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를로르 지음/ 오유란 옮김 / 오래된 미래 출판사

 

잔잔한 행복의 느낌이 있는 책.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와 같은 느낌! 시를 쓰듯이 썼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은 어른을 위한 동화의 느낌을 지니고 있다.  

 

불행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느끼며 정신과를 찾는 현실을 대하면서, 정신과 의사 꾸뻬씨도 자신도 불행하다고 느낀다.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꾸뻬씨는 스스로 해답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행복을 찾아 떠나는 행복 여행을. 그리고 여정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일들... 그 가운데서 발견되는 행복한 배움들이 수첩에 하나씩 채워져 나간다. 

 

한 가난한 나라에 도착했을 때 꾸뻬씨는 구걸하는 아이들이 한결같이 웃고 있는 모습을 본다. 왜 그럴까? 그들은 행복한 걸까? 한 소녀는 탈무드에 나올 법한 대답을 한다. 누구나 웃는 얼굴을 좋아하기때문이라고.

 

가진 것 없이 행복한 사람들, 가진 것이 많음에도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 차이는? "사물을 대하는 방식"! 동감이다. 어떤 이는 선천적으로 행복한 방식의 두뇌를 타고 난다. 하지만 후천적으로도 그러한 두뇌를 형성할 수도 있지. '컵에 물이 반 들어있네' 라는 생각과 '컵이 반 비어있네'는 동일한 상황을 달리 보는 방식의 결과이다. '물이 반이나 있네'와 '물이 반밖에 없네'도 비슷하다.

 

행복을 목표로 삼는 것은 어리석은 일. 행복은 목표가 아닌 생활인 것을. 행복은 소리 없이 우리 주위에 이미 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 

   

행복여행의 마지막 여정은 한 노승과의 만남이다. 산 속의 사원, 노승은 꾸뻬씨의 행복수첩에 대단히 진지한 관심을 보여준다. 이것은 꾸뻬씨가 행복하게 느끼게 해 주었다. 꾸뻬씨는 노승에게서 깊이 있는 가르침을 원했건만, 그는 꾸뻬씨에게 아무런 교훈도 베풀지 않는다. 다만 함께 좀 걷자는 제안을 할 뿐. 노승과 아무 말없이 함께 걷는 길에 꾸뻬씨는 노승의 가르침을 깨닫는다. 꾸뻬씨는 아름다운 자연과 하나됨을 느낀다. 아주 행복한 느낌을 꾸뻬씨는 경험한다.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 스스로 느낄 때만 그것은 진정한 자아가 된다. 행복을 아는 것과 행복한 것은 다르다. 그대는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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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성의 칼날  (찰스 길리스피 지음/이필렬 옮김/새물결)

제1장 완전한 원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의 낙체의 법칙 "자연스런 운동에서 통과한 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

 

갈릴레오는 이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그가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일상 언어 및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의 기하학뿐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변수 x가 포함된 방정식이나 함수로 나타나는 대수학을 편리하게 사용한다. 하지만 그러한 도구가 없는 상태에서 자연의 법칙을 수학적으로 명시하고 증명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번거로운 것이었을까? 위의 식도 대수적으로 나타내면 S=1/2*gt^2처럼 쉽게 나타낼 수도 있는데...어쨌든 갈릴레오가 이 낙체의 법칙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한 기하학적 도형은 자연을 수학의 언어로 표현하는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갈릴레오는...수학적 기법과 철학적 주장이 온통 뒤얶여 있는 곳에서 물리학의 기본 요소를 골라내는 자연에 대한 판단력과 직관과 감각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수리 물리학자가 단지 토론으로만 그치지 않고 실제로 상황을 일변시켜버린 기법으로는 최초의 것이었다."

 

그리스 과학에서 근대 과학으로

"과학은 그리스 철학의 유산에서 유래한다."

그리스인의 사변적 천재성은 합리적 우주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그 우주는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질서 정연한 우주였다. 그리고 그 법칙은 인간 사고에 의해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이성에 의해 모든 만물의 법칙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신화에서 지식으로의 그리스인의 전이는 철학뿐만 아니라 과학의 기원이기도했다. 실제로 자연에 관한 지식은 17세기의 과학혁명을 통해 분리되기까지 철학은 일부분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는 자연철학이라고 불이었다. 

 

그리스 과학은 근대 과학과는 그 성격에 있어 차이가 있다. 그리스 과학은 주관적이고 합리적이며 순수하게 지적이었다. 그것은 정신의 내부에서 출발하여, 보편성과 이성을 만족시키는 능력에 따라 성공여부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리스 과학은 실험이라는 근대 과학적인 방법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리스 과학의 도구는 이성이었다. 

 

이에 반해 근대과학은 비개성적이고 객관적이다. 출발점을 자연에 두며, 새로운 현상을 예측하고 새로운 개념을 제안한다. 가능하면 수학적으로 표현하고 실험을 통해 검증하는 과정을 거친다. 합리성을 내던지지는 않았으나 무엇보다도 계량적이고 경험적이다. 근대 과학은 자연을 이해함과 동시에 통제하려고 든다.

 

르네상스시대에 기성 권위에 대한 반역을 통해 근대 과학이 등장했다. 그것은 근본적인 것에 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것은 중세시대의 과학을 지배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허물어 뜨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플라톤의 힘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형이상학적이었으며 추론적이었다. 그것은 자연현상을 논리 정연하게 그리고 고도로 정교하게 관념화하였다. 상식에 의해서 파악된 경험에서 출발하여, 정의, 분류, 연역을 거쳐서 논리적인 증명에 도달하는 방식의 추론이 그것의 기초이었다. 이것의 무기는 실험과 방정식이 아니라 삼단 논법이었다.  이것의 목표는 무수한 종속적 수단들이 어떻게 질서라는 커다란 목적에 들어맞게 되는가를 보임으로써, 세계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직접적이고 미세한 관찰, 종에 의한 형상의 분류, 부분이 어떻게 전체에 봉사하는가에 대한 분석...이러한 것들은 19세기까지는 생명과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기술이라고 불렸던 박물학에 유용한 것이었다.

 

플라톤이 물리학에 끼친 영향

플라톤은 과학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과학자에게 아리스토텔레스에 버금가는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이데아론은 사물의 세계에서 진리를 제거한다는 점에서는 과학에 부정적이지만, 이상적인 단순성을 수학적 현실로 확인하는 점에서는 과학적 아이디어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안타깝게도 우주론과 물리학은 단일 과학으로 확립되지 않았다. 우주론은 달 저편에 있는 천체의 영역에 관여하고, 물리학은 지상의 세계에 관계하는 것이었다. 우주의 물리학과 지구의 물리학은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케플러와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상의 운동은 불완전한 것이었으며, 오직 하나의 운동만이 완전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천체의 운동을 지배하는 원운동이었다.   

 

피타고라스학파

피타고라스학파는 자연의 본질은 수라고 확신하였다. 그들에게 수는 사물의 형상을 포함하고 있으며, 실재하면서 동시에 이상적인 것이었다. 수에는 완전하고 영원한 구조가 존재한다고 믿었기때문이다. 현대물리학자중에도 우주의 본질은 구조라고 이야기하거나, 또는 정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질의 근본이 비물질이라는 사상은 고대나 현대나 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불가능한 수리물리학

그리스 철학 전통의 두 위대한 인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수리물리학 즉 수학과 물리학의 결합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학과 물리학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플라톤에게 이상적이며 영속적인 수학의 세계는 그의 이상 세계에 실재하는 진실이었으며, 물리학은 불완전한 사물의 세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서로는 인연이 닿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수학이란 추상적인 것을 다루는 것이었으며, 물리학이란 현실적인 것을 취급하는 것이었다. 성질, 형상, 미묘한 특성들로 이루어진 현실 세계는 수학을 통해 표현할 수없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현실 세계는 미묘하여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으며 특히 양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르키메데스는 지렛대의 법칙등을 통해 불가능해 보였던 기하학과 물리학의 결합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의 사후 1700년 후 그의 가장 뛰어난 제자 갈릴레오가 나타났을 때에야 비로소 그의 정역학은 동역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사고  

고대 그리스 전통의 물리학으로 부터의 과학 혁명은 코페르니쿠스에서 시작하여 뉴턴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뉴턴의 중력 법칙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분리되어 있었던 천체와 지상의 지식을 연결하여 운동하는 물체에 관한 단일한 이론 과학을 완성한 때가 바로 그것이다.

 

고대의 지동설과 천동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은 행성의 역행운동과 같은 불규칙성을 해결할 수 없었다. 그것은 태양 중심 모델에 의해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태양이 중심에 위치한다는 것을 믿었으며,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310~230 BC)도 이러한 설을 제안했었다. 하지만 당시의 천문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85~165 AD)의 완전한 기하학적 천문학을 받아들었다. 이는 지구가 정지해 있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는 이른바 천동설이다. 그는 주전원, 이심원, 대심이라는 세가지 구조를 사용한 원의 조합으로 천체의 겉보기 운동을 합성해 내었다. 이것은 고대 로마로부터 16세기까지의 역(달력)의 계산을 뒷받침하는데도 충분한 기능을 함으로 당시의 천문학자들에게 만족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출판했다. 이 책에 들어있는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프톨레마이오스까지의 낡은 형식을 그 근본원리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뒤엎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의 학설은 태양계의 배치를 바꾸어 버렸다. 태양계의 중심에 태양이 있고, 움직이지 않는 지구를 하루에 한바퀴씩 돌게 만들었으며, 일년에 한번 태양주위를 돌게 만들었다. 그의 사상이 완전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그의 태양중심설은 근대물리학으로의 위대한 혁명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발상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이 상식의 흐름에 대항하여 얼마나 강하게 거슬러 올라가야 했는가는 고려한다면 그의 사상이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 다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대는 관성의 원리도 운동의 합성도 알려지지 않은 시대였다. 만일 지구가 움직인다면 우리는 공중으로 팽개쳐지는 것처럼 느껴야 할 것이다. 탑위에서 떨어지는 돌은 탑 서쪽에 떨어져야 하며, 서쪽을 향해 발사된 포탄은 동쪽으로 발사된 포탄보다 멀리 날아가야 한다. 분명한 경험과 우리가 느끼는 직관적인 정지감은 코페르니쿠스의 생각과는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타르코스와 코페르니쿠스의 경우에는 이성이 오감을 제압하여 그 주인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나는 찬탄을 금할 길이 없다"라고 갈릴레오가 말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신념

코페르니쿠스는 고집쟁이이다. 아리스타르코스적 생각의 단순성과 우아함을 깨달은 이후, 그는 수많은 모순에 압도되면서도 기가 꺽이지 않고, 온갖 곤란에 직면하면서도 그의 생각을 고수했었다. 사실 그의 연구가 완성되었지만 그 중심적인 내용의 멋진 단순성을 입증하기는 불가능했다. 그의 체계는 수학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웠으며 아주 틀린 것도 많았었기때문이다. '과학에서 이론이 수행하는 합리화의 역할 및 사물에 궁극적 이치가 들어 있다는 신념'의 힘을 코페르니쿠스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대한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의 우월성은?

그 당시 코페르니쿠스체계의 우월성은 어디에 있었는가? 당시의 학문적 전통은 태양 중심설과 지구 중심설은 기하학적으로 교환 가능한 것이었으며, 특별히 태양 중심설을 취해야 할 현실적인 이유가 없다는 쪽이었다. 천체의 위치를 예측하고 역을 만드는 등의 일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보다 우월한 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우월성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개념적인 것이었으며 프톨레마이오스가 보여주지 못했던 장대한 규칙성을 제시한다는 점이었다. 그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은 데이터가 완성된 미래에 가능한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의의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이 물리학의 발달에 기여한 중요한 점이 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질서를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또한 상상력의 날개를 펴도록 자극하는 면이 있었다.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면 세계는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우주의 둥근 지붕에 별이 부착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들은 얼마나 깊은 공간에 놓여있을까? 이런 생각은 공간과 세계에 무한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용감한 상상력은 비극으로 인도하기도 했다. 조르다노 브루노(1548~1600)의 무한한 우주에 대한 용감한 주장은 그를 화형으로 인도하고 말았다. 

 

케플러의 법칙

케플러는 "나는 코페르니쿠스의 견해가 진리임을 고백하며, 활홀하게 그 조화를 명상한다."고 말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보완할 세가지 법칙을 제안한다. 첫째, 행성은 타원의 한 초점에 놓여있는 태양 주위를 타원궤도를 그리며 돈다. 두번째 법칙은 행성의 속도가 변하더라도 일정하게 유지되는 양이 있다는 것이다. 행성이 공전할 때, 태양과 행성을 이은 가상의 선이 휩쓰는 면적은, 같은 시간에 같은 면적만큼 움직인다는 것이다. (1609년 <새로운 천문학>) 세번째 법칙은 행성주기의 제곱은 태양으로 부터의 평균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1619년 <우주의 조화>)

 

케플러의 혁명적 발상

케플러에 이르기 전까지는 원은 우주 질서의 기초였으며, 사물은 원위를 영원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케플러의 경우에는 상상력, 사실에의 몰입, 좀 더 깊은 질서에의 신념이 도대체 어떻게 배합되어 있었기에 천문학 창시 이래의 관습을 깨고 태양계를 그 참 형태로 끌어내서 원의 완전성보다 더욱 추상적인 수학적 기초 위에 놓게 되었을까? 쉽게 말하자면 어떻게 행성이 타원궤도로 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유연성으로 가득한 위대한 인간 정신의 공적이며, 참신함이란 점에서 이와 비견될 수 있는 것은 상대성 이론뿐이다.

 

케플러와 티코 브라헤의 만남

케플러가 티코 브라헤를 만난 것은 과학 역사상 가장 잘된 만남의 하나였다. 티코 브라헤는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자연에 관해서 관측하고 실험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론적 통찰이라는 고도의 자질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는 여전히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믿지 않고 있었다. 티코는 케플러에게 고도의 이론적 능력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의 귀중한 관측 결과를 사용하게 하여 티코 학설을 수립하도록 케플러를 구속하려 했다. 하지만 1600년 그들의 만남이 있은 1년 후 티코는 사망하고 케플러가 그의 데이터를 물려 받았다. 이 데이터에서 케플러의 법칙이 만들어 진다.

 

어떻게 타원 궤도를 발견하게 되었을까?

케플러는 티코의 숫자들에 근거하여 화성의 궤도에 대해 연구하면서, 계산에 엄청난 시간을 허비하면서 적어도 일흔 번 이상 해 가며 5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그는 올바른 값을 얻었다고 생각했으며, 화성의 궤도를 증명하게 되었다. 그런데 관측된 위치와 이론에 의해서 예상된 위치 사이에 8분 정도의 각도가 어긋난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아주 적은 차이였다. 티코 이전이라면 그것은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케플러는 이 8분을 해결하기 위해 또 다시 6년을 연구하며 보냈다. 8분의 각도를 가지고 6년을 희생하며 연구했다는 것만큼 케플러의 양심을 증명해 주는 것은 없다. 이 8분이 원을 깨뜨리는 결함이라는 것이 판별되었다. 이리하여 케플러는 화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다른 형태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과학의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은 왕왕 커다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소한 모순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타원궤도에 대한 또 다른 증거들

그의 발견중 타원궤도를 증명하는 것이 몇개 더 있다. 그가 생각한 달걀형 궤도와 완전한 원사이에 생긴 초승달 모양의 최대폭은 반지름의 0.00429배이며, 화성에서 태양으로 그리고 화성에서 궤도중심에 그은 선분이 이루는 최대각이 5도 18분이라는 것이다. 이 각의 시컨트 값이 1.00429라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이 관계는 타원을 정의하는 조건중 하나였던 것이다.

 

케플러 제3 법칙의 발견의 배경

그는 타원의 불합리성에 화가 치밀었다. 그의 우주의 기하학적 구조는 미숙하였으며 그의 타원이란 결국 원에 대한 보잘 것 없는 대용품이었기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타원보다 더 깊이 내재한 사물의 근거를 찾으려고 했다. 세계의 조화를 찾으려는 그의 노력은 조각 그림 맞추기 놀이처럼 여러 방식으로 시도되었다. 그리고 결국 제3법칙에 도달하게 된다. 행성의 운동과 거리의 관계, 태양계의 운동과 구조의 관계를 수립하게 된 것이다.

 

"나의 책은 백 년 동안 독자를 기다려야 할 지 모른다. 신은 사람들이 자기 작품을 명상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기까지 6천년이나 기다리지 않았던가."(케플러 <우주의 조화> 제3법칙 서문)

 

갈릴레오의 혁명

갈릴레오의 객관성은 어떻게 표출되는가?

갈릴레오의 플라톤주의는 피타고라스적 전통보다는 오히려 아르키메데스적 전통을 계승햏다. 그는 우주의 구조에서 감각성, 경건한 윤리, 교훈등의 애매한 요소들을 제거하여, 연구의 대상으로 유클리드적 차원의 견실하고 곧은 뼈대만을 남겼다. 그는 물체의 제1성질과 제2성질을 구분했다. 길이, 넓이, 무게, 모양등 수량화할 수 있는 것은 본질적인 성질이라 정의하고, 색, 맛, 냄새, 감촉등은 물질에 속한 본질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지각 양식으로 제2성질을 이룬다고 정의하였다. 그 차이는 객관과 주관의 차이이다.

 

갈릴레오의 독창성과 혁명성은 어디에 있는가?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이 지니고 있던 주관성 즉 목적론적 물리학을 완전히 바꾸어 객관적 물리학으로 만들었다. 갈릴레오의 세계는 공감보다는 오히려 측정에 의해 파악된다. 갈릴레오는 그의 낙체의 법칙에서 시간을 순수한 물리 현상의 매개 변수로 취급하여 운동을 수량화하였다. 이것은 과거와의 단절을 이루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갈릴레오는 물체의 낙하 거리와 속도에 관한 일반적 표현을 발견하려 시도하였고, 결국 속도를 낙하시간과의 관계로 표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자연의 책은 수학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말한다.  

 

갈릴레오가 윤리에 미친 부정적 영향

갈릴레오는 자연의 모든 것을 크기, 형, 수, 운동이라는 제1성질로 환원하고 그 밖의 것은 모두 주관적인 것으로서 제2성질로 분류했다. 이리하여 과학과 윤리학 사이의 치명적인 불화가 시작되었다. 과학의 객관화는 자연에의 모든 목적론적인 의미를 제거함으로 세계는 허무주의에 노출되었다. 과학자는 측정을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도덕적 책임을 스스로 해제했고, 사물에 대한 분별력을 행사하지 않게되었다. 과학자의 성격이나 윤리에 대한 판단으로 부터 그들의 업적에 대한 판단을 분리하라는 요청을 받는 시대는 갈릴레오로 부터 시작되었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통해 하늘을 관찰하면서 천체들은 완전한 존재가 아님을 알게되었다. 구멍투성이의 달표면, 태약의 흑점등...그리고 토성의 위성들의 발견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의 정당성을 추론할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보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케플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웃어야 할까요, 울어야 할까요?"라고 말했는데, 이는 어느 스콜라 철학자들이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것을 거절했을 때의 일이었다.

 

갈릴레오와 교회와의 반목의 원인

갈릴레오와 교회의 분쟁은 종교의 과학에 대한 원천적 적의나, 진리와 지식 사이의 반목에서 유발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과학자와 세상물정에 밝은 사람들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하는, 어쩔 수 없는 사정에 기인한 것이었다.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혼란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그것이 거론되길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으리라고, 어떻게 갈릴레오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신앙과 도덕과 문명의 질서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 성직자들이, 상식과 정통 종교에 대항하여 기존 자연철학의 구조를 뒤엎으려 하는 갈릴레오의 정열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추기경과 수사들은 수리적 추론에는 완전히 무지했으며,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힘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갈릴레오의 한계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갈릴레오도 그와 같은 경향을 나타냈다. 갈릴레오는 천체와 지상을 단일 물리학으로 결합시키는 수리 과학을 수립하려는 열망 즉 아리스토텔레스에 대신할 통일적 우주상을 얻으려는 갈망이 있었다. 갈릴레오는 운동을 자연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이 지속된다고 하여 보존법칙과 힘의 법칙으로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뉴턴의 제1법칙과 고전 동역학의 기초가 되는 관성의 원리를 정식화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완전한 수리화 사이에서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그 역시 질서 쪽을 택했기때문이다. 그리스에서 과학의 기능은 우주를 단일한 이론적 바탕 위에서 설명하는 것이지, 단지 어떤 특정한 현상만을 일반화하는 것이 아니었기때문이다. 설명가능한 우주, 우리에게 적합한 우주는 유한해야 했다. 하지만 관성의 법칙은 무한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물체는 무한히 앞으로 전진할 것이었기때문이다. 갈릴레오조차 앞에 펼쳐져 있는 무한성과 대결하지 못했다. 갈릴레오에게 있어서 자연스런 운동은 관성 운동이며, 상승도 하강도 하지 않은 지구 중심으로부터의 등거리 운동, 즉 원운동이었다. 지구는 이미 우주의 중심은 아니지만 여전히 운동의 중심이긴 했다.

 

갈릴레오는 이 원을 타파하는 데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낙체의 법칙에는 투사체의 포물선 궤도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타원궤도를 논한 케플러의 <새로운 천문학>도 가지고 있었다. 타원궤도에서 행성을 떠 받치고 있는 물리적 힘은 투사체의 포물선을 만들어내는 힘과 동일한 것이며, 그 어느 것이든 원추 곡선이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갈릴레오가 원했던 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승리지, 혼돈이 아니었기때문이다. 중력이 없다면 직선적인 관성을 가진 물체는 일직선으로 무한히 날아 갈 것이다. 만약 갈릴레오가 원을 포기했다면, 그리고 케플러의 업적을 생각했다면, 그는 관성을 직선상으로 보았을런지도 모르며 천체와 지구를 중력으로 연결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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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관념이 깨어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는 과학혁명에 불을 붙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적 전통에서 이어져 온 "완전한 원"이란 개념안에 갇혀버렸다. 위대한 혁명적 발상의 소유자들도 그것을 벗어날 수 없었다. 단 케플러만이 화성의 궤도를 알아내기 위한 5년, 그리고 실제로 나타나는 궤도와 이론상의 궤도사이의 8분의 오차를 설명하기 위한 6년의 연구 끝에 '완전한 원'을 대신하는 타원을 발견했다. 데카르트에 이르러서야 영원한 원운동은 직선상의 운동개념으로 발전하며, 무한을 향한 움직임을 상상하게 된다. 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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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은 모순을 뛰어넘는다. 어떤 모순들은 지식의 불완전함에 유래한다. 그러한 모순을 극복하는 것은 완전한 지식을 향한 걸음이다. 오류는 진리를 향한 첫 발걸음을 재촉하는 힘이 될 수 있다. 모순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로부터 발전을 이끌어내는 동력이다.  모순 뒤에 숨어 있는 진리는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객관성의 칼날 - 과학 사상의 역사에 관한 에세이 / 찰스 길리스피 지음/ 이필렬 옮김/ 새물결

 

<객관성의 칼날>은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100권중에 과학분야의 한 권이다. 전세계적으로 꼭 읽어봐야 할 고전으로 꼽히지만 일고 이해하기 어려운 책 중의 하나이다. 특히 과학에 대한 소양이 다소 부족하다면 읽는데 더욱 어려움이 있겠지만, 얻는 성과는 작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갈릴레오로부터 시작한 근대과학의 대부분의 분야를 망라한다. 동역학, 고전역학, 광학, 화학, 생물학, 에너지학, 전자기장등 과학 내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과학과 철학, 예술과의 연관성등에 대한 논의등도 담고 있다. 여러 과학분야의 수많은 천재과학자들의 연구결과와 그 구체적인 연구과정까지도 어느정도 보여주며, 그들의 인간적인 면등이 흥미롭게 소개되어 있다. 

 

그의 제목 <객관성>에 비추어 볼 때, 천재과학자들의 직관, 감각, 판단력, 개성등의 주관적 요소들이 과학 혁명에 미친 역할은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 과학발전과 혁명은 그와 같은 개인적 요소에 빚진 바가 있지만, 정작 그 결과물에는 주관적 요소들이 완전히 배제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선명한 대조를 통해 과학의 객관성을 두드러지게 하려는 의도였을까?

 

어쨌든 그의 서문은 이 책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1990년판 서문>

 

과학발전의 기초가 된 행동양식은 무엇인가?

'지식은 활동을 통해 그것의 목적을 찾아낸다. 그리고 활동은 지식 속에서 그 근거를 찾아낸다. 또한 어떤 문제가 풀릴 수 있다면 그것은 풀려야 하며 어떤 일이 실행될 수 있다면 그것은 실행되어야 한다는 본능. 이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를 만들어낸 행동양식이다. 르네상스 분화는 고대적이거나 스콜라적인 학식과 기법과는 확연한 차별화를 보이면서 현대과학과 공학의 모태가 된다.  

 

과학사에서 <객관성의 칼날>의 의의

<객관성의 칼날>은 최초의 역사 서술 형태의 과학사이다. 이를 시초로 하여 전문적인 과학사 분야가 새롭게 소개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이 분야가 발달하고 있다. 이후 과학사는 과학의 사상과 개념을 다루는 내적 과학사에서 외적 과학사로 발전해 나간다. 외적 과학사는 과학 그 자신의 제도속에서, 그리고 사회와의 연관 속에서 과학을 다룬다. 과학의 사회사, 과학의 정치사등은 외적 과학사가 어떻게 그 영역을 확장해 왔는지 보여준다. 과학은 얼마간 정치적 사회적 산물로서의 모습을 띤다. 하지만 과학 지식의 골간이 정치나 사회 구조로 인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과학의 본성에 대한 부차적인 측면일 뿐이다.

 

찰스 길리스피가 의도한 '객관성'이란 무엇인가?

과학은 어떤 사회적 환경 속에 존재하는 개개인들과 집단들에 의해 산출되지만, 역사적 과정 속에서 결국 개인의 인성과 사회적 환경을 초월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과학은 몰개인적이며 보편적인 것이다. 과학이란 객관적이며 개인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지식체계이지만 그들 자신에 관해서가 아니라 세계에 관하여 만들어지는 지식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 아는 데에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 과학은 그 방식은 아니다.

 

과학은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해 왔으며, 그 대가는 과학의 정식화된 내용과 서술들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목표, 목적, 적합성, 희망 등에 대한 고려를 제거하는 것이다. 과학의 중심적인 문화적 경향은 '자연의 외화'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과학은 감성의 차원에서 '소외'라는 결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과학은 양날의 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비록 지식이 위험할지라도 무지는 더욱 위험한 것이다. 과학의 후퇴나 퇴보를 통해 과학에 수반된 악을 감소시키려고 하는 것 보다는 과학을 보다 더 잘 이끌어 나감으로 이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서문(제임스 클럭 맥스웰의 강연-1871년 10월)

과학연구와 인간연구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마음의 움직임이 진리인가 오류인가를 논하는 지적인 활동 무대"가 있는가 하면 "분노와 정념, 악의와 선망, 격정과 광기 같은 격렬한 감정상태"의 인간성을 연구하는 무대가 있다. 과학연구자는 후자의 연구에 적합하지 않다.

 

"우리는 즐겁게 뛰어난 사람들에게 되돌아가서, 그들과 함께 이론적인 것이든 실제적인 것이든 고귀한 목적을 열망함으로써, 폭풍의 영역을 넘어서 청명한 대기로 올라갑니다. 그 곳에는 견해에 대한 그릇된 설명도, 표현의 애매함도 없으며, 오직 진리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지점에서 마음과 마음이 서로 접촉할 뿐입니다."

 

맥스웰의 강연은 과학연구자의 홛동무대를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성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청명한 대기와 같은 객관적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영역이다. 그리고 진리에 가장 가까운 영역이다. 그의 강연은 과학도들과 연구자들에게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며 과학에 대한 그 자신의 자부심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찰스 길리피스의 과학에 대한 확신과 그가 말하고자 하는 과학의 객관성에 그 맥이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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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회된 과학이 더 이상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고 전 인류의 재산이며 책임이므로 양날의 칼날을 지닌 과학을 올바르게 소유하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과학자와 과학세계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찰스 길리피스의 생각일까? 과학의 공은 자신들에게로 돌리고 그 과에 대해서는 모두가 책임지자고 하는 말이라면 이는 분명 독선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독선적인 것이든 아니든,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그의 저변에 깔려있든 그렇지 않든간에, 야누스적인 얼굴을 지닌 과학은 분명히 인류를 위해 길들여야 하는 대상임에는 틀림없다.

 

과학세계도 책임감을 가지고 이러한 문제에 직면해 나가야 할 것이다. 생명과 윤리등이 과학과 그토록 밀접한 관련을 가진 때는 이전에 없었던 듯 하다. 객관성만을 부르짖으면서 무한한 방향으로의 과학발전을 도모할 것이 아니라, 적절한 방향성을 인지하고 통제함으로, 최소한 인류의 멸망이라는 대파국으로 향하는 길에 과학이 촉매제가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랄뿐이다.

한용환 지음/ 삼성문화사

 

역사책인가 소설인가????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 그리고 중전이었던 민비.

후사 없이 죽은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 그의 아버지는 퇴락한 왕손 이하응. 그는 상갓집 개라는 치욕스런 말도 듣는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야망이 불타고 있었으니. 결국 그의 아들 이재황이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된다. 그리고 이하응은 대원군이란 칭호와 함께 섭정이 되어 하루밤에 권력을 붙잡게 된다. 그는 그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일가친척이 없는 민치록의 딸 민자영을 왕비로 맞아들이도록 한다.

 

하지만 민자영도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그 속엔 천하를 호령하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으니... 고종이 성년이 되면서 대원군의 섭정은 끝나고 민비에 의해 축출된다. 쇄국정책은 파기되고 일본과 정식 국교가 수립된다. 그리고 민비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 친위대의 성격을 띤 무위영이 일본의 도움으로 신식군대로 재조직되어 별기군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 새로 조직된 별기군에 대한 우대정책은 정규군의 반발을 불러오게 된다.

 

차별에 불만이 폭발한 구식군대에 의해 1882년 고종 19년 임오년에 임오군란이 발생하게 된다. 반란군들은 대원군을 추대하며 민비를 제거하려 든다. 이를 기화로 일본과 청나라는 군대를 보내어 조선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려 한다. 민비와 결탁한 청나라가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해 가면서 민비는 다시 대원군을 쫓아내게 된다. 

 

청의 세력으로 권력을 다시 잡은 민비의 정권하에 수구파와 개화파(독립당)의 대립이 심각해 진다. 개화파의 박영효, 김옥균등은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고 정변을 일으킨다. 갑신정변이다. 하지만 청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한편 민비는 개화파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동맹을 맺으려 계획한다. 청나라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때문에 일본을 견제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기때문이다.

 

이에 청나라는 이와 같은 민비의 계획을 견제하기 위해 억류하고 있던 대원군을 돌려보낸다. 하지만 대원군은 민비의 세력에 압도당해 연금당해 있으면서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한편 민비의 실정에 전국에서는 민란이 일어나고 동학혁명이 일어난다. 이에 대원군은 동학을 이용하여 재집권하려한다. 민비는 동학혁명을 진압하면서 개화파의 일본의 세력도 막기 위해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한다. 청나라는 이를 기화로 군대를 파견한다.

 

천진조약을 빌미로 일본도 군대를 보내면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대립장이 되어버린다. 일본이 청에 대해 승리하고 대궐을 장악하면서 고종과 민비는 연금되고 만다. 그리고 조선의 관제를 근대국가의 내각제도로 뜯어고침으로 실질적인 정무를 내각에서 담당하게 되고 고종과 대원군은 실권을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민비는 러시아의 세력을 등에 입은 러시아파의 힘을 입어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다시 잡게 된다. 이에 일본은 육군중장출신을 한국 공사로 임명하여 대원군과 결탁하여 민비를 시해할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해 나간다. 결국 일본의 폭도들이 궁내로 진입하여 민비를 시해하기에 이르니, 이때 민비의 나이 45세.

 

 민비와 대원군의 권력투쟁은 말 그대로 업치락 뒤치락...어찌 하늘은 같은 시대에 두 호걸을 두었단 말인가? 다소 유치한 스토리 전개를 보여주지만 이 책은 조선조말 정치의 흐름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기회가 되었다.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그리고 동학혁명에 뒤이어 민비시해까지의 파란만장한 역사의 흐름. 대원군과 민비의 권력투쟁. 나약한 고종.

 

정치지도자의 실정이 그 국가에 미치는 장기적 영향은 쉽게 볼 사안이 아니다. 권력에 취하고 눈이 멀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의 교훈, 또한 가문의 영광이나 일신상의 영화, 권력을 탐하는 정치의 결과가 어떤 종말을 맞이하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교훈.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교훈들. 오늘의 상황은 이러한 역사의 진실을 꿰뚫어 보고 있는가?

The Brain: A Beginner's Guide

아마르 알-찰라비, 마틴 R 터너, 셰인 델라먼트 지음/ 김상훈 옮김/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인체 기관중에서 가장 신비로운 부분...뇌!

수천억개의 신경세포로 이루어진 두뇌는 작은 우주라 불리기도 한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부 뇌의 소개
서문: 시작하면서
01 인간 뇌의 역사: 그래도 뭔가 하기는 한다
02 뇌의 진화: 어떻게 뇌가 되었나
03 신경: 몸의 전기장치

2부 단세포에서 탄생된 뇌와 정신
04 뇌의 발달: 신경계의 성장
05 뇌의 해부: 원대한 계획의 이해
06 뇌의 지지 기관: 살아남기 위해 뇌에게 필요한 것
07 행동과 추론의 발달: 인간이 되는 걸 학습한다

3부 성인이 된 뇌의 사용
08 의식: 마지막 불가사의
09 기억: 과거를 투시하다
10 수면: 뇌의 취침시간
11 운동계: 움직임과 동작을 만들다
12 감각계: 세상을 느끼다
13 시공간계: 효율 향상
14 언어, 청각 그리고 음악: 소리의 이해
15 감정과 둘레계통: 심장과 머리
16 뇌의 연구: 진단의 발견
17 영원한 삶: 젊음의 샘
18 끝?

전반적인 뇌의 활동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때로는 흥미로운 부분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전두엽, 마루엽, 측두엽, 후두엽, 대뇌피질, 시상, 소뇌 등등 다양한 뇌의 부분들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뇌의 특정부분들에는 각각의 역할이 있다. 예를 들면 언어의 이해를 담당하는 부분과 언어를 표현하는 부분은 서로 다르다. 베르니케 영역이 손상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말을 하는데 있어서는 정상적이다. 반면에 브로카 영역에 손상을 입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하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또한 시각을 담당하는 부분과 청각을 담당하는 부분도 달라서 시각은 후두엽에서 그리고 청각은 측두엽에서 그 신호를 수신한다. 또한 음악은 청각을 수용하는 부분과 또 다른 부위를 사용한다. 대뇌피질은 주로 이성, 지성과 관련이 있지만 뇌의 중심부와 그 중심부를 감싸고 있는 둘레계통은 감정과 관련이 있다.

 

뇌에는 가소성이라는 특징이 있어서, 어떤 부분이 손상되었을 때 다른 부분이 그 역할을 보충하거나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아주 어린 아이의 경우에는 뇌의 가소성이 두드러지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 가소성의 범위가 좁아지거나 비가소적이 되기도 한다.

 

뇌는 수천억개의 신경세포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신경세포는 재생되지 않는다. 나이가 70세 정도에 이르면 원래 신경세포의 92%정도가 남는다고 한다. 인간이 영원한 삶을 얻으려면 신경세포의 재생을 연구해야만 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뇌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얻게 되었다. 내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의식, 자유의지이다. 이 부분은 물리학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과연 우리에게는 자유의지란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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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독서광의 생산적 책 읽기 50 / 안상헌 지음

 

안상헌씨는 책읽기에 편집증 증상을 가진 독서인이다. 어떤 독서광이라도 경험하듯이, 그는 책읽기때문에 아내와의 갈등을 경험하기도 하고, 아내대신 아기를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는 책읽는 시간을 빼앗긴다고 여겨 초조해 하기도 한다. 또한 책읽기에서 뭔가 가치있는 것을 뽑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러한 과정을 거친다. 아마 한 때 그러한 경험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지금도 그렇게 느끼는지 궁금하긴 하다.

 

어쨌든 이 책은 생산적으로 책을 읽기 위한 50가지를 제안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읽었던 책들을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그의 책읽기는 경영, 비지니스등에 약간은 치우쳐 있는 듯 하다. 그가 읽은 것으로 파악되는 책들을 간략하게 소개함과 아울러, 이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 의미가 있었던 몇가지 문구들을 적어본다.

 

<카네기 인간관계론>

 "우리는 우리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다."

이 책은 진정한 인간관계에서의 윈-윈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오자사 요시히사 <변화의 기술>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눈을 돌리고 유익한 미래를 위해 필요한 행동과 사고에 집중하는 것, 이것이 모티베이션 컨트롤의 기본중의 기본이다." 자신이 변화시킬 수 없는 과거나 타인에 집중하지 말고 자신이 바꿀 수 있는 자신과 미래에 집중해서 행동하도록 권하는 책

 

앤서니 라빈스 <네 안의 잠든 거인을 깨워라>

'무엇이 인간의 행동을 만들어 내는가'라는 질문에 충실한 답변을 해 주는 책이다.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행동이 필요한데, 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깨달음이 있는 경영>

얇지만 강한 책. 이 시대 경영학의 구루(대갸) 5명의 생각과 이론을 소개하는 책.

 

<니벨룽겐의 노래>

독일 기사 문학의 대표작. 장편의 영웅서사시. 읽기가 녹록치 않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어린왕자>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사랑을 경작하라" 농부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거름을 하고 작물을 가구듯이 사랑도 정성들여 가꾸어야 결실을 맺을 수 있다. 경작의 거름은 애정일 것이다.

 

찰스 핸디 <산이 움직여주길 기다라는 사람들>

고객과의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하고자 했던 일이 불발로 끝났을 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 난처한 상황일 때 나는 이 책을 꺼내든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일수록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세상에 대한 사랑이기때문이다.

 

>>>> 책을 읽고 중요한 부분은 외우라!!!

- 때로는 중요한 부분을 외우듯이 할 필요가 있다. 잊어버리면 읽은 보람이 없다. 외우는 가운데 그 사상이 자신의 것이 되어 실천적이 될 수 있기때문이리라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이야기를 실은 <미쳐야 미친다> (푸른역사)

 

도로시 리즈의 <질문의 7가지 힘>

 

나타카니 아키히로 <돈은 쓰면 쓸 수록 늘어난다>

자신을 위해 많은 돈을 사용하면 할수록 스스로 발전하기때문에 벌 수 있는 돈도 많아진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월급을 한 푼도 남김없이 사용하라고 말한다. 자신을 위해서 투자하라는 것이다.

 

>>>>>창의적 책읽기 3단계

1. 많이 읽고 많이 기억하려는 단계

2. 적게 읽고 많이 생각하는 단계

3. 적게 읽고 많이 쓰는 단계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창의성의 즐거움>

삶에서 차지하는 창의성의 가치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만큼 중요하다. 창의성은 어디에서 오는지 창의성을 가진 인물들의 특징과 성장기를 조명한다. 아울러 창의성의 핵심적인  요소인 삶의 열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유쾌한 심리학>

 심리학에 대한 기본 개념을 쉬운 예를 통해 짧게 설명한 책

 

정채봉의 <멀리 가는 향기>

 

>>>>>>"다급하게 책을 읽는 버릇을 가진 사람은 좋은 책을 천천히 읽어나갈 때의 묘한 힘을 결코 알지 못한다." 로망 롤랑

 

이진경의 <노마디즘1,2>

들뢰즈와 카타리의 <천의 고원>의 해설판이라고 할 수 있다. 노마디즘이란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불모지를 이동하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아인쉬타인 "그 시대의 문제는 그 시대의 관념이나 지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 호프스태터의 <괴델,에셔,바하>에 나오는 '형식체계'에 대한 말이 생각난다. 진정한 지능이란 체계를 초월하여 생각하는 것이라는 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패러다임을 버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접근할 때 그 해결책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은 창의력인가?

 

카프카의 <변신>

 

>>>>>

"신은 죽었다(니체)"

"니체, 넌 죽었다(신)"

"너희 둘 다 죽었다(청소부 아줌마)"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관정요>

 

존 어데어 <성공하는 리드는 혼자 뛰지 않는다>

 

>>>>>

한 경건한 수도자가 있었다. 사탄들은 회의를 열어 수도자를 타락시키기로 했다.

 

첫번째 방법으로 커다란 금덩이를 보여주었다.

두번째로 아름다운 여인을 보냈다.

세번째로 지금하고 있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주입시켜보려 했지만 다 실패했다.

우두머리가 나섰다. 그는 수도자의 귀에 속삭였다. "당신의 경쟁자가 방금 종단의 총재로 피선됐다고 합니다."

수도자는 벌컥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간은 질투의 동물이다.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 "반대하거나 논쟁하기 위해 독서하지 말라. 내용을 그대로 믿거나 화술의 밑천으로 삼기 위해 독서하지 말라. 다만 생각하고 생활하기 위해 읽어라" 베이컨

 

유홍준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J 젤린스키 <게으르게 사는 즐거움>

슬럼프라고 느낄 때 읽으면 좋은 책. 빠른 것보다는 느린 것을, 부지런한 것보다 게으른 것을, 행동하기보다는 생각할 것을 강조한다.

 

입센의 <인형의 집>

열심히 사는 것과 의미있는 삶의 충돌

 

나카지마 아츠시 <역사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산월기, 명인전> 

"인생은 아무것도 이루지 않기에는 너무도 길지만, 무언가를 이루기에는 너무도 짧은 것이다"

 

>>>>>>가치 발견, 가치 창조, 어느 것이든 있어야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의미가 없는 일은 지속되기 힘들다.  

- 책읽기에서도 의미를 갖는 것이 중요하겠지. 책속에서 가치를 발견하든, 아니면 읽는 도중 가치를 창조하든, 어쨌든 의미를 발견하거나 만드는 일이 있어야 오래 동안 지속할 수 있을테지....재미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겠는걸, 다양한 재미가 있겠지....단순히 만화나 무협지를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도 있을테고, 더 나아가 지적 만족을 주는 그런 재미도 있을테지....

 

고쓰카 다케시 <상혼>

장사란 상대방에게 상품을 판매하는 일이 아니라 의미 있는 가치를 제공하는 일

 

>>>>>>타인에게 설명하듯 읽어보라.

책의 내용을 교과서를 읽듯이 그냥 한 번 읽어 보자. 그리고 이번에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특히 아이들이나 남편, 아내엑 설명을 하듯이 읽어 보자.

 

<아주 특별한 마케팅 과외수업>

 

베른하르트 그림 <권력과 책임>

오직 책임감을 가지고 권력을 사용하는 사람만이 두려움이 없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먼저 돌아눕지 마라> 고객만족의 바이블. 모든 것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행동하도록 도와주는 책

 

>>>>>>자기가 읽은 내용을 남들에게 들려줘라.

유머는 마음을 열어주는 것과 동시에 상대를 사로잡는다.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책읽기가 즐겁다. 왜 즐거운가? 특히 어려운 책을 읽고 이해할 때 기쁨이 크다. 어렵다는 것은 그 만큼 지식의 깊이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 어려움을 이해했다는 만족감과 아울러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의 한계를 넓히는 것은 겸손함과 더불어 자부심을 갖게 한다. 최근에 읽은 <야생의 사고>는 무척 어려운 책이었지만, '역사가 없는 사회'라는 개념은 내가 가지고 있던 역사에 대한 생각의 지평을 더 확장했다고 느낀다. 이렇듯 고전은 나의 정신적 영역을 넓히고 세상을 보는 고차적 눈을 갖게 함으로 나의 가치를 높이고, 나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둘째, 책읽기를 통해 얻은 표현, 지식, 이해력, 통찰력은 다른 분야에서의 나의 활동을 촉진하고 발전시켜 다른 사람과의 의미있는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빈곤한 정신으로부터의 탈출은 빈곤한 대화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는 것이니, 훨씬 고차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줄 듯도 하다.

 

세째, 책읽기가 장차 나의 은행이 될 수도 있다는 전망을 가지고 있다. 책읽기는 훌륭한 소일거리이지만 이 또한 생활의 방편이 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내가 나이가 들어 육체적인 일을 감당할 수 없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있다. 책을 쓸 수 있다면 이 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으랴?

 

네째, 책읽기를 통해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발전시킬 수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 탐색하는 일이 가능해 진다. 아직도 그러한 분야가 눈에 확 들어 오지는 않지만, 다양한 분야들을 넘나드는 책읽기는 나의 관심사를 찾게 도와 줄 것이다. 또한 여러 분야의 지식들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장차 할 일의 좋은 밑거름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다.

 

마틴 셀리그만 <완전한 행복>

"행복은 배우고 함양할 수도 있으며 사람은 스스로 기쁨을 자아내는 삶을 이끌어갈 힘이 있다"

 

<착한 아이의 비극>

자신도 모르게 착한 아이를 만들고 있는 부모들을 위한 책이다. 착한 아이는 부모의 희망에 부응하지 못하면 버림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스스로를 부모의 틀에 맞추어 가는 꼭두각시처럼 행동하는 불쌍한 아이를 말한다. 칭찬의 역효과?

 

찰스 핸디 <헝그리 정신>

 

>>>>>'소멸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의미없는 소멸'이 두려운 것이다.

책읽는 사람은 자아발전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가치관이 스며 있는 것들을 읽어야 한다.

 

<리더가 죽어야 리더쉽이 산다>

  

-나의 책읽기 키워드는 무엇?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중심으로 잡아야 한다면, 수학, 물리, 천문학등 과학분야이고

내가 하는 일을 중심으로 잡는다면, 교육, 영어, 책읽기...

그 외 관심을 넓힌 분야는 역사, 철학등....

그렇다면 과학철학이나 과학사등은 어떨까?

아마추어 수학자도 책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은 다소 놀랍기는 하다. 수학부분을 좀 더 파고 들고 싶기는 하다만...

 

>>>>키워드를 정해서 책을 읽게 되면 책의 내용이 키워드를 중심으로 해석되고 확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키워드로 '신의 존재'는 어떠한가? 신의 존재 타당성을 높여주는 논리들, 신의 부재를 반박하는 것들을 키워드로 책을 읽어나가는 것은?

 

>>>>많은 책을 읽어도 책 속에서 일상의 진실과 합치되는 부분을 찾지 못한다면 시간 소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

 

>>>>>머릿속의 내용이 정리되어야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써야 머릿속의 내용들이 정리된다.

자기 안의 잠든 거인을 깨우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글쓰기임을 확신한다.

훌륭한 독자는 읽으면서 자신만의 책을 다시 쓴다. 구체적인 현실에서 추상적인 법칙들을 찾아내고 책 속 추상적 주장에서는 자신의 삶에서 그 근거들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하자.

 

<무대리가 일하기 싫을 때 읽는 책>

 

<죽었다 깨나도 회사 가기 싫은 날>

 

>>>>>미래를 위한 세권의 책?

법정의 <무소유>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달라이 라마의 <용서>

 

>>>>>이 세상에서 부족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감탄이다.

세상의 가장 작은 모습에서도 무엇인가 배우기 위해서는 세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빈곤한 정신은 빈곤한 대화를 낳고 빈곤한 대화는 빈곤한 인간관계를 낳는다.

 

정문술 <왜 벌써 절망합니까>

 

이윤기 <그리스 로마 신화>

 

- 안상헌씨의 독서일기에는 더 많은 책이 소개되어 있지만 비지니스나 경영 또는 자기 계발과 관련된 책이 많이 있는 것 같아 일부는 생략하였다. 생산적 책읽기에 대한 몇 가지 좋은 팁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책을 쓰기까지 안상헌씨의 독서 내공이 느껴지기도 했다. 포기하지 않고 책읽기를 계속한다면 그리고 생산적인 방법으로 책읽기를 계속한다면 필경 좋은 결과에 이르게 될 것이란 긍정적인 메세지를 던져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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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경복 지음

 

오랫동안 말을 잘하고 싶었다. 재미있게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자신의 주장을 조리있게 설득력있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손석희가 말하는 법>이란 제목이 눈에 띄었을 때 나의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두께도 두꺼운 편이 아니라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커다란 무기를 하나 얻었다는 느낌에 뿌듯했었다.

 

손석희씨의 말하는 방법

 

손석희는 어떻게 감정대립을 최소화해가면서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지에 촛점을 둔다. 손석희는 곁다리 논쟁으로 빠지지 않기 위한 장치들을 만들어 상대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그가 내세운 장치들과 싸우면서 논리적인 반박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화법을 구사한다.

 

그러한 장치중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사실'이다. 주장만 공허하게 반복하는 상대에게 집요하게 그 주장을 뒷바침하는 사실을 요구해서 상대 스스로 주장을 검증하게 하는 것이다. 손석희는 '당신의 주장은 틀렸습니다'라고 직접적으로 몰아세우지 않으면서 상대의 주장이 스스로 힘을 잃도록 만든다. 브리지트 바르도와의 개고기 논쟁에서 '개고기를 먹는 한국인은 야만적이다'라고 주장하는 그녀에게, 한국에서 개고기를 먹는 사람의 수를 알고 있는지, 한국인뿐만 아니라 유럽인들도 한국에 와서 개고기를 먹게된 사람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는지 물으며 사실 자체에 관한 방향으로 논쟁을 이끈다.

 

또한 손석희는 논쟁에서 험악하게 공격해오는 상대를 바로 받아치기보다 상대의 주장에 반대되는 생각을 제시함으로써 상대방은 싸우게 하되 자신은 싸우지 않는 방식을 적절히 구사한다. 바르도에게 "당신의 말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불쾌할 뿐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당신의 말을 듣고 설득되는 쪽보다 불쾌하게 여기는 반응이 더 많았는데,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되묻는 식이다.

 

손석희의 말하는 방법을 몇가지로 정리해 본다.

 

1. <상대방과 싸우지 않고 생각과 싸우게한다>

손석희씨는 상대방이 싸우도록 한다. 하지만 손석희 자신은 싸움에 끼여들지 않는다. 싸우지 않고 반대생각을 제시함으로 상대방이 그 반대되는 생각과 싸우게 만든다. 

 

2. <생각을 말하지 않고 사실로 말한다>

사실은 명쾌하다. 하지만 주장은 사실만큼 명쾌하지 않다. 주장은 반박의 여지가 많다. 그래서 주장이나 생각을 말하지 않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실을 말한다. 사실로 생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말한다.

 

3. <상대방도 알고 있는 예를 든다>

서로 알고 있는 사례는 구속력이 있다. 상대방도 알고 있는 예시를 통해 그 논리의 울타리안에서 싸움을 하도록 그 활동범위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말한다.

 

4. <논리의 벼랑끝에 세우고 돌아선다>

설득은 없다. 논쟁에서 그것은 기대할 수 없다. 다만 끝까지 항복을 요구하지 않고 논리의 예리함으로 진실을 들추면서 칼을 거둔다.

논쟁은 상대방을 이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듣고 있는 제삼자를 설득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어떻게 말할지가 아니라 어떻게 들릴지를 생각하며 말한다. 다수를 인정하면서도 준엄하게 합리성을 갖출 것을 요구하는 것도 방법중의 하나이다.

 

5. <상대방의 말로써 상대방의 오류를 보인다>

경청은 상대의 말을 활용하는 절묘함을 가져다 준다.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자신이 듣게 한다. 이렇게 상대의 말로 상대를 묶을 수 있다.

 

6. <주장을 내세우는 자에게 사실을 요구한다>

주장을 강하게 펴는 상대방에게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실을 집요하게 요구하여 상대를 무력화시킨다. 주장의 강함을 판단기준으로 삼으려는 시도에 반하여 사실 검증의 장으로 이끌어 들인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손석희씨는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자신의 것으로 드러내지 않고 보편화시키거나 익명화시킨 의견으로 제시한다. 즉 '이러이러한 의견들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와 같이....

또는 '사실은 이러이러한데 이점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네이버 카페 <푸른 숲의 책> http://cafe.naver.com/prunsoop/12141  <엘리>님의 글의 도움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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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사고/ 레비 스트로스 지음/

 

레비 스트로스는 누구인가? 현대실존주의 철학의 대가인 샤르트르와 맞짱을 뜬 인물이라면 그의 위상을 알 수 있으련가? 그는 실존주의를 뒤이은 구조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또한 인류학자로서 <슬픈 열대>라는 저서를 남겼다. 이 저서는 브라질의 원주민들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그의 관찰을 보여주며 더 나아가 문명과 야만에 대한 반전이 있는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또 다른 저서인 <야생의 사고>에서는 그의 인류학자로서 그리고 구조주의자로서 입장이 아주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나 오스트레일리아, 멜라네시아, 아프리카등지의 원주민들의 문화에 대해 연구하고, 그 특성을 밝혀낸다. 특히 토테미즘이나 외혼제, 음식금기, 명명법등의 제도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원시사회는 현대문명세계도 놀랄만한 논리체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레비 스트로스의 연구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레비 이전의 서양의 인류학자들은 원주민의 문화를 멸시하며 경시하는 경향이 짙었다. 서구의 합리적 과학나 역사등에 비해 볼 때 원주민들의 제도나 문화는 미신적이며 역사도 없는 미개한 것이라는 사고가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비 스트로스는 원시사회의 사고를 "야생의 사고"라고 일컬으며, 이 야생의 사고는 비논리적이며 비합리적인 사고가 아니라, 서양의 과학과 당당히 양립할 수 있는 엄격하면서도 방대한 지적인 논리체계임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미개문화를 비롯한 타문화에 대한 서구의 배타적 우월주의에 결정적인 한방을 가하고 있다.

 

레비 스트로스의 연구의 의의는 무엇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레비스트로스가 제시하는 다양한 미개사회의 문화나 제도,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드러난 야생의 사고, 그 야생의 사고의 틀이 되는 논리체계등은 나에게는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웠으며, 더 나아가 이 모든 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이 책은 역자도 언급하고 있듯이 상당히 난해한 책이 아니든가? 나 역시 지금껏 읽었던 모든 책 중에 가장 어려웠었다. 심지어 호프스태터의 <괴델,에셔, 바하>보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계속 읽어야만 하는가하는 갈등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두번 읽고 그 요점을 정리하던 중에, 그의 연구의 결과가 어떤 놀라운 사상으로 인도하는지, 그리고 왜 <야생의 사고>가 위대한 고전의 반열에 속하게 되는지 그 답을 희미하게 나마 인지하게 되었다. 나름대로 얻게 된 결론을 다음의 세가지로 정리해 본다.  

 

구조주의

첫째, 구조주의는 나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야생의 사고>를 통해 구조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느낌을 잡았다고나 할까? 이 새로운 개념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을 인식하도록 만든 것이 <야생의 사고>이다. 또한 구조주의적 접근 방법은 대상을 파악해 나가는 하나의 독특한 학문의 연구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미개 사회에 존재하는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며, 심지어는 서로 대립하는 듯이 보이는 그 다양한 관습들이나 제도들에서, 그리고 때로는 단순하고 별 의미가 없어 보이며, 때로는 원형을 찾을 수 없을만큼 파편화되어 버린 수많은 조각들로 부터 구조나 논리등을 형성해 나가는 레비스트로스의 지적 능력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놀라운 연구방법과 그가 도출해낸 독특한 결론등은 이 책을 고전으로 만드는 하나의 동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 레비는 야생의 사고에 존재하고 있던 그 구조를 발견한 것일까? 아니면 구조주의의 방법론을 통해 그 구조를 만들어 낸 것일까? 그의 구조주의적 방법은 충분히 그럴만한 창조능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인데...실상 레비스트로스도 <야생의 사고>에서 서양의 과학이 자연에 존재하는 법칙을 발견한 것인지, 아니면 과학적 방법으로 그러한 것을 만들어낸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고 있지 않던가? 사실 코페르니쿠스의 과학혁명이 있기 이전 세계는 프롤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자연법칙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았던가? 또한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오기 전까지는 뉴턴의 고전역학이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이렇듯 과학이 설명하는 자연의 모습은 본질적인 자연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파악하는 과학적 방법에 따라 달려져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현대 물리학이나 과학이 제시하는 자연상이 절대 본질의 자연상이라고 단정지을 순 없을 듯 하다. 결국 과학은 그 나름의 방법에 따라 세계와 자연을 설명하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현상을 넘어 본질을 탐구하려는 과학적 시도와 철학적 노력은 지속되어야 하겠지만... 

 

레비 스트로스의 역사관

둘째, <야생의 사고>의 뒷 부분은 샤르트르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역사관은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서의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이전에 E,H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고 상당히 놀랐던 것이 기억난다. 역사란 '역사가가 선택한 과거의 사실'들의 집합이라는 기본적 사실에서 부터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부단한 대화'라는 카의 정의에 이르기까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나의 생각의 한계를 깨뜨리게 하기에 충분하였었다. 그런데 <야생의 사고>는 역사를 보는 또 다른 특이한 시각이 있음을 보여주며 생각의 또 다른 지평이 존재함을 깨닫게 하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레비 스트로스는 역사가 있는 사회와 역사가 없는 사회를 대비시켜 논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문자가 없는 사회는 역사를 가지지 않은 사회를 형성했으며, 반면에 문자를 가진 사회는 역사를 가진 사회로 발전하였다. 그는 역사없는 사회를 '차가운 사회'라고 일컬으며, 반면에 역사를 소유한 사회를 '뜨거운 사회'라고 부른다. 레비스트로스는 사회내의 갈등이나 그로 인한 투쟁등을 '열'이라고 비유하면서, '차가운 사회'는 그러한 열이 없는 사회로서 발전이 없이 정체되어 있는 사회라고 말을 한다. 반면에 '뜨거운 사회'는 그 사회 구성요소들 사이의 차이에 의해 발생한 열이 동력으로 작용하여 발전을 가능케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역사를 가진 사회 - 뜨거운 사회'와 '역사를 가지지 않은 사회- 차가운 사회' 둘 중 어느 것이 우월한가? 다른 말로 하자면 '발전하는 사회'와 '정체된 사회'중 어느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이 문제에 있어 레비스트로스는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 생각을 뒤집어 엎어버린다. 즉 역사없는 사회 즉 '차가운 미개 사회'가 '뜨거운 사회'에 비해 결코 그 사회의 질이나 사고의 깊이에서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차가운 사회'가 '뜨거운 사회'보다 우월할 수 있다는 것을 넌지시 보여준다. 

 

그는 역사가 있는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드러낸다. 역사라는 집합은 무한집합이라는 것이다. 즉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 또는 사회가 지니고 있는 의도나 목적에 따라 수없이 많은 역사가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필시 권력에 의해 역사가 오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무한집합내의 각 원소들은 긍정적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다. 실례로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역사는 역사의 긍정적인 부면으로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인식 역시 각 민족이나 사회들 사이의 차이를 부각시키고 더 나아가 차이에서 파생된 차별을 고착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차별은 근본적으로 평화보다는 갈등과 투쟁으로 이끄는 경향이 있다.

 

역사를 통해 보면 힘있는 자들이 역사를 통제하며 그것을 조작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그들의 권력과 소유를 정당화했던 사례들을 무수히 관찰할 수 있지 않은가? 역사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유용한 도구가 되어 왔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역사를 가지지 않은 야생의 사고는 오히려 현대 문명사회보다 권력의 폐해로 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사회가 아닌가? 그리고 차가운 사회가 뜨거운 사회보다 더 평등한 사회를 구축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은가? 그러한 야생의 사고야말로 보편적 인류가 오랫동안 염원하고 추구하였던 사회를 만들고 유지하는데 훨씬 유용한 사고의 형태가 아닐까?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를 통해 이와 같은 역사관을 드러낸다. 

 

역사가 없는 사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나에게 꽤 충격이었다. 더구나 그 역사가 없는 사회가 역사가 있는 사회에 비해 그 논리체계나 유용성등에 있어 열등하지 않다는 것 아니 오히려 우월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지적 충격이었다. 

 

타문화 사회에 대한 존중

세째, 미개사회라 하더라도 그들의 제도나 삶의 방식은 존중받을 만한 논리와 체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타자의 관점을 무시하는 자기본위의 생각이나 관점이 얼마나 편향적일 수 있는지를 깨닫는다. 야생의 사고가 지적 논리적 형태로 존재한다는 점은, 편견의 울타리를 깨고 개방적인 마음으로 대상을 바라보게 한다. 자신의 생각이나 문화와는 다른 생각이나 문화 역시 또 다른 가치를 가지고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열린 마음은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길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다. 

 

야생의 사고를 통해 얻게 된 생각들

마지막으로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를 읽으면서, 어려운 책을 읽는 방법을 가지게 되었다. 도대체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내용이 난해할 수록 더욱 그러한 질문을 마음에 간직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책은 반드시 두번 이상 읽기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즉 첫번째의 읽기는 저자가 말하고 싶은 사상을 파악하는데 의미가 있다. 첫번째 읽을 때는 세부적인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냥 끝까지 읽어 나가는 것이다. 끝까지 읽다 보면 저자의 생각을 어렴풋하게 나마 이해하게 된다. 어차피 그의 생각들이 책의 요소 요소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두번째 읽기이다. 이 때에는 세부적인 면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세부사항들이 주제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생각하며 읽는 것이다. 이 과정은 즐거운 과정이다. 왜냐하면 저자의 생각의 흐름, 저자가 특정한 점을을 말하는 이유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기때문이다. 이 때야 말로 '아하!'하는 감탄사가 튀어 나오는 때이다. 깨달음의 즐거움이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이제 내용을 정리하여 글로 남기는 것이 마지막 단계이다. 세번째 읽을 때는 전체를 읽는 것이 아니라 주요내용만을 읽어나가는 것이다. 첫째, 둘째 읽기에서 표시해 놓은 주요점들만 읽어가며 책을 마무리한다. 이 때에는 이러한 요점들을 글로 정리하는 것이 이해를 넓히는 또 하나의 좋은 방법이다. 

 

어려운 책을 읽고 ...물론 100%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레비스트로스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분별할 수 있었다는 느낌은 참 좋다. 어려운 책을 찾는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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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지음

 

정유정씨의 작품 <7년의 밤>을 읽을 때 말 그대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이후 <네 심장을 쏴라>를 읽었으며,

오늘은 최근의 <28>을 읽었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손을 뗄 수도, 눈을 뗄 수도 없는 굉장한 흡인력을 가진 소설이다.

 

사상 유래가 없는 전염병으로 고립도시가 된 화양, 그 도시는 철저히 버림을 받은 도시가 되었다. 이 와중에 복수를 꿈꾸는 미치광이 박동하, 그 박동하를 미치광이로 기른 그 부모, 또 하나의 복수를 꿈꾸는 야수가 있으니, 링고...

지난 날의 자신의 쉬차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서재형은 그 끔찍한 악몽으로 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죄없는 사람들이 생존의 기로에서 무참히 버림을 받는 지옥의 아가리...그 아비규환 속에서 드러나는 동물과 같은 인간성들...

먹먹한 느낌... 말로 할 수 없는 참담한 느낌은 애써 글을 멈추게 한다. 

움베르토 에코 장편소설/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은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를 읽기전에는 알지 못했었다. 그 이후에야 뉴욕타임즈지가 추천한 100권의 책 중에도 <장미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단한 철학적 논의가 들어있다는 점과 아울러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작품이란 것은 한층 더 흥미를 끄는 것이었다.. 

 

중세시대 1300년대 한 수도원에서 수도승들이 차례대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한편으로는 이 사건을 의뢰받은 수도승 윌리엄이 사건의 진실에 접근해 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전개되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론 그 당시 중세 세계의 모습이 그려진다. 교리논쟁, 이단논쟁, 마녀재판, 그리고 황제 루트비히와 교황 요한22세의 대립, 청빈교리에 대한 프란체스코회와 베네딕트회 및 교황측의 대립의 모습을 통해 중세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종교 권력의 어두운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진실을 파헤치려는 윌리엄, 자신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을 지키려는 호르헤, 이 둘 사이의 치열한 철학적 논쟁. 독자는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진리의 가치는 뭇 생명을 초월한 것이라 생각하는 호르헤, 그리고 그 어느 진리도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하지는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윌리엄. 호르헤는 독단적 교조주의에 빠져 비합리적인 광신적인 모습을 보이는 반면, 윌리엄은 합리주의적 사고, 철학적인 태도를 보인다. 움베르토 에코는 광신적 종교 행위의 불합리성을 드러내며 그 자신 윌리엄으로 대표되는 합리성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나의 종교적 신념이나 믿음은 윌리엄과 호르헤 사이의 어디에 있는 것일까? 호르헤는 절대적 진리에 대한 강한 믿음에 따라 행동하고 있으며, 윌리엄은 절대진리에 대해 어느 정도 회의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윌리엄은 이단 심판관으로 여러 이단 사건을 처리하던 중 어느 것이 이단이며 어느 것이 정통인지에 대한 기준이 모호함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이단 논쟁 및 종교 재판등은 진리를 옹호하는 최전선이 아니라 일종의 권력과 관련된 싸움임을 깨닫는다. 프란체스코회의 청빈교리를 이단으로 정죄하려는 교황청의 의도는 무엇인가? 진리를 옹호하려는 순수한 마음이라기 보다는 당시 교회가 장악하고 있던 재산, 권력등을 보호하려는 은밀한 욕망이 그 동기임을 윌리엄은 알아채게 된다. 청빈교리를 인정하는 순간 교회는 모든 권력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호르헤의 자세는 교황청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종교의 근엄성을 지키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웃음은 종교를 훼손하는 사악한 것이라 생각한 호르헤는 수도승들이 웃음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표명한 아리스토텔레스로 부터 영향을 받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수도승들의 손으로 부터 영원히 격리시키려는 계책을 꾸미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게 되는데...

 

윌리엄의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는 방법론은 좀 낯선 철학으로 표명된다. 즉 오류를 통해 진리에 접근한다는 그의 말에 그 방법론의 철학이 드러난다. 그의 철학에 따르면 오류는 불필요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진실에 다가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진리만이 아니라 거짓도 필요하다는 이율배반적인 논리가 거기에 들어있다.

 

또한 진실, 또는 진리가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시된다.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마적 모습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과연 그 진리는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인가? 진리가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불행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리인가? 

 

과연 진리란 무엇인가? 그 실체가 있는 것인가? 호르헤 노수도사가 진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은 진리인가? 웃음에 대한 그의 판단은 진리인가? 아니면 이단적인 생각인가? 때로는 명확히 밝혀진 계시가 없어 그 진위를 판단하는 것을 유보하는 것이 옳을 때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를 계속 주장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올바른 태도인가?

 

윌리엄 수도사는 진실에 접근했으나,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못했다. 그리고 올바른 경로를 통해 결론에 이른 것도 아니었다. 그의 추리에는 적지 않은 오류들이 있었으며, 결정적 실마리는 합리적인 추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며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오류는 진리로 인도하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윌리엄 수도사의 말은 개연성이 희박하다. 진실에 접근하는 무한한 경로가 있음을 생각할 때 그의 생각이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판단되어 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진실에 도달하는 건실한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오류에 접어든 추리를 진실의 방향으로 물줄기를 바꾸어 주는 것은 오류일 수가 없다. 오류 더하기 오류는 진실이 될 수 있을까? 2+3+5 라는 계산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2+3 =5 라는 진실의 과정과 5+5=10이라는 진실의 과정이 연이어져야만 한다. 2+3=6 이라는 오류와 6+5+10 이라는 두가지 오류가 합해져서 정답에 이를 수는 있다. 하지만 이는 진리에 이르는 올바른 경로가 아니다. 오류 더하기 오류는 더 큰 오류도 이어진다는 것이 상식적이다. 단 오류를 포함할 수도 있는 여러가지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의 합리성 및 진실성을 시험하여 오류가 포함된 가설들을 버리는 과정을 통해 올바른 가설을 찾아낸다는 것은 합리적 방법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현대의 과학적 방법도 이러한 과정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이러한 합리적 방법은 철학이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방법과 상응한다. 하지만 과학이 그렇듯이 철학은 결코 절대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단지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에 무한히 접근할 뿐이다. 수많은 철학들이 진리를 표현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철학은 뒤이은 철학에 의해 비판받고 변증법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철학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렇다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이러한 철학적 방법을 수용해야 하는 것일까? 계시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철학적 방법이야 말로 단 한가지의 합리적 방법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철학은 윌리엄수도사와 호르헤 노수도사의 설전에서 보여지듯이 서로의 지적 우위를 증명하고자 하는 논쟁에 불과한 것은 아닐런지... 진리에의 탐구는 희미해 지고, 고도의 지적 유희, 또는 지적 우위를 돋보이게 하려는 투쟁의 장은 아닐런지....러셀은 <서양철학사>에서 철학은 지적능력이 뛰어난 할 일없는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지적 유희라고 지적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진리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져본다. 진리란 사실들, 거짓이 아닌 진실인 것들의 집합이라고 정의를 내려야 할까? 이렇게 정의된 진리가 인간의 생명 및 행복에 디딤돌이 아니라 거침돌이 된다면, 이런 경우에도 그것을 진리라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진리란 참이거나 거짓이거나에 상관이 없이 인류의 생명과 행복에 기여하는 모든 것들의 집합을 말하는 것일까? 이 후자의 견해는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이란 책에서 언급한 바가 있기는 하다만... 이 또한 진리의 정의로서는 부족하지 않은가?

 

역사는 진리인가? 역사는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본, 역사가가 선택한 과거의 사실이라는 정의로 판단해 볼 때, 진실에 근접하기는 하나 그 선택된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의 머리에서 구성된 흐름상에 있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볼 때 그 절대적 진리성은 약화될 수 밖에 없다.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저서를 남긴 E.H 카아의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정의에 의하면 그 과거의 사실들은 시시각각 변화는 현재의 상황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대적 사실이라는 면에서 그 역사의 진리성 역시 훼손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심지어 백과사전식의 발생한 모든 사건들의 집합이라는 역사에 대한 정의는 어떠한가? 애초에 그러한 역사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역사관을 실제로 구현해 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면 진리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는가?

 

진실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자신의 진리를 옹호하려는 자, 권력을 추구하는 자, 지식을 탐하는 자, 다양한 대상물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엮어내는 세상의 모습을 <장미의 이름>에서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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