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 한길출판사 / 루소 / 김중현 옮김 2012년 11월 14일 ~ 2012년 12월 30일
그 유명한 칸트가 에밀을 읽다가 그만 그의 산책시간에 늦었다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오랫동안 에밀의 명성은 들어 알고 있었으나 읽을 기회가 닿지 않았었는데, 과연 난 칸트와 같은 흥미를 느끼게 될까?
에밀은 교육에 관한 글이다. 에밀이라는 아이를 성장에 맞추어 교육하는 과정을 기술한다.
교육에 대한 루소의 사상은 몇가지로 정리가 될 듯하다.
첫째, 아이들의 나이에 맞는 교육을 실행해야 한다.
둘째, 아이들이 자연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도록 한다.
서문
제1부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 양육-유년기의 에밀
제2부 신체와 감관의 훈련-다섯 살에서 열두살까지
제3부 지능과 기술 교육 - 열두 살에서 열다섯 갈까지
제4부 도덕과 종교교육 - 열다섯 살에서 스무 살까지
제5부 에밀과 소피의 결혼- 스무 살에서 결혼까지
1부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 양육-유년기의 에밀
루소의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한 인간을 만드나냐 아니면 한시민을 만드느냐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
<자연의 질서 속에서는 인간은 모두 평등하므로 그들의 공통적인 천직은 인간이라는 바로 그 신분이다.>
<부모가 선택해주고자 하는 직업 이전에 자연은 먼저 그에게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요구한다.
사는 것, 바로 그것이 내가 그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직업이다.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때 그는 법관도 군인도 사제도 아닐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무엇보다 그는 먼저 인간일 것이다.>
이러한 루소의 말에 그의 교육목적이 잘 드러나 있다. 자연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올바른 교육이라고 그는 본다.
루소의 교육 사상의 중심 사상중 한 가지는 연령에 적합한 교육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제에서 볼 수 있듯이 유년기의 교육은 아이들을 건강하게 양육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둔다. 건강은 자연인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조건이기도 하지만 건강한 아이가 가지게 되는 신체와 감관은 다음 연령의 과정의 교육에 필수적인 요소이기때문이다.
특히 유아들이 자유로운 활동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며, 건강을 위한 모유수유등을 통해 신체발육을 도모해야 한다.
어머니들의 과도한 보살핌은 끊임없이 아이들을 훈련시키는 자연의 작용을 방해하는 요소이므로 과보호를 경계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들 중 한가지는 아이들의 언어인 몸짓의 언어 즉 표정, 그리고 최초의 목소리인 비명과 울음을 판단하는 일이다.
<아이들의 울음에 경솔히 반응하여 지배와 복종에 대한 잘못된 관념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한다. 아이들이 울음이라는 명령을 통해 어른들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아이의 최초의 울음은 부탁이며 간청이다. 그런데 조심하지 않으면 그 울음은 곧 명령이 된다.>
유년기의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어휘를 제한해야 한다. 형성되지 않은 관념,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어휘들은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 이는 그의 경험주의적 교육과 유용성에 근거한 교육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아이가 사용하는 어휘를 가능한 최대한 줄여라, 그가 관념보다 더 많은 어휘를 아는 것,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주 큰 지장이다.> <그는 살아있지만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다>
루소의 교육사상은 분명해 보인다. 자연으로 부터 배운다. 경험적으로 배운다. 자연인으로 성장시킨다. 있는 그대로의 인간으로 자라도록 돕는다. 어떤 일정한 사회나 제도의 구성원으로 자라도록 돕는 일보다는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성장해 나가는 자연인의 모습을 추구한다고나 할까?
제2부 신체와 감관의 훈련-다섯 살에서 열두살까지
<당신의 학생을 그의 연령에 따라 다루어라>라는 루소의 교육원칙에 따르면 이 시기의 교육은 신체와 감각기관의 훈련에 있다. 여기서 훈련이라 함은 배움에 있어 지속적인 감각기관의 사용을 일컫는 것이리라. 루소의 말에 따르면 <말이 아니라 관찰과 경험을 통해 배우게 하라>는 것이 이 시기의 핵심적인 교육방향이다.
<당신의 교육은 말보다는 행동이어야 한다>는 말에 나타난 것과 같이 주위의 상황을 보고 스스로 이해하고 깨치며 배우게 되는 것이 진정한 배움이요, 참된 지식을 얻게 되는 방법이다. <자연이 오래 작용하도록 내버려두라> 그럼으로 배운다는 강박감없이 <행복하게 지내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이 시기를 행복하게 보내게 하는 최상의 방법이며, 자신도 모르게 배우게 되는 최고의 방법이다. <주위의 모든 것이 일종의 책>인 것이다. 플라톤도 그의 유명한 저작인 '국가론'에서 '아이들은 축제, 유희, 노래, 오락으로만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바와 같다. 그러므로 어른들이 보기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배우지 않는 것 같으나, <무위를 두려워하지 마라, 시간을 즐겨라>는 모토 아래 교육이 진행될 필요가 있다.
가르치지 않고 가르치는 것은 교사의 최고의 덕목이다. 어떤 관념들을 아이들이 이해하고 머리속에 형성시키기 위해서는 말로 설명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아이들이 제대로 알지 못한다. '소유'관념을 형성시키기 위한 흥미로운 예가 있다. '소유'라는 관념을 형성시키기 위해 농작물을 직접기르는 경험학습의 예는 말로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관념을 형성시키는 본을 보여준다. 아이는 노동이라는 활동을 통해 점유권리를 가지게 되고 이로 부터 소유라는 관념이 형성됨을 깨우친다. 그리고 그러한 자연스러운(사실은 교사에 의해 잘 조절된 상황) 경험을 통해서 소유관념으로 부터 약속 그리고 의무라는 관념에 이르기까지 명확한 이해를 형성시킬 수 있다. 또한 무언가를 부수는 성향을 가진 아이에게는 말로 그렇게 하면 안됨을 일깨우는 것보다는 <결핍의 불편을 주어 바로 잡도록 한다>. 이러한 과정은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닌 자연이 가르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아이는 이성이 없다. 판단능력이 없다. 그래서 가르쳐서는 안된다. 이미지를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 미리 생각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장래에 대한 이야기는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언어교육은 관념이 앞서야 한다. 진정한 관념이 발생하고 난 후에 그 관념에 대한 언어로의 교육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념들은 두뇌에 새겨져 훗날 적합한 방식으로 행동하는데 이용된다. 말로써 이루어지는 또는 책이나 언어로 이루어지는 교육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예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솝우화는 일반적으로 재미있고 쉽게 교훈을 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 본 이솝우화가 주는 교훈은 어른들이 받는 것과는 사뭇 다를 수 있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로 부터 아이들은 개미의 냉정한 거절과 조롱을 배우게나 되지 않을까? 그러므로 <아이는 절대로 당신이 바라는 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아이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 보라.>
아이들이 스스로 배우고자하는 동기를 어떻게 불러 일으킬 수 있는가?
<어떤 동기가 아이들로 하여금 배우고 싶어하게 하는가? 그 도구가 그를 즐겁게 하는 일에 사용되도록 해보라. 배우고 싶은 욕망은 당장의 이익과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글을 배우도록 동기를 유발시키기 위해서 '초대장'전략과 같은 것을 사용할 수 있다. 어떤 아이가 좋아할 만한 일에 초대장을 보내는 것이다. 아이는 초대장을 읽을 수 없어 그 초대에 주어지는 좋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그리고 아이는 그 이익을 취하기 위해 읽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동기를 갖게 될 것이다. 교사에 의해 잘 다듬어진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아이들의 동기를 불러일어키며 더 나아가 스스로 배울 수 있게 한다. 달리기를 싫어하는 아이가 달리기를 하고자 하는 동기를 불러 일어키는 자연스러운( 이경우도 사실은 교사의 인위적인 상황설정이지만) 상황을 연출한다.
이렇듯 <훈계하지 않고 학생을 지도하는 기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하는 기술은 어려운 기술이다.> <자연의 지도 즉 경험에 따른 훈련>은 아이들이 타의에 의해 강제되는 배움이 아니라 스스로의 배움을 가능하게 한다.
2부를 요약하자면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으로 교육해야 한다. 말로써 진행되는 교육은 이 시기에 맞지 않다. 보여주는 방법, 경험하여 알게하는 방법이 적합하다. 아이들이 스스로 배우고자하는 마음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자연이 가르치게 하라.
제3부 지능과 기술 교육 - 열두 살에서 열다섯 살까지
유아기의 자유로운 신체의 발달, 유년기의 감관의 훈련, 그리고 뒤이어 지능의 발달로 이어지는 교육이 이루어 진다.
<정신이 최초로 작용할 때에는 언제나 감각만이 정신의 안내자가 되게하라. 이 세상 왜의 책은 주지 말 것이며, 사실 외의 것은 가르치지 말라.> 정신, 지능등의 교육에 입문할 때는 반드시 경험을 통해 그것이 이루어 지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당신의 아이에게 자연현상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라. 그러면 당신은 곧 그를 호기심 많은 아이로 만들 것이다. 그런데 그의 호기심을 더욱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절대로 서둘러 그 호기심을 만족시키지 말라. 그의 능력 범위 안에서 문제를 내고, 그것을 스스로 풀게 하라. 당신이 그에게 이야기해 주어서가 아니라 아이 스스로 이해함으로써 배우도록 하라. 다른 사람의 지식을 배우게 하지 말고 그가 만들어 내도록 하라. 만실 당신이 그의 정신 속의 이성을 권위로 대치하면, 그는 더 이상 이치를 따지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타인의 사고의 노리개가 될 뿐일 것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의 감각적인 관념에서 또 다른 감각적인 관념으로 천천히 이동하며 다음 관념으로 넘어가기 전에 오랫동안 동일한 관념에 익숙하도록 함, 또 우리의 학생에게 결코 강요해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지는 않>는다.
<나의 교육정신은 아이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두뇌 속에 정확하고 명료한 관념만 넣어주는 것임을 잊지말라.>
<그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학문을 사랑하는 취미를 갖게하여 그 취미가 더 커질 때 학문을 배우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확실히 그것이야말로 모든 좋은 교육의 근본원칙이다.>
<또한 같은 것에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이도록 조금씩 습관을 들이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절대로 그것이 강제여서는 안된다. 그러한 주의를 유발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움이나 욕구여야 한다. 그것이 그를 괴롭힌 나머지 지겨워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할 일다. 그러므로 항상 주의를 기울여 그를 살펴보라. 어떤 일이 있어도 그가 싫증내기 이전에 그만두게 하라. 그가 무엇을 배우느냐는 중요하지 않으며, 자신의 의지에 반해서 하는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가 당신에게 질문하면 그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답변이 아닌 오히려 호기심을 더 증대시키는 답변을 해주라.>
<나는 말로 설명하는 것을 종하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그런 설명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기억하지도 못한다. 실제 대상을 ! 실제 대상을! 이 말에 아무리 중요성을 부여해도 지나침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수다스럽게 지껄이는 교육으로는 수다쟁이밖에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유익한 것이라고 아이에게 말해주기는 쉽다. 하지만 그를 납득시킬 줄 모르면 그런 일은 아무 소용이 없다.>
직업교육
<당신이 가장 마음을 써야 할 것은 아이가 이해할 수 없는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모든 관념을 그의 정신으로 부터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식의 연계성으로 인해 당신이 인간의 상호 의존 관계를를 보여주지 않을 수 없을 때, 그것을 도덕적인 면에서 보여주는 대신 그의 모든 주의를 먼저 서로를 유용하게 만드는 산업과 기계 기술로 돌리게 하라.>
<먼저 사룸 그 자체가 무엇인지를 가르쳐라. 그후에 그것이 우리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를 가르쳐라. 그렇게 하면 그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진실을 비교할 줄 알며, 대중의 통속적인 견해를 초월할 줄 알 것이다.>
<한 젊은이를 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의 판단을 그에게 주입시키는 대신 그의 판단력을 잘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기술을 그렇게 필요로 하지 않는 기술 - 그것은 더 자유롭고 더 독립상태에 가깝기 때문에- 이 다른 기술에 의존적인 것보다 더 존경받을 만하다는 점을 말해 두고 싶다. 이상이 기술과 산업의 평가에 대한 진정한 기준이다.
<우리는 그의 신체와 감각의 단련부터 시작하여 그의 정신과 판단력을 훈련시켰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의 손발의 상요법과 그의 능력의 사용법을 연결시켰다. 우리는 그를 행동하고 생각하는 존재로 만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인간을 완성하기 위해 그를 자애심많고 다정다감하며 인정 많은 존재로 만드는 일만이 남아 있다. 말하자면 감정에 의해 이성을 완성하는 일이다.>
<우리의 학생은 처음에는 감각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는 느낄 뿐이었는데, 이제는 판단을 한다. 연속적이거나 아니면 동시적인 여러 감각의 비교와 그에 관하여 내리는 판단으로 부터 내가 관념이라고 부르는 혼합 감각 또는 복합 감각이 생겨난다.>
<나로서는 그가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를 자기가 믿는 모든 것에 대해 왜를 발견할 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시 말하지만 내 목적은 그에게 지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그것을 획들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지식의 가치를 정확하게 가늠하도록 하는 것이며 특히 그가 진실을 사랑하도록 하는 일이다. >
제4부 도덕과 종교교육 - 열다섯 살에서 스무 살까지
도덕 교육과 관련해서는 아무 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다. 다만 종교교육과 관련하여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신부의 신앙고백이 그것이다. 그는 신이 존재한다는 자신의 신앙을 담담히 고백한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목적도 아니고,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것도 아니고 다만 그의 신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개인적인 이유를 고백한다. 그는 움직임에 주의를 돌린다. 움직임에는 두가지가 있을 뿐인데, 그 하나는 외부의 힘에 의해 움직여지는 수동적 움직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외부의 힘의 작용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능동적 움직임이다. 그는 이 능동적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 능동적 움직임의 근원은 이성이랄까, 의지랄까, 지성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주적인 모든 움직임의 근원엔 그를 가능하게 한 애초의 의지가 있었음을 확신한다. 그의 자연신에 대한 믿음의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는 계시의 신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수많은 종교들이 나름 진리라고 주장하는데 그 중에서 진리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하면서 증명하거나 확증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한 논쟁은 뒤로 밀이내 버리고 종교의 도덕적인 면에 관심을 가기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는 그는 복음서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불가사의라고 평한다. 그 놀라운 가르침은 인간을 초월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나 그 기록 가운데는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계시의 신에 대한 모습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칸트가 에밀을 읽다가 자신의 산책시간을 놓쳤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들을 바 있는데, 아마 칸트는 그 때 이 부분을 읽고 있었으리라....
제5부 에밀과 소피의 결혼- 스무 살에서 결혼까지
이 부분에서 그는 여자의 교육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늘날 남녀평등의 관점에서 보면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나름 흥미있다. 자연으로 보아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그러므로 자연주의 교육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둘 사이에 행해지는 교육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교육사상인듯 한다. 특히 남성위주의 사회에 일원이던 루소는 여성의 교육은 어느정도 남성의 교육에 종속적인 성질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듯 하다. 하지만 여성이 올바른 교육을 받게되면, 남성을 지배할 수 있음을 비친다. 남자는 세계를 지배하지만 여자는 그 남자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남자를 지배하기 위해 여자들은 어떤 교육을 받아야 할까? 어떠한 매력을 지니고 있어야 남자를 지배할 수 있을까?
에밀이 소설의 형식으로 쓰여졌다는 것은 이 부분을 일컫는 것이다. 에밀과 소피와의 연애 그리고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상황들이 소설적으로 펼쳐진다.
이 책은 거의 900여 페이지에 달한다. 루소는 정말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그 만큼 생각의 폭과 깊이가 있다는 것이겠다. 이러한 고전을 읽으면 인간 이성의 힘이 얼마나 큰 지 놀라게 된다. 가끔씩 순수한 인간의 이성으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전에는 위대한 인물들의 생각이나 사상을 폄하한 적도 있었다. 그들의 생각도 단순한 한 인간의 생각에 불과한 것인데, 나와 같은 사람의 생각에 그리 큰 비중을 둘 필요가 있겠느냐고...하지만 몇몇 고전으로 평가되는 책을 읽고서는 그 이성의 힘의 크기에 감탄을 하게 된다. 근 50년을 살아온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그러한 넓이와 깊이를 보여주고 있기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진리로 귀결되지는 않을지라도 그들의 이성은 인간사고의 한계를 더 넓혀주는 것이 분명함을 느낀다. 나의 사고도 더 넓고 깊은 힘을 가지게 되어 진리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내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