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란드 러셀/ 박상익 옮김 / 푸른 역사
이 책은 원래 <역사를 어떻게 읽고 이해할 것인가?> 라는 제목으로 1943년에 처음 선을 보였다가 1957년 <역사의 이해>라는 책에 대표 에세이로 재수록된 글이다.
일반적으로 시험을 위한 역사 공부, 또는 전문가를 위한 역사 강의등은 따분하고 재미가 없다. 그러나 러셀은 역사를 읽고 이해하는 것은 방법에 따라 재미나 흥미 더 나아가 쾌락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먼저 거시적 역사와 미시적 역사가 있다. 거시적 역사는 어떻게 세계가 오늘의 세계로 발전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미시적 역사는 흥미로운 역사적 인물들을 만나게 해주며 인간 본성에 대한 지식을 향상시켜 준다. 이 두가지 방법의 역사읽기는 읽는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러셀은 이 글을 통해 거시적 역사를 보는 방법과 미시적 역사를 보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거시적 역사를 볼 때는 특히 역사의 거대한 진보의 시기인 세 시기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첫째, 농업이 시작되며 왕권이 강화되는 시기, 문자와 수학이 시작되며 건축이 시작된 시기
둘째, 위대한 문명, 그리스 문명의 시기
세째, 15세기부터 오늘날까지의 위대한 진보의 시기
<기록된 역사시대 전 기간을 통해 진보는 규칙이 아니라 예외였다. 그러나 일단 도래하자 진보는 신속하고도 단호하게 진행되었다.>
진보의 시기에 초점을 둔 역사읽기는 흥미를 더해 줄 수 있겠다.
러셀은 역사철학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단행하면서, 그 대안으로 역사과학과 인물연구의 방법을 역사 읽기의 방안으로 제시한다.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투스의 주요 주제는 유럽과 아시아의 충돌이다. 마라톤 전투, 살라미스 해전등... 아시와와 유렵의 충돌은 역사의 흐름에서 꾸준히 등장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헤로도투스의 주제는 유효함을 보여준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세련되고 정밀하게 다루고 있다. 운명, 정의 또는 필연이라 칭하는 거대한 비인격적인 힘이 세계를 지배하는 모습을 서사시적 장엄함으로 묘사하고 있다.
<위대한 역사가들의 저술을 읽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전기와 회고록의 폭넓은 섭렵을 통해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고 즐겁고 흥미로운 것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역사읽기의 최고의 쾌락은 우리가 특정시대를 좀 더 잘 알고 난 후에야 얻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때에 이르러서야 조각그림 맞추기 퍼즐에서 새로운 사실들 하나하나가 제자리를 찾기 때문이다.>
러셀은 실제로 나폴레옹,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 예카테리나 여제등의 예를 통해 역사란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을 제공해 준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역사적 인물들도 작은 일에 집착하는 인간일 뿐임을 그러한 세부사항을 통해 알게 된다고 말한다.
러셀은 역사의 흐름을 알아채는 것의 흥미를 소개하고 있다. 군사사, 경제사, 종교사, 조직사의 분야를 언급하면서 자신이 나름 흥미롭게 이해한 점들을 소개한다.
군사사에 대한 흥미로운 점들, 귀족을 몰락시킨 대포. 궁수는 기사들을 제압할 수 있고, 대포는 궁수를 제압할 수 있다. 기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봉건귀족들은 대포의 등장에 의해 그 세력이 현저히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 프랑스 혁명은 새로운 종류의 전쟁을 도입했다. 전 국민이 무언가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고 믿고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그런 전쟁,...2차세계대전의 영국처럼...정부형태로서의 민주주의는 모든 국민을 전쟁에 참여토록 만드는 장점이 있다고... 또한 공업화와 전쟁의 판도...
경제사에 대한 흥미로운 점들...비범한 개인이 아닌 보통 사람에게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 평범한 사람들은 어떤 경제 상황을 살았을까? 예를 들면 피라미드가 전설되던 시기의 이집트 농민들은 충분한 음식을 섭취했는가? 중세에 번영했던 상업도시의 평균적 주민은 얼마나 유복하게 살았는가? 산업혁명 이전의 농민의 삶은 산업혁명 초기의 공장 노동자의 상황에 비하면 어땠을까? 이러한 문제들을 흥미를 자아낸다.
러셀은 또한 역사의 흐름에 따라 도시와 농촌의 대립 구조가 어떻게 변하는지 흥미롭게 살펴보도록 한다.
러셀은 마르크스를 비판하면서 지성 또는 개인의 역사에서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과학적이라 자처하는 사회학의 한 분야는 인간의 내적 심리나 동기를 탐구하지 않고 개인이 아닌 사회를 관찰함으로 진정한 과학에 근거한 결론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반박한다. 역사에서 개인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흥미있는 것 중 하나는 러시아 혁명에서의 레닌의 역할에 대한 러셀의 관점이다. 언젠가 읽은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책에서도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며, 카는 러셀과는 상반된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러셀은 레닌의 귀환이 러시아 혁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지만, 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는 일개인이 그 흐름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도도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시대정신 및 상황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기때문에 그 어떤 개인들도 다만 그 물줄기에서 작은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뿐이라고.... 또한 카는 역사를 공히 인정받는 과학의 위치에 올려놓고 싶어했다. 그는 자연과학에 대한 열등감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자연과학의 명확성과 객관성에 대한 부러움을 드러내면서, 역사도 과학이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러셀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러셀과 카의 충돌이라...ㅋㅋ
선택과 가치판단이라는 제목하의 내용도 카의 주장과 비교할 만하다. 역사란 역사가가 선택한 사실들로 이루어 진다고 보았을 때, 그 선택과 가치판단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러셀은 <문화의 궁극적 가치는 과학 만으로 제공할 수 없는 선, 악의 기준을 제시하는데 있다>라고 말한다.
러셀은 종교사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철학은 종교에 대한 반란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피타고라스에 의해 도입된 사상은 철학은 더 이상 세계를 이해는 정직한 시도가 아닌 도취를 통한 구원으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이 플라톤, 그리스도교 신학자, 그리고 이어 루소와 낭만주의자에게까지 이르렀다고 ...무슨 말인지???
아뭏든 그리스도교는 유대인으로 부터 받는 유산에 그리스적 요소를 채용하여, 성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철학을 그리스도교 사상의 필수요소로 삼았다. 그러다가 11세기~13세기 말까지 교회는 급속히 권력, 규율, 학문에서 실력이 향상되었다. 특히 학문적 측면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기인한 바가 큰 데, 그 당시는 플라톤의 영향아래 있었다. 아퀴나스는 아랍의 영향하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선호함으로 정죄를 당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그의 발언은 가톨릭 교육기관에 의해 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후 14~16세기 교회는 대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마무리 되던 시점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되고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오른다. 꺼질 듯 하던 가톨릭은 종교개혁과 그 이후의 도전에 생존하여 아직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조직사...<그 조직들은 당신이 어느 정도, 어느 수준까지 당신의 독자적 관심사를 추구할 수 있을 지를 결정한다.>
조직은 공적인 목적과 사적인 목적 두가지를 다 가지고 있다. 이 사적인 목적을 위한 조직의 부정적 활동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조직은 그 성질상 탈선의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다. 대학살, 박해, 마녀사냥등 종교조직의 이름하에 행해진 탈선들이 그러하다. <조직의 발전을 연구하되 우리가 고찰한 바의 악행에 빠지는 우를 범하지 않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예외적 개인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엔 미래가 없다.
정신의 시간적 영역을 확대해 주는 역사
<천문학은 정신의 공간적 영역을 확장시켜 준다면 역사학은 정신의 시간적 영역을 확대해 준다. 우리의 개개인의 삶은 종종 감정이 격앙되며, 때로는 참을 수 없으리만큼 고통스럽다. 그러한 개인적 격앙과 고통이 거대한 인류적 생애의 직극히 작은 단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균형감 있게 조감한다면, 피할 수 없는 개인적 불운을 견디기가 조금은 나아질 것이다.>
영속적인 것을 분별하는 안목
<역사의 전망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사건과 어떤 행동이 영속적 가치를 갖는지를 좀 더 명료하게 볼 수 있도록 한다.
수많은 사건들은 일시적으로 그것들이 갖는 진정한 중요성에 걸맞지 않게 엄청난 흥분과 동요를 자아낸다. 반면, 가장 위대한 사건들은 높은 산의 정상과도 같이 저 멀리에서 삼라만상을 압도하고 있으면서도 가까이에서 펼쳐진 풍경에 의해 가려진다. 역사는 건전하고 침착한 판단력을 갖는 데 도움을 주어, 동시대의 사건들을 역사적 배경 속에서 바라보는 습관과 그것들이 과거에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상상하는 습관을 얻게 해 준다.
신학자들은 신이 모든 시대를 마치 현재인 것처럼 바라본다고 말한다. 우리 또한 지극히 제한된 수준에서나마 그렇게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한,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지헤와 통찰로 나아가는데 도움을 준다. 역사에 의해 사상과 감성이 확장된 인간은 후세에 무언가를 남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할 것이다.> 이러한 말로 러셀은 그의 글을 끝 맺는다.
처음 이 책을 읽으면서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깊이읽기'라는 부제가 붙은 부분-보다 상세한 역사적 사실들을 부가적으로 읽고 나서, 다시 읽었을 때, 비로소 그 내용이 이해되고 흥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정리하기 위해 다시 살펴보면서, 러셀이 이 책을 쓴 의도와 그의 마음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는 어떻게 읽어야 하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흥미롭게 읽으며, 그리고 실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읽을려면 말이다.
때론 거시적으로 때론 미시적으로...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통찰을 갖게 해주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