

6. 신세계로 출발

파동방정식을 발견한 쉬뢰딩거와 보어의 토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보어의 상보성원리를 통한 양자세계의 이해. "이제 사람들이 원자세계까지 내려간다면 공간과 시간 안에서의 객관적인 세계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이론 물리학의 수학적인 기호들은 실존적인 것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것만을 묘사한다는 사실이 주장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입장과 아인쉬타인과 쉬뢰딩거의 입장차이가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7. 자연과학과 종교에 대한 첫 대화

플랑크는 "종교와 자연과학은 실재의 전혀 다른 두 영역에 각각 관계되는 것이기때문에 둘이 서로 잘 조화될 수 있다고 생각...자연과학은 객관적인 물질세계를 다룹니다. ...그러나 종교는 가치의 세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인쉬타인은 "사물의 중심질서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아인쉬타인은 어떤 종교적 전통에 매여 있지도 않으며, 어떤 인격적인 하느님의 표상과도 전혀 무관한 분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그에게는 과학과 종교 사이에 어떠한 분리도 있을 수 없으며, 중심질서는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라고 디랙은 말한다. 하이젠베르크는 디랙과는 달리 플랑크의 견해에 우호적이었으며 종교와 신의 존재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양자세계의 불확정적인 원리를 개인의 자유의지 또는 신의 간섭에 대한 여지의 논증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보어의 견해.

 

8. 원자물리학과 실용주의적 사고방식

미국을 방문하여 버튼과 나눈 대화속에서 그는 미국식 실용주의적 사고 방식이 사물의 본성을 파악하고 더 나아가 전체와의 연관성을 탐구하는데 적절하지 못하다는 견해를 밝힌다.

 

9. 생물학과 물리학 및 화학과의 관계에 대한 대화

원자물리학에서 알려져 있는 힘과 상호작용말고도 어떤 특수한 생명력과 같은 것 즉 살아있는 유기체의 특수한 형태를 지배하고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하는가? 뉴턴의 역학이 양자역학의 극한적인 경우라고 생각되듯이 양자역학이 특별한 극한의 경우로 나타나는 더 포괄적인 자연 법칙이 성립된다고 생각하는가? 에 대한 보어의 견해 ..."자연과학에서는 되도록 보수적이어야 하며, 관찰의 결과에 대하여 더 이상 설명할 수 없게 되는 경우에 관해서만 확장을 시도하는 것이 항상 최선책이 될 것입니다." "때때로 양자이론의 확장 필요성이 언급되는 까닭은 ...인간의 의식이 존재하기때문입니다."

 

10. 양자역학과 칸트철학

"도대체 원자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언어는 일상경험에서 형성된 것이기때문입니다. 그런데 원자란 일상 경험의 대상이 아닙니다." "칸트가 한 인식의 분석은...'경험'이라고 불리는 그러한 관계에 서게 될 때에는 칸트의 철학은 ...정당한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칸트의 '선천적인 것'도 뒷날 그 중심적 지위에서 추방되고 인식과정의 좀 더 포괄적인 분석의 일부분이 되고 말 것입니다."

 

11. 언어에 대한 토론

"설거지는 마치 언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더러운 설거지 물과 더러운 냅킨을 가지고도 접시와 컵을 깨끗이 씻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불명확한 개념과 적용범위도 뚜렷하지 않은 논리를 가지 언어를 사용하여 자연에 대한 이해를 명백하게 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12. 혁명과 대학생활

나치즘을 받아들이고 있던 한 학생과의 대화. 나치의 일부 행태에 대해 동의하지 않지만 당시 팽배해 있던 부조리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치를 옹호하며 동참을 요구하는 학생의 주장과 그에 대한 하이젠베르크의 반론.

나치를 피해 외국으로 옮겨야 할 것인지에 대해 플랑크와 나눈 대화. 비록 일부에서 타협하는 일이 있더라도 파국이 끝난 후에 재건을 위한 씨의 역할을 할 그룹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플랑크의 입장과 하이젠베르크의 독일에 남아있으려는 결정 배후의 고뇌.

 

13. 원자기술의 가능성과 소립자에 관한 토론

오토 한에 의한 우라늄 핵분열이 실현. 디랙의 반물질(양전자)의 발견과 더불어 더 많은 소립자들이 존재할 가능성에 대한 대화

 

14. 정치적 파국에서 개인의 행위

엘리자베트 슈마허와의 결혼. 1939년 미국에서 페르미와의 만남과 독일로 돌아가지 말 것을 권유받음에도 불구하고 독일로의 귀국하기로 결정한 이유. 조국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나치의 패망에의 바램사이의 마음의 갈등

 

15. 새로운 출발을 위한 길

나치치하에서의 연구활동에서 원자폭탄제조를 회피하고자 하는 입장. 전쟁의 끝과 체포

 

16. 연구자의 책임에 대하여

원자폭탄 히로시마 투하에 대한 연구자의 책임에 대한 토의. 발견과 발명은 구별되어야 한다. 과학의 진보는 계속되어야 한다.

 

17. 실증주의, 형이상학, 그리고 종교

과학은 이미 철학의 깊이까지 들어와 있으며 형이상학적인 논의는 불가피하다. 실증주의는 나름대로 과학의 정밀성에 기여하였으나 원자세계의 연구에 있어서는 실증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중심질서와 그에 나타난 의도등은 의식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닌가?  "도대체 자네는 신의 존재를 믿고 있나?" "내가 그 물음을 좀 달리 표현해 보아도 좋다면... 전혀 의심할 수 없는 사물이나 어떤 사건의 중심질서에 -어떤 사람의 영혼이 가능했던 바와 같이 - 바로 대면하고 접촉할 수가 있느냐? (는 질문으로 바꾸어 대답해 보자) ...자네가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네는 중심질서가 어떤 사람들의 영혼과 같이 분명하게 현존한다고 생각한단 말인가?""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18. 정치과 과학의 대결

원자력을 무기화하려는 독일의 정치가 아데나워와의 논쟁.

 

19. 통일장 이론

베타붕괴에 수반되는 대칭성 붕괴문제와 이와 관련된 이론의 전개에 따른 파울리와의 불화

 

20. 소립자와 플라톤 철학

데모크리투스의 "태초에 입자가 있었다"란 명제보다 "태초에 대칭성이 있었다"라는 명제가 더 옳다. "소립자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의 정다각형과 견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물질의 원형이고 이념이었던 것이다. 핵산의 생물의 이념이다. ...그것은 중심질서의 대표자인것이다. 그 뒤에 모든 피조물의 충실한 발전에서 우연이라는 것이 또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우연 또한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이 중심질서와 연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군데 군데 눈에 띄는 내용과 전체적인 인상들을 정리해 보았는데...그 많은 의미있는 대화,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발언등...내가 읽었던 모든 책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책인듯하다. 하지만 <부분과 전체>라는 주제가 각각의 흐름의 바닥에 깔려있는 듯하다. 부분이 모여서 전체가 되는 것은 확실하나, 그 부분과 전체는 다른 본성을 가질 수도 있음들 역설하고 있다. 원자의 세계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이며, 우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물질의 본질은 물질이 아니며, 본질의 세계로 내려갈 수록 불확실의 세계가 펼쳐진다. 하지만 모든 것은 중심질서을 기본으로 연관성 및 단순성을 가질 것이라 확신한다. 실험과 관찰도 더 이상 객관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수리적인 논증과 이성적인 판단 그리고 대화와 토론등으로 사물의 본성을 파헤쳐야 하는 현대 물리학자들의 연구방법은 철학자들의 그것과 사뭇 닮아가는 느낌이다.

 

이 책을 읽고 싶다면, 먼저 현대 물리학의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등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칸트의 인과률법칙과 실증주의에 대해 알고 나서 읽으면 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다.

 

레베카 골드스타인 지음| 고종숙 옮김 2012 9 18 읽음

 

"괴델이 누구죠?"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라고 부르다면 되레 모욕일걸세."

 

그 괴델의 생애와 그의 불완전성 정리를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소심한 거인, 정신쇠약으로 인한 영양실조와 굶주림으로 쓸쓸한 죽음에 이른 천재 논리수학자의 특이한 삶

조용하게 세계를 뒤흔든 그의 불완전성정리

 

이 책을 다 읽고 덮은 후, 아무 생각도 없이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그리고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서 왜 이런 책들이 대단한 것인가 느꼈다. 이래서 고전이라 불리는구나하고 감탄을 했었다. 이 책들은 나의 생각의 한계를 단 번에 뚫어 버리는 발상의 참신성 및 독특성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불확정성>을 읽고서는 그와는 또 다른 느낌 -  뭔가 알 수 없는 묵직한 좀처럼 사리지지 않는 무게의 힘을 느꼈다. 그의 초라한 죽음때문만은 아니리라. 프린스턴 고등과학원의 쟁쟁한 당대의 내노라는 수학자 및 과학자들조차 경원시하던 인물이라서? 아니면 그의 놀라운 정리때문일까? "도대체 증명불능이면서도 참인 산술명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명제가 참임을 보이는 것 자체가 그것에 대한 증명이 될 것이며, 그렇다면 증명불능성을 증명했다는 주장은 모순이 아닌가????" 그도 아니면 그의 정리가 인간사고의 한계에 대한 논쟁에 불을 지핀 파장때문일까?

이 느낌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사람을 알았다는 정체모를 뿌듯함과 자부심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뭔가에 대한 깊은 사색에 빠지게 하는 은근한 힘의 느낌이라니...

 

제1불완전성정리

산술을 포함하는 형식체계가 무모순인 한 참이면서도 증명불능인 명제는 언제까지나 존재한다.

 

제2불완전성정리

산술을 포함하는 어떤 형식체계의 무모순성이 그 안에서는 증명불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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