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델,에셔,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

 

제11장 두뇌와 사고

 

인공지능 연구는 인간의 사고과정에 대한 연구를 촉발시켰다. 10장에서는 인간의 두뇌와 사고의 과정을 유추해 보기로 한다.

 

형식체계에서 활자형 기호는 수와 연산 및 관계들로 사상되고, 활자형 기호의 연쇄체는 명제로 사상되는 동형관계가 성립하며, 이러한 동형관계로 부터 의미가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기호들과 현실 사이의 동형관계가 꼭두각시 인형과 그것을 조종하는 손 사이에 달려 있는 끈과 같이, 경직된 곧이 곧대로의 복제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인간 사고의 덩어리적 구조

인간 사고의 특징은 내포적이다. 그것은 묘사들이 기존의 특정한 대상에 근거하지 않아도 "자유롭게 떠다닐 수 있다"는 의미이다. 사고의 내포성은 사고의 유연성과 관계있다. 그 유연성 덕분에 우리는 가상세계를 상상하거나 다양한 묘사들을 융합하고 하나의 묘사를 여러 부분으로 분할할 수 있다. 사고에서는 바로 이 세계에 대한 유연하고도 내포적인 표상이 가장 중요하다. 이러한 체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두뇌의 생리적 체계는 바로 두뇌안의 "개미들" 즉 1000억개에 달하는 뉴런이라 불리는 신경세포와 관련이 있다. 하나의 뉴런에로의 입력의 복잡성- 심지어 한번에 20만개의 입력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 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뉴런은 아주 원초적인 방식-발포 또는 비발포-으로 반응한다. 이제 이런 원초적 구조위에 더 높은 구조가 있을 것이다. 즉 개념들을 가공할 수 있는 더 높은 층위의 구조가 존재하리란 것이 명백하다. 그러한 구조는 분명히 더 많은 수의 뉴런들로 구성된 더 큰 구조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개별 두뇌들 사이의 동형관계가 존재할까?

뇌는 해부학적으로 대뇌, 소뇌, 시상하부 등의 영역으로 구분될 수있다. 대뇌는 좌뇌,우뇌로 구분되며, 두뇌의 외피부분은 대뇌피질의 층으로 덮여있다. 이 대뇌피질의 양은 인간의 두뇌를 다른 동물의 두뇌와 구분시켜주는 특징이다.

 

사고가 두뇌에서 수행된다면... 그렇다면 두 개의 뇌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나의 두뇌는 여러분의 두뇌와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두뇌 속에 위에 언급한 동일한 해부학적 분할 영역을 가진다. 두뇌들의 이러한 동일성은 어디까지일까? 신경의 층위까지? 

 

이점과 관련하여 지렁이의 뇌에 대한 언급이 흥미롭다. '한 특정한 지렁이의 특정한 개별적인 세포를 규명한다면 동일한 종의 다른 지렁이의 상응하는 동일한 세포를 확인할 수 있다' 결론은 지렁이들이 동형태의 두뇌를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직 하나의 지렁이만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사고의 위계질서가 높아지고 뉴런의 수가 증가할 수록 개체의 두뇌들이 그런 식으로 1:1로 사상될 수 있는 가능성은 급속히 줄어든다.

 

기억과 두뇌 사이의 연관관계가 존재하는가?

정신적인 경험들이 두뇌에 할당될 수 있다면, 지식이나 정신적인 삶의 다른 측면들이 두뇌 속의 특정한 장소나 물리적인 하위체계로 환원될 수 있을까?

신경학자 칼 레슐리는 미로속의 쥐 실험을 통해 어느 부분에 기억이 저장되는지를 밝히려 했다.  하지만 그는 대뇌피질의 어느 부분에서도 기억을 저장하는 특정한 부분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기억흔적을 찾아서"라는 논문에서 기억이란 전혀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결론을 내렸다. 이 실험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주는 듯 하다. 즉 대뇌피질의 어느 곳이나 동일한 기억저장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반면에 1940년대 말 캐나다 신경외과 의사인 와일더 펜필드는 전극을 통해 두뇌에 약한 전류를 흘러 보내는 수술을 하면서 '일정한 뉴런들의 자극이 환자의 특정한 심상이나 감각을 창출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런 특정한 사건들을 촉발 시킬 수 있는 장소들의 수효는 극도로 적었으며 근본적으로는 단 하나의 뉴런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발견은 아마도 국지적인 영역들이 특정한 기억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이 두 사이의 결론은? 기억이 국소적으로 더욱이 대뇌피질의 더욱 더 많은 장소에 분산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명은 기억이란 두뇌 전체에 분포된 동적인 과정들로부터 재구성될 수 있지만, 그 격발은 개별적인 국소적인 지점들로부터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두뇌 처리과정의 위치 할당에 대한 가장 흥미있고 중요한 업적중 몇 가지는 하버드 대학의 데이비드 허블과 토르스텐 위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고양이 두뇌에 있는 시지각 경로를 사상해 내었다. 이 연구에 의하면 잘 정의된 신경경로들이 전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시각신호들은 최종적으로 시각피질로 진행하게 되는데, 아직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시각피질은 거시적인 척도의 하드웨어 조각이지만 전적으로 소프트웨어-즉 시각 정보의 처리-를 위해서 동원된다. 대상들의 [인식]에 관한한 시각피질에는 어떤 것도 자리잡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각피질에 있는 복잡세포와 초복잡세포들의 출력이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형태, 공간, 그림, 얼굴 등의 의식된 인식으로 변환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이러한 점들은 의식의 존재 장소가 두뇌의 개략적인 해부학적 영역 분할에서 보다 차라리 미시적 분석에서 찾아지리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아마도 특정한 대상만을 인식하는 고유의 신경망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망에 집중될 "누두작용(깔대기작용)의 과정"이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바로 그러한 신경망이 우리 두뇌 속에 있는 "기호들" 즉 신호를 수신하여 의미로의 변환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모든 개념에 대하여, 격발될 수 있는 매우 잘 정의된 모듈- 아주 적은 무리의 뉴런들로 구성된 모듈로서의 "신경복합체"-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두뇌안의 어디엔가 그런 모듈이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 증명되지 못한다. 아마도 모든 모듈의 많은 복제가 두뇌안에 산재해 있을 수도 있고, 아미면 모듈들이 물리적으로 중첩되어 있는 지도 모른다.

 

부류와 사례

두뇌안의 기호(신경복합체)들은 부류를 표상하는가 아니면 사례들을 표상하는가? 부류만을 표상하는 일정한 기호들이 있는가 또는 사례들만을 표상하는 기호들이 있는가? 아니면 개별적인 기호는 자기의 어느 부분이 활성화도었는가에 따라서 제각기 부류기호 또는 사례기호로서 쓰일 수 있는가? 또 한가지의 곤란한 질문은 복수라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개 세마리를 어떻게 상상할까? "개"에 대한 부류기호부터 시작해서 그로 부터 세개의 복제"를 얻어낼 수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개라는 부류기호를 판형으로 이용하는 가운데, 세 개의 새로운 사례기호를 만드는가? 아니면 우리는 셋과 개라는 기호를 결합하여 활성화하는가?

 

아마도 두뇌 속에서는 부류와 사례 사이의 차이를 창출하고 그렇게 해서 다양한 등급의 구체성을 가지는 기호들 및 기호의 조직을 허용하는 방법론의 위계질서가 있을 것이다.

 

두뇌에 존재하는 거대하고 꾸준히 증가하는 기호들을 보면서 우리는 결국 두뇌가 포화상태 즉 더 이상 새로운 기호를 위한 공간이 없는 지점에까지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기호들이 중첩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상태가 비교적 빨리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기호들은 중첩되고 완전히 뒤엉켜 있기때문에 모든 뉴런들은 유일한 기호의 구성성분이 아니라, 아마도 수백 개의 기호의 기능적인 일부분일 것이다. 그렇다면 기호들은 결코 공간상으로 자리매김될 수 없다. 모든 기호는 전체 두뇌와 동일시된다. 이렇듯 기호들은 서로 여러 겹으로 얽혀 있으며, 서로 그물을 짜는 것이다.

 

부류기호와 가상세계

우리는 부류들로 부터 사례들을 "추출하는"능력 덕분에 다양한 가상상황을 표상할 수 있으며, 현실세계에 충실하게 머물러야 할 필연성으로 부터 자신을 해방시켰다. 기호가 다른 기호들을 위한 판형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현실에 대한 정신의 일정한 독립성을 부여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부여하고 싶은 만큼 많은 개별 사항들을 가지고서 비현실적인 사건이 일어 날 수 있는 인공 우주를 창출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풍요로움을 만드는 부류기호 자체는 현실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절차적 지식과 정언적 지식

어떤 지식이 있을 때 그것을 프로그래머뿐만 아니라 프로그램도 "판독할" 수 있게 만든, 예를 들면 사전이나 연감에 실린 것처럼 저장되어 있는 지식을 정언적이라고 한다. 이것은 국소적으로 코드화되어서 분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서 절차적 지식은 사건이 아니라 프로그램으로서만 코드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절차적 지식은 통상 조각으로 분산되어 있어, 그것을 호출하거나 고정시킬 수 없다. 이로부터 바로 그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방식은 어떤 국소적인 세부사항을 가지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른 말로 하자면, 순수한 절차적 지식이란 부수현상이다. 그렇다면 두뇌의 사고작용, 의식등은 두뇌의 어떤 부분에도 그 존재장소를 가지지 않는 절차적 성질을 지닌 부수현상이란 말인가?

 

 

괴델,에셔,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

 

제10장  기술층위와 컴퓨터 체계

 

여러개의 층위

텔레비젼 화면에 펼쳐지는 것은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두 개의 표상을 가진다. 하나는 화면 위에 켜졌다 꺼졌다하는 점들의 집합이고, 또 다른 하나는 화면위에 나타나는 여자의 모습등과 같은 것이다. 이 두가지 대립되는 두가지 층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간단히 다른 하나를 배제하거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림으로 그 두사이에 혼란을 겪지 않는다.

 

인공지능 연구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의 하나는 이것이다. 즉 여러개의 층위가 있을 때 그 중에서 하나의 기술층위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체계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이며, 다른 층위를 어떻게 만드는가를 규명하는 것이다. 그 대답은 "덩어리"만들기(응축)의 개념이다.

 

함축적 가지치기

덩어리 만들기 개념은 다음에 나타나는 함축적 가지치기와 유사하다. 체스의 고수들은 초보자와 다른  층위에서 생각한다. 고수들은 여러가지 다양한 행마가운데 나쁜 행마는 아예 보지 않는다. 모든 행마를 다 검토한 후 나쁜 행마를 구별해내는 것을 구체적 가지치기라 하는 반면에, 고수들은 직관적으로 나쁜 행마는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는 함축적 가지치기의 방식으로 체스의 행마를 한다고 한다. 천부적인 수학자도 보통 사람들이 하듯이 모든 종류의 오류경로를 다 점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장 유력한 경로의 "냄새를 맡고는" 곧 바로 결정한다.

 

덩어리 만들기(응축)

하나의 체계에는 많은 기술층위들이 존재하는데, 낮은 층위와 높은 층위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응축이다. 낮은 층위에서는 서로 무관한 것으로 보이는 일련의 사물들이 높은 층위에서는 그것들이 응축된 형태인 덩어리로 집약되어 나타난다. 낮은 층위에서의 개개의 점들은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높은 층위에서 관찰할 때는 그 점들이 모여서 하나의 덩어리 또는 형태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컴퓨터의 프로그램의 층위

컴퓨터 프로그램의 기술 위계에 있어서 가장 낮은 층위는 기계언어이다. 그 보다 높은 층위는 어셈블리 언어이다. 이 두 사이에는 1:1 대응관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컴파일러 언어는 응축의 개념을 이용한 언어로서, 어셈블리 언어보다 한 단계 높은 층위의 언어이다.  컴파일러 언어의 명령어 하나는 기계언어 층위에서의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처리과정을 하나의 덩어리로 응축시켜 호출하는 능력을 가지도록 설계되었다.

 

그 외에 기계언어보다 낮은 층위의 마이크로 프로그래밍이 있으며, 운영체계의 층위도 존재한다. 이러한 복잡한 컴퓨터 시스템의 여러 층위들은 총체적으로 사용자를 "편안하게"해 주고, 사용자와는 무관한 심층적인 층위들에서의 많은 과정을 고민하지 않게 해 주는 효과를 가진다.

 

오늘날 인공지능 연구의 주요 영역중의 하나는, 훨씬 높은 층위의 언어의 개발을 연구하는 자동 프로그래밍이다. 보기들로부터 일반화하기, 문법적 오류정정하기, 애매한 묘사의 의미를 이해시키기, 사용자의 낌새를 알아차리기, 어떤 사안이 불분명해지면 질문하기, 자연언어 자체를 사용하기등... 이 때 사람들은 신뢰성과 유연성사이에서 적당한 타협점을 찾을 수 있기를 원한다.

 

정신대 두뇌

두뇌에 대해 논하고 있는 다음 장에서는 두뇌의 가장 높은 층위인 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지를 검토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정신과 관련이 있기도 하고 동시에 관련이 없기도 한 낮은 층위들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낮은 층위의 법칙들에 대해서 "봉쇄"된, 따라서 뇌세포의 미시적인 활동을 좌우하는 사고의 법칙들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사고의 과정들을 하위체계들로 쪼개어 넣는 것이 불가능한가? 아니면 두뇌는 차라리 원자, 재규정된 전자, 원자핵, 중성자 아니면 쿼크 같은 것인가? 의식은 부수현상인가? 정신을 이해하려면 신경세포의 층위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내려가야 하는가?

 

괴델,에셔,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

 

제9장  무몬과 괴델

 

서양 지성인들의 동양종교에의 심취는 무슨 까닭일까?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 나타난 종교사상을 호프스태터의 이 책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무몬은 참선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13세기에 48개의 선문답집을 썼다. 선문답(공안)의 전형적인 요소는 이율배반이다. "논리의 본질을 분쇄하려는"시도가 모든 선문답에 드러나 있다. 참선의 목표는 논리를 분쇄시킴으로 혼동을 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를 혼동의 상태에 있게함으로, 우리의 마음을 비논리적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 참선의 목표인 것이다. 그 이론에 따르면 논리로부터 벗어날 경우에만 깨우침으로 도약할 수 있다

 

깨우침을 가장 정확히 요약하자면 '초월적 이원론'이다. 인간의 지각은 그 본질에 있어 이원론적이다. 인간의 지각은 세계를 개념적으로나 지각적으로 상이한 범주로 분할한다. 낱말의 사용은 아주 분명하게 개념적인 범주를 표상하기때문에 본질적으로 이원론적이다. 따라서 참선의 요체는 낱말에 대한 의존을 극복하려는 투쟁이다. 이렇게 본다면 깨우침의 적은 논리라기 보다는 언어적 사고 속에 들어 있는 이원론적 사고이며 지각이다. 지각은 우리를 대상과 그 밖의 세계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다. 세계를 인위적으로 여러 부분으로 쪼개며, 그로 인해 진정한 길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헤세의 '싯다르타'에서 주인공인 싯다르타가 깨달은 것,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그의 친구 고빈다가 깨달은 것이 바로 이러한 이원론의 초월이셈이다. 싯다르타는 그의 친구 고빈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하지만 결국 고빈다도 모든 세계가 일체로 이루어졌음 - 심지어 선과 악도 일체임을 깨닫게 된다. 금세기 최고의 철학자로 인정받는 비트겐슈타인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말은 참선이 표방하는 언어로는 진리를 나타낼 수 없다는 사상과 맥이 닿는 것 같다. 에셔의 목판화 "베르붐"이라는 작품에서는 대립들이 다양한 층위의 통일체로 묶인다. 그리고 "세개의 공"이라는 석판을 보면, 세계의 각 부분이 각기 다른 부분을 포함하고, 또 모든 다른 부분들에 거꾸로 포함된 것 처럼 보이는 모습이 있다. 이것은 불교의 우화 "인드라의 그물"을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MU는 정리의 본성을 가지는가, 아닌가?

호프스태터는 MIU-체계에 괴델수를 부여함으로 310-체계와 같은 숫자로 이루어진 체계로의 변환을 보여준다. 이렇게 괴델의 방법론을 통해  임의의 형식체계에 그와 동형관계를 가지는 일련의 산술 규칙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결론은 모든 형식체계의 연구에 수론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활자형 규칙의 집합이 정리들을 재귀순환적으로 생성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산술 규칙을 반복적용함으로 그에 상응하는 자연수의 집합을 만들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수를 "가산수"라고 하는데, 이 "가산수"는 수론에서 형식체계의 정리들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면 "비가산수"도 재귀순환적으로 연산될 수 있는 지, 비가산수들은 공통적인 산술적 속성을 가지는 지 궁금해 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TNT체계를 사용할 수 있다.

 

즉 'MU는 MIU-체계의 정리인가?' 은 310-체계를 통해 "30은 MIU-수인가?"라는 말로 변환될 수 있다.

그리고 "30은 MIU-수이다"라는 명제를 또 다시 TNT-표기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얻어진 TNT 연쇄체를 MUMON이란 부르면...

"MUMON은 TNT의 정리인가?"라는 질문이 "MU는 MIU-체계의 정리인가?"하는 문제와 동형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우리는 "MU는 MIU-체계의 정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얻기 위해(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MIU-체계내에서의 기계적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으며, 다만 그 형식체계를 벗어난 상태에서 지능적인 방법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비교적 짧은 연쇄체(MU)을 또 다른 기괴한 연쇄체(MUNON)으로, 그리고 간단한 형식체계(MIU-체계)를 더 복잡한 형식체계(TNT)로 대체한 것이다.  

 

이 과정은 다음과 같은 사실과 관련이 된다.

1) "MU는 정리이다"와 같은 명제들은 괴델의 동형관계를 거쳐서 수론으로 코드화될 수 있다.

2) 수론의 명제들은 TNT로 번역될 수 있다.

 

이제 TNT 자체에 괴델 수를 부여하고 그 추론 규칙을 "산술화"한다. ...블라블라....이하는 이해불가...

 

G의 존재가 TNT의 불완전성을 야기한다.

G는 TNT의 정리인가, 아인가?

TNT는 추론적 사고의 유효한 방법이고, 따라서 TNT 자체는 결코 정리에 대한 거짓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일상적인 전제를 해 보자. 달리 말하자면, TNT의 정리인 모든 것은 하나의 진리를 표현한다. 그래서 G가 정리라면, 그것은 하나의 진리, 즉 "G는 정리가 아니다"를 표현할 것이다. 이 재귀준거의 힘이 여기서 아죽 극적으로 발휘된다. 하나의 정리이기 위하여, G는 거짓이어야 할 것이다. TNT가 결코 정리에 대한 거짓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전제에 기대어 볼 때, 우리는 G는 정리가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건 그런대로 괜찮지만, 작은 문제가 하나 남는다. G가 정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G가 진리를 표현한다는 것은 시인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TNT가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참인 명제를 나타내지만 정리는 아닌 연쇄체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놀랍게도 우리는 G 또한 그 결과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주는 산술적 해석을 가진다는 사실의 단서를 놓쳐서는 안된다.

'TNT의 연쇄체는 발견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자연수의 일정한 산술적 속성에 대한 명제를 표현한다. 더욱이 그 체계의 외부에서 추론한다면, 그 명제가 참인지뿐만 아니라 그 연쇄체가 TNT의 정리가 아니라는 것 또한 결정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TNT에게 그 명제가 참인지를 묻는다면, TNT는 긍정할 수도,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다. ????

 

괴델,에셔,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

 

제8장  활자형 수론

 

"게카논"은 형식과 내용에 있어 흥미로운 점을 포함하고 있다. <어느 한 층위에서는 이해하지만, 다른 한 층위에서는 이해하지 못한다> 바로 이점을 "게카논"을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한 것 같다.

 

8장에서는 활자형 수론(TNT)라는 형식체계를 소개한다. 놀랍게도 이 TNT는 모든 수론의 정리들을 형식화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5는 소수이다' 또는 '무한하게 많은 소수들이 존재한다'와 같은 명제들을 기호를 사용하여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TNT형식체계의 공리와 규칙들을 사용하여, 여러가지 정리들을 유도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재귀연산을 통해 참 명제(정리)들을 생산해 내고 그 결과 거짓명제를 구별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만일 TNT 체계가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 낼 수 있다면 이는 우리가 모든 진리를 비진리로 부터 구별할 수 있는 활자형 방법론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까? 이 책의 취지로 보건데 그건 가능하지 않을 것같다.  

 

페아노의 다섯개의 공준

1889년 페아노는 자신의 공준을 제안하면서 유클리드의 방식을 따랐다. 유클리드는 기본적인 4~5개의 공준을 기초로 다른 기하학적 정리들을 유도해냈다. 페아노는 추론적 사고의 원리들을 공식화하지는 않았지만, 추론적 사고를 통하여 다른 모든 것들을 유도시킬 수 있는 자연수의 속성의 작은 집합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렇게 함으로 페아노는 자연수의 개념을 정의하고자 했다.

수학자들은 대체로 페아노가 그의 다섯개의 공준으로 자연수의 본질을 지적하는데 성공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의 성공이 "우리가 자연수에 대한 참명제와 거짓 명제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 답은 제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수학자들은 TNT와 같이 전적으로 형식적인 체계에 몰두했다.

 

그렇다면 TNT 체계는 바로 수학자들이 원했던 그런 체계일까?

 

ω-불완전 체계들과 결정 불가능한 연쇄체

"한 피라미드 가족의 모든 연쇄체들이 정리이지만, 전칭양화처리된 요약하는 연쇄체가 정리가 아닐 경우, 하나의 체계는 ω-불완전하다. 이것은 어떤 연쇄체는 체계안에서 결정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결정불가능하다"라는 말은 '그 체계가 계속 확장될 수 있다는 데 대한 징후일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결정불가능을 결정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그 상위의 형식체계로의 확장의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유클리드 기하학에서의 절대기하학은 "점" "직선"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제대로 정의하지 않았기에 - 무정의 용어로 사용했기때문에, 그 결과 그 개념의 다양한 확장을 위한 여지가 남아있게 되는 것과 같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점과 직선은 "점"과 "직선"이라는 개념들의 일종의 확장을 제공하며,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점"과 "직선"은 다른 확장을 제공한다.

 

ω-모순은 모순과 다르다.

1) 모든 자연수들이 일정한 속성을 가진다고 집단적으로 주장하는 정리들의 피라미드 가족과 2) 모든 수가 일정한 속성을 가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이는 유일한 정리를 대립시킴으로써 생기는 그런 종류의 모순을 ω-모순이라고 한다.

ω-모순적인 체계는 인정하기 힘들지만 결국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같은 것이다. 이 모순처럼 보이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연수와는 다른 예기치 못한 "별도의" 수가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것을 "자연수"가 아니라 초자연수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 수(초자연수)들은 피라미드 가족에서는 표현될 수 없다. 결국 모든 것이 제대로 운용되게끔 기호들을 해석하는 방법이 있기때문에, 그것은 알고 보면 진정한 모순은 아니다.

 

->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장에서, 메시지는 세개의 층위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 바 있다. 그중 외부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이 제대로 운용되게끔 기호들을 해석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은 바로 외부메시지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내부 메시지만이 아니라 외부메시지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 즉 지능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법 - 자신의 체계에 대해 사고하는 - 은 체계 외부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것 같다.

 

힐베르트의 프로그램

다비드 힐베르트의 지휘아래 , 수학 및 논리학의 중요한 학파에 의해서 금세기 초반에 추진되었던 희망사항 및 목표는 무모순성을 지닌 수론을 공식화하는 것이었다. 이 수론은 "유한론적"입장으로 불리는 매우 제한된 집합의 추론 원리들을 적용하여 TNT와 유사한 수론의 무모순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괴델은 TNT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만큼 충분히 강력한 그 어떤 체계도 최소한 TNT 자체만큼 강력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체계내에서는 그 체계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 체계의 메타체계, 그리고 메타메타체계...등 끝없이 이어지는 순환성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괴델,에셔,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

 

제7장  명제계산

 

이전에 MIU체계, pq-체계, tq-체계등이 논의되었었다. 이번 장에서는 명제계산이라는 형식체계가 등장한다.

호프스태터는 왜 명제체계을 도입하는가? 이 체계로 부터 유추할 수 있는 귀중한 정보가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8장에서 다룰 TNT체계의 중요한 요소이기때문이기도 하다. TNT체계는 호프스태터가 소개하는 마지막 형식체계이다. 그 형식체계를 이야기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길을 걸어왔던 것 같다.

 

그렇다면 명제계산이라는 체계로 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인공지능을 위한 귀중한 요소, 이상한 고리는 무엇인가?

다음의 말에 유의해 보면,  <명제계산에서는 모든 과정이 전적으로 활자로만 이루어진다. 그 누구도 "그 안에서" 그 연쇄체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기계적으로, 아무 사고도 동반하지 않고, 엄격하게, 심지어는 우둔하게 진행된다.>

 

이 언급은 명제계산의 기계적 특성을 잘 묘사한다. 이것은 지능적 특성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 형식체계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몇가지 특징들은 인공지능 문제에 대한 뭔가 중요한 요소들을 생각해 보도록 한다. 그것은 층위개념이다. 지능이란 체계 그 자체를 생각하고 논하는 것이다. 즉 하나의 형식을 그 외부에서 바라보며 그 형식체계를 논할 수 있는 것이 지능의 특성이라 볼 때, 한 형식체계의 상위 층위 개념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호프스태터는 명제계산의 한계 내지는 모순성을 지적함으로 상위체계 즉 메타체계와의 상호작용의 필요성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듯 하다. 다음 호프스태터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 부분에서 그 점을 추리해 볼 수 있겠다. 

 

<이 작은 논쟁은 논리와 추론적 사유가 스스로를 변호하기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어떤 특정한 순간에 우리는 절벽에 도달한다. 즉 "나는 내가 옳다고 봐"라고 큰 소리를 치는 것 외에는 어떤 방어수단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추론적 사고의 패턴을 영원히 변호할 수는 없다. 믿음이 그것을 대신하는 시점이 온다... 우리는 어떤 증거가 한 체계 안에서 옳다는 궁극적으로 절대적인 증거는 결코 댈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증거의 증거 또는 증거의 증거의 증거 등을 댈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맨 바깥의 체계 증거의 타당성은, 믿을 수는 있지만 증명되지 않은 가정에 머무른다.>   

 

....러셀의 역설이 수학을 확고한 반석위에 건축하려는 시도가 무모함을 일깨워 준 이후에도 힐베르트를 비롯한 일단의 수학자들은 수학의 완전화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특히 러셀은 그 자신의 이름을 딴 역설을 극복하려는 여러 노력으로 상위 층위 개념을 생각해 냈지만 이 역시 수학을 확고한 기반위에 세워 놓기에는 역부족임을 깨닫는다. 더 나아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힐베르트를 비롯한 실증주의 수학에 마지막 결정타를 가하고 만다. 결국 완벽한 학문의 위치에 있던 수학 조차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어 버렸던 것이다.

 

<명제계산은 어떤 점에서 추론적 사고와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명제계산의 규칙들을 인간의 사고규칙들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순적인 사고를 야기한 자신의 추론적 사고의 믿음과 방식들을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모순을 야기했으리라고 보이는 자신의 내부의 체계들로부터 가능한 벗어나서 그것을 수리하고자 할 것이다.>

 

<실제로 모순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보와 발전의 주요 원천이며, 수학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전에 수학자들은 모순을 찾았을 때 그 즉시 모순을 야기한 체계들을 확인하여 그것으로 부터 벗어나서 그 체계를 개선하려고 했다. 모순의 발견과 수리는 수학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신앙에서도 이러한 모순의 발견고 그로 인한 체계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할 수 있을까? 신에 대한 신앙을 완전을 바탕으로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완전을 가정한 체계내에서 모순이 발견된다는 것은 당황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논리 자체의 불완전성과 우리 자체 지식의 불완전성으로 볼 때, 모순이 아닌 것이 모순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데카르트는 무한으로 뻗어나가는 관성을 명석한 이성으로 볼 수 있었다. 우리 지구상의 환경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현상, 모순이 되는 현상이 관성인데, 이 한계를 벗어나 이상적인 환경 즉 아무런 힘의 영향도 받지 않는 환경을 가정했을 때 비로소 명확히 드러나는 관성을 정의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형식체계내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것은 불가능한 상황을 가정하는 지능의 한 요소로서 가능하게 된 것은 아닌가? 그야말로 호프스태터의 말처럼 언젠가 믿음이 필요한 때가 닥치게 되는 것이다.

 

<더욱 적절한 (그와 같은 모순)은 바로 이 순간 다루고 있는 모순, 즉 우리가 실제로 생각하는 방식과 명제계산이 우리를 흉내내는 방식 사이의 괴리이다. 이것은 수 많은 논리학자들을 괴롭힌 원인이었기 때문에, 명제계산이 우둔하거나 경직되지 않도록 많은 창조적인 노력이 경주되었다....더욱 극단적인 시도들은 완전성이나 무오류성에 대한 요구를 묵살하며, 그 모든 비정합성을 가지고서 인간의 추론적인 사고를 모방하고자 한다. 그런 연구들은 이제 더 이상 수학에 견고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간단히 말해서오로지 인간의 사고과정을 연구하는 것이 그 목표이다.>

 

...지능의 또 한가지 특징은 논리의 한계를 벗어난 비정합성이라...??? 인간의 사고 과정은 결코 수학적이지 않다. 그 독특한 사고과정을 어떻게 흉내낼 것인지 인공 지능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괴델,에셔,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

 

제6장  의미는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가?

 

이 장은 의미가 코드화된 메시지, 암호해독자 및 수신자 사이에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가를 포괄적으로 논의한다. 그 보기로 DNA 유전자 코드, 판독이 안 된 고대의 비문, 우주공간을 날려보낸 바흐와 케이지의 음악이 담긴 음반을 들고 있다. 지능과 의미사이의 관계를 고찰한다.

 

객관적인 의미가 존재하는가? 지능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모든 수신자에게 발신자의 의도가 동일한 의미로 전달될 수 있는가? 그러한 뜻에서 객관적인 의미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발신자의 의도와는 다른 의미를 창출해 내는 그런 종류의 지능이 있다고 볼 때, 객관적인 의미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수신자의 지능의 수준이나 종류에 따라 주관적인 의미로만 전달되는 상황이 가능할 것인가?

 

정보 저장체와 정보 발현체가 있다. 음반은 정보 저장체, 전축은 정보 발현체에 해당할 것이다. DNA분자는 유전자형(genotype)으로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는 정보 저장체이며, 이 정보를 바탕으로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하나의 유기체로 변환된다. 이 유기체는 정보의 표현형(phenotype)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표현형인 유기체의 물리적인 특징과 와 유전자형인 DNA사이에는 그 어떤 유사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 둘은 이상한 동형관계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음반과 음악작품사이에는 한 구조의 부분이 다른 구조의 부분으로 쉽게 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평범한 동형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유전자형을 표현형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유전자형보다 훨씬 더 복잡한 메커니즘이 작용해야 한다. 유전자형의 다양한 부분들은 이러한 메커니즘을 위한 방아쇠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정보는 유전자 속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메커니즘 속에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도 있겠다.

 

모든 메시지는 세 층위를 가진다. 메시지의 해독을 위해서는 정보의 세 층위가 있는데 그것은 1) 틀메시지, 2) 외부메시지, 3) 내부메시지 이다. 틀메시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해독 메카니즘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 속에 어떤 특정한 내부메시지가 들어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는 모든 구조나 기타 지능의 증거들이 틀메시지에 속할 것이다. 외부메시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내부 메시지에 대한 올바른 해독 메카니즘을 구축한다는 것 또는 구축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을 뜻한다. 내부메시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발신자에 의해서 의도된 의미를 추출했다는 뜻이다.

 

틀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한다. "도대체 메시지가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이를 위해 기본적으로 가정해야 할 것은 우주에 있는 모든 지능적인 존재가 우리와 전반적으로 유사한 인지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매우 규칙적인 기하학적 구조 안에 비주기적 결정이 발견된다면 이는 내적인 메시지를 숨겨놓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소수가 바로 그러한 일종의 규칙적인 구조안에 숨어있는 비규칙적 결정으로 신비한 창조주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메신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우주에 있는 지능적인 존재를 가정할 때, 이 지능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보아야 할 지 곤혹스러울 수 있다. 우리의 지능과 닮은 존재만을 '지능을 가진 존재'라고 부르며, 다른 종류의 대상들은 지능적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하는 것을 지구 쇼비니즘이라고 불러도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분명한 틀메시지에도 불구하고 그 메시지를 무시하는 방법으로 반응하는, 아니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일개의 운석이 우리 지구인의 쇼비니즘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더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가정하는 것은 과연 이치적일까?

 

지능을 가진 우주의 존재가 있다면, 그들이 바흐의 음반과 존케이지의 음반을 통해 그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바흐의 음악은 그야말로 화음의 아름다운 비주기적 결정이며, 반면에 케이지의 곡은 불확정적으로 창출된 요소들의 구성이다. 아마 바흐의 음악을 접하게 된 지능은 그 곡의 패턴, 그리고 구조적인 층위(선율, 화음, 박자)의 복잡성에 따라 바하를 포함한 인간 종의 지능이 어느 수준에 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렇게 파악할 수준을 가진 지능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한 지능적인 추리로 마침내 인간 종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그 음악으로 부터 끄집어 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맥락을 상실한 채 전해진 케이지의 음반은 지성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보다는, 그에 접한 지능은 그 메시지가 단순한 우연성에 의한 것임을 추리하게 될 확률이 높다. 물론 케이지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음악,예술,문화의 흐름과 같은 맥락이 함께 전달된다면 사정은 달라지겠지만...

 

....호프 스태터의 생각의 참신함과 천진스러움은 재미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지능과는 다른 지능이 존재할 가능성을 논한다는 자체가 참으로 천진난만하지 않은가? 예전에 생명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우리 지구상에 사는 생명과는 다른 종류의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에 대해...예를 들면 지구에는 지구의 환경에 알맞는 생명체가 진화되어 살게 되었다면, 다른 행성에는 그 환경에 알맞는 또 다른 생명체가 진화라는 과정을 통해 살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또한 바하의 음반과 존 케이지의 음반에 근거하여 지성을 유추해 낼 것이라는 그의 생각은 상식을 뛰어 넘은 어린애다운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케이지의 음악이 어떤 흐름의 한 구성 요소이며 필연적이라고 말하기까지는 지나치지만 필요조건을 충족하는 장르의 음악임을 파악하는 그의 지성은 그의 지적인 범위가 과학에만 한정된 것이 아닌, 과학과는 정 반대의 끝에 서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예술에 대한 그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 

 

 

결론적으로 의미는 어디에 숨어있는가? 기본적으로 내부 메시지에 보편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내부메시지들 들여다 볼 수 없다하더라도 의미의 존재여부를 판단하게 해주는 틀메시지가 하는 역할도 있다. 그럼 외부메시지는...가장 흥미로운 생각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외부메시지에 따라 내부메시지가 여러가지로 해석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없다. 즉 해독 메카니즘에 따라 달리 해독될 수 있는 텍스트도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예를 들면 텍스트의 어느 부분을 전경과 배경으로 볼 것인지 결정하는 것도 다른 해석을 낳게 할 수 있다. 이런 예는 어떨까? '아버지가방에들어간다.' 이 문장은 1) 아버지가 방에 들어간다. 2) 아버지 가방에 들어간다. 두가지로 해독이 될 수있다. 맥락없이 이 텍스트만 주어졌다면 두가지다 가능한 해독이 될 수 있다. 이것은 해독메카니즘 즉 외부메시지가 의미를 창출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의미는 메시지의 세가지 층위에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러한 메시지의 층위를 관통할 수 있는 지능의 특징을 가지도록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 인공지능의 갈 길은 험란하고 멀기만 한 것 같은데...  

괴델,에셔,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

 

제5장  재귀적인 구조와 재귀순환적 과정

 

1장에서 4장에 이르기까지 다루어진 내용들을 검토해 보면 형식체계와 그 외부의 더 큰 형식체계, 그러한 형식체계들의 상호관계, 나아가서 이러한 형식체계의 위계의 존재에 대해 암시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체계를 넘나드는 사고야 말로 지능의 특징이며, 인공지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본적인 개념등을 구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인공지능을 개발하기 위한 길 위에 도사리고 있는 난점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제 5장에서 다루는 재귀적인 구조 맻 재귀순환적 과정은 형식체계의 위계의 구조와도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이는 컴퓨터에서의 작업과도 비교된다.  더 낮은 단계로의 진입을 위한 '푸시', 그리고 그 낮은 층위에서의 연산을 종결하고 나서, 다시 원래의 단계 즉 푸시 직전의 연산상태로의 귀환(팝), 그리고 연관된 정보 즉 귀환주소나 중단의 지점에서의 연관된 사실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보(변수결합)를 제공하는 임시기억장치등은 컴퓨터 작업의 특성이다. 이러한 푸시, 팝, 임시기억장치등을 이용한 작업은 일종의 재귀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복제나 변형복제등을 통한 자기증식등도 일종의 재귀적인 구조를 가지는 것이며, 특정한 경우에는 이러한 재귀순환적 구조는 카오스 즉 예측불가능성과도 연결된다. 이는 인공지능을 개발하기 위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재귀순환개념과 불규칙성

이러한 재귀순환개념이 음악의 여러 패턴, 언어적 패턴, 기하학적 구조, 수학의 함수, 물리학이론, 컴퓨터 프로그램등의 여러 맥락으로 소개한다. 특히 언어적 패턴에서 나타나는 재귀순환적 구조는 재귀순환추이도(RTN - Recursive Transition Network)를 통해 시각적으로 표상된다. 수학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피보나치 수열이 재귀순환적인 구조를 가진다는 것이다. 피보나치 수는 바로 앞의 선행하는 피보나치 수들에 의해 정의된다. 더욱 경악하게 하는 것은 Q(n)=Q(n-Q(n-1)) + Q(n-Q(n-2)), Q(1)=Q(2)=1, n>2 와 같은 함수이다. 이 재귀순환적인 함수를 통해 생성된 수열은 상식을 벗어난다. 즉 정의에 따라 이 수열은 규칙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계속 수열을 진행시키면 더욱 더 무의미하게 보이는 수열이 형성된다. 이것은 카오스를 질서정연하게 생성하는  매우 특이한 경우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상이성 속에서의 동일성"에 직면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된다.

두 개의 사물은 언제 동일한가?

그 질문은 이 책에서 반복되어 나올 것이며, 우리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그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단순한 질문이 인공지능의 본질과 얼마나 깊이 연관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 문제가 재귀 순환에 대한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재귀순환이란 "상이성 속에서의 동일성"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영역이기때문이다. 재귀순환은 "동일한" 사태가 상이한 층위들에서 한꺼번에 출현하는 데 근거하고 있다. 물론 상이한  층위들에서의 사태들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 오히려 많은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불변의 속성을 찾아낸다.>

 

프로그래밍과 재귀순환: 모듈성, 고리, 처리절차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본질적 기법 중의 하나는 모듈화이다. 즉 두개의 처리절차가 넓은 의미에서 동일해 지는 것을 감지하는 것이다. 일정한 조건이 충족될 때까지 일련의 연산을 계속 수행하도록 하는 하나의 고리를 만들 수 있다. 이 때 조건에 따라 경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매개변수와 조건들로 무장된 RTN을 확대추이도(ATN: Augmented Transition Network)라고 한다.

 

재귀순환과 예측 불가능성 

<재귀순환적인 나열은 기존의 규칙들을 통하여 낡은 것들로 부터 새로운 것들이 창발하는 하나의 처리과정이다. 얼핏 보기에는, 그런 처리과정들에서는 예를 들면 Q-수열의 예측 불가능성과 같은 많은 놀라운 것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런 유형의 재귀정의된 수열에는 일종의 내재적으로 증식하는 복잡성이 전형적이기때문에, 우리가 깊이 들어갈 수록 예측하기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것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적당히 복잡한 재귀순환적인 체계들은 예정된 어떤 표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지능을 정의하는 속성중의 하나가 아닐까? 프로그램들이 재귀순환적으로 스스로를 호출할 수 있는 처리과정들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대신에, 자기 스스로를 변경할 수 있고, 다른 프로그램에 영향을 주는 프로그램들 그리고 그것을 확장하고 개선하며 일반화하고 고정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없을까? 안 될 이유가 없다. 짐작컨대 이런 종류의 "헝클어진 재귀순환"이 지능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괴델,에셔,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

 

제4장  무모순성, 완전성, 그리고 기하학

 

형식체계의 무모순성/ 모순성, 그리고 완전성/불완전성에 대한 문제가 논의된다.

"무정의 용어"라는 대단히 난해한 개념이 설명되고, 무정의 용어가 체계의 무모순성 및 완전성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그리고 지각 및 사고 과정에 대해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이로 인해 기하학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 지 검토한다.

 

괴델의 불완전성

<모든 주어진 형식체계에 있는 진리란 정리적 속성을 초월한다는 그 사실이 바로 그 체계의 "불완전성"이다.>

진리의 집합은 정리의 집합보다 크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되겠다. 다시 말하면 증명할 수 없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호프스태터의 말을 다시 빌리면, <진리와 정리성이라는 개념들 사이의 괴리>가 있다는 말이다.

 

모순성

두가지 부류의 모순성을 지적할 수 있다.

1) 외부세계와의 모순

2) 내부적인 모순

 

형식체계내의 정리들을 해석하였을 때, 그 해석된 명제들에 상당수의 오류명제를 포함한다면 이 체계는 외부세계와의 모순이다.

또한 그 체계가 자기들끼리도 충돌하는 명제들을 포함한다면 이는 내부적인 모순을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체계내의 기호에 대한 의미있는 해석을 발견하여 외부세계와의 모순 및 내부의 모순을 동시에 제거할 수도 있다.

호프스태터는 수정된 pq-체계에 대한 설명으로 이를 이해시키고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출현

유클리드 기하학에는 다섯가지의 공준을 제시한다. 그 중 앞의 네 개의 공준을 토대로 유도될 수 있는 기하학을 절대기하학이라고 부른다.

다섯번째 공준은 문제가 되어 왔다. 유클리드를 포함하여 그의 제자들 그리고 수많은 학자들은 제 5공준을 1~4공준을 이용하여 증명하기 위하여 노력을 기우려 왔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등장하게 된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출현하게 되는 데는 무정의 용어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점, 직선등의 의미를 그것들이 나타나는 정리(또는 명제)의 집합을 통해서 규정되도록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비유클리드 기하학 발견자들의 위대한 인식이었다.>

예를 들어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정의되는 '점'과 타원기하학에서 정의되는 '점'은 같지 않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수많은 직선이 한 점을 지날 수 있으며, 두 점은 한 직선을 결정한다. 하지만 타원기하학에서는 사정이 다른다. 수많은 직선이 구 표면의 두 점을 지날 수 있다. 구의 지름의 양쪽 끝에 존재하는 두 개의 점은 평면기하학의 한 점에 상응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타원기하학에서는 점은 대칭을 이루는 두개의 점들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점'이나 '선'같은 낱말들이 단지 그것들이 출현하는 명제가 부여하는 의미만을 가지는 것으로 취급하게 되면, 그 특수한 낱말들은 더 이상 일상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을 무정의 용어(undefined term)이라고 불린다. <무정의 용어의 완벽한 정의는 오직 공준에서 유지된다. 왜냐하면 공준으로부터 유도되는 명제들은 이미 그 공준에 함축되었기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공준이란 모든 무정의 용어의 정의들, 즉 다른 무정의 용어들에 의해서 정의된 모든 무정의 용어들의 정의들에 대한 함축적 정의일것이다.>

 

특정한 낱말을 무정의 용어로 사용하여 기하학을 추구함으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발견되었다. 낱말들은 확고하고 불변의 의미를 가지는 부류와, 체계가 모순이 없을 때까지 그 의미가 조절되어야 하는 부류(무정의 용어)로 나뉜다. 이런식으로 기하학을 추구하는 것은, 첫번째 부류의 낱말들에 대해서는 그 의미가 이미 기하학 외부의 어딘가에 확정되었다는 것을 요구한다. 이 낱말들은 그 체계에 토대가 되는 구조를 부여하는 견고한 뼈대를 형성한다. 이 뼈대에 다른 재료가 채워지면 그 체계는 변할 수 있다.

 

무모순성과 모순성

무모순성과 모순성을 정의해 보자. 외부세계와의 모순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경우 무모순성은 해석된 모든 정리가 참인 명제가 된다는 것이며, 모순성은 해석된 문장들 중에서 적어도 하나의 오류진술이 있을 경우 말한다.

 

내적인 모순성에 대해서는 어떤 체계가 그 해석이 양립불가능한 둘 이상의 문장을 함유하면 모순일 것이고, 해석된 모든 문장이 양립가능한 경우에는 모순이 아닐 것이다. 즉 내적 무모순성은 모든 정리가 참임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정리들 간의 양립가능성을 요구할 뿐이다.

 

정리하자면, 해석된 모든 정리가 참으로 증명되면 외부세계와 모순이 없다는 것을 말하며, 해석된 모든 정리들이 양립가능한 것으로 증명되면 내적으로 모순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가상의 세계와 무모순성

이러한 두 종류의 무모순성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생긴다. 여러 개의 명제가 서로 양립가능한 지 여부를 확인하려면, 우리는 모든 명제가 동시에 참일 수 있는 그런 세계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내적인 무모순성은 외부세계와의 무모순성에 의지한다. 그 "외부세계"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그 세계 대신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상세계]이다. 가장 관대한 무모순성의 세계는, 논리학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 "논리학적 무모순성"일 것이다. 그 외 '수학적 무모순성, 물리학적 무모순성, 생물학적 무모순성'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면 이 모든 가능한 세계가 공유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공통의 토대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반드시 그 토대에는 논리학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순을 추구하는 선에 대한 믿음의 체계는???)

 

대부분의 현대 수학자와 철학자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논리학과 더불어 우리가 "상상 가능한 세계"라고 이해하는 것에 속하는 핵심 수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페아노-산법이라 불리는 것이다.

 

완전성

무모순성이 기호들이 수동적 의미를 얻는 최소 조건이라면, 그 상보적인 개념, 즉 완전성은 이 수동적 의미를 최대한 확증하는 것이다. "체계에 의해서 생성된 모든 것은 참"이라는 속성이 무모순성이라면, 완전성은 정반대이다. "참인 모든 명제는 체계에 의해서 산출된다" 이것은 이 세계의 모든 참인 진술이 아니라, 우리가 체계 속에 표상하려고 했던 영역에 속하는 것만을 의미한다. 따라서 완전성이란 "체계의 표기법으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참인 진술은 하나의 정리이다'를 의미한다.

 

괴델의 정리가 말하는 바는 "충분히 강력한" 어떤 체계도 바로 자신의 성능 때문에, 이를테면 수론의 명제로서 참이기는 하지만 정리가 아닌 적형적인 연쇄체가 있다는 점에서(체계 내부에서 증명될 수 없는 수론에 속하는 진리들도 있다)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pq-체계와 같은 것은 완전하지만 충분히 강력하지 않기때문에 수론의 모든 진리를 감당할 수 없다.

 

....지난 장에서 전경과 배경을 논할 때 이야기한 점들의 확장이라고 보여진다. 즉 어떤 충분히 강력한 체계라 할지라도 그 불완전성을 제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인공지능으로 가는 꿈의 실현에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괴델,에셔,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

 

제3장  전경과 배경

 

지금 호프스태터가 관심을 갖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세계를 반영하는 형식체계를 만들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지난 장에서는 현실세계의 일부를 pq-체계로 형식화할 수 있음를 보여주었다. 이 pq-체계는 현실의 '더하기'개념을 형식체계화 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소수를 합성수와 구별할 수 있는 형식체계'를 만들 수 있을까? 라는 문제를 살펴보자. 먼저 '곱하기'의 개념을 형식체계화한 tq-체계를 고찰해보고, 이것을 이용하여 합성수를 규정해 본다. 그리고 나서는 이 합성수 생성규칙에 따라 형성된 정리의 보집합 개념을 활용하여 소수를 규정하는 발상과 그 문제점을 알아본다. 이 문제점을 고찰하는 가운데 '전경과 배경'이라는 주제개념이 등장한다.

 

이 개념과 관련있는 용어는 1) 흘림체(cursive)로 그릴 수 있는 전경 2) 재귀순환적(recursive)인 전경이다. 흘림체로 그릴 수 있는 전경은 그 배경이 다만 그림 그리는 과정의 우연한 부산물로 나타나는 전경인 반면에, 재귀순환적인 전경은 그것의 배경 또한 독자적인 전경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에셔는 그런 재귀순환적인 전경을 그린 대가였다. 쉽게 말하자면 전경 자체에만 의미가 있는 경우에는 cursive하다고 이야기 하고, 전경만이 아니라 배경 역시 의미가 있는 경우에는 recursive하다고 보는 것이다. 아래 그림은 에셔가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전경과 배경의 구별이 없다. 흰색의 새모양(?)을 전경으로 보면 검은색 새가 배경이 될 터이고, 검은색 새를 전경으로 보자면 흰색새가 배경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재귀순환적이라 말한다.

에셔

 

결정규칙으로 검출할 수 없는 정리

그렇다면 합성수와 소수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합성수가 전경이라면, 소수는 배경이면서도 독자적으로 전경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다행히 합성수와 소수의 경우는 그러하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그렇지 아니하다. 그것은 다음 두가지 이유때문이다.

1) 모든 비정리의 집합 내부에서 일정한 참이 발견된다.

2) 모든 부정된 정리의 집합 외부에서 일정한 오류성이 발견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결정규칙이 모든 정리를 창출해 내지 못한다. 또한 결정규칙으로 검출할 수 없는 정리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공리로 부터 시작하여 증명할 수 있는 정리(진리)의 집합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으로 도달할 수 없는 진리들이 그 정리의 집합 외부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정리의 부정의 집합을 가정할 때 역시 그 집합의 외부에 정리(진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도달할 수 없는 비진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쿠르트 괴델의 정리가 아닌가? 힐베르트는 완벽한 수학의 세계를 꿈꾸었지만 괴델은 그 꿈을 부서버리고 말았다. 증명할 수 없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버린 것이다. 증명할 수 없는 진리는 전경도 아니요, 배경도 아닌 것이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형식체계가 있을 때, 그것의 무표공간(비정리의 집합:배경)은 어떤 형식체계의 유표공간(정리의 집합:전경)도 아니다.>

<재귀순환적으로 연산될 수 있는, 그러나 재귀순환적이지 않은 집합들이 존재한다.>

'재귀순환적으로 연산될 수 있는'이라는 수학적 표현은 "흘림체로 그릴 수 있는"이라는 개념이며, '재귀순환적'이라는 표현은 "재귀순환적으로 그릴 수 있는"이라는 의미로 받아 들일 수 있다. '재귀순환적인 집합'은 그 배경 또한 하나의 전경이 되는 그런 전경이다. 즉 그 전경만이 재귀순환적으로 연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전경의 상보적 부분인 배경 또한 재귀순환적으로 연산된다.

 

여기에서 이러한 결론이 나온다.

<그것에 대하여 어떤 활자형 결정절차도 없는 그런 형식체계가 존재한다.>

<괴델의 정리, 튜링의 정지문제 같은 제한적 결과라든가 재귀순환적으로 연산될 수 있는 모든 집합이 다 재귀순환적인 것은 아니라는 원리를 토대로 제시된다.>

 

나 개인의 의문..."어떤 활자형 결정절차도 없는 그런 형식체계를 형식체계라 부를 수 있는가? 그 형식체계에 밎는 정리를 어떻게 생성해 낼 것이며, 비정리를 어떻게 구별해 낼 것인가? 바보! 증명할 수 없는 정리들의 집합도 하나의 형식체계로 볼 수 있지. 하지만 그 형식체계내에서는 어떤 것이 정리인지 비정리인지 구별할 결정절차가 없다는 것이지. 결정절차가 없는 형식체계!!! 음~ 인공지능에서 또 다시 멀어지는구만~

괴델,에셔,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

 

제 2장 수학에서의 의미와 형식

 

<언어와 사고는 과연 형식화 규칙을 따르는가 그렇지 않은가?>

언어와 사고는 현실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언어와 사고를 형식화할 수 있다면, 현실의 세계도 형식화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형식화된다는 것은 컴퓨터로 그 문제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컴퓨터로 현실세계를 다룰 수 있다는 말인가? 즉 인공지능이 가능한가? 지금 호프스태터는 그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그의 논증을 펼친다. 즉 형식체계와 수학적 현실을 연결시킴으로, 즉 동형관계를 형성시킴으로 인공지능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pq-체계와 그 동형관계에 대해 알아본다.

 

 

pq-체계

정의: x가 오직 붙임표(-)들로만 이루어질 경우에만, xp-qx-는 하나의 공리이다.

(x가 붙임표들만 이루어진다는 것은,  x가 - 또는 --, 또는 --- 등과 같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x=- 일때 xp-qx- = -p-q--가 된다)

규칙: x, y 그리고 z는 붙임표만을 가지는 특정한 연쇄체들이며, xpyqz가 하나의 정리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xpy-qz-도 하나의 정리이다.

 

예를 들면, x= --, y=---, z=- 라고 할 때

만약 --p---q- 가 정리로 판명되면 --p----q--도 정리이다. (하지만 이 경우 --p---q-은 정리가 아니다. 즉 xp-qx- 이라는 공리에 맞지가 않기때문이다. 당연히 --p----q--도 정리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연쇄체의 형식만을 보자면, 먼저 일련의 붙임표로 시작하는 연쇄체 그리고 그것에 뒤이어 하나의 p, 두번째 붙임표무리 그리고 q가 뒤따르는 연쇄체 그리고 마지막 붙임표로 종료되는 모든 연쇄체들은 적형적인 연쇄체(well-formed strings)이다. 즉 그러한 적형적인 연쇄체들은 모두 공리인 xp-qx-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결정절차

어떤 연쇄체가 정리인가의 여부를 판정하는 기준은 p앞의 붙임표의 갯수와 q 앞의 붙임표의 갯수를 더한 갯수만큼의 붙임표가 q 뒤에 와야 한다는 것이다. 공리를 잘 보라. xp-qx- 에서 'x + - = x-' 의 관계가 있다. x=--라면 공리는 --p-q---의 형태가 될 것이다. 그리고 붙임표를 보면, p 앞의 붙임표 2개, q앞의 붙임표 1개, 총 3개의 붙임표가 있다. 그래서 q뒤에 붙임표가 3개가 붙게 된다. 붙임표들간의 관계는 xpyqz에서 x+y=z의 관계가 된다. 그렇다면 2+2=4 이므로 --p--q---- 은 정리인 반면, --p--q-는 정리가 아니다.

 

자! 그렇다면 pq-체계의 정리들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p---q-----라는 연쇄체는 2+3=5 이므로 정리이다. 그러면  --p---q----- 라는 정리대신에 2+3=5인 명제를 상정하면 어떨까? ...뭐 안 될 것도 없겠군. 사실 p 는 '더하기(plus)', q는 '같다(equal)'을 나타내는 기호이며, 붙임표는 그 갯수에 상응하는 숫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pq- 정리들과 더하기 사이에는 동형관계를 발견하게된다.

 

어라...그러고 보니 pq-체계는 어떤 의미가 없어 보이던 형식체계였는데, 그 동형관계를 발견하게 되니 그 pq- 체계에 의미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렇다. <동형관계가 의미를 유발한다> <"동형관계"라는 낱말은 정보를 함유하는 변형으로 정의된 바 있다.> 예를 들면 크레타 섬의 선형문자와 같은 미지의 언어로 쓰인 암호를 해독하는 것은 일종의 형식체계를 "해독하는"것과 같다. 즉 현대언어와의 동형관계의 발견을 통해 의미를 갖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형식체계를 다루는 수학자들은 그 정리들이 현실의 일정한 부분을 동형형태로 재현해내는 형식체계를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다시말해 현실을 형식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공하게 된다면 우리의 현실을 모두 형식체계내에서 다룰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을 갖게 된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 호프스태터는 그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 같다. 그 자신이 만든 pq-체계는 현실의 일부분을 반영하는 형식체계로 자신이 고안해 낸 것이기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사람이지 않는가?

 

<그 pq-체계는 원래는 의미가 없지만 한 형식체계의 기호들이 적어도 동형관계가 확인되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의미"와 같은 무엇인가를 가정한다는 인식을 강요하는 것 같다.> 하지만 형식체계 내부의 의미와 그와 동형관계에 있는 한 언어 내부의 의미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형식규칙에 맞지 않는 것은, 외부의 언어체계와 동형관계에 있다하더라도 그 형식체계에 포함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형식체계내의 <연쇄체(정리)들은 사물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실이 모조리 형식체계로 변환될 수 있는가?

아주 넓은 의미로 말하자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현실 그 자체는 매우 복잡한 형식체계에 불과하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 형식체계의 기호들은 소립자에 해당한다. "규칙들" 물리법칙이다. 즉 그 "활자규칙"은 주어진 상태에 있는 모든 입자들의 위치와 속도가 일정할 경우, 이것들이 어떻게 변화되어서 "다음 번" 상태에 속하는 새로운 일련의 위치들과 속도로 귀결되는가를 보여주는 물리적 법칙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형식체계의 정리들은 우주 역사의 상이한 시점들에 있는 입자들의 가능한 조합상태들이다. 유일한 공리가 있다면 그것은 "태초 시점"의 모든 입자들의 원래의 조합상태이다.>

 

이 책의 관심사는 <우리가 공식화한 기호 처리 규칙이 (수론에 관한 한) 정말로 우리의 정신적인 추론능력에 상응하는가, 또는 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약간의 형식체계를 이용해서 우리의 사고능력의 차원에 도달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한가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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