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 장편소설/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은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를 읽기전에는 알지 못했었다. 그 이후에야 뉴욕타임즈지가 추천한 100권의 책 중에도 <장미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단한 철학적 논의가 들어있다는 점과 아울러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작품이란 것은 한층 더 흥미를 끄는 것이었다..
중세시대 1300년대 한 수도원에서 수도승들이 차례대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한편으로는 이 사건을 의뢰받은 수도승 윌리엄이 사건의 진실에 접근해 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전개되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론 그 당시 중세 세계의 모습이 그려진다. 교리논쟁, 이단논쟁, 마녀재판, 그리고 황제 루트비히와 교황 요한22세의 대립, 청빈교리에 대한 프란체스코회와 베네딕트회 및 교황측의 대립의 모습을 통해 중세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종교 권력의 어두운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진실을 파헤치려는 윌리엄, 자신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을 지키려는 호르헤, 이 둘 사이의 치열한 철학적 논쟁. 독자는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진리의 가치는 뭇 생명을 초월한 것이라 생각하는 호르헤, 그리고 그 어느 진리도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하지는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윌리엄. 호르헤는 독단적 교조주의에 빠져 비합리적인 광신적인 모습을 보이는 반면, 윌리엄은 합리주의적 사고, 철학적인 태도를 보인다. 움베르토 에코는 광신적 종교 행위의 불합리성을 드러내며 그 자신 윌리엄으로 대표되는 합리성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나의 종교적 신념이나 믿음은 윌리엄과 호르헤 사이의 어디에 있는 것일까? 호르헤는 절대적 진리에 대한 강한 믿음에 따라 행동하고 있으며, 윌리엄은 절대진리에 대해 어느 정도 회의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윌리엄은 이단 심판관으로 여러 이단 사건을 처리하던 중 어느 것이 이단이며 어느 것이 정통인지에 대한 기준이 모호함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이단 논쟁 및 종교 재판등은 진리를 옹호하는 최전선이 아니라 일종의 권력과 관련된 싸움임을 깨닫는다. 프란체스코회의 청빈교리를 이단으로 정죄하려는 교황청의 의도는 무엇인가? 진리를 옹호하려는 순수한 마음이라기 보다는 당시 교회가 장악하고 있던 재산, 권력등을 보호하려는 은밀한 욕망이 그 동기임을 윌리엄은 알아채게 된다. 청빈교리를 인정하는 순간 교회는 모든 권력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호르헤의 자세는 교황청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종교의 근엄성을 지키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웃음은 종교를 훼손하는 사악한 것이라 생각한 호르헤는 수도승들이 웃음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표명한 아리스토텔레스로 부터 영향을 받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수도승들의 손으로 부터 영원히 격리시키려는 계책을 꾸미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게 되는데...
윌리엄의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는 방법론은 좀 낯선 철학으로 표명된다. 즉 오류를 통해 진리에 접근한다는 그의 말에 그 방법론의 철학이 드러난다. 그의 철학에 따르면 오류는 불필요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진실에 다가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진리만이 아니라 거짓도 필요하다는 이율배반적인 논리가 거기에 들어있다.
또한 진실, 또는 진리가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시된다.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마적 모습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과연 그 진리는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인가? 진리가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불행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리인가?
과연 진리란 무엇인가? 그 실체가 있는 것인가? 호르헤 노수도사가 진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은 진리인가? 웃음에 대한 그의 판단은 진리인가? 아니면 이단적인 생각인가? 때로는 명확히 밝혀진 계시가 없어 그 진위를 판단하는 것을 유보하는 것이 옳을 때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를 계속 주장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올바른 태도인가?
윌리엄 수도사는 진실에 접근했으나,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못했다. 그리고 올바른 경로를 통해 결론에 이른 것도 아니었다. 그의 추리에는 적지 않은 오류들이 있었으며, 결정적 실마리는 합리적인 추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며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오류는 진리로 인도하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윌리엄 수도사의 말은 개연성이 희박하다. 진실에 접근하는 무한한 경로가 있음을 생각할 때 그의 생각이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판단되어 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진실에 도달하는 건실한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오류에 접어든 추리를 진실의 방향으로 물줄기를 바꾸어 주는 것은 오류일 수가 없다. 오류 더하기 오류는 진실이 될 수 있을까? 2+3+5 라는 계산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2+3 =5 라는 진실의 과정과 5+5=10이라는 진실의 과정이 연이어져야만 한다. 2+3=6 이라는 오류와 6+5+10 이라는 두가지 오류가 합해져서 정답에 이를 수는 있다. 하지만 이는 진리에 이르는 올바른 경로가 아니다. 오류 더하기 오류는 더 큰 오류도 이어진다는 것이 상식적이다. 단 오류를 포함할 수도 있는 여러가지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의 합리성 및 진실성을 시험하여 오류가 포함된 가설들을 버리는 과정을 통해 올바른 가설을 찾아낸다는 것은 합리적 방법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현대의 과학적 방법도 이러한 과정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이러한 합리적 방법은 철학이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방법과 상응한다. 하지만 과학이 그렇듯이 철학은 결코 절대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단지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에 무한히 접근할 뿐이다. 수많은 철학들이 진리를 표현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철학은 뒤이은 철학에 의해 비판받고 변증법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철학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렇다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이러한 철학적 방법을 수용해야 하는 것일까? 계시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철학적 방법이야 말로 단 한가지의 합리적 방법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철학은 윌리엄수도사와 호르헤 노수도사의 설전에서 보여지듯이 서로의 지적 우위를 증명하고자 하는 논쟁에 불과한 것은 아닐런지... 진리에의 탐구는 희미해 지고, 고도의 지적 유희, 또는 지적 우위를 돋보이게 하려는 투쟁의 장은 아닐런지....러셀은 <서양철학사>에서 철학은 지적능력이 뛰어난 할 일없는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지적 유희라고 지적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진리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져본다. 진리란 사실들, 거짓이 아닌 진실인 것들의 집합이라고 정의를 내려야 할까? 이렇게 정의된 진리가 인간의 생명 및 행복에 디딤돌이 아니라 거침돌이 된다면, 이런 경우에도 그것을 진리라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진리란 참이거나 거짓이거나에 상관이 없이 인류의 생명과 행복에 기여하는 모든 것들의 집합을 말하는 것일까? 이 후자의 견해는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이란 책에서 언급한 바가 있기는 하다만... 이 또한 진리의 정의로서는 부족하지 않은가?
역사는 진리인가? 역사는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본, 역사가가 선택한 과거의 사실이라는 정의로 판단해 볼 때, 진실에 근접하기는 하나 그 선택된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의 머리에서 구성된 흐름상에 있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볼 때 그 절대적 진리성은 약화될 수 밖에 없다.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저서를 남긴 E.H 카아의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정의에 의하면 그 과거의 사실들은 시시각각 변화는 현재의 상황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대적 사실이라는 면에서 그 역사의 진리성 역시 훼손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심지어 백과사전식의 발생한 모든 사건들의 집합이라는 역사에 대한 정의는 어떠한가? 애초에 그러한 역사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역사관을 실제로 구현해 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면 진리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는가?
진실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자신의 진리를 옹호하려는 자, 권력을 추구하는 자, 지식을 탐하는 자, 다양한 대상물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엮어내는 세상의 모습을 <장미의 이름>에서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