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 유홍준 지음 /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씨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한 생각은 이 두 문장에 집약되어 있다. 유홍준씨의 답사기는 떠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킨다. 더군다나 지금은 파릇 파릇한 봄이 아닌가?

 

2권에서 소개하고 있는 답사지는 다음과 같다.

 

1. 지리산 동남쪽 - 함양과 산청

 

농월정/박지원사적비/정여창 고택/학사루/함양상림/단성향교/단속사터

산천제/덕천서원/대원사/가랑잎국민학교/지리산

 

남명 조식(1501~72)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곳은 그의 서재였던 산천제, 남명선생을 모신 덕천서원등이 있다. 남명 선생은 퇴계 이황과 동갑으로 당대 도학의 쌍벽이었다. "경상좌도에 퇴계가 있고 우도에 남명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산은 지리산이다."  지리산의 장엄은 천왕봉의 높이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넓이와 깊이에서 나온다. 지리산 연봉이 이루어낸 계곡의 깊이를 우리는 가늠치도 못한다. 그 크기를 말하는 것도 남명선생의 대안목은 달랐다.

"천석이나 되는 저 큰 종을 좀 보소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울리지 않는다오

허나 그것이 지리산만하겠소

(지리산은)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다오"

지리산을 좋아하는 분은 채색 장식화보다도 수묵담채화를 좋아할 것이다.

 

도대체 지리산이 뭐길래 이렇듯 사람을 홀리는 말을 남기게 하나?

 

2. 영풍부석사

 

사과밭 진입로/무량수전/대석단/조사당/선묘각/부석

 

남한 땅의 5대명찰?

춘삼월 양지바른 댓돌 위에서 서당개가 턱을 앞발에 묻고 한가로이 낮잠자는 듯한 절은 서산 개심사이다.

한여름 온 식수가 김매러 간 사이 대청에서 낮잠자던 어린애가 잠이 깨어 엄마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듯한 절은 강진 무위사이다.

늦가을 해질녘 할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반가운 손님이 올리도 없건만 산마루 넘어오는 장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듯한 절은 부안 내소사이다.

한겨울 폭설이 내린 산골 한 아낙네가 솔밭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굴러가는 솔방울을 줍고 있는 듯한 절은 청도 운문사이다.

몇날 며칠을 두고 비만 내리는 지루한 장마 끝에 홀연히 먹구름이 가시면서 밝은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듯한 절은 영풍 부석사이다.  

 

언젠가 이 명소들을 가게되면 유홍준씨의 읊은 평을 판단해 보련다...

 

영풍 부석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이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형용사로는 부석사의 장쾌함을 담아내지 못하며, 장쾌하다는 표현으로는 정연한 자태를 나타내지 못한다. 부석사는, 오직 한마디, 위대한 건축이라고 부를 때만 그 온당한 가치를 받아낼 수 있다.

한낱 여행객, 답사객의 눈으라도 풍요로운 자연의 서정과 빈틈없는 인공의 질서를 실수없이 읽어내고, 무량수전 안양루에 올라 멀어져 가는 태백산맥을 바라보면 소스라치는 기쁨과 놀라운 감동을 온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니 부석사는 정녕 위대한 건축이요, 지루한 장마 끝에 활짝 갠 맑은 하늘과 밝은 햇살 같을 뿐이다.

 

부석사의 절정인 무량수전은 그 건축의 아름다움보다도 무량수전이 내려다보고 있는 경관이 장관이다. 바로 이 장쾌한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기에 무량수전을 여기에 건립한 것이며 앞마당끝에 안양루를 세운 것도 이 경관을 보기 위함이다.

 

유홍준씨는 해마다 거르는 일 없이 부석사를 가고 또 간 것은 사무치는 마음이 있었기때문이라는데, 또 궁금해 진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사무치는 마음을 갖게 했을까?

 

3. 아우라지강의 회상-평창 정선

이효석 생각/ 봉산서재/팔석정/아우라지강/ 정선아리랑/사북과 고한/정암사/자장율사

 

[메밀꽃 필 무렵]의 고향, 봉평

"이즈러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줄기)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설악산은 감성을 환기시켜주는 절경의 명산이라면 지리산은 감성을 심화시켜주는 깊이감을 갖고 있는 영산이라 할 만하며, 아우라지강을 찾아가는 길에 맞닥뜨린 태백산맥의 연봉들과 거기에 어우러진 큰 여울들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연의 원형질을 대하면서 받는 자기 정서의 순화작용 같은 것이었다.

 

추억의 답사처를 회상하는데 골수회원들은 대다수가 아우라지강을 으뜸으로 꼽는데 신참 초보회원들은 전혀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고참들은 누구하난 무엇이 그리도 감동적인지를 신출내기에게 설득력있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안타까워하면서 저희들끼리만은 한결같이 감성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이었다. 철학자 데까르뜨가 아름다움을 판별하는 감성적 인식이란 이성적 사유와 달라서 분명하게는 인식하지만 판연하게는 설명하지 못한다고 했던 얘기 같았다.

 

4. 토함산 석불사

창건설화/정시한의 석굴 기행/소네 통감의 도둑질/ 일제의 해체수리

박종홍/ 야나기/ 고유섭/ 요네다/ 이태녕/ 남천우/ 김익수 / 강우방

1963년 보수공사/ 전실문제/ 광창문제/ 보존문제/ 신라역사과학관/ 유치환시 /서정주 시

 

석불사의 석굴, 그것은 종교와 과학과 예술이 하나됨을 이루는 지고의 최미이다. 거기에는 전세계 고대인들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 절대자의 세계가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지금도 석불사의 석굴 앞에 서면 숨막히는 감동과 살 끝이 저려오는 전율로 인하여 감히 아름답다는 말 한마디조차 입 밖에 내는 것을 허용치 않으며 오직 침묵 속에서 보내는 최대의 찬미만이 가능하다. 우리는 석굴에 감도는 고요의 심연에서 끝도 없이 흐르고 있는 신비롭고 장중한 정밀의 종교 음악을 감지할 뿐인 것이다.

 

"보지 않은 자는 보지 않았기에 말할 수 없고, 본 자는 보았기에 말할 수 없다."

 

"종소리는 때리는 자의 힘만큼만(에 응분하여) 울려지나니...(고유섭의 [우리는 고대미술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서 ) 

 

박종홍씨는 석굴암의 신비를 파헤치다 한계에 부딪혀 좌절하였으나, 일본인 야나기는 석굴암의 미학적 가치에 대한 예찬을 펼친다. 한국 미술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유섭씨 역시 야나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석굴암의 미학적 유산을 발견해 낸다. 요네다는 석굴암을 실측하여 그 과학성을 밝혀내었다. 이태녕교수는 석굴암 아래에서 솟아나는 샘물의 신비를 밝혀냈으며, 남천우박사는 석굴암의 습기문제 즉 결로현상을 극복하기위해서는 원형대로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태녕교수와 남천우 박사는 자연과학자로 신라인의 과학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들의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 조각가인 김익수교수는 석굴암의 구조를 상세히 연구한 후 석굴암의 창건자 김대성의 키가 170cm라고 주장했다. 반보 강우방 선생은 본존불의 정체를 밝히는 데 일조를 하였다.

 

5. 민통선 부근-철원

한탄강/ 고석정/승일교/도피안사/궁예궁터

 

고석정은 한탄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의 명소로 한탄강에 임꺽정이 은신처로 삼았다가 관군에 잡혀 처형되었을 때 그의 혼이 꺽지라는 물고기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다소 사실무근적인 데가 있다고 한다. 

 

철원이 내세울 미술사적 유물의 진수는 도피안사이다. 이곳에 국보 63호인 철조 비로자나불상이 있다. 이 철불은 하대신라 즉 9세기를 대표하는 두 불상중 하나이다. 그 얼굴을 보면 원만한 것도 근엄한 것도 인자한 것도 아닌, 도전적이고 씩씩하며 개성적이다. 이것이 이 불상의 큰 매력이며 신앙사적, 사회사적 의의를 보여준다. 이것은 9세기 철원지방의 호족이 지닌 자화상적 이미지이다. 왕권과 중앙귀족이 원하는 세계는 석굴암 본존불 같은 원만한 질서이다. 꽉 짜여진 틀 속에 모든 것이 종속하기를 바라는 보편성의 추구이다. 그러나 지방의 호족은 달랐다. 그 보편적 틀 때문에 자신의 인간적, 사회적 능력ㅇ르 제약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그 틀을 깨어 버려야 했다. 능력있는 자가 부처라는 이미지로 몰고 갔던 것이다. 궁예는 그런 호족의 하나로 드디어 왕을 자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6. 운문사와 그 주변

동곡의 선암서원/대천리 수몰마을/ 운문사 입구 솔밭

가슬갑사/이목소/운문적/일연스님/비구니 승가대학

새벽예불/벚나무 돌담길/운문사의 보물들/목우정/남매지

 

운문사의 아름다움 다섯

첫째는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어 항시 사미니계를 받은 200여명의 비구니 학인스님이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장엄한 아침예불이 있기때문이다.

세째는 운문사 입구의 솔밭이다.

넷째는 운문사의 평온한 자리매김이다.

다섯째는 일연스님의 삼국유사가 여기에서 씌어졌다는 사실이다.

 

해묵은 노송들이 시원스레 뻗어 올라 소나무 터널이 높이 치켜든 우산처럼 드리웢니 솔밭 사이를 여유롭게 걷는다. 저 청정한 솔바람 소리에 실려오는 낮은 소리를 들으며 무작정 걷는 순간 나는 법열에 든 스님보다도 더 큰 행복을 느낀다. 냇물이 흐르는 소리이든, 풀벌레 우는 소리이든, 바람에 스치는 마른 갈 대 몸 뒤척이는 소리이든, 노보라 속에 산죽이 춤추는 소리이든, 아니면 운문사 비구니의 염불소리이든 붉은 홍송은 하늘로 치솟고 소리는 낮게 가라앉는다. ...

 

운문이라! 그 내력은 운문선사에서 따온 것이지만, 문자 그대로 운문사는 구름문을 젖히고 들어오듯 안개가 짙게 내려앉는다. 그리하여 붉은 홍송줄기가 습기를 머금어 불그스레 피어오를 때 운문사 소나무들은 더욱 아름답다.

 

청도 운문사가 보존하고 있는 최고의 문화유산은 새벽예불이다. 운문사이 답사는 반드시 새벽예불을 관람하거나 참배하는 음악이 있는 기행으로 엮어져야 제 빛을 발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운문사 답사는 미술사 답사가 아니라 음악이 있는 기행이다.

 

 

7. 미완의 여로-부안변산,농민전쟁의 현장

부안장승/구암리고인돌/ 수성당/ 내소사/ 반계선생 유허지/ 유천리 도요지/ 개암사

고부항교/백산/만석보터/말목장터/녹두장군집/황토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쓰면서 나는 그 일번지를 놓고 강진과 부안을 여러번 저울질 하였다. 조용하고 조졸한 가운데 우리에게 무한한 마음의 평온을 안겨다 주는 저 소중한 아름다움을 끝끝내 지켜준 그 고마음의 뜻을 담은 일번지의 영광을 그럴 수만 있다면 강진과 부안 모두에게 부여하고 싶었다.

 

내소사쪽을 향아면 화려한 원생으로 단청한 일주문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데 그 안쪽은 한치도 시선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지나칠 수도 있지만 공간 내부를 신비롭게 또는 호기심이 나게 유도하는 건축적 사고의 한 반영이었음은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에는 알게 된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 답사객은 저마다 가벼운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다.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전나무 숲길이 반듯하게 뻗어 멀리 앞서가는 사람이 꼬마의 키가 된다. 늘씬하게 뻗어 오른 전나무 옆으로는 산죽과 잡목들이 뒤엉키어 숲길은 더욱 호젓하고 한걸음 내딛고는 심호흡 한번, 한번 고개들어 하늘을 올려보고 또 한걸음 내딛고...전나무가 터널을 이룬 내소사 입구는 내소사 자체보다도 답사객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반계 유형원선생은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이다. 당신이 이룩한 실학의 전통은 성호 이익에서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진다. 서울에서 태어난 반계는 나이 30세까지 벼슬에 드는 일 없이 곳곳을 전전하다가 32세에 이곳 우반동에 은거하여 20여년간 학문에 힘쓰다 숱한 저술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지금 우리는 [반계수록]26권만 알고 있을 뿐 목록으로만 전하는 경학, 지리학, 역사학, 음운학의 저서들은 그 행방조차 모르고 있다.

 

반계 선생의 실천적 사고와 민에 대한 사랑, 투철한 현실인식은 실학이라는 이름의 전통이 되어 공재 윤두서,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연암 박지원, 환재 박규수로 이어간다. 그리고 단재 신채호, 위당 정인보로 이어지고 내 이루 이름을 열거할 수 없는 재야의 학인들이 그 정신적 뿌리를 여기서 찾고 있다. 20세기 한국 지성사에서 흔들릴 수 없는 재야학자들의 종가집이 바로 여기이다. 바로 그 자리 그분의 서재 툇마루에 우리는 걸터 앉아 있는 것이다.

 

이평이라고도 불리는 배들평야에 물을 대주는 작은 댐이 만석보이다. ..."배밭이 많아서 이평이 아니고 배가 여기까지 드나들었다고 해서 그냥 배들이라고 불렀는데 일제 때 지적도를 만들면서 면서기가 그 뜻은 모른 채 이평으로 적은 것이 지금껏 그대로 내려온 것입니다. 굳이 한자로 말하자면 선입이 되는 것이죠." 이태호교수의 설명이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현장이 바로 이 곳이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가리키는 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에서 파랑새란 곧 팔왕, 즉 전자의 파자라는 설이 나오고 실제로 지역에 따라서는 '팔왕장군'을 노래하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절명시에서 그의 의연한 기상을 볼 수 있다.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힘을 합하더니

운들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민을 사랑하고 의를 바로 세움에 나는 아무 잘못이 없었건만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을 그 누가 알아주리

필립 E. 존슨/ 이승엽. 이수현 옮김 /까치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이 과학 혁명의 한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현재 진화론은 정상과학으로의 지위를 누려왔다. 하지만 [종의 기원]에서 다윈이 제시한 점진적인 변화를 통한 새로운 종의 출현이라는 명제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과연 다윈의 이론을 대신할 새로운 패러다임인 '지적설계론'이 정상과학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

 

놀랍게도 필립 존슨은 과학자가 아니다. 그는 법학교수이다. 어떻게 그런 그가 과학적인 문제에 권위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겠다. 존스는 리차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과 마이클 덴턴의 [진화론과 과학]이라는 두 권의 책을 읽고 진화는 결정적인 사실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진화론과 과학]은 불가지론 생물학자인 마이클 덴턴의 책으로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종교적 동기를 배제하면서 냉철한 과학적 분석으로 다윈주의를 분석하고 있다. 그는 다윈주의를 실패한 이론으로 바라보고 있다. 

 

존슨은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을 읽으면서 진화론적 설명에 대해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갑자기 나는 이 책이 명석한 수사학적 기교로 쓰였음을 깨달았다. 이러한 일은 변호사들이 익숙하게 하는 것이다. 거기에 증거는 없다. 다만 가설로서 결론을 받아들이도록 당신을 유도하고 논리의 명석함에 감동하게 할 뿐이다." 진화론의 전도사라고 불리는 도킨스는 경험적이며 실제적인 증거로 진화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논리로 신다윈주의의 타당성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존슨은 그가 비록 과학적인 교육은 부족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던 형법학과 수사학적인 전문지식으로 이 문제를 누구보다도 더 잘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법정논쟁의 수사학적 기교와 구조에 대해 강의했었고, 증거와 주장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제시하며, 반대 주장 속에 담겨진 허구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발견하는가를 가르친 전문가이었기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그는 광범위한 학술적 논문들과 과학적 에세이를 세심히 연구한 후 [심판대의 다윈]을 쓰게 되었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스티븐 와인버그는 과학적 연구에서는 반드시 신적 요소를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이다. 그는 존슨을 비평하는 가운데 '필립존스 교수는 현재 진화론에 대한 가장 비중 있는 학술적인 비평가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진화론 비평은 어떤 것인가?

진화론은 경험론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다만 초자연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자연주의적 과학풍토에서 진화론은 다른 대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과분한 대접을 받아왔다. 과학 철학자 칼 포퍼는 과학이 가져야 할 하나의 요소로 '반증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진화론은 '반증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사실들은 진화론내에서 합리화된다. 그리고 그에 부합하지 않는 증거들은 무시되어 버린다. 더 나아가 진화론은 하나의 다윈주의적 종교가 되어버렸다. 결론적으로 존슨은 진화론은 과학인가? 의사과학인가?라는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오늘날 수많은 과학자들과 대중은 진화론을 열렬히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 과학적이려면 열린 마음을 가지고 그 반대되는 의견이나 증거들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객관적인 과학적 자세이기때문이다. 진화를 받아들이건, 그렇지 않건 이러한 자세는 과학을 더 신뢰할 만한 학문으로 그리고 객관성을 구비한 방법론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할 것이다.  

 

이 책은 진화를 옹호하는 사람이나 창조를 믿는 사람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창조를 믿는 사람들은 진화론에 대한 객관적인 비평에 접하게 될 것이다. 한편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과학도나 일반인들도 과학적 진화론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더 필요한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두 부류의 사람들 모두 읽어 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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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제임스 지음/ 김재영 옮김 / 민음사

 

 윌리엄 제임스는 의학을 전공했으며, 심리철학자로 활동하였다. 그가 쓴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은 종교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책이다. 유명한 과학자 칼 세이건은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읽고 감명을 받아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이란 책을 썼다고 한다.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에 대한 통찰과 그의 글의 문학적 향기가 잘 어울러져 아름다운 작품이 되었다. 

 

제임스는 종교를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종교적 경험에 대한 그의 견해는 어떠한가? 종교의 유용성에 대해서는?

인간의 종교성은 인간본성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등 여러가지 문제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제임스는 인간의 본성을 알기위해서는 제도화된 종교보다는 각 개인의 종교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모든 선험적, 관념적 체계나 철학적 방식을 배제하고 각 개인들의 실제적 종교적 경험에 근거한 연구를 진행함으로 인간의 종교성과 인간본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그래서 책 전반에 걸처 종교적 경험들의 사례들이 많이 언급되어 있다. 특히 한 종교나 종파의 창시자들의 특별한 종교적 경험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종교적 경험들은 회심, 환상, 환시, 종교적 황홀감, 또는 자동증이라고 불리는 비정상적 육체적 반응등을 통해 나타난다.

 

제임스는 인간들을 두 종류의 유형으로 나눈다. 낙관주의적 성품(optimistic mind)를 가진 사람들과 고뇌하는 영혼(sick soul)을 가진 사람들.

낙관주의적 성품을 가진 사람들은 세계를 낙관적으로 바라본다. 세계에 편만해 있는 모순, 악등의 존재를 무시해 버리고 오로지 선하고 밝은 면만을 편파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고뇌하는 영혼은 인생에 대해, 세계의 모순과 악에 대해 괴로워하고 고뇌한다. 이러한 고뇌하는 영혼은 분리된 자아 의식을 가진다. 여기서 그의 고뇌와 불행이 시작된다. 하지만 분리된 자아를 통합을 경험함으로 삶에 대한 의미를 되찾고 살아갈 원동력을 얻게된다. 분리된 자아의 통합이 종교적 경험의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제임스는 고뇌하는 영혼이야말로 진정한 종교성을 나타날 수 있는 부류의 사람으로 평가한다.

 

종교적 경험은 개개인들로 하여금 성인다운 삶을 살도록 촉구한다. 이러한 성인다움이 지나치게 되면 병폐가 나타나기도 한다. 신비주의에서 이러한 병폐가 관찰되기도 한다. 이러한 지나침은 종교성의 과대에 비해 지성의 편협함이 그 원인이 된다. 하지만 종교적 경험으로 인한 이러한 삶의 결과는 종교적 경험이 없이 나타나는 삶이 만들어 내는 세계에 비해 우월하다는 면에서 종교의 유용성이 있다.

 

제임스는 인간의 종교적 경험의 심리적 접근을 시도한다. 인간에게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잠재의식의 영역이 있다. 인간의 종교적 경험은 바로 이 잠재의식의 영역이 의식의 세계로 침입함으로 이루어진다. 잠재의식의 영역에서 에너지가 의식세계로 분출됨으로 다양한 종교적 경험이 산출된다. 종교적 경험의 원천은 잠재의식의 영역내에 있다. 그렇다면 종교적 경험의 제일원인으로 파악하고 있는 신적존재는 어떠한가?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이다. 종교적 경험이 순전히 심리학적 경험일 수도 있지만 만일 신적 존재가 있다면 아마 그는 바로 이 잠재의식의 영역에 작용하여 종교적 경험을 유발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그러한 문제와 관련한 그의 객관적 입장을 나타내는 표현이 있다. 그는 경험적 판단의 약점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우리는 인간을 동물적 부분과 이성적 부분으로 뚜렷하게 나눌 수 없다. 우리는 자연적 작용과 초자연적 작용을 구별할 수 없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작용사이에서 어떤 것이 신의 호의이고 어떤 것이 악마의 작용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험적 체계에 의해 판단하는 것의 폐기 후에 우리는 결코 선명하고 학구적인 결과들을 기대할 수는 없다. "

 

제임스는 신학철학은 결코 인간의 종교성을 올바로 나타낼 수 없다고 말한다. 종교적 경험이 우선이며 철학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산물일 따름이다. 또한 신학철학은 곁코 인간의 종교적 삶에 그 가치를 부여해 주지 못한다. 실용적 관점에서 볼 때 신학철학이 논하는 문제는 인간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으며, 단지 심미적인 역할만을 담당하고 있다.

 

그는 일반적 종교철학 대신에 종교학이라는 분야를 제안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신조들, 그리고 일반적 사실들을 사적인 종교적 경험으로부터 추출하려는 노력은 범종교적인 종교학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그리고 이 모든 지적 작업은 구조적이든 비교적이든 비판적이든 간에 직접적 경험을 통해 이루어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험적, 관념적인 것들을 모두 배제하고 직접적인 경험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이 그의 기본 연구 방침인 것이다. 

 

제임스는 그의 결론을 맺는다. 즉 때때로 과학적 자연주의등은 종교를 비판하고, 종교의 무용성을 주장하며, 종교가 곧 없어질 존재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의 경험세계는 객관적 부분과 주관적 부분이 있다. 객관적 부분은 보다 엄청나게 포괄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관적 부분도 결코 생략되거나 억제될 수 없다. 즉 종교적 부분은 여전히 그 나름대로의 영역을 지키게 될 것이다.

 

또한 종교는 궁극적으로 신이 아니라 삶, 즉 더욱 풍요롭고 거대하며 만족스러운 삶을 목적으로 한다. 모든 그리고 단계마다의 발전에서 삶에 대한 사랑은 종교의 추진력이다. 그러므로 순수하게 주관적인 이 평가에서 종교는 어떤 식으로든 그 비평가들로 부터 변호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단순한 시대착오와 잔존신앙일 수 없고, 지성적 내용이 있든 없든, 그리고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어떤 영원한 기능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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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스콧피츠제럴드 / 김태우 옮김 / 을유문화사

 

"위대한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에서 우리는 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부유층의 삶의 모습들을 보게된다. 그것은 삶의 의욕을 서서히 죽이는 황폐해져가는 모습들이다. 전통적인 가치관이 상실된 세대의 삶은 잿빛 계곡과 같은 절망의 색조를 띠고 있다. . 

경멸스러운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톰 뷰캐넌은 아름다운 아내 데이지가 있음에도 윌슨머틀과의 내연관계에 빠져든다. 또한 개츠비의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파티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사람들은 개츠비에 감사함은 커녕 그의 뒷소문에 열광한다. 그들 모두는 개츠비의 죽음에 모두들 모른채 등을 돌려버리는 비정한 세대이다. 개츠비의 사랑 데이지도 그의 죽음을 외면해 버린다. 숭고해야만 할 사랑마저도 개츠비를 져 버리는 것이다. 오로지 개츠비의 데이지에 대한 집념적인 사랑이 돋보일 뿐, 모두가 잿빛 모습들이다. 

 

데이지에 대한 개츠비의 사랑은 엄청난 에너지의 원천이다. 가난으로 인해 데이지와 헤어지게 된 그는 젊은 나이에 엄청난 부를 쌓아 올린다. 그 부의 축적과정이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지만 정황적인 증거로 볼 때 도덕적이거나 합법적인 방법과는 거리가 있는 듯 하다. 그는 데이지를 자연스럽게 다시 만나기위해 데이지가 사는 지역 부근에 대저택을 마련한다. 그리고 그녀의 자연스러운 관심을 끌기위해 그 지역사회에 아주 널리 소문이 날 사교 파티를 개최한다. 또한 데이지와의 만남을 주선해 줄 수 있는 데이지의 사촌인 캘러웨이에게 접근한다. 결국 데이지와 만나게 된 그는 그녀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는 데이지와의 사랑을 이루기위해 톰과 단판을 짓는다. 혼란에 빠지 데이지는 운전중에 자동차로 뛰어든 톰의 정부인 윌슨머틀을 치게된다. 개츠비는 자신이 데이지를 대신할 것이라 결심한다. 그러나 결국 이 사건때문에 개츠비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이 비극적 죽음의 배후에는 톰과 데이지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데, 사실 데이지의 배신은 충격적이다. 아프다. 사랑을 배신한 것이기에....

 

<위대한 개츠비>...개츠비는 정말 위대한가? 무엇이 그를 위대하게 만드는가? 나 자신은 개츠비가 위대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작가인 피츠제럴드는 그다지 위대해 보이지 않는 개츠비를 왜 위대하다고 불렀을까? 여기에 작가의 위대한 통찰력과 재치의 번득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개츠비가 죽기전에 캐러웨이가 개츠비에게 남긴 말은 여기에 빛을 던져준다.  

"They are rotten crowd," I shouted across the lawn. "You're worth the whole damn bunch put together." I've always been glad I said that. It was the only compliment I ever gave him, because I disapproved of him from beginning to end.

 

개츠비는 경멸스러운 인간이었다. 캐러웨이도 개츠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차라리 경멸스러운 개츠비가 위대한 개츠비로 보일 정도로 다른 사람들은 훨씬 더 경멸스러웠다. 그래서 캐러웨이는 '모든 판단을 유보하는 경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츠비를 향해 "당신은 그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라고 소리친 것이다. 이것은 그의 경향으로 볼 때 파격적인 찬사였다.

 

피츠제럴드는 가치관을 상실한 전후세대에 대한 지독한 경멸과 조롱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리라. 이것을 해 "위대한" 개츠비라는 반어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의 시대에 대한 통찰력을 물론이거니 그의 비꼬는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라 판단된다.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나 자신 문학자도 아니요, 글 쓰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나 나름의 방식으로 이 소설을 평가하자면, ....

훌륭한 작품은 그 구조가 아주 치밀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이 소설에서는 그냥 한 번 읽으면 그냥 흘려 버릴 수 있는 부분들이 뒷 사건과의 연관성 또는 암시등으로 작용하는 부분이 꽤 있다. 그러한 부분들은 숨겨져 있는, 말로는 직접 서술되지 않은 상황들을 감지하게 해 주고 있다. 사실 피츠제럴드는 상황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다만 부분적인 상황들을 단편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독자는 그 단편들을 모아서 하나의 스토리로 꾸며야 하는 입장에 있게 된다. 어떤 일본 작가는 위대한 개츠비를 세번 읽은 사람만이 나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는데, ... 그 점에 백프로 동감이다. 독자 스스로 상황들을 연결시켜 가며 하나의 전체적인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아주 사소해 보이며 그냥 지나칠만한 미묘한 점들을 알아채려야 한다. 그러려면 그 정도는 읽어야 하겠지. 그렇게 완성된 <위대한 개츠비>를 볼 수 있을 때에만 <위대한 개츠비>라는 작품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

"데릭젠슨" 이 쓴 [네 멋대로 쓰라]라는 책은 글쓰기에 대한 책이다. 그는 글쓰기의 첫번째 덕목은 글은 재미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독자의 주의의 끈을 끝까지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방법 중 한가지는 궁금증을 일으켜 놓고는 그 답을 보여줄 듯 보여줄 듯 하면서 계속 유보하는 것이란다. [위대한 개츠비]에 그러한 구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부분을 읽을 때 첫 느낌은 '어라...이 이야기는 무엇에 대한 이야기이지? 개츠비는 언제 나오는거야? 개츠비가 도대체 누구야?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대답을 찾아 계속 읽어 나가게 된다. 그리고는 조금씩 조금씩 개츠비에 대해 알게된다. 피츠제럴드는 한꺼번에 개츠비에 대한 것을 많이 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도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호한 상태로 전달된다. 결국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대략적인 흐름은 알겠는데, 도대체 어찌된 상황인지 깨끗하게 마무리되지 않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다시 읽으면서 문득 깨닫는다. 사실 정보들은 내가 파악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이 주어져 있었구나.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었을 뿐...  

 

피츠제럴드의 글쓰기는 너무 교묘해서 나를 놀랍게 한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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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우주에 대한 과학과 종교 논쟁, 최근 50년

빅뱅에서 지적 설계론까지  /  래리 위덤 지음/ 박희주 옮김  / 혜문서관

 

서문

다시 생각하는 과학

  1장  승리자 다윈

  2장  피고석에 앉은 과학

 

신의 설계

  3장  우주의 중심

  4장  빛을 찾아서

  5장  과학과 종교의 대화

  6장  생명의 기원

  7장  지적 설계 운동

  8장  By Design (설계에 의해)

 

인간의 본질

  9장  신과 과학을 둘러싼 언어의 전쟁

  10장 생명의 계통수

  11장 마음과 뇌

  12장  신앙의 도약

 

다윈의 진화론이 과학계 전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신을 믿는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것은 과학계에서 매우 난감한 문제이다. 특히 온전히 과학계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젊은 과학도나 소장학자들의 상황에서는 그러한 공개적 선언은 불이익을 의미할 수도 있기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상황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다. 이전에는 제기되지 않았던 진화론과 관련된 새로운 의문들이 등장하게 되고, 이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에서 무신론적인 진화론과 대척점에 서 있는 지적설계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오랫동안 진화론은 토마스 쿤이 말한 바 있는 정상과학의 지위를 누려왔다. 하지만 자체의 모순과 한계로 인해 무수한 공격을 받고 있으며, 또 다른 패러다임인 지적설계론이 출현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과연 이 지적설계론이 정상과학의 입지를 확보하게 될 것인가? 최근 50년간의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을 소개하면서, 저자는 지적설계론에 무게중심을 두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을 소개하기 위해, 과학과 신앙 사이에 진행되어 온 일들을 사건, 사상, 인물, 연구소, 논쟁등을 중심으로 그려나간다. 현대과학의 다양한 영역에서 등장하는 우주의 기원, 지구에서의 생명의 기원, 인간 지성의 근원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세기전의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이라는 저서에 주의를 돌리며 책을 마무리 짓는다.

 

<제임스는 피곤에 찌든 회의론이 제공하는 심리적 안정과 비교해 볼 때 희망과 모험을 향한 신앙의 도약이 최상의 선택이라고 믿었다.>

<제임스는 '회의와 낙관의 꼭지점에 선 철학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대부분의 유신론자들은...신적 설계에 대해 네 종류의 증거를 제시한다. 자연법칙의 단순성, 수학과 물리적 질서가 가진 아름다움, 사물에 내재된 질서에 대한 이해가능성,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무조건적인 진화론의 수용, 아마 이것은 종교에 대한 또는 신에 대한 반항에서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은 없다고 믿고 싶은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진화론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진화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그 반대 증거나 논리에도 귀를 기울일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큰 외침소리가 이 책 안에서 터져 나온다.  

John Grisham

 

한 법률회사에서 발생한 인질극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사건의 범인은 사살되고 상황은 무사히 종료되지만, 이 상황으로 큰 충격을 받은 주인공은 왜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결국 자신이 속한 회사도 이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이 사건은 노숙자 문제와 관련이 있음을 알게된다. 노숙자들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된 주인공은, 자신이 도우려던 3명의 아이를 포함한 노숙자 가족이 동사하는 비극적인 일을 겪게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이로 인해 그는 유망한 법률회사를 그만두고, 노숙자들을 돕는 일에 뛰어든다. 그리고 거대한 법률회사와의 무모한 싸움이 시작된다...

 

살아감의 의미를 찾은 한 변호사의 이야기를 통해, 현 미국 사회의 부조리를 엿보는 한 편, 나 자신의 살아감을 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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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료헤이 / 다께모도 고노스께 / 최영혁 옮김/ 청조사

 

활자중독인? 연체되어 10일간 도서대여금지란 철퇴를 맞고 보니, 읽을 거리를 찾아 집안에 책장을 이리저리 뒤져 본다. 어라 처음 보는 책인데...

집어든 책이 '우동 한그릇'이다. 그리고 '마지막 손님'이라는 작품도 함께 실려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속-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 <우동 한 그릇>을 주제로 삼아 일본인의 의식구조를 파헤쳤다한다.

일본경제 신문이 '울지 않고 배겨날 수 있는가를 시험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 읽어 보라'고 추천한 작룸이 바로 <우동 한 그릇>이다.  

저녁 늦게 세모자가 우동 한 그릇을 주문한다. 단 한그릇만을 주문하여 행복하게 나누어 먹는 가족을 보며, 행복을 느끼는 주인장. 해마다 그 날이 오면 그 가족을 기다리는데... 우동 한그릇에 담겨있는 감동적인 이야기

 

법정은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에서 <마지막 손님>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다.

빵가게에 일하는 한 소녀는 진정 손님에 대한 사랑으로 고객을 대한다. 늦은 저녁 문을 닫고 퇴근하는 길에 급하게 빵가게를 찾는 고객을 만난다. 임종을 앞둔 어머니가 먹고 싶어 하던 빵을 사기 위해 방문한 손님이다. 마지막 순간에 자기네 가게의 빵을 생각해 준 그 고객의 진심에 감동한 그녀는 그 고객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된다...

 

일본 사람 특유의 국민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일본 국민성의 부정적인 면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긍정적인 면도 사실은 가면을 쓴 위선적인 면모를 보여준다고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진솔한 마음을 지닌 일본인의 마음을 보여준다. 가면을 쓴 듯한 모습은 실상은 그들 일본인이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하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아주 짧은 이야기이기때문에 30분정도면 다 읽을 수 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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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 지음/ 예담

 

GEB처럼 오랫동안 읽은 책도 없을 듯 하다. 거의 3주에 걸쳐 읽었다. 하권은 어떻게 읽나하는 걱정이 슬며시 들기도 한다. 덕분에 대출기한을 넘겨 근 10일간은 대출금지이다. 아쉽지만 집에 있는 책을 읽는 것으로 대신하면 되겠다는 마음으로 집사람이 사놓았던 책을 들었다. 그 책이 바로 김형경의 <사람풍경>이다. 제목이 어쩐지 마음을 끌어당긴다. 처음 몇장을 읽어가면서 이 책이 심리학 또는 정신 분석학과 맥이 닿는구나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작가도 여성임을 알게되면서 그 문체와 내용도 여성다운 면이 있구나 느껴진다.

 

김형경씨는 유럽과 오세아니아 지역을 혼자서 여행하면서 다양한 경험들을 한다. 친절한 사람들, 적대적인 사람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의 풍경을 그린다. 그러면서 그 풍경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또한 많은 예술작품들을 보면서의 느낌과 작가의 심리를 추적해 보기도 하고, 자신의 심리를 다시 돌아보기도 한다.

 

이 에세이의 첫번째 부분은 기본적인 감정들을 소개한다.

하나 - 무의식, 사랑, 대상선택, 분노, 우울, 불안, 공포

그리고 이어서 선택된 생존법도 소개한다.

둘- 의존, 중독, 질투, 시기심, 분열, 투사, 회피, 동일시, 콤플렉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긍정적인 가치들

셋-자기애, 자기존중, 몸사랑, 에로스, 뻔뻔하게, 친절, 인정과 지지, 공감, 용기, 변화, 자기실현

 

우리네 인간들의 거진 모든 행동들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고 이 무의식속에 숨어 있는 다양한 감정들 및 이미지, 또는 억압되어 있는 것들이 일상생활에 어떻게든 투사되어 나타난다. 작가는 20대부터 심리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많은 관련 책을 읽었으며 실제 자신이 정신분석상담을 받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알게 되었던 많은 심리적 요소들을 여행중 만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 관찰하게 된다. 또한 그들에 대한 자신의 반응에도 심리적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인간행동에 대한 작가의 심리적 설명이 때로는 지나치다고 생각되며 거부감이 드는 부분도 더러 있다. 특히 친절을 논할 때, 보상심리나 방어기제로써 설명하는 지점에 있어, 모든 친절의 행동이 그런 것은 아닐터인데, 때론 심리학적 지식이 사람들을 오해하게 만들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사회를 보다 냉소적으로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읽은 내용을 나 자신에게 적용해 보기도 하며,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비추어 보기도 하는 소소한 재미도 있다. 더 나아가 도대체 '나'란 무엇인가? 하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문도 일으키기도 한다. 

 

작가가 소설가라서 그럴까? 소설은 아니지만 나름의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걸까?  심리에 대한 흥미를 일으키는 초반부, 그리고 작가의 진단이 다소 진부해지며, 다소 나의 견해와의 갈등이 존재하는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긍정적이며 훈훈한 느낌으로 글을 마무리하면서 갈등을 해소하는 느낌이 드는 마무리.

 

그녀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이제 나는 내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며,

정의롭기도 하고 비겁하기도 하며

이기적이기도 하고 이타적이기도 하며.....

 

그런 얼룩덜룩하고 울퉁불퉁한 존재로서

존엄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여행을 통해 자신의 심리를 치유할 수 있었다.

문득 이 구절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라는 작품에서 싯다르타의 깨달음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성경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말도 생각이 난다.

 

어떻던 모든 심리적인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여전한 콤플렉스와 나르시시즘, 공포, 질투나 시기심,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들이 있기마련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들에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으며, 그것들을 조절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 인간 정신에 '정상'의 개념은 없으며, 생이란 그 모든 정신의 부조화와 갈등을 끊임없이 조절해 나가는 과정일 뿐임을 알게되었다. 작가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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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한 번씩 간단한 주제를 제시하고 영어로 에세이를 쓰도록 하는데, 어떤 장점이 있을까?

아이들이 영어로 글 쓰는 것에 조금씩 익숙해 진다. 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면 더 이상 발전하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다.

첫째는 아이들 생각하는 힘이 굉장히 약하다. 기본적으로 우리말로도 에세이를 쓰기 힘들어 하는데, 영어로 쓰야하니 더 그럴 것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비록 조잡한 글이기는 하나, 어떤 때는 아이들의 속 마음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학교 선생님이나, 학습, 또는 부모님에 대한 생각등의 단편들을 엿 볼 수 있어, 아이들 지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다.

 

 왜 부모님께 순종해야 하는가? 에 대한 질문에 이런 답이 있었다.

They have money. They give gift to me.

....

So I study hard.

 I want to make my parents obey me.

 

ㅋㅋ 끝 문장이 압권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자기가 크면 부모님보다 더 큰 파워를 가지고 부모님들이 자기 말을 듣도록 하겠다는 뜻인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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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이가 입이 또 나왔다.

"선생님! 이건 너무 어려워요!"

일곱 문장을 듣고 따라하기 그리고 보고 읽기가 그의 할 일이다. 문장이 조금 길어지니 어렵다고 한다.

생각으로는 "어휴, 이것도 못해?" 하면서 한 소리하고 싶지만,

"그럼 오늘 네 문장, 내일 세 문장 공부하면 되겠네." 하고 부드럽게 말해 줬다.

표정이 좋아진다. 그리고 군말없이 연습하고 검사를 받았다.

 

단어학습한 이후에 단어 테스트를 할 차례이다. 또 다시 인상이 험해진다.

"꼭 해야되요? 잘 모르겠는데..."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그래 선생님이 도와 줄테니, 걱정말고 해 보자"

그리고는 단어를 불러주고, 힌트도 주고, 맞추면 동그라미도 해 주었다. 표정이 밝다. 그 놈 표정을 보니 내 기분도 좋아진다.

 

가끔은 이렇게 편하게 해주다보면 습관이 들어, 나중에 이것도 저것도 다 빼달라 하면 어쩌지하는 걱정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이들 마음이 아니겠는가? 즐거운 마음으로 학습하도록 해야 더 나은 결과를 보게 되리라는 생각으로 편하게 해준다.

 

제발 나중에 이것 저것 다 빼달라고 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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