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 올라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완만하지만은 않은 오르막길은 갈비뼈를 앙상하게 드러내고 있다. 흙속에 덮여 있어야 할 나무뿌리가 얽기설기 얽혀 기괴하게 표면에 다 드러나 있다. 뿌리를 계단 삼아 힘들게 올라갔다. 문득 다산 선 이 뿌리 길을 라가면서 무슨 각을 을까? 

자신의 꼬인 인생 한탄했을까? 아니면 ' 이상 잃을 것은 없다. 다시 시작이다.'라고 생각했을까?


<뿌리길 - 출처: 전라남도 SNS 통합사이트>


다산초당을 방문했던 여행을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자리에서 다산선생이 체취제대로 감지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단지 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는 편액에서만 희미하게 다산의 흔적을 느꼈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추사 김정희의 흔적이었다.


다산의 흔적을 진하게 느끼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초의 기대가 어긋난 때문이었을까? 초가지붕이 아닌 기와지붕을 보 '다산초당이 아니라 다산와당이었어?'하는 생각? 다산선생의 영정을 보고 왠 안경? 고독하고 적막해야 할 유배지에 이런 북적임이란? 기대와는 다른 이질감 다산 선생의 흔적을 찾아 그의 삶을 되돌아보려는 마음을 흩트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산의 삶을 느끼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무지였다. 흘러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려면 뭔가 실마리가 있어야 했다. 다산 선생이 남긴 흔적은 그의 삶을 상상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다산 선생이 남긴 흔적을 놓치고 말았다. 적어도 다산 4경은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 다산 선생이 남긴 흔적들, 정석丁石, 약천藥泉, 다조茶竈,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말이다.  



18년간의 오랜 유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다산. 10년간 고운 정 미운 정 다 들었을 다산초당을 떠나려다 문득 돌아서서 망치와 정을 가지고 초당 뒤 바위 앞으로 다가간다. 그리 자신의 성을 바위에 새긴다. 다산초당의 제1경 '정석丁石'이다. 선생이 그 글을 새길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정석을 새기고 난 뒤에도 한참을 머뭇거리지 않았을까? 가다 멈춰서서 다시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나는 다산초당 방문을 되돌아보는 지금에야 선생의 심정을 헤아려 본다.


<정석>


다산초당의 제2경과 제3경은 약천藥泉과 다조茶竈이다. 초당 주위를 살펴보던 선생 초당 뒤에서 물기가 축축이 새어나오는 곳을 보게 된다. 혹시 하는 마음에 손가락으로 이곳을 헤집어 본다.  그랬더니 바위들이 드러나고 그 틈에서  맑은 물이 흘러나온다. 선생은 그 물을 마시기도 하고 그 물로 차를 끓이기도 했다. 이 물과 차는 유배생활로 초췌해진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이 샘을 '약천藥泉'이라 한다. 또한 초당 앞 뜰에는 널찍한 바위가 하나 있는데, 선생은 약천에서 물을 떠다가 이 바위 위에서 솔방울을 태워 차를 끓여 마시곤 했다. 이 바위가  다조茶竈이다   


<약천>


<다조>


선생을 이야기하자면 차를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선생에게는 '사암'이라는 호가 있다. 하지만 '다산'이라는 호가 더 널리 알려져 사용된다. 선생이 생활을 하던 초당은 강진 만덕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산에는 야생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다. 그래서 만덕산을 '차가 많이 나는 산'이라는 뜻의 '다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선생이 기거하던 초당도 그래서 다산초당이라 불렸고, 선생도 역시 '다산'이란 호를 얻게 되었다.  


선생과 6년간 절친한 벗이었던 백련사의 혜장선사도 차로 맺어진 인연이었다. 혜장이 보내준 차는 선생의 건강과 마음을 다스리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억울하게 유배되어 온 선생, 큰 형 약전은 흑산도, 자신은 이 곳 강진에 유배되고, 작은 형 약종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끝내 목숨을 다. 이렇게 가족이 풍비박산 나는 통에 그 마음에 맺힌 응어리는 얼마나 컸을까? 게다가 열악한 유배생활은 선생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이런 선생의 몸과 마음을 치료해 준 것이 바로 차였던 것이다.


또한 조선후기에 이르러 거의 절멸 상태에 있었던 차문화는 다산과 초의선사를 거쳐 추사에 의해 다시 부흥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산은 차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제 돌이켜 보니 다산초당의 선생의 흔적들은 실은 차향의 흔적이 었음을 깨닫는다. 다산 선생과 차는 뿌리길의 뿌리들처럼 깊이 얽혀 있  선생 산인지 다시 생각해본다.


다산초당의 제 4경은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다. 풀이하면 '연꽃이 핀 연못에 돌로 만든 산'이란 뜻이다. 다산초당 인근은 물이 많은 지역이다. 차나무도 습하고 일교차가 큰 지역에서 잘 자란다고 하는데, 바로 다산이 그러한 곳이었다. 다산초당 왼쪽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선생은 연못을 조금 더 크게 만들고 연못 중앙에 돌을 쌓아 작은 산을 조성하였다.


<연지석가산>


초당에서 연못 쪽으로는 '관어제觀魚齊'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작은 문이 있다. 선생은 글을 읽거나 쓰다가 피로해질 때면 이 문을 열고 연지석가산을 보기도 하고, 연못 속을 노니는 잉어도 쳐다보면서 잠깐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좁은 연못을 헤엄치고 있는 잉어를 보면서 자신도 그 잉어와 같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다산초당을 방문했다면 이렇듯 다산이 남긴 흔적들에 묻어나는 다산의 삶의 향기를 느꼈어야 하지 않을까? 시간의 흐름을 살아남은 실마리의 꼬리를 잡고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다산의 삶을 그려보는 시간여행을 했어야 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유홍준 님의 말처럼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역사적 장소를 답사할 때 기억해야 할 가장 기본임을 절실히 느낀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일정이었기에 아쉬움은 피할 수 없었던 일이었고, 다산초당의 방문을 계기로 뒤늦게라도 선생의 삶의 흔적을 좇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 아쉬움을 달래 본다.   


다산초 4경외에 남아 있는 선생의 흔적은 다산초당의 편액이다. 언제인가 이 글씨가 추사 김정희의 것임을 읽은 기억이 있었다. 추사의 글씨라는 선입견 때문일까 그 글씨는 특별해 보였다. 하지만 자꾸 들여다보니 정이 가는 글씨이다. 각 글자는 모두 다른 필체낌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어우러진 조화는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다산과 추사가 한 시대를 살았다는 우연과 다산과 추사의 인연이 만들어낸 다산의 흔적이 바로 '다산초당' 편액이 아닐까?


이 우연은 다산동암의 편액에서 또다시 조우한다. 다산동암의 편액은 다산선생의 글씨이다. 다산과 추사의 글씨는 이렇게 나란히 서로 만남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다산동암을 지나다산초당의 백미 백련사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뿌리 길과는 달리 이 길은 그다지 가파르지는 않다. 숲의 향기에 취해 40여분을 걸어 800여 미터를 가면 고갯마루를 넘어 백련사에 도착한다. 선생은 혜장을 만나러 이 길을 무던히도 걸었을 것이다. 혜장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함께 이야기하는 즐거움도 즐거움이려니와 계절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보이는 길도 선생의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동백꽃 가득한 봄날의 숲, 동백꽃 떨어지고 초록의 향연이 짙어지는 늦봄의  숲, 매미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어대는 한 여름의 숲, 모든 잎들이 꽃이 되는 가을의 숲, 낙엽이 융단처럼 깔린 늦가을의 숲, 눈 덮힌 겨울의 숲, 선생은 이 숲 사이로 난 백련사 가는 길을 사랑했을 것이다.  



어떤 밤에는 부드러운 달빛을 초롱 삼아 달그림자 밟으며 길을 걸었을 것이다. 때로는 혜장이 이 길을 거슬러 선생을 찾았을 것이다. 선생은 혹 밤늦게라도 자신을 찾아 올 혜장을 위해 평소에도 문걸이를 걸지 않았다. 다산보다 14살이 어린 혜장이 초당을 찾아, "선생님 계십니까?" 하고 부르며 들어섰을 때, 다산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혜장을 맞이 했을 것이며, 약천에서 물을 떠다가 다조에서 차를 끓이고, 찻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차향과 맛을 음미하며 대화를 즐겼을 것이다. 찾는 이 드문 외로운 유배지에서 선생의 마음에 위로가 된 것은 백련사 가는 길로 이어진 혜장과의 사귐이었을 것이다.  



나는 뒤늦게서야 다산초당에 남아 있는 선생의 흔적을 찾아 선생의 삶의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다. 아 무상한 세월이여, 선생은 가고 없고 그 흔적만 남아 있고, 난 그 향기를 좇아 나대로의 방식으로 선생의 삶으로 상상의 여행을 떠나고 있다.




우연한 만남이 때로는 오랫동안 기억되는 순간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5월의 황금연휴 이틀째 오후, 우리는 순천만 국가정원에서 전날 보성 여행을 다녀온 지인을 만났다. 그는 전 날에는 벌교와 보성을 갔었고, 우리를 만난 날 오전에는 순천 낙안읍성에 갔다고 한다. 그러면서 보성녹차밭을 가보란다. 아내도 무척 보성에 가보고 싶다고 한다. 아내의 바람을 외면할 수만은 없어 예정에도 없던 보성을 여행하기로 한다. 아름다운 순천만 국가정원은 다시 한 번 더 와 봐야 할 명소의 목록에 올려놓고는 아쉬움을 달래며 보성으로 달린다. 내게는 보성 가는 길이 미답의 길이다. 하지만 보성녹차밭 정경을 담은 사진을 여러 번 보았던지라 새로움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은 그다지 하지 않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미세먼지로 뿌옇다. 5월의 푸른 하늘 찍힌 짙푸른 산등성이를 보고 싶었지만, 몸살처럼 성가신 미세먼로 먼 풍경은 마치 선잠을 깬 눈에 비치는 모습처럼 흐릿하다. 참 성가신 일이다.


늦게 순천만 국가정원을 출발한 대가로 보성에는 해거름 녘에 도착한다. 높은 나무 그림자가 땅에 길게 깔리고, 주위의 공기에는 서늘함이 감돈다. 녹차밭 폐장 시간까지는 삼십여 분만이 남아 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 것도 한 순간이다. 장대비처럼 곧두박질치고 있는 삼나무 울창한 숲, 안개가 자욱한 숲 사이로 난 오솔길. 이 순간 주위에 가득한 자욱한 안개는 저항할 수 없는 손짓으로 나를 잡아당긴다









대한다원 녹차밭으로 향하는 오솔길 좌우에 쭉쭉 뻗은 삼나무가 안개 속에 도열해 있다. 당당하게 다원을 지키고 있는 울창한 삼나무 숲이 압도적이다. 안개가 불러일으키는 아득함과 신비스러움이 그 당당함에 더 힘을 실어준다. 짙은 안개가 깊은 숲 속에서 고여 물이 되어 흐르는 듯한 아주 작은 시냇물이 안개에 젖은 숲 사이를 흐른다. 짙은 안개로 숲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고, 그만큼 숲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안개가 자욱한 분위기는 미세먼지가 일으키는 성가심과는 딴 판이다.  


전혀 예상 밖의 풍경이다. 이전에 보아왔던 사진 속의 풍경을 기대하던 무의식적인 선입견과 예상은 다원의 입구에서 산산이 깨어져 버린다. 오히려 생각도 못한 기대감과 설렘으로 마음이 흔들린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길게 이어진 고랑, 정원사의 손길을 탄 정원처럼 가지런히 정돈된 푸른 녹차밭, 사진 속에서 보던 그런 녹차밭이 여전히 저 숲 너머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카메라의 눈으로 잡지 못했던 뭔가가 더 있을 것이라는 새로운 기대가 마음속에서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숲의 요정이 이끄는 손길을 따라 나는 넋을 잃고 시커멓게 하늘을 치찌르는 삼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습도가 높고 일교차가 큰 보성의 기후조건은 차나무를 재배하는 최적의 조건이다. 보성군은 협소한 해안지역과 보성강 유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산지로 되어 있으며 연이어져 있는 산들로 산세가 수려하고 웅장하다. 보성의 남쪽으로는 보성만이 자리 잡고 있고, 보성군의 서쪽에서 발원한 보성강은 보성군의 북쪽을 감싸 안듯이 흘러 섬진강과 합류한다. 또한 산지에서 발원한 크고 작은 천들이 이 지역을 적시며 흐른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습기가 많고 일교차가 큰 기후로 이어져 보성은 차나무가 잘 자라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게 된다.   

  

습기가 많고 일교차가 심한 기후 조건으로 보성차밭의 두 개의 얼굴을 갖게 된다. 한 낮의 얼굴과 아침저녁나절의 얼굴이 사뭇 다르다. 보성은 아침저녁나절에 안개가 자주 낀다. 이른 아침 보성은 깊은 안개 속에서 잠을 깬다. 잠 기운이 사라지면서 꿈결 같은 안개는 어둠과 함께 차츰 대기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고 차가운 기운이 감돌면 안개는 어둠과 함께 숲 속 다원으로 찾아든다.


 


안개 자욱한 삼나무 숲을 지나 드디어 녹차밭과 마주한다. 안개가 내려앉은 녹차밭은 하얀 어스름 속에,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처럼 다소곳하게 우리를 맞이한다. 하지만 그 고아함은 안개 자욱한 속에서도 도저히 숨길 수가 없다. 안개 낀 다원의 풍경은 여백이 아름다운 한 폭의 산수화이다. 더구나 폐장시간이 가까운 다원은 인적조차 드물어 아주 깊은 산 속인 양 고요하고, 저 멀리 아스라이 사라져 가는 풍경은 하얀 여백이 되어 몽환적인 풍경을 이룬다.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보았다는 복숭아꽃 핀 마을인 몽유도원에 비할바는 못되겠지만 몽유 다원이라고는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한 낮의 다원은 싱그러운 푸르름을 뿜어낼 것이다. 찻잎을 따는 일꾼들이 다니는 길이 그리는 아름다운 곡선으로 뚜렷한 밭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낼 것이다. 대기 중에 가득 찬 녹차 기운은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줄 것이다. 여행으로 피로해진 발걸음은 녹차밭을 산책하는 동안 어느새 가벼워질 것이다. 아직 한 낮의 다원을 경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한 낮의 얼굴도 충분히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정작 보성의 속살은 안개 속에 잠긴 모습이 아닐까? 아무에게나 보여주지는 않는 민 낯의 보성이 바로 이 모습일 것이다. 그 날 나는 안개 자욱한 다원을 신선처럼 거닐었다. 걸음에 지친 다리는 어느새 가벼워져 있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군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는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그 바람 속에는, 신선한 햇볕과 아직 사람들의 땀에 밴 살갗을 스쳐 보지 않았다는 천진스러운 저온, 그리고 지금 버스가 달리고 있는 길을 에워싸며 버스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산줄기의 저편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소금기, 그런 것들이 이상스레 한데 어울리면서 녹아 있었다. 햇볕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가지만 합성해서 수면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약방의 진열장안에 있는 어떠한 약보다도 가장 상쾌한 약이 될 것이고...


무엇이 주이고 무엇이 부인가? 김승옥의 섬세한 감성과 표현에 무게를 둘 것인가, 아니면 김승옥이 그리고자하는 인물에 무게를 둘 것인가?

위대한 개츠비의 파괴적 영향력이 지나치게 크다. 의미없는 표현이 없다.

김승옥식 표현은 단절 단절, 이성적인 노력으로 연결되지 않는 토막 토막 난 글들,

하인숙, 세무서장인 조씨가 따 먹으려던 여자, 꽁생원같은 선량한 박선생이 좋아하던 여자, 서울로 데려가 달라던 여자, 그 여자는 바닷가 서울 남자가 하숙하였던 집에서 조바심을, 칼을 빼앗지 않으면 절망에 사로잡혀 찌를 사람처럼, 조바심을 느끼던 여자에게서 조바심을 빼앗아 버렸다. 그 조바심이 정체가 무엇이었을까? 조바심을 빼앗긴 여자는 서울로 가지 않겠다고 하고, 서울 남자는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끝내 그 여자를 서울로 데려가겠다고 하는데,

그 빼앗긴 조바심이란, 모든 것을 달라지게 만드는 것인가? 여자가 먼저 남자를 유혹했고, 남자는 유혹을 당했고, 그런데 왜 여자는 남자를 유혹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서울 남자라는 이유로,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그런데 조바심을 빼앗기고 나서는 또 서울로 가지 않겠다고...


무진 기행의 키워드는 안개, 모든 것이 안개 속에 뿌옇게 사라져 버린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되어 버리고 없다.

수치도, 책임도 무책임도 모든 것이 유배되어 버리고 없는 세상, 그 세상이 무진이다. 이 무진은 당시의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서울은 희망의 장소, 믿음의 장소였을까?


돈 많은 과부를 어떻게 만났을까? 급상경요 회의참석요. 이 전갈은 전무가 될 것임을 알리는 것, 이 전보로 모든 안개가 걷히고...


자살한 여자, 술집작부, 독해서 죽을 것 같지 않았던 여자, 이 여자의 죽음을 지켜 주고 있었던 불면의 밤....

서울 남자는 옛 자신을 현재의 자신으로 끌어내기 위해 애를 쓴다.

옛 모습은 골방에 숨어 의용병도 국군도 ...징집을 피하기 위해 선배와 친구들이 전방에서 싸우는 동안 골방에 숨어 있었다. 어머니의 성화로...하지만 점점 무거워 지는 마음 전장을 달려가는 마음,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

1년동안 폐병을 고치기 위해 바닷가의 집에서 하숙을 한다. 쓸쓸한 느낌을 엽서에 써서 사방으로 보냈던 옛 모습

나오는 인물, 주인공, 어머니, 어머니의 산소에 들러 이슬비 내리는 산소 앞에서 절을 한다. 긴 풀을 뽑는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의 표시런가. 골방에 자신을 숨겨준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가 죽고 난 후 폐병이 들었다는 것은 그 만큼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이 컸다는 그런 의미일까? 어쨌든 어머니.

하인숙, 박선생, 조씨, 자살한 술집 작부, 서울 남자의 부인, 장인....


개구리 울음 소리가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로 화하는 청각이 시각으로 변하는 이상한 현상....

개구리 울음이라고 답하며 하늘의 별들을 쳐다 본다. 그리고는 또렷이 깨닫는다. 나와 별 사이의 거리를, 그리고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사람과 사람사이의 거리감을 이야기하려는 건가?


끝없는 의문이 잇달아 올라오면서, 과연 김승옥님은 이런 표현을 함에 어떤 의미를 두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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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못한 일들이 예상외의 즐거움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애초부터 땅끝마을에 가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언제부터인지는 희미해도 마음 한 구석 저 깊은 안쪽에는 늘 땅끝마을이 작은 소망처럼 자리 잡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번 땅끝마을 여행은 순전히 즉흥적인 것이었다. 미답의 땅인 보성을 밟아보고는 어디서 힘이 났는지, 여기까지 온 김에 갈 때까지 가보자는 묘한 만용이 생긴 것일까? 율포에서 일박한 후 땅끝까지 가보자고 합의를 보았다.


가는 길에 월출산 무위사, 다산초당, 백련사, 가우도 출렁다리를 먼저 찾았다. 유홍준 님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무위사를 "한 여름에 낮잠 자다 깬 아이가 엄마 찾아 우는 절"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 무위사의 유명세에 비해 볼 때, 그리고 석탄일을 일주일 앞둔 때였음에도, 무위사는 한참이나 인적이 드문 한적한 사찰이었다. 그 고적한 분위기는 한 여름 뜨거운 열기를 피해 기와지붕 아래 그늘진 마루에서 맛있게 낮잠을 자던 아이가 사방의 고요함에 문득 잠이 깨어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울며 엄마를 찾을 법한 그런 분위기였다.   


무위사를 말하자면 국보 13호로 지정된 극락보전을 빼놓을 수 없다. 맞배지붕에 주심포 형식의 극락보전은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형태를 보이고 있는 오래된 건물이다.

나무의 결과 색을 그대로 살린 기둥이 첫 보기에는 허름하고 낡아보이지만 오히려 그것이 세월의 묵직한 힘이다



극락보전 앞 널찍한 마당에 고적함이 감돈다. 극락보전 마당 건너편의 아름드리 고목나무는 얼마나 오랜 세월을 이 극락보전과 마주하고 있었을까? 이 건물이 세종 때 지어졌다는데, 그때 심긴 나무일까? 움직이지는 못해도 한 자리에서 고스란히 그 역사를 지켜보았으리라. 그 시간의 깊이가 나이테로 쌓여 아름드리나무가 되었지만, 말이 없이 다만 어그러지고 뒤틀린 형상으로 시간의 묵직함을 전한다.  


나무 그늘 아래 마루에 앉아 오월의 햇볕이 눈 부신 너른 마당 건너편의 극락보전을 한참 동안 무심히 바라본다.

어둠에 익숙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듯이 세월의 이끼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보는데도 그런가 보다. 정신이 나른하게 고즈넉함에 젖어갈 무렵 시간을 거슬러 우뚝 서 있는 이 건축물이 보인다. 기둥을 붉은색으로 칠한 다른 건물들과 극락보전과의 거리는 공간 속의 거리가 아니라 시간 속의 거리임을 깨닫는다. 새 것이 옛 것보다 나을 것이란 보펀적인 생각은 때로는 무참히 깨어진다. 

 

극락보전이 지니고 있는 소박미는 맞배지붕과 주심포 형식에 기인한 바가 크다. 일반적으로 대갓집 지붕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팔작지붕은 기와지붕이 전후로만이 아니라 좌우로도 날개를 폈듯 처마를 드리운다. 하지만 극락보전의 맞배지붕은 기와지붕이 용마루로부터 건물의 앞 뒤로만 펼쳐져 내린다. 기와지붕의 여러 형태 가운데 가장 단순한 형태이다.  


또한 주심포 형식은 지붕을 떠 받히는 힘을 분산시키기 위한 구조인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건축 양식이다. 극락보전의 네 개의 기둥을 보면 그 위에 장식 모양의 '공포'가 놓여져 있다. 이와 같은 공포가 기둥 위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건축 형식이 '다심포'형식이다. 주심포 형식은 다심포 형식에 비해 화려하지 않고 다만 단순해 보인다.  



맞배지붕을 한 극락보전, 정면의 기와 지붕과 후면의 기와지붕이 가장 높은 중앙 용마루에서 만나 서로 배를 마주 대한 것처럼 보인다



무엇을 보자고 이 곳에 들린 것일까? 역시 무위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만 고즈넉히 서 있는 극락보전을 보면서 찬란한 오월의 나른함을 느낄 뿐이었다. 큰 기대를 하고 무위사를 방문하는 것은 실망만 안겨 줄 뿐이지만, 무위사는 오랫동안 기억속에 남을 그런 곳이 될 것이다.   

무위사를 방문하면 반드시 그 고즈넉함과 극락보전이 아울러 내는 느낌을 놓치지 말기를...


다음 행선지는 다산초당이다. 정약용 선생은 18년 유배생활 동안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다산 초당은 땅끝까지 가는 길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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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개츠비는 더 이상 닉에게 숨길 것이 없습니다.

톰의 폭로로 그의 어두운 면이 낱낱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개츠비는 닉에게 데이지와 관련된 진실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떻게 데이지를 만났으며 어떻게 배신을 당했는지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It was this night that he told me the strange story of his youth with Dan Cody--told it to me because "Jay Gatsby" had broken up like glass
against Tom's hard malice and the long secret extravaganza was played  out.

바로 이 날 밤 개츠비는 댄 코디와 함께 했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내게 들려주었다. 나에게 이야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분노에 사로잡힌 톰의 무자비한 폭로로 "제이 개츠비"라는 인물은 이제는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졌버렸고, 오래 계속되었던 화려한 파티의 비밀도 이미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I think that he would have acknowledged anything, now, without reserve, but he wanted to talk about Daisy.

이제 개츠비는 숨길 것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개츠비는 데이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She was the first "nice" girl he had ever known.

데이지는 개츠비가 알게된 여인 중 처음으로 "고상한" 아가씨였다.   


In various unrevealed capacities he had come in contact with such people but always with indiscernible barbed wire between.

개츠비가 접하게 된 사람들 중 그러한 고상한 사람들은 내가 다 알 수 없을 정도로 많겠지만, 언제나 그들과의 사이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가시가 달린 철조망같은 것이 존재했었다.   



He found her excitingly desirable.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마음을 들뜨게 하는 사랑스러운 아가씨였다.  


He went to her house, at first with other officers from Camp Taylor, then alone.

개츠비는 데이지의 집에 갔다. 처음에는 부대의 다른 장교들과 함께 갔지만, 나중에는 혼자서 갔다. 


It amazed him--he had never been in such a beautiful house before.

그 집은 놀라웠다. 전에는 그렇게 아름다운 집에 가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But what gave it an air of breathless intensity was that Daisy lived there

그러나 그 집에 들어설 때의 숨이 멎을 듯한 강렬한 느낌은 오로지 그곳에 데이지가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it was as casual a thing to her as his tent out at camp was to him.

그 집은 데이지에게는 그저 일상적인 것이었다. 부대가 개츠비에게 일상적이었던 것처럼. 


There was a ripe mystery about it, a hint of bedrooms upstairs more beautiful and cool than other bedrooms, of gay and radiant activities taking place through its
corridors and of romances that were not musty and laid away already in lavender but fresh and breathing and redolent of this year's shining motor cars and of

dances whose flowers were scarcely withered.

그 집에는 알 듯 말 듯한 신비스러움이 있었다. 위층에는 다른 침실보다 더 아름답고 멋진 침실이 있을 것이고, 복도에서는 쾌활하고 눈부신 활동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며, 진작에 라벤더 향 속에 보관해 둔, 그러면서도 진부하지 않고 신선하며 살아 숨 쉬는 낭만이 있고, 그 해의 새로 출시된 빛나는 자동차를 생각나게 하는 빛나는 자동차를 생각나게 하는, 그리고 언제나 시든 꽃은 치워버리고 신선한 꽃을 꽂아놓는 그런 무도회가 있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It excited him too that many men had already loved Daisy--it increased her value in his eyes.

많은 남자들이 이미 데이지를 사모하고 있다는 것도 개츠비를 자극했다. 데이지의 가치는 더 높아졌다.   


He felt their presence all about the house, pervading the air with the shades and echoes of still vibrant emotions.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모하는 남자들의 존재를 온 집안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 집 주위에는 짝 사랑의 떨리는 감정의 흔적과 아우성이 가득했었다.  



But he knew that he was in Daisy's house by a colossal accident.

그러나 개츠비는 내세울 것이 없었다. 데이지의 집에 있게 된 것도 사실은 엄청난 우연으로 인한 것이었다.  


However glorious might be his future as Jay Gatsby, he was at present a penniless young man without a past, and at any moment the invisible
cloak of his uniform might slip from his shoulders.

제이 개츠비로서 그의 미래가 참으로 화려할 것이었지만, 당시로서는 하나 내 세울 것이 없는 한 푼도 없는 애송이였고, 그런 모습을 가리고 있던 군복이라는 투명 망토가 언제 벗겨질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So he made the most of his time.

그래서 개츠비는 최대한 서둘렀다. 


He took what he could get, ravenously and unscrupulously

개츠비는 자기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탐욕스럽게, 그리고 뻔뻔스럽게 훔쳤다.  


--eventually he took Daisy one still October night, took her because he had no real right to touch her hand.

결국 그는 어느 조용한 10월의 밤에 데이지를 훔쳤다. 데이지의 손을 잡을 권리조차 없었던 터라 훔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He might have despised himself, for he had certainly taken her under false pretenses.

개츠비는 아마도 스스로를 경멸했을 지도 모른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속이고 그녀와 관계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I don't mean that he had traded on his phantom millions, but he had deliberately given Daisy a sense of security; he let her believe that he was a person

from much the same stratum as herself--that he was fully able to take care of her.

개츠비가 자신이 바라는 모습을 사실인 양 염치없이 되풀이해서 데이지를 속였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개츠비는 의도적으로 데이지로 하여금 안전감을 주었다. 데이지는 개츠비가 자신과 같은 계층 출신이라고 믿었고, 자신의 화려한 삶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개츠비는 데이지가 그렇게 믿도록 내 버려 두었던 것이다.  


As a matter of fact he had no such facilities

사실상 개츠비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었다.


--he had no comfortable family standing behind him and he was liable at the whim of an impersonal government to be blown anywhere about the world.

개츠비는 뒤를 받쳐주는 안정된 가족도 없었고, 오로지 냉혹한 정부의 변덕에 따라 자신이 자칫하면 세계 어디로나 날려가 버릴 수 있는 입장이었다.   



But he didn't despise himself and it didn't turn out as he had imagined.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경멸하지 않았고, 그가 상상했던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He had intended, probably, to take what he could and go--but now he found that he had committed himself to the following of a grail.

아마 개츠비는 가질 수 있는 것은 가지고 가기로 기왕에 작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이 결코 잡을 수 없는 성배를 어쩔 도리 없이 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He knew that Daisy was extraordinary but he didn't realize just how extraordinary a "nice" girl could be.

개츠비는 데이지가 예외적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고상한" 여자가 얼마나 예외적일 수 있는지 까지는 깨닫지 못했다. 


She vanished into her rich house, into her rich, full life, leaving Gatsby--nothing.

데이지는 개츠비를 내버려두고 그녀의 부유한 집으로, 부유하고 풍요로운 삶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개츠비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He felt married to her, that was all.

데이지와 결혼했었다는 느낌 뿐 아무 것도 없었다. 


When they met again two days later it was Gatsby who was breathless, who was somehow betrayed.

이틀 후 다시 만났을 때, 숨을 죽인 사람은 바로 개츠비였다. 그리고 어쨋든 배반 당한 사람도 개츠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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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영문화예술회에서 회원들과 수영구민들의 글을 엮어 만든 '수영문예'를 읽었다. 참 소박하면서도 정겨운 소재의 수필들, 내 고장 작가의 수필들에 한 동안 젖어 있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글감으로 쓴 수필들과 시들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부산 수영의 숨겨진 이야기들이며 사람사는 이야기들이 지면에 펼쳐져 있었다. '멀리서 빛나는 별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발 밑에도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것들이 많다.'(Daum 브런치의 '푸른냥 이야기'에서)


유태연님의 수필 '매표구'/ '매표구'의 역발상이 흥미롭다. 매표구(買票口)냐, 매표구(賣票口)냐. 표를 사는 창구이나 표를 파는 창구이냐? 하나의 대상이지만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사실, 그리고 언어의 변화는 사람들의 의식의 변화를 쫓아간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정인호님의 작품 '구청장님 전상서'/  수영구 망미동에 '정과정' 정자가 있다. 고려시대 '과정 정서'라는 인물이 수영강변에 유배 생활을 하면서 임금님에 대한 충절을 노래한 '정과정곡'이라는 고려가요를 남겼다. 이 지역 도로명에 '과정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이 이름이 이렇게 역사적인 사실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에 은근히 놀랐다. 아직 가보지 못한 '정과정'정자는 어떤 모습일까? 그곳에 서면 그 옛날의 향기를 더듬어 맡을 수 있을까? '정과정'정자에 들리기 전에 '정과정곡'을 읽어봐야되지 않을까?


정인호님의 수필 '등록상표'/ 흥미롭다. 1원을 투자하여 자신만의 홍보전략을 세웠다니. 정인호님은 송금할 때는 반드시 1원을 더 보태어 보내준다고 한다.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표인 것이다. 상대방의 통장에 찍힌 1,000,001원. 1,000,000원보다 1원에 더 큰 신선한 충격을 받지 않을까? 나도 정인호님의 등록상표를 도용할까 보다.


박경인님의 시 '단팥죽과 팥빙수'/ 부산 용호동 이기대 입구에 있는 '할매 팥빙수'는 전국적으로 유명한가 보다. 하지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혼자 알고 싶은 좋은 곳도 있을 것이다. 박경인님의 시에는 자신이 즐겨가는 팥빙수집 '남천동 보성녹차'집이 나온다. 이 시를 읽고서 아마도 보성이라는 곳이 머리속에 박혔는지도, 그래서 전라도 여행 때 불쑥 보성을 방문했는지도 모른다. 벌써 입하도 지나고 소만이라고 한다. 여름이 느닷없이 눈 앞에 나선 듯 하다. 박경인님이 자주 들리는 보성녹차 팥빙수집에 가면 혹 박경인님을 우연히 만날 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사진속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시는 운율과 리듬이 있는 음악의 문학이다. 하지만 시는 감성의 문학이며 지성의 문학이기도 하다. 글자가 형상화하는 이미지, 소리가 만들어내는 리듬을 즐길 수 있다면 이미 시를 즐기는 사람이다. 또한 시인의 생각과 그것을 풀어내는 감성을 쫓아갈 수 있다면 시가 더 좋아질 것이다. 시인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시인이 사용한 표현의 깊은 속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곱씹어 보는 것도 시를 감상하는 한 방법이다. 그러한 즐거움을 독자에게 주려면 시를 쓰는 사람은 시 속에 최소한의 단서를 남겨 놓아야 한다. 그 단서를 잡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그런 단서 말이다. 이러한 단서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시는 어렵다 너무 어렵다.


초등학생에서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영구민들의 작품을 보면서 어떤 글이 좋은 글인가 생각해 본다. 좋은 글이란 깊은 생각, 그리고 수려한 문체등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사실 자신의 생각을 읽기 쉽게 풀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 나도. 좋은 글.


요즈음 들어 '무진기행'의 '김승옥'님이 눈에 밟힌다. 김훈님의 '라면을 끓이며'에서도 만나고, 순천만습지와 순천만국가정원을 방문했을 때도 만나고, 순천출신이란다. 비록 순천문학관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Daum의 '스토리펀딩'에서도 김승옥님을 만났다. 아주 오래전에 '무진기행'을 읽었더랬는데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어 미안할 지경이다. 이 번 토요일에는 도서관에 꼭 들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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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집으로 돌아온 닉은 밤새 잠들지 못합니다.

이 기구한 사나이 개츠비의 운명을 예고라도 하는 듯 그 날 밤은 밤새 안개로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고,

무적소리조차 슬프게 우는 것처럼 들려왔습니다.

닉은 개츠비의 운명을 슬퍼하며 잠들지 못합니다.

개츠비가 돌아오는 소리를 듣자마자, 닉은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개츠비를 찾아갑니다.


한동안 떠들석하던 개츠비의 저택은 이제는 귀신이 나올 것만 같은 을씨년스러운 곳이 되어 있었습니다.

닉은 개츠비더러 도망하라고 권하지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I couldn't sleep all night; a fog-horn was groaning incessantly on the Sound, and I tossed half-sick between grotesque reality and savage
frightening dreams.

나는 밤이 새도록 잠을 잘 수 없었다. 멀리 만에서는 밤새 무적소리가 울부짖었다. 나는 기구한 현실에 안타까워하다가 잠들라치면 소름끼치는 무서운 꿈에 쫓겨 깨어나곤 하면서 잠을 설쳤다.     


Toward dawn I heard a taxi go up Gatsby's drive and immediately I jumped out of bed and began to dress--I felt that I
had something to tell him, something to warn him about and morning would be too late.

동 틀 무렵 택시가 개츠비의 저택으로 향하는 길을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용수철 퉁기듯 침대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기 시작했다. 개츠비에게 해 줄 말이 있었다. 경고해 줄 말이 있었다. 날이 새면 너무 늦을 것 같았다.  


Crossing his lawn I saw that his front door was still open and he was leaning against a table in the hall, heavy with dejection or sleep.,

잔디밭을 건너가면서 보니, 현관문이 아직 열려있었고, 개츠비는 낙담에 압도된 것인지, 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것인지 거실의 탁자에 기대어 있었다. 


"Nothing happened," he said wanly.

"아무 일도 없었어," 개츠비가 힘없이 말했다.


"I waited, and about four o'clock she came to the window and stood there for a minute and then turned out the light."

"기다리고 있는데, 4시쯤 되었을까, 데이지가 창문에 와서는 잠깐 서 있더니 불을 껐어."


His house had never seemed so enormous to me as it did that night when we hunted through the great rooms for cigarettes.

개츠비의 저택이 그 날 밤처럼 넓게 보인적은 없었다. 우리는 담배를 찾느라 큰 방을 온통 뒤지고 다녔다. 


We pushed aside curtains that were like pavilions and felt over innumerable feet of dark wall for electric light switches--once I tumbled with a sort of splash

upon the keys of a ghostly piano.

우리는 길게 늘어진 커텐을 젖히고 전기불 스위치를 찾으려고 가늠할 수 없는 어둠속에서 벽을 더듬거렸다. 한 번은 넘어지면서 유령같은 피아노의 건반위로 쓰러지기도 했다.     



There was an inexplicable amount of dust everywhere and the rooms were musty as though they hadn't been aired for many days.

온통 먼지 투성이였는데,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고, 방마다 오랫동안 환기 시키지 않은 것처럼 퀴퀴한 냄새가 났다.


I found the humidor on an unfamiliar table with two stale dry cigarettes inside.

나는 전에 내가 보지 못한 탁자 위에서 다 말라빠진 담배 두 가치가 든 담배 보관통을 찾았다. 


Throwing open the French windows of the drawing-room we sat smoking out into the darkness.

응접실의 프랑스식 창문을 밀어 제치고, 우리는 앉아서 어둠속으로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You ought to go away," I said. "It's pretty certain they'll trace your car."

"도망쳐야 해," 내가 말했다. "곧 차가 발견될 거야."



"Go away NOW, old sport?"

"지금 도망쳐야된다고. 이 친구야?"


"Go to Atlantic City for a week, or up to Montreal."

"일주일 동안 아틀란틱시에 가 있던지, 아니면 몬트리얼이라도."


He wouldn't consider it.

개츠비는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He couldn't possibly leave Daisy until he knew what she was going to do.

아마 개츠비는 데이지가 어떻게 될 것인지 알기 전에는 떠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He was clutching at some last hope and I couldn't bear to shake him free.

개츠비는 마지막 희망을 꼭 붙들고 있었다. 나는 개츠비를 잡고 흔들어서라도 제발 그것을 놓게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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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더듬는다. 그 속에 어렴풋한 풍경이 떠 오른다. 기억속에 남은 사진은  내가 찍은 사진의 풍경과 그대로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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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뿌옇게 흐리다. 가는 비를 뿌릴만한 구름이 하늘에 가득하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비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비가 오더라도 아주 가는 비일 것이다. 창 너머 아래를 내다본다. 우산을 쓴 사람들이 듬성 듬성 보인다. 괴어있는 물 표면에 가느다란 비의 흔적이 흔들린다. 가는 빗방울이 듣고 있다. 맞아도 될 비지만 어쨌든  우산을 들고 나섰다. 대연수목전시원으로 나선 길이다.


요즈음 손에 책이 잡히질 않는다. 김훈씨의 <라면을 끓이며>를 살 때 가득했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자전거 여행>을 읽을 때의 감동과 찬탄은 허물어져 버렸다. 새로운 문장을 써 낸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더구나 새로운 생각을 생각해 낸다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일까? 김훈씨의 글과 생각은 그냥 제자리에 멈추어 선 듯하다. 최소한 <라면을 끓이며>라는 수필집은 그렇게 보인다.


책을 읽지 않으면 집안에서 별달리 할 일이 없다. 나가야 한다. 나가야 할 일이 생긴다. 그렇다면 수목원으로 가자.주위에 있는, 산에 있는 초목들의 이름을 불러주기 위해

먼저 그들 존재의 모습을 익혀 개별성을 부여해야 한다. 그리고 개별 이름을 익혀야 한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나무'라는 명사가 없다고 한다. 각 나무는 고유의 이름으로 불릴 뿐 그 전체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분류하지 않는다. 초목은 인디언들에게 이름으로 불러주어야만 할 존재였다. 단지 뭉뚱거려 하나로 취급하지 않았다. 숲속에서 자연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겐 초목 하나 하나가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된다. 다른 존재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존재는 서로 구별시켜 주는 이름을 지녀야만 한다. 


나도 초목들의 이름을 알고 싶다. 개별적으로 그들을 알고 싶다. 다만 나무들, 꽃들, 초목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다. 사실 출근하는 길은 걸어서 15분 길이다. 나는 걸어가면서 이리 저리 기웃거리며 길가에 있는 꽃들과 수목들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불러본다. 아직 기억하고 있는지 잊어버렸는지 검산해 본다. 철쭉, 영산홍, 산수유, 매화, 동백, 느티나무, 벚나무, 목련나무, 튤립나무, 장미, 선주목, 채송화, 남천나무, 천리향, 붉은괭이밥... 이 정도면 길가의 초목은 다 아는 것이라 자처했었다. 그러나 천만에... 


봄이 오는 길에 가장 먼저 동백꽃이 피고 차례로 매화와 산수유가 피었다 진다. 그리고 목련꽃이 핀다. 목련꽃 질 무렵 개나리와 함께 벚꽃이 핀다. 하루새 벚꽃이 바람에 지고 나면 노란 개나리꽃은 돋아나는 푸른 잎사귀 속으로 사라진다. 가지를 붙들고 놓지 않는 늙은 동백꽃이 햇빛에 바래어갈 때 철쭉과 영산홍이 짙은 분홍색과 진홍색으로 핀다. 이렇게 꽃으로 자신의 존재를 내보이던 초목들은 나의 눈을 비켜가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이다. 언젠가부터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던, 내가 알지 못하는 초목들이 꽃이 피운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초목들이다. 더구나 산에 가면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 나무가 저 나무같고, 저 나무가 이 나무같다. 풀 속에 숨어서 핀 야생초며, 아주 작은 꽃을 피운 야생초며, 도무지 그 이름을 불러 줄 수가 없다. 불러주고 싶은 이름들을 알 수 있을까? 그래서 수목원에 가서 나무들이나 꽃들의 이름을 알아 보자고 나섰다. 


대연수목전시원은 평화공원, 그리고 UN기념공원과 붙어 있다. 수목원 한 쪽 끝에서 저 쪽 끝으로 천천히 걸으면서 나무잎과 기둥을 살펴보고 그 이름을 읽어본다. 이름은 익숙하지만, 그 모습만 보고서는 구별할 수 없는 초목들을 다시 한 번 보고 이름을 불러본다. 다시 저 쪽 끝에서 이 쪽 끝으로 걸어오면서 다시 이름을 맞추어 본다. 피나무,먼나무, 팽나무, 닥나무, 사시나무, 오리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보리수나무, 올리브나무, 서어나무, 아왜나무, 동백나무, 이팝나무, 조팝나무, 튤립나무, 서어나무, 사과나무, 살구나무, 매화나무, 석류나무, 비파나무, 금목서, 치자나무, 물푸레나무, 자작나무, 산시나무, 후박나무, 벚나무, 자목련, 리기다소나무, 해송, 잣나무, 편백나무, 꽝꽝나무, 수국, 해당화, 영산홍, 철쭉, 황매나무, 겹황매나무, 무궁화, 라벤더, 로즈마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초목들을 보고 생각하기를, 이 보다 좋은 산책 코스가 어디 있겠는가? 나무들 사이를 천천히 걸으면서 나무 잎새를 보고, 줄기를 보고, 꽃을 보면서, 이름을 맞추어 보고, 이름을 불러보고, 참 좋은 산책길이 될 듯하다. 얼마나 걸으면 이 수목원에 있는 모든 나무의 이름을 알게 될까? 궁금해 진다. 그리 큰 수목원은 아니기 때문에 한 번 그렇게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리고 더 큰 수목원으로 옮겨볼까? 화명수목원이 넓다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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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브레히트/ 백정승 옮김/ 동서문화사

☞ 뉴욕 타임즈 선정 100권


브레히트의 희곡이다. 희곡이란 장르는 익숙한 소설과는 달라 낯설다. 묘사나 서술등으로 작가의 생각을 표현해 낼 수 있는 소설과는 달리, 희곡은 대화를 통해서만 작가의 생각을 잡아내어야 한다. 실제로 연극을 보면 또 달라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익숙하지 않음이 희곡을 읽는데 어느 정도 장애로 작용한다.


주요인물: 억척어멈, 억척어멈의 벙어리 딸 카트린, 억척어멈의 큰 아들 아일립, 작은 아들 슈바이처카스


이 희곡은 '30년전쟁'(1618~1648년)이 배경이다. 안나 피얼링은 전쟁의 와중에서 질긴 삶을 이어가기 위해 군대를 따라다니며 병사들에게 물건을 팔면서 억척같이 돈을 번다. 전쟁터를 전전하는 동안 억척어멈은 아이들을 하나 하나 잃게 된다. 혼자 남은 억척어멈은 혼자 수레를 끌면서 퇴각하는 군대를 뒤따라 간다.  


전쟁이란 극한 상황에서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억척어멈은 전쟁으로 먹고사는 인생이다. 전쟁이 끝나려 하자 오히려 걱정을 한다. 생계의 끈이 떨어질까 염려하는 것이다. 전쟁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억척어멈의 모습에서 두가지 상반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전쟁이라는 악에 굴복하는 비루한 인생이 그 하나라면,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는 탐욕적인 인생이 또 다른 하나이다. 현대에 죽음의 상인이라 일컬어지는 무기상은 분명 전자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득을 위해 전쟁을 조장하기까지 한다고들 말을 하지 않는가? 


파스칼의 팡세에는 전쟁의 비논리성을 지적한 바 있다. 강 이편에 있는 사람을 죽이면 살인죄가 되지만, 강 저편에 있는 사람을 죽이면 오히려 용맹하다고 상을 받게 된다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억척어멈의 큰 아들 아일립이 그렇다. 전쟁중에 살해행위는 용맹한 행동으로 칭찬을 받게 되지만, 전쟁이 끝난 후의 살해행위는 범죄가 되는 것이다. 아일립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아일립을 그런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작은 아들 슈바이처카스는 어떤가? 적에게 군사자금을 넘겨주지 않으려다 목숨을 잃게 되는 슈바이처카스는. 한 쪽에서는 영웅으로 받들어질 행위가 다른 쪽에서는 죽을 죄가 되는 것이다. 어느 한 쪽을 편드는 순간 이미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전쟁의 희생자가 될 상황에 처하게 된다. 명분은 어느 쪽이나 갖고 있다. 더구나 종교 전쟁이 아닌가? 종교가 평화의 사도가 아니라 전쟁의 사도가 되어버리는 이 기괴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카트린의 죽음. 조용히 잠든 도시가 죽음의 문턱에 놓여있다.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다. 무지막지한 공격으로 곧 죽게 될 것도 모른채 잠들어 있다. 카트린은 임박한 무자비한 공격을 시민들에게 알린다. 하지만 카트린은 목숨을 잃는다. 카트린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전쟁을 막았다. 잔혹한 전쟁의 참상속에서도 빛나는 희생이 있다. 오래 기억에 남을 희생이지만, 오히려 모두의 눈에 숨겨진, 잊혀진 그런 희생이 있을 것이다. 밝은 인간성의 승리는 잊혀진다.



옮긴이의 브레히트의 작품 해설에 기대어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의미를 되 짚어 본다. 


브레히트는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이란 작품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이 작품이 1941년 초연되었을 때, 처참한 전쟁터에서 어떻게든 자식들과 함께 살아가려고 몸부림쳤지만 끝내 자식들을 하나하나 잃고 마는 한 어머니의 불행한 운명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브레히트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반대되는 이러한 연출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1949년 직접 연출을 지휘했을 때, 억척어멈을 연기한 바이겔의 연기는 내면에 격렬한 분노를 품은 듯 하였다. 이 분노는 억척어멈의 분노가 아니라 오히려 억척 어멈을 향한 분노이었다. 바이겔은 스스로 억척어멈에게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멀찍이 거리를 두면서 그녀에게 분노하고, 관객에게도 그 분노를 느끼게끔 했던 것이다.'


"세 아이를 키우기 위해 전쟁터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장사를 하지만, 그 때문에 아이들을 모두 잃고 마은 것이다. 이보다 더한 모순이 있을까? 이러한 모순은 인간의 힘으로는 피할 수 없는 비극적이며 운명적이고 필연적인 모순은 아니라고 브레히트는 강조한다... 브레히트는 그러한 모순을 개인적이 아닌 사회적인 것으로 보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런 모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물건을 사고팔며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성공할 수는 없다. 수많은 사람의 파멸과 몰락, 불행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배우 자신이 극중인물에 감정이입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연기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무대 위의 인물들을 바라보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브레히트는 '서사적 태도'라고 일컬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대사나 줄거리가 아닌, 배우들의 연기나 작품구성방식 또는 연출 지문등를 통해 무대 위에서 실현된다. 이것을 '생소화 효과'라 한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각 장면들은 전통적인 극적 방식이 아닌 단순한 나열의 몽타주 기법으로 연결된다. 각 장면이 시작할 때 영사기로 제목을 무대 위 커튼 앞에 내보내고, 뒤에 이어질 장면도 간략하게 소개한다. 그리하여 관객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그에 대해 기대감을 품는 게 아니라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브레히트의 극 사이사이에는 노래가 끼어든다. 이것 또한 무대 위헤서 벌어지는 사건을 낯설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줄거리의 진행을 방해하고 관객을 환상에서 깨어나게 한다. 서사극 관객들은 극중 등장인물에 너무 빠져들어서는 안된다. 냉정한 눈으로 등장인물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무조건적인 이해가 아니라 잘못된 점을 찾아내 그 까닭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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